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대학원 은사셨던 안해균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님께서 지난 12일 86세을 일기로 영면하셨다. 안 교수님은 내게 학자로의 길을 열어 주신 고마운 분이다. 앞의 글은 14일 영결식에서 내가 읽은 <영결사>이고, 뒤의 글 <오랜 인연>은 18년전(1994) 안 교수님께서 정년 퇴임하실 때 선생님을 추억하며  썼던 글이다.

 

                       

                              영결사 (永訣辭)

 

  오늘 저희들은 실로 애통한 심경으로 저희 모두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선생님의 영정 앞에 서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간 오랜 병고로 크게 힘드셨지만, 놀라운 정신력으로 잘 견뎌 오셨기 때문에 이처럼 빨리 저희들 곁을 떠나시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가족과 친지 그리고 수많은 제자들의 슬픔과 안타까움, 허망하고 아쉬운 심경은 그만큼 더 큽니다.

 

  저희 제자들은 이 자리에서 선생님의 저희들 제자들에 대한 가없는 사랑에 깊게 감사드리며, 학자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선생님의 지난 모습을 추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가능한 한 비탄에 젖기보다는 보다 가라앉은 심경으로 선생님의 그간의 업적을 되돌아보며, 아울러 저희들이 선생님과 맺었던 그 아름답고 소중한 기억들을 더듬어 보고자 합니다.

 

  우선 선생님은 한국 행정학의 제 1세대로서 한국행정학 발전에 크게 공헌하셨습니다. 현대행정학, 정책학원론, 한국행정체계론 등 수 많은 저서를 내셨고 다수의 논문을 통하여 한국 행정학의 프로티어를 성실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개척하심으로써 후학들에게 훌륭한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다듬어 지지 못한 수많은 제자들을 뛰어난 학자로 잘 키워 주셨습니다. 선생님의 문하에서 행정학계의 수많은 제제다사(濟濟多士)들이 배출되었다는 사실은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선생님께서 제자 발굴과 제자 조련에 남다른 노하우를 지니셨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선생님의 남다른 제자 사랑과 지극한 정성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분이셨습니다. 무엇보다 정이 넘치셨고, 또 서민적이셨습니다. 아무와도 스스럼없이 허술한 선술집을 찾으시는 선생님의 서민풍의 풍모는 선생님 특유의 트레이드 마크셨습니다. 그래서 선생님 정년퇴임 때 제자들이 선생님께 헌정한 에세이 집의 제목도, “정 많은 서민풍의 학자, 안해균 선생님”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언제나 유머가 넘치시는 유쾌한 분이셨고, 또 무척이나 순수한 분이셨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에는 언제나 위트와 기지, 해학과 풍자가 넘쳤고, 좌중을 휘어잡으시는 현란한 말솜씨와 중저음의 매력적인 목소리는 정말 일품이셨습니다. 저희들은 이제 선생님이 즐겨 부르시던 문주란의 ‘공항의 이별’을 어디서도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어린 아이처럼 착하고, 순진무구, 천의무봉(天衣無縫)의 모습이셨습니다. 한 올의 악의도 없으셨고, 감정을 가식이나 여과 없이 그대로 물 흐르 듯 표현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선생님을 생각하면, 아주 자연스럽게 입가에 웃음을 띱니다. 아주 기분 좋은 웃음 말입니다.

 

  지금 이 순간 저희들이 가장 안타깝게, 또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앞으로 저희들은 이처럼 좋은 스승, 이처럼 보배로운 인생의 선배, 그리고 이처럼 진정한 멘토를 세상 어디서도 만날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도 매울 수 없는 선생님의 그 큰 빈 자리 앞에 저희들은 오열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일생동안, 그리고 특히 지난 8년 동안 병상의 우리 선생님을 지극한 사랑과 정성으로 수발해 주신 사모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사모님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선생님의 큰 사랑의 백분의 일도 돌려 드리지 못한 불초한 저희 제자들은 선생님의 영전 앞에서 회오의 눈물을 흘립니다. 선생님, 하해와 같으신 마음으로 저희들 모두를 용서해 주십시오.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선생님 영전에 제자 일동 올림

 

 

                                           

                               오랜 인연

                                          

                                      I.

  안해균 선생님을 내가 처음 뵌 것은 1963년 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 입학하면서부터였으니, 따져 보면 선생님을 가까이 모신지도 어언 30년이 넘었다. 돌이켜 보면 그때 선생님은 30대 중반이셨는데, 어린 내 눈에는 꽤나 연세가 지긋한 어른으로 보였다. 그래서 그런지 내 눈에 비친 선생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변하신 게 없다. 얼굴이 좀 검으신 편이라 세월이 가려서 그런지 지금도 연세에 비해 무척 젊으신 편이고, 무엇보다 머리가 아직 칠흑 같이 검으셔서 정년퇴임을 하신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어떤 좌석에서나 해학과 풍자가 섞인 질펀한 말솜씨로 좌중을 휘어잡으시는 것이나, 괜찮아 보이시는데도 항상 감기가 드셨다고 호주머니에서 감기약을 꺼내시는 것도 그렇고, 아무와도 스스럼없이 허술한 선술집을 찾으시는 특유의 서민적 풍모, 그런가 하면 환갑 문턱에 이른 제자들에게도, “완기야”, “영희야” 하고 거리낌 없이 이름을 크게 부르시는 품, 실로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선생님 모습 어느 것 하나 30년 전과 다를 것이 없다.

 

  내 눈에 비친 선생님이 항상 30년 전에 머물러 계시니 나도 어쩔 수 없이 선생님 앞에 서면 그대 그 옛날로 돌아가 20대 홍안의 청년이 된다.

 

                                          II.

  1963년 6월, 대학원 첫 학기가 거의 끝날 무렵으로 기억한다. 내가 우연히 당시 선생님 조교로 있던 최치덕 군을 만나러 선생님 연구실에 들렸더니, 안 선생님께서 느닷없이 “병영아, 너 내 방에서 공부해” 하시며 잡아 앉히셔서, 그 길로 안 선생님 조교가 되었다. 그것이 안 선생님과의 오랜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 때 안 선생님께서는 행정대학원 도서관장직을 맡고 계셨기 때문에 나는 선생님 연구실에 있으면서, 보이지 않는 혜택을 많이 받았다. 당시 미국에서 행정대학원에 꽤나 푸짐한 도서지원을 하고 있었기에, 신간 사회과학 도서들이 우리나라 어느 도서관보다 더 많이, 그리고 빨리 들어왔다. 새로 들어오는 책들이 정식으로 등록되어 서가에 꽂히기까지 도서관 사무실에 수북이 쌓여 있었고 그것이 처리되자면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새 책에 눈독을 들였고, 내 뜻을 알아챈 미스 윤(당시 사서로 근무하던 노처녀)은 아직 등록되지 않은 책들을 옆방 연구실에서 미리 볼 수 있도록 편의를 보아주었다. 그 바람에 나는 행정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교수님들의 손이 미치지 않은 책들을 한 발 앞서서 미리 읽을 수 있는 행운을 가졌다. 그때 내가 열독하던 책들은 대체로 비교정치와 사회학 책들이었는데, 안 선생님께서는 연구실에서 내가 읽는 책들을 눈 여겨 보시고 바쁘신 중에도 이 방면 책들을 놓치지 않고 챙겨 읽으시곤 했다.

 

 

  연구실에 있었던 몇 가지 일화가 생각난다. 내가 하루는 안 선생님께 매우 난처한 얼굴로 말씀을 드렸다. “선생님, 제가 우연히 알아보니까 항렬로 따져서 선생님께서 제 손자뻘이 되던데요. 그냥 알고나 계시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내 얘기를 들으시더니 선생님은 무척이나 난처하신 표정이었다. 평소에 순흥 안씨 가문이 어떻고 하시는 말씀을 비교적 자주 하셨던 편인데, 밤낮으로 어린애 취급을 하시던 구석자리 조교가 하루아침에 조부 뻘이 된다니 꽤나 불편하셨던 모양이다.

  “그래 그랬었군. 그렇게 항렬이 높은지 몰랐네.”

  실은 내가 족보도 따져보지 않고 선생님의 반응을 보려고 일부러 능청을 떨었던 건데, 선생님께는 얼마간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의외로 풀이 죽으신 선생님을 보고 내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불과 며칠이 못되어 들통이 났다.

  하루는 연구실에 들어오시면서 대갈일성, “저런 멀쩡한 놈, 나보다 4대나 뒤지면서 제가 할아버지를 자처해. 족보를 뒤져 보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네.” 하시는 게 아닌가. 나는 그 일로 아직까지 안 선생님께 많은 구박을 받는다. 그런데 나도 문제인 게 게으른 탓에 아직도 선생님과의 족보상의 서열을 제대로 따져 보지 못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내게 대한 선생님의 엄포가 당초에 내가 선생님께 시도했던 유(類)의 ‘짜가’가 아닐지 의심스러울 때가 없지 않다.

 

 

  하루는 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그리고는 내게 찾아오는 친구가 너무 많고 걸려오는 전화가 많다고 역정을 내시면서, “너는 도대체 사내 기생이냐. 왜 오가면서  그리 친구를 많이 사귀어. 분명히 말하자면, 네가 정말 학자가 되려면 친구를 정리해야 돼”라고 일갈을 하셨다. 선생님께서는 그냥 귀찮으셔서 한마디 뱉으셨던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그때 그 말씀을 들으며, 내 인생의 항로를 분명히 정해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실은 그때까지 그냥 공부가 좋아서 막연히 연구실에 찾아들었지만, 막상 교수가 되겠다는 작정을 굳게 하고 있지는 않았다.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며, 나는 그때 앞으로 교수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고, 그 후 이 생각은 흔들리지 않았다. 또 공부하기로 결단을 내린 후에는 공부와 무관하게 폭 넓게 친구 사귀는 것을 삼갔다. 그래서 아직도 내 친구들은 대부분 예부터 알던 묵은 친구들이거나 학계  동료들이지, 새로 사회에서 사귄 친구들은 거의 없다.

  이후 나도 한때 선생님이 내게 하신 말씀을 내 방 조교들에게 자주 써먹었다. “너는 사내 기생이냐. 왜 그리 친구가 많아...” 그러면서 이렇게 불쑥 던지는 내 말이 조교들에게 왕년에 선생님이 내게 주셨던 그런 자극을 던져줄 수 있었으면 하고 은근히 기대한다.

 

 

  행정대학원 2학년 2학기 1964년 가을은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그때 학생들이 학교 측과 오랜 갈등 끝에 이른바 스트라이크를 감행한 것이다. 엄혹한 권위주의시절 국립대학교 대학원에서 스트라이크라니,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학교 측의 대응은 무척이나 강경했다. 교수 회의에서 몇 명 주모 급에 대한 징계 논의가 있었다. 그 중에 나도 끼어있었다. 학생총회에서 만장일치로 등교거부를 결의하고 배수진을 쳤는데, 하루 이틀이 지나니 퇴학시키겠다는 학교 측 엄포에 밀려 대부분 학생들이 등교를 하는 바람에 앞장섰던 친구 몇 명이 퇴학감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 때, 나는 마침 오스트리아로 유학 가는 시험에 합격해서 졸업하면 곧장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석사학위가 장학금 지불의 전제조건이었기 때문에 퇴학을 맞으면 모두가 도로아미타불이 될 형편이었다.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중징계를 면하고 제때에 졸업을 하게 되었는데, 그 후 한 교수님이 내게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이 일로 안 교수님께서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셨는지 아나. 교수회의에서 ‘이 놈은 학자가 될 놈이니 제발 살려 달라’ 고 읍소를 하셨네. 그 바람에 자네가 막판에 살아남았네.”

  그 후 나는 이 일을 선생님께 여쭤본 적도 없고, 안 선생님께서도 그 일을 내게 자세히 설명하신 적이 없으니 당시 교수 회의의 정경이 실제로 어떠했는지 알 길이 없다. 내게 말씀해 주신 선생님께서 조금 과장을 하셨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일로 안 선생님께 꽤나 심려를 끼쳤던 게 사실이고,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죄송스럽기 그지없다.

 

 

   이처럼 선생님께 많은 은덕을 입었지만 요즈음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산다. 전화라도 자주 드려야 하는데 그렇지도 못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런데 그간 나는 전화로 선생님께 두 번이나 큰 실수를 저질렀다. 어쩌다가 내 전화수첩 속에는 나와 가까운 친구 하나의 전화번호가 선생님 전화번호의 바로 밑에 자리해 있었다. 문제는 내가 이 두 전화번호를 혼동해서 전화를 잘못 건데서 시작된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고는 저쪽 목소리를 확인하지 않은 채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여봐, 아무게야, 너 요사이 평이 영 좋지 않아. 하라는 일은 하지 않고 허구헌날 골프만 치고, 정신 차리지 않으면 큰일 나. 어쩌고저쩌고....” 앞뒤 가리지 않고 한참 떠들다 보니 무언가 기미가 이상해 멈칫하고 저쪽 목소리를 확인해 보니까, 웬걸 내가 실수로 전화 다이얼을 잘못 돌려 안해균 선생님께 큰 소리를 치고 있는 게 아닌가.

뒤늦게나마 선생님께 백배 사과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실수를 또 다시 저질렀다.

  그 후 얼마 뒤에 같은 방식으로 선생님께 전화를 드리고 이번에는 “너 임마....운운 ”하며 아주 거칠게 나와 버렸다. 어쩌다가 같은 실수를 두 번씩이나 거푸하게 되니, 나로서도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두 번 다 안 선생님께서는 곧장, “나야 나...”하시면서 내 잘못을 빨리 일깨워 주시지 않으셨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워낙 장난기가 넘치시는 분이라, 자신을 숨기시면서 마치 내 친구인 양 행동하셨다. 가능한 한 반응을 늦추시며 시간을 오래 끄셨다. 두 번째는 아예 가성까지 내시면서 내 실수를 유도하셨다.

그 후 다른 사람들을 함께 만나면, 으레 그 얘기를 끄집어내신다. “저 친구, 정말 멀쩡한 놈이야. 실수하는 척하고 내게 욕지거리를 상습적으로 하니...” 그래서 나는 상습 전화 골갈범으로 선생님께 크게 찍혔다.

 

 

   선생님은 저녁에 술을 한잔 하시면 가끔 내게 전화를 하신다. 전화를 하시면 으레 야단을 치신다. 대충 야단의 내용은 두 가지 중에 하난데, 하나는 내가 건방지다는 것이고 둘째는 너무 완벽주의자라는 것이다. 선생님께서 정말 나를 그렇게 느끼셔서 그러시는 건지 아니면 그냥 그래 보시는 건지 알 길은 없지만, 신기한 것은 선생님께서 아무리 야단을 치셔도 내 기분이 별로 상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대체로 선생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된다. “병영아, 너 내가 볼 때, 요새 너무 건방져. 오만하단 말야. 네가 뭐라고. 아무 것도 아닌 놈이 괜히 재기나 하고..... 이런 얘기는 나만 하는 게 아니야. 중론이 그래....”

  “너는 너무 완벽주의자야. 무엇하나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완벽을 추구하는 것은 바보짓이야. 제 능력과 형편을 알아야 돼.”

  그러시면 내 대답은 한결같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다음부터 안 그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면 선생님께서는 곧장, “됐어. 그렇다면 좋아....그런데 말야.” 하시면서 본론으로 들어가신다. 말하자면 나에 대한 비판과 핀잔은  일종의 전주(前奏)인 셈이다. 그래서 그것은 그냥 가깝다는 친화감의 표현이신 게 아닌가 생각한다.

  만약 선생님 말씀대로라면 나는 정말 큰일이다. 건방지고, 무능하고, 게다가 제 분수도 모르고 완벽을 추구하니. 이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마음이 울적하다가도 선생님 전화를 받고 몇 마디 비난의 표적이 되고 나면, 금방 웃음을 머금게 되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아마 이것이 선생님이 지니신 심리적 흡인력이 아닌가 싶다.

 

  안 선생님께서 별 생각 없이 하시는 말씀 속에서 나는 깊은 뜻을 찾아내고 새로 배우는 것이 많다. 선생님께서 인간관계나 사회관계를 표현하실 때, 최근에 자주 쓰시는 말씀이 “그건 복잡한 거야”다. 앞뒤 맥락에서 선생님의 말씀을 내 나름대로 정리하면,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는 단선적이거나 합리적인 것이 아니고 여러 요인이 얽히고설켜 만들어지는 매우 복잡한 것이라는 뜻이시다. 그 관계는 오랜 세월 속에 씻기고 닦이면서 형성된 역사적 침전물이기 때문에, 그것을 논리적으로 파악하거나 합리적으로 이해하려고 애써도 소용이 없다는 말씀이다.

  나는 선생님의 이런 말씀을 자주 들으면서 선생님의 삶의 철학이 그 안에 깊게 스며있다고 느꼈다. 선생님을 잘 모르는 분들은, 선생님 문하에서 그렇게 많은 걸출한 학자들이 배출되고 그들이 선생님을 마음으로 따르는 것을 무척 신기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을 단순하고 명쾌한 인과율로 설명해 보려면 쉽게 풀리지 않는다. 하지만 선생님이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전체적 삶의 맥락에서 설명하면, 얼마간 이해가 될 수 있다.

  선생님은 하나하나 촘촘히 생각하시고 이것저것 재면서 행동하지 않으시는 편이다. 그러나 큰 궤적으로 선생님 스타일을 마련하셨다. 기본적으로 정이 많으신 분이고, 가식이 없고 감정을 여과 없이 그대로 표현하신다. 얼마간 자유분방한 기질이 있으신 게 사실 이지만, 선생님과 오랜 교분이 있는 사람이면 선생님의 행동을 바르게 예측할 수 있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심리적 부담을 주지 않으신다. 그러기에 많은 이들은 선생님과 함께 있는 시간을 무척 즐긴다.

  선생님은 또 제자들에 관한 한 정말 유별나신 데가 있으시다. 우수한 제자들 발굴하시는 독특한 노하우가 있으시고, 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또 좋은 공부 성과를 올릴 수 있도록 한껏 도와주신다. 이렇게 긴 세월을 보내고 나면, 선생님과의 인연이 쌓이고 거기서 깊은 정과 감사의 염(念)이 남는다. 그러면서 선생님 말씀대로 복잡하게 인연이 엮어진다.

 

 

  며칠 전 전화를 드렸더니, 정년을 앞두고 ‘멜랑콜리한 하루하루’를 보내신다고 말씀하셔서 가슴이 찡했다. 그래서 선생님은 아직 건강하시고 하실 일도 많으신데 웬 말씀이냐고 상투적인 위로의 말씀을 드렸다.

  전화를 끝내고 나니 마음이 아팠다. 정든 연구실을 뒤로 할 일이 큰일이라는 말씀이 비수처럼 가슴에 와 꽂혔다. 그러면서 교수들에 있어 연구실이 주는 상징적 의미는 그의 인생의 전부일 수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니 우리 선생님께서는 그리 침울하게 세상을 보내실 분이 아니시다. 아마 일요일이면 더 씩씩하게 산에 오르시고, 공부에도 더 큰 열정을 쏟으시리라 생각한다. 또 선생님 앞에 서면 언제나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진심으로 선생님께 매달리는 많은 제자들이 있으시니, 그 염력(念力)으로라도 선생님의 여생이 더 건강하고 보람되며 행복하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선생님께서 그간 베풀어 주신 학은(學恩)에 머리 숙여 감사드리며, 다시 한번 선생님의 만수무강을 하느님께 빈다.

 

                               『정 많은 서민풍의 학자 안해균 선생님』(평보 안해균 교수 정년기념논문집

                                 간행위원회, 1994) 156-167.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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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만곤 2012.10.19 11:01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부총리님의 은사에 대한 추억과 가없는 기림이 가슴을 울렸습니다.
    글을 읽을 때마다 '이런 일이 있었으니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이 글에서도 그런 느낌이 강했습니다.
    덧붙이면 부총리님께서는 심각한 내용의 말씀을 유머스럽게 이야기하셔서 깊은 감동을 주신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군데만 예로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선생님, 제가 우연히 알아보니까 항렬로 따져서 선생님께서 제 손자뻘이 되던데요. 그냥 알고나 계시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중략)…
    “그래 그랬었군. 그렇게 항렬이 높은지 몰랐네.”
    실은 내가 족보도 따져보지 않고 선생님의 반응을 보려고 일부러 능청을 떨었던 건데, 선생님께는 얼마간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의외로 풀이 죽으신 선생님을 보고 내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음은 물론이다

    저는 이 부분을 읽고 혼자서 낄낄거리고 웃다가 좀 송구스러운 마음이 되기도 했습니다.
    부총리님.
    좋은 글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셔야 합니다.

  2. 현강 2012.10.20 12:56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제 불로그에 자주 방문하시고, 따듯한 관심을 보여 주셔서 고맙기 그지 없습니다.
    좋은 계절에 더욱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3. 서정욱 2012.10.26 10:45 Address Modify/Delete Reply

    꽤 오래간만에 선생님 블로그에 들르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과 안해균 선생님과의 인연에 관한 글 너무나 재미있고, 감동적이네요.
    고성 날씨는 제법 추워졌을 것 같은데, 건강 유의하세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서정욱 올림

  4. 이득주 2012.12.09 06:03 Address Modify/Delete Reply

    2편의글 잘 읽었습니다. 요즘도 속초에 계시는 지요? 그곳은 이쪽 보다 눈이 많이 쌓이는 것 같은데, 지내시는데, 무리가 없으신지요? 내외분 건강 보중 하시기를 기원 합니다. 이득주

  5. 백수정 2013.02.27 17:14 Address Modify/Delete Reply

    교수님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장례식장에서 뵈었습니다만 안해균 교수님 외손녀 백수정입니다.
    근무시간 중 문득 할아버지 생각에 네이버에 검색해보니 교수님 글이 첫번째로 보여 반갑고, 감사한 마음에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영결사의 첫 문장을 읽으니, 그 날 아침 교수님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 합니다.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함께해주셔서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지난 겨울, 매우 추웠고 눈도 많이 내렸는데 잘 지내셨는지요? 저희 가족은 조용히 할아버지와의 옛추억을 그리며 지냈던 겨울인 것 같습니다. 또한 장례식장을 지켜주셨던 교수님들의 노고와 그 깊은 마음을 되새기며 감사한 마음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조금 반가운 소식 알려드리자면, 제 동생인 동하가 금년 한국외대 행정학과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평생 몸담으신 행정학을 하나뿐인 손자가 배우게 되어 저희에겐 매우 기쁘기도 하고, 동하가 할아버지의 뜻을 조금이나마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으로 행정학도의 길을 걷는 것을 축하해주고 있습니다. 월요일 1교시부터 황성돈 교수님의 행정학개론 수업을 듣게 되는 인연도 생겼고 합니다. 참 신기하기도 하고, 쉽게 넘겨짚을 수 없는 인연인듯 합니다.

    가까이 계시는 황교수님은 조만간 찾아뵙고 인사드리고자 해요. 교수님도 가까운 시일내에 인사드리고 싶습니다. 교수님의 블로그를 이렇게 알게되니 온라인 상으로라도 자주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교수님 건강하시고 다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백수정 올림

  6. 현강 2013.03.07 09:26 Address Modify/Delete Reply

    수정양, 무척 반갑네.
    수정이 엄마가 아주 간난 어린애일때 부터 내가 외할아버지댁을 드나들었으니, 참 세월이 많
    이 흘렀네. 엄마가 어렸을 때부터 애우 영민해서 외할아버지 사랑을 독차지 했었지.
    동하가 외대 행정학과를 갔다니 반갑네. 내가 1872-1975년간 외대 행정학과 교수를 했기
    때문에 그곳은 나와도 인연이 각별하네. 그래서 친정집이라고 그러지. 황성돈 교수가 아
    마 내가 떠날 무렵, 입학을 했을걸세.
    외할아버지 추억 잘 간직하고, 외할머니 자주 찾아 뵙게 바라네. 아빠, 엄마에게도 인사전
    하고.

I.
2004년 가을 내가 참여정부에서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장관으로 재직할 때 이야기다. 교육부 출입기자들과 기자회견을 끝낼 즈음이었다. 어떤 기자가 내게 물었다.

 “장관님, 제가 보기에 장관님은 ‘노무현 코드’는 아니신 것 같은데, 그럼 어떤 코드십니까”

  나는 곧장 서슴없이 대답했다.

  “저는 국민코드입니다.”

  그러자 와 하고 웃음이 터졌다. 그들은 내가 그냥 농담하는 것으로 느낀 듯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내 진지한 낯빛을 보고 그들의 웃음기는 빠르게 걷혔다. 나는 다시 힘주어 말했다.

  저는 국민코드입니다.”

  예상했던 질문도 아니었고, 준비했던 대답도 아니었다. 그런데 대답을 하면서 이게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II.

나는 김영삼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 교육부 수장을 지냈다. 그런데 나를 임명한 두 대통령과는 아무런 정치적 연고나 사적 친분이 있었던 사이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정치적으로 얽매이지 않아 얼마간 자유롭다는 이점이 있었으나, 대신 청와대나 당, 정 어디에도 마땅히 터놓고 의논할 상대나 나를 지지해 줄 세력이 없어 늘 외롭고 힘들었다. 당시 나는 장관 퇴임 후 곧장 대학으로 돌아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깨끗하게’ 그리고 ‘떳떳하게’ 복귀해야 한다는 목표 외에 정치적으로 아무런 다른 욕심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내 갈 길을 분명하게 정했다.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말고 ‘국리민복(國利民福)‘만을 염두에 두자, 그리고 ‘일’로 승부를 겨루자. 생전 일면식도 없는 나를 장관으로 임명한 두 대통령이 마음이 걸렸지만, 그렇다고 장관직이 그분들에게 충성을 바치는 자리는 아니지 않겠는가. 또 그분들도 내게 정치적 예종(隸從)을 기대하고 임명하지는 않았을 게 아닌가. 나라의 백년대계를 생각해야 하는 교육이라는 영역은 적어도 당리당략이나 지나친 이념적, 정치적 고려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일련의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실제로 이러한 결심을 실천하기는 상황이 그리 녹록치 않았다. 주요한 정책결정에는 늘 크고 작은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에 당, 정, 특히 청와대와의 정책조정과정에서 자주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나는 그 난관을 극복하는 것이 내 책무이자 운명이거니 생각했다.

  III.

내가 이해하는 '국민코드‘는 바로 ’국리민복‘의 관점이다. 이 맥락에서 볼 때, 필자는 무릇 한 나라의 교육정책의 거시적 틀은 경쟁력 강화에 역점을 두는 ’수월성‘과 교육기회의 평등을 중시하는 ’형평성‘을 슬기롭게 조합한 중도지향의 정책혼합(policy mix)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념적 성향으로 볼 때, 김영삼 정부는 수월성 쪽에, 그리고 노무현 정부는 형평성 쪽에 과도하게 치우칠 개연성이 컸다. 나는 색깔이 다른 두 정부에서 장관으로 재직(1995.12- 1997.8. 2003.12 -2005.1)하면서 이 문제를 가장 크게 고심했다. 그래서 적어도 내가 교육부 수장으로 있는 동안은 국민코드의 관점에서 주요 정책이 이념적으로 어느 한 쪽으로 크게 편향되지 않도록 적절히 조율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나는 교육의 중심을 잡기 위해 내심 아래와 같은 원칙을 세웠다.

 먼저 정권의 수명을 넘어 지속가능한 정책 및 사업을 우선적으로 추진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치 굳건한 주춧돌처럼 교육의 근본을 바르고 튼튼하게 만드는 백년대계 지향의 인프라가 구축된다면, 이념적 성향이 다른 새 정권이 들어서도 감히 그것에 손대지 못할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두 번 교육부 수장을 맡으면서 이러한 관점에서 시종 가장 큰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 <e-러닝 교수. 학습체제 구축>이었다. 그 핵심 사업으로 에듀넷 (1996.9), EBS 수능방송(위성교육방송/1997 및 EBS 수능강의 및 인터넷 서비스/2004), 사이버 가정학습체제 (2004)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 일련의 사업들은 교육정보화라는 세계적 추세에 부응하여, 그리고 정권의 수명을 넘어 공교육내실화, 사교육비경감 및 지역. 계층 간 교육격차해소에 두루 이바지할 수 있었다. 주지하듯이 오늘날 한국은 e-러닝 세계 선도국가가 되었다.

 두 번째로 교육정책의 거시적 틀이 수월성과 형평성 중 어느 한 쪽에 기우는 경우, 다른 쪽을 적절히 보완하여 전체적 균형을 잡자는 것이었다.

 1995년 김영삼 정부의 대통령 자문기관인 ‘교육개혁위원회’은 ‘5.31 교육개혁안’을 내 놓았다. 이 방안은 기존의 획일적이고, 규제위주, 그리고 공급자위주의 교육체계를 보다 다양하고 자율적이며 수요자위주의 교육으로 바꾸고 교육과정도 민주화하자는 패러다임 전환적 내용을 많이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 개혁안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라는 당시의 시대적 조류와 정권특성의 영향을 받았기에 얼마간 형평성에 비해 수월성에 편중되어 있었다. 필자는 전체적 균형과 조화를 위해 형평성 차원의 정책보완이 필요 하다고 보고, 고심 끝에 우리나라 최초의 ‘교육복지종합대책’(1996)을 수립했다. 위의 대책 중 ‘중도탈락자 대책’은 ‘대안학교 설립 및 운영지원대책’(1997)으로 발전하면서, 대안학교가 제도권으로 들어오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반면 노무현 참여정부는 수월성보다 형평성에 관심이 컸다. 따라서 거시적 정책지형에서 볼 때, 수월성 교육의 결손이 우려되었다. 그래서 필자는 전체적 균형과 조화를 위해 2004년 12월 말 ‘수월성교육 활성화방안’을 발표했다. 일견해서 참여정부의 이념지향과는 얼마간 거리가 있는 정책 프로그램이었다. 필자는 청와대 및 당정과 정책협의를 거치면 차질이 생길까 우려되어 그 과정을 생략하고 보고형식만 갖춘 후 전격적으로 발표하는 길을 택했다. 그 주된 내용은 자질이 뛰어난 학생을 일찍 선발하여 그들에게 ‘맞춤식 개별화 교육’을 하자는 전형적인 수월성 강화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이 방안을 발표하면서, 이는 형평성 지향의 평준화 교육을 깨는 것이 아니라, 그를 보완하는 것이며, 형평성과 수월성의 새로운 균형을 추구하는 것임을 크게 강조했다. 아울러 수월성의 핵심은 고부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창의성임을 함께 역설했다.

 세 번째는 절실히 필요한 정책임에도 이념이나 정치적 이유로 추진이 미뤄지는 경우, 그것을 찾아 과감히 밀고 나가자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관점에서 2004년 2월 초, 당. 정. 청은 물론 교육부 고위 간부와도 사전 조율 없이, 그간 금기시되었던 ‘교원평가’ 시행의지를 표명했다. 우리나라 교원의 질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방도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예상대로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왔다. 전교조의 저항이 가장 치열했고, 대통령도 부정적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필자는 교원평가는 더는 지체할 수 없는 과제임을 밝히고, 교원평가를 교원양성체제 및 교원연수체제 개혁과 유기적으로 연계하여 총체적인 ‘교원 개혁’을 추진할 것을 천명하였다. 2005년 1월, 교원평가에 대한 정책연구가 크게 진척되어 그 윤곽이 드러날 즈음, 필자는 부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후 교원평가 논의는 오랜 동면기로 접어든다.

 네 번째 정권이 지나치게 이념적으로 편향된 정책을 밀어붙이려는 경우, 이를 단호히 거부하자는 것이었다.

 노무현 정부의 대통령 자문기구인 교육혁신위원회는 민중주의적/평등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한 때 ‘대학 공동선발제’와 같은 혁명적 제안을 구상하였고, 수능 무력화를 위해 ‘수능 5등급’이라는 극단적 접근을 시도하는 등 시종 지나치게 편향된 이념적 성향을 드러냈다. 교육부와 교육혁신위 간에는 팽팽한 긴장이 계속되던 가운데, 양자의 갈등은 ‘2008학년도 대입 개선안’을 둘러싸고 극적으로 분출했다. 오랜 논란 끝에 수능 9등급화에 합의했으나, 청와대, 혁신위, 여당은 1등급 7% 안의 강행을 시도했다. 대통령도 그편에 섰다. 7%는 아무런 타당근거를 내세울 수 없는 정치적 비율이었다. 정규분포(正規分布)를 상정하면 1등급은 당연히 4%가 되어야 하며, 그래야 최소한의 변별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필자는 사표 제출이라는 배수진을 치고 이에 맞서 결국 교육부가 설정했던 마지노선인 1등급 4% 안을 관철했다(현강재, 연구노트 ‘2008 대학입학제도 개혁안의 정책과정’ 참조).

  V.

대통령과 장관과의 이념적 궁합은 매우 중요하다. 양자 간의 궁합이 잘 맞으면 정책형성이나 집행과정이 순조롭다. 무엇보다 대통령의 강력한 지지와 후원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정책추진에 동력이 붙고 부처 직원들도 일하기가 수월하다. 그러나 그런 경우 항상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칫하면 이념의 편향성이 보강되어 ‘국리민복’과 더 멀어질 수도 있다.

 두 번 장관직을 수행하는 동안, 대통령이나 정권의 이념 및 정책 성향이 내가 생각하는 ‘국민코드’와 어긋날 때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정치적 후원세력이 없어서, 언제나 단기(單騎)로 난관을 돌파해야 했기 때문에 많은 고뇌가 따랐다.

 지금까지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교육부 직원들이 고비 고비마다 어김없이 내 뒤에 서 주었다는 점이다. 그들의 신뢰와 지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내가 어찌 감히 ‘국민코드’를 표방할 수 있었겠는가.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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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2.24 14:38 Address Modify/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I.
내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학했던 때 이야기다. 그곳에서 결혼하고 1968년 10월 첫 딸을 낳았다. 아이 낳고 퇴원한 지 닷새쯤 지났을까 구청 복지과로부터 제법 큰 부피의 소포가 배달되었다. 뜯어보니 출산 축하 편지와 함께 분유와 옷가지 등 갓난아이에 필요한 각종용품이 가득했다. 아무 신고도 안 했는데 관청에서 어떻게 내가 아이 낳은 걸 알고 이런 걸 보냈을까 신기하기 짝이 없었고, 또 그냥 덥석 받는다는 것도 염치없는 짓 같아 어찌 된 일인지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담당 직원은 산모의 퇴원 서류가 병원에서 자동 복사되어 자신들에게 넘겨진다면서 빈에서 출산한 모든 아이에게 주어지는 복지혜택이니 걱정하지 말고 받으라고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달부터 매달 같은 날짜에 아동수당이 딸아이 몫으로 통장에 들어왔다. 큰돈은 아니었으나, 아이를 보살피는 데 꽤 도움이 되는 금액이었다. 가난한 유학생에게는 더 할 수 없는 고마운 선물이었다.

 그런데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며칠 후 구청 복지과에서 내게 편지가 왔다. 내용인 즉, 내가 오스트리아 국법에 따라 절차를 밟아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딸은 ‘사생아’ 이며, 아이의 양육비용은 만 17세가 될 때까지 빈 시가 맡겠다는 얘기였다. 그러면서 매달 일정 금액의 부양비를 보내겠다고 통보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편지를 받고 나는 무척 불쾌한 심경으로 즉시 구청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나는 외국인이기에 현지 신분법에 따라 결혼할 의무가 없으며, 분명 이곳 교회에서 결혼했고, 또 한국에 정식으로 결혼 신고를 했기 때문에 부양비를 받을 이유가 없다고 격렬하게 항의했다. 그랬더니 담당자는 사정이 그렇더라도 절차적으로 이미 양육비 지급이 결정된 상황이니,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그냥 받으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적법하게 매달 적잖은 액수의 부양비가 나오는데 그것을 마다하니 이해가 안 된다는 얘기였다. 그의 관료적 사고와 상투적인 말투가 나를 다시 격앙시켰다.

 그 길로 구청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왜 멀쩡한 내 아이를 사생아를 만들고, 싫다는 돈을 굳이 주겠다며 내 자존심을 꾸기느냐고 대들며 따졌다. 구청 한구석이 떠들썩하자 상급자가 나서서 중재를 시도했다. 그러면서 내게 우선 오늘은 그냥 돌아가서 내일 하루 깊이 생각하고 모래 다시 들려 달라며, 그동안 자기들도 어떻게 이 문제를 풀 것인가 숙의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돌아와 가까운 현지 친구 몇 명과 의논을 했다. 그랬더니 웬걸 이 친구들은 하나같이 그쯤 했으면 됐으니 못이기는 체 하고 양육비를 받으라는 얘기였다. 돈을 받아 아기에게 요긴하게 쓰면 그게 좋은 일이지, 거기 왜 자존심을 내 세우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와 내 처의 입장은 처음부터 분명했다. 우리가 아무리 곤궁해도 딸아이를 사생아로 만들면서 부양비를 챙겼다가는 반드시 천벌을 받을 것 같은 느낌이었고, 괜한 일을 만들어 우리를 괴롭히는 현지 당국의 처사는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이틀 후 구청에 가서 그 결심을 말했더니 구청직원은 부양비를 받지 않으려면 서울에서 내 결혼신고서를 떼어, 그 내용을 오스트리아 현지 한국대사관이 공증하고, 다시 빈 신분청의 확인 절차를 밟는 등 복잡한 과정을 밟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논란 끝에 나는 하는 수 없이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기로 했다. 이후 서류가 서울과 빈을 오가며 복잡한 절차가 완결되기까지 석 달이 넘게 걸렸다. 나는 여러 번 분통이 터졌고, 학업에도 지장이 많았다.

  II.
오스트리아의 빈은 전통적으로 이 나라 사회당이 오래 지배했던 도시이다. 따라서 20세기 빈은 사회복지의 맥락에서 유럽의 대표적인 진보 도시였고, 그 혜택이 모든 시민의 생활 구석구석까지 미쳤다. 돌이켜 보면 나도 당시 그 혜택을 풍성하게 받았다. 외국학생인 나도 학비, 의료비가 모두 공짜였고, 학교 식당은 물론 전차요금부터 오페라, 미술관 관람료에 이르기까지 파격적인 할인혜택을 받았다. 게다가 이 나라로부터 장학금 명목의 생활비까지 받았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국가라면 규제의 주체로만 인식했던 가난한 나라 유학생에게 복지선진국 오스트리아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한번은 내 지도교수가 한국의 사회복지에 대해 자세히 묻기에 한국은 이제 겨우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는 형편이라 국가 차원의 복지제도는 아직 걸음마도 떼지 못한 처지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는 “그러면 국가가 국민에게 어떻게 충성을 요구할 수 있는지” 되물어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내가 겪은 일화를 한 가지 더 보태보자. 유학 간지 얼마 안 될 때 일이다. 하루는 빈 도심지에서 일단의 대학생이 구호를 외치며 데모를 하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 그들이 요구하는 바를 알아보았더니, 나라에서 대학생에게 정규적인 급여를 지급하라는 황당한 내용이었다. 논거인 즉, 자신들이 직업학교를 거쳐 일찌감치 입직(入職)했다면 이미 돈도 잘 벌고 결혼도 했을 텐데, 훗날 나라의 동량(棟樑)이 되려고 대학 공부 길에 들어 온갖 고생과 희생을 감수하고 있는데 국가가 뒷짐을 지고 모른 체 하니 말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모든 대학생이 학비를 안 내고 공짜로 대학에 다니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한 일인데 월급까지 달라니 정말 염치없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속으로 “정신없는 친구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주변의 시민들 반응이었다. 대다수가 공감하는 낯빛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고, 더러는 “힘내”하고 의기를 북돋아 주기도 하였다. 때는 바야흐로 복지국가 황금기였고, 이들은 모두 복지국가에 깊숙이 길들어 있었다.

III.
다시 ‘사생아 부양비’ 건으로 돌아가자. 지금 생각해도 그때 그 사건은 자못 희화적(戱畫的) 이다. 당사자가 싫다는 데도 복지 당국은 돈을 주려고 갖은 애를 썼고, 내 편에서는 그 돈을 안 받겠다고 안간힘을 썼으니 말이다. 구청에서는 경우가 어떻든 합법적 절차에 따라 법을 집행하면 된다는 생각이 앞섰고, 나는 무엇보다 멀쩡한 내 딸이 ‘사생아’로 낙인찍히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서양의 실용적 사고와 동양의 명분 중시 사고가 맞부딪쳤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빈 의 ‘지나친’ 복지공세도 고마운 일이었고, 궁핍한 가운데 명분 없는 부양비를 완강히 거부했던 우리 부부의 ‘만용(蠻勇)에 가까운’ 행태도 그런대로 대견했다고 느껴진다.

내 딸이 다 큰 후, 이 일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나와 내 처는 그런 일이 다시 닥쳐도 아마 당시와 똑같이 행동했으리라고 얘기했다. 그러나 내 딸의 얘기는 달랐다.

 “그 돈 받는다고 내가 사생아가 되는 것도 아닌데, 궁핍했다며 왜 굳이 어렵게 그 돈을 안 받아. 그냥 받아서 예쁜 옷이나 사 입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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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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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1.19 17:19 Address Modify/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2. 2011.01.24 17:22 Address Modify/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3. 2013.11.27 00:32 Address Modify/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I.
사회정책연구회가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사회복지분야를 연구하는 학자들 몇 명이 모여 이름도 없이 조촐하게 출범했던 연구 소모임이 이제 리스트 회원이 100명에 육박하고, 연구발표회 때마다 발표공간이 꽉 찰 정도의 회원들이 모여 활기찬 토론을 펼치는 생명력 있는 연구회로 발전했다.

그간 이 연구회가 공식명칭이나 공식조직, 정관이나 규칙 등 모든 공식성을 배제한 채 오직 회원 간의 자발적 참여와 연구열정, 그리고 상호 신뢰와 인간적 유대만으로 오늘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이 연구회는 다른 기존 학회와 확연히 구별되는 고유성을 지닌다. 이처럼 비공식적이고 느슨하기 짝이 없는 연구회가 매달 월례 발표회 때마다 대형 학회 보다 더 많은 열성적 회원을 모을 수 있다는 것은, 참여빈곤으로 몸살을 앓는 작금의 학회 사정으로 볼 때 실로 불가사의에 가까운 일이다.

지난 10월 23-24일 연세대학교 원주 캠퍼스에서 1박 2일의 10주년 기념 모임이 있었다. 여기에도 40여명의 회원들이 참여하여 연구회의 어제를 되돌아보고, 오늘을 진단하며, 앞으로의 발전 방향을 논의했다.

출범 당시부터 깊이 관여했던 필자로서는 이날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II.
10년 전 늦여름, 나는 사회복지정책을 연구하는 몇몇 젊은 학자들에게 함께 모여 공부하는 연구모임을 갖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그러면서 그 모임은 개방적이고, 학제적(學際的)이어야 하며, 무엇보다 서로 공부에 실질적 도움이 되는 모임이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뜻을 밝혔다. 모두 반기면서, 일단 비공식적 모임으로 출발하여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연구회로 발전시키자는데 합의했다. 마침 삼성경제연구소에 소모임 지원 프로그램에 의해 장소 도움을 받을 수 있어 순조롭게 출발할 수 있었다.

초기 멤버 중에는 어쩔 수 없이 내 제자들이 많았다. 또 학부부터 줄곧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학자들 보다는 학문적 배경이 정치학, 행정학, 사회학, 경제학 등 인접 분야 출신인 학자들이 많았다. 이들 비(非) 사회복지배경 학자들은 특히 그동안 복지학계의 비주류로서 얼마간 소외감을 느껴왔기 때문에, 연구회의 출범을 더 반겼던 것 같다. 나 자신도 말하자면 그런 축이여서 상호간에 공감대가 컸다. 이들은 학부부터 줄곧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사람들과 달리, 다양한 사회과학적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각자 사회문제와 정책을 바라보는 관점과 접근 방식, 강조점이 서로 달랐다 이 점이 바로 이 연구회의 큰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출범 당시 나는 이스라엘의 <키브츠> 모형의 몇 가지 특성에 준거해서 이 모임을 발전시키면 어떨까 하는 조금 엉뚱한 생각을 했다. 함께 연구한다는 본질적 목표에서 벗어나 관료화, 형식화, 비본질화의 길을 걷는 기존의 연구회나 학회와는 다른 새로운 연구회 모형을 실험해 보고 싶은 의도에서였다.

주지하듯이 키브츠는 집단적 생활공동체이다. 따라서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지식인 모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조직 유형이다. 그러나 키브츠의 몇 가지 특성, 즉 자발성, 비공식성, 대면성, 평등성, 공동체성을 우리 연구회의 조직과 관행에 적절히 적용하면, 연구회의 본래의 목표를 온전하게 지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키브츠는 이스라엘이라는 자본주의 바다에 떠있는 작은 섬과 같은, 소규모의 사회주의적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그 생존 자체가 도전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키브츠가 그 동안 이스라엘이라는 큰 사회에 생명력을 불어 넣으며 오늘까지 연면히 자기 지탱을 할 수 있었던 요체는 무엇일까. 나는 구성원 모두가 자유로운 영혼으로, 스스로의 결단에 따라 진정으로 그들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키브츠 구성원은 누구나 가입과 탈퇴가 자유로우며, 모두가 평등한 존재로서 비공식적, 대면적 네트워크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들은 또한 공동으로 의사를 결정하고, 그에 따라 자신들이 원하는 삶을 공동체적으로 일구어 나간다. 이렇듯, 이들은 현대조직에 필수적인 공식성과 위계, 규제는 최소 수준으로 낮추고, 대신 교감, 소통, 우의와 공동체 의식을 높였다. 나는 우리 연구회를 그렇게 만들고 싶었다.

그렇다고 내가 이런 속생각을 공공연히 밝히거나 연구회의 방향을 그런 식으로 애써 유도하지 않았다. 사회정책연구회는 오히려 스스로 길을 찾아 당초의 내가 의도했던 것 보다 더 아름답고 건강하게 발전했다. 출범부터 오늘까지의 과정을 되돌아보자.

 사회정책연구회는 처음부터 따로 이름을 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초기에는 모임 때 마다 이름이 편의대로 바뀌었던 기억이다. 그러다가 언제 부턴가 명칭이 <사회정책연구회>로 자연스레 수렴되었다. 공식적 직책은 언제나 간사 하나였다. 역대 간사가 모든 연락을 하고 연구회를 추스렸다. 연구회가 커지면서 간사의 일이 힘겨워 보였다. 혼자 애쓰는 그가 안쓰러워 보였던지 언제 부턴가 회원들은 간사를 모두 회장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본인은 아직 스스로를 간사라고 부르지만, 이제는 회장이 실질 명칭이 되어 버렸다. 따로 정관이나 규정이 전혀 없다. 공식적 회의록도 채택한 바 없다. 아마 역대 간사가 중요한 사항은 메모 정도 해 놓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모두가 그냥 평등한 회원일 뿐이다. 회원 중에는 큰 규모의 국제학회, 국내학회의 회장도 여러 명이지만, 여기서는 그냥 회원일 뿐이다. 초창기 회원들 중 많은 이가 이미 50대 이상이고, 신입회원 중에는 30대가 적지 않으나 모두가 세대를 넘어 격의 없이 소통한다. 연구회 안에 일말(一抹)의 권위주의의 그림자도 찾아보기 어렵다.

대체로 간사가 이메일로 월례발표회 일정을 통보하고, 가능한 한 발표논문도 미리 첨부파일로 보낸다. 그러나 아무도 굳이 참석을 종용하거나 불참한다고 탓하지 않는다. 모두가 자유의사에 맡겨진다. 탈규제의 전형과 같은 모임이다.

모이는 장소도 여러 번 바뀌었다. 초기에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모였는데, 이후 그 때, 그 때, 형편에 따라 을지로 2가 꽃동네 사무소, 경희대, 보건복지인력개발원, 서강대로 전전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서강대에 안착했다.

한 여름 가장 더울 때 한 달, 그리고 한 겨울 가장 추울 때 한 달을 제외하고는 매달 발표회를 가진다. 주로 회원 한, 두 명이 그간 준비했던 연구결과나 논문을 발표하고 그에 대한 토론을 진행한다. 한 때는 복지국가 및 사회정책 분야의 최근 도서 및 논문들을 선정하여 독해와 토론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가끔 외부 인사를 초청해서 서로 생각을 나누기도 했다. 어떤 경우에도, 발표, 토론이 무척 자유롭고, 격의 없이 진행된다. 아무런 금기 없이 자유롭게 소통하고 어떤 치열한 논쟁도 주저하기 않기 때문에, 자신의 연구 아이디어를 점검하거나 학회의 공식 발표 전 예비발표로도 안성맞춤이다. 허심탄회하면서도 속 깊은 논의가 서로에게 큰 학습이 된다. 발표회가 끝나면, 시간이 되는 회원들은 발표장 가까운 음식점에 모여 저녁을 함께하며 담소한다. 그러면서 토론이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공식회비가 없으니, 모두가 만원씩 내서 저녁 값을 충당한다.

서울에서 열리는 월례 연구발표회 외에, 일 년에 한번 정도 지역모임을 가지거나 지방 여행을 함께 했다, 형식상 연구발표를 곁들이기도 했으나, 우의를 돈독히 하는데 주된 목적이 있었다. 그 때는 모두가 수학여행을 하는 학생처럼 즐거워한다. 원주 2번, 정선 1번, 청주 2번, 진주 1번, 속초 1번, 전주 1번의 1박 2일을 프로그램이었는데, 언제나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을 남겼다. 적지 않은 회원들이 지방 여행 때 가족을 동반한다. 그 덕택에 가족 간의 우의가 많이 다져졌다. 지방여행은 연구회가 하나의 큰 가족이라는 공감대를 마련하는 데 크게 보탬이 되었다. 흥미 있는 것은 최근에 들어 여성 회원들이 자제들은 물론, 비회원인 남편을 대동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 다른 연구회나 학회의 경우, 이런 예는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회정책연구회 회원들은 얼마간 공유하는 특성이 있는 듯하다. ‘사회복지’라는 공통의 지적 관심이 삶에 투영된 때문인지, 회원 모두가 온유하고 배려심이 각별하다. 나눔과 돌봄이 몸에 배었다. 그래서 어떤 게재에도 상호 간에 긴장감이 없고, 처음 입회해도 그냥 그 날부터 가족이 된다. 흥미있는 것은 ‘저출산 고령화’ 사회에 대한 우려 때문인지, 회원 중에 ‘다산형’(多産型)이 많다는 것이다. 비혼(非婚)이 늘어가는 이 시대에 아이가 셋인 회원 수가 적지 않다.

사회정책연구회는 그동안 역대 간사들의 헌신적 노력과 회원들의 진심어린 협조로 크게 성장했다. 외연도 넓어지고 내실도 갖춰졌다. 회원들도 전공분야도 복지국가, 사회보장을 비롯하여 비교사회정책, 노동시장정책, 보건의료정책, 복지행정, 비영리조직 등 그 연구영역이 크게 확장되었다. 전공학문의 배경도 실로 다양하여 사회복지학, 정치학, 사회학, 행정학, 경제학, 보건 및 예방의학에 이르기 까지 갖가지다. 국내에서 다(多)학문적 성격이 가장 강한 연구모임이 아닐까 한다. 회원들의 최종 학위 수여지로 따져 보아도 처음에는 국내와 미국 중심이었는데, 이후 유럽에서 공부한 회원이 급격히 증가하여 최근에는 오히려 영국 및 독일 등 유럽 유학배경 회원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전체로 볼 때, 한국, 유럽, 미국, 일본 등 비교적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국내 대학 출신 배경도 처음에는 연세대 출신이 가장 많았으나, 날이 갈수록 다양하게 구성되고 있다. 해외 회원 중 스웨덴 <남 스톡홀름 대학>의 최연혁 교수는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국내 회원들과 깊게 교감하고 유럽학계와의 가교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회원들 중에는 교수들이 가장 많으나, 연구소의 연구원도 적지 않고, 전문관료들도 있다.

최근에 귀국해서 아직 정착하지 못한 젊은 박사들도 여러 명 있다. 아직도 학부배경이 사회복지학이 아닌 젊은 학자들이 국내외에서 사회정책을 공부를 한 후 이 연구회에 들어오는 예가 많다. 그 때문에 이전 회장이 이 연구회는 <제2의 모교>와 같다고 한 말이 기억이 난다. <새 보금자리>라는 말도 생각난다. 각자 학문적인 배경이나 소속이 다르지만 이 연구회는 모두에게 정서적으로 편안하고 의지할 수 있는 모교와 같은 보금자리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다른 학회나 연구회에 비해 사회정책연구회의 회원들 간에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지는 학문적, 인간적 교류가 매우 긴밀하다. 공동연구 프로젝트 등을 통해 비공식적 연구 네트워크를 형성하기도 하고. 신진연구자의 학계 진출을 돕는 인큐베이터 구실도 한다.

이처럼 다원적, 복합적 구성에도 불구하고 사회정책연구회는 마치 용광로처럼 회원들 모두를 한데 묶고 용해하는 엄청난 힘이 있다. 회원들의 다양한 배경이 오히려 연구회의 역동성을 보태고 상호 학습을 통하여 회원의 시야와 안목, 그리고 연구수준을 높인다.

최근에 연구회의 국제적 접촉이 잦아졌다. 2009년 여름에 최연혁 교수의 주선으로 일정이 가능한 회원들이 참여하여 스웨덴 현지에서 그곳 학자들과 한국과 스웨덴 양국의 사회정책을 비교하는 공동세미나를 가졌다. 아울러 스웨덴의 주요 사회정책 관련기관인 노동조합(LO), 경영자 조직, 최소단위 지방정부인 코뮌 등을 직접 방문하여 세계 최고 복지국가의 진면목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연구회 회원들의 국제적 네트워크의 형성과 국제적 역량은 여러 가지 경로로 나타난다. 회원 중에 최영준 교수(고려대)를 비롯한 일부 젊은 유럽유학출신의 학자들은 유럽체류 기간 동안 영국을 중심으로 여러 유럽대학에서 복지국가를 공부하는 학자와 학생들을 모아 동아시아 복지제도의 발전을 논구하는 연구회의 창립을 주도했다. 이 연구모임이 지금은 명실 공히 유럽과 아시아 학계에서 높이 평가하는 국제적 학회(East Asian Social Policy Network/EASP)로 성장했다. 문진영 교수는 최근에 바로 이 학회의 회장직을 지냈다.

바로 지난주에는 세계적으로 저명한 복지국가 이론가인 스웨덴의 Bo Rothstein 교수가 한국을 방문하게 되어, 연구회가 그를 초청했다. 그의 강연을 듣고 회원들과 장시간 진지하게 토론하는 기회도 가졌다. 세계적 학자가 바쁜 일정에 소규모 비공식 연구모임을 위해 오후와 저녁시간을 통째로 할애하여 장시간 서로 소통하는 기회를 가지는 것은 드문 예일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그동안 연구회가 상승곡선을 그렸던 것만은 아니다. 성쇠(盛衰)와 부침(浮沈)이 있었다. 그러나 큰 위기는 없었던 것 같다. 그것은 무엇보다 연구회에 대한 회원들의 지극한 속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역대 회장들, 즉 1대 정무권(연세대, 2000-2003), 2대 신동면(경희대, 2004-2006), 3대 문진영(서강대, 2007-2009), 4대 정무권 (연세대, 2010)의 헌신적 노력과 기여가 컸다.

그러나 필자는 사회정책연구회의 지속가능성과 생명력의 가장 큰 원천은 이 연구회가 그 동안 회원들에게 실질의 차원에서 학문적, 인간적으로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연구회의 미래 성공의 열쇠도 바로 여기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근 사회정책연구회의 새로운 시도의 하나는 <메타로그>를 만드는 작업이다. 구성원 개개인이 자신의 블로그를 만들고 여기에 실린 글이 자동적으로 연구회의 메타블로그에 모여져, 전 회원과 연구회 밖의 사람들이 상시적으로 정보와 지식, 관점과 아이디어를 공유, 소통하게 되는 이 시스템이 이제 시동단계에 있다. 정무권 회장의 회심작인 메타로그를 통해 회원들이 앞으로 한국복지국가 및 사회정책발전을 위한 알차고 활기넘치는 담론을 펼칠 것으로 기대된다.

필자는 연구회의 초기 형성과정에 참여했을 뿐, 그 후로는 어떤 실질적 관여도 피했다. 특히 2007년 2월 연세대학교를 정년퇴직하고 강원도 속초/고성으로 이사를 간 후로는 한 해에 한번 정도 연구발표회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지방여행 때는 꼭 참석하는 편이다. 터 놓고 얘기하면, 내가 연구회와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 연구회의 자생적 발전에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왔던 게 사실이다.

 III.
사회정책연구회 10주년을 기념하는 지난 번 원주 모임에서 <사회정책연구회의 과거, 현재, 미래>를 주제로 라운드 테이블이 있었다. 여기에서 회원들은 연구회의 앞으로의 발전방향에 대해 많은 토론을 했다. 그런데 흥미 있는 일은, 대부분의 회원들이 연구회를 보다 공식화, 제도화하기 보다는 오늘과 같은 비공식적 연구네트워크로 그냥 유지하는 것이다는 입장을 개진했다는 것이다. 다만 회장의 짐이 너무 크니 그를 도와 줄 직책을 한 자리 정도 더 마련하자는 의견에는 대체로 동의했다.

그 날, 연구회 내에 소모임을 활성화시켜 소규모로 공동연구/스터디 그룹을 형성하자는 의견, 가끔 연구발표 외에 주요 저술이나 논문의 독해도 하고, 실제로 정책결정 위치에 있거나 현장에 몸담고 있은 사람들의 초청강연도 주선 하자는 제안, 연구회를 중심으로 국제적인 리서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방안 등 연구회의 운영 및 발전과 연관하여 다양하고 건설적 제의가 많았다. 그러나 앞으로 어떤 시도나 노력도 미리 면밀히 기획하고 추진하기 보다는 현재와 같은 비공식적 네트워크 안에서 자연스레 뜻을 모아 보자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 졌다. 전체적으로 연구회의 어제와 오늘에 비교적 만족하며, 내일에 대해서도 낙관하는 여유 있는 분위기였다.

 나는 그날 회원들의 논의를 지켜보면서 깊은 감회에 젖었다. 그러면서 어떠한 공식성과 조직성을 배제한 채, 진정성 하나 만으로 이 연구회가 오늘의 성장을 이룬 것은 하나의 <작은 기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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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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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9.28 수복으로 서울로 돌아온 후 몇 달도 못 되어 1.4 후퇴로 다시 피난길에 올랐다. 천신만고 끝에 대구에서 약 10개월 머물다가 부산으로 내려갔다. 1951년 11월 부산에 정착한 곳이 우연히도 당시 임시수도 부산의 정치 1번지인 부민동이었다. 당시 구 경남도지사 관사였던 곳에 대통령관저가 자리 잡았고, 그 근처에 국회가 있었는데, 모두 우리 집에서 100M 이내였다. 그런데 한국 정치사에 큰 획을 그었던 부산정치파동이 바로 그 때 그곳에서 시작되어 이듬해인 1952년 전반기에 집중적으로 펼쳐졌다. 실로 적기, 적소에 한국 정치의 분화구로 찾아 들어 간 셈이다.

부산정치파동은 1950년 5.30선거에서 야당이 압승하여 이승만의 재선이 어려워지자, 정부가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1952년 1월 18일 국회가 이를 부결함으로 정부와 국회의 대립이 첨예화 된다. 이에 정부는 국회 해산을 요구하는 ‘관제민의’를 동원하여 국회의원을 위협하는 한편, 5월 25일 국회해산하기 위해 부산을 중심으로 한 23개 시, 군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국회의원 정헌주 등 12명을 구속하는 등 초강수를 두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비난여론이 쇄도하자 대통령 이승만은 5월 4일 국회해산을 보류한다고 밝힌다. 이를 계기로 부통령 김성수가 사임하였고, 국회의원 장택상을 중심으로 한 신라회가 주동이 되어 대통령직선제 정부안과 내각책임제 국회 안을 발췌, 혼합한 이른바 ‘발췌개헌안’을 마련한다. 7월 4일 경찰과 군인들이 국회의사당을 포위한 가운데, 국회의원들은 기립투표방식으로 출석의원 166명 중 찬성 163표, 반대 0표, 기권 3표로 발췌개헌한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이승만 독재 기반이 굳어졌다. 정치학자 김일영은 부산정치파동을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군사쿠데타로 규정하고, 이를 ‘본질상 보나파르트 쿠데타적 성격’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이 1952년 바로 내가 열 두 살 되던 해에 일어난 일이다. 전쟁이 한창 진행되어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던 그 당시 임시수도에서 이승만 정부의 야당탄압과 헌정질서의 파행적 운영이 공공연히 자행된 것이다. 나는 그 과정을 마치 역사의 증인인양 가까운 곳에서 목도할 수 있었다.

대통령 관저 앞 광장에는 연일 사람들로 들끓었다. 전국 각 지방에서 ‘민의’의 이름으로 군민대표들이 몰려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주장하는 데모를 했다. 하얀 옷의 촌로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이승만 대통령에게 충성을 맹약하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역사는 이들을 강제동원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나, 현장에 있던 내가 보기에 그들에게 나름대로 진정성이 있었던 것으로 느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반 백성에게 이승만은 하늘같은 존재였고, 그의 카리스마는 막강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다수의 자유당 외곽조직들이 ‘반민족 국회의원 성토대회’를 열어 내각책임제 개헌추진 의원의 제명 요구했다. 딱벌떼, 백골단, 민족자결단 등 섬뜩한 느낌을 주는 이름의 폭력단체들도 국회의원 소환과 국회 해산을 요구하는 관제데모에 앞장서며 국회를 압박했다. 이들이 거리를 휩쓸면서 공포 분위기를 연출하여 시민들도 불안에 떨었다. 특히 계엄령이 선포되고 야당의원이 무리로 잡혀갈 당시 국회주변의 분위기는 삼엄하기 그지없었다. 어린 나에게도 이런 모습은 학교에서 배우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일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나는 학교가 파하면 빠짐없이 대통령 관저와 국회 근처로 달려가 그 곳에서 전개되는 대중동원과 파행정국을 예의 관찰했다. 답답하기 그지없었던 것은 내 친구 중 어느 누구도 이런 정치 현실에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혼자 끌탕했다. 그러다 보니 궁금한 것을 아버지에게 낱낱이 묻고, 억지로 정치 토론을 유도했다. 매일 신문을 탐독하는 것도 일과가 되었다.

II.
열 세 살 되던 1953년 3월에 피난지 부산에서 K중학교에 입학했다. 그해 6월 나는 서울로 환도했고, 곧 이어 7월에 정전협정이 맺어져 전쟁이 끝났다. 그 사이에 나는 ‘정전협정 반대’, ‘북진통일’을 외치는 관제 데모에 여러 번 동원되었다. 선배들의 열변과 선창에 따라 거리로 나서곤 했는데, 이미 반공의식이 깊숙이 머리에 배여 있던 터라 별다른 이의 없이 데모에 참여했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 들어간 후 정치에 대한 나의 관심에 다시 불을 지핀 것은 동아일보에 연재된 정치칼럼 <단상단하(壇上壇下)>였다. 재치와 풍자가 넘치는 날카로운 정치촌평이었는데, 특히 자유당정권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 인기가 높았다. 백광하(白光河)라는 분이 썼는데, 이 분이 한문에 조예가 깊어 칼럼에 한시, 한자성어 등을 많이 인용하여 노장층 독자에게 특히 인기가 높았다. 내 짧은 한문 실력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옥편을 들고 칼럼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으며 지배(紙背)에 담긴 함축된 의미를 찾아내려고 꽤나 고생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풍자의 참뜻을 찾아내면 무릎을 치고 기뻐했다.

내가 당시 탐독하던 또 하나의 칼럼이 경향신문의 무기명 칼럼 <여적(餘滴)>이었다. 이 칼럼은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등 생활전반을 고르게 다뤘는데, 필진 중에는 유명 문필가, 정치평론가가 많았다. 이 칼럼은 투철한 비판의식과 함께 지성적 풍미가 높았다. 나는 이 칼럼을 읽으면서, 높은 지성의 뒷받침을 받은 비판이야 말로 지식인이 추구해야 할 평론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여적>은 1959년 2월 경향신문 폐간을 몰고 온 도화선이 되었다, 그 때 집필자가 시인이자 정치인이었던 주요한이었다. 경향신문의 최장수 칼럼인 <여적>은 아직도 이 신문의 대표 아이콘으로 남아있다.

이들 주요 신문의 칼럼을 읽으며, 나는 비판적 관점에서 정치를 보는 공부를 많이 했다. 그러면서 권력의 편에 서려면 굳이 왜 언론에 글을 쓸까 하는 생각을 자주 했다. 아울러 나도 커서 반드시 비판적 지성이 넘치는 격조 있는 정치평론을 써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이후 나는 1970년대 말부터 약 20여년 동안 주요 언론에 백 여 편의 정치평론을 썼다. 대체로 비판적인 논조에 글을 많이 써서, 주위에서 ‘사람은 온유한 것 같은데, 글은 꽤나 매섭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아마 거기에는 <단상단하>와 <여적>의 영향이 적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III.
나의 소년시절을 되돌아보면서 왜 내가 그 어린 나이에 그토록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가졌을 까 다시 생각해 본다. 그런데 별로 설득력 있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우리 집안이 특별히 정치에 관심이 있다거나 이해관계가 있는 편도 아니고, 더욱이 내가 남달리 활발하거나 나서서 설치는 성격이 아니어서 더욱 그렇다. 나는 조용하고 무척이나 수줍은 성품이어서, 어른들도 내가 정치에 큰 관심을 쏟는 것이 ‘별 스러운 일’이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나는 어려서부터 정치는 무척 중요한 영역이고, 정치가 잘되어야 나라의 앞날이 밝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현실 정치에 참여할 뜻은 추호도 없었지만, 정치에 대한 나의 관심과 공부를 언젠가 글로써 표현하겠다는 열망을 강렬하게 키웠다.

돌이켜 볼 때, 내가 소년기에 정치와 연관하여 가장 관심이 컸던 대목은 옳고 그른 것에 대한 관심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정치적 인물, 정권, 정치적 사건을 평가할 때, 으레 정의라는 잣대를 가지고 따져 보곤 했다.

아직도 이러한 경향은 나의 정치를 보는 눈에 주된 기준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정치적 술수와 계략에 능한 세력이나 명분 없이 작은 실리나 이해관계에 집착하는 정치인은 아예 질색이다. 내가 정치참여를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이유도, 그 세계에 이러한 사람들이 많고, 또 그들 세력이 판을 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아마도 보다 정의로운 사회, 미래와 큰 사회를 생각하는 참 정치에 대한 꿈이 소년을 미래의 정치평론가, 그리고 정치학자로 이끌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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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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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어떤 이는 세 살, 네 살 때 일도 제법 많은 것을 기억한다고 한다. 그런데 내 뇌리에 각인된 최초의 기억은 다섯 살 때이다. 해방 다음날 군중이 환호하며 거리로 몰려 나가던 장면이 그것이다. 그 기억이 의외로 선명한 것을 보면, 그 역사적인 순간이 내게도 꽤 인상적이었던 게 틀림없다. 이렇듯, 내 인생의 첫 기억은 해방이라는 정치적 사건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정치에 대해 비상한 관심과 흥미를 가졌다. 그래서 어른 들이 정치 이야기를 하면 언제나 귀를 종긋 세웠고, 자주 끼어들어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끈질기게 묻곤 했다. 신문을 읽기 시작한 이후 내 눈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면은 정치면이었고, 특히 정치칼럼을 열독했다.

그런데 나는 정치를 관전(觀戰)하고, 분석, 평가하는 데 관심을 가졌으나, 커서 직접 정치를 하거나 정치권에 다가 갈 꿈은 전혀 꾸지 않았다. 말하자면 정치 구경은 즐겼으나, 스스로 ‘꾼’이 될 생각은 없었다는 얘기다.

아래 글은 내가 열 살 전후 소년시절, 정치에 흠뻑 빠졌던 얘기다.

II.
내가 아홉 살 때인 1949년 6월 28일 김구 선생이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백범일지>를 읽어 그 분의 애국충정에 크게 감동을 받았던 나에게 이 사건은 더 할 수 없이 큰 충격이었다. 사건 자체도 통분할 일인데, 하필 살해자가 나와 같은 안(安)씨라는 사실에 무척이나 화가 났던 기억이다.

나는 어머니께 조문을 가야겠다고 떼를 썼다. 내 성황에 못 이겨 어머님이 서대문 경교장으로 나를 데리고 가 주셨다. 길게 늘어선 조문객 들 틈에서 한참을 기다려 선생 영정에 넙죽 절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것도 모자라 며칠 후 동대문 운동장에서 거행된 장례식에 참석하겠다고 어른을 졸라 댔다. 장례식 당일 하도 사람들이 많이 몰려 식장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대신 아버지 친구 댁인 종로 6가 <동원당 약국> 2층 창문에서 장례행렬을 눈으로 따라갔다. 오열 속에 이어지는 장례 행렬을 보면서 나도 함께 울었다. 그날 약국 주인이신 고 선생께서 “너, 어린놈이 정치에 그렇게 관심이 많다며?” 하셔서 내가 부끄러워 아버지 뒤에 숨었던 기억이 난다.

III.
열 살 되던 1950년 해방 후 두 번째 선거인 <5.30 선거>가 있었다. 나는 성북 선거구인 돈암동에 살었는데, 당대의 거물 정치인 조소앙과 조병옥의 맞대결로 전국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조소앙은 한국독립당 대표로서 단정수립에 반대하고 김구 등과 남북협상에 참가했던 중도계열이었다. 이에 반해, 조병옥은 미군정청 경무부장 출신으로 해방 후 치안유지와 공산당 색출에 앞장섰던 한민당계 보수정치인이었다.

당시 나는 조소앙의 광팬이었다. 그의 이념에 공감하기 보다는 그가 풍기는 지사(志士)형 분위기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올곧은 선비의 인상이었고, 우리 민족의 꿈과 희망을 이야기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느꼈다. 조소앙 후보가 가난하고 관권에 핍박을 받는다는 항간의 소문도 그에게 연민을 느끼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유세장을 열심히 쫓아다녔다. 멀리 정릉, 성북동까지 원정을 갔었다. 사람이 운집해서 연사가 잘 보이지 않으면, 남의 자전거 뒷좌석에 올라가 무례하게 자전거 주인의 어깨를 짚고 어른들 머리 너머로 정견을 듣곤 했다. 조소앙의 연설은 지성적이고 격조가 있었다. 정견발표 첫 마디에 항상 함께 입후보한 일곱 명의 후보자를 ‘북두칠성’에 비유하며 그들 모두에게 존경과 사랑을 전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조병옥은 보다 직설적이고 공격적이었다. 그의 솔직하고 결의에 찬 모습이 사나이답다고 생각했으나 마음이 끌리지는 않았다. 두 사람의 소견발표가 끝나면 군중이 썰물처럼 빠져 나가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선거전이 한창 절정을 향해 달렸던 5월 20일 경, 내가 엄청난 사고를 쳤다. 옆집 아이와 장난을 치다가 드럼통에서 떨어져 관자노리를 뾰족한 돌 모서리에 찌었다. 동맥이 끊어져 피가 낭자했다. 당시 서울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종로 화신 옆 김하등 외과에서 큰 수술을 받고 열흘 가까이 입원했다. 어른들은 그 때 빨리 손을 쓰지 않았으면 내가 죽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수술 후 입원실 침대에 누어서도 모든 관심을 선거에 쏟았다. 라디오를 귀에서 떼지 않았고, 사람만 보면 선거 추세와 성북구 선거 전망을 묻곤 했다. 당시 전국의 선거 열기는 무척 높았다. 1948년 <5. 10 선거> 때 불참했던 남북협상파와 중립계가 대거 참여한 것도 선거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내가 입원했던 병원의 김하등 원장님은 ‘종로 갑’ 에 출마한 박순천 여사의 열렬한 지지자이셨다. 그래서 한글을 모르는 그 댁 가정부에게 박여사의 기호를 주입시키려고 애쓰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다행이 선거 전날 퇴원해서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선거당일의 현지 분위기를 가까이서 체험할 수 있었다.

결과는 조소앙 선생의 압승으로 끝났다. 그가 3만 여 표로 전국 최고득표를 했고 조병옥 박사는 1만 여 표밖에 얻지 못했다. 나는 환호, 작약했고 며칠 동안 신이 나서 그 얘기만 화제에 올렸다.

IV.
그 후 한 달도 못되어 6,25 전쟁이 터졌다. 1950년 6월 27일 우리 집 지하실에서 온 식구가 밤을 지새웠다. 밤새 포화소리가 가까이서 들렸고, 공포와 불안감 때문에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새벽녘이 돼서야 주위가 잠잠해 졌다. 아침에 조심스레 대문을 열고 나가 보니 이미 인민군이 진주에 있었다. 까맣게 그을은 앳된 얼굴의 소년병을 보고 놀랐다. 열여섯이나 되었을까. 따발총이 꽤나 무거워 보였다.

북한 치하에서 약 보름을 지내고 우리 가족은 7월 중순 어느 날 새벽, 몰래 서울을 떠났다. 후에 안 일이지만 집안 성향으로 보아 공산치하에서 무사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판단에서 그랬던 것이다. 이후 평택 외가에서 9.28 서울 수복 때까지 석 달을 지냈다. 평택 읍에서 30리나 떨어진 외진 시골마을이어서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얼마간 벗어난 곳이었다. 그러나 한, 두 번 빨간 완장을 찬 군 인민위원회 요원이 동네를 다녀갔고, 로동신문이 한번, 당 선전물이 몇 번 배포되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 가족은 그곳에서 숨죽이며 석 달을 보냈다.

그곳에서도 나의 관심은 온통 정치에 있었다. 정보는 거의 차단되었고 부모님이나 외가 친지들도 정치 얘기는 금기시했기 때문에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면도도 안하시고 조용히 방에 들어 앉아계시던 아버지에게 계속 질문을 퍼 부었다. 물음의 요지는 남, 북한 중 어느 쪽이 더 정의로운 세력이냐 하는 것과 전쟁은 어느 편이 이길 것 같으냐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웃으시며 내 손만 잡으실 뿐, 아무 대답이 없으셨다. 나는 그럴수록 조바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외갓집에 배포된 로동신문을 너덜너덜해 질 때까지 수없이 읽었다. 대전 함락을 알리는 대문짝만한 헤드라인과 탱크를 앞세우고 진격하는 인민군의 사진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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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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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Voest에서의 공장 노동과 연관해서 잊혀 지지 않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그 중 기억나는 일 몇 가지를 정리해 본다.

I.
회장과의 대화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 너구리 반장은 내게 회장과 무슨 말을 나눴느냐고 끈질기게 물었다. 나는 그분이 최근 한국에 다녀오셨기 때문에 한국 얘기를 주고받았다고 둘러댔더니, 그는 꽤 미심쩍은 표정으로, 겨우 그런일로 그 바쁜 분이 너를 만났겠느냐고 계속 다그쳤다.

그런데 그날 이후 반장의 모습이 달라졌다. 위압적이고 꽤나 권위적이던 던 그가 하루아침에 나에게는 순한 양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다른 노동자들에게, 내가 회장님의 지인이며 대단한 친구라고 떠벌리며, 내게 잘 보이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다. 당시 내가 30kg짜리 강판을 들어 옮겼는데 그것을 20kg으로 낮춰 주었고, 일하는 데 자주 찾아와 힘들지 않으냐, 따로 도와줄 일이 무엇이냐며 귀찮을 정도로 물어댔다. 한번은 일하다가 내가 손을 조금 다쳐 사소한 상처가 났다. 평소 같으면, “침이나 묻혀” 혹은 “코나 발라” 등 다친 사람 염장지르기로 이름난 그였는데, 그 날은 급히 의료반을 불러 치료를 해 주며 수선을 떨었다. 너무 부담스러워, 그에게 제발 이러지 말라고 간청을 했더니, 그의 대답인 즉,

“아닐세, 당신은 매우 중요한 분이 아닌 가.”

그때 나는 생각했다. 서양이라고 다를 게 없구나.

II.
나는 그곳 철공장에서 일하면서 사람의 몸은 대단한 적응력을 가졌다는 것을 절감했다. 처음에는 파트너와 더불어 20kg을 들어 옮기는데도 쩔쩔맸는데, 시간이 가면서 일이 한결 수월해졌고 후반에 들어서는 30kg을 거뜬히 옮기게 되었다. 나보다 훨씬 건장한 서양의 전문 일꾼들에 견주어 별로 뒤지지 않게 육체노동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대견하게 느꼈고, 나름대로 자부심도 생겼다. 두 달 가까이 되면서 주말 가외 노동도 어렵지 않게 소화했다. 그러다 보니 몸무게는 조금 줄었지만 근력이 강화되어 가슴도 벌어지고, 팔에 알통도 배기는 등 몸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주위 동료도 “이젠 진짜 노동자 티가 난다”고 연대감을 피력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일하면서, 나는 공장 노동자들의 삶과 그들의 문화를 체험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그래서 휴식시간마다 그들에 가까이 다가가서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들은 내가 외국 유학생이라는 사실 때문에 처음에는 거리를 두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내 진심을 알고 마음을 열었다. 내가 제법 유식하고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했는지, 정치나 경제의 흐름으로부터 자신들의 가족문제, 장래 계획 등 생활 전반에 걸쳐 이것저것 자주 물어보고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후반에 들어서자, 이들은 나를 아예 “안 박사(Doktor Ahn)”라고 불렀다. 학위를 받기 전에 이들로부터 이미 박사대접을 받은 셈이다.

이들과 몸을 비비며 일했던 공장 노동자 생활이 후에 내가 정치사회학, 산업사회학을 공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고, 특히 산업민주주의에 관심을 두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III.
방학은 학생들이 집중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런데 학업에만 전념해야 하는 외국 유학생이 두 달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학업을 접어두고 공장에서 일하다 보니 심리적으로 많은 부담이 되었다. 더욱이 그 무렵은 박사학위 주제를 지도교수와 합의하고 논문의 큰 그림을 그리는 시점이었다. 그 중요한 시기에 온갖 책과 자료는 물론 모든 지적 소통으로부터 두 달간 단절을 한다는 것은 얼마간 모험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과중한 육체노동으로 지치고 고단한 몸을 가지고 주경야독 식으로 남은 시간에 책을 보거나 공부에 매달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일과 공부를 함께 해 보자는 것이었다. 공장에서의 작업이 이제 웬만큼 익숙해졌고 강판 무게도 감당할 만하니, 기계처럼 일상화된 동작을 반복하면서 머리로는 공부를 해 보면 어떻겠냐는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몸과 머리를 별개로 움직인다는 일이 불가능하다 싶었다. 그러나 우선 논문 주제를 머리에 달고 계속 고민을 하는 연습을 시작했다. 마치 수행자가 화두에 몰두하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웬걸 몸이 일상화된 반복동작을 거듭하는 동안 머리는 저 나름대로 논문의 큰 그림을 조금씩 그리는 게 아닌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몸과 머리가 따로 놀고 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일하면서 동시에 머리로 논문의 얼개를 만들고, 주요 논점과 접근방법 등을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방학 중 공장에서 책과 멀리 하고 있다는 조바심 때문에 보다 생각을 더 깊이, 철저하게 했다. 그러다 보니 집중력도 심화하는 느낌이었다. 혼자 생각했다. ‘이렇게 되면 마르크스가 말한 노동소외도 극복되는 것이 아닌 가’.

두 달간의 일을 마치고 대학으로 돌아와 지도교수와 마주 했다. 토론을 통해 나의 논문 진척상황을 면밀히 점검한 교수는, 꽤나 만족한 얼굴로 “자네 방학 중 공부를 많이 했군, 한여름을 도서관에서 보낸 모양이야.”라고 말했다. 나는 굳이 그것이 철공장에서 이루어 진 것이라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산행에 나설 때는 생각의 한 꼭지를 미리 챙긴다.

IV.
당시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학비가 따로 없었다. 그래서 내가 받는 장학금은 말하자면 생활비였다. 장학금으로 생활하는 데는 큰 불편이 없었으나 필요한 책을 산다는 것은 무리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책이 ‘고팠다’. 그런데 두 달 공장에서 노동하고, 막판에는 주말 가외 노동 까지 하니 생각했던 것보다 노임을 훨씬 많이 받았다. 따져보니 두 달 일하고 자그마치 넉 달 치 장학금을 받은 셈이다. 그래서 큰 맘 먹고 거기서 벌어들인 거액의 돈을 몽땅 투자해서 책을 샀다.

공부를 끝내고 귀국길에 오르기 위해 이삿짐을 정리하다 보니, 내가 지닌 책들 대부분이 1967년 여름, 그 한여름 철공장에서 번 돈으로 사들인 책들이었다.

V.
그 한 여름 제철공장으로부터 나는 실로 많은 것을 배우고, 얻었다. 우선 내가 모르던, 그러면서 알고 싶었던 미지의 세계를 경험했다. 또 그 체험학습을 통해 추상의 세계에서 맴돌던 내 공부와 생각이 소중한 ‘현장감’을 얻게 되었다. 아울러 공부는 책상머리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새로운 사실도 몸소 터득했다.

나는 요즈음도 한 여름 폭염이 기승을 부릴 때면, 철공장에서 중무장하고 땀 흘리며 일하던 그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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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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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강렬 2010.10.13 14:26 Address Modify/Delete Reply

    프란치스코 성인이 "노동은 사람을 성화시킨다"고 말했습니다. 저도 주말에 밭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일을 하고 나면 머리속이 그렇게 맑아질 수 없습니다. 세상 걱정근심, 잡념을 모두 놓게 되지요. 저는 제집 아이들을 비롯해 요즘 아이들이 진지하게 땀흘리는 노동을 해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I.
나는 1967년 6월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 유학 간 후 두 번째 맞는 여름 방학을 앞두고 색다른 계획을 세웠다. 산업사회의 가장 역동적인 삶터인 노동현장을 직접 몸으로 체험하자는 생각이 그것이었다. 여러 가지를 고려해 보니 <린쯔>에 있는 세계적인 제철소 <Voest>가 가장 내가 찾는 이미지에 맞았다. 당시 Voest는 생산체계, 생산능력, 공법 등에 있어 유럽 최고수준의 제철소로서,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산업체였다. 제철공장은 노동강도가 높고 얼마간 위험이 따르는 작업장이나, 산업사회의 참 모습을 가장 잘 살필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알아보니 이미 여름 방학 학생 아르바이트 신청기간이 지났다는 얘기였다. 궁리 끝에 Voest의 회장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일자리를 부탁해 보자는 생각을 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왜 그런 엉뚱한 발상을 했는지 의아스럽다. 나는 그에게 편지를 통하여 한국에서 유학 온 정치학 전공의 박사과정 학생인데, 방학 기간 중 귀 제철소 노동현장에서 일하면서 산업사회의 여러 단면을 직접 체험하고 싶다는 소망을 전했다. 놀랍게도 편지를 보낸 지 사흘 만에 회장의 친필 편지를 받았다. 일자리는 걱정하지 말라며, 나를 한번 만나고 싶으니 일하러 오면 꼭 한번 자기를 찾아 달라는 것이었다. 나의 두 달간의 한여름 철공장 체험은 이렇게 시작이 되었다.

  II.
인사부에서 내게 사무실 보조업무를 할 것인가 아니면 육체노동을 할 것인가를 물었다. 내가 노동을 하러 왔다고 대답을 하니, 담당자가 몇 군데를 추천했다. 나는 직접 발품을 팔아 몇 공장을 직접 돌아보았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이 용광로 작업장이었다. 1,000도가 훨씬 넘는 높은 온도로 철광석을 녹여 쇳물을 만드는 숨 가쁜 과정을 지켜보며 치열한 노동현장의 전형을 보는 듯했다. 그러나 너무 위험해 보여 발길을 돌렸다. 결국, 나는 냉연강판절단설비공장을 택했다. 기계화된 공정과 인간 노동이 적절히 배합되어 보였고, 노동 강도나 안전관리체계도 그만하면 됐다 싶어 그리 결정한 것이다.

작업장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고릴라처럼 우람한 체격의 반장이었다. 능글맞은 웃음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나를 보자 그 몸집으로 이 힘든 일을 어떻게 하겠느냐며, 고개를 모로 저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정말 그곳 노동자들 한명 한명이 근육질의 거한들이었고 힘이 넘쳐 보였다. 당시 나는 173cm, 73kg의 체구였으니 한국청년으로는 제법 건장한 축에 들었는데, 그들과 비교하니 왜소하기 그지없었다. 반장은 며칠 전에 아르바이트 대학생이 멋모르고 왔다가 사흘 만에 포기하고 되돌아갔다며 “내가 장담하지, 자네는 이틀 만에 기권할 거야”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작업장은 마치 대도시 기차역 터미널처럼 높은 천정의 통짜 공간이었는데, 그 크기가 운동장만큼이나 컸다. 그 대형 홀 안에 수십 대의 절단기가 있었고, 전단기들은 저마다 일정 시간 간격으로 냉연강판을 한 장 한 장 토해내고 있었다. 그러면 절단기 앞 쪽에 마주 서있던 노동자 두 사람이 기계가 토해낸 강판을 받아 함께 맞들고 몇 걸음 옮겨 차곡차곡 쌓는다. 강판이 일정 높이로 쌓이면 대형 크레인이 공중에서 내려와 큰 집게로 집어 나른다. 절단기마다 쏟아 내는 강판의 무게가 달라 가벼운 것은 20kg 정도이나 어떤 것은 그 배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반장은 60세 전후의 초로의 노동자 한 사람을 불러, 나를 데리고 가르쳐 가며 일하라고 명했다. 베버라는 이름의 자상한 눈빛의 그 아저씨(사실 그때는 그가 할아버지처럼 보였다)는 나에게 강판을 잡고, 옮기는 요령을 간략히 설명한 후, 기계는 사람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자동으로 작동하니 정신 차리지 않으면 사고가 난다고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는 곧장 “일하자”고 외쳤다.

20kg짜리 강판을 두 사람이 맞잡으니 처음에는 가볍게 느껴져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채 10 여분도 안 되어 팔이 떨어질 듯 아프고 땀이 비 오듯 했다. 그렇다고 기계는 쉴 새 없이 강판을 토해내니 마음대로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안간힘을 쓰며 겨우 겨우 버텼다. 그렇게 정신없이 8시간을 보내고, 노동자 숙소로 가는 셔틀버스에 올랐을 때 완전히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노동자 호텔이라고 불리는 숙소는 냉방시설, 화장실과 샤워시설을 다 갖춘 제법 준수한 원룸 형식의 공간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쓰러졌다. 다음날 눈을 뜨니 오전 10시, 인사불성으로 무려 17시간을 잔 것이다. 다행히 오후 4시 교대여서 일터로 나가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온몸이 아프고 쑤셔 운신이 어려웠다. 무엇보다 두 손이 퉁퉁 부어 아예 쥐고 펴고 할 수가 없었다. 그때 내 뇌리를 스치는 생각은 ‘도저히 안 되겠다. 살고 봐야지. 일을 그만두어야겠다’ 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능글맞은 우리 반장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분명, “그것 봐, 내가 얘기한 그대로지, 제 녀석이 여기가 어디라고”라며 크게 웃을 게 아닌가. 어디 그 뿐인가. 그 작업장에, “한국 유학생이 한명 왔었는데, 그래 그 녀석이 겨우 하루 일하고 그만두었잖아”라는 뒷말이 전설처럼 이어질 게 아닌가.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내가 나 자신에 대해 크게 실망하고, 자신감을 잃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나는 부랴부랴 양손을 따듯한 물에 담그고 힘껏 비비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리곤 뜨거운 목욕으로 몸을 풀었다. 그러기를 몇 시간. 오후 3시가 돼서야 간단히 요기하고,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쓰러지더라도 일터에서 쓰러져야겠다고 단단히 작정했다.

  III.
공장의 노동강도는 생각보다 높았고, 작업조건도 녹록치 않았다. 자잘한 일상적 사고도 빈번했고, 무엇보다 대형 크레인이 강판 더미를 공중으로 올리다가 실수로 한, 두 장을 놓쳐 허공으로 날리는 경우 그 결과는 치명적일 수 있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언제나 중무장 상태로 일했다. 한여름인데도 철제 헬멧을 쓰고 가죽 보호대로 몸 여기저기를 감싸다 보니 일하는 내내 땀이 억수처럼 쏟아진다. 힘든 작업을 잊을 겸, 땀도 식힐 겸, 대부분 노동자들은 손에 맥주를 달고 일한다. 말하자면 얼마간 취한 상태에서 일하는 셈이다.

그들 노동자들 대부분은 청소년기 학교과정에서 실패를 맛보고 패자부활전에서도 낙오된 사람들이었다. 성정이 단순하고 거칠었으나, 하나같이 순수했다. 임금은 높은 편이었으나 많은 이가 낭비벽이 있고, 합리적인 생활관리 능력이 부족해서 일상이 무질서하고 돈을 모으지 못했다. 그런가 하면, 일 자체가 단순반복적이고, 성취나 자기쇄신의 기회가 전무하다보니 노동과정에서 소외를 느끼기 십상이다. 게다가 매주 8시간씩 시간대를 옮겨가는 3교대제여서 일상적 사회생활에 지장이 크고 불안정했다. 예전에 비해 크게 나아졌다고는 하나 이러저러한 이유로 평균적 노동자 생활의 질은 그리 높지 않았고, 중산계급과의 사회문화적인 간격은 크게 좁혀지지 않았다.

내 파트너인 베버 씨는 여느 노동자들과 많이 달랐다. 2차 대전에 참전했던 구세대인데, 성실하고 사려깊은 분이었다. 휴식시간이면 조용한 말투로 자신의 미래계획을 말하곤 했는데, 아직도 기억나는 대목이 있다.

“헤르(Herr) 안, 나는 생사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사람이네. 그런데 살아오면서 이렇게 좋은 세상이 오리라고는 꿈꾸지 못했네. 내년에 퇴직하면 연금이 제법 되네. 그간 저축한 것도 얼마 되고... 그래서 내 처와 자주 해외여행을 떠날 생각이네. 혹시 아나, 한국에서 자네와 만나게 될지.”

제철공장의 막 노동자가 은퇴 후 부부 해외여행을 계획하다니. 당시 우리의 형편과 비교할 때, 정말 꿈같은 얘기였다. 1960년대 후반, 유럽은 산업사회의 절정에서 보편적 복지국가를 이미 구가하고 있었다.

  V.
당초 나는 일을 끝내고 회장님을 찾아뵈려고 생각했다. 일도 시작하기도 전에 그를 찾아갔다가 혹 그가 내가 원치 않는 호의를 베풀고 나서면 어쩔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런데 공장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다섯 주 째 되던 어느 날, 우리 작업장 너구리 반장이 심각한 얼굴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곤 귓속말로 “웬일이야, 우리 최고 보스가 자네를 찾으니” 하는 게 아닌가.

반장은 자기 차로 나를 회장실로 안내하며, 흥분된 어조로 도대체 왜 그가 나를 찾는지 계속 캐물었다. 내가 모르겠다고 대답하니 그럴 리가 없다며 연상 다그쳤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혹 작업장 근로조건이 어떠냐고 물으시면 꼭 좋게 말씀드려야 한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내가 만난 회장님은 지적이면서도 인품이 있어 보이는 좋은 인상의 신사였다. 그는 반갑게 나를 맞으며, 당신을 일찍 만나고 싶었는데 연락이 없어 뒤늦게 수소문해서 불러들였노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얘기를 풀어 놓았다.

그에 따르면, 현재 남한과 북한이 각각 큰 규모의 제철공장의 건립을 모색하는데, 모두 Voest에게 협력 요청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Voest는 형편상 두 곳을 다 도울 수는 없고 그 중 한 곳을 택해야 하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고심하고 있던 중, 내가 제 발로 찾아오겠다고 편지를 해서 나 만나기를 학수고대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내게서 아무 연락이 없어 방학 중 아르바이트를 포기했거니 생각하고, 그 동안 서울과 평양을 급히 다녀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쪽도 썩 내키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고심 중인데, 혹시 당신이 이미 와서 일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어제부터 당신을 찾아 나섰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당신은 공부하는 젊은이이니 신뢰가 간다며, 허심탄회하게 얘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와 한 시간 너머 대화를 나눴다. 그는 그때 그가 이미 평양에 대해서는 정나미가 떨어져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가 말했던 일화 중 하나는, 평양의 큰 광장 옆에 한 호텔에 머물었는데 아침에 나팔소리가 한번 나니 순식간에 그 광장이 꽉 찰 정도의 많은 군중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도 나치 시대를 경험했는데 나치의 동원능력은 김일성에 비하면 어린아이 수준이라고 말했다. 내가 느끼기에는, 대체로 북한은 그의 마음에서 이미 제외된 듯 했고, 이제 남한을 파트너로 삼을 것인가 여부로 저울질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한국의 정치정세가 불안해서 꺼려진다는 얘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 박정희 정부가 권위주의 정권인 것은 사실이지만, 정부의 산업화 의지가 강렬하고 국민의 수준이 높아서 Voest가 기술과 재정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주면 빠른 시간 내에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릴 것이라고 열심히 설명했다. 그는 시종 진지한 얼굴로 경청하며, 간혹 질문을 던졌다. 그 중 기억이 나는 것이, 한국의 젊은이는 대체로 정권에 저항하는 입장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당신이 정부가 추진하는 사업에 우호적인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나는 나 자신도 체제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크지만, 이 사업은 정권 차원보다는 국가적, 국민적 사업이고 이 일이 한국산업화의 동력을 마련하는데 필요불가결한 사업이라 그렇다고 답하면서, 간곡하게 도움을 청했다. 끝내 그는 결정적인 언급을 피했다. 다만 매우 유익한 만남이었다고 말하며 작별을 고했다. 회장실을 나오는데 긴장했던 탓인지, 내 손안에 땀이 흠뻑 고였 있었다.

그 이듬해인 1968년 포항제철은 고고의 성을 울렸고, 이후 포철이 제 궤도에 오르기까지, 또 그 이후 발전과정에서도 Voest의 큰 도움을 받았다. Voest가 한국을 파트너로 선택하는데 나와 회장님과의 대화가 얼마나 보탬이 되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20대 후반의 젊은이가, 매우 중요한 시기에, 세계적인 제철회사의 CEO와 만나 내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는 것은 나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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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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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강렬 2010.10.11 09:48 Address Modify/Delete Reply

    대학 재학시절이 생각납니다. 복지행정시간 교수님께서 오스트리아 유학시절 여름방학을 제철소에서 아르바이를 했던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오늘 글을 읽으니 훨씬 생생합니다. 저는 커리어 컨설팅 때문에 요즘 대학생들을 가끔 만납니다만 교수님의 그때처럼 그런 순수한 열정을 가진 이들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세월이 변했다고 세월탓만 해야할지요?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2. 서남수 2010.10.11 17:32 Address Modify/Delete Reply

    그 힘든 제철소에서 아르바이트할 생각을 하신 부총리님이나, 그 우연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낯선 나라에서 온 유학생과 애써 만나신 그 회장님이나 참 대단하신 분들입니다. 논리적으로는 어떻게 그런 우연이 있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되는 그 만남과 그 대화는 큰 인연의 작은 시작이 아니었을까요? 생각해 보면 인연에 의한 것이 아닌 일이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아마도 지나친 신비주의겠지요?

  3. rolex replica 2013.02.17 18:14 Address Modify/Delete Reply

    우리 모두가해야 둘 다 좋은 아이디어와 개념, 훌륭한 정보와 영감의 많은, 매우 좋은 소식입니다.

I.

1995년 말 내가 교육부장관으로 발령이 났을 때, 무척 당황하고 아득한 심경이었다. 전혀 예상치도, 아니 꿈꾸지도 않았던 상황이었다. 개각 발표 1시간 10분 전 쯤, 김영삼 대통령의 전화를 받았을 때, “제가 저를 잘 압니다. 전혀 그 직책에 합당한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누누이 말씀을 드렸다. 그냥 인사치레로 한 게 아니라, 진심을 토로한 말이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궁지에서 빠져 나오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수락하고 말았다.

그날 늦은 오후 시간에 얼마 전 까지 정부 고위직에 있었던 가까운 친구 한명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는 내일 임명장을 받으려면 검거나 짙은 곤색의 정장이 필요한 데 그런 양복이 있느냐고 내게 물었다. 내 옷은 모두가 밝은 계통의 옷뿐이라고 답하니, 그는 “그럴 줄 알았다”라며 빨리 하나 준비하라고 했다. 나는 급히 내 처와 함께 L 백화점으로 달려가, 문 닫기 직전에 가까스로 기성복 검은 정장을 갖출 수 있었다.

마음의 준비 없이 시작한 일이라 벅차고 힘겨웠다. 자신감도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던 얼마 후 한국행정학회 전임 회장단 모임이 있어 위로도 받을 겸 거기 참석했다. 많은 분들이 축하의 말씀을 건넸다. 그런데 두 분의 격려가 특히 마음에 와 닿았다. 한 분은 이한빈 교수님이셨다. 한 때 경제부총리를 역임하기고 학계, 관계에서 두루 큰 족적을 남기신 분이다. 이 교수님은, “안 교수, 잘 하실 거야. 안 교수는 철학이 있는 분이잖아. 장관은 철학이 있는 사람이 해야 돼, 그래서 나는 믿어”라고 격려하셨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주제넘게 “아, 나에게도 그런 자질이 있을지 모르지, 저 양반이 빈 말 하실 분은 아니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힘이 솟았다.

연구실 선배인 고려대 백완기 교수님도 내게 크게 힘을 보태 주셨다. “내가 안교수를 오죽 잘 알아, 사심이 없잖아. 누구에게 인사청탁이나 뇌물은 절대 받지 않을 테니까. 그것만으로도 장관 깜이야. 잘 하실거야”라는 말씀이었다. 그러자, 또 주제넘게 “아, 그 점은 내가 자신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 나는 학계의 선배와 동료들이 내게 보낸 신뢰와 격려에 크게 고무가 되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힘 내, 너도 할 수 있어”라고 다짐했다.

II.

1997년 8월 퇴임했다. 퇴임 직후, 교육부 출입기자들이 고맙게도 송별연을 마련하고 감사패까지 해 주었다. 그러면서, “장관님, 기자들이 제 돈 내서 퇴임하는 장관 밥 사주는 예는 유례없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돼요.” 라고 말했다. 분위기는 매우 화기애애했다. 그러던 중, 야당지의 한 기자가 말했다. “장관님, 제자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어 제가 얼마나 고전한지 아세요. 냉혈한으로 이름 난 우리 부장님도, 저만 만나면, ‘우리 교수님 도와 드리라’니 저는 뭐가 되지요”라고 볼 맨 소리를 했다. 그러자 다른 기자들도 비슷한 사연을 펼치면서 내 제자들 등살에 고생했다는 말로 한마디 씩 거들었다. 재임 중 언론이 비교적 내게 호의적이었던 데는 이처럼 나도 모르게 커튼 뒤에서 나를 도왔던 많은 이들의 성원이 있었음으로 뒤늦게 깨달았다.

장관직을 수행하는 동안에는 사생활은 없었다. 가족이나 친지를 만나 안락한 분위기에서 여유롭게 대화를 나눈 기억이 별로 없다. 그래서 많은 이들을 서운하게 했다. 그런데 장관직을 마치고 나와 가까운 분들과 자리를 같이 하면서, 새롭게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놀랐던 것은 장관으로 있으면서, 본의 아니게 많은 지인들을 크게 괴롭혔다는 것이다.

이들이 다투어 하는 말인 즉, “내가 당신과 가까운 걸 세상이 다 알잖아. 그러니 나를 통해 인사청탁이 꽤나 많이 들어왔어. 그거 뿌리치느냐 얼마나 고생한 줄 아나. 그 때 마다, 나는 ‘그 친구 성질이 더러워서 부탁하면 분명 불이익을 받을 게 뻔하니 아예 그런 생각일랑 하지 말라’ 고 한마디로 잘랐지, 당신 때문에 고생한 것, 말도 마”였다. 어떤 이는, 나를 한번 만나도록 주선해 달라고 간청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혼났다는 얘기도 했다. 이들의 곤궁한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실제로 재임 중 코빼기 한 번도 못 보면서 내 그림자 뒤에서 갖은 고생만 했다는 것이다. 나는 백배 사죄하며 이 분들의 속 깊은 배려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같이 유학을 했던 여자 선배 한 분 말씀에 나는 잠시 숙연함을 느꼈다. 얘기인 즉, “안 교수가 장관을 그만 두시니 이제 제가 발을 뻗고 자겠어요. 마치 어린 아이 물가에 내 보낸 것처럼 어찌나 불안했던지. 정말 이제 사는 것 같아요” 였다.

대과(大過)없이 두 번 씩 장관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처럼 커튼 뒤에서 마음 졸이며 나를 응원해 주신, 많은 분들의 따듯한 격려와 깊은 배려 덕택이었음을 다시 느낀다. 나도 모르게 나와 한 배에 동승해서, 거친 풍랑 속에서 흔들리는 나를 굳게 지켜 주셨던 이들 많은 분들에게 진심으로 송구스러움과 고마움을 함께 전한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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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09년 12월 5일 <사회정책연구회>에서 발표한 내용의 요약본이다. 
  학자로 산 내 생애 40년을 성찰적으로 되 돌아 보았다.


‘하고 싶은 일’, ‘잘하는 일’, 그리고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이 하나로 겹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어려서부터 ‘글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워낙 다른 재주가 없어 그 나마 공부 잘하는 것이 내 딴에는 장기였다. 또 학자로 산다는 것에 항상 의미를 부여했고 자부심을 느껴 왔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스스로 무척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학자, 특히 사회과학자는 자신의 생활철학이 어쩔 수 없이 공부 속에 녹아 들어간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내 기본적 생각이 무엇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를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지난 40년간 격동의 생활 속에서 학자로 살면서 중요하게 여겼던 가치들을 성찰적으로 되새겨 볼 때, 아래에 몇 가지로 집약된다.

 

1. 자유와 평등의 변증법

나는 스스로 이념적으로 <중도개혁자>를 자처했다. 자유나 평등에 극단적으로 몰입되기 보다는 양자가 변증법적으로 지양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급진적 변혁보다는 점진적 개혁을 지지했고, 이념적 대결대신에 상생과 사회적 합의를 추구했다. 경제성장과 사회복지의 선순환을 지향하고, 그 길이 어렵지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교육영역에서도 정권의 수명을 뛰어 넘는 중. 장기적 교육비전을 마련하려고 애썼다. 영재교육과 대안교육이 다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자리나 현실적 이해 때문에 이러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내가 지향했던 우선적 가치는 <인간화>가 아니었던가 생각한다.

크게 보아 체제 안에 있었지만, 언제나 <핵심>이 아닌 <주변>에 터를 정하고 비판의 날을 세웠다. 대체로 <unattached within>의 입장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중도주의자의 <고독>을 반추하며, 시대의 도도한 흐름과는 얼마간 다른 소리를 해 왔다.

 

2. 자아준거성

사회과학은 그 사회의 토양과 문화를 반영하는 학문영역이다. 따라서 사회과학자들은 그 사회의 필요를 발굴하고 또 그에 슬기롭게 대응해야 한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한국 땅에서 <미국학문>을 하고, 자신들이 학문적으로 <첨단>에 있다고 자부한다. 교과과정도 미국사람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마련한 것을 그대로 옮겨 놓고 그것을 가르치며 스스로 <선구적>이라고 자부한다. 나는 사회과학의 <자아준거성>(自我準據性>을 필요 있을 때 마다 주장했다. 나는 그 때 그 때 한국 사회가 목마르게 필요로 하는 분야가 무엇인지를 찾아 보려고 애썼고, 그 분야에 대한 개척적 연구를 많이 했다. 나의 학문적 접근은 대체로 <역사. 비교론적> 접근이었다. 주제를 역사적으로 탐구하고, 아울러 비교론적 입장에서 다른 나라(혹은 국가군)와 비교하는, 씨줄-날줄의 교직(交織)을 통한 입체적 연구방법이 그것이다.

 

3. 학문간 벽 허물기

실제 세상(사회현상)은 모든 게 한데 얽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움직이는데, 학문이 자기 필요에 의해 전공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나누고 칸막이까지 했다. 나는 비교적 전공이나 학과의 벽을 넘어 학자생활을 해 왔다. 정치학자이며, 행정학자이고, 정치사회학이나 정치경제학도 남의 영역이라고 느껴 보지 않았다. 그 때 그 때 몰입했던 분야도 다양하고, 손댔던 분야도 꽤나 넓었다. 그러다 보니 하고, 학문적으로는 한 우물만 깊게 파는 경우 보다 에너지 손실이 컸다. 그러나 나는 그런 식의 공부가 재밌고, 행복했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교수충원에서 흔히 대두되는 <순혈주의>(학사, 석사, 박사 모두를 같은 전공으로 해야 한다는 식의)를 탐탐치 않게 생각한다.

 

4. 이론과 실천의 접목

나는 정치학과 행정학, 정책학을 함께 공부 하면서, 이론과 실천을 엮어 보는데 많은 관심을 쏟았다. 원리추구적 순수학문인 정치학과 실천위주의 행정학을 접목하는 일은 내게 역동적이며, 살아있는 학문을 하고 있다는, 그리고 우리의 생활세계를 개선하는데 스스로 한 몫을 하고 있다는 의미를 부여했고, 여기서 오는 박동감, 몰입감, 자부심이 나를 항상 깨워있게 했다. 내가 주저하면서도 정부 일을 두 번 씩 맡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고 본다.

 

5. 권력, , 연고와 거리두기

나는 권력과 돈, 그리고 연고와 거리를 두려고 나름대로 노력을 해 왔다. 두 번이나 장관을 지낸 사람이 권력과 거리를 두었다니 이해가 안 된다고 할지 모르나, 입각 전에 당시 대통령들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고, 정치권과는 어떤 인연도 없었다. 10 여년 동안 주요 일간지에 정치평론을 쓰면서 내 딴에는 언제나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위치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또 정부와 정책을 연구하는 학자이지만 정부 프로젝트는 극력 피했고, 특히 권위주의 시대에는 더욱 그랬다. 학연이나 지연, 혈연 등 연고주의적 네트워크가 우리 사회를 멍들게 하는 주범이라고 여겨 이런 사회관계의 늪에서 스스로를 멀리 하려고 노력했다. 검약을 생활의 모토로 했고, /글과 행위/삶의 양식 간에 괴리를 줄이려고 애 썼다.

 

6 處無爲之行學不言之敎

내 서제에 걸려 있는 액자에 그렇게 쓰여 있다. 靑南 吳濟峯 선생이 내게 내려 주신 글이다. 나는 그 내용을 무척 좋아 한다. 정년 후 설악산 기슭을 찾은 것도 무위자연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학자에게는 정년이 없다>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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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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