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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에세이

1.4 후퇴와 피난길 (II)

2017. 2. 25. by 현강

                                     I.

1월 초의 추위는 살을 에는 듯 매서웠다. 많은 수의 남녀노소가 짐 보따리와 함께 떼 지어 움직이니 피난대열은 혼잡스럽기 그지없었다. 그 북새통에 아이들의 울음소리, 한발이라도 빨리 가려다 서로 얽혀 밀려 넘어지며 내지르는 고함소리, 가족을 잃고 비탄에 젖어 울부짖는 소리가 진동했다. 한마디로 아비규환이었다.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오직 ‘살겠다는’ 의지하나로 큰 물결을 이루며 남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평택>에서 <천안>까지는 주로 철로를 따라 갔던 기억이다. <성환> 가까이 갔을 때, 멀리 철로 주변에 시체가 두 구(具)가 나동그라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 눈에 기차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어머니가 황급히 손을 뻗혀 내 눈을 가리셨다. 그러나 그 순간 내 뇌리에 마지막 열차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자신을 묶으셨던 아버지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그 곳으로 달려갔다. 다행이랄까 모르는 사람들의 주검이었다. 기차에서 추락하면서 머리를 크게 다친 듯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고, 이미 시신을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그 때 나는 난생 처음 사람이 죽은 모습을 보았다. 무척 충격적이었다. 이후 철도 연변에 쓰러져 있는 시신들을 자주 보았다. 기차 지붕에 웅크리고 있거나 난간에 매달려 졸다가 기차가 한 밤중에 터널을 지날 때 부딪혀 떨어진 경우가 많았다. 매번 어머니가 말리셨지만, 나는 ‘만(萬)에 하나’ 어버지가 일을 당하셨으면, 외아들인 내가 시신을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에 현장으로 달려가곤 했다. 그러면서 내 딴에는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겼던 것 같다.

 

그러나 정작 경악한 일은 천안 역 앞에서 경험했다. 하행 군용기차 뒤편에 미군 탱크가 두 대 실려 있었는데, 피난민들이 벌 떼처럼 탱크로 기어오르다가 장전되어 있던 기관총을 건드려 총알이 마구 난사가 된 것이다. 순식간에 피난민 서너 명이 쓰러지고 탱크 주변은 피범벅이 되었다. 미군 헌병이 소리치며 말리는 데도 막무가내로 위험을 무릅쓰고 탱크로 오르던 피난민들이 참혹한 죽음을 당한 것이었다. 비명소리, 구호를 외치는 소리, 놀라 울부짖는 소리로 주위는 온통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사 장면을 나는 불과 3-4m 떨어진 곳에서 생생하게 보았다. 엄청난 충격으로 나는 그 순간 온 몸이 얼어붙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서 나는 사람의 생사가 이렇게 갈리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후 한 동안 그 피빛의 적나라한 장면이 눈에 자주 아른거려 나를 괴롭혔다.

 

                                      II

<천안>을 지나면서 그동안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공산군의 기세가 크게  꺾이었고, 전선(戰線)도 <오산> 근처에서 교착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에 피난민들은 한숨을 돌렸고 정서적으로도 안정을 되찾았다. 한 겨울이라 일찍 날이 어두워졌다. 하루 걸러 눈도 오니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날이 저물기 시작하면 다른 이들 보다 일찍 발걸음을 멈추고 잘 곳을 찾으셨다. 대체로 수소문해서 동네 구장이나 유지집을 찾아 사정을 얘기하고 저녁과 방값으로 비교적 넉넉하게 얼마를 건네곤 하셨다. 어떤 집에서는 안방을 내 주는 집도 있었다. 그래서 피난민치고는 비교적 잠자리는 괜찮았던 기억이다. 나는 따스한 방에서 지친 몸을 녹이면 그냥 잠에 빠져 들어갔다.

 

<전의>에서 어느 한의원 댁에서 잤다. 고풍어린 옛집이었는데 주인인 한의사는 그 동네 유지였다. 다음날 아침에 어머니가 주인께 부탁드릴 말씀이 있다고 해서 나도 어머니를 따라 그 댁 안방으로 들어 갔다. 그런데 왠일인지 어머니는 그 예의 싱가 미싱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계셨다. 의아했지만 여쭤보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에 앞서 형제로 보이는 두 소년이 미리 와서 주인에게 막 무슨 얘기를 꺼내고 있었다. 들어 보니 그들은  피난길에서 가족을 잃은 형제인데, 그간 갖은 고초를 겪으며 이곳까지 와서 어제 밤에는 이 집 머슴의 호의로 머슴방에서 끼어 잤다는 것이다. 이어 매우 영민해 보이는 윗 형이 진지한 어조로 아래와 같이 얘기했다. 얘기가 조리가 있었고, 목소리는 낭랑하고 당찬 느낌을 주었다.

 

 “저는 배재중학 1학년이고, 이 아이는 국민학교 5학년인 제 동생입니다. 저희들이 힘겹게 여기까지 왔습니다만, 이제 너무 지치고 수중에 돈 한 푼 없기 때문에 더 이상 무리를 하다가는 길에서 큰 일을 당할 것 같습니다. 어려우시겠지만, 어른께서 저희들을 얼마동안 거두어 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저는 건강해서 머슴 한명 몫은 넉넉히 할 수 있습니다. 저 혼자라면 어떻게 해 보겠는데, 이 추위에 저 어린 놈 굶는 꼴은 더 이상 못 보겠습니다. 도와 주시면 평생은인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그 형이 무척 존경스러웠다. 나보다 불과 몇 살 위인데, 어쩌면 저렇게 의젓할까. 그리고 어른스러울까. 그간 응석받이로 살았던 내가 무척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이집 주인께서 이들 형제를 받아 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으로 손을 웅켜잡고 그 장면을 지켜 보았다. 간절하게 기도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주인은 얼마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냉랭하게 대답했다.

 

“ 자네들 사정은 무척 딱하지만 내가 도울 형편이 못되네. 우리도 피난을 가야 할지 그냥 여기서 버텨야 할 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고, 우리 식솔도 많은데 거기에 두 식구를 더 보탠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네. 달리 방법을 강구해 보게 나.”

 

그 말을 듣고, 그 형은 잠시 머믓하였으나 크게 흔들리지 않은 표정으로 “잘 알겠습니다. 크게 결례를 했습니다”라며 큰 절을 하고 동생을 데리고 방을 나갔다. 나는 그 차가운 한의사가 무척이나 원망스러웠다. 가슴이 메어지는 듯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어 주인장이 어머니께 얼굴을 돌리고, “어제 잘 주무셨습니까. 그런데 뭐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라고 물었다. 어머니는 ”네 저도 긴한 청이 하나 있습니다"라고 운을 띠우시더니. "제가 피난길에 애지중지하던 싱거 미싱을 갖고 떠났어요. 새것이에요. 그런데 이게 너무 무거워서 큰 짐이 되네요. 어려우시겠지만 전쟁이 한 고비 넘길 때까지 이 것을 댁에 맡기고 떠났으면 하는데,  받아주실 수 있으실지요.“ 라고 말씀 하셨다. 그러면서 보자기를 풀어 재봉틀은 꺼내 보였다. 반짝 반짝 빛나는 신형 싱거 미싱의 미끈한 모습이 드러났다. 당시 시골에서는 쉽게 만나기 어려운 명품이었다. 그 순간 나는 그 한의사의 얼굴에 환하게 희색이 감도는 것을 보았다.

한의사는 곧 ”네, 물론이지요. 그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요. 제가 고이 잘 간수하겠습니다“라고 흔쾌하게 수락했다.

 

그 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아끼던 비싼 미싱을 이 무정한 한의사에게 통째로 맡긴다니 도대체 말이 되나. 그런데 어머니는 한의사의 대답을 듣자 공손히 고맙다고 말씀하시고는, 다음 순간 빠른 손놀림으로 미싱의 몸통만 남겨 놓고 그와 연결된 몇몇 부품과 연결나사들을 잽싸게 뽑으시는 게 아닌가. 이미 손을 보아 느슨하게 만들어 놓으셨던지 순식간에 일을 마치시고, 그것들을 미리 준비한 자그마한 꽃 주머니에 차곡차곡 담으셨다. 그리고 몸통만 한의사에게 건넸다. 나는 그 때 그 한의사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어머니의 슬기에 내심 감탄을 했다.

 

후일담이지만, 예의 그 싱거 미싱은 몇 달 뒤 서울이 수복되고 전선이 안정된 후, 아버지가 그곳에 들려 되찾으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우리가 무척이나 궁핍했던 1952년 대구 피난시절 바로 그 미싱으로 삯바느질을 하셔서 우리 가족 생계의 큰 부분을 책임지셨다.

 

그 날 나는 피난 행열을 따라 길을 가면서 그 형제들 걱정에 시종 우울했다. 어머니는 눈치를 채신 듯 내게 말씀하셨다.

"너무 걱정마라. 너 그 배재중학 형의 눈빛을 보았지. 그 의지와 용기면 어떤 어려움도 잘 헤쳐 나갈 것이다."

어머니의 그 말씀이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그래서 "그렇지, 엄마, 나도 그렇게 생각해" 라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면서  그들 형제를 위해 진심으로 하느님께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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