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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에세이

나의 학계 데뷔 첫날 풍경

2024. 6. 28. by 현강

         I.

나는 1970년에 오스트리아 빈(Wien) 대학에서 공부를 끝내고, 이듬해 초에 귀국했다. 돌아와서 한 달이 채 못 되었을 때쯤, 한국정치학회 총무이셨던 동국대학교의 이정식 교수님께서 전화로 내게 곧 열릴 학회에서 연구발표를 할 것을 청하셨다. 나는 얼떨결에 수락했다.

19712월 초, 연구발표회는 성균관대학교의 계단강의실에서 열렸다. 발표자는 두 사람, 이영호(李永鎬) 교수님과 나였다. 이 박사님은 연세대 정외과 내 6년 선배로,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학위를 마치고 조지아 대학교 정치학과에서 조교수로 강의를 하시다 그 전해에 귀국, 이미 이화여대 정외과에 채용이 결정되신 기존 학자셨다. 원래 이분 단독으로 발표하실 예정이었는데, 내 귀국 사실이 알려져 학회에서 급히 내게 연락을 주셨던 것이었다.

발표회장에는 많은 분이 오셨다. 당시 만해도 외국에서 학위를 하고 돌아오는 신진 학자들이 많지 않던 시절이었는데 미국과 유럽에서 공부한 정치학자 두 사람이 발표한다니 아마도 이목을 끌었던 것 같다. 내가 기억하는 분으로는 연세대의 은사이신 이극찬 교수님, 성균관 대학교의 차기벽 교수님 등 다수의 중견 정치학자들과 그날 내게 질문을 하셨던 독일 유학파인 성대 윤근식 교수님, 서울대의 배성동 교수님 등이다. 앳된 얼굴의 대학원생 모습의 청년이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당시 서울대 조교였던 안청시 교수였다. 따져 보니 반세기도 넘는 세월 저편인데, 마치 어제처럼 기억이 선명하다.

          II.

이영호 교수님이 먼저 발표를 하셨다. 손에 아무런 메모 하나 없이 유머를 곁들이며 청산유수로 말씀하셨다. 훗날 정치에 관여하시고 체육부 장관도 역임하셨다가 비교적 일찍 세상을 떠난 분인데, 말씀에 자신감과 여유가 넘쳤다. 주제는 한국인의 선거행태에 관한 것이었는데, 내용도 알차고 흥미로웠다.

그런데 이분 발표를 보며, 나는 무척 당황했다. 왜냐하면, 유럽에서 대체로 연구발표회에서 발표자가 자신의 논문을 또박또박 읽어가며 강조할 부분만 부연 설명하는 경우가 많아, 나도 미리 쓴 발표 내용을 차분히 읽을 채비를 하고 왔는데 이 교수님의 자유분방한 발표 방식에 접하니, 나는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급한 대로, 이극찬 교수님께 다가가 여쭤보았더니, “글쎄 여기서는 논문을 읽는 식으로 발표를 하지는 않네..,.아는 내용이니 가능하면 그냥 말로 하면 어때?” 하시는 게 아닌가. 그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원래 말주변도 없고 무대 체질과는 거리가 먼 내가,  이 많은 청중 앞에서 정해진 시간 내에 내 생각을 조직적으로, 설득력 있게 발표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온몸에 힘이 빠졌다.

그러면 그냥 읽을까. 그것도 이곳 관례가 아닌 듯하니 그렇고.. 더욱이 앞서 발표하신 이 교수님은 읽을거리 하나 없이 멋진 발표를 하셨는데.... 나는 어쩌지? 복잡한 생각 끝에 나는 읽기보다는 로 하기로 마음을 작정했다. 그리고 빠르게 발표 내용을 머리로 정리했다.

내 차례가 되어 연단에 섰다. 비교론적 맥락에서 오스트리아의 정치지형과 정치문화에 관해 발표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가끔 손에 든 발표문에 눈길을 주었으나, 그냥 청중을 보며 얘기하듯 말을 이어 갔다. 처음에는 내가 느껴도 서투르고, 두서가 없었다. 그런데 조금 지나니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그런대로 가닥이 잡혔다. 가능한 한 무리 없이 내 생각을 열심히 전달하려고 애를 썼다. 발표가 끝났을 때 뒷등에 심한 한기(寒氣)를 느꼈다. 발표 중에 땀이 꽤 났던 것 같았다. 여러분이 질문을 주셨는데, 그때쯤 긴장이 풀려 대답을 곧잘 했던 것 같다. 질의자들이 대체로 만족해 하셨다.

연단에서 내려오는데, 이극찬 교수님이 다가오셔서 수고했네. 처음에는 더듬거리더니 나중에는 무척 좋았네, 잘했어라고 말씀하셨다.

 

               III.

그날 연구 발표는 이후의 내 학문적 진로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날 내 발표가 의외로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았고, 그 덕택으로 백수인 내가 급 한대로 입에 풀칠할 수 있게 되었고, 무엇보다 앞으로 학계에 연찬륙(軟着陸)할 전망이 높아졌다. 기대 이상의 결과였다.

발표가 끝나자, 두 분이 나를 만나자고 하셨다. 한 분은 고려대학교 정외과의 김하룡(金河龍) 교수님이셨고, 다른 분은 같은 대학교 행정학과의 이문영(李文永) 교수님이셨다. 먼저 김 교수님을 뵈었는데, 무척 호의적이셨다. 그 분 말씀이, 본인이 고대 아세아연구소 공산권 연구실장이신데, 소장님이신 김준엽(金俊燁) 교수님이 학회에 가서 안 박사를 눈여겨보고 괜찮으면 아연(亞硏)의 비상임연구원으로 초청하라고 명하셨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비상임이지만, 연구실을 주고 다른 연구원 한 명과 함께 공동으로 한 명의 조교를 쓸 수 있으며, 3 만원(현재 약 200만원 정도)의 월급을 지급한다고 말씀하셨다. 또 후에 내가 어느 대학의 전임교수가 되어도 겸직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러시면서 내 발표를 들으니 유럽 사회주의 전통에 대해 잘 아는 듯하니 아연에 오면 공산권연구실에 소속하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우선 고대 아연이 국내 유수의 연구소인데 여기서 나를 부른다니 우선 무척 고마웠다. 더구나 저명하신 김준엽 교수님이 내게 관심을 보이셨다니 도시 믿기지 않고 신기했다. 내게는 글자 그대로 불감청(不敢請)이나 고소원(固所願)이 아닐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간 유럽에서 관심을 가졌던 공산권연구를 계속할 수 있다는 점도 나를 들뜨게 했다. 그래서 선득 수락하고 감사의 말씀을 드렸다. 그랬더니 바로 다음 날 김준엽 소장님과 만날 시간 약속을 마련해 주셨다. 그런데 김 교수님이 자리를 뜨시면서, 내게 안 박사, 잘하면 고대 전임이 되실 것 같아, 그러면 이중 경사야.”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도무지 무슨 말씀이 알 수가 없어, “무슨 말씀이신지?”라고 되물었더니, 웃으시면서 이제 곧 알게 되실 거야라고 말씀하셨다.

 

이어서 이문영 교수님을 뵈었다. 이문영 교수님은 처음 뵈었지만, 나는 그의 학문 세계와 인품 및 정치적 지향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다. 이 교수님은 엄숙한 인상과는 달리 처음부터 내게 격의 없이 대하셨다. 그 분 말씀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지요. 내가 안 박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어요. 정치학과와  행정학과 어느 쪽으로 갈 수 있는 분인 것도 알고요. 그런데 오늘 발표를 들으며, 나는 이 사람이 내가 찾던 분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어요. 고려대로 오셔서 행정학과를 함께 크게 키웁시다. 전공도 행정학 쪽으로 굳히시면 좋겠구요.“

나는 너무 놀라 말문이 막혔다. 이문영 교수님은 미국서 공부하셨지만, 당시 한국 행정학계에서 거의 유일무이(唯一無二)자아준거적(自我準據的)' 행정학을 추구하시는 분이셨고, 부퇴전(不退轉)의 용기로 박정희 권위주의체제에 도전하시는 존경스런 어른이셨다. 그런데 이 큰 어른이 내게 한국의 대표 사학 고대로 부르시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내가 그냥 고맙습니다라고 선득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과분한 청이라고 느껴졌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선생님, 제가 워낙 천학비재(淺學非才) 합니다. 곧 실망하실 텐데요라고 조심스럽게 여쭈었다. 그랬더니 걱정 마세요. 나도 사람 보는 눈이 있어요라며 내 손을 잡으셨다.

알고 보니 김하룡, 이문영 두 분이 옆에 함께 앉으셔서 내 연구발표를 들으며 미리 호의적인 말씀을 나누셨던 모양이다.

 

               III.

내가 언젠가 미국에 이민 가신 분에게서 옛날 나처럼 무작정 미국에 온 사람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미국에 도착한 날, 공항에 누가 마중 나왔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의 방향이 결정됐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내 경우도 나의 한국 학계 첫 데뷔 날, 위의 두 분과의 만남이 이후 학계에서의 나의 연구와 지향, 그리고 학자적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우선 고대 아연(亞硏)과의 인연은 내게 북한 및 공산권 연구의 길을 터 주었다. 이듬해 <아세아 연구>에 실렸던 내 대표 북한 연구 논문 <북한 권력에리트의 구조분석>이 나왔고, 10년 뒤 출간한 <현대공산주의 연구>(한길사), 그리고 이후 계속된 일연의 동구 공산권 연구 및 비교 공산주의 연구의 단초가 바로 그 때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고대 아연 생활 1년 동안, 김하룡, 한배호, 김경원, 한승주 등 정치학계에 좋은 선배 교수님들과 가까워졌고, 특히 김준엽 선생님과의 인연은 무척 각별했고 오래 이어졌다. 김준엽 선생님을 모시고 창설되어 한동안 한국 공산권 연구의 산실(産室) 구실을 했던 <공산권연구협의회>에서 나도 한 귀퉁이에서 힘을 보탰고, 훗날 그 분이 창간한 <계간 사상>에서도 편집위원으로 일하며 자주 뵈었다. 매해 년말 이면 김준엽 교수님이 주최하시는 조촐한 송년 파티가 있었는데, 그 때 우리나라의 몇몇 어른들과 좋은 선배 및 동료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격의 없는 대화 속에 그 따듯했던 분위기가 아직도 가슴에 느껴진다. 무엇보다 고대 아연은 시간 강사로 전전하는 내게 연구실을 제공했고, 매달 기초생활비를 마련해 주었다. 지금 생각해도 고맙기 그지없다.

 

특히 그날 이문영 교수님과의 만남은 내게 일생일대의 큰 사건이었다. 그날 이후 이 교수님과 나는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그가 10년 전 2014년에 돌아가실 때까지 40여 년간 고인과 나는 더없이 깊은 학문적, 인격적 사귐을 가졌다. 나의 고대 전임은 아깝게도 그해 고려대와 우석대의 통합으로 무산되었지만, 그것과 관계없이 나와 고인과의 관계는 친형제 이상으로 가까웠다. 그래서 그와의 일화(逸話)는 끝이 없다.

돌이켜 보면, 송구스럽게도 그는 나를 거의 절대적으로신뢰하셨다. 거의 모든 정치적, 세속적 문제를 나와 의논했고, 내 의견을 존중했다. 한때는 거의 아침마다 내게 전화를 주셨다. 그러시면서 나이 차이가 16년인데도 불구하고, 평생 내게 한 번도 말을 놓지 않으셨다. 이 교수님은 담대하고 결연하게 독재와 맞섰지만, 착하고 순진무구한 성품의 소유자였고, 탐욕이나 극단은 금기로 여기는 철저한 청교도주의적 종교인이셨다. 스스로를 나는 절대 허용해서는 안 될 최소를 고집하는 최소주의자이다라고 자평하시며, 그는 자신은 워낙 겁이 많아 꼭 필요한 말을 해야 할 때, 용기를 내어 벌벌 떨면서 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그의 자전적 에세이 겁많은 자의 용기도 거기서 나온 제목이다. 이문영 교수님이 반독재 투쟁으로 장장 46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셨다. 그때 나는 그의 고려대 강의를 대신했다. 그 덕택에 나는 수많은 유능한 고대 제자를 얻었다. 그것은 평생 가는 엄청난 횡재(橫財)였다. 당시 고려대 행정학과 학생들이 나를 젊은 이문영이라고 불렀다는 얘기를 훗날 들었다. 긴 머리, 굵은 검은태 안경, 엄숙한 표정부터 학문 접근법, 세상 보는 관점이 비슷해 보였다는 것이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는 대뜸 내게는 영광이지만 그 분께는 큰 누()가 된다고 말했다.

이 교수님이 1991년 고려대를 정년 퇴직하실 때, 축하 연사로 두 사람, 정치인 김대중씨와 나를 부르셨다. 지금 생각해도 과분한 처사였다. 그런가 하면 1987, 629일 노태우 대통령 후보가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한다는 이른바 ’6.29‘선언을 발표하자, 그 몇십 분 후 이 교수님이 내 연구실을 박차듯 열고 들어오시며, 큰 소리로 안 교수, 명예혁명이오!“라고 외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러시면서 누구보다 안 교수와 그 기쁨을 나누고 싶었다고 말씀하셨다.

이문영 교수님은 정치투쟁을 오래 하셨지만, 결코 학문에 소홀히 하시지 않으셨다. 그는 깊게 사고하고, 늘 되새기며, 그것을 글로 옮기셨다. 말년에 원효·율곡·함석헌·김구의 사상을 정치·행정학적으로 풀어낸 협력형 통치라는 개념을 정립하셨는데, 책 마무리 단계에서 몸이 노쇠해서 글쓰기조차 어렵게 되자 구술로 끝을 맺으셨다. 평생 반려자이자 정치적 동지셨던 사모님을 먼저 보내시고, 이틀에 한 번씩 고대병원을 찾아 혈액 투석(透析)을 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만나시면 늘 나라 걱정과 더불어 공부 얘기를 빼놓지 않으셨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평생 학자셨고, 나는 아직도 그 점을 본받으려고 애쓰고 있다. 

 

                IV.

몇 자 쓰려고 시작했는데 글이 너무 길어졌다. 내 학계 데뷔 첫날이 내 삶과 학문에 미친 크고 진한 그림자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면서 인연(因緣)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특히 내가 학계에 데뷔하던 바로 그 날, 나와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고려대학교와 그곳 교수님들이 내게 첫 학문적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시고, 훗날까지 따듯이 보살펴 주신 데 대해서 더 할 수 없는 감사의 념(念)을 느낀다.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내 처가 자주 하는 말대로 나는 이래저래 인복(人福)이 참 많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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