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울시 교육청은 이미 1995년 2월부터 특수교육 환경개선을 위해 3만 2천여평 경기고등학교 안 공터 2천 4백여평에 정신지체 장애아를 위한 ‘지애학교(후에 정애학교) 건립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남구청이 삼성동 일대의 주민들의 반대와 환경훼손을 이유로 서울시 교육청과의 사업시행계획협의 요청에 계속 불응하는 바람에, 공사 시작의 삽도 들지 못한 채 갈등은 첨예화, 장기화되고 장애아 부모들의 가슴은 타들어갔다.

  1997년 6월 당시 교육부장관이었던 나는 고심 끝에  K 강남구청장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K 구청장은 나의 경기고등학교 후배였다.

        

         

             K 구청장님

 

  그간 안녕하십니까. 무척 바쁘시리라 생각됩니다. 지난 번 전화통화 이후 소식을 기다리다가 몇 자 글월을 보냅니다.

경기고등학교 부지 내 서울지애학교 설립계획과 연관하여 구청장님께서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으실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러나 잘 아시다시피 서울의 경우 특수학교의 절대부족으로 많은 장애아들이 하루 2-3시간을 통학에 시달리고 있고, 특히 정신지체 장애아의 경우 형편이 더욱 어려워 한마디로 그 정황이 목불인견(目不忍見)입니다. 이런 딱한 사정 때문에 다시 한 번 긍정적인 결정을 하여 주실 것을 간곡히 청합니다.

 

  이미 지난 얘기입니다만 경기고등학교 동창회에서도 몇 차례 특수학교설립에 대해 재고 요청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 때도 제가 마음이 무척 아팠습니다. 당장은 학교부지 내에 특수학교가 설립되면 얼마간 번거롭고 약간의 녹지훼손이 된다는 불리점이 있으나, 강남에 자리 잡은 명문학교 부지 내에 소외된 아동들의 보금자리가 마련된다는 일은 정말 가슴 뿌듯한 일이고, 더욱이 그것이 지닌 상징성 때문에 엄청난 교육적 합의(含意)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역시 경기출신인 지역구 S 의원께도 모교 및 동창회를 함께 찾아가 지애학교 설립을 설득하자고 청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경기출신이 우리 사회의 각 부문에서 많은 기여를 하고 있으나, 우리 사회가 경기고등학교에게 베푼 엄청난 사랑과 기대, 그리고 그 학교 출신들이 누리는 보이지 않는 프리미엄은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경기출신은 평생 동안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심경으로 이 사회에 봉사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간 동창회에서 지애학교 설립을 반대했던 행동은 제가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뒤늦게나마 동창회에서 지애학교 설립을 양해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고맙고 기뻤습니다.

 

  그간 있었던 삼성동 지역주민의 특수학교설립 반대 및 항의방문 등 민원제기는 제가 익히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반대는 이 지역만의 문제가 아닌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꾸준한 토론과 설득, 또 유인 제공 등을 계속하는 경우, 주민들의 반대는 상당히 완화되곤 해 왔습니다. 서울정민학교와 밀알학교가 오랜 갈등과 진통 끝에 좋은 결론을 얻은 것도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희망과 자신감을 불어 넣고 있습니다.

 

  서울지애학교의 경우 사업시행협의를 강남구청에 요청했다는 소식을 듣고 당초에 저는 비교적 낙관을 했습니다. 동창회의 양해도 얻었고, 주민들의 조직적인 민원제기도 많이 수그러졌기 때문에, 구청장님의 긍정적인 결심만 있으면 되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협의요청 후 반년이 가깝도록 아직 이 문제가 풀렸다는 소식이 없고, 들리는 말로는 타 지역에 학교 부지 제공 등 다른 조건제시가 있다는 얘기고 보면 가슴이 먹먹합니다. 물론 구청장님께서 제가 자세히 모르는 구체적 어려움이 많으실 줄 믿고, 직접 이 문제와 더불어 저 보다 더 많은 고민을 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핵심을 피해가며 해결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특수학교가 강남구라는 부촌을 피하고 경기라는 명문을 피해 다른 곳에 자리 잡아야 한다면, 앞으로도 특수학교 설립문제는 우리사회에서 영원히 풀릴 수 없는 사회문제로 남습니다.

 

  제가 장관이 된 후 몇 가지 역점 사업을 벌리고 있는데, 특수교육진흥은 그 중 하나입니다. 우리 국민이 장애인을 가슴의 한 가운데 안지 않는 한, 우리 사회가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해도 우리는 후진국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같은 맥락

에서 강남구민들께도 서울지애학교를 기쁨으로 받아들이시기를 청합니다. 어렵겠지만 구청장님께서도 구민들에게 이해를 간곡히 구하고, 바로 우리들 자제이기도 한 이들 장애아들이 명실상부한 서울 1번지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어려운 청을 드려 미안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경기고등학교 출신이자, 강남구청장이신 청장님께서 용기를 가지고 푸셔야 하는 문제입니다. 좋은 결과를 기다리겠습니다.

 

       不備禮

                                             1997. 6. 30

                                                                  교육부장관 안병영 드림

 

 

                                    III.

  그러나 이후에도 강남구의 협의 불이행이 계속되자, 서울 교육청은 기다리다 못해 그해 10월 사업승인과 업자선정을 마치고 11월 공사를 강행하게 된다. 다음은 1997년 11월 11일(화)일자 국민일보에 게재된 “ ‘지애학교’ 부모의 눈물”이라는 기사내용이다.

 

“ 1997년 11월 10일 오후 11시 정신지체 장애아들을 위한 특수학교인 ‘지애학교’가 들어설 예정인 서울 삼성동 경기고등학교 후문 부근에서는 300여명의 장애아 학부모들이 주민들과 격렬한 몸싸움을 벌였다. 공사를 기다리는 대형 포클레인이 올라타거나 그 앞에 드러누운 채 저항하는 주민들과 장애아들이 다닐 학교 건립을 고대하면서 주민들을 끌어내리는 학부모들의 공방은 1시간여 동안 계속됐고 전경들이 끈질기게 저항하는 주민들은 1명씩 끌어낸 뒤 대형 포클레인이 경기고 담을 부스면서 공사가 시작되자 환호와 욕설이 엇갈려 터져 나왔다.”

 

이러한 역경을 거쳐 2000년 1월 15일 지애학교는 서울정애학교라는 바뀐 이름으로 설립인가를 받아, 같은 해 3월 3일, 23학급 133명의 학생이 시업식과 입학식을 연다. 그리고 5월 17일 개교식을 가졌다.  그날 정애학교 학부모들이 얼마나 많은 눈물을 쏟았을까.

 

 

                                      IV.

  장애아에 대한 사회적 편견 때문에 특수학교의 설립과정에서 거의 예외 없이 위와 유사한 고난의 역정을 겪는다. 구청장에게 보낸 내 편지에서 잠시 언급한 역시 강남구 일원동의 ‘밀알학교’ 역시 주민들의 반대로 건립이 중단되었다가 법정소송까지 가서 가까스로 건립이 이루어져 1997년 3월 개교했다. 개교 후에도 인접도로가 있고 전철역도 가까운 후문을 만들어 놓고도 주민들의 반대로 인해 후문을 사용 못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비단 장애아 학교뿐이 아니었다. 내가 1997년 제도권 교육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대안학교 설립을 추진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노랑머리의 문제아들이 대부분이었던 ‘꼴통학교’인 초기 대안학교를 건립하자면 ‘결사반대’를 외치는 지역주민들과 끈질긴 싸움을 벌려야 했고, 몇 번 퇴짜를 맞아 터를 옮기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런 모진 고난과 역경을 거쳐 1998년 충북 청원군에 어렵사리 개교한 ‘양업고등학교’는 이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교육 롤모델’로 자리 잡아 2013년 전 세계에서 22번째, 아시아 국가 중 첫 번째로 WGI( William Classer International)의 ‘좋은 학교’(Quality School)의 인증을 받았다(조선일보 2015/1/27 참조). 실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2004년 교육인적자원부는 통일부와 힘을 합해 탈북자 청소년들에게 대한민국의 정규교육을 받게 하기 위해 ‘한겨레 고등학교’의 설립을 준비했다. 그 과정에서도 주민들의 반대와 사회적 편견 때문에 상상하기 어려운 가시밭길을 헤쳐야 했다. 원불교 박청수 교무의 주도로 2006년에 개교한 한겨레 학교는 이후 비약적 발전을 거쳐 이제 양질의 교육을 펼치는 모범적 새터민 교육기관으로 우뚝 솟았다. 나는 가끔 “그마져 없었으면, 우리가 사선을 넘어 대한민국의 품에 안긴 새터민들에게 어떻게 얼굴을 들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신기하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그간 건립된 수많은 장애인 학교, 대안학교, 특성화학교 등이 시간과 더불어 지역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서로를 아끼며 잘 번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점차 그 지역의 명소이자 자랑거리로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로 부대끼며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있던 착한 천성, 감정이입 능력이 마치 봄의 숨결처럼 제 힘을 발휘한 게 아닌가 싶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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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양재진 2015.01.30 23:52 Address Modify/Delete Reply

    교수님, 마음 아프네요. 조금씩 전진하긴 하는데, 좀 더 인간애가 바탕이 된 사회를 꿈꿔 봅니다.

  2. 한홍석 2015.02.03 11:37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부총리님!
    안녕하셨습니까?
    비록 퇴임은 하였지만 특수교육의 한 식구로서, 당시에 특수학교 현장에 있었던 한 사람으로서 부총리님의 글을 읽으면서 지난날의 기억들이 되살아나는군요!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인 경기고등학교 터에 특수학교가 생긴다고 할 때 서울의 거의 모든 특수교육인들이 참 좋아했었지요! 당사자인 학부모들의 기쁨은 옛날 경기고등학교에 합격한 아들을 둔 부모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근무하고 있었던 학교의 학부모 중에서 그 학교가 생기면 전학가게 되어 있던 학부모는 자신의 아이가 경기고생이 된 것처럼 좋아하든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 최고의 학교인데 그 학교 동문들이 가만있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습니다. 아니 동문들과 주민들의 반대로 학교건립이 거의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한 이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들려오는 소식은 ‘역시나’ 이었습니다. 동문들이 반대해서 건립이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두들 바삐 움직였습니다. 얼마 후 들려온 소식은 동문회에서 학교설립을 양해하기로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민심은 또 ‘역시나’이었습니다. 역시 경기고 출신들이 의식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번 글을 읽으면서 “정애학교가 경기고 터에 문을 열 수 있게 된 것도 역시 부총리님께서 뒤에 계셨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언젠가, 누군가 ‘근대한국특수교육사’를 쓰게 되면 그 중 특수교육의 발전부분에 부총리님께서 재임 중 계획하시고 추진하셨든 여러 일들이 기록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간 우리나라 특수교육역사를 기록하는 책에는 그렇게 기록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면에서 본 글은 사료적 가치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재임 중 바쁘신 일 많은 중에도 우리 장애학생들의 교육을 위해 자주 특수학교 현장을 방문하셔서 학부모를 만나시고 학생들과 시간을 보내시고 장애시설에서 봉사하시든 모습이 생생합니다. 학부모들을 지역의 특수학교에 초청하셔서 특수교육정책을 설명하시는 것이 아니라 학부모들의 생각을 건의를 경청하시든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리고 조용한 목소리로 설명하시거나 되물어보시든 모습 또한 생생합니다.

    아마도 특수교육 현장 그리고 대안학교 현장에서는 또 다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교육중흥의 햇불을 높이 든 ‘제2의 안병영부총리님’ 같은 선지자적인 교육수장이 나오시길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많이많이 늦었지만 우리 장애학생들과 특수교육 발전을 위해 애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좋은 글 감명 깊게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좋은 자료로서도 잘 간직하겠습니다. 추운 겨울 날씨에 감기조심하시고 내내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I.

  얼마 전 아파트 난방비리와 연관해서 영화배우 김부선씨가 일약 ‘난방투사’로 만인의 입에 회자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 기사를 보는 순간 35년 전 강남 M 아파트에서 내가 몸소 아프게 겪었던 아파트 관리비리 사건이 떠올랐다. 내가 한창 30대말에서 40세 고개를 넘어가던 시점에서 1년 가까이 치열하게 몸으로 부딪히며 악전고투했던 일이라 아직도 기억이 비교적 생생하다. ‘아파트 관리 문제’는 우리나라 전 국민의 약 2/3가 일상 속에서 체험하는 생활사(生活事)이기에 아무도 남의 일처럼 그냥 넘길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처음부터 아파트 난방비리를 세차게 고발했던  ‘김부선’ 씨의 용기에 박수를 치는 입장이었다.

 

 

                               II.

  1979년 초 우리 가족은 서울 강남에 신축한 M 아파트에 입주했다. 처음부터 아파트에 문제가 많았다. 무엇보다 부실공사로 논란이 잦았고, 그 때문에 입주 초기에는 집집마다 하자보수로 정신이 없었다. 입주한 후, 반년이 넘자 인근 다른 아파트에 비해 우리 아파트 관리비가 어처구니없이 많이 나온다는 불평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러면서 아파트 관리사무소를 감독하는 주민 대표기구인 운영위원회가 난방, 쓰레기 수거, 경비 등에 일일이 관여하면서 전횡을 일삼고 이권을 챙겨, 비리, 부정이 많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러나 말만 무성했지 정작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하루하루 살기에 바빴고, 당시 까지만 해도 아직 아파트가 도시의 전형적 주거형태로 자리 잡기 전이라, 주민들도 아파트 관리에 별로 아는 바가 없없었고, 더욱이 누구도 관리 비리에 대처하는 노하우를 갖고 있지 않았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당시 이른바 ‘풀뿌리 민주주의’, ‘조직내 민주주의’ 등 주민자치와 연관된 주제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이 기회에 아파트 주민자치의 실상을 알아보고, 혹 관리 비리가 있다면 그 실체를 파헤쳐 보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그래서 우선 아파트 주민대표 체계를 살펴보았다. 전체가 9개 동인데, 동마다 라인에 따라 5명의 대표가 선출되어 전체 45명이 모이는 대의원 회의가 있고, 그들이 9명의 운영위원을 호선하게 되는데, 이렇게 구성된 운영위원회가 아파트관리사무소를 관리. 감독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알아보니 주민대표기구인 대의원회의는 거의 소집되지 않아 유명무실했고, 실제로 운영위원회가 전권을 행사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운영위원회 모임 날짜를 알아보고 그날 시간에 맞춰 회합장소로 나갔다. 왁자지껄 떠들어 대던 대, 여섯 명의 운영위원들은 의외의 방문객에 아연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누구냐고 묻기에, “주민의 한 사람인데, 아파트 문제에 관심이 있어 방청하러 왔으니, 개의치 마시고 회의 진행하시라”고 말했다. 불쾌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참관인 한 명 앞에서 회의를 진행했다. 아파트 관리규정을 개정하는 안건이었는데, 가뜩이나 유명무실한 아파트 대의원회의를 더 무력화하고 운영위원회의 권한을 강화하자는 내용이었다. 나는 손을 번쩍 들어, 의견 개진을 청했다. 그들은 논란 끝에 내게 말할 기회를 주었다. 나는 이 의안은 아파트 대의원회의에 논의할 얘기지, 운영위원회에서 자의적으로 의결할 사항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며, 주민의 입장에서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했다. 급기야 고성이 오갔고, 끝내 나는 그들에게 회의장에서 밀려 나왔다. 그 때 나는 저들이 ‘나쁜 사람들’이라는 심증을 굳혔고, 이대로 물러서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당시 M 아파트의 주민의 구성을 보면, 대체로 40대 도시 중산층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고도 성장기 한국 사회의 여러 부문에서 상향이동을 하기에 바쁜 한창 나이의 중년들로, 개중에는 공직자, 대기업종사자, 교수/교사, 언론인 등 지식인 계층이 많았다. 그들은 이른 아침 시간에 택시합승으로 한강을 넘어 서울 도심으로 출근을 하고, 밤늦게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하는 피곤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파트 비리 소문이 아무리 무성해도, 실제로 그들이 이 문제로 신경을 쓸 형편이 못되었다. 그렇다고, 당시 집에  아낙들이 오늘 ‘이부선’ 씨처럼 이런 문제로 앞장을 서기에는 조금 이른 시기였다. 이런 빈틈을 타서 아파트 관리비리가 독버섯처럼 크게 만연하고 있었다.

 

   내가 알아보니, 운영위원회의 주축이 되는 ‘3인방’이 있는데, 모두 50세 전후의 나이로 비리경력이 있는 전직 관료, 경찰서 간부, 그리고 가짜 의사라는 것이다. 백수인 이들은 하루 종일 관리사무소 근처에서 맴돌며 크고 작은 아파트 연관 각종 이권에 깊이 관여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구사한다는 것이다. 평판이 무척 나빴지만, 모두 그들을 두려워했다. 그런데 저들을 몰아내자면, 석 달 후에 있을 아파트 대의원선거에서 깨어있는 사람들이 많이 진출해서 운영위원회를 혁신적으로 재구성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M 아파트에 사는 사람 중, 내가 알 만한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다행이 같은 성당에 다니는 교우들이 제법 되었고, 학교 선후배, 한다리 건너 알 만한 사람들도 꽤 있었다. 나는 이들을 이른 아침에 한 사람, 한 사람 찾아 가서, 각동의 라인 대표, 말하자면 줄반장으로 나서달라고 종용했다. 그러면서 “깨어있는 주민만이 아파트를 지킵니다”라고 호소했다. 공감을 피력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개 중에는 괜한 짓을 한다고 비아냥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당시 그 아파트에는 훗날 국회의원, 장관, 대기업 사장이 된 사람들도 꽤 있었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나에게 ‘쓸데없는 일’ 그만 하라고 말렸다. 어떤 이는 아예, “교수가 한가한 직업인 것은 익히 알고 있지만, 이렇게 나서는 저의가 무엇입니까?”라고 내가 무슨 속셈이 있는 것처럼 몰아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석 달을 혼자 강행군을 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우군을 얻었다. 많은 이들이  “앞장을 서지는 못하지만, 이렇게 나서는 분이 계시니 열심히 돕겠습니다”라며 공감과 격려를 보냈다. 이들은 대체로 중학교 교사, 자영업자, 인근 가게 주인 등 소박한 이웃들이었다. ' 안교수'가  단기로 바삐 움직이자, 운영위원회를 장악하고 있는 예의 ‘3인방’도 불철주야 열심히 뛴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III.

  대의원 선거는 우리 편의 압승으로 끝났다. 기억이 확실치 않으나 우리 쪽이 30여명, 그리고 저편이 10명 남짓이었던 것 같다. 이제 M 아파트에 새 아침이 밝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처럼 일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대의원 호선으로 진행되는 운영위원회 선거에서 고정표를 가진 저편 3인방은 모조리 운영위원으로 당선이 되었다. 그래서 결국 나를 포함하는 우리 편 대의원 6명과 대치하게 되었다. ‘3인방 배제’의 목표는 처음부터 어긋난 것이다. 그나마 운영위원장은 중량감 있는 공직 인사 한분을 어렵게 모셨다. 운영위원회 구성만을 보면, 위원장이 아군이고, 머리수로는 6;3 으로 우리 편이 크게 우세했지만, 실제 돌아가는 상황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우리 편 인사들은 모두 직장에 나가는 사람들이고 아파트 문제에 대한 관심은 부수적인데 비해, 저편 인사들은 대부분 백수들이 었고 아파트 문제는 바로 그들의 ‘생존’ 문제였다. 저들은  매사에 온 몸을 던져 저돌적으로 임했다.  정보력이 뛰어 났고, 지역사회의 공사기관 관계자들과 한 통속이었다. 또 하나같이 현하(懸河)의 웅변가들이었고, 밀어붙이기와 모함과 협박에 명수였다. 저들은 운영위원과 대의원들 한명, 한명에게 접근하여 설복, 회유, 협박을 일삼았다. 그러다 보니, 대의원회의나 운영위원회를 열어도 우리 편 인사들의 참석률은 극히 저조한데 비해, 저편 사람들은 전원 참석해서 분위기를 몰아갔다. 시간이 감에 따라 관리사무소 직원들도 저들 편으로 회귀했고, 유명인사인  운영위원장 K씨의 말발도 잘 먹히지 않았다. 그래도 새 운영위원회가 구성된 이후, 난방, 청소, 경비, 관리비회계 등 제 문제를 공적 토론의 마당으로 끌어 들여 과거에 일상화되었던 비리와 부정은 크게 줄어들었다.

 

   이권과 연관해서 저들의 몫이 사라지자, 문제의 ‘3인방’은 상황의 반전을 위해 강수를 두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와 운영위원장을 정조준하고 갖가지 치졸한 방법을 다 동원해서 비방과 모함을 하기 시작 했다. 안 교수는 여자문제가 매우 복잡하다며 그럴듯한 스토리까지 만들어 소문을 내는가 하면, 운영위원장 K씨는 불법 토지매입으로 문제가 있다고 언론에 투서까지 했다. 나는 미동(微動)도 하지 않았고, 내 처는 " '여자관계계’라니 사람을 과대평가해도 유분수지!" 라고 대응했다. 하지만  공직자인 K씨는 매우 힘들어했다. 급기야 우리 집에 테러위협 전화가 빈번하게 걸려 왔다.

 

   그러던 중, 하루는 운영위원장 K씨가 나를 보자고 해서 만났더니, “ 안 교수님, 어쩔 수 없습니다. 저들과 타협을 합시다. 몇가지 이권 중 일부라도 저들에게 내 줍시다. 그러지 않고는 우리가 더 버틸 수가 없습니다. 이게 현실입니다”라는 게 아닌가. 나는 펄쩍 뛰면서, “안됩니다. 저들은 ‘절대악’입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물러나다니요. 절대 그럴 수는 없읍니다.조금만 더 참으시면 우리가 분명 이깁니다”라고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그랬더니 그 분은 나를 물끄러미 처다 보더니, “안 교수님, 여기서 명예혁명을 하자는 겁니까. 가능한 일을 시도하십시오. 이제 우리 편이 몇 명 남지 않았습니다. 안 교수님이 계속 이러시면, 미안하지만, 저는 더 이상 이 직책을 맡을 수는 없습니다”며 사의를 표했다. 그 때 그가 왜 '명예혁명' 운운 했는지, 지금도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나를 현실을 모르는 강경론자로 치부했다. 훗날 그는 정계입문, 국회의원 등을 지냈다.

 

   K 운영위원장의 사퇴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위원장이 공석인 가운데, 대의원회의나,운영위원회를 열어도 저들이 더 많이 참석했다. 실질적으로 주도권이 저편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울화가 치밀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심한 스트레스로 시달리면서 나는 위통으로 매일 배를 안고 다녔고, 골치가 뻐개지는 듯 아파 생전처음 신경정신과 병원을 찾기 까지 했다. 무엇보다, 이제 ‘혼자 남았다’라는 절대고독감이 무섭게 엄습했다.

 

  나는 마침내 ‘풀뿌리’에게 매달려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민들에게 상황을 바르게 알리고 힘을 뫃아 아파트를 지키자는 마지막 호소를 하기 위해, M 아파트 역사상 처음으로 주민총회를 소집했다. 큰 강당에 나는 일찍 나가 마이크를 확보했다. 그리고 우리 편 몇 사람이 나를 에워쌌다. 시간이 가까워지자 주민들이 한명한명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웬걸 참가자 대부분이 아파트 부인네들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너나없이 아파트 문제에 관심은 지대한데, 워낙 복잡하고 시끄러우니 걱정이 되어 남편은 집에 아껴두고 부인들 스스로가 나왔다는 것이었다. 한발 뒤늦게 저편 사람들이 나타났다. 십 여명이 바삐 우리 편 주위로 몰려와 씩씩거리며 마이크에 접근하려고 거칠게 우리 쪽 사람들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나는 예정시간이 되자마자, 마이크를 잡고 그간의 진행사항을 빠르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 딴에는 빠르게 말한다고 했지만, 내 말투가 워낙 느려 몇 마디 하기도 전에 저편 사람들이 거센 파도처럼 내 가까이 밀어 닥쳤다. 나는 마이크를 든 채 몸을 조금씩 이동해 그들과 거리를 만들어 가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사태가 워낙 다급하니 내 말도 점차 속도가 빨라지고 격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저편 사람들이 “저놈, 죽여라” 외치며 일제히 총공세를 취하며 거칠게 몰려들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이었다. 삽시간에 나를 에워쌌던 몇 명 안 되는 우리 편 사람들의 인간사슬이 무너졌다. 나는 황급히 그들의 벌거벗은 폭력을 피해 강당 한가운데로 몸을 피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저편 사람들이 나를 잡아채기 직전에 강당에 모여 있던 수많은 부인들이 몇 겹으로 나를 에워싸는 게 아닌가. 삽시간에 연약한 부인네들로 새로운 인간사슬이 형성되자, 저들도 망연자실,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아수라장에서 그들은 마이크를 손에 넣었으나, 만천하에 정당성을 잃은 그들에게 마이크는 이제 아무 소용이 없는 물건이었다.

 

  뒤에 들리는 얘기로, 동네 부인들은 그냥 놓아두었다가는 ‘착한(?)’ 안교수가 악인들에게 그냥 맞아 죽을 것 같아 부지불식간에 나를 에워쌌다는 것이다.

 

 

                                  IV.

  그 며칠 후, 나는 일본에 무슨 회의가 있어 2박 3일로 일본을 다녀왔다. 그런데 돌아 와보니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래서 나는 저녁을 마친 후, 내 처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따져 물었다. 그랬더니 내 처가 그 사이에 “아파트를 팔았다”는 것이었다.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그게 무슨 소리냐고 다그쳤더니, “하도 힘들어서 부모님께 그간의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아버님이 오셔서 파격적으로 싼값으로 아파트를 내놓으셨고, 아파트는 그날로 팔렸다”는 것이다. 나는 펄쩍 펄쩍 뛰며, “아파트가 이 지경인데 내가 어디를 가. 이제 사람들이 내가 겁이 나서 도망을 간다고 할 것 아니야”며 야단법석을 했다. 그랬더니, 내 처가, “동네 부인들이 다 나 보고 잘했다고 해. 그냥 놔두면 안 교수 제 명에 죽지 못한 데” “당신 탓 할 사람 한명도 없어. 다 미안해 해.”라고 말했다.

 

  나는 내처가 나 몰래 아파트를 판 데 대해, 화가 치밀었지만, 마음의 다른 구석에서는 “이제 살았구나”라는 안도의 한 숨이 나왔다. 그러면서 지난 10개월 동안의 갖가지 사건이 주마등처럼 뇌리에 스쳤다. 그날 밤 나는 실로 오랜만에 푸근하고 긴 잠을 잤다.

 

   우리가 이사 가기 전 날 밤, 30여 평짜리 우리 집 거실에 발 디딜 틈도 없게 많은 주민들이 우리를 찾아와 헤어짐을 아쉬워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제대로 돕지 못해 미안하다며 떠나는 우리를 위로했다. 한편 그 날 밤, <3인방>을 비롯한 저편 무리들은 관리사무소를 빌려 밤새 술 파티를 벌리며, 자신들의 무혈입성을 자축했다는 후문이다.

 

 

                                     V.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일이 있은 후, 1년 뒤 도하 신문에는 강남의 M 아파트에서 “1억이 넘는 아파트 사상 최대, 최악의 부정사기 사건”이 터졌다고 크게 보도되었다.

 

  나는 그 때 “안 형! 속는 셈치고 아파트 관리비 몇 푼 더 내지. 그거 바로 잡겠다고 그 고생을 해”라며, 내 걱정을 했던 아파트 지인들의 얼굴이 하나, 하나 떠올랐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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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용석 2015.01.04 22:38 Address Modify/Delete Reply

    아버님, 김부선이에요.

  2. 양재진 2015.01.31 00:37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저도 2003~5년에 비슷한 경험을 했네요. 지금 사는 700세대 아파트의 초대 입주민대표를 했었는데, 주상복합인지라 상가분들과 운영위원회를 함께 꾸려야 했지요. 그런데 상가협의회 사람들과 부딪치는 일이 많았습니다. 애들 교육을 우선시하고 삶의 터전을 만들고자하는 아파트주민들과 임대로 들어와 수익을 내야하는 상가분들과는 이해상충이 많았어요. 저희 입주민 대표들을 골탕먹이려고 횡령인가 배임인가 뭐했다고 형사고발도 하고, 그 덕에 조사받으러 경찰서도 다녀오고 그랬었지요. 너무나도 상식적인 대화도 안통했고, 우리사회에서는 눈에는 눈으로 맞대응하고 소위 지랄을 떨어야 뭔가 먹히는 것을 깨닫기도 했지요. 결국에 상가 리더들이 당시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던 '바다이야기'라는 빠징코같은 불법오락장을 들여 오려고 하다가, 주민들 (여기서도 주력은 아줌마 부대였지요)이 데모하고 실력행사를 해서 쫒아낸 경험이 있습니다. 문제가 된 상가리더들이 나가고 후임 입주민대표들이 노력하니 조금 상식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지금은 정부로부터 깨끗한 아파트로 모범표창까지 받고 그럽니다. 다시 돌아가서 입주자대표 할 거냐 그러면, No입니다. 너무 힘들었었어요. 그래도 한가지 좋은 건, 그 때 같이 고생했던 이웃들하고 동지애를 느끼는 친구들이 되어 편히 술한잔하고 여행도 같이 가는 사이가 된 점입니다. 70년대보다는 세상이 나아지긴 했나 봅니다.

  3. 현강 2015.01.31 11:08 Address Modify/Delete Reply

    양박사도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은 전혀 몰랐네.
    나도 왠만해서는 이런 저런 일에 끼어 들지 않는데, 살다보면 본의아니게 관여하게 되고
    그러다가 혹독한 대가를 치루게 되네. 우리 사회가 너무 눈앞에 이익에 집착하고, 공동선에
    대한 관심과 의식이 박약한게 문젤세. 작년에 우리 동네 '산립훼손'의 경우도, 훼손반대 서명을
    했던 대다수의 동네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훼손 지지로 돌아 갈 때는 인간성에 대한 회의를
    느낄 수 밖에 없었네. "아니, 세상에 어떻게 그럴수가"라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니
    아예 이곣을 뜨고 싶은 심경 뿐이었네.
    서울이 지겨워서 '모두 잊고 살자'고 이곳에 왔는데, 불의가 눈앞에 보이니 그럴 수도 없어,
    또 관여하게 되니...언제까지 이래야 할지. 걱정이네

  4. 양재진 2015.02.03 15:59 Address Modify/Delete Reply

    교수님, 그래도 결과들은 다 나쁘지만은 않으니, 다행이에요. 건강한 숲속에서 사모님하고 오래오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세요.

                                   I.

   2004년 4월, 에이펙 교육부장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칠레 산디아고에 가는 길에 나는 일본에 들려 가와지마 일본 문부과학상과 만났다. 교과서 문제 등 한일 간에 여러 가지 난제가 얽혀있었기에 소통을 위해 내가 나종일 주일대사에게 부탁해서 마련된 자리였다. 그런데 가와지마 장관은 나를 보자, 대뜸 “당신이 1997년에 한국에 초등영어 교육을 도입한 장본인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정말 대단한 일을 했다. 일본에서도 같은 시기에 초등영어 시행이 치열한 사회적 쟁점이었는데, 좌고우면하다가 끝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뒤로 미뤘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초등영어를 도입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화 경쟁에서 크게 실기(失期)했다. 천추의 한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얘기를 들으며, 초등영어 출범 전후를 되돌아보았다. 우리는 1995년 이후, 1997년 3월을 목표로 초등영어 실시를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초등영어 도입을 위해 막판 스퍼트를 하고 있었다. 준비 정도만 가지고 따진다면, 일본이 우리보다 한발 앞섰다. 그러나 워낙 세심하고, 조심스러운 일본이지라, 이리 살피고 저리 재다가 끝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시행을 연기했다. 당시 한국의 상황도 무척 복잡했다. 사회적 논란이 격화되면서 우려의 분위기가 팽배해서, 청와대, 당, 정 어디에서도 내 등을 떠미는 아무도 없었다. 당시 내 머리에서는 두 가지 생각이 맴돌았다. 하나는 “지금 미루면 자칫 아주 늦어질 텐데, 그 역사적 책임은 누가 감당할 것인가”라는 보다 근본적 우려와 다른 하나는 “이게 실패하면 오로지 내 책임이 될 터인데, 일단 한발 늦춰볼까”라는 기회주의적 생각이 그것이었다. 오랜 고뇌 끝에 얼마간 무리수인 줄 말면서도, 예정대로 1997년 첫 학기에 초등영어 교육을 시행한다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결단을 내렸다. 마지막 결심의 순간에 나는 무척 외롭고 힘들었다. 당시의 상황을 복기(復棋)한다.

 

                                   II

  우리나라에서 영어교육의 필요성이 강조되면서 1982년부터 초등학교 특별활동시간에 희망자 중심으로 영어교육을 실시하여 왔다. 그러는 가운데 초등영어교사연구협의회가 조직, 운영되는 등 영어교육에 대한 상당한 경험이 축적되었고, 해마다 특별활동 시간에 영어교육을 실시하는 학교가 늘어났다. 1992년부터 각 시. 도 교육청에서 교사 영어연수를 실시하여, 1995년 말을 기준으로 9,461명의 특활 영어교사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초등학교에서 특별활동이나 방과 후 교육활동시간에 학생의 희망에 따라 영어교육을 실시하였으므로, 대다수 학생에게 교육의 혜택을 주지 못하였고, 영어교육에 대한 학부모와 학생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추진위원회가 1995년 2월 24일 대통령에게 세계화 추진을 위하여 외국어 교육의 강화 필요성을 보고했다. 특히 이미 세계어로 자리 잡고 있는 영어 교육을 초등학교에서 실시할 것을 강력히 건의하였다. 그러면서 지금까지의 단어, 문법 중심 외국어 교육으로부터 의사소통 중심의 교육으로의 일대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같은 해 3월 15일, 교육부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점진적으로 영어교육 실시계획>을 확정하였다.

 

  그런 가운데 1995년 5월 31일, 대통령 자문기구인 교육개혁위원회가 제 1차 교육개혁과제로 초등학교 영어교육 실시에 역점을 두어 외국어 교육의 강화를 대통령께 보고하였다. 교육부는 이제 초등영어 시행은 지상명령이라고 생각하고, 발 빠르게 대응했다. 같은 해 6월 27일 초등학교 영어 교육과정 최종시안을 작성하고, 이후 심도 있는 교육과정 심의를 거쳐 그해 11월 1일, 초등학교 교육과정 부분개정 고시를 하기에 이른다. 여기까지는 비교적 무난한 흐름이었다.

 

  참고로 1995년 당시 여론조사를 보면, 영어를 정규교과로 찬성하는 시민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 비율이 증가추세에 있었다.

-코리아 리서치(‘95,2) : 정규교과로 찬성 68%

-한국교육개발원(‘95,5): 정규교과로 찬성 80%

 

  바로 그 무렵인 1995년 12월에 필자가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에 임명된다. 당시 대체적 여론은 초등영어 도입에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실제 정책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이해관계 집단 및 여론주도 집단들의 입장은 보다 다양하고. 복잡했다. 그 때 이후 1997년 3월 초등학교 영어 교육이 실시하기까지, 사안의 중요성 때문에 주요 이해당사자인 교육부, 국회, 교육청, 학원, 출판사, 학부모 및 교육전문가 간에 매우 복잡하고 역동적인 상호작용이 전개된다. 그 과정에서 치열한 갈등과 공방, 그리고 설득과 조정이 거듭된다.

그런 와중에서도 1996년에 들어서자, 특별활동 영어교육 실시학교는 5,370교(전체의 95.2%)로 늘었고, 방과 후 상설 영어반 운영은 3,960교(전체의 70.2%)에 이르렀다.

 

                                           III.

  필자는 초등영어교육은 세계화 추세에 비추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시대적 과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초등학교 3학년을 대상으로 1997년 3월부터 예정대로 실시해야 한다는 확고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1996년 중반에 접어들면서 초등 영어교육 실시 여부를 둘러싸고 사회적 논쟁이 격화되었고, 그해 후반 특히 10월경에는 그 갈등이 절정에 이른다.

  크게 보아 초등학교 영어교육의 도입을 반대하거나, 그 실시를 늦추자는 쪽은 민족주의적(내지 국수주의적) 성향이 강한 일부 국회의원 및 정치인을 비롯하여, 일부 언론, 일부 국어학계와 일부 학원 및 일부 교육계인사, 그리고 일부 학부모들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반대파와 유보파로 나뉜다. 반대파는 대체로 어려서부터 영어를 가르치면, 작금의 과도한 서양화, 미국화의 격류 속에서 우리말과 글, 그리고 우리 고유의 문화를 지키기가 더 어려워 질 것이라는 점을 강하게 부각시켰다. 거기에는 반미정서도 한 몫을 했고, 그러다 보니 반대파 중에는 진보진영 인사들이 많았다. 한편 유보파는 초등영어 교육은 필요하나, 아직 준비가 충분치 못하므로 2, 3년 더 연기해야 마땅하다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또한 초등영어 실시가 가시권에 들어오면서, 조기영어 열풍이 몰아쳐서 학원가를 비롯하여 심지어는 일부 유치원에 까지 영어과외를 하는 등 그  부작용이 크다는 점을 지적하며, 학부모들의 사교육비 부담이 크게 늘고 있다는 점을 심각한 현실적 문제로 제기하고 나섰다.

  한편, 초등영어교육을 찬성하는 측은, 그 시행을 앞장서서 추진하는 교육부를 비롯하여 교육개혁위원회, 교육청 및 일선 교육계, 그리고 다수의 학부모, 그리고 세계화의 추세에 민감한 시민들이었다. 찬성 측의 논지는 세계화, 정보화 시대에 이미 국제공용어, 세계어가 되어버린 영어의 조기교육을 더 이상 늦출 수 없다는 입장을 피력하면서, 세계의 대부분의 국가들, 특히 모국어 사랑에 가장 앞장서는 프랑스조차도 이미 오래 전부터 초등학교에서 영어교육을 시작했고, 중국, 태국 등도 초등영어 교육을 시작했다는 점을 내세웠다. 그러나 발을 동동 구르는 교육부를 제외하면 대체로 찬성하는 측은 침묵하는 편이었고, 기껏 입을 열어도 무척 소극적이었다. 그러니 교육부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 우군의 숫자가 많은데 그 세력이 조직화되어 있지 못했고, 오히려 언론 등에서는 반대와 유보의 입장만 강하게 부각시키는 형국이어서 계속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감에 따라 초등영어교육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세력 중 적지 않은 수가 유보 쪽으로 돌아섰다. 그러다 보니 점차 <찬성 대 유보> 간의 대결양상이 두드러졌다. 유보하자는 쪽에서는 보다 착실히 준비해서 신중하게 영어교육을 시행하자며, 이를 반대하는 것은 명분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또한 교육부의 강행 태세는 신자유주의의 이념적 공세 내지 무분별한 성과주의라고 공격하며, 심지어는 조기 영어교육기관의 로비에 포획되었기 때문이라는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국회 교육위원회의 김한길, 이수인, 정희경 등 몇몇 의원들의 반대는 매우 치열했다. 특히 초등영어 도입을 앞장서서 반대했던 김한길 의원은 당시 그의 교육위원회 질의의 대부분을 초등영어반대에 할애하면서, 유아영어교육의 실태, 교육일선의 준비부족, 교재의 졸속제작 우려 등의 문제점을 고발하는데 앞장을 섰고, 그것이 언론에 크게 보도되곤 했다.

 

  장관인 필자는 교육부는 초등영어 교육 실시를 위한 준비가 충분치 않은 게 사실이나, 한, 두해 늦춘다고 그것이 완벽해 질 수 없을뿐더러, 마침 그것이 교육개혁위윈회의 교육개혁방안으로 크게 부각되어 한창 많은 이의 기대와 관심을 모으고 있는 현시점에서 초등영어를 출범시키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자칫 이 모멘텀을 잃으면, 앞으로 몇 년이 늦춰질지 모른다는 걱정을  했다. 무엇보다 필자는 초등영어 교육을 더 늦추는 경우, 도시와 농촌 및 빈. 부 학생 간의 영어격차가 더 벌어질 것이라는 점을 크게 우려했다. 조기영어교육 열풍이 이미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크게 일고 있는 상황에서, 거의 모든 도시 중산층 자제들은 이미 사설 학원이나 개인 과외 등을 통해 어려서부터 영어를 익히고 있었다. 반면 농. 어촌 및 도시 빈곤층 자제들은 중학교에 입학할 때 까지 영어 공부를 할 기회가 거의 없는 것이 눈 앞에 펼쳐지는 차디찬 현실이었다. 그러다 보니 중학교 입학 후 두 그룹 간의 영어능력 격차가 지나치게 벌어지게 되고, 그 부정적 영향력이 이후의 학업 및 대입과정, 그리고 멀리는 사회생활에 까지 심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따라서 나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모든 학생들에게 영어의 학습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분명 이 격차를 줄이는데 크게 도움이 줄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초등영어 실시를 둘러싼 논쟁은 날이 갈수록 가열되었다. 개중에는 준비가 잘 된 대도시부터 초등영어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도 개진되었다. 교육부는, 그렇게 되는 경우, 이미 벌어진 도농 간의 조기영어교육 격차가 더 벌어진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를 분명히 했다. 그런 가운데, 새로 취임한 유인종 서울시 교육감이 초등영어교육 반대 의사를 피력하여 물의를 일으켰고, 몇몇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정치인, 교육계 인사들도 공공연히 초등영어 도입 반대 의견을 개진했다. 교육개발원 보고서에서도 유보 쪽을 지지하는 글이 발표되는 등, 자중지란이 일어나 혼선을 빚기도 했다.

 

  초등영어 도입 쟁점이 사회적으로 점화되면서, 교육부의 기대와 달리, 반대 내지 유보 의견이 갑자기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교육부와 일선 교육계는 초등영어 교육 준비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 온 정성을 쏟았다. 하지만 상황은 오히려 더 불리해 졌다. 당초 초등학교 영어교육을 위해 전국 5천 9백여개 초등학교 중, 3학년 학급 수가 10개 이상인 2백 41개 학교에 한하여 영어 전담교사를 배치하려는 계획을 추진하였으나, 관계부처인 총무처, 재경원과의 협의과정에서 교원증원과 예산문제 등에 차질이 생겨 결국 담임교사담당제로 기존 방침을 변경하게 된다. 그 충격은 컸다. 교육부의 체면 손상은 고사하고, 이는 프로그램의 실효성 차원에서 매우 우려되는 일이었다.

 

  이처럼 불리한 흐름에도 불구하고 교육부는 수시로 초등영어 준비상황을 점검하고, 무엇보다 초등학교 교사연수에 힘을 모았다. 그러면서 우리보다 한해 앞서, 즉  ‘96년부터 이미 시행 중인 태국의 초등영어교육의 진행과정과 그곳 여론에 추이를 촉각을 곤두세웠다. 당시 정태동 주태국대사가 수시로 상황변화를 알려 주며 유익한 조언을 했다. 태국의 경우, 초등영어 출범 준비가 우리보다 훨씬 허술했는데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국민적 반응은 매우 호의적이었다. 그 소식에 우리는 매우 고무되었다. 반면 그동안 초등영어 실시를 위해 우리 보다 더 장기간, 그리고 더 치밀하게 준비해 왔던 일본이 끝내 도입을 유보한다는 소식을 접할 때는 심경이 매우 착잡했다.

 

                                       III.

  1996년 10월로 접어면서 나는 시행시기에 대해 마지막 결단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초등영어 출범 시기를 늦추자는 여론이 오히려 증폭되는 분위기였고, 청와대나 당. 정 모두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민감했다. 이수성 총리와 청와대 박세일 수석은 내가 어떤 결정을 내려도 그 결정을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그런 가운데 이 총리는 너무 무리하지 않는 게 어떻겠냐는 말도 덧붙였다. 우회적으로 유보 선호를 내 비친 것이었다. 이영탁 차관과도 의견을 나눴다. 그도 연기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주위가 이러니 나도 내심 흔들렸다. 여차직하면 1년 연장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서서히 고개를 드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김정기 비서관이 흔들리는 내 마음을 읽었다. 그는 시행을 불과 5개월 앞두고 초등영어 실시를 미루는 경우, 그간 장관만을 믿고 오랜 기간 동안 열정과 헌신을 다해 각고의 노력을 해 온 일선 교육현장에 일대 패닉 현상이 일어날 것이고, 교육부에 대해 엄청난 불신을 불러올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며 펼쩍 뛰었다. 나는 부하의 직언에 움찔하면서도 “흔들리긴 누가 흔들린다는 말이냐”고 태연한 척했다. 그런데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만들었던 것은, 만약 1년을 늦추면 그 사이 대통령 선거가 있는데, 차기 정권이 과연 초등영어를 도입할지, 그에 대한 의구심이었다. 내가 일신의 편안을 위해 ‘유보’를 선언하고, 이 수렁에서 빠져 나간다면, 나는 끝내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며칠 잠을 설쳤다. 결국 혼자 남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말 못할 외로움이 엄습했다. 깊은 고민 끝에 마지막으로 준비상활을 총점검 해보고, ‘쿨하게’ 결론을 내리자고 마음먹었다.

 

   총점검 결과 상황이 크게 우려할 정도는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다. 흔들리던 마음이 다소 진정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결심은 유보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예상치 못한 일이 터졌다. 10월 13일자 동아일보 저녁 가판에 일면 톱으로 <초등학생 영어교육 연기검토>가 일면 톱으로 대서특필된 것이었다. 그동안 흔들렸던 내 마음이 그들에게 전달되었던 모양이다. 나는 부랴부랴 담당 기자와 편집국장에게 전화해서, 명백한 <오보>라고 항의했다. 동아일보는 “확실한 소스에 근거한 것‘이라고 자신감을 피력하며, 쉽사리 물러날 기세가 아니었다. 옥신각신하면서, 나는 내심으로 이제 시행을 결심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장관이 그렇게 말해도 구태여 오보를 내겠다면 당신들 마음대로 하라’며 전화를 끊었다. 장관의 결연한 태도에 동아일보는 결국 다음날 조간에 위의 톱기사를 거둬들였다. 돌이켜 보면, 이 날 동아일보와의 해프닝이 한국에서의 초등영어 실시 일정을 결정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다행이 이 결정적인 시간에 내 마음의 잦은 동요를 담당 실국장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일단 결론은 내린 후, 초등영어 교육의 성공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교육감회의 및 부교육감회의를 수시로 열러 철저한 당부를 당부하고, 교육부 담당부서를 총동원하여 수시점검했다. 원어민 교사를 통한 영어연수에 박차를 가하고, 장관이 수시로 현장을 방문하고 격려했다. 그리고 장관이 초등영어 교육 예정 교사들에게 특강을 통해서, 그들의 역할과 임무의 중요성을 재삼 강조했다. 그러면서 T.V에 자주 나가 초등영어교육의 준비상황을 국민들에게 알렸다. 아울러 효율적 영어교수방법에 대한 그 간의 논의와 사례를 정리하고, 검증된 결과를 확산시키는데 힘을 쏟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린이에게 영어교육의 도입이 그들의 국어 사랑과 국어교육에 부정적인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게 하기 위해 <영어교육발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위원회에는 영어교육전문가 외에 국어 및 언어교육전문가, 그리고 어린이 신문 편집장 등이 두루 참여하여 영어교육이 나아갈 진로에 대해 심도있는 논의를 했다. 위원장은 저명한 영문학자이면서, 연세한국어사전 편집책임자였던 이상섭 교수(연세대)가 맡아 수고했다. 교육부 전문직들을 비롯해 온 교육부 직원들이 한마음이 돼서 열심히 준비했는데, 특히 구학봉 장학관의 노고가 컸다.

 

  역설적이지만, 초등영어의 성공적 시행에 김한길 의원도 한 몫을 했다고 본다. 그는 국회 본회의 및 교육위를 통해서, 그리고 잦은 방송출연, 신문기고 등을 통해 초등영어교육에 대해 줄기차게, 또 조직적으로 반대를 했다. 말하자면 결의에 찬 확신범이자 일급 저격수였다. 그 영향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 반대에는 논리뿐만 아니라 그의 작가적 상상력까지 동원했다. 내가 국회 회랑에서 그에게 “김 의원님, 10년 후 역사가 이 문제를 어떻게 평가할지 생각해 보셨나요” 라고 물었던 것을 그가 아직도 기억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초등영어에 대한 그의 신랄한 비판, 특히 그 준비부족에 대한 그의 집요한 지적은 교육부를 계속 긴장시켰고, 스스로를 엄격히 챙기는데 크게 작용했다. 그래서 초등영어가 성공적으로 시행되자, 교육부 내에서 그에게 공로상을 주어야겠다는 얘기가 나왔던 게 사실이다.

 

  1996년 10월 과열과외 예방조치로서 ‘수, 우, 미, 양, 가’ 형식의 평가 대신에 <00 분야에 흥미가 있고 이해가 빠르다> 등의 방식으로 담임이 관찰 평가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어 1997년 1월, 출판사들의 문자교습을 포함한 부교재 발행을 억제하고 기존 영어교육제도의 모순을 답습하지 않게 하기 위해 초등학교 영어교육을 회화위주로 하기로 확정했다.

 

                                      IV

  초등영어를 시작하려면, 교과서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런데 검인정 교과서(2종)인 초등영어 교재선정과정 또한 순탄치 않았다. 그 1차 심사가 막 시작될 즈음, 평소에 잘 아는 유재현 경실련 사무총장이 급히 나를 찾아왔다. 그는 매우 심각한 얼굴로, 항간에 심사는 형식적일 것이고, 이미 최종 합격 출판사 및 교재는 결정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부디 각별이 조심하고 직접 전 심사과정을 철저히 감독하라고 조언을 했다. 나는 급히 과천에 있는 심사장소로 달려가서, 심사위원들에게 초등영어 도입의 의의와 그 중요성을 강조하며, 공정하고 투명한 심사를 간곡히 부탁했다. 그리고 엄정한 심사를 보장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조처를 다 했다. 바로 그날 밤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 몰래 심사장을 벗어나서 전화로 밖에 진행 정보를 전하다가 잠복하던 경찰에 적발, 연행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계기로 심사위원들은 크게 긴장했다. 1. 2차 심사를 통해 33개 출판사 45종의 교재 중 8개 출판사 12종의 교과서가 합격판정을 받았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당연히 합격하리라고 믿었던 국회 교육위원회의 영향력 있는 국회의원 소유의 출판사 교재, 막강한 권력기관의 강자가 관계한 교재, 거대 언론사가 정성들여 만든 교재 등이 줄줄이 낙방을 했다. 교육부 고위관료 중에는 이 선정결과가 몰고 올 후폭풍을 우려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결과가 만인에게 공정심사를 증거했기 때문이었다.

 

                                         V    

 

  1997년 3월, 드디어 초등학교 3학년을 대상으로 초등영어교육이 출범했다. 예상을 뒤엎고, 처음부터 매우 호의적인 반응이 나왔다. 반신반의했던 언론도 <성공> 쪽으로 돌아섰고, 그간 치열했던 반대여론도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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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행정포럼 2014 봄(통권 144호, 한국행정학회)호에 수록된 고() 이문영 교수님의 추도사이다.

 

                               I.

  지난 1월 16일, “민주투사, 노학자 이문영 고려대 명예교수 별세”라는 뉴스에 접하면서 실로 만감이 교차한다. 우리 시대의 마지막 의인(義人)울 잃은 공허함과 슬픔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한국 민주화에 기념비적인 존재이면서, 행정학자로서의 본분을 한시도 잊지 않으셨던, 지사형의 큰 학자 이문영 교수님의 생애와 공헌은 앞으로 언제까지나 “시대와 함께 한 행정학자”로서 한국 행정학의 역사에 길이 남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래에서 민주투사로서의 그의 삶과 행정학자로서의 그의 기여를 함께 논의하고자 한다. 여기서 방점은 당연히 후자에 놓여 지나, 그의 삶에서 두 가지가 함께 융합되어 있어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II.

  소정(小丁) 이문영 교수님의 민주화 투쟁의 가시밭길은 1960년 4월 19일 이후,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대학교수들의 시위에서 시작한다. 그 때 그의 나이 33세였다. 그는 1965년에는 무장군인들의 고려대 난입을 항의하는 고대교수회의 항의문을 본관 앞에서 낭독한다. 1970-1973년간 김재준 목사와의 동인지 <제 3일>에 30여회에 걸쳐 <아나로기아>를 집필하며, 성서와 행정이론을 인용하여, 촌철살인의 명품 정치비평을 쏟아 놓는다. 이후 소정은 1970년대, 80년대에 걸쳐 불퇴전의 용기와 치열한 저항정신으로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열일곱 번 잡혀가 세 번에 걸쳐 4년 6개월의 옥고를 치루고, 9년 6개월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해직되는 고초를 겪는다. 이렇듯 시대의 양심으로,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온 몸을 바쳐 한국 민주화에 봉헌하던 그의 40대, 50대는 한국 현대사와 민주화의 산 기록이다. 작년 그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필자가 “그 고난의 시절이 어떻게 회고 되세요”라고 여쭸더니, 그의 대답은 “당시 나는 무척 행복했고, 지금도 그렇게 추억된다”였다. 이 기간 중에도 그는 <한국행정론>(1980), <민주사회를 위하여>(1983) 등의 저작을 통하여 학자로서의 자신의 본분을 잃지 않는다.

 

  이문영 교수님은 사유의 깊이와 통찰력에 있어 행정학자 중 단연 독보적인 존재로서, 한국 행정학 제1세대 중 가장 먼저 행정학의 한국화에 정성을 기울인 학자였다. 그의 첫 저서 <행정학>(일조각, 1962)은 독창적 체계과 논리구성으로 마땅히 한국의 자아준거적 행정학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1963년, 한국 행정학계가 미국행정학 모방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정책자문, 용역 등으로 박정희 군사정권에 깊이 관여하던 그 시절, 소정 선생은 당시의 한국행정학계를 성찰적, 비판적으로 조명하면서, 1) 행정학 연구는 마땅히 제도의 소개보다는 그 위에 숨어있는 원리를 설명해야 하고, 2) 한국의 행정현실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실현가능한 모델을 탐색해야 하며, 3) 돈 벌고 명예를 올리는 일보다 본업인 연구에 열중해야 한다“(한국에 있어서 행정학 연구현황,” 법률행정논집 4)고 설파하여. 한국행정학의 이정표를 제시하는 선각자적인 주장을 폈다. 그는 무엇보다 한국행정학이 권위주의 정권에 복무하는 ‘기술관리학’ 으로 전락하는 것을 크게 우려했고, 그런 맥락에서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던 ‘발전행정’에 대해서도 비판적 입장을 강력하게 표명했다.

 

  이문영 교수님의 학자로서의 진면목은 그가 오랜 영어의 생활을 뒤로 하고, 1984년 고려대학교에 다시 복직한 이후의 그의 학자적 삶에서 역력히 드러난다. 정계의 숱한 유혹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연히 권력의 세계와 멀리하고 다시 책상 앞으로 다가와 학문에 전념하면서 시로 누구도 다를 수 없는 뛰어난 저작활동을 계속한다. 특히 그는 1992년 정년퇴임 이후에도 경기대 등에서 강의를 계속하면서, <논어, 맹자의 행정학>(1996), <인간. 종교. 국가>(1991), <협력형 통치>(2006), <겁많은 자의 용기>(2008), <3.1 운동에서 본 행정학>(2011) 등의 대작들을 연이어 출간했다. 이문영 교수님은 이들 저서들에서 유교와 기독교의 고전, 한국과 서양의 근. 현대사를 아우르고, 행정을 정의하는 세 범주, 즉 ‘사람과 일, 그리고 방법’에 준거하면서, ‘마땅히 지켜야 할 최소’를 바탕삼아 그 특유의 독창적인 학문세계를 펼치고 있다. 이들 저서들은 그 속에 소정의 심오한 행정학적 사유와 민주화 운동의 체험, 그리고 육화한 신앙이 융합되어 ‘기술’ 위주 아닌 ‘정신’ 위주의 ‘새 문명’을 지향하는 새로운 행정철학으로 재창조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접하는 통상적인 행정학 저술들과 크게 다르다.

 

  이문영 교수님의 학문적 열정과 집념은 실로 경이롭다. 이 교수님은 정년하실 즈음, 필자에게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따랐으니, 부디 내가 마음에 담고 있는 책 몇 권을 마칠 때까지 건강을 주셔야 된다”고 하나님께 간곡히 청원을 드렸다고 얘기하셨다. 그가 자신의 마지막 저서인 <3.1 운동의 행정학>을 집필하던 중, 오랜 병고로 더 이상 글쓰기가 어렵게 되자 뒤의 두 장(章)은 구술로 마무리 하셨다. 필자가 이 교수님을 이 책을 끝내신 직후 찾아뵈었더니, 매우 평화스럽고 만족스러우신 얼굴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술회하시던 기억이 새롭다. 그는 감옥에서 조차 행정학적 사유와 탐구를 계속하셨고, 자신의 생의 마지막 불꽃마저 온전히 자신의 학문에 바쳤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평생 학자로서 영원한 ‘현역’이셨다. 많은 사회과학자들이 정년 이전에 사실상 학문에서 손을 떼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교수님의 학문하는 올곧은 자세는 실로 후학들에게 값진 전범으로, 큰 교훈을 남기셨다.

 

  소정 이문영 교수님은 고려대학교 행정학과를 세우고, 가꾸고, 그 정신적, 학문적 바탕을 마련하셨다. 그가 키워낸 기라성 같은 학자들, 그의 감화를 받은 수많은 제자들, 그들 모두에게 그는 존경과 자존심, 그리고 지향해야 할 정신적 목표였다.

 

  이문영 교수님은 그의 저서에서 ‘협력형 통치’와 ‘민회’를 강조하셨듯이, 학문하는 과정에서도 학계의 가까운 동료 및 제자들과의 협력적 상호작용을 중요시하셨고, 다른 이의 관점을 열심히 경청하셨다. 그는 저서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스스럼없이 후배와 제자들에게 조언과 자문을 구하셨고, 집필 이후에도 몇몇 제자들과 독회를 거듭하며, 의미전달을 바르게 하기 위해 글을 다듬고 손질하셨다. 정년이후 집필하신 책들은 하나같이 정성호(경기대), 윤견수(고려대), 김동환(중앙대) 제 교수들과 잦은 독회를 거쳐, 그리고 고창훈(제주대), 김문기(평택대) 교수 등 많은 이의 조언을 들어 마무리하셨다.

 

                                         III.

  소정 선생은 거짓 권위와 폭정에 대해서는 실로 치열하게 저항하신 민주투사이셨으나, 천성이 착하고 순수한 선생은, ‘작은 머슴’을 자처하는 그의 호에서 드러나듯이, 항상 자신을 낮췄고, 절제와 배려가 몸에 배인 분이셨다. 그는 일생 가정과 학교와 교회에 충실하셨고, 속과 겉이 같았고, 언제, 누구에게나 늘 한결같으셨다. 그는 일상의 삶 속에서도 자신이 좋아하셨던 어귀, ‘이로움을 보면, 그것이 의에 합당한지 따져보라’는 ‘견리사의(見利思義)’의 정신을 어김없이 실천한 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큰 바위 같은 의인(義人)의 면모를 지니신 분이셨다.

 

  이문영 교수님은 민주주의의 적과 온 몸으로 외롭게 맞섰던 그 엄혹한 시절의 모진 고난에 대해서도 “의당 해야 할 최소한의 발언을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한낮의 수사(修辭)가 아니라 그의 신념이자, 철학이다. 우리 시대의 고뇌하는 행정철학자이시자 종교가인 소정선생은 ’정도를 넘어선 최대‘가 아닌 ’마땅히 지켜야 할 최소한‘을 주장하셨다. 그러나 그는 ”최소를 지키기란 쉽지 않다. 자기희생을 동반하지 않으면 최소를 지킬 수 없다“라고 말한다. 그가 주장하는 ’최소한‘의 철학이 비폭력으로, 또 개인윤리, 사회윤리, 자기희생으로 이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세상을 향하여 ’최소한‘을 요구하면서, 정작 자신은 그 최소한을 위해 외롭게 온몸을 민주화 재단에 ’최대한‘으로 바쳐 희생, 봉헌했다.

 

  소정의 실존적 삶 속에는 늘 하나님 사랑, 나라 사랑, 그리고 행정학 사랑이 함께 용해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철학과 인격에 융합, 재창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깊은 뿌리에는 오늘의 그를 만든 사람들, 소정의 의로운 아버지, 사랑의 버팀목 어머니, 평생 아내이며 동지였던 김석중 여사, 배선표 목사, 함석헌 선생, 공자, 맹자, 원효, 율곡, 마르틴 루터가 있었고, 그의 정신적 요람이었던 배재학교, 고려대학, 갈릴리 교회가 버티고 있었다.

 

                                      IV.

  소정 선생님과의 필자의 인연은 올해로 43년 되었다. 스승처럼, 큰 형님처럼 가까이 모셨던 그 세월동안 필자는 그로부터 학문적으로, 정신적으로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너무나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14 년 연상이셨지만, 한 번도 말씀을 놓으신 적이 없으셨다.

 

  그가 해직, 옥고를 치르시던, 1970년대 초, 중반 필자가 이 교수님의 고려대학교 강의를 대신 맡았던 일은 나에게 큰 자랑이며 영광이다. 1987년 민주화의 열풍 속에 6. 29 선언이 있던 날, 내 연구실 문을 크게 여시면서, 환한 얼굴로 “안 교수, 명예혁명입니다”라고 크게 외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소정 선생님이 옥고를 치르실 때, 창동 선생님 댁을 찾으면, 집 옆에 감시초소가 세워져 오가는 사람을 일일이 점검했다. 한 겨울, 온 집안에 냉기가 차 있었고, 거실에 작은 난로에는 불기가 꺼져 있었다. 추위에 나무가 비틀려 마루바닥이 거북 등처럼 부풀어 올라 있던 기억이 있다 사모님도 민주화에 동참하시기 위해 밖에 나가셨고, 약간의 온기가 감도는 안방에는 선생님의 90 노모가 수감 학생들의 죄수복에 솜을 넣어 손수 꿰매고 계셨다. 그 때 막 청소년기를 벗어나던, 훗날 모두 박사가 된 1남 2녀, 현아, 선포, 선아는 그 어려움 중에도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아 활기찼고, 집안에는 언제나 평화와 사랑이 감돌고 있었다.

 

  엄혹한 권위주의 시절, 이문영 교수님은 겁 많고 용기마저 없었던 우리 모두를 대신해서 민주화에 앞장 스셨고, 평생 뚜벅 뚜벅 큰 걸음으로, 바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행정학의 민주화와 한국화, 그리고 우리 사회의 문명화를 위해 헌신하셨던 큰 어른이시다. 그가 행정학이라는 학문공동체에서 오랜 세월 우리와 함께 계셨다는 사실, 아니 그가 우리와 동시대인이셨다는 사실은 분명 우리 모두의 행운이었고 축복이었다.

 

  온 행정학회 회원들과 더불어 소정 선생의 영면을 빈다.

 

 

                                                                                    안병영 (연세대 명예교수)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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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1978년 겨울, 파리에서의 세 번째 날, 나는 호텔에서 백영수 화백의 전시회 소식을 들었다. 백영수(白榮洙, 1922-) 화백은 한국 추상회화의 선구자 중의 한분으로, 이미 한국동란 직후인 1950년대에 김환기, 이중섭, 유영국, 이규상, 장욱진 등과 함께 ‘신사실파’ 동인으로 활동했던 분이다. 나는 신사실파 화가들, 한분 한분을 한결같이 좋아했다. 백영수 화백은 단순하고 절제된 화면, 중간색의 깊이 있는 색조를 바탕으로 고개 갸우뚱한 모자상(母子像)을 즐겨 그렸다. 그는 모자(母子)외에도 남자아이, 꽃잎, 새, 나무, 개, 창문 등 향토적이고, 서정적인 소재들을 바탕으로 티 없이 맑은 순수 동심의 세계를 화폭에 담백하게 담았다. 백영수의 그림에는 늘 애잔한 그리움과 향수가 잔잔히 흘러. 평소에 나는 그를 장욱진과 더불어 한국 화단의 대표 ‘서정시인’이라고 여겼다. 특히 백영수 화백은 어린이 잡지에 삽화를 자주 그려, 내겐 어려서부터 꽤나 친근한 이름이었다. 그런데 그와 그의 작품을 이 겨울 파리에서 만날 수 있다니. 우선 반가웠다.

 

                                         II.

   그날 나는 백영수 개인전을 찾았다. 그가 1977년 파리에 온 후 처음 여는 전시회였는데 반향이 무척 좋았다. 전시된 작품 중 많은 것에 이미 팔렸다는 쪽지가 붙어 있었다. 나는 원래 그림을 무척 좋아하지만, 주머니 사정 때문에 그 때까지 유명작가의 그림을 산다는 것은 엄감생심 꿈도 꾸지 못해왔다. 그런데 그 날 얼마간 촌놈 파리 여행의 객기도 작용해서 남아 있는 서너 작품 중에서 큰맘 먹고 마음에 드는 소품 한 점을 골랐다.

   같은 날 저녁 호텔 지하 바에서 백영수 화백님을 만났다. 첫눈에 백 화백의 모습이 그의 작품의 두드러진 특징, 즉 우려낸 순수성과 깊이 삭힌 중간색을 그대로 닮았다고 생각했다. 흰 얼굴, 단정하고 맑은 인상, 유현한 분위기, 인간미 넘치는 잔잔한 미소가 청솔위에 좌정하고 있는 한 마리의 학을 연상시켰다. 한마디로 선비풍의 초로의 어른이셨다. 처음 뵈면서 이처럼 세속의 때묻지 않은 분이 이국만리 남의 나라에서 어떻게 견뎌 내실까 하는 괜한 노파심이 일었다. 그러나 말씀을 나누면서, 이 분의 내공과 경륜이 감지되었고, 그의 명상적 내면세계가 백 화백의 독창적인 예술세계의 원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III.

   그날 밤, 백 화백은 호텔 지하 바에서 조각가 문신(文信, 1923-1995)씨를 내게 소개했다. 문신은 내게 생소한 이름이었는데, 첫인상이 무척 강렬했다. 갈색 얼굴에 짙은 눈섭, 움푹 파인 눈, 서양인을 닮은 크고 오뚝한 코, 꽉 다문 입이 결연한 의지를 지닌 투사를 연상시키는 분이었다. 일견해서 투신형, 몰입형의 예술가임을 직감했다. 이미 1961년부터 파리에 머문다는 문신은 그의 역동적인 인상에도 불구하고, 오랜 외국생활에서 얼마간 지친 모습이었다.

 

   얼마 후, 백 화백은 자리를 떴고 나와 문신만 남았다. 나는 늦은 시간까지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한발, 한발 그의 오묘한 예술세계에 빠져 들어갔다. 그러면서 그가 놀라운 열정과 비범한 재능을 지닌 걸출한 예술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 질 무렵, 문신은 불현듯 내게 “안 교수, 제 아트리에로 갑시다. 제 작품을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라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두말없이 그를 따라 나섰다.

   자정 무렵, 불빛이 점멸하는 파리의 겨울거리는 무척 아름다웠다. 시내를 빠져나와 교외로 한참을 가서야 그의 아트리에가 있었다. 문신이 아트리에 불을 켜자, 한쪽 구석 소파에 누어자고 있던 웬 사람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문신은 “하형, 미안합니다. 제가 계신 걸 깜박 했습니다”라며 어리둥절하는 그에게 나를 소개했다. 그는 화가 하인두 (河麟斗, 1930-1989)였다. 나는 독창적 추상표현주의 화가 하인두를 이미 작품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기에 반갑게 인사했다. 하인두는 당시 파리에 머물면서 문신의 아트리에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던 듯 했다.

 

   비교적 넓은 공간의 아트리에에는 그의 조각작품 외에도 드로잉, 회화, 도자기, 석고원형 등이 여기 저기 널려 있었다. 나는 비상한 관심을 갖고 그의 작품을 한점 한점 감상했다. 브론즈, 금속 등도 있었지만 흑단(黑檀)과 주목을 깎아 만든 작품이 많다는 것이 특이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작품들이 하나같이 원형, 반원, 타원 등의 기하학적 형태와 좌우 대칭구조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기하학적 구성과 추상적 구조에도 불구하고, 그의 조각 작품 속에는 자연과 유기체의 고유의 속성인 조화와 균형, 그리고 생명감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그의 작품에 접하며, 예술의 대가들만이 표현할 수 있는 높은 예술적 경지에 이르렀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나는 한 작품 앞에 이르러 자신도 모르게 가벼운 탄성을 발했다. 타원형의 대칭구조를 이룬 중간크기의 흑단 작품인데, 내 눈에는 조형적 미학과 예술적 깊이가 절정에 이른 명품이었다.

   그러자 문신 조각가는 “역시 안목이 있으시군요. 제가 이 작업공간에서 제일 아끼는 작품입니다”라며, 그 조각품을 어루만졌다. 그러면서 그 작품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를 공개했다. 그와 가까운 프랑스의 저명한 여성 미술평론가 한 분이 그 작품에 매료되어, 문신에게 그것을 한 주일만 빌려 달라고 간청을 해서 1주간 무료로 대여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그녀가 작품을 돌려주면서, “정말 행복한 일주일이었다”고 고마워했다는 것이었다.

 

   문신은 내가 그 작품을 높이 평가하는데 대해, 무척 좋아했다. 그러면서 “정 마음에 드시면, 가져가시지요. 제가 크게 부담되지 않는 가격으로 드리겠습니다”라고 의외의 제안을 했다. 내가 놀라서, “말씀은 백번 고맙지만, 제 형편에 이런 명품이 걸맞지 않습니다. 그냥 오늘 감상한 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라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랬더니, 그는 “작품들도 저마다 주인이 있습니다. 제가 볼 때, 저 작품의 주인은 그 진가를 바로 알아보는 안교수입니다” 라며, 내게 그 작품의 구입을 권했다. 그 때, 그가 내게 제시했던 가격은 40만원이었다. 내게는 큰 돈이지만, 작품의 질과 예술적 가치를 감안할 때 무척 싼 값이었다. 끝내 내가 고사하자, “여행 중에 돈이 있으실 리 없지요. 일단 그냥 가져 가세요. 그리고 나중에 돈이 생기실 때 나누어 갚으세요.”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그 순간 나는 강한 구매욕을 느꼈다. 그러나 끝내 나는 그의 고마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처럼 그림 좋아하는 사람이, 감상에 앞서 소유에 욕심이 생기면 앞날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내 분수를 맞게 처신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신은 못내 아쉬워하며, 자신이 아끼는 도로잉 두 점을 내게 선사했다.

 

                                         IV.

   1980년, 문신은 오랜 프랑스 시절을 뒤로 하고 영구 귀국하여 고향 마산에 정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현대화랑에서 귀국 전시회를 열었다. 나는 첫날 일찍 전시장을 찾았다. 마침 문신씨는 자리에 없었다. 그러나 전시장 한 가운데에 1년 여 전, 파리에서 온통 내 혼을 빼앗은 그 문제의 흑단 작품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나는 관계자에게 작품 가격을 문의했더니, 500만원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작가가 특히 아끼는 작품입니다”라고 덧붙였다.

   귀국 후 문신의 작품 활동은 예나 다름없이 열정적으로 이어졌다. 올림픽 공원에 있는 25m 높이의 <올림픽 1988>도 서울 올림픽을 위해 그가 제작한 작품이다. 그는 1994년 고향에 평생 숙원이었던 문신미술관을 직접 건립하였으나, 아깝게 이듬해 1995년 지병으로 타개했다. 그의 미술관은 마산시에 기증되어 ‘마산시립미술관(2004)’으로 다시 개관하였고, 같은 해에 숙명여대내에 ‘문신미술관’이 새로 개관됐다.

 

 

 

    1978년 겨울, 파리의 문신 아트리에에서 한 순간, 우연히 스치듯 만났던 하인두 화백의 기억도 새롭다. 그 또한 한국 화단의 대표적 전위적 추상화가로서 그의 모든 작품 속에서 섬광처럼 예술혼이 번쩍이는 천재 화가였다. 전통미술과 불교적 세계관, 그리고 우주에 대한 연상을 바탕으로 화려한 원색을 절규하듯, 불꽃처럼 내뿜었던 그의 심오한 예술세계는 그가 마지막 병마와 싸우며 그렸던 ‘혼불-빛의 회오리 연작’에서 절정에 이른다. 나는 그 파리의 겨울 밤, 눈을 비비며 자리를 피해 주었던 그와 제대로 한 마디도 나누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쉽다.

 

   한편, 백영수 화백은 34년의 오랜 파리생활을 접고 2011년 영구 귀국했다. 구순을 훌쩍 넘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한국 근현대 미술사의 산 증인으로, 아직도 예의 그 정갈한 모습으로 열정적으로 작품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모자상 시리즈’에 이어 ‘여백’, ‘창문’, 그리고 최근에는 ‘연꽃’에 이르기 까지 그의 작품 속에 현현하는 그윽한 명상의 정신세계가 세속에 찌든 중생들의 집착과 미망을 덜어내고 있다. ‘신사실파’의 망내 백영수는 이제 한국 미술계의 전설이 되었다,

 

 

 

                                         V.

   파리에서의 셋째 날 하루 밤 사이, 정확히는 그 겨울날 저녁부터 이튿날 이른 새벽 까지 내가 한국을 대표하는 전위적 추상작가 세 명을 파리에서 차례로 만났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경이롭다. 이후 나는 그들 누구와도 다시 만날 기회가 없었다. 두 분은 이미 이 세상을 떠났고, 한 분만 남았다. 그러나 그들 한명 한명은 그들의 작품들이 추구하는 세계와 더불어 내 가슴속에 오롯이 남아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시대에 앞서가던 선구적, 진취적 화가, 조각가였고, 강한 개성과 독창성, 자신의 우주를 지닌 빼어난 예술인이었다. 또한 그들의 작품 속에는 한국적 정서와 세계적 보편성이 함께 녹아 있어, 서울과 파리 모두에서 사랑을 받았다. 내가 그들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 한분 한분이 자신들의 미적 활동을 통하여 자연과 인생, 그리고 우주를 노래하는 진정한 시인이자 철학자였다는 사실이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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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남수 2014.01.30 07:42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부총리님께서 많은 분야에 해박하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문학가와 예술가 개개인에까지 이렇게 깊은 이해를 갖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존경과 부러운 마음뿐입니다. 원암리를 떠나 한 동안 다시 연희동에 머무르시는 생활이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갑오년 새해에도 늘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빕니다.

  2. 현강 2014.01.31 06:56 Address Modify/Delete Reply

    장관님, 새해 늘 건강하시고 나라 교육발전에 크게 기여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구정지나면,
    다시 원암리로 내려 가려고 합니다. 제 처는 병원관계로 조금 더 서울에 머물게 될 듯 하구요.
    바쁘기 이를 데 없으실터인데, 여전히 제 블로그를 방문하시니 고맙기 짝이 없습니다.

  3. 양재진 2014.02.03 17:37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저도 많이 배우고 좋은 작품 즐거이 감상하였습니다. 오래오래 늘 건강하시어 계속 좋은 글 올려 주세요.

                                                    I.

   1978년, 내 나이 38세 때, 그 한 해를 훔볼트 연구교수(Humboldt Fellow)로 독일 만하임 대학에서 보냈다. 그 해 12월 말, 나는 얼마 후 귀국을 앞두고, 처와 어린 남매를 대동하고 파리 겨울 여행을 떠났다. 파리 시내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작은 호텔에 묵었는데, 투숙객들이 모두 한국인들이어서 마치 서울 어디 변두리 호텔 같은 분위기였다. 그 때 한창 중동경기가 치솟을 때라, 투숙객 중에는 휴가차 파리를 찾은 중동 노동자들이 많았다. 그들이 사막의 열기를 몰고 왔는지, 호텔 전체에 활기가 넘쳤고, 마치 축제 현장 같은 들뜬 분위기였다.

   나는 추운 겨울에 아이들 데리고 구경 다니는 것도 수월치 않아 저녁에는 조금 일찍 돌아와 호텔 지하에 있는 바에 내려가곤 했다. 한 해 내내 쿨(cool)하기 짝이 없는 독일 사람들 틈에서 남의 나라 말만 하고 살다가, 동포들이 우리말로 왁자지껄, 시끌벅적하는 분위기를 접하니, 무척이나 정겹게 느껴졌다. 그래 술도 못하면서 운무처럼 담배연기 자욱한 지하 바에 자주 내려가 기웃거렸다. 그러면서 거기서 누군가 의외에 인물, 반가운 사람을 만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정말 그곳에서 생각지 못했던 몇 분을 만났다.

 

 

                                                    II.

   이틀째 되던 날 저녁, 간단한 식사도 할 겸해서, 가족과 함께 그 지하 바에 내려갔다. 그런데 웬걸 저쪽 귀퉁이에서 미당(未堂) 서정주 시인이 혼자 술을 드시고 있었다. 전에 뵌 적은 없으나, 지면이나 화면을 통해 자주 익혔던 분이라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한국의 ‘보들레르’ 미당 선생을 여기서 뵙다니,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이미 노경(老境)에 드셨으나, 뚜렷한 윤곽의 구리 빛 얼굴, 짙은 눈썹, 이마의 깊은 주름, 잔잔한 미소에 날카롭고 형형한 눈매가 특징적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오랜 세월의 영욕과 굴곡이 그대로 새겨 있었다. 내가 한국외국어대학 교수로 있을 때(1972-1975), 가까이 모셨던 전후문학의 대표작가 ‘오발탄’의 이범선 선생도 ‘역사를 간직한’ 그런 ‘깊은’ 얼굴이셨다. 그런데 그날 미당 선생의 행색은 마치 갓 등산에서 돌아 온 젊은이처럼 점퍼에 진 바지 차림의 날렵한 모습이셨다. 내가 가까이 가서 넙죽 “미당 선생님, 여기서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라고 인사를 드렸더니, 그는 무척이나 환한 얼굴로 “아니, 내가 여기 내려와 사흘 째 자작을 하고 있었는데, 도대체 내 얼굴 알아보는 놈이 하나도 없었어. 그런데 젊은이는 나를 어떻게 알아 보나”라며 크게 반기셨다.

 

   말씀인 즉, 경향신문사의 청으로 풍류객처럼 유럽 곳곳을 돌며 인상기를 써서 보내시는데, 마침 파리에서 며칠 머무신다는 것이었다. 내가 “ 천하의 미당 선생님을 여기서 뵈었으니, 제겐 일생일대의 큰 행운입니다” 라고 말씀 드렸더니, 미당 선생은 “자네,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는 군”하시며, 파안대소, 어린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그리고는 “자네 문학을 좀 아나, 내 시를 한번 평해 보게 나”, “내 시 말고, 또 누구 시를 좋아하나”, 등 많은 말씀을 하셨다. 그러다가 내가 시인 고은을 언급하자, “고은이는 내 아들과 진배없는 사람이야”라며 그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내비치셨다. 그러시더니 호텔 옆 가게에서 예쁜 반지를 보아 두셨다며, 아무리 말려도, 굳이 나가셔서 그것을 사다가 내 처 손가락에 끼어 주시고, 내 두 아이 각각에게 친필로 자신의 시 “국화 옆에서”를 손수 써 주시며, “ 너희가 크면, 이게 큰 기념이 될게다”라고 말씀 하셨다. 가족을 올려 보내고, 그날 나는 미당 선생과 밤늦도록 대작했다.

 

 

                                                      III.

   시인 서정주(1915-2000)에 대한 평가는 폄훼와 상찬으로 엇갈린다. 나는 그의 친일행각 등을 익히 알고 있었으나, 민족적 소재와 정서를 바탕으로 우리 말, 우리 글에 업겁의 혼을 입힌 그의 문학적 성취가 워낙 크고 경이롭기 때문에, 마음 한 구석에 진한 안타까움을 간직한 채, 그의 문학은 그냥 ‘문학으로’ 평가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아직 성숙하지 않았다”는 그의 아호, 미당(未堂)의 뜻처럼, 그도 불완전한 인간의 하나가 아닌가. 따라서 그가 죽은 후 고운의 <미당담론>을 접했을 때에도, 가슴이 무척 아렸다.

 

   그날 이후 나는 서정주 선생을 뵙지 못했다. 2000년 12월 24일 캐나다 밴쿠버의 UBC에서 그의 부음을 들었다. 그가 마지막 순간에 ‘선운사 동백꽃’을 떠올렸을까, 아니면 허허로운 ‘동천(冬天)’을 보았을까.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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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3년 10월 15일, 한국교육방송공사(EBS)가 주최한 <교육복지 실현, EBS 수능강의의 성과와 발전방향>의 기조강연 내용입니다.

 

1. 지난 16년을 뒤돌아보며

 

는 1995년 12월부터 1997년 8월까지, 그리고 2003년 12월부터 2005년 1월까지 두 번에 걸쳐 약 2년 8개월 동안 교육부의 수장으로 봉직했습니다. 장관을 지내면서 저는 늘 이 자리는 '멍에이자 축복‘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장관으로 국정에 깊숙이 참여한다는 일은 막중한 책임과 각고의 노력, 그리고 그에 따른 엄청난 격무를 수반해야 하므로 무척이나 힘겹고 고달픈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분명 멍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장관직 수행은 국정에 참여하여 국리민복을 위해 온 몸을 바쳐 헌신할 수 있는 값지고 보람된 기회이므로 더 없는 축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두 번 교육부 수장으로 일하면서 1997년 7월 EBS 위성교육방송의 출범과 2004년 EBS 인터넷 강의의 개통을 총 지휘하는 막중한 일을 수행했습니다. 국가가 <무상으로 최고의 과외를 하겠다>고 나서는 일도 인류 역사상 처음 있었던 일이거니와, 수능방송 인터넷 서비스를 통하여 e-러닝 시대를 열고, 교육 패러다임의 전환을 꾀했던 일 또한 미증유의 혁명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도 제게 그런 기회가, 그 것도 때맞춰 두 번이나 주어졌다는 것은 분명 하늘의 축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EBS와 더불어 그 일을 수행하던 당시를 회상하면 아직도 가슴 벅찬 감동과 전율을 느낍니다. 저의 EBS와, 그리고 수능방송과의 인연은 이처럼 깊고 오래 되었습니다.

 

2004년 인터넷 서비스의 성과에 가려 점차 잊혀지고 있으나 저는 EBS 수능방송의 첫 발자국인 1997년 여름 위성교육방송의 출범에 큰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후 EBS 수능강의 전개의 원형(原形)이었고, 또 초심(初心)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EBS 수능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논의하면서 마땅히 그 때 그 <처음>을 기억하고 <초심>을 되새기는 일을 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일은 매우 중요하고 또 값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제게 이러한 기회를 마련해 주고, 제 소회의 일단을 말씀드릴 기회를 주신 EBS에 크게 감사를 드립니다.

 

2. 두 가지 목 표: 사교육비 경감과 교육격차의 해소

 

1997년 EBS TV 위성교육방송이 처음 고고의 성을 울릴 때, 그 기본계획안의 이름은 <과열과외 완화 및 과외비 경감대책>이었습니다. 그리고 2004년 인터넷 수능 서비스가 출범할 때, 그 단초는 <2.17 사교육비 경감대책>이었습니다. 이렇듯 EBS 수능은 두 번다 사교육비 경감을 가장 큰 목표로 삼았습니다. 격심한 입시경쟁에서 비롯되는 과도한 사교육 현상이 공교육을 무력화하고, 그 과도한 부담이 가계를 크게 압박하는가 하면, 때로는 가정해체의 위기로 까지 몰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책이 무엇보다 절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번 다, 두 번째 목표로는 교육격차의 해소 내지 교육기회의 평등을 내 세웠습니다. 사회경제적으로 볼 때, 사교육비가 날로 늘어가면서 빈부격차에 따른 교육불평등과 학력의 세습화, 그리고 가난의 대물림이 사회쟁점화되고 있었기에, 이 또한 충분한 명분이 있었습니다. 농어촌이나 산간오지, 절해고도와 같은 교육소외지역의 주민이나 낮은 사회계층의 자녀들, 그리고 장애우에게 최고의 과외를 제공하고 정보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지원대책을 마련함으로써 교육소외를 극복하고, 교육기회의 평등에 기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은 교육복지의 차원을 넘어 사회통합과 국민형성의 관점에서 큰 의미를 지닙니다.

 

두 번의 EBS 수능 개혁에서 언제나 사교육비 경감대책을 앞세웠으나, 실제로 제 마음을 더 크게 움직였던 것은 교육격차의 해소와 이를 통한 교육소외의 극복이라는 두 번째 관점이었습니다. 김영삼 문민정부의 1995년 <5. 31 교육개혁>은 주지하듯이 한국 교육사에서 실로 기념비적인 혁신사업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제시된 개혁방안들은 세계화라는 시대적 격랑 속에서 마련된 것이었기 때문에 교육의 수월성 내지 경쟁력 강화에 역점이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 역사적 교육혁신사업이 더 찬연한 빛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교육의 형평성의 제고를 통해 새로운 균형을 찾아야겠다고 마음먹고, 1996년 말 <교육복지 종합대책>을 마련했습니다. 이제는 <교육복지>라는 개념이 일상화되었으나, 그것이 당시로는 교육부 정책 아젠다로 역사상 처음 등장한 매우 생소한 개념이었습니다. 제가 제도권 교육의 한계를 느껴 교육복지정책의 일환으로 대안학교를 지원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즈음 입니다. 때가 때인지라 저는 TV 위성 수능방송이 함축하는 교육의 형평성 내지 교육복지의 관점은 제가 추구했던 정책적 지향과 크게 일치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따라서 EBS TV 수능은 태생적으로 첫 단추부터 교육소외 극복과 교육에서의 형평성 제고라는 교육복지적 관점과 깊게, 그리고 유기적으로 연계가 되었습니다. 첫 번째 위성교육방송을 통해 36%에 이르던 전국의 난시청 지역 해소에 앞장섰던 일이나, 두 번째 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소외지역 학생 및, 저소득층 자녀들에게 위성방송 수신기를 지원하고, 케이블 시청료 인하를 추진하며 PC 및 인터넷 통신비 지원을 했던 일, 그리고 EBS가 솔선해서 수능교재의 무상지원을 했던 일, 그리고 장애우를 위해 점자교재를 개발하고 무상지원을 하는 일들이 모두 교육복지적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제가 2004년 4월 1일, 인터넷 서비스의 출범에 때 맞춰 진대제 정통부 장관과 함께 발표한 <e-러닝 시대에 즈음하여 국민 여러분에게 드리는 말씀>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가난하지만 능력을 갖추고 성실하게 노력하는 청소년이 큰 어려움 없이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방도를 마련하는 데 앞장을 서고자 합니다”.....“.EBS 수능을 포함한 e-러닝은 농어촌 및 저소득층 자녀에게도 대도시 지역의 학생들과 실질적으로 동일한 교육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사회통합과 교육복지를 실현하는 획기적 기회가 될 것입니다. 더불어 장애인들도 e-러닝의 혜택으로부터 소외되지 않도록 하는 방안을 계속 강구해 나가겠습니다“.

 

저는 EBS 수능방송은 폭발적 잠재력을 가진 교육개혁 사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카노이와 레빈의 분류에 따르면 <거시적, 기술적 교육개혁>의 사례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이 개혁사업은 ‘수능’을 표적으로 삼았습니다만, 실제로 한국의 전체 교육체제의 변화를 겨냥하면서 동시에 기술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습니다. EBS 인터넷 서비스를 예로 할 때, 그것은 우리나라의 세계 굴지의 IT 인프라 및 그 경쟁력 없이는 불가능한 사업이었습니다. 또 그것이 또한 한국의 e-러닝 시대를 촉발했다는 사실은 그런 맥락에서 큰 의미를 지닙니다.

이 사업은 <거시적, 기술적> 교육개혁 사업이므로 교육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지만, 큰 관심이 기술적 성패에 집중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업을 둘러 싼 여야나, 교직단체들 간에 첨예한 정치적, 가치론적 갈등은 별로 없었습니다. 한국의 주요 교육정책 아젠다 대부분이 보수와 진보세력 간의 이념적 갈등 때문에 이미 공론화 단계에서 좌초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을 감안하면, 그것은 무척이나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인터넷 서비스의 도입을 예로 할 때, 야당도 명분상으로 사교육비 경감과 교육격차의 해소를 겨냥하는 이 국가적 사업을 반대할 이유가 없었고, 오히려 그 성공을 빌어야 할 입장이었으므로, 모든 관심은 ‘인터넷 대란’ 여부에 모였습니다.

 

EBS가 앞으로도 양질의 교육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생산하고 교육소외 극복에 ,한 쪽의 치우침 없이 교육의 수월성과 형평성 모두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기를 빕니다.

 

3. 공교육과의 관계: 대 체제 아닌 보완제

 

EBS 수능을 이야기 할 때는 언제나 공교육과의 관계가 거론됩니다. 저는 늘 EBS 수능은 매우 유용한 정책수단임에 틀림없으나, 공교육정상화라는 큰 목표로 가는 길목이자, 보조수단이며, 따라서 그것이 공교육을 무력화하거나 파행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해 왔습니다. 그 때문에 EBS 수능방송은 공교육 내실화와 함께 가야 된다는 점을 이야기해 왔습니다. 그런 까닭에 저는 근년에 고등학교 교육이 EBS 수능강의에 예속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올 때면 무척 가슴이 아픕니다. 또 고교현장에서 EBS 교재를 가지고 수업을 한다는 얘기를 들을 때도 마음이 꽤나 불편합니다. 현장교사들이 EBS 수능강의 때문에 사기가 떨어지고 소외감을 느낀다면, 그것도 안 될 일입니다.

 

학교수업은 스스로 충실한 내용을 바탕으로 뚜벅 뚜벅 제 길을 가야하고, EBS 수능강의는 그것을 보완하고 필요한 부족분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주객이 전도되어 EBS 수능강의가 학교 현장교육을 대체하거나, 주인으로 올라서게 된다면, 그것은 당초에 의도했던 일이 아니거니와, 장기적 안목에서 볼 때, 자칫 공교육을 공동화(空洞化)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명심할 일은, EBS 수능은 학교교육의 대체제가 아닌 보완제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EBS는 겸허한 자세로 스스로의 역할을 성실한 도우미로 인식하고, 추호도 주인자리를 넘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주연이 아니라 명품 조연의 역할을 수행할 것을 권합니다. 공교육도 각고의 노력을 통해 스스로 수준 높은 양질의 교육을 창출함으로써 실추한 자신의 위치를 바르게 세워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고교 현장교사들과 EBS 관계자들 간의 잦은 소통과 협업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고교 현장교사들이 수능 강의 제작에 강사 또는 교재개발자로 적극 참여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입니다. 교육부도 이러한 양자의 바람직한 관계 정립과 바른 역할인식을 위해 가운데서 성실한 조언자로, 또 슬기로운 중재자로서 자신의 몫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게 EBS와 수능시험의 연계입니다. 사교육비 경감을 위해, 양자 간의 연계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양자 간의 연계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우, 자칫 학교의 현장교육이 설 자리가 협소해 질 수 밖에 없고, 자칫 공교육이 EBS 수능에 예속될 개연성이 높아집니다. 따라서 저는 공교육과 EBS 수능 간의 연계에 더 큰 관심이 주어져야 하며, 가장 바람직한 해법은 공교육-EBS 수능방송-수능시험 3자간의 유기적 연계 설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때문에 제가 처음부터 마치 주문처럼 되뇌었던 말이,

“학교에서 성실히 공부하고, EBS 수능을 열심히 시청하면, 수능시험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입니다.

 

4. 접근 방법: 기능적 접근과 본질적 접근

 

두 번 EBS 수능강의의 새로운 출범에 관여하다 보니, 이에 관계하는 사람들이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한 그룹은 기능적, 성과주의적 접근을 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 그룹은 교육본질적, 장기적 접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기능적 관점에 서는 사람들은 EBS 수능강의가 입시생들의 수능성적에 가능한 한 많이 반영되어, 사교육비 경감 효과가 빠른 시간 내에 극대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수능강의의 기능성과 효과성에 초점을 맞춥니다. 반면 교육본질적, 장기적 관점에 서는 사람들은, EBS 수능강의는 기본적으로 교육본질에 충실해야 하며, 따라서 단기성과에 집착하기 보다는 설혹 시간이 걸리더라도 교육적 목적에 충실하게, 또 학생들의 학력신장에 기여할 수 있도록 설계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이 두 가지 접근법은 어쩔 수 없이 자주 부딪히고 갈등을 일으킵니다.

대체로 기능주의자들은 수능강의와 수능시험 간의 연계성을 크게 강조하고, 유명 스타강사를 선호하고, 사교육 경감효과에 대단히 민감합니다. 반면 본질주의자들은 수능강의와 수능시험 간의 연계 못지않게 학교수업과 수능강의 간의 연계에 깊은 관심을 갖으며, 수능강사로 학원가의 스타강사들 보다는 학교 현장교사들을 선호합니다. 또 단기적 성과보다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양질의 수능강의가 수험생들의 학력을 높여 자연스럽게 수능성적에 반영되는 편을 바람직하다고 여깁니다.

 

따지고 보면, 기능주의적 접근과 본질적 접근은 모두 일장일단이 있습니다. 기능주의적 입장에서 볼 때, 사교육비 경감이라는 절체절명의, 절박한 목표 앞에서 지나치게 교육본질을 따진다는 것은 EBS 수능방송의 본래의 정책적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본질주의자들은, 실질적 학력신장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수능교재만 달달 외어 수능성적이 몇 점 오른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전자는 현실주의자 내지 실용주의자들이라면, 후자는 보다 이상주의자 내지 근본주의자들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터놓고 이야기하면, 저는 교육본질주의 쪽으로 더 기울어져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정책관리자로서 저는 기능주의자들의 입장을 상당 부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두 접근법은 어쩔 수 없이 조화되어야 하고, 변증법적으로 지양되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초기 단계에서는 기능주의적 접근에 적절한 비중이 주어질 것이나, EBS 수능강의가 좋은 성과를 거두며 연착륙 한 후에는, 교육본질적 접근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한다고 나름대로 정리했습니다.

 

그래서 i) 수능강의와 수능시험 간의 연계는 강조해야 마땅하나, 몇 % 식의 수리적, 기능적 연계는 주장하지 말아야 하며, ii) 수능강사 충원에서 당연히 고교의 현장교사들이 다수를 차지해야 하나, 일정 비율로 스타강사들도 영입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보았습니다. 아울러 iii) EBS 수능은 시간과 더불어 초기 해열제 역할에서 점차 공교육의 보완이라는 본연의 역할로 서서히 옮겨져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학교현장과 e-러닝 연계, 그리고 수능강의의 질 관리를 통하여 수능시험에 반영률을 높이도록 애써야 한다고 마음으로 정리했습니다.

 

5. EBS 수능강의와 수능시험 간의 연계 문제

 

EBS 수능방송과 관련하여 가장 뜨거운 쟁점은 수능강의와 수능시험 간의 연계 문제입니다. 연계한다는데 얼마나, 어떻게 연계한다는 건지, 똑같이 나온다는 것인가 아니면 같은 유형, 혹은 변형인가. 또 변형이라면 어느 정도까지 변형한다는 것인가, 그 물음은 끝없이 이어집니다.

 

수능방송 프로그램이 사교육비경감을 첫 번째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실효성이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수능시험에 반영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그 때문에 저도 장관시절 “수능방송프로그램은 사전 기획단계부터 수능문제출제기관인 한국 교육과정평가원과 협조, 제작하므로 양자 간의 연계는 분명합니다”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몇 퍼센트 연계된다고 공언하는 일은 극력 피했습니다.

교육과정평가원은 ‘연계’의 의미를 <EBS 교재나 강의에서 본 친숙한 지문이나 자료, 개념이나 원리, 문항 등을 이용해 출제하다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실제로 만인이 공감할 수 있는 ‘연계’의 기준이나 지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똑같이’, ‘거의 똑같이’, ‘약간 변형해서’, ‘꽤 많이 변형해서’ 이처럼 연계 방식은 무수하기 때문에, 시험이 끝나면 연계의 체감온도는 사람마다 다르고, 그 때문에 늘 논란이 일게 됩니다. 상황이 이러한데 어떻게 사회적 신뢰와 공적 책임의 상징인 일국의 장관이 반영률 몇 퍼센트를 거침없이 공언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지나친 기능주의적, 성과주의적 접근이라고 생각합니다.

 

EBS 수능강의와 수능시험의 연계를 과도하게 강조하면, 어쩔 수 없이 더 많은 수험생들이 EBS 수능강의를 시청하거나 <수능연계교재>에 매달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상대적으로 교육소외지역이나 저소득층 자녀들에게 다소 유리할 수 있다는 점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우리 학생들을 획일적 학습으로 유도하기 쉽고, 지문이나 유형 익히기 식의 얕은 공부, 겉핥기 공부를 일상화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자칫 공교육을 파행으로 몰고, 오늘 우리의 시대정신인 창의적, 자기주도적 공부와도 크게 어긋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공교육-EBS 수능강의-수능시험 삼자 간의 상호 교류와 협조, 수능강의의 지속적 질적 제고, 그리고 학생들의 학력신장을 매개로 할 때, 비로소 진정한 연계를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6. 두 번의 성공: <재원>의 장벽과 <인터넷 대란>이라는 망령

을 넘어

 

1997년과 2004년 두 번의 EBS 수능개혁 사업은 실로 엄청난 시련과 난관의 연속이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두 번 다 하늘의 도움 없이는 성공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두 번의 경우를 간략히 설명해 보겠습니다.

 

1997년 7월 위성교육방송이 출범할 즈음, 1996년 초에 닻을 올린 교육정보화의 사업이 한참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각급학교에 이미 TV가 보급되어 있었고, 한 학교 당 1 컴퓨터 교실을 확보했으나 통신회선의 부족, 교사의 IT 능력결여 등으로 전반적 교육정보화 수준은 아직 빈약했습니다. 교육부나 EBS의 입장에서는, 위성방송 수신설비를 구축하는 일이 당장 중요한 기술적 문제였으나, 보다 심각한 것은 이 대규모 TV수능방송을 위한 재원조달 문제였습니다. 당초 계획은 교육방송에 광고방송을 허가받아 이를 주재원으로 하고, 교재판매수입을 보조재원으로, 그리고 부족분은 국고로 지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공보처가 EBS에 광고방송 허가를 극력 반대했기 때문에 위성방송채널을 통한 TV수능강의 계획은 그 혁명적 발상에도 불구하고 거의 좌초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김영삼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광고방송 허가의 물꼬를 터주는 바람에 철옹성처럼 느껴졌던 <재원>의 장벽을 넘어 설 수 있었습니다. 이미 EBS가 1989년 이래 지상파를 통해 <고교 가정학습>을 제작, 방송하고 있었고, 그 얼마 전 부터 일정 기간 위성시험방송을 실시했던 경험이 축적되어 있었기 때문에 초기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일은 비교적 순조로웠습니다. 그러나 수능연계 문제, 강사충원 문제 등과 연관하여 적지 않은 논란이 있었고, 그 때 이들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했던 과정이 훗날 소중한 경험으로 남았습니다. 실시과정에서 박흥수 원장님의 열정과 돌파력이 돋보였습니다. 저는 위성교육방송이 출범하자마자 장관직을 떠났습니다.

 

그 후 7년 여가 지나, 2003년 말, 저는 교육부총리로 취임했습니다. 곧 이어 서둘러서 <2. 17 사교육비경감대책>을 발표하고, 그 핵심사업으로 <EBS 인터넷 서비스>를 내 세웠습니다. EBS 플러스 1 채널 하나를 수능강의 전문채널로 특화하여 24시간 전문방송을 하는 한편, e-러닝 시대의 총아인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초, 중, 고급의 수준별 교육을 하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위성방송이 매체의 한계로 인해 획일적이고, 단방향적인 프로그램 밖에 제공할 수 없었는데 반해, 이제 e-러닝이라는 진전된 개념 아래 수준별 쌍방향 학습의 새 시대를 연다는 것은 더 할 수 없이 고무적인 일이었습니다. EBS와 의논하여 개통일자를 4월 1일로 잡았는데, 체제를 갖춰 본격적으로 일에 매달린 것은 실제로 3월 5일 부터였습니다. 따지고 보면, 한 달 미만에 이 대형 사업을 성취한 다는 것은 실로 무리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는데, 당시에 제반 상황이 그것을 강제했습니다.

 

단기간 내에 대규모 사용자를 위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은 모험에 가까웠습니다. 무엇보다 초기 동시접속량이라는 미지수와 겨루는 일이 난제였습니다. 이 사업 자체가 사상 초유의 실험이기 때문에 시뮤레인션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전문가마다 예상 접속량이 달랐습니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동영상 서비스 사이트 중 가장 큰 사이트가 고작 동시 접속 2만명 정도의 사이트였는데, 우리는 많은 논란과 우여곡절 끝에 EBS에 최대 10만명을 동시에 동영상으로 서비스할 수 있는 서버 (Server)를 구축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서버를 구입, 장착하기에 시간이 너무 촉박했습니다. 실제로 장비 제작사인 미국의 CISCO가 공수한 마지막 장비가 천시만고 끝에 인천공항을 통과한 것이 3월 30일 새벽이었습니다. 이것을 시스템 구축 책임을 맡은 LG CNS가 하루 만에 세팅해서, 그 다음날 즉 4월 1일에 개통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한 가닥 위안이 되었던 것은 1997년 위성방송 출범 당시 정부 측 주역들이 고건(총리)-안

병영(장관)-서삼영(국장)-박경재(과장)이었는데, 7년 후인 이번에도 그 팀, 즉 고건(총리)-안병영(장관)-서삼영(전산원장) -박경재(국장)가 다시 모여 이 역사적인 사업을 함께 도모하게 된 것입니다. 우연치고는 너무 큰 우연이었습니다. EBS 측의 주역은 고석만 사장님이었는데 열정과 헌신, 그리고 전문성에 있어 발군이었습니다. EBS의 배종대 뉴 미디어 국장과 교육부의 배성근 과장도 유능성과 적극성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빼어난 일꾼들이었습니다. 이 구성이면 한번 해 볼만하다고 느꼈고 그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어렵사리 서버는 구축되었지만, 인터넷 대란’의 악몽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KT나 하나로 통신을 비롯한 주요 초고속 인터넷 사업자들이 수능강의 실시 발표 후 인터넷 백본망 증설, 기간망 증설, 부하분산, 가입자망 점검 등의 작업을 서둘러 진행해 인터넛 대란에 대비했으나, 특정시간대에 수능강의의 접속이 폭주했을 때, 해당 서버와 회선에 무리가 갈 위험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인터넷 서비스의 교육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서둘러서 모든 고등학교에 위성방송 수신기 및 안테나를 설치하고, 각 학교의 인터넷 통신속도 및 학내망 속도를 증속하는 일, 저성능 PC의 교체 또는 업그레이드 하는 작업 등 끝이 없었습니다. 아울러 산간, 오지 및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EBS 서비스를 고르게 제공하기 위해 이들에게 위성방송 수신기를 지원하고, 케이블 TV 시청료 인하를 추진하며, PC 및 인터넷 통신비 지원을 추진하는 등 교육복지 차원의 제반조치에도 소홀 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웠던 것의 하나는, 그 해 4월 15일에 국회의원 선거가 예정되어있어, 4월 1일 EBS 개통의 성패는 총선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 불문가지였습니다.

 

 

여기서 저는 교육인적자원부와 EBS와 더불어 유관기관간의 협력체제를 구축하는데 큰 힘을 쏟았습니다. EBS, 정보통신부, 전산원, KT, 하나로, 두루넷 등 유관기관 전문가들(13명)로 구성된 T/F 팀을 구성(3월 11일)해서, EBS에 구축되는 인터넷 시스템의 설계 및 구축을 점검, 지원하고, 국가망, 상용망, 등 통신 네트워크 차원에서 예상되는 제반 문제점을 점검하고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아울러 동시 접속자 폭증을 막기 위해, 각 학교에 가능한 한 위성방송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인터넷 강의는 미리 ‘다운로드’ 받은 후 학내망을 통해 활용하며, 개별 접속을 자제해 줄 것을 권고했습니다.

 

마지막 15일은 남기고는 교육부는 장관실을 비롯한 모든 방에 <D-15>라는 상황판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하루하루 날짜가 줄어들면서, 일은 폭주하고 긴장은 고조되었습니다. 장관을 비롯해 많은 직원들이 ‘올인’에 돌입했습니다. 전국 2,100여개 고등학교별 추진상황 모니터링 시스템이 구축되었으며, 홍보를 위해 언론사별 전담요원이 가동하기 시작했습니다. EBS도 마찬가지로 마지막 점검에 나섰습니다. 언론은 개통 초기 동시 접속자 폭증으로 인한 서버다운, 끊김현상, 접속지연 등 다양한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는 지적과 함께 ‘인터넷 대란’이 마치 필지의 사실인양 보도하기 까지 했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우군은 없었습니다. 심지어 청와대도 우리를 믿지 않았습니다. 극도의 소외감에 몸서리가 칠 정도였습니다.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다가 새벽에 잠을 깨면 온 몸이 흠뻑 땀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정작 언론을 비롯한 모든 외부의 회의적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교육인적자원부와 EBS 양측은 성공에 대한 확신 속에서 굳게 결속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개통 사흘 전에 기자회견을 자청했습니다. 아직 서버의 구축이 완결되지 않은 상황이지만, 프로그램과 콘텐츠와 네트워크의 품질, 그리고 유관기관의 대응 등을 총 점검한 결과 얼마간의 자신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기자들에게 ‘인터넷 대란은 없다’라는 메시지를 자신있게 발표했습니다. 기자들은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습니다.

3월 31일 저는 진대체 정보통신부 장관과 함께 <e-러닝 시대 개막에 즈음하여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라는 제하의 대국민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늘에 맡기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4월 1일 새벽 2시 개통에 앞서 저는 EBS 상황실에서 진대제 장관과 고석만 EBS 사장과 더불어 마치 야전사령관처럼 e-러닝 연창륙을 진두지휘하였습니다. 그날 아침 날이 밝으면서 모든 언론은 EBS 수능강의, 인터넷 서비스가 성공했음을 일제히 보도했습니다.

그날 이후 교육부는 이 여세를 몰아 e-러닝 체제 구축방안의 일환으로 이른바 사이버가정학습 지원체제 구축에 다시 ‘올인’ 하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넷 개통 100일 이 되는 날, 7월 9일 오후 4시 EBSi는 드디어 회원가입 100만을 돌파했습니다. 완벽한 성공이었습니다.

 

7. 인터넷 수능 서비스: 성공적 정책사례의 예

 

2004년 4월 1일 고고의 성을 울린 <EBS 수능방송, 인터넷 서비스>은 보기 드문 성공적 정책사례입니다. 실제로 그 해 8월 국무조정실은 이 정책사례를 2004년 참여정부의 대표적 정책 성공사례로 뽑았습니다.

이 사업은 동시접속 수용인원이 10만명 이상을 겨냥한 세계에서 유례없는 교육정보화 사업으로, 최단기간 내에 ‘인테넷 대란’에 대한 많은 이의 우려를 떨치고 기적과 같은 성공을 일궈낸 정책사례 입니다. 무엇보다 그것이 IT 산업의 새로운 흐름인 방송, 통신, 인터넷을 융합하는 ‘디지털 컴버전스’를 선도하여 IT 강국의 면모를 과시하고, 아울러 첨단산업분야의 국가적 경쟁력을 향상시켰다는 점에서 국제적 관심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범적 정책사례의 성공요인은 무엇인가. 한번 되짚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한국의 세계최고의 정보통신 인프라와 학교의 e-러닝 준비도가 이 사업을 성공으로 이끈 가장 큰 열쇠였습니다. 2004년 인터넷 서비스의 성공은 바로 이러한 IT 경쟁력의 기반 위에서 가능했고, 동시에 그것은 한국이 IT 강국으로 또 한번 도약하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두 번째, EBS의 콘텐츠 개발능력, 경륜과 기술수준이 성공의 주요한 발판이었습니다. 사업당사자로서 EBS는 모든 주요한 결정에 참여하여 합리적인 방안을 제시했고, 사업 전체를 조감하면서 협력체계의 주요한 고리 역할을 했습니다. 막판에는 자체적으로 별도의 비상대책반을 가동해 수능방송을 24시간 모니터링하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습니다.

 

세 번째, 정부(교육부, 정통부)와 민간부문(EBS, LG CNS, KT 등 통신사업자) 간의 긴밀한 연대와 효과적인 협력이 사업성공에 주요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교육부와 EBS, 그리고 정통부의 협력은 환상적이었습니다. 또 교육부는 민간부문의 협조를 최대한으로 이끌어 낼 수 있도록, 3월부터 13개 민간 유관기관의 전문가 위주로 구성된 시스템 전문가 T/F 팀을 구성하여 그들의 자발적 협력과 전문성 및 노하우를 최대한으로 활용하였습니다. 이들은 또한 학교정보화 인프라를 점검하고, 수능강의 시스템과 통신망에 대한 기술적 검토를 통해 통신망을 고려한 서버의 최적 배치, 동시접속 수요분산 대책 등 현안으로 제기된 제반 문제들을 전문적으로 진단하고 치밀하게 보완함으로써 인터넷 대란을 사전에 봉쇄했습니다. 저는 이들의 치밀한 준비과정을 지켜보면서, 물샐 틈 없는 <완벽한 준비>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들 민간 IT업체들은 EBS 인터넷 서비스를 위한 장비증설에도 수 십억원을 투자하는 놀라운 열의를 보였습니다. 3월 29일 이들 민관 기관들이 모두 함께 참여한 <합동상황실>은 중앙사령탑으로서 서비스 개시 전에 시스템 운영 준비상황을 종합적으로 점검하고 유사시에 신속하게 대응하기에 만전을 기했습니다.

 

네 번째로 모든 관계자들의 사심 없는 헌신과 열정이 이 큰 사업을 성공으로 이끌었습니다. 정보통신부는 처음에는 교육부와 EBS의 무모한(?) 모험을 말리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되돌아 올 수 없는 강을 넘었다는 것을 직감하자, 진대제 장관은 두말없이 이 흔들리는 배에 동선, 저와 함께 조타석에 앉아, 끝까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가 옆에 앉았다는 사실 자체가 제게는 더할 수 없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1997년에 교육정보화 국장으로, 또 2004년에 한국전산원 원장으로 이 국책사업의 성공을 위해 혼신을 다 했던 고(故) 서삼영 원장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아울러 정작 이 사업의 주인공으로 열과 성을 다해 이 기념비적인 사업을 구체적 성공으로 이끈 EBS의 임직원 모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8. EBS 수능강의의 성과

 

EBS 수능강의의 사교육비 경감효과에 대해서는 조사마다, 그리고 시기마다, 그리고 지역이나 대상에 따라 차이가 있기 때문에 한 마디로 집약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구 및 조사는 매우 유의미한 성과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2012년 7월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EBS 덕분에 지난해 약 9000억원의 사교륙비가 줄어들고, 고등학생 자녀 한 명당 사교육비가 월 평균 30만원이 감소했다”고 말했습니다.

 

대부분의 조사에서 사교육비 감소효과는 서울의 경우 강남보다 강북에서, 서울보다 지방에서 큰 것으로, 그리고 대도시 지역에 비해 군지역에서 더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부유한 가정에서 보다 서민층에서 사교육비 절감효과가 더 큽니다. 이렇게 볼 때, EBS 수능의 사교육비 절감효과는 특히 교육소외지역 및 저소득층에서 더 두드러지게 부각되었습니다. 말하자면 EBS 수능이 당초부터 겨냥했던 두 가지 목표, 즉 사교육비 경감과 교육격차 해소가 서로 엇물려서 플러스 방향으로 상승적으로 작용했다고 불 수 있습니다.

 

EBS 수능 인터넷 서비스는 세계 최초로 국가차원의 e-이러닝 서비스입니다. 더욱이 e-러닝은 지식기반사회, 평생학습과 가장 궁합이 잘 맞는 인적자원개발 수단입니다. 그런데 그 새 시대가 바로 EBS 수능에 의해 개막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감동적인 일입니까. 당시 교육부 그 여세를 몰아, 전국 16개 교육청에서 전국적 규모의 ‘사이버 가정학습 서비스’가 본격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학생들이 e-러닝을 활용하여 교수-학습 과정에 적극적, 주도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교육혁신과 공교육의 경쟁력 강화에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또한 교사들도 e-러닝을 매개로 교사들 상호 간의 노하우를 공유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다양한 교수방법을 공유하고 지식의 폭을 넓혔습니다. EBS 수능강의가 가져다 준 간접효과도 상당합니다. 우선 학교 현장의 정보화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무엇보다 정보의 소통로, 즉 ‘도로정비’를 말끔히 정리 했습니다.

 

저는 인터넷 서비스가 성공한 2004년 4월의 마지막 날, 칠레 산티아고에서 열린 제3차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교육장관회의에 참석하여, ‘ E-learning Korea'라는 제목으로 ’정보통신교육분야‘의 주제연설을 하였습니다. 이후 세계 여러나라의 정부와 교육관계자들은 한국의 e-러닝을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아 e-러닝 현장을 견학하려는 각국의 발길이 이어졌습니다. 그해 7월, ’2004 정부혁신 국제박람회‘에서 EBS 수능강의가 교육인적자원부의 대국민 서비스 혁신사례로 선정되었습니다.

 

수능방송의 경제적 효과도 만만치 않습니다. 처음 위성교육방송이 출범할 때나 두 번째 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할 때 모두 컴퓨터나 TV 등 수능방송관련 제품의 수요가 크게 늘었습니다. 1997년 지상파 교육이 위성교육으로 확대되었을 때에 부도위기에 몰려있던 a 가전회사 급증한 수상기 수요로 중단됐던 생산라인이 재가동했던 것은 유명한 얘기입니다. 2004년 수능 인터넷 서비스가 시작할 때도 비교적 단기간에 1조를 훨씬 넘는 IT 및 전자산업의 경기부양 효과를 몰고 온 것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EBS 수능으로 촉발된 e-러닝의 활성화는 관련 산업군의 확장과 더불어 복합적이고 연쇄적인 산업, 경제 확장성을 시현했습니다. 컴퓨터 산업(PC, 메모리, 하드디스크), 가전산업(TV, VTR, DVD 등)의 확대를 비롯하여 , 인터넷 통신산업 활성화도 괄목할 만 했습니다. 아울러 차세대 PC, 디지털 TV 및 홈 네트워킹 산업과의 융합 등 파생시장이 창출되었습니다. 아울러 동영상 관련 처리기술(저장, 전송, 압축, 검색기술) 발달을 촉진하고 기술표준화로 글로벌 마켓에 진입하는 소득을 얻었습니다. 아울러 교육 및 정보통신분야에 상당한 고용증대 효과도 가져 왔습니다.

그런가 하면 정부는 EBS 수능강의와 e-러닝 활성화를 소외계층의 복지증진과 연계하는 데 세심한 정책적 배려를 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EBS 수능강의 인터넷 서비스의 시행과정에서 소외지역 및 소외계층에 대해 각종 통신편의를 제공하고 수능 교재를 지원함으로써, 이들에게 고른 교육기회를 제공하는데 추호의 흐트러짐이 없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정부의 다른 부처들도 이들 소외계층에게 양질의 학습기회를 제공하는데 기꺼이 동참했습니다. 행자부의 정보화 마을(103개), 문광부의 문화의 집(141개), 보건복지부의 공부방(600여개)가 그것이었습니다. 교육부도 방과후 학교를 개발하여 수능방송 공부방으로 활용하도록 주선을 하였습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EBS 수능강의가 이 땅의 많은 소외계층에게 한 줄기 빛이 되고, 꺼지지 않는 희망의 불꽃이라는 점을 크게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EBS 수능의 도움으로 불가능하다고만 여겼던 자신의 꿈을 실현한 많은 산 증인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오늘 이 순간에도 이 땅에는 EBS 수능방송에 의지해서 자신의 꿈을 가꾸고 있는 수많은 불우 청년들이 있습니다.

 

9. 남아있는 문제들

 

어느 사업이나 빛과 그림자가 있습니다. EBS 수능강의도 여기서 예외가 아닙니다. 아직도 EBS 수능강의에 대한 사회일반, 학부모와 학생들, 그리고 교육계, 교육학계의 비판과 불만이 적지 않습니다. 또 학생들의 만족도와 활용도도 천차만별입니다.

 

아예 ‘수능방송은 범죄다’라고 까지 극언을 하는 유명 시인도 있습니다. EBS와 교육부는 마음에 내키지 않더라도 이러한 다양한 목소리에 대해 겸손한 심경으로 경청을 해야 될 것입니다.

교재와 연관되어 계속 문제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대체로 수가 너무 많아 교재구입비가 가계에 부담을 준다는 얘기입니다. 교재 판매액 수익금의 환원문제도 자주 등장하는 쟁점입니다. 그런가 하면, EBS 수익금이 계속 증가하니, 이제 교육부의 특별교부금을 중단하거나, 크게 줄여야 되지 않겠느냐는 말도 나옵니다. 이 밖에 수능강의를 하는 강사 및 강의의 질도 가끔 도마위에 오르고, EBS의 관료적 분위기도 비판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저는 얼마 전 인터넷에서 “학원 뺨치는 중학 EBS 인강, 과목당 12만원”이라는 기사를 보고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내용인 즉, ‘프리미움 강좌’라는 이름으로 중학생을 위한 내신 대비용 강의를 개설했는데, 모두 유료라는 것입니다. 이유인 즉, 중학교 과정은 정부지원이 없기 때문에 불가피하다는 얘기였습니다.

 

이 모든 쟁점에 대해 제가 하나 하나 따져 볼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EBS는 수능강의가 당초에 무상으로 제공되는 공공재로 출발했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수능 프로그램에는 교육복지적 측면이 크게 담겨 있다는 사실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수능강의를 비롯한 EBS의 다양한 교육, 문화 프로그램들은 우리 사회에 건전한 humanware 양성의 책무가 있다는 점도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humanware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논의하겠습니다.

 

교육부에게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EBS 수능강의는 국가가 주도한 사업 중에서 드물게 보는 장수 프로그램입니다. 또 그것은 비교적 성공적인 프로그램입니다. EBS는 공공기관으로서 자신의 공적 책임에 입각해서, 공공재로서의 구실과 교육복지에 대한 책무를 다하고, 아울러 건강하고 유익한 humanware의 양성에 힘써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자면, EBS는 사적 시장의 온라인 교육매체들과 달리 적지 않은 인적, 물적 부담을 짊어지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교육부는 이 점을 명심하고, 앞으로도 EBS와의 지속적 유대를 유지하면서, 따듯한 관심과 큰 폭의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양자의 이러한 동반자 관계만이 EBS의 수능강의 프로그램이 이제껏 그러했듯이 미래에도 그 역사적 책무를 다하며 제 빛을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10. 사람이 미래다: 휴멘웨어 (humanware), 기술윤리, 그리고 정체성 자본

 

한국이 IT 강국이라는데는 누구도 별로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한국은 세계적 수준의 정보통신 국가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EBS 수능강의 인터넷 서비스>의 성공도 이러한 바탕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이 진정으로 정보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hardware, software, 그리고 humanware의 세 가지 요소가 다 제 몫을 해야 합니다. hardware는 통신망과 컴퓨터기기와 같은 정보화의 하부구조입니다. 우리가 자랑하는 부분입니다. software는 정보의 ‘콘텐츠’입니다. 그 나라의 정보화의 수준은 건 바로 이 정보의 내용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음 humanware는 정보를 만들어 내는 정보사업자와 정보를 이용하는 정보이용자를 말합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정보사업자가 건전하고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고, 정보이용자가 깨끗한 정보를 사용하면, 그 나라야 말로 정보강국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정보를 이용하는 사람은 많은데, 그 대부분이 게임과 노름만 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컴퓨터로 좋은 정보를 많이 이용할 수 있어야 진정한 IT 강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초.중등 교육 콘텐츠 개발에 있어서도, 비단 교과교육에 대한 교수-학습자료 뿐만 아니라, 인성교육 및 창의성 교육, 그리고 정보윤리에 대한 콘텐츠 개발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EBS는 앞으로 전체 프로그램의 구성 및 개발에서 이러한 맥락에 각별한 관심과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능강의의 단기적 성과를 넘어, 최상의 humanware 양성을 위한 배전의 노력을 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하나의 특징은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는 속도는 무척 빠르나, 기술윤리 technology ethic가 이를 따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양질의 humanware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네티즌들이 건전하고 유익한 정보에 접근하고, 불건전 정보를 멀리하고 혐오하는 건강한 정신과 윤리의식을 내면화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렇게 볼 때, 정보강국은 정보화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문화강국이 될 때, 비로소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정보윤리교육을 강화하고 정보인권체제를 보다 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EBS가 이러한 노력에 중심에 설 것을 청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인적 자본(human capital)이라는 개념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는 경제적 관점에서 사람의 가치를 바라 볼 때에 많이 쓰는 개념입니다. 따라서 유능성과 생산성이 강조됩니다. 한편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의 개념은 신뢰성에 역점을 둔 개념입니다. 가정과 사회조직, 그리고 큰 사회가 원활하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사회 내에 신뢰가 형성되는 일이 매우 중요하며, 이것이 쌓여질 때 사회적 자본이 축적됩니다. 여기 덧붙여서 최근에는 문화적 자본(cultural capital)이라는 개념이 크게 부상하고 있습니다. 이 개념은 개인의 예술적, 문화적 경험과 학습을 통하여 체화된 문화적 산물을 말합니다. 즉 인간의 사고나 행동양식에서 드러나는 문화적 향기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과거에는 국가나 개인의 발전에서 인적 자본의 중요성이 크게 강조되었지만, 근래에는 사회적 통합과 높은 수주의 발전을 위해 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이 매우 v필요하다는 점이 두루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적, 사회적, 문화적 자본의 통합된 총제를 ‘정체성 자본(identity capital)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정체성 자본의 개념은 말하자면 유능성과 인격성의 총화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유능성과 인격성이 높은 수준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룰 때, 인간의 정체성은 가장 찬연히 빛납니다.

 

이상의 논의에서 EBS가 앞으로 나갈 길이 분명히 보입니다. humanware의 개발, 기술윤리, 정보윤리의 강화, 그리고 정체성 자본의 추구가 그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여러 방송국이 있고 수많은 채널이 있지만 이러한 도덕적 책임을 다 할 수 있는 방속국은 별로 눈에 띠지 않습니다. 그러나 EBS는 그것을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EBS는 최근 다큐 프라임과 같이 격조 높고 문화적 향기가 드높은 양질의 프로그램을 통하여 국민으로부터 사회적 신뢰를 얻고, 아울러 정체성 자본 형성에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EBS 수능강의 프로그램의 제작에 있어서도 EBS가 이러한 관점을 폭넓게 수용하기 바랍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이른바 스타강사의 현란한 말솜씨와 감성적 자극을 매개로 한 기능적 명강의 보다 진정성과 교육적 관점, 그리고 얼마간 영혼이 곁들인 현장교사의 소박한 강의를 더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EBS는 한시라도 자신의 공공성, 교육복지적 관점, humanware적 접근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사적 시장의 온라인 매체들과의 차별성도 바로 여기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에필로그

EBS는 이제 공교육의 보완이라는 본연의 역할을 재인식하고, 철저한 질 관리를 통하여 미래세대들의 정체성 자본을 높이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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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남수 2013.11.02 09:31 Address Modify/Delete Reply

    EBS 주최 행사에서 인사만 드리고 서둘러 자리를 떠나 무척 아쉬웠는데 여기서 그 말씀을 들을 수 있어 참 기쁩니다. 기대했던대로 교육방송 수능강의의 목적과 의의, 그리고 그 쉽지 않았던 실현과정을 소상하게 말씀해 주셔서 교육방송과 교육부 관계자는 물론 많은 관계자들에게 교육방송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일깨워주었으리라 믿습니다. 저 역시 여러 번 말씀으로 들었습니다만 새롭게 또 더 깊이 있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제 새벽에 국정감사를 마치고 이제야 조금 마음의 여유가 생겨 현강재에 들어와 보았습니다. 늘 존경하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2. 현강재 현강 2013.11.02 18:21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무척이나 바쁘실텐데, 제 글을 다 읽으셨다니 무척 고맙습니다.
    부디 나라 위해 큰 일 많이 하셔서, 역사에 남는 명장관이 되기기를 빕니다.

                                I.

  1971년 초 유학에서 돌아 왔다. 공황에 나왔던 친구가 나를 보자 요즈음 장발단속이 심하다며, “머리부터 깎아야겠다 ”라고 말했다. 나는 이미 한국에 장발단속 소문을 들었기에 웃으면서 “그래야지”라고 답했다.

  그런데 막상 머리를 깎으려니, 영 내키지 않았다. 우선 반민주적 권위주의 정부가 1945년 제정된 경범죄 처벌법을 근거로 퇴폐풍조를 일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한다는 것 차제가 전형적인 파시스트 수법 같아서 울화가 치밀었다. 뿐만 아니라 단속이 겁나 스스로 머리를 깎는 일이 마치 체제를 마음으로 수용하는 것 같아 따르기가 싫었다. 1968년 권위주의적인 구질서를 혁파하려고 봉기했던 진보적 학생운동이 유럽을 휩쓸 때 내가 그곳에서 공부했고, 당시도 히피의 반문화 운동이 전 세계를 들썩이게 하던 때였기에, 그러한 시대적 배경도 내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래서 궁리 끝에 결국 머리를 스스로 깎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러한 결정이 무슨 비장한 결의위에 이루어 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거기에는 소극적 저항심과 더불어 얼마간의 장난기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어디 할 테면 해 봐라. 내 손으로는 안 깎는다. 나도 한번 버틸 때까지는 버텨 보겠다는 생각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후 몇 년 동안 나는 장발 때문에 만만찮은 수난을 겪었다.

 

                            II.

  당시 뒷머리가 옷깃, 옆머리가 귀에 닿으면 장발에 해당되었다. 그런데 내 머리는 그 보다 훨씬 길었다.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그랬듯이 내 경우도 내 처가 집에서 조발을 했는데, 얼굴이 둥그니 머리가 좀 긴 게 낳아 보인다고 항상 머리끝만 조금씩 자르곤 했다. 귀국 후에도 처가 머리를 깎으니 늘 머리가 꽤 긴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당시의 안목에서는 장발 중에도 장발에 속했다. 우리 가족에게는 그 모습이 익숙한데, 다른 이들에게는 조금 지나치다 싶었을 게다.

 

  귀국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내가 정부 종합청사에서 일하는 가까운 친구 C군을 찾아 갔다. 그 친구가 근무하는 큰 방을 여니, C군이 황급하게 내게 다가와 내 등을 밖으로 밀어 내면서, “아니 너 예수님 머리를 하고 어떻게 감히 정부청사에 들어 올 생각을 했어. 모두 놀라서 네 얼굴만 처다 보잖아”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내 긴 머리를 지키기는 일이 앞으로 그리 수월치 않을 것을 예감했다.

 

  첫해는 이 대학, 저 대학 강사로 열심히 뛰었다. 몸이 큰 편이고 굵고 검은 안경테라 제 나이 보다 더 먹어 보였지만, 그 때 세는 나이 31세였으니 영락없는  ‘장발의 젊은 이’였다. 그러니 불신 검문에 걸려 거리에서 바리캉으로 머리 깎일 위험은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거리에 나설 때는 언제나 조마 조마했다. 그러나 그 해는 요행이 잘 지나갔다.

  다음해 나는 한국외국어대학에 조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같은 대학에 무척이나 보수적이고 고집불통인 Y라는 전설적인 체육교수님이 한분 계셨다. 50대 후반 쯤 되신 분인데, 장발의 남학생이나 미니스커트의 여학생을 보면 어김없이 잡아 크게 혼을 내신다는 분이셨다. 당시 만해도 외대가 전임교수 70명 정도의 작은 학교였으니, 교수들 간의 접촉도 비교적 잦은 편이었다. 그런데 Y교수님에게는 내가 꽤 못 마땅한 존재였던 것 같다. 그래서 멀리서 내 모습이 보이면 아예 발길을 돌리시던가 아니면 의식적으로 외면하곤 하셨다. 동료교수들도 장난삼아 내게 “Y 교수님한테 아직 안 걸렸어”하고 자주 물었다. 그러다 보니 외대에 있었던 3년 반 동안 Y교수님과는 한 번도 말씀을 나누지 못했다.

 

                         III.

  그러나 그 힘든 세월이 나만 피해 갈 수는 없었다. 1972년 유신 선포 이후 장발단속은 더 심해 졌다. 1972년에서 1974년 간 세 번이나 장발단속에 걸려 파출소에 잡혀 갔다, 요행히 그때그때 풀려 나왔지만, 대학교수로서 할 짓은 아니었다. 자초지종을 말하면 다음과 같다.

 

  1972년 가을로 기억된다.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야간 강의가 있어 동순동으로 가려고 신설동에서 택시를 기다리다가 순경에게 잡혔다. 신설동 파출소로 연행되었는데 아무리 사정을 해도 막무가내였다. 승강이를 하다 보니 이미 수업시간을 넘겨 버렸다. 겨우 파출소 내에 전화를 빌려 행정대학원 수위실에 전화를 걸고, 내 수업을 기다리는 학생 한명을 바꾸어 달라고 청을 했다. 한 학생이 전화를 받기에 내가 사정이 생겨 오늘 휴강을 하게 되었노라고 얘기했다. 그랬더니 그 학생이 무슨 안 좋은 일이냐고 걱정스레 묻기에, 내가 장발단속에 걸렸는데, 그냥 풀려 날 것 같지는 않다고 곧이곧대로 말했다. 그랬더니 그 학생이 “파출소 순경을 좀 바꿔 주십시오”하는 게 아닌가. 내가 소용없는 일이라고 했더니, 그래도 자꾸 바꾸라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나를 잡아 온 순경을 바꿔 주었다. 두 사람이 몇 마디 나눈 후, 수화기는 다시 내게 넘겨졌다. 그러자 저쪽 학생이 “교수님, 저는 서울지검의 K 검사 입니다. 얘기가 잘 되었으니 택시타고 그냥 오세요” 하는 게 아닌가.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2부가 공직자를 위한 석사과정인데, 요행이 내 전화를 받았던 학생이 현직 검사였기에 예상치 못한 도움을 받은 것이다.

 

   두 번째는 1973년 늦가을이었다. 당시 내가 우이동 유원지 근처에 살았다. 마침 일요일이라 편한 옷차림으로 동네 어귀로 한가로이 산책을 나갔다가 순찰 중이던 순경에게 잡혔다. 그 순경은 다짜고짜 나를 오토바이 뒤에 태우고, 수유리 장미원 근처 파출소로 직행했다.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보기는 그 때가 처음이었고, 그 후에도 다시는 그런 일이 없었다. 장미원 파출소에는 이미 유원지 일대에서 잡혀 온 더벅머리 장발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내가 파출소 소장에게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되냐고 물었더니, 큰 차가 오면 모두 함께 뚝섬으로 옮겨져 즉심에 회부되고, 머리 깎이는 것은 물론이고 아마 하루 구류처분을 받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다음 날 강의 걱정이 앞섰고, 아울러 즉심에서 직업을 물으면 어쩌나하는 생각부터 구치소에서 지낼 하루 밤, 바리캉으로 마구 잡이로 깎일 내 머리 모습까지 파노라마처럼 뇌리에 스쳤다. 바로 그 때 창밖을 보니 우리 동네 통장님이 지나가다 힐끗 파출소 안을 쳐다보는 게 아닌가. 나는 급히 그에게 손짓을 했다. 그는 파출소 안을 들여다보고 즉시 상황을 파악한 후, 평소 안면이 있는 파출소 소장을 밖으로 불러내어 열심히 설득했다. 얼마 후 나는 큰 차가 오기 전에 풀려 나왔다.

 

   세 번째는 1974년 봄 서울 한 복판 명동에서 빚어졌다. 당시 서울대학교 김운태 교수님 주관으로 정치학자 6인 공저 <한국정치론>(박영사, 1975년 초판) 집필을 하고 있었는데, 그 중간 점검 모임이 명동에서 있었다. 다른 5인이 다 중견이상 원로 교수님들이었기에 내게는 조금 어려운 자리였다. 그래서 조금 이른 시간에 잰 걸음으로 약속장소로 가다가 명동 파출소 바로 앞에서 경찰관에게 잡혔다. 매우 중요하고 빠질 수 없는 모임에 가는 길이라며, 선처를 부탁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파출소 전화로 약속장소에 전화를 걸어 김 교수님께 사정을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김 교수님께서 “알겠네, 잠간만 기다리게” 하시더니 한 걸음에 파출소로 달려 오셨다. 파출소 문을 열자마자, 김 교수님은 “누가 파출소장이야”하고 큰 소리로 물으시더니, 파출소장을 향해 “머리 좀 길다고 대학교수를 마구 잡아넣다니, 당신 정신 있는 사람이야”하고 일갈을 하시는 게 아닌가. 나는 무척이나 당황했다. 김 교수님은 평소에 온후하시고 말씀도 적으신 분인데, 파출소장에게 반말로 호통을 치시는 것도 의외였고, 혹시 파출소장이 이 어른께 거칠게 반응을 하면 어쩌나 싶어서였다. 그런데 의외로 파출소장은 공손하게 내 신분을 확인하더니 웃으면서 “저희들이 지나쳤던 것 같습니다”라며 순순히 풀어 주었다. 나는 너무 고마워서 파출소장에게 깊숙이 꾸뻑 했다. 나는 그 후에도 그날 그 장면을 가끔 머리에 떠 올린다. 당시 50대 중반이셨던 김 교수님은 이미 고인이 되셨고, <한국정치론>은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4판을 거듭했다.

 

                             IV.

   1970년대 중반을 넘으면서 장발 유행도 한물갔고, 자연 장발단속도 없어졌다. 그러는 가운데 내 머리도 많이 짧아졌다. 내 처도 “그냥 이발소 가서 깎지 그래” 할 때가 잦아졌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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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선일 2020.05.15 00:52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장발 단속에 대한 경험담 재밌게 읽었습니다
    요즘은 두발 자유화도 되고 또 트렌드라고 어느정도는 기르고 다니는 듯 합니다
    날이 점점 더워지는데 건강하십시오

                               I.

   <아우토스톱>은 독일어로 ‘차’(Auto)와 ‘멈춰!’(Stopp)의 합성어다. 말하자면 남의 차를 세워 편승하는 것을 말한다. 영어 'hitchhiking'과 같은 말이다. 흔히 젊은이들이 여름 철 여행할 때 돈을 아끼려고 많이 쓰는 방법인데, 1960년대 후반 내가 오스트리아에서 유학할 때도 그곳 대학생 사이에 크게 유행했다. 나도 1966-1968년간 여러 차례 <아우토스톱>을 통해 이웃 나라 여행을 했는데, 그와 얽힌 얘기가 적지 않다.

 

                            II.

   1966년 초, 베르린에서 언론학을 공부하던 친구 L군이 빈(Wien)으로 나를 찾아 왔다. 외국생활 석 달 만에 가까운 친구를 만나니 무척 반가웠다. 사흘째 되는 날, L군이 내게 잘쯔부르크를 함께 놀러 가자고 청했다. 그러면서 함께 <아우토스톱>을 시도해 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L군은 전부터 그래 보고 싶었으나 혼자는 엄두가 나지 않아 망설여 왔는데, 둘이면 한번 해볼 만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선뜻 그러자고 응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고속도로 진입로로 나갔다. 한 겨울이었는데도 이미 대, 여섯 명의 젊은이들이 도로 연변에 줄지어 서서 연상 지나가는 차에 손을 흔들고 있었다. 우리도 그 사이에 끼어 다가오는 차들에게 손을 내저으며 편승을 청했다. 그러나 모든 차들이 우리를 전혀 개의치 않고 그냥 지나쳐 달려갔다. 추운 가운데 한 시간 가량 버티며 고생을 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또 별로 성공할 것 같지도 않아, 마음을 접고 시내로 되돌아 왔다. 그날 오후 잘쯔부르크 행 기차를 탔는데 기차 값이 한국에 비해 엄청나게 비쌌다. 가난한 유학생에게는 기차여행이 무리하다는 생각을 다시 확인했다.

 

   그런데 유럽 체제 1년 쯤 되어 그곳 생활에 얼마간 익숙해지고, 독일어도 조금 된다 싶으니, 그간 잊고 지냈던 <아우토스톱>의 유혹이 가끔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돈 적게 들이고 견문도 넓힐 겸 외국여행을 하자면 그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느꼈다. 내가 비교적 염치심이 있는 사람인데, 왜 그 때 그렇게 ‘공짜’ 생각이 났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몇몇 한국인 선배들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한결같이 “망신스럽게 어떻게 길가에서 차를 세워! 노랑퉁이가 그러면 더 눈에 뜨여. 아예 생각도 말게”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나는 당시 오스트리아의 바로 이웃인 독일, 스위스 등지의 몇몇 대학도시들에 가보고 싶은 열망이 컸다. 그곳에 가서 그들 대학의 연구실, 도서관들도 찾아보고 학풍과 연구경향도 살펴보고, 지인들도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1966년 말 혼자 제2차 시도를 감행했다.

 

   초겨울 어느 날, 나는 첫 행선지를 빈에서 약 800Km 떨어진 독일 하이델베르크로 잡고, 아침 8시경 고속도로 진입로로 나갔다. 한참 기다릴 각오를 하고 옷도 두툼하게 입고 방한모도 썼다. 짐은 간단히 배낭에 꾸렸다. 그런데 웬걸 재수가 좋으려니 저 만치 첫 번째 다가오던 차가 미끄러지듯 스르르 내 앞에 서는 게 아닌가. 40대초의 인상 좋은 운전자가 차 창문을 내리고 내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내가 하이델베르크라고 답하니까, 그는 “아니 세상에 이런 일이!”하면서, 자기도 하이델베르크로 가는 길이라고 반겼다. 내가 태워줘 고맙다고 하니, 그는 먼 길의 무료를 달랠 대화 친구를 만났으니 오히려 자기가 운이 좋았다며 껄껄 웃었다. 무척이나 유쾌한 사람이었다. 긴 여행길에서 주로 그가 대화를 이끌었고, 나는 가끔 한마디 씩 거들었다. 그러다 보니 이른 저녁 시간에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했다. 이렇게 첫 번째 <아우토스톱>은 예상외로 쉽게 이루어졌다.

 

                                          III.

  이후 나는 얼마간 자신이 생겨 1967년, 68년 간 일곱 번이나 <아우토스톱>으로 긴 이웃 나라 여행을 했다. 숙박은 언제나 유스호스텔을 이용했다. 계절도 가리지 않고 시간이 나면 어깨에 배낭하나 걸머지고 길을 나섰다. 그렇게 경험을 쌓으면서 <아우토스톱>을 잘하려면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한지, 어느 지점, 어느 시점에 차를 잡는 게 유리한지, 어떤 경우 더 기다려야 하고, 어떤 경우 일찍 포기해야 하는지 등 나름대로 <아우토스톱>의 기본적인 노하우를 터득했다.

 

    세 번째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늦은 봄, 그 날 봄빛이 유난히 따스했다. 이른 시간에 잘쯔부르크에서 빈으로 향하는 고속도로 연변에 나갔다. 거기서 역시 <아우토스톱>을 위해 연도에 서있던 내 나이 또래의 일본인 젊은이를 만났다. 모자, 배낭, 팔뚝에 온통 일장기를 수놓아 첫 눈에 일본인인 줄 알았다. 그는 내게 다가와 자신은 함부르크 대학에 유학중인 학생인데 <아우토스톱>으로 유럽 곳곳을 여행한다고 떠벌렸다. 그러면서 한몫에 두 명 태우기를 꺼리는 운전자가 많으니, 차가 멈춰서면 우선 나부터 타라며, 크게 선심 쓰는 시늉을 했다. 내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자, 그는 팔뚝에 일장기를 자랑스럽게 가리키면서 자기는 언제라도 차를 잡을 수 있으니 걱정 말고 나부터 먼저 타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 시절 전후 일본의 경이적인 경제성장으로 유럽의 일본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고, 특히 독일이 제2차 대전 중 일본과 손을 잡았었기에 독일어권 국민들의 일본에 대한 친화감이 남달랐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친구 얘기를 듣는 순간, 나는 속이 뒤틀리고 부화가 났다. 그래서, “천만에, 자네가 먼저 왔으니 당연히 자네가 먼저 타야지”하고는 그와 거리를 두고 저만치 가서 섰다. 그러면서 ‘국력’의 차이가 뼈저리게 느껴져 마음이 아렸다.

 

   바로 그 순간 내가 그동안 <아우토스톱>을 비교적 잘 해 온 것도, 나를 태워준 운전자들이 나를 일본인으로 착각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끄러움이 크게 치솟으면서, 이제껏 그 사실에 둔감했던 나 자신이 꽤나 원망스러웠다. 돌이켜 보니, 그간 나를 태워준 운전자들 중 몇 사람의 첫 질문이, “당신 일본인이지오”였었다. 그럴 때면 나는 무심히 ‘아닙니다. 한국인입니다“라고 대답했는데, 그러면서 내가 일본인이기를 기대했던 그들의 속내를 제대로 읽지 못했던 것이다.

 

  그날 그 일본 청년을 미리 보내고, 요행이 얼마 안가 나도 차를 탈 수 있었다. 내가 옆 좌석에 앉아 마자, 그 운전자의 첫 질문도 “당신 일본인이지오”였다. 내 대답도 역시 예의 “아닙니다. 한국인입니다”였다. 그러면서 힐끗 그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실망의 빛이 역력했다. 그리고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도 할 말을 잊었다. 그 때 나는 다시 치밀어 오르는 곤혹감과 수치심, 자책과 분노 때문에 그냥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러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제 <아우토스톱>을 그만 둘까, 아니면?”

 

                                           VI

   <아우토스톱>을 그만 두는 것은 실제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런 수모를 느끼면서 구태여 거기 집착해야 할 절박감은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뭔가 내가 패배 내지 좌초하는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자문했다. 혹시 이 상황에서 한국인의 자긍심을 지키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방도는 없을까.

 

  잠시 후 나는 침묵을 깨고 먼저 운전자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면서 대화를 유도했다. 그도 마지못해 응대했다. 이후 나는 계속 대화 속으로 그를 끌어당기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도했다. 그러면서 내가 평균적 유럽인과 비교할 때, 언어능력은 떨어지지만 지적으로 훨씬 앞서고 있고,  비교론적 시각에서 유럽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들의 통상적 생각을 뛰어 넘는 자신만의 관점을 갖고 있다는 점을 스스로에게 일깨웠다. 더욱이 나는 비교적 유럽 역사에 정통하고, 그들의 정치. 경제, 그리고 문화에 관심이 크기 때문에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지적 토론을 통해 그들의 인식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내 운전자는 튜빙겐 대학에서 생리학을 전공하는 젊은 조교수였다. 그가 한국에 대해 이것저것 묻기 시작하기에, 나는 간략이 대답하고 주제를 의도적으로 유럽으로 옮겼다. 우선 그가 근무한다는 튜빙겐 대학의 역사, 학풍, 그곳 출신의 큰 학자들에 면면을 얘기했더니 크게 놀라는 기색이었다. 이어 나는 당시 서독의 외무장관이던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Ostpolitik), 유럽공동체(EC)의 앞날 등으로 주제를 옮겨가며, 유럽차원의 주요 쟁점에 대해 대화에 불을 붙였다. 그도 점차 흥미를 갖고 논의에 참여했고, 함께 펼치는 지적 대화를 크게 즐겼다. 그는 특히 내가 주제마다 그 역사적 경과를 숙지하고 있는데 감탄했다. 그러다 보니 네 시간이 훌쩍 지났다. 작별에 앞서 그는 내게 매우 많이 배웠다고 치하하며, 튜빙겐으로 나를 정중히 초대했다.  나는 고마움을 표하며  초대에 응할 수 없는 내 사정을 얘기했던 기억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그날 내 접근 방식은 성공적이었다고 느껴졌다. 나는 이제껏 남의 차에 공짜로 편승하면서 언제나 소극적 참여자였다. 운전자의 말을 경청하고, 간혹 그가 물으면 간략히 대답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내가 주제를 설정하고,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두 사람간의 소통과 교감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면서 한국인의 자긍심을 지키면서 그 유능성도 한껏 펼쳐 보였다. 그리고 보니 내가 아무런 반대급부 없이 남의 차에 그냥 편승한 게 아니라, 무언가 내 몫을 톡톡히 한 느낌이었다. 또한  일본 청년처럼 나라 덕을 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내 나라에 누를 끼치지는 않고, 그들의  한국에 대한 인식을 얼마간 우호적인 쪽으로 바꿔 놓았으리라는 생각을 하니 기뻤다.

 

                                       V

   이후 나는 <아우토스톱>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여러 나라의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며, 정보교류와  소통의 즐거움을 익혔고 견문도 넓혔다. 눈과 귀가 크게 트이는 느낌이었다. 또 그 바람에 독일어도 많이 숙달되었다. 대화도 운전자에 수준과 선호에 맞춰 다양하게 옮겨 갔고, 언제나 능동적으로 참여했다.  독일인들은 비교적 정치토론을 즐겼고, 오스트리아인들은 정치나 경제보다는 예술과 문화에 관한 대화를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그 쪽으로 대화를 이끌기도 했다. 그들은 너나없이 자기 나라 스포츠 영웅들의 얘기가 나오면 신나서 떠들어 댔다. 당시 독일인들은 축구신예 베켄바우어(Franz Beckenbauer)에 홀딱 반해 있었고,  오스트리아인들은 스키 황제 슈란쯔(Karl Schranz)에 열광했다.  나도 그들을 좋아해  숱한 일화를 알고 있었기에 서로 맞장구를 치며 즐겁게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당연히 한국도 대화 주제로 자주 등장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그들이 한국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전쟁의 참화를 겪은 세계 최빈국 중 하나라는 어두운 기억이 전부였다. 나는 한국이 고유한 역사와 문화를 가진 나라이며 뛰어난 발전 잠재력을 가진 나라라는 것을 많이 강조했다. 길지 않은 대화 속에서 과장이나 거짓 없이 한국을 인상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어떤 얘기를 하는 게 좋을지 많이 고민하고, 그를 위해 나름대로 적지 않은 노력을 경주했다.

  재미있는 일은 대화 중 내가 유럽의 역사 속 연대(年代)와 연도(年度)를  잘 외우는 것을 그들은 무척 신기하게 여겼다. 그래서 내가 고등학교 때 열심히 익힌 탓이라고 답하면, 어떻게 지구 저편에 있는 나라에서 서양사를 그렇게 소상하게 가르치냐고 묻곤 했다. 그럴때면 나는 속으로 그게 한국 특유의 주입식 교육의 알량한 성과이려니  생각하고 혼자 웃었다.

 

  되돌아 보면 나는 순전히 내 현실적 필요에 의해 <아우토스톱>을 시작했으나, 그것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얻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것은 내 유럽 체험을 보다 다양하고 풍성하게 만들었고, 그것이 내 유럽 사회에 대한 심층적 이해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나를 태워주었던  몇몇 운전자와는 운전자와 편승자의 관계로 시작해서, 지적 대화의 상대로, 그리고 좋은 친구로 발전하기도 했다.  당시 가난한 한국 유학생들 중 많은 이가 유학한 나라 밖을 거의 나가보지도 못하고 공부가 끝나자 마자 귀국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나는 <아우토스톱> 덕택에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유서깊은 많은 명문 대학도 두루 찾아 볼 수 있었다.

 

   근 반세기 전, 긴 세월 저 너머의 일이, 마치 어제 일인 듯 낭만적인 추억으로 다가온다. 그 옛날 석양녘 뮌헨의 고속도로 연변에서 손을 흔들며 차를 기다리던 그 홍안의 청년이 그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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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남수 2012.12.03 07:32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부총리님은 젊은 시절부터 역시 참 대단한 분이셨네요. 그 용기와 자세와 지혜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대학 다닐 때나 고시 공부할 때 주로 혼자서 국내 산천을 헤메고 다녔습니다. 빈번하게 휴교를 할 때나 행정고시 시험을 치고 난 직후 그리고 번번히 낙방을 하고 나면 그날로 배낭을 꾸려 훌쩍 떠나곤 했지요. 부총리님에 비하면 한참이나 수준이 낮았겠지만 벗도 없이 아무 말도 없이 시골길이나 산길을 무작정 걷던 그 홍안의 청년은 그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2. 현강 2012.12.04 11:21 Address Modify/Delete Reply

    서남수 총장님

    저는 문경 새재를 가면, 그 옛날 과거보러 혼자 봇짐지고 이곳을 넘던 가난한 선비들을 생각합니다. 아마 그 때도 부자집 도령들은 말타고 시종을 거느리며 편하게 갔겠지요. 그 가난한 선비들이 터벅 터벅 호젓한 시골길을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예상 문제를 풀어보기도 하고 배운 것을 되새기기도 했겠지요. 그러면서 가끔 자신의 부픈 꿈과 희망을 떠올리기도 하고, 진심으로 나라 걱정도 했겠지요. 한양으로 가는 긴 여정 속에서 이런 온갖 생각을 되씹는 가운데 아마 그들의 내공이 많이 쌓이고, 인간적으로 성숙해 졌으리라 생각합니다. 차관님이 고시 낙방하고 술로 지새지 않고, 훨훨 털고 홀로 산으로 향했던 것은 참 잘한 일입니다. 뭇 사람과 어울릴 때 보다, 자신이 혼자라고 느낄 때 사람은 더 단련되고 안으로 성숙해 진다고 생각합니다.

                                      I.

  나와 <신동아>의 인연을 각별하다. 우선 나는 아마도 <신동아>에 글을 가장 많이 쓴 필자의 한 사람일 것이다. 이 글을 쓰는데 도움을 주려고 며칠 전 <신동아>가 내가 그 동안 쓴 글의 목록을 보내왔다. 살펴보니 1976년 이래 <신동아>에 최근까지 40편의 글을 썼다. 그런데 그 중 23편이 한국 정치가 오랜 권위주의의 질곡에서 벗어나 민주화를 향해 숨 가쁘게 질주하던 1980년대에 집중되어 있었고, 특히 민주화의 불꽃이 가장 높게 치솟았던 1985년 초부터 1987년 6월 항쟁 직전까지 9편의 글을 썼다. 글은 대부분 신군부 정권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민주화의 당위와 그 나아 갈 길을 설파하는 정치평론이었는데, 글 목록 속에 그 질풍노도의 시기에 내가 느꼈던 분노와 절박감, 열망과 감동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1980년대는 내 40대와 그대로 겹치는 시기이다. 때문에 나는 그 리스트를 보며 1980년대의 <신동아> 속에서 가슴 뜨거웠던 내 40대의 초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장기간 <신동아>의 편집위원으로 일했다. 편집회의에서는 그 시대에 걸 맞는 공공의제를 찾아내고, 그것을 어떻게 다를 것인가를 열띠게 논의했다. 가끔 주요한 편집기획에도 참여했던 기억이다. 편집위원 중에 나 보다 20년 연상인 소설가 <이병주> 선생이 계셨는데, 가끔 달관한 경지의 말씀을 툭툭 던지셨던 것이 기억에 남아있다. 1991년, <신동아>가 환갑이 되는 60년을 기념하여 프레스센터에서 4번의 연속기획 토론을 가졌는데 공전의 성황을 이뤘다. 첫 번째 주제인 “제 3의 길은 있는가”에서 내가 사회를 보았고, 세 번째 주제 “복지국가의 길‘에서 내가 발제를 했던 기억이다. 지금부터 21년 전에 <신동아>가 복지국가 담론을 펼쳤으니, 당시 <신동아>는 분명 시대를 앞서가고 있었다.

 

                              II.

  1931년에 창간한 <신동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종합지이다.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폐간되는 큰 고난을 겪었고, 암울했던 권위주의 시절 민주화에 앞장 서는 등 우리 민족과 영욕을 같이 했다. <신동아>는 연륜에서 비롯되는 서지적 가치를 넘어 권위 있는 시대의 기록으로 한국 언론사의 기념비적 가치를 지닌다. <신동아>가 한창 낙양의 지가를 올렸던 1980년대 중반에는 40만부를 넘는 폭발적인 발매부수를 올렸다.

내 뇌리에 가장 인상적으로 각인되어 있는 1980년대의 <신동아>는 지식인 계층이 읽는 지성지와 대중이 읽는 종합지의 중간 정도의 성격을 지녔다. 얼마간의 상업성을 추구하고 있었으나, 사회와 시대에 대한 ‘의제설정’(agenda-setting) 기능을 성실히 했다는 점을 높이 사고 싶다. 시대적 고뇌를 같이 하며, 우리 사회가 무엇을 아파하는지, 우리 사회가 앞으로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성찰적 자세를 잃지 않았다. 당시 편집위원들도 당대를 향하여 비판적, 창조적 지성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불타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진입한 후, <신동아>는 지성지의 성격이 크게 약화되고, 교양 있는 일반 대중이 읽는 종합지로 변모했다. 그러면서 지성지의 핵심인 의제설정 기능을 잃었다. 영국의 <에코노미스트>나 프랑스의 <렉스프레스>도 시대와 더불어 지성지에서 종합지로 바뀌었으나, 아직도 의제설정 기능이 엄연히 살아 있는 것과 극명하게 비교가 된다. 그래서 내 마음이 아프다.

 

                                   III.

  시대와 매체상황이 크게 달라진 오늘 <아! 옛날이여>를 외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내게 고언이 허락된다면, <신동아>가 현재의 백화점식 편집에서 얼마간 탈피해서, 우리 시대의 관심 주제를 한 발 앞서 제시하고, 시대의 아픔과 희망을 함께 토론하는 열린 광장의 구실을 해 줄 것을 감히 청하고 싶다. <신동아>가 너무 무겁지 않게, 흥미를 돋우면서, 이념적으로 편향되지 않은 방식으로 의제 설정 기능을 왕년의 반쯤이라도 되살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얘기다. 오늘 이 땅의 주요 언론매체들이 이념적으로 편향되어 있어 실제로 이런 공간이 크게 비어있다. 때문에 <신동아>가 이 빈틈을 슬기롭게 파고든다면 그러한 시도가 무모하지 않으리라 생각이다.

 

  오랜 연륜과 더불어 사회적 책임과 시대적 사명을 안고 있는 <신동아>가 창간 81년인 올해를 의미있는 변화와 발전의 계기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신동아 2012년 11월호>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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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eplica rolex 2013.03.20 17:15 Address Modify/Delete Reply

    나는 아주 긴 시간의 정보를 쓰기 기업의 이러한 종류를 읽을 그리워했다.

  2. chanel replica 2013.03.20 17:16 Address Modify/Delete Reply

    게시물 이러한 종류 알아 두는 건 좋은 것은 무지와 초보자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