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나는 가끔 <연세춘추>/Annals 주간 시절이, 참으로 힘겹고 어려운 시간이었는데, 왜 강렬하고 아름다운 색깔로 내 뇌리에 자주 떠오를까 의아할 때가 많다. 또 그 때의 고생스러웠던 큰 기억들은 시간과 더불어 점차 퇴색하고, 당시에 소소하고 단편적이었던 한 컷, 한 컷의 즐거웠던 작은 순간들이 덧칠되고 미화되어 밀도 있게, 또 낭만적으로 추억되는지 신기할 때가 많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고통 속에서 겪는 작은 행복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존재인 것 같다.

'연세춘추와의 인연(I)'올 올린 후, 당시 기자였던 안인자 교수가 내게 문자를 보내, “춘추와 함께 한 1년 반은 참으로 제 생의 황금기였어요”라는 술회했다. 나는 “와! 이 친구들도 그 시절을 아름답게 추억 하는구나”라는 생각에 조금 놀라고 크게 기뻤다. 

 

                        II.

<연세춘추>/Annals가 자리한 핀슨 홀에서 윗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평화의 집’ 이라는 카페가 있었다. 간단한 식사도 할 수 있는 이 카페를 당시에 내가 자주 이용했던 기억이다. 한갓지고, 가을이면 주위에 단풍이 아름다웠다. 밖에서 손님이 오셨을 때나, 동료 교수가 나를 찾을 때도, 부산하기 이를 데 없는 편집실을 거쳐야 하는 비좁은 주간실 보다는 이곳이 훨씬 편했다. 무엇보다 학생기자들과 어울리고 토론하기에 무척 좋았다. 이곳에서 학생기자들과 개인 상담도 많이 했던 기억이다.

백양로를 거쳐 굴다리를 지나 신촌 로타리로 가는 중간지점 오른 쪽에 춘추 단골 중국집 '태화루'가 있었다. 여기서 학생기자들과 왁자지껄하면서 급한 대로 짜장면으로 배 채우며 ‘소확행’을 만끽했던 기억도 새롭다.

 

<연세춘추>, Annals 를 통 털어 직원이 한 명 있었다. 나는 그 녀를 ‘미쓰 리’라 부르고, 학생들은 ‘누나’, ‘언니’로 통칭했다. 수상경력까지 있는 꽃꽂이 전문가인 그녀는 가난한 신문사를 재정적으로 잘 꾸렸고, 예닐곱 밑의 학생기자들을 마치 친동생처럼 정성스레 잘 보살폈다. 그녀는 학생기자들에 관해서는 물론 졸업한 기자들의 신상에 대해서도 가히 백과사전적 지식을 지녀, 내겐 가장 믿을 만한 정보소스였다. 내가 주간을 그만 두고 한참 뒤 하루는 미쓰 리가 내게 전화를 걸어, “교수님! 빅 뉴스에요. 강경화가 시집을 간데요”라고 소리쳤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미쓰 리는 연세대 여직원 사이에서 왕언니로 통했고, 후에 인사동에서 큰 꽃집 사장님이 되었다.

 

                          III.

<연세춘추> 주간 1년이 넘어가면서 나는 엄혹한 시대의 중압아래서 더 일하기가 너무 힘들어, 내심 학생들에게는 미안했지만, ‘춘추 탈출’을 결심하고 이를 위해 온갖 궁리를 다 해 보았다. 그러다가 결국 생각해 낸 방안이 외국에서 연구비를 받아 그것을 구실로 명분 있게 주간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마침내 독일로부터 훔볼트 연구비를 받게 되어 1977년 말  1년 예정으로 독일 만하임 대학교로 떠나게 된다. 그런데 학교에 알아보니, 내 연대 경력이 3년 미만이기 때문에 규정상 휴직 기간 중 봉급을 반 밖에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출국을 한 학기 늦춰 3년을 채우고 온전한 봉급을 받아야 할지, 아니면 그냥 떠나야 할지가 초점이었다. 고심 끝에 떠나기로 작정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주간직을 계속 수행하기는 심신이 너무 피폐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로서는 ‘춘추 탈출’이 ‘혹성 탈출’ 만큼 절실했다.

당시 이우주 총장님도 마지못해 허락하시며,

“아니, 몇 달을 더 못 참아? 그러면 나도 더 편하게 보내 줄 수 있잖아?” 하시며 무척 아쉬워 하셨다.

공항에는 많은 학생기자들이 나와 배웅을 해 주었다. 무척이나 미안하고 고마웠다.

 

                      IV.

<연세춘추> 주간을 그만 둔 후에도 나는 한참이나 위궤양으로 고생을 했다. 독일에서 귀국 후 하루는 내 주치의였던 세브란스 소화기 내과의 P교수님을 찾았다. 밖에서 기다리다가 간호사가 내 이름을 호명해서 막 진료실 앞으로 다가서다, 막 방문을 열고 나오는 앞 환자와 마주쳤다. 위(I)에서 언급한 중앙정보부 M이었다. 서로 눈이 부딪히자 둘 다 크게 놀랐다. 해쓱하고 지친 얼굴의 M은 내게 겸연쩍게 눈인사를 하고 황급히 발을 옮겼다.

 

순간 내가 늘 ‘가해자’로 인식하고 미워했던 M도 실은 나와 같은 피해자였다는 생각이 내 뇌리에 스쳤다. 그가 당시 유신체제의 지킴이를 진정 자신의 소명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그악스럽게 수행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분명 그도 빗나간 체제의 희생양임에 틀림없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가슴에 스며드는 동병상련의 진한 아픔을 느꼈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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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연세대 백양로를 따라 걷다 보면, 본관 가까이 왼편에 나지막한 언덕이 나온다. ‘시인의 언덕’이라 불리는 이 언덕 위에 윤동주 시비(1968년 건립) 있고 그 뒤편에는 2층 규모의 고색창연한 작은 석조건물이 하나 있다. 당시 <연세춘추>가 이 건물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건물은 일년 사계절을 늘 아름답게 품에 안았고, 돌집이라 특히 여름에는 시원했다.

‘핀슨홀(현 윤동주 기념관)’로 불리는 이 건물은 1922년 연희전문학교의 기숙사로 지어졌는데, 윤동주 시인이 1940년 후배 정병욱(훗날 서울대 국문과 교수)과 함께 하숙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까지 2년여를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연세대 캠퍼스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인 이 건물은 밖에서 보면 2층이지만, 내부로 들어가며 다락층도 있어 실제로는 3층인 셈이다. 핀슨홀에서 가장 인상적인 공간은 바로 3층 다락방인데, 뻐기창이라 불리는 지붕 밖으로 튀어나온 머창을 통해 빛이 들어오는 아늑한 곳이다. 윤동주 시인이 신입생 시절 바로 여기 머물렀다. 젊은 동주가 도머창을 통해 멀리 청송대 너머로 별과 달, 하늘을 바라보며 꿈을 키웠던 바로 그 역사적 공간이다. 나는 윤동주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이 건물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II.

내가 주간으로 있을 때, <연세춘추>는 대체로 열 댓명, 그리고 영자신문 Annals는 대여섯명의 학생기자가 있었다. 춘추는 매주, 그리고 Annals는 한 달에 한번 발간이 되었다. 춘추사 기자들과 Annals 기자들은 분위기와 색깔이 달랐다. 춘추사 기자들은 대체로 외모에 별로 관심이 없고, 떠들썩하고 열띤 분위기에 시국문제에 예민하게 반응을 했는데 비해, Annals기자들은 보다 단정하고, 조용하며, 매사에 비교적 쿨(cool)하게 반응했던 것 같다. 같은 날 춘추와 Annals의 편집회의를 해 보면, 그 차이가 더 확연했다. 그러나 두 기자 그룹 간의 사이는 무척 좋았고 서로 아꼈다.

재미있는 일은, 한 번 Annals에 정치적으로 위험수위를 넘는 기사가 나왔다. <연세춘추>였다면 적어도 배포중지가 되었을 터인데, 아무 문제없이 지나갔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았는데, 하나의 가능성은 기관원들의 영어가 모자랐거나, 못 보았거나, 아니면 영자로 나오는 신문이라 그 영향력과 파장을 다소 낮게 평가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여하튼 주간인 나는 아슬아슬한 심경으로 그 한 주를 넘겼다.

춘추나 Annals 모두 일 중심의 집단이라기보다 확대된 가족 같은 공동체 분위기가 두드러졌다. 내적 결속과 선. 후배간의 유대가 무척 강했다. 그래서 한, 두해, 어떤 때는 몇 년 전 퇴사한 선배들도 고향처럼 신문사에 내왕하며 후배들을 격려하고, 함께 어울렸다. 그러다 보니 주간인 나도 그 모두를 한 식구처럼 대하고 스스럼없이 교유했다. 그래서 얼마 전 퇴사한 춘추의 김수길(전 JTBC 대표이사/중앙일보주필)군이나 Annals의 강경화(전 외교부장관)양도 자주 얼굴을 비쳤다. 내가 <연세춘추>를 낭만적으로 추억하는 큰 이유가 아마 이러한 <연세춘추> 특유의 정겹고 도타운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III.

위에서 언급한 대로, 그 때 춘추와 Annals 기자들은 한결같이 우수하고 성실했다. 그래서 그 후 40여년의 세월 속에 많은 풍파를 겪으면서도 그 대부분이 우리 사회의 걸출한 인재로 우뚝 섰다. 짧은 기간 동안 이 처럼 제제다사(濟濟多士)가 집중적으로 모인 경우는 연세춘추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다. 정말 고맙고 다행한 일이다.

 

우선 편집국장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내가 주간일 때, 첫 번째 편집국장이었던 박성학(신방과)군은 언론인으로 뛰어난 자질을 갖춘 좋은 재목이었는데, 일찍 도미하여 미국에서 사업을 했다. 비즈니스를 하면서 영화 등에 관한 저서를 발간하고 현재는 오지에서 규모 있는 개척사업을 하는 환경운동가가 되었다. 두 번째 편집국장인 서병훈(정외과)군은 숭실대(정치학)교수로 자유주의 사상 특히 J. S. Mill 연구의 대가로 정치사상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며 칼럼니스트로도 이름을 날렸는데, 지난 2월 정년퇴임을 했다. 내가 주간 직을 그만 둔 직후, 편집장을 맡았던 이용주(신방과)군은 조선일보 기자로 재직 중 젊은 나이로 아깝게 일찍 세상을 등졌고, 그에 뒤를 이은 편집국장 강상현(신방과)군은 얼마 전 까지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고 현재 연세대학교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모두가 글 솜씨가 출중했는데, 박성학은 특히 편집능력이 뛰어낫고, 서병훈은 리더십과 정치감각이, 그리고 강상현은 통합능력과 인품이 훌륭했다. 모두 발군의 인재들로 일당백(一當百)이었다.

 

내가 주간으로 일할 때, <연세춘추>를 거쳐 간 학생기자들이 20여명이 되는데, 그 중 가장 많이 진출한 분야가 학계이고, 언론계, 관계가 그 뒤를 이었다. 또 이선효(경영학과,전 라코스테대표/현 네파대표)군 등 몇몇 친구들은 다양한 비즈니스 분야에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내가 아는 범위에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학계를 보면, 위에서 언급한 서병훈, 강상현 외에 전상인(서울대 환경대학원, 사회학), 정연구(한림대, 미디어스쿨), 안인자(동원대, 도서관학), 김복순(명지대, 국문학), 허철(연세대 원주의대, 의학) 등이 있다. 연세의대 정신과에 재직하다 독립한 이성훈(정신의학)박사는 탁월한 수면 및 뇌 과학 연구가로 인문, 사회 융합분야에 다수의 저서를 출간한 한국 정신의학계의 이색적인 존재다. 재학 중 연세문화상(학술부문)을 수상한 이력을 갖고 있다. 이밖에 내가 주간을 그만 둔 후 같은 해 입사했던 서영조(편집국장, 동의대, 정치학), 이호근(전북대 로스클, 사회법) 교수도 학계의 주목받는 탁월한 연구자들이다

언론계에도 여러 명이 진출했는데, 위에서 언급한 김수길, 이용주 외에 유명 가수 알리의 아버지 조명식(전 디지털 타임즈 대표이사)이 있다.

외무고시에 김종훈(법학과, 전 알제리 대사), 정만영(정외과, 전북 국제관계대사) 두 명이 합격했는데, 두 명 모두 춘추사의 튼실한 대들보들이었다. 그런가 하면, 최대용(행정학과, 전 대통령직속 국가브랜드 위원회 사업단장) 박사는 행정고시 출신으로 정부에서 정년퇴임 후 연세대 글로벌행정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이밖에 정계에 진출한 2선 의원인 이원복(신학과, 인천 남동구출신)군과 시민운동가 출신으로 문재인 정부에서 청와대 시민사회 수석을 역임한 김거성(신학과)군도 그 시절 연세춘추에서 활동했던 빼어난 재목들이다.

 

같이 학생기자로 활동했던 김종훈-송혜진 커플은 연세춘추를 매개로 백년가약을 맺었고, 나는 김창회, 최대용, 서영조의 주례를 섰다. 그런가 하면 강상현은 내 천주교 대자인데, 현재는 잠실 7동 성당 총회장으로 나이롱 신자인 나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신심이 두텁다.

내가 주간을 하던 당시, 그리고 그 전후 시기의 연세춘추 기자들 중 다수와는 아직도 자주, 그리고 밀도 있게 교류하고 있다. 이제 60대 중반에 이른 그들과 나 사이는 사제지간이라기보다 스스럼없는 친구에 가깝다. 서병훈, 강상현 교수가 주로 그 중계역을 맡고 있다.

주요 분야별로 이야기하다 보니, 정작 자신의 생활 영역에서 보람된 삶을 개척한 다수, 특히 여기자들의 이름을 거명하지 못했다. 미안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들 한 명, 한 명을 나는 아직 모두 뚜렷이 기억하고 있고 가깝게 느끼고 있다. 이 기회를 빌려, 그들 모두에게 간곡한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IV.

Annals 이야기도 여기서 빼어 놀 수 없다. 소수 정예였던 Annals 출신들도 언론계, 학계, 그리고 특히 외교계에 성공적으로 사회진출을 했다. 내가 주간할 당시 Annals의 편집장은 김창회(신방과) 군이었는데, 그는 언론계로 진출하여 연합통신 전무로 은퇴했다. 그에 뒤를 이은 장성준 (행정과) 군은 미국에서 사회학 교수(Baylor 대학)로 재직 중이고, 다음 편집장 배득종(행정과)군은 현재 연세대 글로벌행정학과 교수로 재직하는 한국 행정학계의 거목이다. 그런가 하면 캐나다의 명문 UBC 정치학과의 박경애(정외과)박사는 한때 북미한국정치학회 회장을 역임한 북미의 대표적 북한 전문가다.

 

얼마 전에 사임한 강경화 외교부 장관도 Annals 출신이다. 당시에도 그녀는 유능함과 지성미로 많은 이에게 회자되었다. 그런가 하면 외교부 차관을 역임하고 현재 유엔대사로 재직 중인 조현대사도 그 때 Annals 기자로 활약했다. 인도대사로 재직 중 ‘대사의 인도 리포트’라는 책을 출간해 공부하는 대사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이에 덧붙여 흥미로운 대목은 미국의 전 대통령 트럼프가 김정은과 북미 정상회담을 할 때, 트럼프의 통역을 맡았던 이연향(종교음악과)도 Annals 기자였다는 사실이다. 이제 중년을 넘겨 중후한 모습이지만 당시에는 소녀같은 가냘픈 용모의 대학 초년생이었다. 함께 Annals 기자를 했던 강경화, 조현, 이연향 세 사람이 같은 시기에 국제무대에서 각광을 받았으니, 이들을 멀리서 지켜보는 내 입장에서는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V.

촌음을 아껴 써야 하는 학창 시절, 대부분의 시간을 <연세춘추>/Annals와 씨름을 하면서 힘겨운 세월을 보냈던 그들이 사회에 나가 이렇게 큰 결실을 거둔 일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 각각의 인생 여정에서 이들이 펼쳤던 각고의 노력과 열정에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한때 나마 스승으로서 이들을 품에 안았던 나로서는 너무나 벅차고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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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1976년 3월 초, 내가 한국외국어대학에서 연세대로 직장을 옮긴 후 한 학기가 지난 때였다. 총장(이우주)님이 나를 보자고 연락을 주셨다. 왜 나를 부르실까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아 의아해 하면서 찾아뵈었더니, 나보고 대학신문인 <연세춘주>와 영자신문 Annals 주간을 맡으라는 것이었다. 그러시면서 내가 학창시절에 연세춘추 기자를 했던 이력이 있고, 나이도 젊어 학생기자들과 교감을 잘 할듯해서 발탁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얼떨결에 "네“하고 답하고 총장실을 나왔다. 나는 그 때까지만 해도 내 앞에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가시밭길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II.

나는 원래 어려서부터 언론에 관심이 많았고, 대학시절 한때는 장래 직업으로 기자를 꿈꾸기도 했었다. 그래서 대학신문의 주간을 맡는다는 일이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고, 좋은 신문을 만드는데 대한 얼마간의 자신감과 그에 따른 설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적인 바람은 내가 주간으로 첫 걸음을 내디딘 후, 반시간도 안되어 산산히 부서졌다. 주간 자리에서 내가 받은 첫 전화는 연세대에 파견된 중앙정보부의 M 이라는 사람의 전화였다. 그는 내게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간단히 자기소개를 하고, 이어 압도하는 어투로 “다음호의 일면 톱은 ***로 하시지요”라고 지시하듯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그거야 우리가 알아서 결정할 일이지요. 여지껏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앞으로는 기관에서 신문내용에 관여하는 일은 없어야 됩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랬더니 M은 대뜸 “아니 이 양반이 세상을 전혀 모르는군, 내가 당장 내려가겠소”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나는 “앞으로 기관에 계신 분의 신문사 출입은 절대 안 됩니다. 한 걸음이라도 신문사에 발을 내디디면 내가 문제를 크게 삼겠습니다.”라고 응수했다.

이렇게 10여분 격앙된 목소리로 말다툼을 하면서, 나는 비로소 내가 사는 시대의 엄혹함을 절감했다. 때는 유신말기, 온 대학이 동토(凍土)처럼 꽁꽁 얼어붙은 가운데 학내에서 불온(?)한 낙서가 몇 자만 등장해도 온 대학을 뒤집어 당사자 색출에 나서는 칠흑 같은 어두운 시대였다. 학생처에 몇 명의 기관원이 거의 상주했다. 학도호국단은 이미 정권의 통제아래 들어갔고, 이들의 남은 관심사는 아직 명맥이 남아 기회있는 대로 저항을 일삼는 연세춘추의 숨통을 막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주간이 된 계기도 기관의 <연세춘추> 통제 과정에서 야기되었다. 당시 취재부장이었던 김수길(경영학과 3, 전 JTBC 대표이사/중앙일보주필)군이 연세춘추의 인기 칼럼인 ‘백양로’에 쓴 글을 트집 잡아 학교에 압력을 가해 그를 내쫓고 주간교수를 나로 교체한 것이었다.

 

               III.

<연세춘추>/Annals 주간으로 재직했던 2년 가까운 세월은 지금 되돌아보아도 실로 노심초사와 고난의 연속이었다. 우선 격무에 시달렸다. 강의 시간 외에는 거의 신문사에서 일과 씨름하며 살았다. 신문이 인쇄되는 토요일 밤 풍경을 잠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광화문 조선일보 외간부에서 새 신문 인쇄를 위해 초교, 재교를 거쳐 최종교정본을 꼼꼼히 살펴보고, 이른바 ‘OK’를 놓고 나면 으레 시간은 11시를 훨씬 넘긴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라 쫓기는 마음으로 급히 뛰어나와 가까스로 마지막 택시를 잡아타고 우이동 입구까지 이르면 대략 12시 가깝게 된다. 통금 때문에 더 이상 갈 수 없다는 택시에서 떠밀리듯 내려, 잰 걸음으로 어둑한 산중턱을 돌아 손병희 선생 묘소 근처의 내 옛집에 닿으면 12시 반을 넘는다. 지친 몸을 눕혀 겨우 몇 시간 눈을 붙인 후, (일요일) 새벽이면 벌써 전화통에 불이 붙는다. 새로 인쇄된 연세춘추를 보고 갖가지 논란이 빚어지는 것이다.

당시 내가 30대 중반, 한창 나이였기에 <연세춘추>의 과중한 업무는 그런대로 몸은 견딜 만 했다. 그런데 관계 기관의 감시와 통제가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하루하루보내기가 숨이 막힐 정도로 괴롭고 힘들었다. 기관원들은 신문을 낼 때 마다 번번이 거칠게 시비를 걸었고, 언필칭 휴간이나 배포중지를 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들과의 다툼이 거의 일상화되었고, 그들 눈에는 녹록치 않은 내가 눈에 가시였다. 나는 만약의 ‘필화’사태에 대비해서 학생들이 쓴 기사를 일일이 점검하고, 정도가 지나치면 그 수위를 낮추거나, 문맥이나 어구를 고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갈수록 일종의 검열관이 되어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자멸감(自蔑感)을 느낄 때가 많았다.

다행히 학생기자들은 내 고충을 이해해서 사보타주하거나 내게 가시적으로 반발하거나 불만을 토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주간인 내가 방패막이 되어 자신들의 글을 임계선(臨界線) 이하로 고쳐 줄 것을 믿고 거침없이 위험수위를 넘기며 시국에 대한 울분을 글로 토로하곤 했다.

나는 최소한 대학언론의 명분을 지키고 나에 대한 학생기자들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으면서, 당국의 철퇴를 피하는 ‘Golden Mean’을 찾으려고 고심했다. 그러나 그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 아니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 고뇌는 점점 깊어갔고, 그것은 내 신체적 건강을 해치는 수준으로 번져갔다. 연세춘추 주간으로 반년이 지나면서부터 나는 위궤양으로 시달리기 시작했고, 일 년이 지나자 체중이 10 Kg이 빠졌다. 나는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려워 총장님께 여러 차례 주간 교체를 청했으나, 번번이 “대안이 없다”라는 말씀으로 일축하셨다.

그래도 <연세춘추>는 실로 엄혹했던 유신말기에 대학언론 중 가장 결기 있게 민주화를 외쳤던 신문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 때문에 핍박과 고초도 더 컸다. 다른 대학 신문사 주간들은 내게 그러고 어떻게 버티냐고 자주 물었다.

 

                  IV.

그 질곡 속에서도 <연세춘추>의 주간으로써 느끼는 보람과 기쁨이 적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주간으로 일했던 2년 가까이의 세월이 없었다면, 내가 연세대에서 보냈던 30년 넘는 세월이 훨씬 메마르고 캠퍼스에서 느꼈던 낭만적 정서도 크게 줄었을 것이다.

우선 학생기자들이 좋았다. 놀라운 일은 우수한 학생들이 대거 기자를 지망했고, 거기서 뽑힌 친구들은 하나같이 빼어난 재목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글 잘 쓰고 당차고 기개 있는 정예(精銳)들을 선배기자들이 엄선해서 뽑았다. 주간인 나는 충원과정에 개입하지 않고, 최종 면접에 형식적으로 참가해서 추인만 했다. 그들 나름의 팀워크와 투쟁 전열을 갖추기 위해 그래야만 될 것 같아서였다.

학생기자들은 시대의 양심으로, 또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로서 대학의 명예와 존엄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무엇보다 그들의 순수와 열정, 그리고 용기가 돋보였다. 나는 기관원들의 감시와 통제 속에서 학생기자들을 보호하며, 그들의 열망과 의기에 찬물을 끼얹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면서 이것이 내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나와 학생기자들과의 관계는 무척 가까웠다 (물론 이것은 내 생각이고, 그들 생각은 달랐을 수도 있다). <교수-학생> 관계라기보다 <가족>과 <동지> 같았다.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았고, 시대적 아픔을 공유하며, 같은 지평을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 때 나도 한창 젊었던 시절이라 그들과 비교적 격의 없이 어울렸던 것 같다. 대체로 일주일에 두, 세 번을 그들과 저녁을 함께 했고, 여름방학에는 단체로 해수욕장을 찾았고 겨울에는 연수를 떠나 산행도 같이 했다. 한번은 쌍쌍파티도 했던 기억이다. 그들은 글 쓸 때는 투사를 닮았으나, 놀 때는 어린아이처럼 착하고 순진무구했다. 학교 앞 중국집 자장면 한 그릇에도 만족했고, 늘 떠들썩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즐거워했다. 나도 그 정서에 휩쓸려 그들과 함께 있을 때는 대학시절의 낭만이 되 살아오는 느낌을 갖곤 했다.

나는 그들이 어려운 시기에 대학신문을 만든다는 구실로 학업을 게을리 할까 걱정 되어, 매 학기 성적이 평균 B학점이 되지 않으면 퇴사시킬 것을 공표하고, 학기말이면 성적표 제출을 의무화 했다. 그러나 곧 이것이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학생기자 대부분이 성적이 빼어났고, 뒤로 크게 처지는 학생은 한명도 없었다.

나는 보다 질 높은 신문을 만든다는 명분으로 학교에 청해서 연세춘추가 자리하고 있는 ‘핀슨 홀’ 위층에 ‘조사연구실’을 마련했다. 이들에게 공부방을 만들어주려는 속셈에서였다. 이들은 이 방을 요긴하게 이용하는 듯해서 기뻤다.

 

                   V.

지난 2017년 겨울, 그 때 고락을 함께 했던 학생기자들 15명과 40년 만에 해후를 했다. 대부분이 이미 퇴직을 했고, 꽃 같던 여학생 기자들이 이제 환갑을 넘어 머리가 희끗한 할머니가 되었다. 세월의 강을 넘어 옛 기억을 소환하며 모두 그 아련한 시절로 돌아가 손을 맞잡았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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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강렬 2021.03.15 13:48 Address Modify/Delete Reply

    그 시절이 참 아련합니다. 제가 75년도에 유신 반대를 하다가 퇴학을 당하고 안기부 와 경찰의 감시 아래 고통의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교수님과 친구들은 학교에서 그 어려움을 당하셨지요. 제가 80년 복적 후 졸업해 82년 연합통신에 들어가서 외신부에서 근무할 때 '보도 지침'이 데스크 책상에 매일 쌓였습니다. 0000는 보도하지 말 것, 0000는 축소해 기사화 할 것 등등입니다. 돌아보면 엄혹한 시기였지만 그때의 민주 회복, 언론 자유에 대한 열정과 갈망이 부끄럽지는 않았구나 생각이 듭니다. 요즘 '기레기'라고 조롱 받는 후배 기자들을 보면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수님 건강하십시오.

                               I.

나는 어렸을 때부터 정치와 시사(時事)에 유달리 관심이 컸던 것 같다. 그래서 소년 시절 내 기억 속에 아이답지 않게 정치가 차지하는 비중이 무척 크다.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정(性情)인데, 거칠고 시끄러운 정치세계에 왜 그리 관심이 많았던지 내가 생각해도 이해가 잘 안 된다. 신문에서도 정치면만 즐겨 찾았고, 라디오에서 정치나 시국 얘기가 나오면 귀를 쫑긋 세웠다.

 

이렇듯 정치세계는 늘 나를 열광시키는 대상이었다. 정치라는 동네는 언제나 떠들썩하고, 변화무쌍하며, 역동적인 게 재미있었고, 정치무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사고, 행태, 전략을 관찰하고 평가하는 일도 흥미로웠다. 하지만 꿈에도 내가 나중에 커서 정치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말하자면 나는 그때 이미 대국(對局)의 참여자가 아닌, 관전자(觀戰者)로 스스로를 자리매김을 했던 것 같다.

1948년부터 1950년까지, 내가 여덟 살 때부터 열 살 때까지 어린 소년기에 나를 가장 매료시켰던 정치인은 김구와 조소앙이었다.

 

                                  II.

내가 처음 김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48년 여덟 살 때 집의 서가에서 백범일지를 꺼내 든 순간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그 책은 아마도 친필본 백범일지가 아니라 1947에 출간된 국사원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 책은 춘원 이광수의 교열과 윤문을 거쳤기에 문장도 유려하고 문체도 쉽고 간결했다. 따라서 어린 내가 읽기에도 그리 부담이 없었다.

 

나는 책을 읽으며 백범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그의 반일 투쟁에서 보여 준 불퇴전의 용기, 그리고 절절한 나라 사랑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 것 중 하나가 백범이 동학에 깊게 관여하다 몸을 피해 황해도 명문 안 진사 댁에 얼마간 몸을 의탁하고 있을 때 얘기다. 그 댁 큰 아들인 안중근이 나이는 어렸으나 매우 영특하고 사격술이 뛰어났는데, 안 진사가 다른 아들들에게는 글을 읽지 않는다고 걱정도 하였으나, 중근에게는 아무 간섭도 하지 않았다는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며 안중근 의사가 어려서부터 남달랐고 부친인 안 진사가 그의 비범함을 이미 숙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꽤 인상 깊게 받아드렸던 기억이다. 아마 내가 워낙 그전부터 안중근 의사를 흠모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게 아닐까 한다.

 

이후 나는 백범 김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에 관한 뉴스나 떠도는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어른들에게 그에 관해 이것, 저것 귀찮게 묻곤 했다. 마침 그해 김구가 김규식 등과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하고, 방북하여 김일성 등과 남북협상을 시도하였다가 실패하고 돌아왔다. 그 일이 일파만파로 정치. 사회적 논란을 빚었는데, 나도 제 딴에는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사태의 전말을 추적하고 김구의 시도가 무위로 끝난 데 대해 안타까워하며, 그를 빈손으로 내친 김일성을 미워했던 기억이다.

 

다음 해, 내가 아홉 살이던 19496월에 백범이 경교장에서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을 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다. 나는 억장이 무너지는 심경이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빈소가 차려진 경교장에 조문을 가자고 졸랐다. 엄마는 그냥 명복을 비는 기도나 하라고 말씀하셨지만, 내가 계속 떼를 써서 함께 서대문 경교장을 찾았다. 조문객이 많아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영정 앞에 넙죽 절을 드렸다.

이어 백범의 국민장이 엄수되었는데, 이번에도 아빠에게 서울운동장 장례식에 꼭 참석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려 함께 일찍 식장을 찾았다. 그런데 워낙 인파가 몰려 식장에 진입을 못하고 서성대다가, 종로 6가 큰 길가에 있는 아빠 친구 <동원당 약국>을 찾아가 그 집 2층 창가에서 효창공원으로 향하는 영구행렬를 보며 울먹였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날 부슬비가 엷게 내려 하늘도 슬퍼하는구나 했다.

 

나는 당시 어린 마음에 백범을 저격한 안두희가 나와 같은 안씨 성을 가졌다는 데 대해 매우 불편한 심경을 가졌다. 무척 화가 나고 부끄럽기까지 했다. 내가 평소에 안중근 의사와 같은 순흥 안씨라는 사실 때문에 가슴 뿌듯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느낌이었다.

이와 연관해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내가 다니던 혜화동 성당에 나와 동갑내기 백범의 손녀(백범의 장남 金仁의 딸)가 다녔는데, 하루는 주일 미사 후 그녀가 내게 다가와, “분도(내 천주교 영세명), 우리 할아버지 죽인 사람이 바로 너와 같은 안 가래, 알았었니?”하고 내게 물었다. 나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부끄럽고 마치 크게 죄진 기분이었다. 그런데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엄마가 그녀가 자리를 뜨자, 내게 괜찮다. 그냥 한 얘기일 깨다. 신경 쓰지 마라. 걔 엄마도 안 씨인데, !” 하며, 나를 다독거리셨다. 그러면서 그 애 엄마가 다름 아닌 안중근 의사의 조카라고 귀띔해 주셨다. 말하자면 김구와 안중근 일가는 사돈 사이였다. 훗날 확인해 보니 그 애 엄마가 백범의 자부(子婦)이자, 안 의사의 조카인 안미생(安美生) 여사였다.

 

                                           III.

열 살 되던 해인 1950년 해방 이후 두 번째 선거인 <5.30 선거>가 치러졌다. 내가 살던 돈암동은 성북 선거구에 속했는데, 이곳에서 당대의 거물 정치인인 조소앙과 조병옥이 맞대결을 하게 되어 전국에 이목이 집중되었다. 조병옥은 미군정청 경무부장 출신으로 해방 후 치안유지와 공산당 색출에 앞장섰던 강골의 한민당계 보수정치인이었다. 이에 반해 조소앙은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을 마련하고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주창한 임정 외무부장 출신으로 김구 등과 한독당을 창설하고 처음에는 남북협상을 지지했으나, 훗날 단정수립으로 선회한 중도계열의 정치인이었다.

 

처음부터 나는 조소앙의 광()팬이었다. 그의 이념에 공감하기보다 그에게서 풍기는 지사(志士)형의 품모에 반했던 것 같다. 올곧고 청빈한 선비의 인상을 주는 조소앙은 선거유세 때도 민족의 꿈과 희망을 이야기했다. 당시 조병옥 측이 경찰을 동원해 테러행위를 일삼는다는 소문이 파다해서 나의 조소앙에 대한 편향과 연민이 더 컸었던 것 같다.

 

나는 선거유세장을 열심히 쫓아다녔다. 인근의 삼선동, 성북동은 물론 멀리 정릉까지 원정을 갔던 기억이다. 유세장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렸는데, 키가 작아 연사가 안 보이면, 남의 자전거 뒷좌석에 올라가 양해를 구하고 자전거 주인의 어깨를 짚고 올라서 정견발표를 듣기도 했다. 조소앙의 연설은 지적이고 온유한 가운데 격조가 있었다. 첫마디에 늘 함께 입후보한 일곱 명의 후보자를 북두칠성에 비유하며, 그들 모두에게 존경과 사랑의 메시지를 보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에 반해 조병옥은 보다 직설적이고 공격적이었다. 힘차고 결의에 찬 모습이 사나이다웠으나 내 마음을 얻지는 못했다. 두 사람의 정견발표가 끝나면, 군중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선거전이 절정에 이르렀던 520일 쯤, 내가 큰 사고를 당했다. 옆집 아이와 장난을 치다가 드럼통에서 떨어져 관자노리를 뾰족한 돌 모서리에 찍혔다. 동맥이 끊어져 피가 낭자했다. 당시 서울에서 유명하다는 종로 김하등 외과에서 큰 수술을 받고 열흘 가까이 입원치료를 받았다. 어른들은 그때 내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입원실 침대에 누어서도 내 관심은 온통 선거에 가 있었다. 라디오를 귀에서 떼지 않았고, 찾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성북구 선거 추세와 전망을 묻곤 했다. <5.30 선거>에는 2년 전 <5.10 선거>에 불참했던 남북협상파와 중립계가 대거 참여해서 선거열기가 무척 높았다. 내가 입원했던 병원의 김하등 원장님은 종로 갑에 출마한 박순천 여사의 열렬한 지지지였다. 그래서 한글을 모르는 그 댁 가정부에게 박순천 여사의 기호를 주입시키려고 무척이나 애쓰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는 다행이 선거 전날 퇴원해서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선거 당일의 현지 분위기를 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퇴원한 바로 그날, 529일에 조소앙이 공산당의 정치자금을 받아쓴 것이 탄로나 투표일을 하루 앞두고 월북했다는 사실 무근의 벽보와 전단이 성북구 일대에 마구 뿌려져 난리가 났다. 당황한 조소앙은 선거 당일 새벽에 지프에 확성기를 달고 지역구를 돌면서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다.

 

선거결과는 조소앙 선생의 압승으로 끝났다. 그가 3만 여 표로 전국 최고득표를 했고, 조병옥 박사는 1만 여표밖에 얻지 못했다. 나는 그때 민심의 힘을 절감했다. 소년은 환호, 작약했고, 신이나서 한동안 그 얘기만 화제에 올렸다.

그 후 한 달이 못되어 6.25 전쟁이 터지고, 조소앙 선생은 납북되는 비운을 맞는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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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근우 2020.07.21 06:21 Address Modify/Delete Reply

    너무 흥미진진합니다.
    마치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보는 듯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특별한 경험을 가지고 계셔서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부총리님께서 말씀하시니 가슴에 쏙쏙 들어옵니다.
    어느 곳에서도 말씀하지 않으셨던 귀중한 보따리를 풀어놓으시는 느낌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2. 윤주명 2020.08.12 23:31 Address Modify/Delete Reply

    교수님 글을 다시 보게되어 기쁩니다. 김구선생님과 안중근 의사 가문이 사돈지간이라는 것도 교수님 글을 통해 알았습니다.

                       I.

2004년 나는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교육장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칠레 산티아고에 가는 길에 일본에 들려, 가와지마 일본 문부과학상과 만났다. 교과서 문제 등 한일 간에 여러 가지 난제가 얽혀 있었기에 소통을 위해 나종일 주일대사에게 부탁해서 마련된 자리였다. 그런데 가와지마 장관은 나를 보자, 대뜸 당신이 1997년에 한국에 초등영어 교육을 도입한 장본인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정말 대단한 일을 했다. 일본에서도 같은 시기에 초등영어 시행이 치열한 사회적 쟁점이었는데, 좌고우면(左顧右眄)하다가 끝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뒤로 미뤘다. 그런데 우리는 부끄럽게도 아직 초등영어를 도입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화 경쟁에서 크게 실기(失期)했다. 천추의 한이다라고 말했다.

 

                     II.

나는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초등영어 출범 전후의 숨 가빴던 과정을 되돌아보았다. 19953월 교육부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점진적 영어교육 실시계획>을 확정한 후, 19973월 실시를 목표로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때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초등영어 도입을 위해 막판 스퍼트를 하고 있었다. 준비 정도만 가지고 따진다면, 일본이 한국보다 한발 앞섰다. 하지만, 워낙 세심하고 조심스러운 일본인지라 이리 살피고 저리 재다가 끝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시행을 연기했다.

당시 한국의 상황도 무척 복잡했다. 특히 1996년 중반에 들어서면서 초등영어교육 실시 여부를 둘러싸고 사회적 논란이 격화되었고, 그해 후반 특히 10월경에는 그 갈등이 절정에 이르렀다. 초등영어 실시에 대한 우려의 분위기가 팽배해지자 청와대나 당. 정 어디에서도 장관의 등을 떠미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교육부 내에서도 장관이 무리수를 두지 않기를 바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당시 내 머릿속에는 두 가지 생각이 맴돌았다. 하나는 지금 미루면 자칫 아주 늦어질 텐데, 그 역사적 책임은 누가 감당할 것인가라는 근본적 우려였고, 다른 하나는 이를 강행하다가 실패하면 오로지 내 책임이 될 터인데, 일단 뒤로 물러나는 게 상책이 아닐까?’라는 기회주의적 생각이 그것이었다. 오랜 고뇌 끝에 예정대로 1997년 첫 학기에 초등영어 교육을 시행한다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결단을 내렸다. 당시의 상황을 간략히 복기(復棋)하면 다음과 같다.

 

                     III.

내가 교육부장관에 임명된 것은 199512월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체적 여론은 초등영어 도입에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실제 정책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이해관계 집단 및 여론주도 집단들의 입장은 보다 다양하고 복잡했다, 사안의 중요성 때문에 주요 이해당사자인, 교육부, 국회, 교육청, 학원, 출판사, 학부모 및 교육전문가 간에 매우 복잡하고 역동적인 상호작용이 전개된다. 그 과정에서 치열한 갈등과 공방, 그리고 설득과 조정이 거듭되었다.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도 1996년에 들어서자, 특별활동 영어교육 실시학교는 5,370 개교(전체의 95.2%)로 늘었고, 방과 후 상설 영어반 운영은 3,960개교(전체의 70.2%)에 이르렀다.

 

크게 보아 초등영어의 도입을 반대하거나, 그 실시를 늦추자는 쪽은 민족주의적(내지 국수주의적) 성향이 강한 국회의원 및 정치인을 비롯하여, 일부의 언론, 국어학계와 교육계 인사, 그리고 일부 학부모들이었다. 반대파는 어려서부터 영어를 가르치면, 작금의 과도한 서양화, 미국화의 격류 속에서 우리 말과 글, 그리고 우리 고유의 문화를 지키기 어려워진다는 점을 강하게 부각시켰다. 거기에는 반미정서도 한 몫을 했고, 그러다 보니 반대파 중에는 진보진영 인사들이 많았다. 야당인 민주당의 다수가 여기 합류했다. 한편, 유보파는 초등영어 교육은 필요하나 아직 준비가 충분치 못하므로 2, 3년 더 연기해야 마땅하다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또한 초등영어 실시가 가시권에 들어오면서, 조기영어 열풍이 몰아쳐서 학원가를 비롯하여 심지어는 일부 유치원에서도 영어 과외를 하는 등 그 부자용이 크다는 점을 지적하며 학부모들 교육비 부담이 크게 늘고 있다는 점을 심각한 현실적 문제로 제기하고 나섰다.

 

한편 초등영어교육을 찬성하는 측은 교육부를 비롯하여 일선 교육계, 그리고 다수의 학부모, 그리고 세계화에 민감한 시민들이었다. 그러나 시행에 앞장서고 있던 교육부를 제외하면, 대체로 찬성하는 측은 사안에 대해 침묵하는 편이었고, 기껏 입을 열어도 무척 소극적이었다. 그러니 교육부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 우군의 숫자가 많은데 이들 <침묵하는 다수>가 조직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언론과 시민사회 등은 오히려 반대와 유보의 입장만 강하게 부각시키는 형국이어서 교육부는 수세에 몰릴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이 감에 따라 초등영어교육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세력 중 적지 않은 수가 유보 쪽으로 돌아섰다. 그러다 보니 점차 <찬성 대 유보>의 대결양상이 두드러졌다. 유보하자는 쪽에서는 보다 착실히 준비해서 제대로 영어교육을 시행하자는데, 이를 반대하는 것은 명분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또한 교육부의 무분별한 강행 태세는 신자유주의의 이념적 공세 내지 성과주의의 전형이라고 세차게 공격하며, 심지어는 조기 영어교육기관의 로비에 포획되었기 때문이라는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특히 국회 교육위원회의 김한길 의원을 비롯한 몇몇 야당 의원들의 반대는 매우 치열했다.

 

나는 초등영어교육은 세계화 추세에 비추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시대적 과제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초등영어 도입은 내게 주어진 역사적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나는 만약 야당인 민주당이 19982월에 정권을 잡으면 과연 초기영어를 도입할지에 대해 의구심이 무척 컸다. 따라서 모처럼 찾아 온 이 절호의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무엇보다 나는 초등영어교육을 더 늦추면, 도시와 농촌, 그리고 빈()과 부() 학생 간의 영어 격차가 더 벌어질 것이라는 점을 크게 우려했다. 이미 조기영어교육 열풍 속에 거의 모든 도시 중산층 자제들은 어려서부터 사설 학원이나 개인 과외 등을 통해 영어를 익히고 있는 데 반해, 농어촌 및 도시 빈곤층 자제들은 중학교 입학할 때까지 거의 영어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없지 않은가. 이 차디찬 현실이 나를 크게 압박했다. 지금이라도 초등영어교육 시기를 앞당기지 않으면, 이들 두 그룹 간의 영어능력 격차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벌어져 그 부정적 영향력이 중학교 입학 이후의 학업 및 대입과정, 그리고 멀리는 사회생활 및 세계 진출에 이르기까지 심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IV.

199610월로 접어들자 나는 다음 해 초등영어 시행여부에 대해 마지막 결단을 내려야 할 운명의 시간이 왔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당시 상황은 초등영어 출범시기를 늦추자는 여론이 증폭되는 분위기였고, 청와대나 당. 정 모두 그러한 여론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수성 총리와 박세일 수석은 내가 어떤 결정을 내려도 그 결정을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그런 가운데 이 총리는 너무 무리하지 않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덧붙였다. 우회적으로 유보 선호를 내비친 것이었다. 차관과도 의견을 나눴다. 그도 말을 아꼈지만 실시를 연기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주위가 이러니 내 마음도 조금씩 흔들리는 것을 스스로 느꼈다. 아무리 다잡으려해도 그게 쉽지 않았다. 초등영어 실시를 늦추자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이 즈음, 내 마음을 영어교육 실시 쪽으로 다시 선회하게 만든 두 가지 일이 있었다. 그 하나는 당시 내 비서관이었던 김정기씨의 충정어린 조언이었다. 그는 지근거리에서 흔들리는 내 마음을 읽고, 다음과 같이 직언을 했다.

장관님! 시행을 불과 5개월 앞두고 초등영어 실시를 미룰 경우, 그간 장관님만 믿고 오랜 기간 동안 열정과 헌신을 다해 각고의 노력을 해 온 일선 교육현장에 일대 패닉현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것은 교육부는 물론 이 정부에 대한 엄청난 불신을 불러올 것입니다. 그리고 기회있을 때 마다 내년 3월 초등영어 실시를 공언해 오신 장관님의 인격은 어떻게 됩니까

폐부를 찌르는 그의 발언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즉시 스스로를 다시 추스르면서, 초등영어 실시 준비상황을 세밀한 부분까지 총점검했다. 그리고 상황이 크게 우려할 정도는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다. 얼마간 자신감이 샘솟았다.

그리고 며칠 후, 예상치 못한 일이 터졌다. 1013일자 동아일보 저녁 가판에 '초등학생 영어교육 연기검토'가 일면 톱으로 대서특필된 것이었다. 나는 부랴부랴 글을 쓴 K 여기자와 편집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그 기사는 명백한 <오보>라고  항의하며, 내일 조간에서 삭제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확실한 소스에 근거한 것이라고 자신감을 피력하며, 쉽사리 물러날 기세가 아니었다. 국회와 당. , 그리고 교육부 및 교육계에 초등영어실시와 관계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인터뷰한 후, 결국 장관이 19973월 초등영어 도입을 유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결론은 내렸다는 얘기였다. 그러면서 이제 장관님도 속내를 드러내시지요라며 거칠게 역습했다.

동아일보와 옥신각신하면서 나는 하느님이 내게 이제 시행을 결단하라고 절호의 기회를 주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단호한 어조로 장관이 그렇게 말해도 구태여 오보를 내겠다면 당신들 마음대로 하시라며 전화를 끊었다. 나의 결연한 태도에 동아일보는 결국 다음 날 조간에 위의 톱기사를 거둬들였다. 바로 그날 나는 서둘러 초등영어 내년 봄 실시 확정을 만천하에 공표했다. 돌이켜 보면, 이날 동아일보와의 해프닝이 한국에서의 초등영어 실시 일정을 결정하는 데 매우 주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이후 5개월 동안 나는 배수진을 친 절박한 심경으로 교육부 및 교육청 관계자, 그리고 일선 초등학교 영어교육 예정교사들과 더불어 초등영어교육의 성공을 위해 올인을 했다.

 

                           V.

19973월 초하루, 마침내 초등학교 3학년을 대상으로 초등영어교육이 그 역사적 출범을 했다. 예상을 뒤엎고, 처음부터 학교 현장에서 매우 호의적인 반응이 나왔다. 반신반의했던 언론도 성공쪽으로 돌아섰고, 그간 치열했던 반대여론도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놀라운 반전이었다. 1997529일부터 612(15일간)까지 미디어 리서치가 전국의 초등학교 3학년 학부모 2,000명을 대상으로 하는 초등학교 영어교육 여론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절대다수(91,9%)가 찬성하였다. 늘 불신의 표적이었던 교육정책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이런 압도적 결과는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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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대구에 피난 온 후, 19514, 새로 이사한 곳이 종로 영남일보사 건너편 조광(朝光)양복점 2층이었다. 처음 몇 달 동안 살았던 칠성동 기찻길 옆 어두운 빈민촌에 비하면 주거조건이 훨씬 낳아졌다. 그 집 2층에는 피난민 세 가구가 살았는데, 우리는 길가 창문 옆 다다미 6장 방에 살았다. 윤동주가 일본 유학 때 쓴 시, ‘쉽게 쓰여진 시에는 육첩() 방은 남의 나라라는 시구(詩句)가 나오는데, 바로 그 규모의 크지 않은 방이었다. 여기서 어머니, 누나와 세 식구가 함께 살았다. 아버지는 우리를 이곳으로 옮겨 놓으시고 그해 3월 서울이 재탈환 (再奪還)되자 직장 선발대를 따라 서울로 올라가셨다.

 

열 한살 소년인 나는 한복 삯바느질을 하셨던 어머니의 옷 주문, 배달과 잔심부름하는 것으로 소일했다. 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어려운 형편이라 그 얘기는 입밖에도 내지 못했다. 그러자니 한가할 때는 무료를 달랠 겸 창턱에다 턱을 괴고 번화한 종로 거리를 내려다볼 때가 많았다. 종로는 온종일 사람과 차로 붐볐고 늘 장바닥처럼 시끌벅적했다. 내 관심은 특히 마주 보이는 길 건너편 영남일보 앞마당에 쏠려 있었다. 신문이 나올 시간이 가까워지면 내 나이 또래에 남루한 차림의 피난민 신문팔이 소년들이 몰려와 왁자지껄했다. 그러다가 신문을 받아 들면 마치 단거리 선수처럼 한껏 내달려 순식간에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난리법석이 끝나면 신문사 앞마당에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텅 빈 고요가 깃들고 초여름 햇살이 한가하게 내려앉는다. 매일 거듭되는 그 역동과 반전의 모습을 거의 놓치지 않고 보는 것이 내 일과였다.

 

                    II

5월 하순 어느 날, 나는 영남일보사 앞마당 신문팔이 아이들 무리에서 조금 떨어져 혼자 서성이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서울 돈암동 같은 동네에 살던 가까운 친구 세영이었다. 반가운 김에 나는 한걸음에 달려가 그를 부둥켜안았다. 그의 사연은 무척 기구했다. 피난길에 온 식구가 뿔뿔이 헤어져 혼자 천신만고 끝에 대구까지 왔고, 우연히 먼 친척을 만나 그 집에 머무는데, 눈치가 보여 오늘 처음으로 신문을 팔러 나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바삐 신문을 받아 파는 요령을 알려주고 오늘 일이 끝나면 우리 집에 들르라고 얘기했다. 그날 저녁 내가 만난 세영이는 여리고 착해 빠졌던 과거의 그가 아니었다. 세상 풍파를 다 겪은 듯 담대하고 초연하기까지 했다. 손을 잡고 위로하는 내 어머니에게, “걱정 마세요.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렇게 살아남았는데 이제 두려울 게 없어요라며 짐짓 웃음까지 지어 보이며 사는데 자신감을 내보였다. 그를 보내고 어머니는 모진 세상이 아이를 저렇게 바꾸어 놓았구나하시며 한참을 우셨다.

 

그 후 세영이는 내게 자주 들려 당시 우리 집 주메뉴였던 수제비를 함께 먹으며, 그가 신문팔이와 갖가지 막일을 하며 겪은 무용담을 털어놓곤 했다. 그러면서 대구 가까이 까지 함께 왔다가 피난민 인파 속에서 안타깝게 손을 놓쳐버린 세 살 위 형 얘기를 자주했다. “분명 대구 어디엔가 있을 거야. 내가 신문 파는 이유도 그 형을 만나기 위해서야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 나올 때가 가까이 되자,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창턱에 턱을 괴고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길거리에 씩씩한 모습으로 세영이가 나타났다. 나는  밑을 내려다보며 손을 입에 모으고 세영아하고 그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도 병영아하고 맞장구 치며 손을 크게 휘저었다. 이어 그는 펄쩍펄쩍 뛰면서 , 어제 우리 형 만났어. 멀쩡히 잘 있어라고 외쳤다. 그 말에 나도 기뻐 축하해를 연발했다. 그러자 세영이는 이따 들릴 게, 기다려라고 짧게 소리치며 고개를 돌렸다. 종로 한복판, 차와 사람 소리가 얽혀 악머구리 끓듯 하는 북새통에서 우리는 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가 형을 만났다는 기쁜 소식을 잠시라도 빨리 어머니에게 알리려고 고개를 안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한, 두 걸음 옮기는데, 길거리에서 -하며 차가 급정거할 때 들리는 금속성의 마찰음이 들렸다. 나는 급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웅성거리는 가운데, 군인 찦차 앞에 세영이가 피를 흘리며 흐트러져 누어있었고 차에 탔던 군인 두 명이 황급이 차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순간 나는 온몸이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겨우 정신을 차려 외마디 소리처럼 엄마, 엄마를 외쳤다. 그리고 말을 잃은 채 엄마에게 손가락으로 그 쪽을 가리켰다. 어머니는 아니 세영이 아니냐고 크게 놀라시며, 내 손을 잡고 급히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우리가 사고현장에 도착했을 때 찦차는 이미 승준이를 싣고 떠난 후였고, 바닥에는 두어 군데 선연한 핏자국만 남아있었다. 아직 그곳에서 서성이는 몇몇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워낙 삽시간에 일어난 일이고, 사고가 나자 군인들이 즉시 차에서 내려와 그를 싣고 사라졌기 때문에 그 이상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정황으로 볼 때 중상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어머니와 나는 물어물어 대구 시내 외곽에 있는 육군 병원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모른다는 대답만 들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심경이었으나 아무 힘없는 피난민 모자는 안타까워 발을 종종 구르는 외에 달리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III

그날 그 사건은 나, 열한 살 소년에게 엄청난 마음에 상처를 안겨 주었다. 무엇보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양심의 가책에 견딜 수가 없었다. 시간상으로 따져 볼 때, 그가 나와 몇 마디 대화를 마치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찦차가 덮쳤으니, 애초에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아니 설혹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더라도 그 이상 대화를 이어가지 않고, “당장 내려갈 게하며 급히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면 아마도 별일이 없었을 것 같았다. 그러니 내가 그 참혹한 사고의 유발자였다.

나 어제 형을 만났어라고 작약(雀躍)하던 그의 밝은 모습과 길거리에 쓰러져 있던 그의 흐트러진 모습이 계속 오버랩 되면서, 가슴이 쥐어짜듯 저리고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나는 그가 죽었을까 걱정이 되었다. 사고 현장을 물들였던 핏자국으로 보아 중상이 확실하고, 그것이 자칫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미치면 나는 미칠 것 같았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부정적인 상상이 증폭되어 급기야 나는 그가 죽었을 것이라는 확신에 가까이 이르게 되었다. 그러면서 급기야 내가 그를 죽였다는 망령된 생각이 계속 엄습했다.

 

그날 이후, 나는 하루 한순간도 이 처절한 고뇌의 심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말수가 적어지고 밤잠을 설치는가 하면 끼니마저 자주 걸렀다. 그러니 옆에서 내 심경을 헤아리는 어머니의 걱정은 태산 같았다. 어머니는, “네 잘못이 아니야. 번잡한 길에서 빨리 자를 몰았던 그 군인들이 잘못한 거야. 그리고 세영이는 좀 다쳤겠지, 죽었을 리 없어. 너무 괴로워하지 말고 대신 하느님께 기도해하시며 나를 달래셨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내 마음을 어루만질 수가 없었다. 그때 나는 양심(良心)’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확연하게 인식했던 것 같다. ‘내 양심에 가책이 되는데, 어떻게 내 마음이 편안할 수가 있을까’. 그런데 문제는 내가 그 양심의 가책을 보상할 수 있는 아무런 수단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나는 갈수록 자책(自責)과 자학(自虐)의 깊은 늪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러면서 열한 살짜리 소년은 그때 양심’’삶과 죽음에 대한 온갖 철학적 사유를 그 나름의 방식으로 다 체험했던 것 같다. 훗날 내가 실존철학에 접하면서 즉시 ‘1951년 초여름의 나를 추억했고, ‘실존의 개념이 전혀 생소하지 않게 내게 다가왔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후 한 달이 가까워도 그로부터 아무 소식이 없었다. 나는 분명 그가 죽었기 때문이라고 단정했다. 그런 가운데 나는 점점 더 야위고 파리하게 시들어 갔다.

 

                         IV

사고 후 꼭 한 되던 날, 나는 집 근처 만경관(영화관) 옆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뒤에서 병영아!”하고 내 이름을 부르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나는 세영이임을 직감했다. 그러면서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뒤를 돌아보니, 서너 발자국 뒤에서 그가 밝게 웃고 있었다. 나는 꿈같은 현실 앞에 압도되어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내게 다가오는 그는 한 다리를 크게 절고 있었다.

 

극장 앞 작은 공터에서 그는 그간의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사고 순간 정신을 잃었고 눈을 떠보니, (우리 모자가 찾아갔던 바로 그) 육군병원 침대 위였다는 것이다. 양다리와 팔목 등의 복합골절로 장시간 수술이 끝난 후였는데, 다행히 생명에 지장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후 병원 측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거의 치유가 되어 어제 퇴원을 해서 우리집을 찾아가는 길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급한대로 형은 만났어?”, “다리는 어때?”하고 두서없이 물었다. 병원측이 연락해서 형은 곧 만났고, 아직 심하게 저는 한쪽 다리도 시간이 지나면 완쾌된다고 말했다.

 

그의 사연을 들으며 내 가슴은 계속 벅차올랐고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었다. 그리고 연상, “세영아 미안하다, 모든 게 내 잘못이다”, “고맙다를 연발했다. 그는 오히려 걱정 많이 했지, 미리 연락하지 못해 미안하다, “네가 사고와 무슨 상관이 있어, 그날 내가 재수가 없었던 거지라며 웃으며 나를 달랬다.

그러는 그가 내게 관세음보살처럼 느껴졌고, 나 자신은 무간지옥 (無間地獄)에서 단숨에 극락(極樂)에 오른 기분이었다.

                      

                        V.

그의 무사한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크게 기뻐하시며 연상 흐르는 눈물을 닦으셨다.

그러면서,

 

세영아, 정말 고맙다. 네가 우리 병영이를 살렸구나라고 말씀하셨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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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진영 2020.07.21 18:39 Address Modify/Delete Reply

    어린 시절로 돌아가 '소년세계', '새소년' 같은 어린이 잡지에 나온 이야기를 읽는
    느낌입니다. ^^

  2. 현강재 현강 2020.07.23 04:59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김 교수님, 바쁜 분이 제 글을 구석 구석 찾아 읽어 주시고 댓글도 달아주시니 고맙습니다.
    이 글에 나오는 그 때, 저는 '양심'의 의미를 제 나름으로 깨우쳤고, 이후 그것을 지켜보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 때 한 달 간의 고뇌를 매우 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늘 건행하시기
    빕니다.

  3. 김항규 2020.09.13 19:20 Address Modify/Delete Reply

    6,25를 배경으로한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한 편의 영화를 본 듯한 느낌의 글입니다.
    그 친구 분과는 그후 어떻게 지내시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4. 현강재 현강 2020.09.14 14:49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그 해 가을, 제 가족은 다시 부산으로 피난지를 옮겼고, 그러는 과정에서 세영이와 연락이 끊겼습니다. 그 후, 1년 반이지나 전쟁 막바지에 서울로 환도해서 세영이를 찾았으나 어디서도 소식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전쟁이라는 참혹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렇게 어렵게 찾았던 인연의 끈을 다시 놓쳤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별일 없었다면, 그 친구도 어디서 저처럼 늙어가고 있겠지요.

                     I.

  1969년 가을, 오스트리아 빈(Wien)에서 나는 박사학위 공부의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 때 나는 내 처와 막 첫돌을 지난 딸 수현이와 함께 빈(Wien) 교외 볼퍼스베르그(Wolfersberg)라는 동네에 살고 있었다. 그곳은 유명한 ‘빈 숲(Wiener Wald)’에서 멀지 않은 작고 아름다운 동화 같은 마을인데, 주위의 목가적인 풍경이 일품이었다. 내가 살던 집은 지방에 사는 돈 많은 출판업자의 작은 별장이었다. 나는 운 좋게 집과 정원을 보살펴 주는 조건으로 그 집 별채를 세내지 않고 빌려 쓰고 있었다. 제법 큰 정원에는 체리나무를 비롯해 다양한 종류의 과일나무, 꽃나무들이 가득했고 내가 사는 별채 앞에도 예쁜 장미 꽃밭이 있어, 봄, 여름에는 마치 집 전체가 꽃잔치를 벌리는 것 같았다.

 

  말하자면 내가 그 집 관리인이었는데, 정원사가 계절마다 와서 전지(剪枝)를 하는 등 정원을 보살펴 주기 때문에 실제로 나는 그곳에 그냥 사는 것 외에 딱히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주인내외는 한 달에 한번 정도 주말에 와서 하루 자고 갔는데, 그 때마다, 그 집이 한동안 비어있었는데 우리가 집을 잘 지켜줘서 이제 안심이 된다며 고맙다고 인사를 하곤 했다.

 

  돌이켜 보면 그 집에 살았던 약 1년 반이 내 빈 유학시절 중 가장 평온하고 행복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공부도 순조로웠고 삶도 안정되었다. 그 때 한 가지 걱정은 내 처가 두 번째 아이를 가졌는데, 이듬해 6월경 출산 예정시기가 내가 공부를 마칠 때 쯤, 말하자면 내게 가장 힘겹고 벅찬 시기와 겹친다는 것이었다. 이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내가 공부에 피치를 올려 둘째가 출산하기 한, 두 달 전에 공부를 끝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다가오는 겨울이 내 유학생활의 마지막 고비라고 생각하고, 한껏 마음을 다잡고 공부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II.

  호사다마(好事多魔)랄까. 그러나 이 호(好)시절이 오래가지 않았다. 그해 10월 중순 경 오랜만에 별장을 찾았던 주인내외가 집을 돌아 본 다음에, 다소 상기된 얼굴로 내게 “혹시 별장 안채를 쓰지 않았냐” 고 물었다. 나는 그런 적이 없었으므로 아니라고 대답했다. 주인과 처음부터 안채는 쓰지 않기로 약속해서 우리 내외는 당연히 그 룰을 지켜왔는데, 주인의 의외의 물음에 조금 황당하게 느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주인은 집을 떠나며 매우 굳은 얼굴로 내게 다가와 “대단히 미안하지만 10월 말까지 집을 내 주어야 겠다”고 말했다. 예상치 못했던 통고에 나는 무척 당황했지만, “알겠다”는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주인의 갑작스런 통고를 들으며, 우리 내외는 곧장 일이 이렇게 된 경위를 쉽게 추론할 수 있었다. 몇 주 전, 빈(Wien) 의대에 다니는 주인집 아들이 여자 친구와 함께 와서, 안채에서 하루 동안 시험공부를 하겠다고 말했다. 조금 꺼림직 했지만, 나는 굳이 마다 할 이유가 없어, 그렇게 하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그 날 저녁 어스름이 내릴 때 쯤 인사를 하고 집을 나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내 처가 “애인사이인 것 같지”라고 말했던 기억이다. 그 후 이 주쯤 지난 후 그들이 또 한 차례 찾아와서 공부 명목으로 하루 종일 안채에 머물다 돌아갔다. 그런데 그들이 아마 안채에 머물면서 집안을 조금 어지럽혔던지, 그렇지 않더라도 누가 왔다간 흔적을 남기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리고 주인집 내외는 그것을 우리가 한 일로 오해를 한 게 틀림없었다.

 

  우리의 추론은 실제로 확인됐다. 집주인 내외가 집 바로 건너편에 있는 성당 노(老)신부님께 우리를 믿고 집을 맡겼는데, 안채까지 사용해서 나가라고 통고했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신부님이 “베네딕트(내 세레명)가 그랬을 리가 없다”고 강하게 나를 변호하며 곧 추위가 닥치는데 너무 심하다고 말씀하셨는데도, 주인은 “이미 끝난 일”이라고 차갑게 말했다는 것이다. 나는 경위를 묻는 신부님께, 주저하다가 그 집 아들이 두 번 다녀간 얘기를 했다. 그랬더니 신부님은 환하게 웃으시며, “그러면 그랬겠지. 이제 아무 걱정 말게나, 내가 전화를 해서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주인 생각을 바꾸어 놓을게”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정작 내 마음은 이미 그 집을 떠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었다. 우선 그 집에 더 머물기 위해 주인에게 구차하게 지난 일을 들먹이는 것 자체가 내 자존심에 허락지 않았다. 또 내게 그 얘기를 듣고, 크게 곤혹스러워 할 집 주인 내외의 얼굴을 떠 올리니, 내가 힘들더라고 그냥 덮어버리는 게 낳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말씀드리니 신부님은 펄쩍 뛰셨다. 말씀인 즉, 그렇게 내가 물러나면, 그 주인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 한국 청년에게 집을 빌려 주었더니 이런 일이 있었다”며 떠들고 다닐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국 “네 나라까지 욕보이게 된다”는 것이었다. 신부님 말씀이 마음에 크게 걸렸으나, 나는 떠날 생각을 굳혔고 내 처도 동의했다. 그래서 조촐한 선물을 가지고 주인내외를 찾아가 그간 고마웠다는 인사를 드렸다.

 

                             III.

  그런데 두 주(週) 사이에 새 보금자리를 구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동분서주했으나 월말이 다 되도록 마땅한 방을 구하지 못했다. 입술이 바짝 마르고 있었다. 그럴 즈음 맞은편 성당의 신부님이 내게 긴히 할 말씀이 있다고 나를 부르셨다. 가서 뵈었더니 정 갈 데가 없으면 빈 숲 초입에 있는 공소(公所) 사택(舍宅)으로 가는 게 어떻겠냐고 물으셨다. 공소는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외진 지역의 교회 지소(支所)를 말하는 데, 대체로 지역 교우(敎友) 중심으로 운영되며, 일요일에 한번 신부님이 오셔서 미사를 집전하는 곳이다. 내게 공소 내의 사택에 거주하며 공소를 관리해 달라는 말씀이셨다. 순간 나는 ‘궁즉통(窮則通)’이라더니 바로 이런 것이 구나 싶어 즉석에서 쾌히 승낙했다. 엄동설한이 닥치는데, 임신부와 간난아이를 데리고 갈 곳이 없어 막막하기 그지없었는데, 우선 거처할 곳이 마련될 수 있다니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그런데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신부님이 “고맙네, 고맙네”를 연발하며 와락 나를 껴안으시는 게 아닌가. 신부님의 의외에 반응에 나는 다소 의아했으나,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내가 공소를 찾은 후였다.

 

  다음날 아침 신부님을 도와 부제(副祭)로 성당에서 일하는 친구 발터(Walter)가 나를 찾아왔다. 공소로 안내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내가 왜냐고 물으니, “가보면 알 걸세. 실은 그 공소 사택이 무척 열악해. 그래서 벌써 두 해째 비워두고 있어. 갓난아기랑 한 겨울을 거기서 나기는 크게 무리야. 신부님이야 공소를 자네에게 맡기면 큰 짐을 덜게 되어 다행이다 싶으신 모양이지만, 네 친구로서 나는 걱정이 태산 같아,” 하는 게 아닌가.

 

                              IV.

  공소는 동네에서 얼마간 떨어져 빈 숲 초입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외지고 황량해서 마치 ‘그림’ 동화의 <헨델과 그레텔>이 길을 찾아 헤매던 깊은 숲속에 들어 온 듯 했다. 공소, 사택 모두 무척 낡고 쇠락했고, 집 모습은 마치 옛날 강원도 화전민이 살던 너와집과 비슷했다. 평소 당찬 내 처도 첫마디가 “여기서 어떻게 살지”라며 고개를 모로 저었다. 나도 순간 마치 천국에서 지상으로 떨어진 느낌이었다. 그러나 내겐 입주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겨울 숲 속은 침울하고 음산했다. 바람이 세차게 불면, 주위의 나무들이 서로 부딪혀 마치 괴기영화에나 나옴직한 무시무시한 소리를 냈다. 거기에 멀리 들짐승 우는 소리까지 들리면 온몸에 소름이 돋곤 했다. 그런가 하면 워낙 낡고 오래 된 집이라 문과 창틀이 모두 취약해서 위부 침입에 대해 제대로 방비를 할 수 없어, 늘 긴장과 불안을 안고 살아야 했다. 열 손실도 커서 난로에 아무리 불을 때도 방의 온도가 17도 이상 오르지 않았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춥고 눈이 자주 왔다. 또 눈이 왔다하면 무릎 까지 찼다. 교우들이 언제라도 공소에 참례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아랫마을로 이어지는 길목까지 눈을 말끔 치워야 하는 데, 이 일이 정말 힘겨웠다. 눈이 많이 온 날은 꼭두새벽에 나서서 동이 훤히 틀 때까지 몇 시간 동안 정신없이 눈을 치웠다. 어떤 때는 애써 한껏 눈을 치고 돌아서면, 방금 치운 곳에 다시 눈이 소복이 쌓여 다시 되돌아가 눈을 치워야 했다.

  내가 맡은 <공소지기>일도 만만치 않았다. 공소 안팎을 늘 청결하게 청소를 해야 하고 때 없이 찾아오는 교우들을 응대해야 했다. 특히 신부님이 오셔서 미사를 집전하는 일요일이 다가오면, 이미 토요일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당일에도 제의(祭衣)준비부터 시작해서 대체로 부제와 복사가 해야 할 온갖 사제 보조 역할을 혼자 도맡아서 해야 했다. 전 과정에서 시나브로 내 처의 도움이 컸던 것은 물론이다. 교우들은 그간 을씨년스럽던 공소에 생기가 돌고, 일요일 미사도 격식을 갖춰 빈틈없이 진행된다며 무척 좋아했다. 제일 기뻐하시는 분은 역시 본당 신부님이셨다. 나는 그 때마다 내 소소한 역할에 대해 얼마간의 보람과 자부심을 느꼈다.

실제로 가장 마음이 시렸던 것은 한 겨울에 처와 아기를 숲속 집에 놓아두고 시내로 나가는 일이었다. 한 주일에 적어도 두 번은 대학에 나가야 되는데, 특히 수요일 오후 세미나가 저녁 6시가 넘어 끝나기 때문에 나간 김에 시장까지 들려 집에 돌아오자면 대체로 9시경이 된다. 겨울 산 속은 오후 4시가 조금 지나면 어둡기 때문에, 몸까지 무거운 안식구는 내가 돌아 올 때까지 아기와 함께 5, 6시간 공포에 떨어야 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빈 숲은 베토벤의 교향곡 6번 <전원>과 요한 스트라우스의 유명 왈츠곡 <빈 숲속의 이야기>의 무대이다. 봄의 향기와 생동감,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 새들의 지저귐이 잠자던 우리의 미적 감성을 일깨워 주는 생명의 요람이다. 그러나 그 해 겨울 빈 숲속의 이미지는 다분히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나그네>의 음울하고 어두운 정조(情調),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그곳 숲 속의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 보고 싶었다. 어떤 때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느껴보려고 애써 보기도 했고, 또 때로는 스님의 동안거(冬安居)에 비유해 자위하기도 했다. 그러나 눈앞의 현실은 너무나 냉혹했다.

정황이 그러하니 실제로 그 겨울 동안 내 가장 절박한 목표는 공부보다도 세(네?) 식구가 별고 없이 이 혹독한 동절기를 견뎌내는 것이었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 겨울, 내 삶의 목표 중 가장 앞선 순위는 단연 ‘생존’이었다.

 

  결국 나는 빈 숲 속에서 아름답고 찬란한 생명의 봄을 맞이하지 못하고, 긴 겨울의 끝자락 2월 말에 시내로 거처를 옮겼다. 박사학위 논문을 마무리하고 학위시험(Rigorosum)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생존’을 넘어 ‘성취’에 전념하는 새 보금자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석 달 후 마침내 나는 고단했던 5년 여의 공부를 끝냈다. 그리고 한 달 뒤 둘째 광선이가 태어났다.

 

                     VI.

  2012년 나는 아내와 오스트리아를 방문했다. 오랜만에 볼퍼스베르그의 옛집과 정든 성당, 그리고 빈 숲의 예의 공소를 찾았다. 옛 집과 성당은 시간이 멈춘 듯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빈 숲 속의 공소 자리에는 현대식의 새 성당이 들어섰고 주위도 많이 변해 있었다. 새 성당, 빈 14구의 ‘코르돈 교회’(Kordon Kirche) 앞에서 나는 '그 겨울의 공소‘를 추억하며 깊은 감회에 젖었다.

 

<사진 1> 1968년 가을, 꼭 반세기 전에 내 처가 갓난 첫 아이 수현이를 안고 옛 집 현관 앞에 서 있는 모습이다.

 

 

 

 

 

<사진 2> 집 맞은 편의 성당(St.Josef am Wolfersberg)

 

 

<사진 4> 빈 숲속의 새 성당(Kordon Kirche)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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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현실>(계간지) 2018년 가을호에 실린 내 글 '나의 삶, 나의 길'을 옮긴다.

 

안병영 교수님_철학과현실_나의삶나의길.pdf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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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 속에는 4.19가 아직도 어제 일인 듯 선명한데, 벌써 58년이 지났다. 대학 2학년 화사한 봄날, 싱그러운 젊음들이 순수와 열정으로 하나 되어 민주주의를 외쳤던 그 날은 내 인생 여정에서 가장 찬연한 기록으로 영원히 뇌리에 남아있다.

아래 글은 2011년 4월 19일, <현강재>에 한번 실렸던 글이다. 북받치는 감정으로 재록한다.  

 

현강재 어머니와 함께 한 4_19.mht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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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출판사의 강희일 사장님이 출판인으로서의 자신의 외길 인생을 담은 자전적 회고록을 내신다며,  글을 부탁했다. 내가 보낸 내용을 아래에 담는다.

 

 

 

 

                               속 깊은 사람, 강희일 사장님

 

 

 

                                                    I.

다산(茶山)의 강희일 사장님을 처음 만난 것은 내가 한국외국어대학 행정학과에 근무하던 1973년경으로 기억한다. 그러니 그와의 교유(交遊)도 어언 45, 거의 반세기 가까이 되었다. 돌이켜 보면, 당시 내가 30대 초반이었고 강희일 님은 아마 20대 말이었으니, 둘 다 정말 꽃 같은 젊은 나이였다. 강희일 님은 그때 <법문사>에서 대학교재 기획과 영업을 맡고 있었는데, 그의 진실한 성품과 훈훈한 인간미에 반해 사회과학 계열의 젊은 교수들이 그를 무척 좋아했다. 그는 비즈니스를 앞세우기보다는 늘 교수들과 인간적 유대와 신뢰 관계를 쌓는데 정성을 기울였다. 바로 그 점이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강희일 님의 오늘을 있게 한 성공의 비결이 아닐까 한다.

 

강희일 님과 가까이하면서, 나는 그가 몇 가지 점에서 남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점을 알고, 깊은 감동을 느꼈다. 첫째, 그는 청소년기에 신문팔이, 구두닦이, 서점점원 등 무척이나 고단한 삶을 살면서 주경야독을 거쳐 대학의 문턱을 넘었으며, 이후 늦은 나이에도 계속 학업에 대한 집념과 지식에 향한 열정이 대단하다는 점이다. 그에게는 각고면려(刻苦勉勵)의 정신이 가득 배 있었다. 두 번째, 그는 자신의 사업 성공을 넘어 한국 출판계의 발전에 기여 하고자 하는 남다른 열망과 소명감을 지녔고, 그 일에 자신의 역량과 시간의 큰 부분을 할애한다는 사실이다. 한길을 걸으며 줄기차게 공의(公義)를 추구하는 그의 모습이 크게 돋보였다. 세 번째 그는 청소년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거듭되는 모진 병마(病魔)와 싸우며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이에 감연히 맞서 이겨왔고,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늘 웃는 모습으로 자신의 일과 책임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이러한 남다른 용기와 책임감이 많은 이의 전범(典範)이 되기에 족하다고 생각했다.

 

강희일 님의 <출판 외길인생>을 좀 더 살펴보자. 그는 35세 젊은 나이에 <다산출판사>를 창업했고, 몇 년 사이에 대학교재 성장 1순위 출판사로 크게 도약하여 <성장하는 기업모델>로 각광을 받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업이 일정 궤도에 이르자, 1990년대 초 이후 자신의 이상과 이념에 따라 사회활동 영역을 크게 넓힌다. 학술도서출판과 연관하여 출판문화 창달을 위한 많은 사업을 주도하고, 필요한 사회적 이슈를 제기하는가 하면, 절박한 법제 문제의 해결에 앞장서는 등 국가문화사업인 출판산업의 발전을 위해 크게 헌신한다. 그는 <()한국학술출판협회> 회장 등 다수의 직책을 역임하며 열과 성을 다해 일했다. 그러면서 늘 그의 사유를 지배했던 것은 출판산업은 문화적 측면과 산업적 측면의 양면성을 동시에 가지며, 그 어느 것도 소홀이 할 수 없다는 신념이었다.

 

그는 평생 부지런한 공부꾼이었다. 뒤늦게 복학하여 대학을 맞췄고, 환갑에 이르러 중앙대학교에서 언론학 석사를 취득했다. 그는 대학에서 자신의 소중한 경험을 바탕으로 10여년 간 <출판편집의 실무>를 직접 가르쳤고, 2014년에는 자신의 학문과 경험의 결정체인 <한국출판의 이해>(문광부 우수학술도서)를 출간하여, 오늘까지 4판에 이르고 있다. 그는 이처럼 자신을 연마하고 실무와 학문을 연계하는 데 한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강희일 님은 평생 많은 병과 함께 했다. 젊은 나이에 불면증, 우울증, 편집증, 폐결핵에서 시작하여 중년 이후 관상동맥협심증과 식도암으로 어려운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아직도 병고와의 싸움은 끝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는 불퇴전의 용기를 가지고 이에 맞섰고, 병 때문에 출판인으로서의 자신의 공적 책임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병마와 얼마간의 타협은 불가피했다. 다산출판사가 보다 성숙한 대형 종합출판기업으로 발전, 확장될 수 있는 결정적 시점에서 축소지향으로 그 방향을 바꾼 것도 실은 병 때문이었다.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는 이제까지의 생애를 통하여 온갖 간난과 병고 속에서도 한시도 꿈과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고, 미래에 대한 도전과 끊임없는 열정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지난 반 세기 한국 출판계의 산증인인 그는 자신이 경험했던 성공과 실패는 출판계의 공동자산이라는 점을 절감하고, 이 책을 출간한다고 술회한다. 이 책에는 그의 개인적 기록뿐만 아니라, 기고문, 기사, 자료, 공공기관에 보낸 문서 등 한국 출판계의 역사를 증언할 많은 소중한 기록들이 담겨있다.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은 다분히 사회사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II.

나는 연세대학교 행정학과에서 1977년에 <복지행정>이라는 과목을 처음 개설했다. 그리고 이듬해 강희일 사장님과 이 제목으로 책을 쓰기로 구두 약속을 했다. 몇 년 후 서면 계약까지 했다. 그런데 이후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실로 긴 세월이 하염없이 흘렀다. 책이 제법 진척이 되어 고비를 넘겼다 싶을 때면, 내가 중요한 학교 보직을 맡거나 정부에 들어가게 되어 한동안 손을 놓게 되곤 하였다. 그런데 일을 마치고 돌아와 보면, 미리 썼던 내용이 학문적 추세에 뒤떨어져 이미 낡은 것이 되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새로운 결의로 번번히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는 자주, 커다란 바위를 산 꼭데기로 밀어 올려 정상 근처에 이르면 그 바위가 다시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시지프스의 신화>를 떠 올렸다.

 

그동안 나는 미안한 심경으로 다산에서 책 두 권을 냈다. <교육복지정책론>(김인희와 공저, 2009)<5.31 교육개혁, 그리고 20>(하연섭과 공저, 2015)이 그것이다. 그러다가 이번에 강희일 사장님과 구두 계약 40년 만에 <복지국가와 사회복지정책>이라는 바뀐 제목으로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 공저로 곧 출판될 새 책의 <머리글> 마지막 대목을 여기 옮긴다. 강희일 사장님의 속 깊은 인간성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다산의 강희일 사장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지난 40년간 그는 줄곧 내가 언젠가 책을 끝낼 것을 믿어 주셨다. 그러면서 한 번도 책 재촉을 하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그의 무한신뢰가 좋은 책을 써야겠다는 내 결의를 다지게 만들었던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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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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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4.25 16:53 Address Modify/Delete Reply

    강사장님 쾌차하시길 빕니다.

  2. 서지오 2018.08.04 20:33 Address Modify/Delete Reply

    강사장님. 제발 건강히 오래오래 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