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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에세이

순식간에 벌어졌던 일

2025. 3. 4. by 현강

                   I

나는 1970년대 초반에 3년 반 동안 한국외국어대학 행정학과 조교수로 재직했다. 이미 까마득한 반세기 저 너머의 일이다. 당시 한국외국어대학(이후 외대)는 아직 단과대학이었고 전임교수가 70명 남짓의 중소 규모의 대학이었다. 그러나 외국학(언어·문학/지역학)에 특화된 대학으로 학생들의 수준이 무척 높았고, 사회적 평판도 좋았다. 그곳이 내 첫 직장이었고, 꽃다운 한창나이에 교육과 학문에 열정을 쏟았던 보금자리였다. 그래서 외대는 아직도 내게 추억의 사진첩을 연상시키는 마치 ‘고향’이나 ‘친정’ 같은 아련한 그리움의 대상이다.

 

당시 외대에서는 매달 한 번씩 학장 주재의 전체 교수회의가 있었다. 여기서 30대에서 60대까지 전 교수가 한데 모여 가까이 얼굴을 마주하며 대학에서 돌아가는 흐름을 공유할 수 있었다. 전체 교수 중 거의 막내였던 내게는 그 가족적인 분위기가 좋았고, 정겹게 느껴지곤 했다.

그 때 학장님은 70대 초의 P 선생님이셨다. 저명한 영문학자로 한때 사회부장관을 역임하신 원로이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연세가 그리 높으신 것도 아닌데, 당시 내게는 엄청난 고령의 상노인으로 여겨졌다. 교장선생님 훈시같은 학장님 말씀이 늘 교수회의의 큰 부분을 차지했는데, 얼마간 지루하게 느껴졌지만 다 옳은 말씀이어서 내 귀에 거슬리지는 않았다.

 

               II

1973년으로 기억된다. 예의 전체 교수회의에서 P 학장님이 전례 없이 약간 고조된 목소리로 말문을 여셨다.

       “어제 우리 대학 법학과 학생 한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학장님 말씀에 좌중에 긴장이 흘렀고 숙연해졌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이 전혀 예기치 않았던 궤도로 향했다.

      “그런데 그 학생이 소아마비를 앓던 장애인이었습니다.... 대체로 신체적으로 성치 못한 사람은 정신적으로도 취약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내년부터 신체적으로 온전치 못한 장애인은 아예 입학허가를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순간 나는 경악했다. 내가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학장님과 동료 교수님들을 번갈아 보았다. 많은 이가 놀란 표정이었고,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나는 당연히 동료 교수님들 중 누군가가 학장님 말씀에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실 것으로 믿고 계속 좌우를 살폈다. 무척이나 절박하고 간절한 심경이었다.

그러나 장내에는 미동(微動)도 없었고, 무거운 침묵만 흐르고 있었다. 나는 입술이 바짝 타오는 것을 느끼며, 바삐 눈길을 다시 사방으로 돌렸다. 하지만 내 기대는 허망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잠시 후 학장님은 잠시 숨을 고르신 후 말씀을 이으셨다.

          “그럼, 별 이의가 없으신 것으로 알고”

상황은 급전직하,  벼랑 끝을 연상했다. 그 순간, 나는

         “학장님, 그건 안 됩니다!”라고 소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III

 그것은 내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아니 스스로 의식조차 하지 않았던 순식간에 벌어진 돌발 사고였다. 그리곤 쫓기는 심경으로 대체로 아래와 같은 요지의 사설(辭說)을 두서없이 쏟아냈다.

 

 <우선 신체적 불구와 정신적, 지적 결핍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 예로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과 헬렌 켈러 여사를 들었던 기억이다. 이어 우리나라가 참혹한 전쟁과 모진 궁핍을 겪었고 의료환경도 열악해서 상대적으로 장애자가 많은 편이라는 점을 적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이들에 대한 국가의 관심과 배려가 부족하고 사회적 편견이 심하다는 점을 밝혔다. 그리고 설혹 우리 사회가 이들을 제대로 챙기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대학은 이들을 따듯하게 품에 안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 이야기가 끝나자, P 학장님은 잠시 묵묵히 앉아 계시더니,

         “그럼 오늘 교수회의는 여기서 그치도록 하겠습니다”라며 조용히 몸을 일으키셨다.

 

                             V

이후 ‘장애인 입학’ 쟁점은 더 이상 학내에서 화두에 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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