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1976년 3월 초, 내가 한국외국어대학에서 연세대로 직장을 옮긴 후 한 학기가 지난 때였다. 총장(이우주)님이 나를 보자고 연락을 주셨다. 왜 나를 부르실까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아 의아해 하면서 찾아뵈었더니, 나보고 대학신문인 <연세춘주>와 영자신문 Annals 주간을 맡으라는 것이었다. 그러시면서 내가 학창시절에 연세춘추 기자를 했던 이력이 있고, 나이도 젊어 학생기자들과 교감을 잘 할듯해서 발탁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얼떨결에 "네“하고 답하고 총장실을 나왔다. 나는 그 때까지만 해도 내 앞에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가시밭길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II.

나는 원래 어려서부터 언론에 관심이 많았고, 대학시절 한때는 장래 직업으로 기자를 꿈꾸기도 했었다. 그래서 대학신문의 주간을 맡는다는 일이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고, 좋은 신문을 만드는데 대한 얼마간의 자신감과 그에 따른 설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적인 바람은 내가 주간으로 첫 걸음을 내디딘 후, 반시간도 안되어 산산히 부서졌다. 주간 자리에서 내가 받은 첫 전화는 연세대에 파견된 중앙정보부의 M 이라는 사람의 전화였다. 그는 내게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간단히 자기소개를 하고, 이어 압도하는 어투로 “다음호의 일면 톱은 ***로 하시지요”라고 지시하듯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그거야 우리가 알아서 결정할 일이지요. 여지껏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앞으로는 기관에서 신문내용에 관여하는 일은 없어야 됩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랬더니 M은 대뜸 “아니 이 양반이 세상을 전혀 모르는군, 내가 당장 내려가겠소”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나는 “앞으로 기관에 계신 분의 신문사 출입은 절대 안 됩니다. 한 걸음이라도 신문사에 발을 내디디면 내가 문제를 크게 삼겠습니다.”라고 응수했다.

이렇게 10여분 격앙된 목소리로 말다툼을 하면서, 나는 비로소 내가 사는 시대의 엄혹함을 절감했다. 때는 유신말기, 온 대학이 동토(凍土)처럼 꽁꽁 얼어붙은 가운데 학내에서 불온(?)한 낙서가 몇 자만 등장해도 온 대학을 뒤집어 당사자 색출에 나서는 칠흑 같은 어두운 시대였다. 학생처에 몇 명의 기관원이 거의 상주했다. 학도호국단은 이미 정권의 통제아래 들어갔고, 이들의 남은 관심사는 아직 명맥이 남아 기회있는 대로 저항을 일삼는 연세춘추의 숨통을 막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주간이 된 계기도 기관의 <연세춘추> 통제 과정에서 야기되었다. 당시 취재부장이었던 김수길(경영학과 3, 전 JTBC 대표이사/중앙일보주필)군이 연세춘추의 인기 칼럼인 ‘백양로’에 쓴 글을 트집 잡아 학교에 압력을 가해 그를 내쫓고 주간교수를 나로 교체한 것이었다.

 

               III.

<연세춘추>/Annals 주간으로 재직했던 2년 가까운 세월은 지금 되돌아보아도 실로 노심초사와 고난의 연속이었다. 우선 격무에 시달렸다. 강의 시간 외에는 거의 신문사에서 일과 씨름하며 살았다. 신문이 인쇄되는 토요일 밤 풍경을 잠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광화문 조선일보 외간부에서 새 신문 인쇄를 위해 초교, 재교를 거쳐 최종교정본을 꼼꼼히 살펴보고, 이른바 ‘OK’를 놓고 나면 으레 시간은 11시를 훨씬 넘긴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라 쫓기는 마음으로 급히 뛰어나와 가까스로 마지막 택시를 잡아타고 우이동 입구까지 이르면 대략 12시 가깝게 된다. 통금 때문에 더 이상 갈 수 없다는 택시에서 떠밀리듯 내려, 잰 걸음으로 어둑한 산중턱을 돌아 손병희 선생 묘소 근처의 내 옛집에 닿으면 12시 반을 넘는다. 지친 몸을 눕혀 겨우 몇 시간 눈을 붙인 후, (일요일) 새벽이면 벌써 전화통에 불이 붙는다. 새로 인쇄된 연세춘추를 보고 갖가지 논란이 빚어지는 것이다.

당시 내가 30대 중반, 한창 나이였기에 <연세춘추>의 과중한 업무는 그런대로 몸은 견딜 만 했다. 그런데 관계 기관의 감시와 통제가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하루하루보내기가 숨이 막힐 정도로 괴롭고 힘들었다. 기관원들은 신문을 낼 때 마다 번번이 거칠게 시비를 걸었고, 언필칭 휴간이나 배포중지를 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들과의 다툼이 거의 일상화되었고, 그들 눈에는 녹록치 않은 내가 눈에 가시였다. 나는 만약의 ‘필화’사태에 대비해서 학생들이 쓴 기사를 일일이 점검하고, 정도가 지나치면 그 수위를 낮추거나, 문맥이나 어구를 고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갈수록 일종의 검열관이 되어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자멸감(自蔑感)을 느낄 때가 많았다.

다행히 학생기자들은 내 고충을 이해해서 사보타주하거나 내게 가시적으로 반발하거나 불만을 토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주간인 내가 방패막이 되어 자신들의 글을 임계선(臨界線) 이하로 고쳐 줄 것을 믿고 거침없이 위험수위를 넘기며 시국에 대한 울분을 글로 토로하곤 했다.

나는 최소한 대학언론의 명분을 지키고 나에 대한 학생기자들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으면서, 당국의 철퇴를 피하는 ‘Golden Mean’을 찾으려고 고심했다. 그러나 그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 아니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 고뇌는 점점 깊어갔고, 그것은 내 신체적 건강을 해치는 수준으로 번져갔다. 연세춘추 주간으로 반년이 지나면서부터 나는 위궤양으로 시달리기 시작했고, 일 년이 지나자 체중이 10 Kg이 빠졌다. 나는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려워 총장님께 여러 차례 주간 교체를 청했으나, 번번이 “대안이 없다”라는 말씀으로 일축하셨다.

그래도 <연세춘추>는 실로 엄혹했던 유신말기에 대학언론 중 가장 결기 있게 민주화를 외쳤던 신문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 때문에 핍박과 고초도 더 컸다. 다른 대학 신문사 주간들은 내게 그러고 어떻게 버티냐고 자주 물었다.

 

                  IV.

그 질곡 속에서도 <연세춘추>의 주간으로써 느끼는 보람과 기쁨이 적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주간으로 일했던 2년 가까이의 세월이 없었다면, 내가 연세대에서 보냈던 30년 넘는 세월이 훨씬 메마르고 캠퍼스에서 느꼈던 낭만적 정서도 크게 줄었을 것이다.

우선 학생기자들이 좋았다. 놀라운 일은 우수한 학생들이 대거 기자를 지망했고, 거기서 뽑힌 친구들은 하나같이 빼어난 재목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글 잘 쓰고 당차고 기개 있는 정예(精銳)들을 선배기자들이 엄선해서 뽑았다. 주간인 나는 충원과정에 개입하지 않고, 최종 면접에 형식적으로 참가해서 추인만 했다. 그들 나름의 팀워크와 투쟁 전열을 갖추기 위해 그래야만 될 것 같아서였다.

학생기자들은 시대의 양심으로, 또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로서 대학의 명예와 존엄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무엇보다 그들의 순수와 열정, 그리고 용기가 돋보였다. 나는 기관원들의 감시와 통제 속에서 학생기자들을 보호하며, 그들의 열망과 의기에 찬물을 끼얹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면서 이것이 내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나와 학생기자들과의 관계는 무척 가까웠다 (물론 이것은 내 생각이고, 그들 생각은 달랐을 수도 있다). <교수-학생> 관계라기보다 <가족>과 <동지> 같았다.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았고, 시대적 아픔을 공유하며, 같은 지평을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 때 나도 한창 젊었던 시절이라 그들과 비교적 격의 없이 어울렸던 것 같다. 대체로 일주일에 두, 세 번을 그들과 저녁을 함께 했고, 여름방학에는 단체로 해수욕장을 찾았고 겨울에는 연수를 떠나 산행도 같이 했다. 한번은 쌍쌍파티도 했던 기억이다. 그들은 글 쓸 때는 투사를 닮았으나, 놀 때는 어린아이처럼 착하고 순진무구했다. 학교 앞 중국집 자장면 한 그릇에도 만족했고, 늘 떠들썩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즐거워했다. 나도 그 정서에 휩쓸려 그들과 함께 있을 때는 대학시절의 낭만이 되 살아오는 느낌을 갖곤 했다.

나는 그들이 어려운 시기에 대학신문을 만든다는 구실로 학업을 게을리 할까 걱정 되어, 매 학기 성적이 평균 B학점이 되지 않으면 퇴사시킬 것을 공표하고, 학기말이면 성적표 제출을 의무화 했다. 그러나 곧 이것이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학생기자 대부분이 성적이 빼어났고, 뒤로 크게 처지는 학생은 한명도 없었다.

나는 보다 질 높은 신문을 만든다는 명분으로 학교에 청해서 연세춘추가 자리하고 있는 ‘핀슨 홀’ 위층에 ‘조사연구실’을 마련했다. 이들에게 공부방을 만들어주려는 속셈에서였다. 이들은 이 방을 요긴하게 이용하는 듯해서 기뻤다.

 

                   V.

지난 2017년 겨울, 그 때 고락을 함께 했던 학생기자들 15명과 40년 만에 해후를 했다. 대부분이 이미 퇴직을 했고, 꽃 같던 여학생 기자들이 이제 환갑을 넘어 머리가 희끗한 할머니가 되었다. 세월의 강을 넘어 옛 기억을 소환하며 모두 그 아련한 시절로 돌아가 손을 맞잡았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이강렬 2021.03.15 13:48 Address Modify/Delete Reply

    그 시절이 참 아련합니다. 제가 75년도에 유신 반대를 하다가 퇴학을 당하고 안기부 와 경찰의 감시 아래 고통의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교수님과 친구들은 학교에서 그 어려움을 당하셨지요. 제가 80년 복적 후 졸업해 82년 연합통신에 들어가서 외신부에서 근무할 때 '보도 지침'이 데스크 책상에 매일 쌓였습니다. 0000는 보도하지 말 것, 0000는 축소해 기사화 할 것 등등입니다. 돌아보면 엄혹한 시기였지만 그때의 민주 회복, 언론 자유에 대한 열정과 갈망이 부끄럽지는 않았구나 생각이 듭니다. 요즘 '기레기'라고 조롱 받는 후배 기자들을 보면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수님 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