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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에세이45

'김부선 난방투사' 연상록(聯想錄) I. 얼마 전 아파트 난방비리와 연관해서 영화배우 김부선씨가 일약 ‘난방투사’로 만인의 입에 회자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 기사를 보는 순간 35년 전 강남 M 아파트에서 내가 몸소 아프게 겪었던 아파트 관리비리 사건이 떠올랐다. 내가 한창 30대말에서 40세 고개를 넘어가던 시점에서 1년 가까이 치열하게 몸으로 부딪히며 악전고투했던 일이라 아직도 기억이 비교적 생생하다. ‘아파트 관리 문제’는 우리나라 전 국민의 약 2/3가 일상 속에서 체험하는 생활사(生活事)이기에 아무도 남의 일처럼 그냥 넘길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처음부터 아파트 난방비리를 세차게 고발했던 ‘김부선’ 씨의 용기에 박수를 치는 입장이었다. II. 1979년 초 우리 가족은 서울 강남에 신축한 M 아파트에 입주했.. 2014. 12. 29.
'초등영어' 출범의 뒷 얘기 I. 2004년 4월, 에이펙 교육부장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칠레 산디아고에 가는 길에 나는 일본에 들려 가와지마 일본 문부과학상과 만났다. 교과서 문제 등 한일 간에 여러 가지 난제가 얽혀있었기에 소통을 위해 내가 나종일 주일대사에게 부탁해서 마련된 자리였다. 그런데 가와지마 장관은 나를 보자, 대뜸 “당신이 1997년에 한국에 초등영어 교육을 도입한 장본인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정말 대단한 일을 했다. 일본에서도 같은 시기에 초등영어 시행이 치열한 사회적 쟁점이었는데, 좌고우면하다가 끝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뒤로 미뤘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초등영어를 도입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화 경쟁에서 크게 실기(失期)했다. 천추의 한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얘기를 들으며, 초등영어 출범 전후를 되돌아.. 2014. 8. 26.
지사(志士)형의 큰 학자, 이문영 교수님 이 글은 한국행정포럼 2014 봄(통권 144호, 한국행정학회)호에 수록된 고(故) 이문영 교수님의 추도사이다. I. 지난 1월 16일, “민주투사, 노학자 이문영 고려대 명예교수 별세”라는 뉴스에 접하면서 실로 만감이 교차한다. 우리 시대의 마지막 의인(義人)울 잃은 공허함과 슬픔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한국 민주화에 기념비적인 존재이면서, 행정학자로서의 본분을 한시도 잊지 않으셨던, 지사형의 큰 학자 이문영 교수님의 생애와 공헌은 앞으로 언제까지나 “시대와 함께 한 행정학자”로서 한국 행정학의 역사에 길이 남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래에서 민주투사로서의 그의 삶과 행정학자로서의 그의 기여를 함께 논의하고자 한다. 여기서 방점은 당연히 후자에 놓여 지나, 그의 삶에서 두 가지가 함께 융합되어 있어 어느 것.. 2014. 4. 1.
1978년 겨울, 파리 (II) I. 1978년 겨울, 파리에서의 세 번째 날, 나는 호텔에서 백영수 화백의 전시회 소식을 들었다. 백영수(白榮洙, 1922-) 화백은 한국 추상회화의 선구자 중의 한분으로, 이미 한국동란 직후인 1950년대에 김환기, 이중섭, 유영국, 이규상, 장욱진 등과 함께 ‘신사실파’ 동인으로 활동했던 분이다. 나는 신사실파 화가들, 한분 한분을 한결같이 좋아했다. 백영수 화백은 단순하고 절제된 화면, 중간색의 깊이 있는 색조를 바탕으로 고개 갸우뚱한 모자상(母子像)을 즐겨 그렸다. 그는 모자(母子)외에도 남자아이, 꽃잎, 새, 나무, 개, 창문 등 향토적이고, 서정적인 소재들을 바탕으로 티 없이 맑은 순수 동심의 세계를 화폭에 담백하게 담았다. 백영수의 그림에는 늘 애잔한 그리움과 향수가 잔잔히 흘러. 평소에 .. 2014. 1. 23.
1978년 겨울, 파리 (1) I. 1978년, 내 나이 38세 때, 그 한 해를 훔볼트 연구교수(Humboldt Fellow)로 독일 만하임 대학에서 보냈다. 그 해 12월 말, 나는 얼마 후 귀국을 앞두고, 처와 어린 남매를 대동하고 파리 겨울 여행을 떠났다. 파리 시내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작은 호텔에 묵었는데, 투숙객들이 모두 한국인들이어서 마치 서울 어디 변두리 호텔 같은 분위기였다. 그 때 한창 중동경기가 치솟을 때라, 투숙객 중에는 휴가차 파리를 찾은 중동 노동자들이 많았다. 그들이 사막의 열기를 몰고 왔는지, 호텔 전체에 활기가 넘쳤고, 마치 축제 현장 같은 들뜬 분위기였다. 나는 추운 겨울에 아이들 데리고 구경 다니는 것도 수월치 않아 저녁에는 조금 일찍 돌아와 호텔 지하에 있는 바에 내려가곤 했다. 한 해 내내 쿨(c.. 2014. 1. 14.
EBS 수능과 관련하여 기억해야 될 이야기들 이 글은 2013년 10월 15일, 한국교육방송공사(EBS)가 주최한 의 기조강연 내용입니다. 1. 지난 16년을 뒤돌아보며 저는 1995년 12월부터 1997년 8월까지, 그리고 2003년 12월부터 2005년 1월까지 두 번에 걸쳐 약 2년 8개월 동안 교육부의 수장으로 봉직했습니다. 장관을 지내면서 저는 늘 이 자리는 '멍에이자 축복‘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장관으로 국정에 깊숙이 참여한다는 일은 막중한 책임과 각고의 노력, 그리고 그에 따른 엄청난 격무를 수반해야 하므로 무척이나 힘겹고 고달픈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분명 멍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장관직 수행은 국정에 참여하여 국리민복을 위해 온 몸을 바쳐 헌신할 수 있는 값지고 보람된 기회이므로 더 없는 축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013. 10. 16.
장발의 수난시대 I. 1971년 초 유학에서 돌아 왔다. 공황에 나왔던 친구가 나를 보자 요즈음 장발단속이 심하다며, “머리부터 깎아야겠다 ”라고 말했다. 나는 이미 한국에 장발단속 소문을 들었기에 웃으면서 “그래야지”라고 답했다. 그런데 막상 머리를 깎으려니, 영 내키지 않았다. 우선 반민주적 권위주의 정부가 1945년 제정된 경범죄 처벌법을 근거로 퇴폐풍조를 일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한다는 것 차제가 전형적인 파시스트 수법 같아서 울화가 치밀었다. 뿐만 아니라 단속이 겁나 스스로 머리를 깎는 일이 마치 체제를 마음으로 수용하는 것 같아 따르기가 싫었다. 1968년 권위주의적인 구질서를 혁파하려고 봉기했던 진보적 학생운동이 유럽을 휩쓸 때 내가 그곳에서 공부했고, 당시도 히피의 반문화 운동이 전.. 2013. 2.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