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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에세이

'초등영어' 출범의 뒷이야기

2020. 7. 11. by 현강

                       I.

2004년 나는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교육장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칠레 산티아고에 가는 길에 일본에 들려, 가와지마 일본 문부과학상과 만났다. 교과서 문제 등 한일 간에 여러 가지 난제가 얽혀 있었기에 소통을 위해 나종일 주일대사에게 부탁해서 마련된 자리였다. 그런데 가와지마 장관은 나를 보자, 대뜸 당신이 1997년에 한국에 초등영어 교육을 도입한 장본인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정말 대단한 일을 했다. 일본에서도 같은 시기에 초등영어 시행이 치열한 사회적 쟁점이었는데, 좌고우면(左顧右眄)하다가 끝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뒤로 미뤘다. 그런데 우리는 부끄럽게도 아직 초등영어를 도입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화 경쟁에서 크게 실기(失期)했다. 천추의 한이다라고 말했다.

 

                     II.

나는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초등영어 출범 전후의 숨 가빴던 과정을 되돌아보았다. 19953월 교육부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점진적 영어교육 실시계획>을 확정한 후, 19973월 실시를 목표로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때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초등영어 도입을 위해 막판 스퍼트를 하고 있었다. 준비 정도만 가지고 따진다면, 일본이 한국보다 한발 앞섰다. 하지만, 워낙 세심하고 조심스러운 일본인지라 이리 살피고 저리 재다가 끝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시행을 연기했다.

당시 한국의 상황도 무척 복잡했다. 특히 1996년 중반에 들어서면서 초등영어교육 실시 여부를 둘러싸고 사회적 논란이 격화되었고, 그해 후반 특히 10월경에는 그 갈등이 절정에 이르렀다. 초등영어 실시에 대한 우려의 분위기가 팽배해지자 청와대나 당. 정 어디에서도 장관의 등을 떠미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교육부 내에서도 장관이 무리수를 두지 않기를 바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당시 내 머릿속에는 두 가지 생각이 맴돌았다. 하나는 지금 미루면 자칫 아주 늦어질 텐데, 그 역사적 책임은 누가 감당할 것인가라는 근본적 우려였고, 다른 하나는 이를 강행하다가 실패하면 오로지 내 책임이 될 터인데, 일단 뒤로 물러나는 게 상책이 아닐까?’라는 기회주의적 생각이 그것이었다. 오랜 고뇌 끝에 예정대로 1997년 첫 학기에 초등영어 교육을 시행한다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결단을 내렸다. 당시의 상황을 간략히 복기(復棋)하면 다음과 같다.

 

                     III.

내가 교육부장관에 임명된 것은 199512월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체적 여론은 초등영어 도입에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실제 정책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이해관계 집단 및 여론주도 집단들의 입장은 보다 다양하고 복잡했다, 사안의 중요성 때문에 주요 이해당사자인, 교육부, 국회, 교육청, 학원, 출판사, 학부모 및 교육전문가 간에 매우 복잡하고 역동적인 상호작용이 전개된다. 그 과정에서 치열한 갈등과 공방, 그리고 설득과 조정이 거듭되었다.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도 1996년에 들어서자, 특별활동 영어교육 실시학교는 5,370 개교(전체의 95.2%)로 늘었고, 방과 후 상설 영어반 운영은 3,960개교(전체의 70.2%)에 이르렀다.

 

크게 보아 초등영어의 도입을 반대하거나, 그 실시를 늦추자는 쪽은 민족주의적(내지 국수주의적) 성향이 강한 국회의원 및 정치인을 비롯하여, 일부의 언론, 국어학계와 교육계 인사, 그리고 일부 학부모들이었다. 반대파는 어려서부터 영어를 가르치면, 작금의 과도한 서양화, 미국화의 격류 속에서 우리 말과 글, 그리고 우리 고유의 문화를 지키기 어려워진다는 점을 강하게 부각시켰다. 거기에는 반미정서도 한 몫을 했고, 그러다 보니 반대파 중에는 진보진영 인사들이 많았다. 야당인 민주당의 다수가 여기 합류했다. 한편, 유보파는 초등영어 교육은 필요하나 아직 준비가 충분치 못하므로 2, 3년 더 연기해야 마땅하다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또한 초등영어 실시가 가시권에 들어오면서, 조기영어 열풍이 몰아쳐서 학원가를 비롯하여 심지어는 일부 유치원에서도 영어 과외를 하는 등 그 부자용이 크다는 점을 지적하며 학부모들 교육비 부담이 크게 늘고 있다는 점을 심각한 현실적 문제로 제기하고 나섰다.

 

한편 초등영어교육을 찬성하는 측은 교육부를 비롯하여 일선 교육계, 그리고 다수의 학부모, 그리고 세계화에 민감한 시민들이었다. 그러나 시행에 앞장서고 있던 교육부를 제외하면, 대체로 찬성하는 측은 사안에 대해 침묵하는 편이었고, 기껏 입을 열어도 무척 소극적이었다. 그러니 교육부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 우군의 숫자가 많은데 이들 <침묵하는 다수>가 조직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언론과 시민사회 등은 오히려 반대와 유보의 입장만 강하게 부각시키는 형국이어서 교육부는 수세에 몰릴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이 감에 따라 초등영어교육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세력 중 적지 않은 수가 유보 쪽으로 돌아섰다. 그러다 보니 점차 <찬성 대 유보>의 대결양상이 두드러졌다. 유보하자는 쪽에서는 보다 착실히 준비해서 제대로 영어교육을 시행하자는데, 이를 반대하는 것은 명분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또한 교육부의 무분별한 강행 태세는 신자유주의의 이념적 공세 내지 성과주의의 전형이라고 세차게 공격하며, 심지어는 조기 영어교육기관의 로비에 포획되었기 때문이라는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특히 국회 교육위원회의 김한길 의원을 비롯한 몇몇 야당 의원들의 반대는 매우 치열했다.

 

나는 초등영어교육은 세계화 추세에 비추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시대적 과제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초등영어 도입은 내게 주어진 역사적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나는 만약 야당인 민주당이 19982월에 정권을 잡으면 과연 초기영어를 도입할지에 대해 의구심이 무척 컸다. 따라서 모처럼 찾아 온 이 절호의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무엇보다 나는 초등영어교육을 더 늦추면, 도시와 농촌, 그리고 빈()과 부() 학생 간의 영어 격차가 더 벌어질 것이라는 점을 크게 우려했다. 이미 조기영어교육 열풍 속에 거의 모든 도시 중산층 자제들은 어려서부터 사설 학원이나 개인 과외 등을 통해 영어를 익히고 있는 데 반해, 농어촌 및 도시 빈곤층 자제들은 중학교 입학할 때까지 거의 영어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없지 않은가. 이 차디찬 현실이 나를 크게 압박했다. 지금이라도 초등영어교육 시기를 앞당기지 않으면, 이들 두 그룹 간의 영어능력 격차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벌어져 그 부정적 영향력이 중학교 입학 이후의 학업 및 대입과정, 그리고 멀리는 사회생활 및 세계 진출에 이르기까지 심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IV.

199610월로 접어들자 나는 다음 해 초등영어 시행여부에 대해 마지막 결단을 내려야 할 운명의 시간이 왔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당시 상황은 초등영어 출범시기를 늦추자는 여론이 증폭되는 분위기였고, 청와대나 당. 정 모두 그러한 여론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수성 총리와 박세일 수석은 내가 어떤 결정을 내려도 그 결정을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그런 가운데 이 총리는 너무 무리하지 않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덧붙였다. 우회적으로 유보 선호를 내비친 것이었다. 차관과도 의견을 나눴다. 그도 말을 아꼈지만 실시를 연기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주위가 이러니 내 마음도 조금씩 흔들리는 것을 스스로 느꼈다. 아무리 다잡으려해도 그게 쉽지 않았다. 초등영어 실시를 늦추자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이 즈음, 내 마음을 영어교육 실시 쪽으로 다시 선회하게 만든 두 가지 일이 있었다. 그 하나는 당시 내 비서관이었던 김정기씨의 충정어린 조언이었다. 그는 지근거리에서 흔들리는 내 마음을 읽고, 다음과 같이 직언을 했다.

장관님! 시행을 불과 5개월 앞두고 초등영어 실시를 미룰 경우, 그간 장관님만 믿고 오랜 기간 동안 열정과 헌신을 다해 각고의 노력을 해 온 일선 교육현장에 일대 패닉현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것은 교육부는 물론 이 정부에 대한 엄청난 불신을 불러올 것입니다. 그리고 기회있을 때 마다 내년 3월 초등영어 실시를 공언해 오신 장관님의 인격은 어떻게 됩니까

폐부를 찌르는 그의 발언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즉시 스스로를 다시 추스르면서, 초등영어 실시 준비상황을 세밀한 부분까지 총점검했다. 그리고 상황이 크게 우려할 정도는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다. 얼마간 자신감이 샘솟았다.

그리고 며칠 후, 예상치 못한 일이 터졌다. 1013일자 동아일보 저녁 가판에 '초등학생 영어교육 연기검토'가 일면 톱으로 대서특필된 것이었다. 나는 부랴부랴 글을 쓴 K 여기자와 편집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그 기사는 명백한 <오보>라고  항의하며, 내일 조간에서 삭제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확실한 소스에 근거한 것이라고 자신감을 피력하며, 쉽사리 물러날 기세가 아니었다. 국회와 당. , 그리고 교육부 및 교육계에 초등영어실시와 관계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인터뷰한 후, 결국 장관이 19973월 초등영어 도입을 유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결론은 내렸다는 얘기였다. 그러면서 이제 장관님도 속내를 드러내시지요라며 거칠게 역습했다.

동아일보와 옥신각신하면서 나는 하느님이 내게 이제 시행을 결단하라고 절호의 기회를 주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단호한 어조로 장관이 그렇게 말해도 구태여 오보를 내겠다면 당신들 마음대로 하시라며 전화를 끊었다. 나의 결연한 태도에 동아일보는 결국 다음 날 조간에 위의 톱기사를 거둬들였다. 바로 그날 나는 서둘러 초등영어 내년 봄 실시 확정을 만천하에 공표했다. 돌이켜 보면, 이날 동아일보와의 해프닝이 한국에서의 초등영어 실시 일정을 결정하는 데 매우 주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이후 5개월 동안 나는 배수진을 친 절박한 심경으로 교육부 및 교육청 관계자, 그리고 일선 초등학교 영어교육 예정교사들과 더불어 초등영어교육의 성공을 위해 올인을 했다.

 

                           V.

19973월 초하루, 마침내 초등학교 3학년을 대상으로 초등영어교육이 그 역사적 출범을 했다. 예상을 뒤엎고, 처음부터 학교 현장에서 매우 호의적인 반응이 나왔다. 반신반의했던 언론도 성공쪽으로 돌아섰고, 그간 치열했던 반대여론도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놀라운 반전이었다. 1997529일부터 612(15일간)까지 미디어 리서치가 전국의 초등학교 3학년 학부모 2,000명을 대상으로 하는 초등학교 영어교육 여론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절대다수(91,9%)가 찬성하였다. 늘 불신의 표적이었던 교육정책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이런 압도적 결과는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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