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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에세이

내 기억 속에 김구와 조소앙

2020. 7. 17. by 현강

                               I.

나는 어렸을 때부터 정치와 시사(時事)에 유달리 관심이 컸던 것 같다. 그래서 소년 시절 내 기억 속에 아이답지 않게 정치가 차지하는 비중이 무척 크다.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정(性情)인데, 거칠고 시끄러운 정치세계에 왜 그리 관심이 많았던지 내가 생각해도 이해가 잘 안 된다. 신문에서도 정치면만 즐겨 찾았고, 라디오에서 정치나 시국 얘기가 나오면 귀를 쫑긋 세웠다.

 

이렇듯 정치세계는 늘 나를 열광시키는 대상이었다. 정치라는 동네는 언제나 떠들썩하고, 변화무쌍하며, 역동적인 게 재미있었고, 정치무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사고, 행태, 전략을 관찰하고 평가하는 일도 흥미로웠다. 하지만 꿈에도 내가 나중에 커서 정치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말하자면 나는 그때 이미 대국(對局)의 참여자가 아닌, 관전자(觀戰者)로 스스로를 자리매김을 했던 것 같다.

1948년부터 1950년까지, 내가 여덟 살 때부터 열 살 때까지 어린 소년기에 나를 가장 매료시켰던 정치인은 김구와 조소앙이었다.

 

                                  II.

내가 처음 김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48년 여덟 살 때 집의 서가에서 백범일지를 꺼내 든 순간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그 책은 아마도 친필본 백범일지가 아니라 1947에 출간된 국사원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 책은 춘원 이광수의 교열과 윤문을 거쳤기에 문장도 유려하고 문체도 쉽고 간결했다. 따라서 어린 내가 읽기에도 그리 부담이 없었다.

 

나는 책을 읽으며 백범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그의 반일 투쟁에서 보여 준 불퇴전의 용기, 그리고 절절한 나라 사랑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 것 중 하나가 백범이 동학에 깊게 관여하다 몸을 피해 황해도 명문 안 진사 댁에 얼마간 몸을 의탁하고 있을 때 얘기다. 그 댁 큰 아들인 안중근이 나이는 어렸으나 매우 영특하고 사격술이 뛰어났는데, 안 진사가 다른 아들들에게는 글을 읽지 않는다고 걱정도 하였으나, 중근에게는 아무 간섭도 하지 않았다는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며 안중근 의사가 어려서부터 남달랐고 부친인 안 진사가 그의 비범함을 이미 숙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꽤 인상 깊게 받아드렸던 기억이다. 아마 내가 워낙 그전부터 안중근 의사를 흠모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게 아닐까 한다.

 

이후 나는 백범 김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에 관한 뉴스나 떠도는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어른들에게 그에 관해 이것, 저것 귀찮게 묻곤 했다. 마침 그해 김구가 김규식 등과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하고, 방북하여 김일성 등과 남북협상을 시도하였다가 실패하고 돌아왔다. 그 일이 일파만파로 정치. 사회적 논란을 빚었는데, 나도 제 딴에는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사태의 전말을 추적하고 김구의 시도가 무위로 끝난 데 대해 안타까워하며, 그를 빈손으로 내친 김일성을 미워했던 기억이다.

 

다음 해, 내가 아홉 살이던 19496월에 백범이 경교장에서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을 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다. 나는 억장이 무너지는 심경이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빈소가 차려진 경교장에 조문을 가자고 졸랐다. 엄마는 그냥 명복을 비는 기도나 하라고 말씀하셨지만, 내가 계속 떼를 써서 함께 서대문 경교장을 찾았다. 조문객이 많아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영정 앞에 넙죽 절을 드렸다.

이어 백범의 국민장이 엄수되었는데, 이번에도 아빠에게 서울운동장 장례식에 꼭 참석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려 함께 일찍 식장을 찾았다. 그런데 워낙 인파가 몰려 식장에 진입을 못하고 서성대다가, 종로 6가 큰 길가에 있는 아빠 친구 <동원당 약국>을 찾아가 그 집 2층 창가에서 효창공원으로 향하는 영구행렬를 보며 울먹였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날 부슬비가 엷게 내려 하늘도 슬퍼하는구나 했다.

 

나는 당시 어린 마음에 백범을 저격한 안두희가 나와 같은 안씨 성을 가졌다는 데 대해 매우 불편한 심경을 가졌다. 무척 화가 나고 부끄럽기까지 했다. 내가 평소에 안중근 의사와 같은 순흥 안씨라는 사실 때문에 가슴 뿌듯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느낌이었다.

이와 연관해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내가 다니던 혜화동 성당에 나와 동갑내기 백범의 손녀(백범의 장남 金仁의 딸)가 다녔는데, 하루는 주일 미사 후 그녀가 내게 다가와, “분도(내 천주교 영세명), 우리 할아버지 죽인 사람이 바로 너와 같은 안 가래, 알았었니?”하고 내게 물었다. 나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부끄럽고 마치 크게 죄진 기분이었다. 그런데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엄마가 그녀가 자리를 뜨자, 내게 괜찮다. 그냥 한 얘기일 깨다. 신경 쓰지 마라. 걔 엄마도 안 씨인데, !” 하며, 나를 다독거리셨다. 그러면서 그 애 엄마가 다름 아닌 안중근 의사의 조카라고 귀띔해 주셨다. 말하자면 김구와 안중근 일가는 사돈 사이였다. 훗날 확인해 보니 그 애 엄마가 백범의 자부(子婦)이자, 안 의사의 조카인 안미생(安美生) 여사였다.

 

                                           III.

열 살 되던 해인 1950년 해방 이후 두 번째 선거인 <5.30 선거>가 치러졌다. 내가 살던 돈암동은 성북 선거구에 속했는데, 이곳에서 당대의 거물 정치인인 조소앙과 조병옥이 맞대결을 하게 되어 전국에 이목이 집중되었다. 조병옥은 미군정청 경무부장 출신으로 해방 후 치안유지와 공산당 색출에 앞장섰던 강골의 한민당계 보수정치인이었다. 이에 반해 조소앙은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을 마련하고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주창한 임정 외무부장 출신으로 김구 등과 한독당을 창설하고 처음에는 남북협상을 지지했으나, 훗날 단정수립으로 선회한 중도계열의 정치인이었다.

 

처음부터 나는 조소앙의 광()팬이었다. 그의 이념에 공감하기보다 그에게서 풍기는 지사(志士)형의 품모에 반했던 것 같다. 올곧고 청빈한 선비의 인상을 주는 조소앙은 선거유세 때도 민족의 꿈과 희망을 이야기했다. 당시 조병옥 측이 경찰을 동원해 테러행위를 일삼는다는 소문이 파다해서 나의 조소앙에 대한 편향과 연민이 더 컸었던 것 같다.

 

나는 선거유세장을 열심히 쫓아다녔다. 인근의 삼선동, 성북동은 물론 멀리 정릉까지 원정을 갔던 기억이다. 유세장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렸는데, 키가 작아 연사가 안 보이면, 남의 자전거 뒷좌석에 올라가 양해를 구하고 자전거 주인의 어깨를 짚고 올라서 정견발표를 듣기도 했다. 조소앙의 연설은 지적이고 온유한 가운데 격조가 있었다. 첫마디에 늘 함께 입후보한 일곱 명의 후보자를 북두칠성에 비유하며, 그들 모두에게 존경과 사랑의 메시지를 보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에 반해 조병옥은 보다 직설적이고 공격적이었다. 힘차고 결의에 찬 모습이 사나이다웠으나 내 마음을 얻지는 못했다. 두 사람의 정견발표가 끝나면, 군중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선거전이 절정에 이르렀던 520일 쯤, 내가 큰 사고를 당했다. 옆집 아이와 장난을 치다가 드럼통에서 떨어져 관자노리를 뾰족한 돌 모서리에 찍혔다. 동맥이 끊어져 피가 낭자했다. 당시 서울에서 유명하다는 종로 김하등 외과에서 큰 수술을 받고 열흘 가까이 입원치료를 받았다. 어른들은 그때 내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입원실 침대에 누어서도 내 관심은 온통 선거에 가 있었다. 라디오를 귀에서 떼지 않았고, 찾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성북구 선거 추세와 전망을 묻곤 했다. <5.30 선거>에는 2년 전 <5.10 선거>에 불참했던 남북협상파와 중립계가 대거 참여해서 선거열기가 무척 높았다. 내가 입원했던 병원의 김하등 원장님은 종로 갑에 출마한 박순천 여사의 열렬한 지지지였다. 그래서 한글을 모르는 그 댁 가정부에게 박순천 여사의 기호를 주입시키려고 무척이나 애쓰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는 다행이 선거 전날 퇴원해서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선거 당일의 현지 분위기를 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퇴원한 바로 그날, 529일에 조소앙이 공산당의 정치자금을 받아쓴 것이 탄로나 투표일을 하루 앞두고 월북했다는 사실 무근의 벽보와 전단이 성북구 일대에 마구 뿌려져 난리가 났다. 당황한 조소앙은 선거 당일 새벽에 지프에 확성기를 달고 지역구를 돌면서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다.

 

선거결과는 조소앙 선생의 압승으로 끝났다. 그가 3만 여 표로 전국 최고득표를 했고, 조병옥 박사는 1만 여표밖에 얻지 못했다. 나는 그때 민심의 힘을 절감했다. 소년은 환호, 작약했고, 신이나서 한동안 그 얘기만 화제에 올렸다.

그 후 한 달이 못되어 6.25 전쟁이 터지고, 조소앙 선생은 납북되는 비운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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