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나는 어렸을 때부터 정치와 시사(時事)에 유달리 관심이 컸던 것 같다. 그래서 소년 시절 내 기억 속에 아이답지 않게 정치가 차지하는 비중이 무척 크다.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정(性情)인데, 거칠고 시끄러운 정치세계에 왜 그리 관심이 많았던지 내가 생각해도 이해가 잘 안 된다. 신문에서도 정치면만 즐겨 찾았고, 라디오에서 정치나 시국 얘기가 나오면 귀를 쫑긋 세웠다.

 

이렇듯 정치세계는 늘 나를 열광시키는 대상이었다. 정치라는 동네는 언제나 떠들썩하고, 변화무쌍하며, 역동적인 게 재미있었고, 정치무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사고, 행태, 전략을 관찰하고 평가하는 일도 흥미로웠다. 하지만 꿈에도 내가 나중에 커서 정치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말하자면 나는 그때 이미 대국(對局)의 참여자가 아닌, 관전자(觀戰者)로 스스로를 자리매김을 했던 것 같다.

1948년부터 1950년까지, 내가 여덟 살 때부터 열 살 때까지 어린 소년기에 나를 가장 매료시켰던 정치인은 김구와 조소앙이었다.

 

                                  II.

내가 처음 김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48년 여덟 살 때 집의 서가에서 백범일지를 꺼내 든 순간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그 책은 아마도 친필본 백범일지가 아니라 1947에 출간된 국사원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 책은 춘원 이광수의 교열과 윤문을 거쳤기에 문장도 유려하고 문체도 쉽고 간결했다. 따라서 어린 내가 읽기에도 그리 부담이 없었다.

 

나는 책을 읽으며 백범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그의 반일 투쟁에서 보여 준 불퇴전의 용기, 그리고 절절한 나라 사랑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 것 중 하나가 백범이 동학에 깊게 관여하다 몸을 피해 황해도 명문 안 진사 댁에 얼마간 몸을 의탁하고 있을 때 얘기다. 그 댁 큰 아들인 안중근이 나이는 어렸으나 매우 영특하고 사격술이 뛰어났는데, 안 진사가 다른 아들들에게는 글을 읽지 않는다고 걱정도 하였으나, 중근에게는 아무 간섭도 하지 않았다는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며 안중근 의사가 어려서부터 남달랐고 부친인 안 진사가 그의 비범함을 이미 숙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꽤 인상 깊게 받아드렸던 기억이다. 아마 내가 워낙 그전부터 안중근 의사를 흠모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게 아닐까 한다.

 

이후 나는 백범 김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에 관한 뉴스나 떠도는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어른들에게 그에 관해 이것, 저것 귀찮게 묻곤 했다. 마침 그해 김구가 김규식 등과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하고, 방북하여 김일성 등과 남북협상을 시도하였다가 실패하고 돌아왔다. 그 일이 일파만파로 정치. 사회적 논란을 빚었는데, 나도 제 딴에는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사태의 전말을 추적하고 김구의 시도가 무위로 끝난 데 대해 안타까워하며, 그를 빈손으로 내친 김일성을 미워했던 기억이다.

 

다음 해, 내가 아홉 살이던 19496월에 백범이 경교장에서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을 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다. 나는 억장이 무너지는 심경이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빈소가 차려진 경교장에 조문을 가자고 졸랐다. 엄마는 그냥 명복을 비는 기도나 하라고 말씀하셨지만, 내가 계속 떼를 써서 함께 서대문 경교장을 찾았다. 조문객이 많아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영정 앞에 넙죽 절을 드렸다.

이어 백범의 국민장이 엄수되었는데, 이번에도 아빠에게 서울운동장 장례식에 꼭 참석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려 함께 일찍 식장을 찾았다. 그런데 워낙 인파가 몰려 식장에 진입을 못하고 서성대다가, 종로 6가 큰 길가에 있는 아빠 친구 <동원당 약국>을 찾아가 그 집 2층 창가에서 효창공원으로 향하는 영구행렬를 보며 울먹였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날 부슬비가 엷게 내려 하늘도 슬퍼하는구나 했다.

 

나는 당시 어린 마음에 백범을 저격한 안두희가 나와 같은 안씨 성을 가졌다는 데 대해 매우 불편한 심경을 가졌다. 무척 화가 나고 부끄럽기까지 했다. 내가 평소에 안중근 의사와 같은 순흥 안씨라는 사실 때문에 가슴 뿌듯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느낌이었다.

이와 연관해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내가 다니던 혜화동 성당에 나와 동갑내기 백범의 손녀(백범의 장남 金仁의 딸)가 다녔는데, 하루는 주일 미사 후 그녀가 내게 다가와, “분도(내 천주교 영세명), 우리 할아버지 죽인 사람이 바로 너와 같은 안 가래, 알았었니?”하고 내게 물었다. 나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부끄럽고 마치 크게 죄진 기분이었다. 그런데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엄마가 그녀가 자리를 뜨자, 내게 괜찮다. 그냥 한 얘기일 깨다. 신경 쓰지 마라. 걔 엄마도 안 씨인데, !” 하며, 나를 다독거리셨다. 그러면서 그 애 엄마가 다름 아닌 안중근 의사의 조카라고 귀띔해 주셨다. 말하자면 김구와 안중근 일가는 사돈 사이였다. 훗날 확인해 보니 그 애 엄마가 백범의 자부(子婦)이자, 안 의사의 조카인 안미생(安美生) 여사였다.

 

                                           III.

열 살 되던 해인 1950년 해방 이후 두 번째 선거인 <5.30 선거>가 치러졌다. 내가 살던 돈암동은 성북 선거구에 속했는데, 이곳에서 당대의 거물 정치인인 조소앙과 조병옥이 맞대결을 하게 되어 전국에 이목이 집중되었다. 조병옥은 미군정청 경무부장 출신으로 해방 후 치안유지와 공산당 색출에 앞장섰던 강골의 한민당계 보수정치인이었다. 이에 반해 조소앙은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을 마련하고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주창한 임정 외무부장 출신으로 김구 등과 한독당을 창설하고 처음에는 남북협상을 지지했으나, 훗날 단정수립으로 선회한 중도계열의 정치인이었다.

 

처음부터 나는 조소앙의 광()팬이었다. 그의 이념에 공감하기보다 그에게서 풍기는 지사(志士)형의 품모에 반했던 것 같다. 올곧고 청빈한 선비의 인상을 주는 조소앙은 선거유세 때도 민족의 꿈과 희망을 이야기했다. 당시 조병옥 측이 경찰을 동원해 테러행위를 일삼는다는 소문이 파다해서 나의 조소앙에 대한 편향과 연민이 더 컸었던 것 같다.

 

나는 선거유세장을 열심히 쫓아다녔다. 인근의 삼선동, 성북동은 물론 멀리 정릉까지 원정을 갔던 기억이다. 유세장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렸는데, 키가 작아 연사가 안 보이면, 남의 자전거 뒷좌석에 올라가 양해를 구하고 자전거 주인의 어깨를 짚고 올라서 정견발표를 듣기도 했다. 조소앙의 연설은 지적이고 온유한 가운데 격조가 있었다. 첫마디에 늘 함께 입후보한 일곱 명의 후보자를 북두칠성에 비유하며, 그들 모두에게 존경과 사랑의 메시지를 보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에 반해 조병옥은 보다 직설적이고 공격적이었다. 힘차고 결의에 찬 모습이 사나이다웠으나 내 마음을 얻지는 못했다. 두 사람의 정견발표가 끝나면, 군중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선거전이 절정에 이르렀던 520일 쯤, 내가 큰 사고를 당했다. 옆집 아이와 장난을 치다가 드럼통에서 떨어져 관자노리를 뾰족한 돌 모서리에 찍혔다. 동맥이 끊어져 피가 낭자했다. 당시 서울에서 유명하다는 종로 김하등 외과에서 큰 수술을 받고 열흘 가까이 입원치료를 받았다. 어른들은 그때 내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입원실 침대에 누어서도 내 관심은 온통 선거에 가 있었다. 라디오를 귀에서 떼지 않았고, 찾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성북구 선거 추세와 전망을 묻곤 했다. <5.30 선거>에는 2년 전 <5.10 선거>에 불참했던 남북협상파와 중립계가 대거 참여해서 선거열기가 무척 높았다. 내가 입원했던 병원의 김하등 원장님은 종로 갑에 출마한 박순천 여사의 열렬한 지지지였다. 그래서 한글을 모르는 그 댁 가정부에게 박순천 여사의 기호를 주입시키려고 무척이나 애쓰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는 다행이 선거 전날 퇴원해서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선거 당일의 현지 분위기를 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퇴원한 바로 그날, 529일에 조소앙이 공산당의 정치자금을 받아쓴 것이 탄로나 투표일을 하루 앞두고 월북했다는 사실 무근의 벽보와 전단이 성북구 일대에 마구 뿌려져 난리가 났다. 당황한 조소앙은 선거 당일 새벽에 지프에 확성기를 달고 지역구를 돌면서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다.

 

선거결과는 조소앙 선생의 압승으로 끝났다. 그가 3만 여 표로 전국 최고득표를 했고, 조병옥 박사는 1만 여표밖에 얻지 못했다. 나는 그때 민심의 힘을 절감했다. 소년은 환호, 작약했고, 신이나서 한동안 그 얘기만 화제에 올렸다.

그 후 한 달이 못되어 6.25 전쟁이 터지고, 조소앙 선생은 납북되는 비운을 맞는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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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근우 2020.07.21 06:21 Address Modify/Delete Reply

    너무 흥미진진합니다.
    마치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보는 듯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특별한 경험을 가지고 계셔서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부총리님께서 말씀하시니 가슴에 쏙쏙 들어옵니다.
    어느 곳에서도 말씀하지 않으셨던 귀중한 보따리를 풀어놓으시는 느낌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2. 윤주명 2020.08.12 23:31 Address Modify/Delete Reply

    교수님 글을 다시 보게되어 기쁩니다. 김구선생님과 안중근 의사 가문이 사돈지간이라는 것도 교수님 글을 통해 알았습니다.

                       I.

2004년 나는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교육장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칠레 산티아고에 가는 길에 일본에 들려, 가와지마 일본 문부과학상과 만났다. 교과서 문제 등 한일 간에 여러 가지 난제가 얽혀 있었기에 소통을 위해 나종일 주일대사에게 부탁해서 마련된 자리였다. 그런데 가와지마 장관은 나를 보자, 대뜸 당신이 1997년에 한국에 초등영어 교육을 도입한 장본인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정말 대단한 일을 했다. 일본에서도 같은 시기에 초등영어 시행이 치열한 사회적 쟁점이었는데, 좌고우면(左顧右眄)하다가 끝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뒤로 미뤘다. 그런데 우리는 부끄럽게도 아직 초등영어를 도입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화 경쟁에서 크게 실기(失期)했다. 천추의 한이다라고 말했다.

 

                     II.

나는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초등영어 출범 전후의 숨 가빴던 과정을 되돌아보았다. 19953월 교육부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점진적 영어교육 실시계획>을 확정한 후, 19973월 실시를 목표로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때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초등영어 도입을 위해 막판 스퍼트를 하고 있었다. 준비 정도만 가지고 따진다면, 일본이 한국보다 한발 앞섰다. 하지만, 워낙 세심하고 조심스러운 일본인지라 이리 살피고 저리 재다가 끝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시행을 연기했다.

당시 한국의 상황도 무척 복잡했다. 특히 1996년 중반에 들어서면서 초등영어교육 실시 여부를 둘러싸고 사회적 논란이 격화되었고, 그해 후반 특히 10월경에는 그 갈등이 절정에 이르렀다. 초등영어 실시에 대한 우려의 분위기가 팽배해지자 청와대나 당. 정 어디에서도 장관의 등을 떠미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교육부 내에서도 장관이 무리수를 두지 않기를 바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당시 내 머릿속에는 두 가지 생각이 맴돌았다. 하나는 지금 미루면 자칫 아주 늦어질 텐데, 그 역사적 책임은 누가 감당할 것인가라는 근본적 우려였고, 다른 하나는 이를 강행하다가 실패하면 오로지 내 책임이 될 터인데, 일단 뒤로 물러나는 게 상책이 아닐까?’라는 기회주의적 생각이 그것이었다. 오랜 고뇌 끝에 예정대로 1997년 첫 학기에 초등영어 교육을 시행한다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결단을 내렸다. 당시의 상황을 간략히 복기(復棋)하면 다음과 같다.

 

                     III.

내가 교육부장관에 임명된 것은 199512월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체적 여론은 초등영어 도입에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실제 정책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이해관계 집단 및 여론주도 집단들의 입장은 보다 다양하고 복잡했다, 사안의 중요성 때문에 주요 이해당사자인, 교육부, 국회, 교육청, 학원, 출판사, 학부모 및 교육전문가 간에 매우 복잡하고 역동적인 상호작용이 전개된다. 그 과정에서 치열한 갈등과 공방, 그리고 설득과 조정이 거듭되었다.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도 1996년에 들어서자, 특별활동 영어교육 실시학교는 5,370 개교(전체의 95.2%)로 늘었고, 방과 후 상설 영어반 운영은 3,960개교(전체의 70.2%)에 이르렀다.

 

크게 보아 초등영어의 도입을 반대하거나, 그 실시를 늦추자는 쪽은 민족주의적(내지 국수주의적) 성향이 강한 국회의원 및 정치인을 비롯하여, 일부의 언론, 국어학계와 교육계 인사, 그리고 일부 학부모들이었다. 반대파는 어려서부터 영어를 가르치면, 작금의 과도한 서양화, 미국화의 격류 속에서 우리 말과 글, 그리고 우리 고유의 문화를 지키기 어려워진다는 점을 강하게 부각시켰다. 거기에는 반미정서도 한 몫을 했고, 그러다 보니 반대파 중에는 진보진영 인사들이 많았다. 야당인 민주당의 다수가 여기 합류했다. 한편, 유보파는 초등영어 교육은 필요하나 아직 준비가 충분치 못하므로 2, 3년 더 연기해야 마땅하다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또한 초등영어 실시가 가시권에 들어오면서, 조기영어 열풍이 몰아쳐서 학원가를 비롯하여 심지어는 일부 유치원에서도 영어 과외를 하는 등 그 부자용이 크다는 점을 지적하며 학부모들 교육비 부담이 크게 늘고 있다는 점을 심각한 현실적 문제로 제기하고 나섰다.

 

한편 초등영어교육을 찬성하는 측은 교육부를 비롯하여 일선 교육계, 그리고 다수의 학부모, 그리고 세계화에 민감한 시민들이었다. 그러나 시행에 앞장서고 있던 교육부를 제외하면, 대체로 찬성하는 측은 사안에 대해 침묵하는 편이었고, 기껏 입을 열어도 무척 소극적이었다. 그러니 교육부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 우군의 숫자가 많은데 이들 <침묵하는 다수>가 조직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언론과 시민사회 등은 오히려 반대와 유보의 입장만 강하게 부각시키는 형국이어서 교육부는 수세에 몰릴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이 감에 따라 초등영어교육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세력 중 적지 않은 수가 유보 쪽으로 돌아섰다. 그러다 보니 점차 <찬성 대 유보>의 대결양상이 두드러졌다. 유보하자는 쪽에서는 보다 착실히 준비해서 제대로 영어교육을 시행하자는데, 이를 반대하는 것은 명분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또한 교육부의 무분별한 강행 태세는 신자유주의의 이념적 공세 내지 성과주의의 전형이라고 세차게 공격하며, 심지어는 조기 영어교육기관의 로비에 포획되었기 때문이라는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특히 국회 교육위원회의 김한길 의원을 비롯한 몇몇 야당 의원들의 반대는 매우 치열했다.

 

나는 초등영어교육은 세계화 추세에 비추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시대적 과제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초등영어 도입은 내게 주어진 역사적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나는 만약 야당인 민주당이 19982월에 정권을 잡으면 과연 초기영어를 도입할지에 대해 의구심이 무척 컸다. 따라서 모처럼 찾아 온 이 절호의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무엇보다 나는 초등영어교육을 더 늦추면, 도시와 농촌, 그리고 빈()과 부() 학생 간의 영어 격차가 더 벌어질 것이라는 점을 크게 우려했다. 이미 조기영어교육 열풍 속에 거의 모든 도시 중산층 자제들은 어려서부터 사설 학원이나 개인 과외 등을 통해 영어를 익히고 있는 데 반해, 농어촌 및 도시 빈곤층 자제들은 중학교 입학할 때까지 거의 영어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없지 않은가. 이 차디찬 현실이 나를 크게 압박했다. 지금이라도 초등영어교육 시기를 앞당기지 않으면, 이들 두 그룹 간의 영어능력 격차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벌어져 그 부정적 영향력이 중학교 입학 이후의 학업 및 대입과정, 그리고 멀리는 사회생활 및 세계 진출에 이르기까지 심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IV.

199610월로 접어들자 나는 다음 해 초등영어 시행여부에 대해 마지막 결단을 내려야 할 운명의 시간이 왔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당시 상황은 초등영어 출범시기를 늦추자는 여론이 증폭되는 분위기였고, 청와대나 당. 정 모두 그러한 여론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수성 총리와 박세일 수석은 내가 어떤 결정을 내려도 그 결정을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그런 가운데 이 총리는 너무 무리하지 않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덧붙였다. 우회적으로 유보 선호를 내비친 것이었다. 차관과도 의견을 나눴다. 그도 말을 아꼈지만 실시를 연기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주위가 이러니 내 마음도 조금씩 흔들리는 것을 스스로 느꼈다. 아무리 다잡으려해도 그게 쉽지 않았다. 초등영어 실시를 늦추자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이 즈음, 내 마음을 영어교육 실시 쪽으로 다시 선회하게 만든 두 가지 일이 있었다. 그 하나는 당시 내 비서관이었던 김정기씨의 충정어린 조언이었다. 그는 지근거리에서 흔들리는 내 마음을 읽고, 다음과 같이 직언을 했다.

장관님! 시행을 불과 5개월 앞두고 초등영어 실시를 미룰 경우, 그간 장관님만 믿고 오랜 기간 동안 열정과 헌신을 다해 각고의 노력을 해 온 일선 교육현장에 일대 패닉현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것은 교육부는 물론 이 정부에 대한 엄청난 불신을 불러올 것입니다. 그리고 기회있을 때 마다 내년 3월 초등영어 실시를 공언해 오신 장관님의 인격은 어떻게 됩니까

폐부를 찌르는 그의 발언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즉시 스스로를 다시 추스르면서, 초등영어 실시 준비상황을 세밀한 부분까지 총점검했다. 그리고 상황이 크게 우려할 정도는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다. 얼마간 자신감이 샘솟았다.

그리고 며칠 후, 예상치 못한 일이 터졌다. 1013일자 동아일보 저녁 가판에 '초등학생 영어교육 연기검토'가 일면 톱으로 대서특필된 것이었다. 나는 부랴부랴 글을 쓴 K 여기자와 편집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그 기사는 명백한 <오보>라고  항의하며, 내일 조간에서 삭제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확실한 소스에 근거한 것이라고 자신감을 피력하며, 쉽사리 물러날 기세가 아니었다. 국회와 당. , 그리고 교육부 및 교육계에 초등영어실시와 관계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인터뷰한 후, 결국 장관이 19973월 초등영어 도입을 유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결론은 내렸다는 얘기였다. 그러면서 이제 장관님도 속내를 드러내시지요라며 거칠게 역습했다.

동아일보와 옥신각신하면서 나는 하느님이 내게 이제 시행을 결단하라고 절호의 기회를 주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단호한 어조로 장관이 그렇게 말해도 구태여 오보를 내겠다면 당신들 마음대로 하시라며 전화를 끊었다. 나의 결연한 태도에 동아일보는 결국 다음 날 조간에 위의 톱기사를 거둬들였다. 바로 그날 나는 서둘러 초등영어 내년 봄 실시 확정을 만천하에 공표했다. 돌이켜 보면, 이날 동아일보와의 해프닝이 한국에서의 초등영어 실시 일정을 결정하는 데 매우 주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이후 5개월 동안 나는 배수진을 친 절박한 심경으로 교육부 및 교육청 관계자, 그리고 일선 초등학교 영어교육 예정교사들과 더불어 초등영어교육의 성공을 위해 올인을 했다.

 

                           V.

19973월 초하루, 마침내 초등학교 3학년을 대상으로 초등영어교육이 그 역사적 출범을 했다. 예상을 뒤엎고, 처음부터 학교 현장에서 매우 호의적인 반응이 나왔다. 반신반의했던 언론도 성공쪽으로 돌아섰고, 그간 치열했던 반대여론도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놀라운 반전이었다. 1997529일부터 612(15일간)까지 미디어 리서치가 전국의 초등학교 3학년 학부모 2,000명을 대상으로 하는 초등학교 영어교육 여론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절대다수(91,9%)가 찬성하였다. 늘 불신의 표적이었던 교육정책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이런 압도적 결과는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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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대구에 피난 온 후, 19514, 새로 이사한 곳이 종로 영남일보사 건너편 조광(朝光)양복점 2층이었다. 처음 몇 달 동안 살았던 칠성동 기찻길 옆 어두운 빈민촌에 비하면 주거조건이 훨씬 낳아졌다. 그 집 2층에는 피난민 세 가구가 살았는데, 우리는 길가 창문 옆 다다미 6장 방에 살았다. 윤동주가 일본 유학 때 쓴 시, ‘쉽게 쓰여진 시에는 육첩() 방은 남의 나라라는 시구(詩句)가 나오는데, 바로 그 규모의 크지 않은 방이었다. 여기서 어머니, 누나와 세 식구가 함께 살았다. 아버지는 우리를 이곳으로 옮겨 놓으시고 그해 3월 서울이 재탈환 (再奪還)되자 직장 선발대를 따라 서울로 올라가셨다.

 

열 한살 소년인 나는 한복 삯바느질을 하셨던 어머니의 옷 주문, 배달과 잔심부름하는 것으로 소일했다. 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어려운 형편이라 그 얘기는 입밖에도 내지 못했다. 그러자니 한가할 때는 무료를 달랠 겸 창턱에다 턱을 괴고 번화한 종로 거리를 내려다볼 때가 많았다. 종로는 온종일 사람과 차로 붐볐고 늘 장바닥처럼 시끌벅적했다. 내 관심은 특히 마주 보이는 길 건너편 영남일보 앞마당에 쏠려 있었다. 신문이 나올 시간이 가까워지면 내 나이 또래에 남루한 차림의 피난민 신문팔이 소년들이 몰려와 왁자지껄했다. 그러다가 신문을 받아 들면 마치 단거리 선수처럼 한껏 내달려 순식간에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난리법석이 끝나면 신문사 앞마당에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텅 빈 고요가 깃들고 초여름 햇살이 한가하게 내려앉는다. 매일 거듭되는 그 역동과 반전의 모습을 거의 놓치지 않고 보는 것이 내 일과였다.

 

                    II

5월 하순 어느 날, 나는 영남일보사 앞마당 신문팔이 아이들 무리에서 조금 떨어져 혼자 서성이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서울 돈암동 같은 동네에 살던 가까운 친구 세영이었다. 반가운 김에 나는 한걸음에 달려가 그를 부둥켜안았다. 그의 사연은 무척 기구했다. 피난길에 온 식구가 뿔뿔이 헤어져 혼자 천신만고 끝에 대구까지 왔고, 우연히 먼 친척을 만나 그 집에 머무는데, 눈치가 보여 오늘 처음으로 신문을 팔러 나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바삐 신문을 받아 파는 요령을 알려주고 오늘 일이 끝나면 우리 집에 들르라고 얘기했다. 그날 저녁 내가 만난 세영이는 여리고 착해 빠졌던 과거의 그가 아니었다. 세상 풍파를 다 겪은 듯 담대하고 초연하기까지 했다. 손을 잡고 위로하는 내 어머니에게, “걱정 마세요.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렇게 살아남았는데 이제 두려울 게 없어요라며 짐짓 웃음까지 지어 보이며 사는데 자신감을 내보였다. 그를 보내고 어머니는 모진 세상이 아이를 저렇게 바꾸어 놓았구나하시며 한참을 우셨다.

 

그 후 세영이는 내게 자주 들려 당시 우리 집 주메뉴였던 수제비를 함께 먹으며, 그가 신문팔이와 갖가지 막일을 하며 겪은 무용담을 털어놓곤 했다. 그러면서 대구 가까이 까지 함께 왔다가 피난민 인파 속에서 안타깝게 손을 놓쳐버린 세 살 위 형 얘기를 자주했다. “분명 대구 어디엔가 있을 거야. 내가 신문 파는 이유도 그 형을 만나기 위해서야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 나올 때가 가까이 되자,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창턱에 턱을 괴고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길거리에 씩씩한 모습으로 세영이가 나타났다. 나는  밑을 내려다보며 손을 입에 모으고 세영아하고 그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도 병영아하고 맞장구 치며 손을 크게 휘저었다. 이어 그는 펄쩍펄쩍 뛰면서 , 어제 우리 형 만났어. 멀쩡히 잘 있어라고 외쳤다. 그 말에 나도 기뻐 축하해를 연발했다. 그러자 세영이는 이따 들릴 게, 기다려라고 짧게 소리치며 고개를 돌렸다. 종로 한복판, 차와 사람 소리가 얽혀 악머구리 끓듯 하는 북새통에서 우리는 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가 형을 만났다는 기쁜 소식을 잠시라도 빨리 어머니에게 알리려고 고개를 안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한, 두 걸음 옮기는데, 길거리에서 -하며 차가 급정거할 때 들리는 금속성의 마찰음이 들렸다. 나는 급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웅성거리는 가운데, 군인 찦차 앞에 세영이가 피를 흘리며 흐트러져 누어있었고 차에 탔던 군인 두 명이 황급이 차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순간 나는 온몸이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겨우 정신을 차려 외마디 소리처럼 엄마, 엄마를 외쳤다. 그리고 말을 잃은 채 엄마에게 손가락으로 그 쪽을 가리켰다. 어머니는 아니 세영이 아니냐고 크게 놀라시며, 내 손을 잡고 급히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우리가 사고현장에 도착했을 때 찦차는 이미 승준이를 싣고 떠난 후였고, 바닥에는 두어 군데 선연한 핏자국만 남아있었다. 아직 그곳에서 서성이는 몇몇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워낙 삽시간에 일어난 일이고, 사고가 나자 군인들이 즉시 차에서 내려와 그를 싣고 사라졌기 때문에 그 이상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정황으로 볼 때 중상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어머니와 나는 물어물어 대구 시내 외곽에 있는 육군 병원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모른다는 대답만 들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심경이었으나 아무 힘없는 피난민 모자는 안타까워 발을 종종 구르는 외에 달리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III

그날 그 사건은 나, 열한 살 소년에게 엄청난 마음에 상처를 안겨 주었다. 무엇보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양심의 가책에 견딜 수가 없었다. 시간상으로 따져 볼 때, 그가 나와 몇 마디 대화를 마치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찦차가 덮쳤으니, 애초에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아니 설혹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더라도 그 이상 대화를 이어가지 않고, “당장 내려갈 게하며 급히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면 아마도 별일이 없었을 것 같았다. 그러니 내가 그 참혹한 사고의 유발자였다.

나 어제 형을 만났어라고 작약(雀躍)하던 그의 밝은 모습과 길거리에 쓰러져 있던 그의 흐트러진 모습이 계속 오버랩 되면서, 가슴이 쥐어짜듯 저리고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나는 그가 죽었을까 걱정이 되었다. 사고 현장을 물들였던 핏자국으로 보아 중상이 확실하고, 그것이 자칫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미치면 나는 미칠 것 같았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부정적인 상상이 증폭되어 급기야 나는 그가 죽었을 것이라는 확신에 가까이 이르게 되었다. 그러면서 급기야 내가 그를 죽였다는 망령된 생각이 계속 엄습했다.

 

그날 이후, 나는 하루 한순간도 이 처절한 고뇌의 심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말수가 적어지고 밤잠을 설치는가 하면 끼니마저 자주 걸렀다. 그러니 옆에서 내 심경을 헤아리는 어머니의 걱정은 태산 같았다. 어머니는, “네 잘못이 아니야. 번잡한 길에서 빨리 자를 몰았던 그 군인들이 잘못한 거야. 그리고 세영이는 좀 다쳤겠지, 죽었을 리 없어. 너무 괴로워하지 말고 대신 하느님께 기도해하시며 나를 달래셨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내 마음을 어루만질 수가 없었다. 그때 나는 양심(良心)’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확연하게 인식했던 것 같다. ‘내 양심에 가책이 되는데, 어떻게 내 마음이 편안할 수가 있을까’. 그런데 문제는 내가 그 양심의 가책을 보상할 수 있는 아무런 수단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나는 갈수록 자책(自責)과 자학(自虐)의 깊은 늪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러면서 열한 살짜리 소년은 그때 양심’’삶과 죽음에 대한 온갖 철학적 사유를 그 나름의 방식으로 다 체험했던 것 같다. 훗날 내가 실존철학에 접하면서 즉시 ‘1951년 초여름의 나를 추억했고, ‘실존의 개념이 전혀 생소하지 않게 내게 다가왔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후 한 달이 가까워도 그로부터 아무 소식이 없었다. 나는 분명 그가 죽었기 때문이라고 단정했다. 그런 가운데 나는 점점 더 야위고 파리하게 시들어 갔다.

 

                         IV

사고 후 꼭 한 되던 날, 나는 집 근처 만경관(영화관) 옆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뒤에서 병영아!”하고 내 이름을 부르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나는 세영이임을 직감했다. 그러면서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뒤를 돌아보니, 서너 발자국 뒤에서 그가 밝게 웃고 있었다. 나는 꿈같은 현실 앞에 압도되어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내게 다가오는 그는 한 다리를 크게 절고 있었다.

 

극장 앞 작은 공터에서 그는 그간의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사고 순간 정신을 잃었고 눈을 떠보니, (우리 모자가 찾아갔던 바로 그) 육군병원 침대 위였다는 것이다. 양다리와 팔목 등의 복합골절로 장시간 수술이 끝난 후였는데, 다행히 생명에 지장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후 병원 측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거의 치유가 되어 어제 퇴원을 해서 우리집을 찾아가는 길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급한대로 형은 만났어?”, “다리는 어때?”하고 두서없이 물었다. 병원측이 연락해서 형은 곧 만났고, 아직 심하게 저는 한쪽 다리도 시간이 지나면 완쾌된다고 말했다.

 

그의 사연을 들으며 내 가슴은 계속 벅차올랐고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었다. 그리고 연상, “세영아 미안하다, 모든 게 내 잘못이다”, “고맙다를 연발했다. 그는 오히려 걱정 많이 했지, 미리 연락하지 못해 미안하다, “네가 사고와 무슨 상관이 있어, 그날 내가 재수가 없었던 거지라며 웃으며 나를 달랬다.

그러는 그가 내게 관세음보살처럼 느껴졌고, 나 자신은 무간지옥 (無間地獄)에서 단숨에 극락(極樂)에 오른 기분이었다.

                      

                        V.

그의 무사한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크게 기뻐하시며 연상 흐르는 눈물을 닦으셨다.

그러면서,

 

세영아, 정말 고맙다. 네가 우리 병영이를 살렸구나라고 말씀하셨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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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진영 2020.07.21 18:39 Address Modify/Delete Reply

    어린 시절로 돌아가 '소년세계', '새소년' 같은 어린이 잡지에 나온 이야기를 읽는
    느낌입니다. ^^

  2. 현강재 현강 2020.07.23 04:59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김 교수님, 바쁜 분이 제 글을 구석 구석 찾아 읽어 주시고 댓글도 달아주시니 고맙습니다.
    이 글에 나오는 그 때, 저는 '양심'의 의미를 제 나름으로 깨우쳤고, 이후 그것을 지켜보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 때 한 달 간의 고뇌를 매우 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늘 건행하시기
    빕니다.

  3. 김항규 2020.09.13 19:20 Address Modify/Delete Reply

    6,25를 배경으로한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한 편의 영화를 본 듯한 느낌의 글입니다.
    그 친구 분과는 그후 어떻게 지내시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4. 현강재 현강 2020.09.14 14:49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그 해 가을, 제 가족은 다시 부산으로 피난지를 옮겼고, 그러는 과정에서 세영이와 연락이 끊겼습니다. 그 후, 1년 반이지나 전쟁 막바지에 서울로 환도해서 세영이를 찾았으나 어디서도 소식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전쟁이라는 참혹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렇게 어렵게 찾았던 인연의 끈을 다시 놓쳤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별일 없었다면, 그 친구도 어디서 저처럼 늙어가고 있겠지요.

                     I.

  1969년 가을, 오스트리아 빈(Wien)에서 나는 박사학위 공부의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 때 나는 내 처와 막 첫돌을 지난 딸 수현이와 함께 빈(Wien) 교외 볼퍼스베르그(Wolfersberg)라는 동네에 살고 있었다. 그곳은 유명한 ‘빈 숲(Wiener Wald)’에서 멀지 않은 작고 아름다운 동화 같은 마을인데, 주위의 목가적인 풍경이 일품이었다. 내가 살던 집은 지방에 사는 돈 많은 출판업자의 작은 별장이었다. 나는 운 좋게 집과 정원을 보살펴 주는 조건으로 그 집 별채를 세내지 않고 빌려 쓰고 있었다. 제법 큰 정원에는 체리나무를 비롯해 다양한 종류의 과일나무, 꽃나무들이 가득했고 내가 사는 별채 앞에도 예쁜 장미 꽃밭이 있어, 봄, 여름에는 마치 집 전체가 꽃잔치를 벌리는 것 같았다.

 

  말하자면 내가 그 집 관리인이었는데, 정원사가 계절마다 와서 전지(剪枝)를 하는 등 정원을 보살펴 주기 때문에 실제로 나는 그곳에 그냥 사는 것 외에 딱히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주인내외는 한 달에 한번 정도 주말에 와서 하루 자고 갔는데, 그 때마다, 그 집이 한동안 비어있었는데 우리가 집을 잘 지켜줘서 이제 안심이 된다며 고맙다고 인사를 하곤 했다.

 

  돌이켜 보면 그 집에 살았던 약 1년 반이 내 빈 유학시절 중 가장 평온하고 행복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공부도 순조로웠고 삶도 안정되었다. 그 때 한 가지 걱정은 내 처가 두 번째 아이를 가졌는데, 이듬해 6월경 출산 예정시기가 내가 공부를 마칠 때 쯤, 말하자면 내게 가장 힘겹고 벅찬 시기와 겹친다는 것이었다. 이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내가 공부에 피치를 올려 둘째가 출산하기 한, 두 달 전에 공부를 끝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다가오는 겨울이 내 유학생활의 마지막 고비라고 생각하고, 한껏 마음을 다잡고 공부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II.

  호사다마(好事多魔)랄까. 그러나 이 호(好)시절이 오래가지 않았다. 그해 10월 중순 경 오랜만에 별장을 찾았던 주인내외가 집을 돌아 본 다음에, 다소 상기된 얼굴로 내게 “혹시 별장 안채를 쓰지 않았냐” 고 물었다. 나는 그런 적이 없었으므로 아니라고 대답했다. 주인과 처음부터 안채는 쓰지 않기로 약속해서 우리 내외는 당연히 그 룰을 지켜왔는데, 주인의 의외의 물음에 조금 황당하게 느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주인은 집을 떠나며 매우 굳은 얼굴로 내게 다가와 “대단히 미안하지만 10월 말까지 집을 내 주어야 겠다”고 말했다. 예상치 못했던 통고에 나는 무척 당황했지만, “알겠다”는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주인의 갑작스런 통고를 들으며, 우리 내외는 곧장 일이 이렇게 된 경위를 쉽게 추론할 수 있었다. 몇 주 전, 빈(Wien) 의대에 다니는 주인집 아들이 여자 친구와 함께 와서, 안채에서 하루 동안 시험공부를 하겠다고 말했다. 조금 꺼림직 했지만, 나는 굳이 마다 할 이유가 없어, 그렇게 하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그 날 저녁 어스름이 내릴 때 쯤 인사를 하고 집을 나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내 처가 “애인사이인 것 같지”라고 말했던 기억이다. 그 후 이 주쯤 지난 후 그들이 또 한 차례 찾아와서 공부 명목으로 하루 종일 안채에 머물다 돌아갔다. 그런데 그들이 아마 안채에 머물면서 집안을 조금 어지럽혔던지, 그렇지 않더라도 누가 왔다간 흔적을 남기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리고 주인집 내외는 그것을 우리가 한 일로 오해를 한 게 틀림없었다.

 

  우리의 추론은 실제로 확인됐다. 집주인 내외가 집 바로 건너편에 있는 성당 노(老)신부님께 우리를 믿고 집을 맡겼는데, 안채까지 사용해서 나가라고 통고했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신부님이 “베네딕트(내 세레명)가 그랬을 리가 없다”고 강하게 나를 변호하며 곧 추위가 닥치는데 너무 심하다고 말씀하셨는데도, 주인은 “이미 끝난 일”이라고 차갑게 말했다는 것이다. 나는 경위를 묻는 신부님께, 주저하다가 그 집 아들이 두 번 다녀간 얘기를 했다. 그랬더니 신부님은 환하게 웃으시며, “그러면 그랬겠지. 이제 아무 걱정 말게나, 내가 전화를 해서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주인 생각을 바꾸어 놓을게”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정작 내 마음은 이미 그 집을 떠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었다. 우선 그 집에 더 머물기 위해 주인에게 구차하게 지난 일을 들먹이는 것 자체가 내 자존심에 허락지 않았다. 또 내게 그 얘기를 듣고, 크게 곤혹스러워 할 집 주인 내외의 얼굴을 떠 올리니, 내가 힘들더라고 그냥 덮어버리는 게 낳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말씀드리니 신부님은 펄쩍 뛰셨다. 말씀인 즉, 그렇게 내가 물러나면, 그 주인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 한국 청년에게 집을 빌려 주었더니 이런 일이 있었다”며 떠들고 다닐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국 “네 나라까지 욕보이게 된다”는 것이었다. 신부님 말씀이 마음에 크게 걸렸으나, 나는 떠날 생각을 굳혔고 내 처도 동의했다. 그래서 조촐한 선물을 가지고 주인내외를 찾아가 그간 고마웠다는 인사를 드렸다.

 

                             III.

  그런데 두 주(週) 사이에 새 보금자리를 구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동분서주했으나 월말이 다 되도록 마땅한 방을 구하지 못했다. 입술이 바짝 마르고 있었다. 그럴 즈음 맞은편 성당의 신부님이 내게 긴히 할 말씀이 있다고 나를 부르셨다. 가서 뵈었더니 정 갈 데가 없으면 빈 숲 초입에 있는 공소(公所) 사택(舍宅)으로 가는 게 어떻겠냐고 물으셨다. 공소는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외진 지역의 교회 지소(支所)를 말하는 데, 대체로 지역 교우(敎友) 중심으로 운영되며, 일요일에 한번 신부님이 오셔서 미사를 집전하는 곳이다. 내게 공소 내의 사택에 거주하며 공소를 관리해 달라는 말씀이셨다. 순간 나는 ‘궁즉통(窮則通)’이라더니 바로 이런 것이 구나 싶어 즉석에서 쾌히 승낙했다. 엄동설한이 닥치는데, 임신부와 간난아이를 데리고 갈 곳이 없어 막막하기 그지없었는데, 우선 거처할 곳이 마련될 수 있다니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그런데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신부님이 “고맙네, 고맙네”를 연발하며 와락 나를 껴안으시는 게 아닌가. 신부님의 의외에 반응에 나는 다소 의아했으나,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내가 공소를 찾은 후였다.

 

  다음날 아침 신부님을 도와 부제(副祭)로 성당에서 일하는 친구 발터(Walter)가 나를 찾아왔다. 공소로 안내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내가 왜냐고 물으니, “가보면 알 걸세. 실은 그 공소 사택이 무척 열악해. 그래서 벌써 두 해째 비워두고 있어. 갓난아기랑 한 겨울을 거기서 나기는 크게 무리야. 신부님이야 공소를 자네에게 맡기면 큰 짐을 덜게 되어 다행이다 싶으신 모양이지만, 네 친구로서 나는 걱정이 태산 같아,” 하는 게 아닌가.

 

                              IV.

  공소는 동네에서 얼마간 떨어져 빈 숲 초입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외지고 황량해서 마치 ‘그림’ 동화의 <헨델과 그레텔>이 길을 찾아 헤매던 깊은 숲속에 들어 온 듯 했다. 공소, 사택 모두 무척 낡고 쇠락했고, 집 모습은 마치 옛날 강원도 화전민이 살던 너와집과 비슷했다. 평소 당찬 내 처도 첫마디가 “여기서 어떻게 살지”라며 고개를 모로 저었다. 나도 순간 마치 천국에서 지상으로 떨어진 느낌이었다. 그러나 내겐 입주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겨울 숲 속은 침울하고 음산했다. 바람이 세차게 불면, 주위의 나무들이 서로 부딪혀 마치 괴기영화에나 나옴직한 무시무시한 소리를 냈다. 거기에 멀리 들짐승 우는 소리까지 들리면 온몸에 소름이 돋곤 했다. 그런가 하면 워낙 낡고 오래 된 집이라 문과 창틀이 모두 취약해서 위부 침입에 대해 제대로 방비를 할 수 없어, 늘 긴장과 불안을 안고 살아야 했다. 열 손실도 커서 난로에 아무리 불을 때도 방의 온도가 17도 이상 오르지 않았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춥고 눈이 자주 왔다. 또 눈이 왔다하면 무릎 까지 찼다. 교우들이 언제라도 공소에 참례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아랫마을로 이어지는 길목까지 눈을 말끔 치워야 하는 데, 이 일이 정말 힘겨웠다. 눈이 많이 온 날은 꼭두새벽에 나서서 동이 훤히 틀 때까지 몇 시간 동안 정신없이 눈을 치웠다. 어떤 때는 애써 한껏 눈을 치고 돌아서면, 방금 치운 곳에 다시 눈이 소복이 쌓여 다시 되돌아가 눈을 치워야 했다.

  내가 맡은 <공소지기>일도 만만치 않았다. 공소 안팎을 늘 청결하게 청소를 해야 하고 때 없이 찾아오는 교우들을 응대해야 했다. 특히 신부님이 오셔서 미사를 집전하는 일요일이 다가오면, 이미 토요일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당일에도 제의(祭衣)준비부터 시작해서 대체로 부제와 복사가 해야 할 온갖 사제 보조 역할을 혼자 도맡아서 해야 했다. 전 과정에서 시나브로 내 처의 도움이 컸던 것은 물론이다. 교우들은 그간 을씨년스럽던 공소에 생기가 돌고, 일요일 미사도 격식을 갖춰 빈틈없이 진행된다며 무척 좋아했다. 제일 기뻐하시는 분은 역시 본당 신부님이셨다. 나는 그 때마다 내 소소한 역할에 대해 얼마간의 보람과 자부심을 느꼈다.

실제로 가장 마음이 시렸던 것은 한 겨울에 처와 아기를 숲속 집에 놓아두고 시내로 나가는 일이었다. 한 주일에 적어도 두 번은 대학에 나가야 되는데, 특히 수요일 오후 세미나가 저녁 6시가 넘어 끝나기 때문에 나간 김에 시장까지 들려 집에 돌아오자면 대체로 9시경이 된다. 겨울 산 속은 오후 4시가 조금 지나면 어둡기 때문에, 몸까지 무거운 안식구는 내가 돌아 올 때까지 아기와 함께 5, 6시간 공포에 떨어야 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빈 숲은 베토벤의 교향곡 6번 <전원>과 요한 스트라우스의 유명 왈츠곡 <빈 숲속의 이야기>의 무대이다. 봄의 향기와 생동감,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 새들의 지저귐이 잠자던 우리의 미적 감성을 일깨워 주는 생명의 요람이다. 그러나 그 해 겨울 빈 숲속의 이미지는 다분히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나그네>의 음울하고 어두운 정조(情調),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그곳 숲 속의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 보고 싶었다. 어떤 때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느껴보려고 애써 보기도 했고, 또 때로는 스님의 동안거(冬安居)에 비유해 자위하기도 했다. 그러나 눈앞의 현실은 너무나 냉혹했다.

정황이 그러하니 실제로 그 겨울 동안 내 가장 절박한 목표는 공부보다도 세(네?) 식구가 별고 없이 이 혹독한 동절기를 견뎌내는 것이었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 겨울, 내 삶의 목표 중 가장 앞선 순위는 단연 ‘생존’이었다.

 

  결국 나는 빈 숲 속에서 아름답고 찬란한 생명의 봄을 맞이하지 못하고, 긴 겨울의 끝자락 2월 말에 시내로 거처를 옮겼다. 박사학위 논문을 마무리하고 학위시험(Rigorosum)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생존’을 넘어 ‘성취’에 전념하는 새 보금자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석 달 후 마침내 나는 고단했던 5년 여의 공부를 끝냈다. 그리고 한 달 뒤 둘째 광선이가 태어났다.

 

                     VI.

  2012년 나는 아내와 오스트리아를 방문했다. 오랜만에 볼퍼스베르그의 옛집과 정든 성당, 그리고 빈 숲의 예의 공소를 찾았다. 옛 집과 성당은 시간이 멈춘 듯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빈 숲 속의 공소 자리에는 현대식의 새 성당이 들어섰고 주위도 많이 변해 있었다. 새 성당, 빈 14구의 ‘코르돈 교회’(Kordon Kirche) 앞에서 나는 '그 겨울의 공소‘를 추억하며 깊은 감회에 젖었다.

 

<사진 1> 1968년 가을, 꼭 반세기 전에 내 처가 갓난 첫 아이 수현이를 안고 옛 집 현관 앞에 서 있는 모습이다.

 

 

 

 

 

<사진 2> 집 맞은 편의 성당(St.Josef am Wolfersberg)

 

 

<사진 4> 빈 숲속의 새 성당(Kordon Kirche)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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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현실>(계간지) 2018년 가을호에 실린 내 글 '나의 삶, 나의 길'을 옮긴다.

 

안병영 교수님_철학과현실_나의삶나의길.pdf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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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 속에는 4.19가 아직도 어제 일인 듯 선명한데, 벌써 58년이 지났다. 대학 2학년 화사한 봄날, 싱그러운 젊음들이 순수와 열정으로 하나 되어 민주주의를 외쳤던 그 날은 내 인생 여정에서 가장 찬연한 기록으로 영원히 뇌리에 남아있다.

아래 글은 2011년 4월 19일, <현강재>에 한번 실렸던 글이다. 북받치는 감정으로 재록한다.  

 

현강재 어머니와 함께 한 4_19.mht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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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출판사의 강희일 사장님이 출판인으로서의 자신의 외길 인생을 담은 자전적 회고록을 내신다며,  글을 부탁했다. 내가 보낸 내용을 아래에 담는다.

 

 

 

 

                               속 깊은 사람, 강희일 사장님

 

 

 

                                                    I.

다산(茶山)의 강희일 사장님을 처음 만난 것은 내가 한국외국어대학 행정학과에 근무하던 1973년경으로 기억한다. 그러니 그와의 교유(交遊)도 어언 45, 거의 반세기 가까이 되었다. 돌이켜 보면, 당시 내가 30대 초반이었고 강희일 님은 아마 20대 말이었으니, 둘 다 정말 꽃 같은 젊은 나이였다. 강희일 님은 그때 <법문사>에서 대학교재 기획과 영업을 맡고 있었는데, 그의 진실한 성품과 훈훈한 인간미에 반해 사회과학 계열의 젊은 교수들이 그를 무척 좋아했다. 그는 비즈니스를 앞세우기보다는 늘 교수들과 인간적 유대와 신뢰 관계를 쌓는데 정성을 기울였다. 바로 그 점이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강희일 님의 오늘을 있게 한 성공의 비결이 아닐까 한다.

 

강희일 님과 가까이하면서, 나는 그가 몇 가지 점에서 남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점을 알고, 깊은 감동을 느꼈다. 첫째, 그는 청소년기에 신문팔이, 구두닦이, 서점점원 등 무척이나 고단한 삶을 살면서 주경야독을 거쳐 대학의 문턱을 넘었으며, 이후 늦은 나이에도 계속 학업에 대한 집념과 지식에 향한 열정이 대단하다는 점이다. 그에게는 각고면려(刻苦勉勵)의 정신이 가득 배 있었다. 두 번째, 그는 자신의 사업 성공을 넘어 한국 출판계의 발전에 기여 하고자 하는 남다른 열망과 소명감을 지녔고, 그 일에 자신의 역량과 시간의 큰 부분을 할애한다는 사실이다. 한길을 걸으며 줄기차게 공의(公義)를 추구하는 그의 모습이 크게 돋보였다. 세 번째 그는 청소년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거듭되는 모진 병마(病魔)와 싸우며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이에 감연히 맞서 이겨왔고,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늘 웃는 모습으로 자신의 일과 책임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이러한 남다른 용기와 책임감이 많은 이의 전범(典範)이 되기에 족하다고 생각했다.

 

강희일 님의 <출판 외길인생>을 좀 더 살펴보자. 그는 35세 젊은 나이에 <다산출판사>를 창업했고, 몇 년 사이에 대학교재 성장 1순위 출판사로 크게 도약하여 <성장하는 기업모델>로 각광을 받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업이 일정 궤도에 이르자, 1990년대 초 이후 자신의 이상과 이념에 따라 사회활동 영역을 크게 넓힌다. 학술도서출판과 연관하여 출판문화 창달을 위한 많은 사업을 주도하고, 필요한 사회적 이슈를 제기하는가 하면, 절박한 법제 문제의 해결에 앞장서는 등 국가문화사업인 출판산업의 발전을 위해 크게 헌신한다. 그는 <()한국학술출판협회> 회장 등 다수의 직책을 역임하며 열과 성을 다해 일했다. 그러면서 늘 그의 사유를 지배했던 것은 출판산업은 문화적 측면과 산업적 측면의 양면성을 동시에 가지며, 그 어느 것도 소홀이 할 수 없다는 신념이었다.

 

그는 평생 부지런한 공부꾼이었다. 뒤늦게 복학하여 대학을 맞췄고, 환갑에 이르러 중앙대학교에서 언론학 석사를 취득했다. 그는 대학에서 자신의 소중한 경험을 바탕으로 10여년 간 <출판편집의 실무>를 직접 가르쳤고, 2014년에는 자신의 학문과 경험의 결정체인 <한국출판의 이해>(문광부 우수학술도서)를 출간하여, 오늘까지 4판에 이르고 있다. 그는 이처럼 자신을 연마하고 실무와 학문을 연계하는 데 한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강희일 님은 평생 많은 병과 함께 했다. 젊은 나이에 불면증, 우울증, 편집증, 폐결핵에서 시작하여 중년 이후 관상동맥협심증과 식도암으로 어려운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아직도 병고와의 싸움은 끝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는 불퇴전의 용기를 가지고 이에 맞섰고, 병 때문에 출판인으로서의 자신의 공적 책임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병마와 얼마간의 타협은 불가피했다. 다산출판사가 보다 성숙한 대형 종합출판기업으로 발전, 확장될 수 있는 결정적 시점에서 축소지향으로 그 방향을 바꾼 것도 실은 병 때문이었다.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는 이제까지의 생애를 통하여 온갖 간난과 병고 속에서도 한시도 꿈과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고, 미래에 대한 도전과 끊임없는 열정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지난 반 세기 한국 출판계의 산증인인 그는 자신이 경험했던 성공과 실패는 출판계의 공동자산이라는 점을 절감하고, 이 책을 출간한다고 술회한다. 이 책에는 그의 개인적 기록뿐만 아니라, 기고문, 기사, 자료, 공공기관에 보낸 문서 등 한국 출판계의 역사를 증언할 많은 소중한 기록들이 담겨있다.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은 다분히 사회사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II.

나는 연세대학교 행정학과에서 1977년에 <복지행정>이라는 과목을 처음 개설했다. 그리고 이듬해 강희일 사장님과 이 제목으로 책을 쓰기로 구두 약속을 했다. 몇 년 후 서면 계약까지 했다. 그런데 이후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실로 긴 세월이 하염없이 흘렀다. 책이 제법 진척이 되어 고비를 넘겼다 싶을 때면, 내가 중요한 학교 보직을 맡거나 정부에 들어가게 되어 한동안 손을 놓게 되곤 하였다. 그런데 일을 마치고 돌아와 보면, 미리 썼던 내용이 학문적 추세에 뒤떨어져 이미 낡은 것이 되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새로운 결의로 번번히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는 자주, 커다란 바위를 산 꼭데기로 밀어 올려 정상 근처에 이르면 그 바위가 다시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시지프스의 신화>를 떠 올렸다.

 

그동안 나는 미안한 심경으로 다산에서 책 두 권을 냈다. <교육복지정책론>(김인희와 공저, 2009)<5.31 교육개혁, 그리고 20>(하연섭과 공저, 2015)이 그것이다. 그러다가 이번에 강희일 사장님과 구두 계약 40년 만에 <복지국가와 사회복지정책>이라는 바뀐 제목으로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 공저로 곧 출판될 새 책의 <머리글> 마지막 대목을 여기 옮긴다. 강희일 사장님의 속 깊은 인간성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다산의 강희일 사장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지난 40년간 그는 줄곧 내가 언젠가 책을 끝낼 것을 믿어 주셨다. 그러면서 한 번도 책 재촉을 하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그의 무한신뢰가 좋은 책을 써야겠다는 내 결의를 다지게 만들었던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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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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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4.25 16:53 Address Modify/Delete Reply

    강사장님 쾌차하시길 빕니다.

  2. 서지오 2018.08.04 20:33 Address Modify/Delete Reply

    강사장님. 제발 건강히 오래오래 사세요~~

                                       I.

 경상북도로 넘어오니 점차 대구에 가까워진다는 생각에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으나 혹한과 과로로 몸은 천근만근이 되었다. 말을 건넬 기력도 없어 그냥 발걸음만 옮겼던 기억이다. 그러다가 조금 뒤처지면 피난대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잰걸음으로 따라가곤 했다. 겨울 해가 짧아 어둠이 일찍 찾아와 아무리 애써 걸어도 하루에 50리를 넘기기 어려웠다.

 

 상주읍은 제법 큰 고을이었다. 옥천 이후 거쳐 온 여느 마을들과는 달리 길도 넓고, 집들도 큼직큼직하고 정돈돼 있어 얼마간 도시풍을 느꼈다. 상주에서 묵은 다음날 새벽, 심기일전을 위해 다른 식구들이 깨기 전에 일찍 일어나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이곳저곳 살폈던 기억이다. 그러면서 훗날 이곳에 한번 들려 오늘 내가 이곳에서 느꼈던 인상을 다시 더듬어 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상주를 다시 찾지 못했다.

 

 상주에서 얼마를 더 가 낙동강에 이르렀다. 거기서 나룻배로 강을 건넜다. 낙동강변 곳곳에서 그 전 해(1950년) 8월의 치열했던 낙동강 전투의 잔해들을 볼 수 있었다. 폭격 맞아 크게 파손된 적군 전차가 모래사장에 비스듬히 누어있었고, 그 주위에 부서진 총기류, 일그러진 군모, 찢긴 군복 조각과 파편들이 즐비하게 널려있어 처절했던 전쟁의 기억을 되살려 주고 있었다.

 

 상주를 떠난 다음, 다음날, 밤늦게 한 마을에 도착했다. 이곳이 어디냐고 물으니 <인동>이라고 했다. 후에 찾아보니 현재는 구미시 (龜尾市) 인동동(仁同洞)이 그곳이다. 허기진 배를 움켜지고 구장댁을 찾았는데, 친절한 주인장은 흔쾌하게 방을 내 주셨다. 구장님 부인이 우리가 저녁을 하지 못했다는 말에 “찬이 없어도 드시겠냐”고 물으시더니 한 밤중에 정성껏 밥상을 차려주셨다. 찬밥을 더운물에 말아, 김치와 콩나물 무침 등으로 저녁을 들었는데, 점심도 건너뛰어 무척이나 배고팠던 터라 밥맛이 정말 꿀맛 같았다. 내가 허겁지겁 밥을 먹는 것을 보시더니, 구장님은 “꽤나 배가 고팠던 모양이네”아며 안쓰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셨다. 돌이켜 보아도 나는 일생 그날 늦저녁만큼 맛있는 식사는 해 본 기억이 없다. 훗날 어떤 분이 내게 자기소개를 하면서 “인동장씨(仁同張氏)입니다”라고 하기에, 내가 “그럼 경북 인동입니까”라고 재차 물으니, 그가 “맞습니다, 제 관향이 그곳 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래서 내가 “그곳 인심이 무척 좋은 곳입니다”라며, 내 피난길 일화를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또 한 번은, 가까운 친구가 뒤늦게 인동최씨(仁同崔氏)임을 알고, 그에게도 그 옛 이야기를 전하며, 친절했던 구장님 부부에 대한 고마운 심정을 토로한 적이 있다.

 

 대구에 가까워지니, 다시 이런저런 우려가 샘솟았다. 대구가 매우 큰 도시라는데 거기 가서 어떻게 아버지를 찾을지 걱정이 돼서 어머니께 여러 차례 물었던 기억이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아버지가 평택에서 혹한에 기차 난간에 매달려 떠나셨는데 무사히 대구까지 가셨는지 그 점도 염려가 되어 영 심사가 편치 않았다.

 

 게다가 피난길이 열흘을 넘기면서  내 몸이 극도로 피폐해지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눈치를 채실까 내색을 하지 않으면서 “이제 다 왔다”고 스스로를 격려하며 걸었다. 하지만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몸은 깊은 수렁에 가라앉는 느낌이었고, 무엇보다 대구 도착 전날부터 배탈이 크게 나서 배를 움켜쥐고 한발 한발을 힘겹게 옮겼다. 어머니가 걱정이 되셔서 “안 되겠다. 하루 쉬고 가자”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막무가내로 “다 왔는데, 무슨 말에요”라며 자못 필사적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평택을 떠난 후 열사흘이 되던 날, 저녁 무렵 대구에서 마침내 그립던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아버지와의 해후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이루어졌다. 아직도 우리를 보고 크게 놀라시던 아버지 모습이 역력하다. 온 가족이 서로 부둥켜안고 한동안 말도 잃은채 눈물범벅이 되도록 울었다. 고진감래(苦盡甘來)가 바로 그것이었다. 가족 재회의 기쁨이 워낙 컸기에 그 동안 피난길의 온갖 고초는 눈 녹듯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II.

 이렇게 1951년 1월 하순, 13일간, 장장 275 Km의 긴 피난길이 끝났다. 따져 보면, 영하 10도가 넘는 혹한에 700리 가까운 거리를 매일 약 50리+ 씩 주파한 셈이다. 그 때 내가 세는 나이로 열 한 살이었는데, 만으로 따지면 9년 4개월의 어린 나이였다. 그 먼 길에 투정 한번 안 부렸으니 지금 생각해도 대견한 일이다.

 

 그래도 우리는 형편이 낳은 편이었다. 어머니 수중에 얼마간 돈과 만약을 위해 준비했던 약간의 금붙이도 있었기에 다른 이들에 비해 그때그때 먹고 자는데 상대적으로 어려움이 적었다. 그런데 별 준비 없이 길을 떠났던 대부분의 피난민들, 특히 가족 중 아픈 이가 있거나 간난아이나 노인과 함께 했던 이들은 아비규환의 피난길에서 하루하루 생명을 부지하는 것 자체가 처절한 투쟁의 연속이었다.

 

 열사흘 동안의 피난길에서 나는 내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그간 가족의 품에서 화초처럼 고이 자라 온 나는 처음으로 야생의 거친 환경에서 들꽃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세상에 눈을 뜰 수 있었다. 무엇보다 삶과 죽음이 맞닿아 있는 극한의 세계를 가까이서 목도하면서,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자면 예기치 못했던 고난과 시련, 절망과 슬픔을 마주하게 된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러면서 어렴프시나마 그 비탄의 여울을 넘어 슬기롭게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 인생의 행로라는 것을 스스로 깨우쳤던 것 같다.

  또 13일 간의 피난길을 통해 나는 괄목할 만 큼 자신감을 배양했다. 어린마음이지만, 이 엄청난 난관을 극복했으니 앞으로 무슨 일이든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이후 나는 큰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1.4 후퇴 때 그 엄혹했던 피난길을 상기하면서 스스로를 채찍질을 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 피난행렬 속에서 내가 얻어낸 가장 큰 수확은 <걸으며 생각하는> 버릇이 아닌가 한다. 나는 700리길을 걸으며 온갖 생각을 다 했던 기억이다. 당장의 힘겨운 순간을 잊기 위해 가볍고, 즐거운 공상도 했지만, 그 보다는 피난행렬을 따라가며 겪었던 갖가지 인상적인 일들을 되새겨 보기도 하고, 앞으로 겪을지 모르는 미지의 시간들을 미리 걱정도 하고, 때로는 미래를 겨냥해 마음의 준비도 해 보았다. 그러면서 이리저리 따져보고 이치를 깊이 파고드는 '궁리(窮理)'하는 버릇을 익혔다.

말하자면 그냥 걷지 않고, 생각하며 걸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7백리 피난길이 그리 힘겹고 참담하지만 않았던 기억이다.

 

                                                   III.

 나는 걷기를 무척 좋아한다. 내가 산을 좋아하는 것도 걷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걸으면서 늘 ‘생각’한다. 이것저것 따져보고 이치를 깊이 캐어 본다. 그래서 생각이 정리가 안 되고 혼란스러우면, 자주 길을 나선다. 가능하면 산이 좋다. 산에서 걸으며 생각의 가닥을 다시 잡고 깊이 파고들면 문제가 조금씩 풀리는 것을 느낄 때가 많다.

 

 나는 이 <걸으며 생각하는> 버릇을, 이곳 시골에 와서 살면서 <일하며 생각하는> 습관으로 넓히려고 애쓰고 있다. 시골에서 농사일을 하다보면, 육체적으로 고달플 때가 많다. 그런데 그냥 몸만 움직이지 않고 동시에 머리로 궁리를 함께 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일도 수월해 지고, 가외의 수확을 걷을 때가 많다. 잡초를 뽑으려고 호미질만 거듭하면 그건 단순노동이다. 그러나 손으로 호미질을 하면서 머리로 생각을 파고들면 그건 동시에 공부가 된다. 나는 시골에 살면서, 여름에 농사에 전념하고 겨울에 글쓰기를 주로 한다. 그런데 겨울에 생산하는 내 글은 여름에 일하면서 열심히 사유했던 것들이 알알이 영근 열매라고 생각한다.

 

 나는 <걸으며 생각하는>, 그리고 <일하며 생각하는> 버릇을 1.4후퇴 피난길에서 그 실마리를 찾는다. 이것은 얼마간 견강부회(牽強附會)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7백리 피난행렬 속에서 만 열 살도 안 된 어린 소년이 나름 치열하게 생각하며 세상 이치를 따져 보고 자신을 키웠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직도 그 열사흘의 피난길이 이후 내 생애에서 <산티에고의 순례길>에 못지 않은 힐링 효과를 가져 왔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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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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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동률 2017.04.30 15:15 Address Modify/Delete Reply

    교수님의 <1.4후퇴와 피난길>...
    몽땅 프린트해서 덩치만 컸지 아직은 어린아이 같은 제 아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소식 여기저기서 듣고 있습니다만..늘 건강하십시오.

                           I.

<대전> 초입에 이르니, 길거리 전신주와 눈에 잘 뜨이는 집벽이나 문짝에 수 없는 알림 글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XX야 우리 대구로 간다>, <XX야 광주에서 만나자>, <XX야 아빠 무사하다> 등의 간단한 메모들이었는데, 피난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족과 헤어진 피난민들이 자신의 소식을 알리는 글들이었다. 많은 이들이 걸음을 멈추고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는 모습이 눈에 뜨였다. 나도 그 글들을 읽어 볼까 어머니께 여쭈어 보았더니, 어머니는 내게,

“그럴 필요 없다. 아버지는 대구로 내려 가셨다. 우리가 그곳으로 가면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잖아도 나는 앞으로 아버지를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 궁금했기에, 나는 어머니께 아버지와 무슨 말씀이 있으셨는지 재차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 만약 우리도 불가피하게 피난길에 나서게 된다면, 대구로 내려가 어디로 연락해야 되는지 아빠와 미리 다 얘기가 되었다. 아무 걱정 말고 그곳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라고 설명하셨다. 그 말씀에 나는 그런대로 마음이 놓였다.

 

대전 시내로 들어갔는데, 도립병원 못미처에 큰 개울이 있었다(나중에 확인하니 ‘대전천’이었다). 다리가 끊어져서 큰 돌을 띠엄띠엄 놓아 징검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돌들 사이가 너무 넓어 아이들은 펄쩍 뛰어야 겨우 앞으로 갈 수 있었다. 내 딴에는 무척 조심했는데도 개울을 거의 다 건널 즈음, 아차 하는 순간에 발을 잘못 디뎌 살엄음이 얼은 개울물에 빠지고 말았다. 차디찬 개울물이 허리춤까지 오르니 솜을 두어 지은 핫바지에 물이 차올라 무겁고 온몸이 얼어붙는 듯 했다. 별것 아닌 듯 헛웃음을 날렸지만, 정말 울고 싶었다.

 

대전을 빠져 나갈 무렵, 피난민 대열의 앞쪽이 웅성웅성하며 자꾸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웬일인가 알아보니, 큰 길목에서 군인들이 너무 많은 피난민들이 영남으로 내려간다고, 강제로 호남으로 보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어머니 얼굴이 금새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는 “안 되겠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대구로 가야한다“며, 우리들을 데리고 큰 흐름에서 옆으로 빠져 나왔다.

그러나 딱히 무슨 대책이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허망한 마음으로 한 동안 서 있는데,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피난민 대열 속에 친숙한 아저씨 얼굴이 보였다. 삼선교 가까이에서 잡화상을 하시는 고씨 아저씨인데, 우리 할아버지를 ‘어르신, 어르신’하고 따르던 분이었다. 나는 반가운 김에 ‘아저씨’하고 그 분께 달려갔다. 고씨 아저씨는 무슨 깃발을 들고 계셨는데, 거기에 무언가 관변 단체 이름이 적혀 있던 것 같았고, 그 뒤에 약 20명 가량 뒤를 따르는 청년들이 있었다. 아저씨는 그 단체의 대장으로 그들을 이끌고 대구로 가신다는 얘기였다. 우리 처지를 말씀드렸더니 어머니께, “걱정마십시오. 그냥 우리 대열에 끼시면 됩니다. 우리 가족이라고 얘기하면 보내 줄 것입니다”라고 별일 아니라는 듯 쉽게 말씀하셨다. 영남, 호남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에 이르렀다. 마치 큰 물길을 호남방향으로 튼 듯, 대부분의 피난민들이 그 쪽으로 가고 있었다. 나는 무척이나 긴장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고씨 아저씨가 휘적휘적 군인들에게 다가가 뭐라고 말씀하시니, 군인 한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호루라기를 호기있게 휙 불면서 우리 쪽을 영남 방향으로 큰 손짓을 했다. 그 바람에 우리는 그 대열에 묻혀 어렵지 않게 영남행을 할 수 있었다. 철체절명의 순간에 천우신조로 큰 고비를 넘긴 것이다.

 

                                      II.

<옥천>에서 우리는 오래된 개신교회 목사관에 숙박했다. 방이 정갈했고 아늑했다. 작고 아름다운 풍금이 있었고, 선반위에는 성경이 놓여 있었다. 나는 그 방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그동안 나를 옥죄던 전쟁과 피난이라는 살벌하고 긴박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마치 평화롭고 따스한 보금자리를 찾은 느낌을 받았다. 그날 밤, 천천히 잠에 빠져 들어가면서 부디 이 행복감이 영원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다. 그날 밤 나는 피난길에 나선 후 처음으로 모든 것을 잊고 편안한 잠을 잦다. 내가 훗날 독일어를 배우다가 ‘gemuetlich'(안락한, 아늑한, 기분이 좋은)라는 어휘를 처음 접할 때, 불현듯 그날 밤 내가 그 방에서 느꼈던 포근하고 안락한 정취를 연상했다.

 

그런데 비교적 또렷했던 내 기억이 충청북도에서 길을 잃고 헤맨다. <옥천>을 떠나 경상북도로 넘어갔는데, 그 경로가 확실치 않다. 분명한 것은 경북 <상주>로 갔다는 것이다. 피난민 대열을 따라 그 흐름대로 발을 옮겼고, 그 길목에 이렇다한 도시나 큰 마을이 없었던 것이 이유가 되겠지만, 그 행로가 내 기억의 창고에서 가장 희미하고 불분명한 부분이다. 그 나마 어렴풋이 내가 기억하는 것은 한 겨울의 칼바람을 맞으며, 강(혹은 큰 개울)을 따라 황량한 시골길을 마냥 걸었던 것, 그러다가 한 밤중에 광산을 끼고 높은 고개)를 넘었는데, 그 고개가 바로 경북으로 넘어가는 도계(道界)라는 얘기를 들었던 일 등이다. 그 날 밤 천신만고 끝에 고개를 넘어 작은 마을에 잘 곳을 마련했는데, 단지 산 하나를 넘었는데 집 주인 말투가 완전히 달라 놀랐다. 비교적 느리고 부드러웠던 충청도 사투리가 불시에 투박하고 억양이 뚜렷한 경상도 말씨로 바뀐 것이다.

나는 그동안 <옥천>에서 <상주>까지의 구체적 행로가 무척 궁금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생존해 계실 때, 한번 여쭤보았더니 어머니도 의 기억 창고도 그 부분에 관해서는 내 것 만큼 빈약했다. 내가 “내 기억에는 그 광산이 흑연광산이었던 것 같은데”라고 말씀드렸더니 “왜 생뚱맞게 흑연광산이야. 석탄광산이었던 것 같은데”라고 말씀하셨다. 지도로 살펴보니 옥천에서 상주로 넘어가는 길목은 옥천군, 영동군, 보은군, 괴산군 등 여러 곳이었다. 그런데 위쪽으로 보은군, 괴산군까지 올라갔을 것 같지는 않아 아마도 옥천군이나 영동군 어디를 통해 도계를 넘어갔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옛 기억을 더듬고 그 희미한 기억에 합당한 경로를 찾아 나섰다. ‘구글’을 통해 이런 저런 자료를 찾다가, 옥천지역 주간신문인 ‘옥천신문’에서 ‘옥천군 청산면 명티리’에 대한 기사를 발견했다. 내용인 즉, 그곳은 옥천의 동쪽 땅끝마을로 한때는 흑연광산으로 번성했으나 1970년대 이후 사양길로 들어가 90년대에 이르러 폐광이 된 지역인데, 현재는 10여 가구만 남았다는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 그곳에 흑연광산이 있었다는 사실에 필(feel)이 꽂혀, ‘옥천문화원’의 자료와 옥천군 지도를 통해 그곳에 관한 정보를 탐색했다. 그랬더니 여러 가지 점에서 내 기억과 대체로 맞아 떨어졌다. 옥천읍에서 명티리로 오는 길가에 큰 개울이 있고, 명티리에서 팔음산(해발 772m) 동쪽 능선을 타고 도계를 넘으면 상주시 화동면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팔음산 자락에 이었던 흑연광산의 이름이 ‘월명(月明)광산’이었다는 것이다. 백 퍼센트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그 추운 겨울날 한 밤중에 넘었던 그 높은 고개가 바로 그곳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다면 옥천읍에서 청산면 명티리를 거쳐 상주군(현재 상주시) 화동명 양지리로 넘어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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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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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1월 초의 추위는 살을 에는 듯 매서웠다. 많은 수의 남녀노소가 짐 보따리와 함께 떼 지어 움직이니 피난대열은 혼잡스럽기 그지없었다. 그 북새통에 아이들의 울음소리, 한발이라도 빨리 가려다 서로 얽혀 밀려 넘어지며 내지르는 고함소리, 가족을 잃고 비탄에 젖어 울부짖는 소리가 진동했다. 한마디로 아비규환이었다.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오직 ‘살겠다는’ 의지하나로 큰 물결을 이루며 남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평택>에서 <천안>까지는 주로 철로를 따라 갔던 기억이다. <성환> 가까이 갔을 때, 멀리 철로 주변에 시체가 두 구(具)가 나동그라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 눈에 기차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어머니가 황급히 손을 뻗혀 내 눈을 가리셨다. 그러나 그 순간 내 뇌리에 마지막 열차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자신을 묶으셨던 아버지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그 곳으로 달려갔다. 다행이랄까 모르는 사람들의 주검이었다. 기차에서 추락하면서 머리를 크게 다친 듯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고, 이미 시신을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그 때 나는 난생 처음 사람이 죽은 모습을 보았다. 무척 충격적이었다. 이후 철도 연변에 쓰러져 있는 시신들을 자주 보았다. 기차 지붕에 웅크리고 있거나 난간에 매달려 졸다가 기차가 한 밤중에 터널을 지날 때 부딪혀 떨어진 경우가 많았다. 매번 어머니가 말리셨지만, 나는 ‘만(萬)에 하나’ 어버지가 일을 당하셨으면, 외아들인 내가 시신을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에 현장으로 달려가곤 했다. 그러면서 내 딴에는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겼던 것 같다.

 

그러나 정작 경악한 일은 천안 역 앞에서 경험했다. 하행 군용기차 뒤편에 미군 탱크가 두 대 실려 있었는데, 피난민들이 벌 떼처럼 탱크로 기어오르다가 장전되어 있던 기관총을 건드려 총알이 마구 난사가 된 것이다. 순식간에 피난민 서너 명이 쓰러지고 탱크 주변은 피범벅이 되었다. 미군 헌병이 소리치며 말리는 데도 막무가내로 위험을 무릅쓰고 탱크로 오르던 피난민들이 참혹한 죽음을 당한 것이었다. 비명소리, 구호를 외치는 소리, 놀라 울부짖는 소리로 주위는 온통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사 장면을 나는 불과 3-4m 떨어진 곳에서 생생하게 보았다. 엄청난 충격으로 나는 그 순간 온 몸이 얼어붙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서 나는 사람의 생사가 이렇게 갈리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후 한 동안 그 피빛의 적나라한 장면이 눈에 자주 아른거려 나를 괴롭혔다.

 

                                      II

<천안>을 지나면서 그동안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공산군의 기세가 크게  꺾이었고, 전선(戰線)도 <오산> 근처에서 교착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에 피난민들은 한숨을 돌렸고 정서적으로도 안정을 되찾았다. 한 겨울이라 일찍 날이 어두워졌다. 하루 걸러 눈도 오니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날이 저물기 시작하면 다른 이들 보다 일찍 발걸음을 멈추고 잘 곳을 찾으셨다. 대체로 수소문해서 동네 구장이나 유지집을 찾아 사정을 얘기하고 저녁과 방값으로 비교적 넉넉하게 얼마를 건네곤 하셨다. 어떤 집에서는 안방을 내 주는 집도 있었다. 그래서 피난민치고는 비교적 잠자리는 괜찮았던 기억이다. 나는 따스한 방에서 지친 몸을 녹이면 그냥 잠에 빠져 들어갔다.

 

<전의>에서 어느 한의원 댁에서 잤다. 고풍어린 옛집이었는데 주인인 한의사는 그 동네 유지였다. 다음날 아침에 어머니가 주인께 부탁드릴 말씀이 있다고 해서 나도 어머니를 따라 그 댁 안방으로 들어 갔다. 그런데 왠일인지 어머니는 그 예의 싱가 미싱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계셨다. 의아했지만 여쭤보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에 앞서 형제로 보이는 두 소년이 미리 와서 주인에게 막 무슨 얘기를 꺼내고 있었다. 들어 보니 그들은  피난길에서 가족을 잃은 형제인데, 그간 갖은 고초를 겪으며 이곳까지 와서 어제 밤에는 이 집 머슴의 호의로 머슴방에서 끼어 잤다는 것이다. 이어 매우 영민해 보이는 윗 형이 진지한 어조로 아래와 같이 얘기했다. 얘기가 조리가 있었고, 목소리는 낭랑하고 당찬 느낌을 주었다.

 

 “저는 배재중학 1학년이고, 이 아이는 국민학교 5학년인 제 동생입니다. 저희들이 힘겹게 여기까지 왔습니다만, 이제 너무 지치고 수중에 돈 한 푼 없기 때문에 더 이상 무리를 하다가는 길에서 큰 일을 당할 것 같습니다. 어려우시겠지만, 어른께서 저희들을 얼마동안 거두어 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저는 건강해서 머슴 한명 몫은 넉넉히 할 수 있습니다. 저 혼자라면 어떻게 해 보겠는데, 이 추위에 저 어린 놈 굶는 꼴은 더 이상 못 보겠습니다. 도와 주시면 평생은인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그 형이 무척 존경스러웠다. 나보다 불과 몇 살 위인데, 어쩌면 저렇게 의젓할까. 그리고 어른스러울까. 그간 응석받이로 살았던 내가 무척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이집 주인께서 이들 형제를 받아 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으로 손을 웅켜잡고 그 장면을 지켜 보았다. 간절하게 기도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주인은 얼마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냉랭하게 대답했다.

 

“ 자네들 사정은 무척 딱하지만 내가 도울 형편이 못되네. 우리도 피난을 가야 할지 그냥 여기서 버텨야 할 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고, 우리 식솔도 많은데 거기에 두 식구를 더 보탠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네. 달리 방법을 강구해 보게 나.”

 

그 말을 듣고, 그 형은 잠시 머믓하였으나 크게 흔들리지 않은 표정으로 “잘 알겠습니다. 크게 결례를 했습니다”라며 큰 절을 하고 동생을 데리고 방을 나갔다. 나는 그 차가운 한의사가 무척이나 원망스러웠다. 가슴이 메어지는 듯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어 주인장이 어머니께 얼굴을 돌리고, “어제 잘 주무셨습니까. 그런데 뭐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라고 물었다. 어머니는 ”네 저도 긴한 청이 하나 있습니다"라고 운을 띠우시더니. "제가 피난길에 애지중지하던 싱거 미싱을 갖고 떠났어요. 새것이에요. 그런데 이게 너무 무거워서 큰 짐이 되네요. 어려우시겠지만 전쟁이 한 고비 넘길 때까지 이 것을 댁에 맡기고 떠났으면 하는데,  받아주실 수 있으실지요.“ 라고 말씀 하셨다. 그러면서 보자기를 풀어 재봉틀은 꺼내 보였다. 반짝 반짝 빛나는 신형 싱거 미싱의 미끈한 모습이 드러났다. 당시 시골에서는 쉽게 만나기 어려운 명품이었다. 그 순간 나는 그 한의사의 얼굴에 환하게 희색이 감도는 것을 보았다.

한의사는 곧 ”네, 물론이지요. 그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요. 제가 고이 잘 간수하겠습니다“라고 흔쾌하게 수락했다.

 

그 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아끼던 비싼 미싱을 이 무정한 한의사에게 통째로 맡긴다니 도대체 말이 되나. 그런데 어머니는 한의사의 대답을 듣자 공손히 고맙다고 말씀하시고는, 다음 순간 빠른 손놀림으로 미싱의 몸통만 남겨 놓고 그와 연결된 몇몇 부품과 연결나사들을 잽싸게 뽑으시는 게 아닌가. 이미 손을 보아 느슨하게 만들어 놓으셨던지 순식간에 일을 마치시고, 그것들을 미리 준비한 자그마한 꽃 주머니에 차곡차곡 담으셨다. 그리고 몸통만 한의사에게 건넸다. 나는 그 때 그 한의사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어머니의 슬기에 내심 감탄을 했다.

 

후일담이지만, 예의 그 싱거 미싱은 몇 달 뒤 서울이 수복되고 전선이 안정된 후, 아버지가 그곳에 들려 되찾으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우리가 무척이나 궁핍했던 1952년 대구 피난시절 바로 그 미싱으로 삯바느질을 하셔서 우리 가족 생계의 큰 부분을 책임지셨다.

 

그 날 나는 피난 행열을 따라 길을 가면서 그 형제들 걱정에 시종 우울했다. 어머니는 눈치를 채신 듯 내게 말씀하셨다.

"너무 걱정마라. 너 그 배재중학 형의 눈빛을 보았지. 그 의지와 용기면 어떤 어려움도 잘 헤쳐 나갈 것이다."

어머니의 그 말씀이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그래서 "그렇지, 엄마, 나도 그렇게 생각해" 라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면서  그들 형제를 위해 진심으로 하느님께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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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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