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서점(교보)에서 출판사 <21세기북스>를 통해 내 새책 <인생삼모작>에 대한 질문서를 보내왔다. 

아래 내용은 그에 대한 나의 답신이다.

 

 

인터넷서점 [이슈 도서] 체크포인트

인생 삼모작

안병영 / 21세기북스

 

 

Q. 한국의 대표적 사회과학자이시고, 김영삼, 노무현 두 정부에서

교육부 수장으로 지내셨는데, 대학 정년을 앞두고

갑자기 강원도 고성으로 귀촌을 하시게 된 특별한 동기가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아울러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

 

A. 서울태생인 저는 젊은 시절부터  노후에는 시골에 가서 ‘다른 삶’을 살아 보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나치게 번잡하고 세속적인 ‘관계의 망’ 속에 얽혀있는 대도시에서 벗어나서, 내가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고 싶은 열망이 컸고, 내 노후를 따스하게  안아 줄 수 있는 자연의 품이 그리웠습니다.

 

한여름에는 농사짓고, 겨울에는 글 쓰며, 남들이 다니는 큰 길가에서 비켜서서 한적하게 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평생 책상머리나 지키던 내가, 땀 흘려 노동하며 살아가는 새로운 일상에서 배우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아늑한 자연에 파묻혀 바깥세상을 멀리 조망하며 사색하는다는 것은 내겐 너무 신선한, 그리고 얼마간 경이로운 삶의 체험입니다. 자연은 특히 지적, 예술적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영감의 원천이라고 생각합니다.

 

 

Q. 교수님께서 쓰신 55편의 에세이 속에는 삶의 깊은 통찰이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주변에서 일어난 가벼운 이야기도 있고, 정치와 사회를 주제로 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번 책을 통해 독자들이 어떤 점을 주목하면 좋을까요?

 

A. 이 책 속에는 격동의 연속이었던 지난 80년간의 제 삶의 여정과 그간에 내가 품었던 생각이 모두 녹아 있습니다. 따라서 글 전체가 얼마간 자전적 성격을 지니고 있고, 그 안에 저 나름의 세상을 보는 눈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어떤 주제는 가볍고, 어떤 주제는 무거워 보이나, 모든 글이 제 영혼과 인격을 담보로 한 시대의 증언이자 삶의 고백입니다. 독자들께서는 제 마음 속에 들어와서 글을 읽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Q. 책의 제목이 인생 삼모작인데, 교수님의 삶을 삼모작으로 구분해 주신 것으로 보입니다.

구체적으로 구분하여 설명을 부탁드리고 스스로 평가를 해주신다면요?

 

A. 제가 말하는 <인생삼모작>에 따르면, 첫 번째 일터에서 한 30년 열심히 일하고, 50대 중반에 이르면 못자리를 옮겨 자신이 평소에 정말 하고 싶었던 일 혹은 진심으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다음 60대 중반이 되면, 못자리를 아예 시골로 옮겨 ‘자연회귀’, ‘자아찾기’로 여생을 보내자는 것입니다.

 

제 삶을 스스로 되돌아보면, 세 번째 못자리로 자연의 품에 귀의한 것은 위의 처방 그대로이지만, 첫 번째와 두 번째 못자리의 구분이나 성격 규정에는 조금 애매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

저는 만 65세에 정년퇴직을 할 때까지,  늘 교수직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살아오면서, 그 일을 가장 좋아했고, 또 가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별다른 재주가 없는 저로써는 그 일이 제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기며 살았습니다. 따라서 퇴직할 때까지 제 주된 못자리는 교수직이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내가 그 후반부에 수행했던 두 번의 장관직은 제 삶의 주된 궤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울뿐더러, 그것이 제가 본래 하고 싶었던 일도 아니었고, 학자 생활보다 더 가치 있게 여겼던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제 경우에도 대체로 50대 중반을 변곡점으로 그 이전과 그 이후 삶의 과정에서 차이가 컸던 것은 사실입니다. 즉 50대 중반까지는 주로 학문 및  <이론>연구에 큰 역점을 두었습니다. 물론 그 시절에도 언론에 정치평론을 하는 등 얼마간 <이론>연구의 외연을 확장하는 작업을 곁들였습니다만, 제 주된 관심은 학문연구였고, 제 삶의 주된 터도 오로지 <연구실 >이었습니다.

그런데 50대 중반에 이르러, 제가 교육부 장관직을 맡으면서 제 관심은 <실천> 쪽으로 크게 선회했고, 제 일의 내용과 일터도 바뀌었습니다. 이후 다시 연구실로 돌아왔으나, 60대 초에 이르러 한번 더 교육부 수장직을 맡으면서 다시 제 삶이 <실천> 쪽으로 옮겨졌습니다. 이처럼 제 삶의 궤적은 50대 중반 이후 두 번의 국정참여를 통해 <이론 중심>에서 <이론과 실천의 접목>내지 <실천을 통한 이론 검증> 쪽으로 크게 전환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를 제 두 번째 못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의 국정참여는 무척 힘겹고 고뇌에 찬 시간이었으나, 정치학과 행정학, 다시 말해 <국가학>을 을 전공한 저에게는 귀중한 경험이었고, 나라에 봉사할 모처럼의 기회였습니다.

 

 

Q. 내용을 살펴보면 책의 주제나 핵심은 중도주의적 삶의 철학으로 보입니다.

동의하시는지 궁금하고, 과연 그 삶은 어떤 것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는지요.

 

A. 저는 늘 <개혁적 중도주의자>라고 자처해 왔습니다. 이념적으로 말하자면, 자유와 평등, 어느 쪽에 크게 편중되지 않고 양자를 조화롭게 가꾸자는 입장입니다. 이는 기하학적으로 양극의 중간 점이 아니라, 양극을 한 단계 높은 수준에서 ‘지양(止揚, aufheben)하는 입장입니다. 따라서 개혁을 품은 역동적 과정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러한 관점은 이념적 지향에 그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과정 속에서도 그대로 용해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은 극단적 사고, 진리독점, <적과 동지>의 구분을 배격하고, 균형적 사고, 점진개혁, 사회적 합의를 중시하고 <함께 사는 삶>과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하는 중도주의적 삶의 철학입니다.

 

Q. 젊은 세대에게는 생경하겠지만, 옛 어른들은 아호를 통해 훨씬 부드럽고

격조 있는 대인관계를 이루어낼 수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교수님의 아호는 현강이라고 들었는데, 그 뜻은 무엇이고 아호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다면 소개해 주십시오.

 

A. 그냥 글자 풀이를 하자면, 현강(玄岡)은  ‘아득히 보이는 작은 산’입니다. 그런데 첫 글자 ‘현(玄)’이 노자, 장자의 도(道)와 통하는 개념입니다. 더욱이 내 아호를 지어주신 청남 선생님 자신이 ‘자연그대로의 삶’을 지향하는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사상의 대가이기에, 저는 그가 내 말년의 삶을 미리 꿰뚫어 보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렇다 할 에피소드는 생각이 나지 않네요. 다만 신기한 것은 한국에서는 내 아호를 부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외국에 사는 옛 친구들이 내게 글을 쓸 때는 하나 같이 제 아호를 앞세우네요.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고풍스런 옛 정서가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게 아닌 가 싶어 가슴이 뭉클하곤 합니다.

 

Q. 교수님의 이번 에세이집은 문학적인 측면에서도

우리나라 수필의 새로운 전범을 보여준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문체는 부드럽고, 글의 내용은 일상의 미세한 감정부터 전 세계적 사고의 분석까지

거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비법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A. 저 나름의 비법은 없습니다. 다만 제가 글을 쓸 때 늘 명심하는 점 몇 가지 점을 보편적인 권고 사항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글은 진솔해야 합니다. 진실하고 솔직해야 합니다. 따라서 글은 마땅히 자신의 양심의 소리에 따라 써야 합니다. 따라서 글을 쓰자면, 늘 자신의 내면의 움림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글에 거짓이 깃들어서는 안 될뿐더러, 글 속에 지나친 과장이나, 미화, 혹은 필요 이상의 현학적 표현이나 시니시즘은 피해야 합니다.

둘째, 글은 쓰고 싶을 때 써야 하고, 글 속에는 얼마간 고뇌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마지못해 쓰는 글, 억지로 쓰는 글은 피해야 하고, 뻔한 얘기, 누구나 하는 얘기, 정석적 글은 아예 쓰지 않는 게 좋습니다.

셋째, 글을 쓸 때, 필자는 ’자유로운 영혼‘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시대의 흐름이나 권력을 지나치게 의식하거나 대중에게 영합해서는 안 되며, 자신의 사적 동기가 앞세워져서는 안 됩니다.

넷째로, 가능하면 사회통합적인 글을 쓰는 게 좋습니다. 필요한 비판은 마땅히 해야 하며, 글을 쓰는 데 따르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이념적이거나, 편향된 글보다는 서로의 이해와 치유를 돕고, 연대를 강화하며,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사회통합적인 글이 바람직합니다.

 

 

Q. 우리나라처럼 극단적인 사고를 강요하는 사회에서

중도주의자로 살아가는 일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젊은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밝혀주세요.

 

A. 요즈음 젊은이들은 내일을 예측하기 어려운 제4차 산업혁명의 여울과 국제정세, 그리고 불안정한 국내의 정치경제적 환경과 코로나 19 팬데믹의 압박 속에서 극히 어려운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격변하는 시대와 사회 속에서는 좌와 우의 이념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포퓰리즘이 만연되기가 쉽습니다. 따라서 이럴 때 수록, 젊은 세대는 비판적 지성과 용기를 바탕으로 자기 중심과 균형을 잡고 편향된 이념과 정치선동에 쉽게 휩쓸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황야에 홀로 섰다는 외로운 느낌이 있더라도, 굳건히 자신을 세우고 좌, 우 이념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끊임없는 <자아성찰>과 <학습능력의 배양>, 그리고 <미래에 대한 낙관적 확신>입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하여 여러분은 현재의 큰 위기를 엄청난 기회로 전환하여 제2의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빛나는 세대가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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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돼지 소동

삶의 단상 2021. 9. 13. 06:18 |

                   I.

한 달 전 쯤이다. 저녁 어스름에 효소 항아리들 근처에서 거뭇한 물체가 보이는 듯 해서 가까이 다가갔더니 웬걸 큰 개 같은 놈 하나가 놀라 나를 스치고 도망을 갔다. 옆구리를 그냥 조금 스쳤는데도 꽤 묵중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깜짝 놀라 도망간 쪽으로 눈을 돌리는데, 뒤를 따라오던 내 처가 큰 소리로 멧돼지야!”하고 소리쳤다. 이미 저만치 달아난 놈의 뒷모습을 보니 중간 크기의 멧돼지가 틀림없었다. 그 순간 나는 멀쩡하던 다리가 풀려 엉거주춤 그 자리에 반쯤 주저앉았다.

 

                   II.

이후 일주일간 우리 집 효소 항아리들은 큰 수난을 당했다. 지난 두 해 동안 수확해 담그어 놓은 블루베리, 오디, 보리수, 매실의 효소 항아리(항아리라기 보다 독이라 불러 마땅한 제법 큰 규모의 옹기) 아홉 개 중 다섯을 깨고, 그 내용물을 포식한 것이다. 경위는 이렇다. 내가 멧돼지와 조우한 다음 날 아침, 나가 보니 블루베리 항아리 두 개가 땅에 나동그라져 있었고, 깨고 먹다 남은 내용물들이 밖으로 흘러나와 주변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아니 도대체 그 큰 독을 어떻게 넘어뜨리고, 더구나 그것을 깰 수 있었을까.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 놀랍기 그지없었으나, 멧돼지의 둔중한 몸집과 입 밖으로 돌출한 날카롭고 발달한 송곳니를 떠올리며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후 하루씩 걸러가며, 오디, 보리수, 매실 효소 항아리를 차례로 작살을 냈다.

그 한 주일 동안 우리도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첫날 블루베리 두 독이 무참히 깨진 후, 나머지 독들 주변에 제법 큰 철 사다리 두 개로 방어벽을 치고 그 사이사이에 크고 작은 장애물을 옮겨 놓았으나, 멧돼지 떼의 막강한 위력에 별로 힘을 쓰지 못했다. 일 주일이 되던 날, 나는 할 수 없이 남은 네 독 속의 효소액들을 일일이 걸러서 여러 병에 옮겨 담아 창고에 저장했다.

 

매년 수확한 블루베리, 오디 등 중 품질이 좋은 놈은 제때 먹거나 냉동 저장하고, 나머지 일부는 쨈을 만들고, 그리고 반쯤 남은 것은 효소로 담가 저장한다. 그런데 2 년전 고성 산불로 효소 항아리 10여 개를 날리고, 그 후 지난 두 해 동안 공들여 저장한 효소들이 이번에 수난을 당한 것이다. 장독대에 십여 개의 간장, 된장, 고추장 독들은 모두 멀쩡한데, 유독 이들 효소 항아리들만 집중 공격을 받은 것은 이것들이 달콤하고 맛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시골 살며 겪게 되는 이색 체험이거니 하고 그냥 웃으며 넘기려는데, 내 처는 그게 아니었다.

아니 지난 2년간 블루베리, 오디 농사의 반은 날라갔잖아. 그 옹기값만 해도 얼만데!”

푸념이 만만치 않다.

 

                        III.

시골마다 야생 멧돼지로 인한 농작물 피해가 해마다 늘어간다. 그런데 비교적 우리 동네는 그간 멧돼지 피해가 크지 않았다. 더욱이 고성 산불로 집 뒤 소나무 숲이 초토화된 후, 근처에 멧돼지가 서식할 곳이 마땅치 않아, 멧돼지 걱정은 전혀 하지 않고 지냈다.

그런데 그 일이 있기 며칠 전, 새벽에 농터에 나가보니 그 동안 보지 못했던 제법 큰 짐승 발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크기로 보아 자주 보는 동네 개나 고라니의 그것은 아니었다. 의아했지만 그냥 잊고 넘겼다. 그런데 이번에 멧돼지 소동을 겪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멧돼지 위험이 늘 있었고, 그에 따른 일화도 적지 않았다. 그 중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멧돼지와 풍산개와의 혈전 이야기다. 10년 전에 들은 얘기인데, 이웃 동네 어른 한 분이 새벽에 풍산개 둘을 데리고 우리 집 뒤 소나무 숲속 산책을 나갔다가 멧돼지를 만났다고 한다. 곧장 싸움이 벌어졌는데, 피 튀기는 치열한 혈전이었다고 한다. 개 주인이 독려하는 가운데, 풍산개 두 마리가 멧돼지를 앞뒤에서 협공하는 바람에, 처음에는 판세를 압도하던 멧돼지가 끝내 뒷걸음을 쳤다고 한다.

실은 나도 멧돼지를 아주 가까이서 본 경험이 있다. 7, 8년 전이다. 차로 내 처와 고성 세계 잼버리 수련장 근처 호젓한 산길을 가다가 가까이서 질주하는 검은 갈색의 야생 멧돼지를 보았다. 가히 200 Kg는 넘을 듯한 큰 놈인데, 목에서 등에 걸쳐 빳빳한 털을 곤두세우고 옆으로 삐져나온 송곳니를 들어내고 무섭게 달려가고 있었다. 마치 가쁜 숨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 큰 몸통을 짧은 다리로 지탱하며 폭주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차 안에 있었는데도 공포스러웠고,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IV.

멧돼지 소동 며칠 후, 원암리 이장님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내용인 즉, “혹시 밤에 총소리가 나도 놀라지 마십시오. 멧돼지 피해가 커서 엽사 한 분을 모셨습니다였다. 그러나 이후 한 밤중에 총소리도 없었고, 동네에 멧돼지 피해 소식도 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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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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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남수 2021.09.17 18:38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부총리님 시골살이 이야기가 참 재미있습니다. 무엇보다 다치지 않으셔서 다행이구요. 새 집에서 더욱 건강하고 행복하기길 빕니다.

  2. 김익로 2021.09.23 21:36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부총리님!!!

    추석명절 잘 보내셨어요?
    긴 연휴도 훌쩍 지나가고 말았어요

    멧돼지 소동을 읽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나마 다치는 사고가 없었음이 천만다행입니다
    저도 시골 출신이라 멧돼지 생리를 좀 알고 이런저런 목격담 등을
    갖고는 있음니다만~~~ 부총리님의 경우와 같은 경우는 생소하고 좀 특별하네요!!!
    애써 농사지은 수확물인데다 한참 발효가 잘 되어 귀한 약이 될 판인데~~~
    사모님께서 많이 놀라시고 속 상하셨을 것 같아요
    조만간 전화라도 드려서 위로를 드려야 겠습니다
    시골살이 액땜을 크게 하셨다 생각하시고 마음을 편안히 가지시길 바랍니다!!!

    부총리님!!!
    이제 아침 저녁으로는 제법 선선해졌어요
    건강에 유의하시길 바라오며~~~ 문안 올리옵니다!!!
    김익로 올림

  3. 현강 2021.09.24 14:20 Address Modify/Delete Reply

    당시 꽤 놀랐던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재미있는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처음 시골생활할 때는 집과 농터 에서 자주 뱀을 만났는데, 그 때 마다 깜짝 놀라 급히 피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자주 접하다 보니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냥 살펴 봅니다. 그러면 언제나 제놈이 먼저 피합니다. 산불 이후 뱀도 찾아 보기 힘듭니다.

빠르면 내달 중순쯤 내 새 에세이 집 <인생 삼모작>이 <21세기 북스>사에서 출간된다. 부제는 '세 못자리에서 거둔

중도주의적 생활철학'이다. 여기 우선 그 머리글인 '글 머리에'를 선 보인다. 

 

I.

서울태생인 나는 젊은 시절부터 언젠가 노후에 시골에 가서 다른 삶을 살아 보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15년 전 정년퇴임에 앞서 마지막 학기가 무섭게 이곳 속초/고성으로 내려왔다. 처음 2년 가까이 속초에 살다가, 이후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로 옮겨 와서, 한여름에는 농사짓고, 겨울에는 글 쓰며, 남들이 다니는 큰 길가에서 얼마간 비켜서서 한적하게 살고 있다.

 

인공()의 작품인 거대도시를 떠나, 중간단계인 소도시를 거쳐 마침내 자연의 품인 농촌에 연착륙하면서 내 삶의 양식도 많이 변했다. 평생 책상머리나 지키던 내가, 땀흘려 노동하며 살아가는 새로운 일상에서 배우는 게 너무나 많다. 무엇보다 나라의 동북쪽 끝 변방에서, 아늑한 자연에 파묻혀 바깥세상을 멀리 조망하며 사색한다는 것은 내겐 무척 신선한, 그리고 얼마간 경이로운 삶의 체험이다. 내가 이곳에 자리 잡은 후 자주 <인생 삼모작>을 되뇌며, 특히 지적, 예술적 작업을 하는 사람에게 노후의 자연의 품은 엄청난 영감과 상상력의 원천이라고 말해 온 것도, 이 산 경험에서 우러난 내 나름의 메시지였다.

 

그러나 호사다마랄까. 재작년 여든 문턱에서 고성산불로 하루아침에 내 삶의 기둥이자 학문의 보금자리였던 <현강재(玄岡齋)>가 소진되었다. 불길 속에 잔해만 남은 집터와 초토화된 주위 환경을 보며, 나는 망연자실, 크게 좌절했다. 가까스로 마음을 추슬러 그래, 이제 다시 시작하자!”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불탄 자리에 새집을 지었다. 그리고 내 삶도 새로 짓기로 마음을 정했다. 나를 무섭게 짓눌렀던 산불의 악몽에서 벗어 나는데 농사일이 큰 몫을 했다.

 

II.

내가 살아 온 지난 80년의 세월을 되돌아보면, 천지개벽에 견줄만한, 격동의 연속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해방의 환희와 전쟁의 아픔을 겪고, 한국역사의 가장 역동적인 시간인 산업화와 민주화의 험난한 도정을 함께했다. 그 사이 우리 사회는 크게 바뀌어 1차 산업 위주의 농경사회에서 이제 바야흐로 4차 산업혁명의 문턱에 이르렀고, 향리문화에 젖어있던 우리네 의식세계도 이제 글로벌리즘을 겨냥하고 있다. 단언컨대, 한 생애에 이처럼 극적인 역사적 소용돌이, 온갖 영욕과 명암을 고르게 체험한 세대는 일찍이 없었다.

 

나는 사회과학자는 책을 통해서 보다, 삶의 과정을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우며, 삶 속에 용해되지 않은 사회과학적 지식은 겉핥기, 흉내 내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 의미에서 비록 신산(辛酸)한 세월이었지만, 내게 다양한 사유()와 공부 밑천을 마련해 준 파란만장하고 변화무쌍한 지난 시대에 대해 내심 고마운 생각이 없지 않다. 돌이켜 보면 그간 내가 겪은 세상 모든 게 내게 알찬 공부거리가 아니었나 싶다.

 

나는 젊어서 유럽의 작은 중립국에 유학해서 새로운 세계, 3의 관점을 익혔고, 오랜 학자생활을 거쳐 민주화 이후 두 번 국정에 참여해서 내가 익힌 이론을 실천의 장에서 검증하는 값진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이제 황혼 녘에 자연으로의 귀의를 통해 삶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얻으려고 애쓰고 있다. 나의 중도주의적 삶의 철학도 이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III.

10년쯤 전에, 제자인 연세대 정무권 교수가 내게, 세 번째 못자리인 속초/고성에서 건져 올린 사유의 편린을 그때그때 글로 옮겨 보라며 손수 블로그를 만들어 주었다. 돌이켜 생각해도 참 고마운 일이다. 이후 나는 이곳에서의 삶의 과정에서 느끼고, 생각하는 갖가지 단상(斷想)들을 한땀 한땀 정성스레 수놓는 심정으로 내 블로그에 올렸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그 대부분이 그간 그렇게 <현강재>(https:// hyungang. tistory.com)에 올렸던 글 중에서 가려 뽑은 것들이다.

 

이 글들은 대체로 최근 몇 년 사이에 쓴 산문 형식의 글들인데, 그 주제들을 보면 내 생활 주변의 소소한 작은 이야기부터, 비교적 무거운 정치. 사회적 주제에 이르기까지 무척 다양하다. 그리고 시간상으로도 내 어린 시절부터 최근까지 전 생애에 걸쳐 있다. 모든 글이 데드라인의 압박 없이, 마음에 내켜 쓰고 싶을 때, 머리와 가슴에 와닿는 주제에 대해, 마치 창공을 나르는 종달새처럼 자유롭게, 그리고 먼 들판을 바라보는 허허로운 심경으로 부담 없이 쓴 글들이다. 그러다 보니, 이 책 속에 부지불식간에 내 평소의 생각과 관점, 내 세계관, 그리고 내 전 생애가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이 책을 펴는데,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 우선 솔선해서 출판사를 주선해 주신 알라딘의 조유식 사장님과 책 출판을 허락하고 모든 편의를 보아주신 김영곤 사장님과 신승철 이사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온갖 정성을 다해 책을 멋지게 꾸며주신 함성주 시인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아울러 손수 글 전편을 정성껏 읽고 교열과 더불어 세세한 조언을 아끼지 않은 제자 연세대 양재진 교수께도 마음속 고마움을 전한다.

 

천생 도시여자인 그녀가 먼 시골까지 따라와 나와 <인생 삼모작>을 함께 하며, 병약한 몸으로 아마도 그녀의 마지막 건축작품이 될 새 <현강재>를 짓는데 온갖 고생을 다 한 내 반려자에게 이 책을 바친다.

 

20218

멀리 울산바위가 보이는 <현강재>에서

 

안병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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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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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보령 2021.08.28 08:47 Address Modify/Delete Reply

    다음 달 중순에 출간 예정인 "인생삼모작"이 서점에 나오는 대로 구독하겠습니다만 출판기념회가 있으면 찾아뵙고 축하드리려 하오니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이 보령 드림.

I.

얼마 전 옛 제자 J가 찾아왔다. 그는 86학번으로 당시 내가 개설한 5개 과목을 모두 수강했던 자칭 내 열성팬인데, 그와 지난 얘기를 주고받다가 대화는 1980년대로 돌아갔다. 그는 내 정치적 관점과 관련해서 아래의 질문을 던졌다. 나는 허심탄회하게 그에게 답했다. 그 대화 내용을 가감 없이 여기에 담는다.

 

II.

J: 1980년대는 질풍노도의 시대였습니다. 특히 80년대 중후반 대학에는 급진적 변혁 사상이 풍미하고 있었지요. 저는 86년에 학교에 들어 왔는데, 마음속으로는 사회주의 이상에 끌렸지만, 현실 사회주의는 물음표였습니다. 북한 사회주의는 물론 동구 공산주의도 대안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교수님의 동구공산권체제변동강의를 들으며 생각이 많이 정리되었죠. 그런데, 그때 다른 많은 친구들은 변혁이란 이름하에 꽤나 급진화되었었습니다. 선생님은 당시 전두환 정권에 대항해 교수 서명을 주도하며 체제 민주화에 앞장 스셨지만, 학생 운동권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셨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선생님은 양쪽에서 배척받으셨을 것 같기도 한데, 어떠셨어요?

 

: 그때 얘기를 하자면 할 말이 많네. 말이 조금 길어지겠네. 자네도 알다시피 당시 흐름을 주도했던 학생집단들이 훗날 386 운동권으로 불렸는데, 이들은 1980년대 중반 이후 급속도로 급진화되면서 민중민주파(PD)와 민족해방파(NL)로 나뉘어 각축하다가, 급기야 NL계의 주사파가 크게 부상하기에 이르렀지. 나는 80년대 학생 운동권이 그 폭발적 기세와 충격으로 한국의 체제 민주화에 기여한 점은 십분 인정하면서도, 이제 그들이 잘못된 길에 접어들었다고 직감했지. 그래서 고심 끝에 1987년에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변론>(전예원)을 펴냈네. 그 시대에 대학가의 금기어인 <자유><자유민주주의>를 앞세운 내 책에 대한 운동권의 분노는 대단했지. 늘 체제 비판적이었던 내가 자기들 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자신들의 적이었다는 배신감 같은 게 폭발한 거지.

나는 곧장 연세대 사회과학대학 꼭대기 대형 종합강의실로 소환되어 수 백명 학생들과 1시간 여 동안 격론을 벌렸네. 처음에는 심문에 가까웠지. 그때 나는 학생들에게 자네들이 오랫동안 자유민주주의라는 파랑새를 쫓다가 권위주의체제의 질곡 아래서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이제 그에게 모질게 돌팔매를 하고 있다네. ‘자유를 뺀 민주주의는 이미 민주주의가 아니고, 그것은 끝내 전체주의로 전락한다는 점을 명심하게나고 엄중 경고했지. 적지 않은 학생들이 내 입장에 큰 소리로 항의하며 자리를 떴지만, 반 이상이 끝까지 남아 내 얘기를 경청하고 끝내는 박수를 쳐 주며 공감을 피력했네. 그때 내가 절감한 것은, 많은 학생들이 운동권의 변혁논리와 급진 처방에 반신반의하면서도 자신들의 생각이 아직 여물지 못해 머뭇머뭇 그에 추종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이들은 바른 소리를 갈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네. 이후 나는 강의시간에 운동권 학생들을 향해 자주 아래와 같은 얘기를 했네.

생각해 보게나. 자네들은 지금 세계의 시계와 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네. 세계 곳곳에서 현실 사회주의, 즉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있는 굉음이 들리지 않나. 소련에서 페레스트로이카가 체제개혁의 신호탄을 올렸고, 대부분의 동구 공산주의 국가들도 그 뿌리가 흔들리고 있네. 그런데 자네들은 역사상 가장 일탈적인 북한 공산주의체제와 그 주체사상에 빠져 그 잘못된 길을 우리의 살길이라고 생각하니 이게 될 법한 일인가.”

세상에는 인류가 만들어낸 명품 국가들이 많이 있네. 스웨덴을 보게나. 그 나라는 자유와 평등, 복지 모든 면에서 세계의 최 일류국가이네. 그런 체제 모형은 자네들 눈에 보이지 않나? 그런데 북한은 어떤가. 자유, 평등, 복지 그 모두에서 세계 최악의 상황이고, 백성들은 바깥 세상과 절연된 채로 무소불위의 독재권력 아래서 신음하고 있네. 그런데 왜, 어째서 그 열악한 체제와 그 거짓 이념이 자네들의 희망의 푯대가 되어야 하나

내가 그렇게 말하면, 몇몇 학생은 항의의 표시로 자리를 떴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내 말을 진지하게 경청했고, 그들의 눈빛에서 공감의 물결을 느꼈네.

내가 이미 1970년대에 북한에 대한 개척적 연구에 앞장을 섰고, 1980년대에 들어 비교공산주의 연구에 집중하면서 1982<현대공산주의연구>(한길사)를 펴냈으므로, 감히 나와의 이론적 논쟁을 꾀하는 운동권 학생들은 없었네.

나는 많은 궁리 끝에 학생들에게 시대적 진실을 알려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1988년에 전교생 대상으로 동구공산권체제변동이라는 강의를 개설했네. 이 강의를 통해, 소련 및 동구권은 이미 몰락의 길에 접어들었고, 현실사회주의(공산주의)는 끝내 역사적 대실패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고, 기회 있는 데로 북한 공산주의체제의 추악한 실체와 주체사상의 허구성을 파 해쳤네. 학생들이 종합관 대형 강의실을 가득 채웠던 기억이네. 당시 나는 학교에서 교무처장을 맡고 있어서 무척 바쁘고 쫓겼지만, 이 강의 때는 늘 힘이 솟았지. 물론 한 번도 휴강을 하지 않았네.

 

J: 저는 교수님이 학생들과 논쟁을 하실 때 종합강의실에 없었는데,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제가 거기 있었으면 끝까지 자리 지킨 학생이었을 거에요. 그런데 여기서 제가 무척 궁금한 것은 이들 운동권 세력은 이후 사회 곳곳으로 펴졌고, 민주화 이후, 정치에 대거 참여해서 특히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에서 무척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는데, 이들은 아직도 그들의 옛 사상에 집착하고 있는 거 같습니다. 사람은 안 바뀌는 것일까요? 아니면 바뀌지만 이미 그것을 극복한 사람들은 배척된 것일까요?

 

: 그거야 어디 한마디로 답할 수 있는 얘긴가. 개인차도 워낙 클 터이니까. 그러나 그들도 자신들이 한 때 세계의 시계에 역주행 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았겠나. 한국적 특수성을 십분 고려한다고 해도 당시 그들은 분명 우물 안 개구리였네.

그러나 그들은 비록 길을 잘못 들었지만, 당시 그들이 추구했던 체제 민주화와 민족 통일에 대한 열정과 집념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들 중 얼마는 아직도 당시 그들이 천착했던 반미’, ‘친북의 정치적 성향은 물론, ‘민중민주주의’, ‘민족해방등의 중심 개념에 대해 얼마간 미련을 가지고 있겠지.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이미 나름대로 그간 변화된 상황에 적응하고 있다고 보여지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국민의 역할이네. 국민이 눈을 부릅뜨고 이들이 정치행태를 면밀히 관찰해서. 그들이 잘못된 길로 접어들 때 가차 없이 단죄하고, 바른 길을 찾아 갈 때 그들을 격의 없이 응원하는 것이네. 한 때 운동권이었다는 팻말만 보고, 손뼉치거나 배격해서는 안된다고 보내.

 

J: 교수님은 한때 노무현 정권에서 장관으로 일하셨잖아요. 그 때 청와대에 있던 386 운동권들은 어떠했나요?

 

: 당시 386 운동권들이 수적으로 적지 않았고, 그들의 관여의 폭이 넓었던 것이 사실이지. 그런데 나는 그들을 일일이 의식하고 일을 하지 않았네. 그래서 가끔 부딪혔고, 그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기도 했지. 그런데 다행스러웠던 것은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그들을 확실히 장악하고 있었다는 점이네.

 

J: 그렇다면, 이미 586으로 불리는 운동권과의 관계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보세요.

 

: 글쎄, 이건 얼마간 주관적인 해석이지만, 노무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의 리더십 간의 가장 큰 차이는 학습능력의 차이라고 보내. 내가 본 노무현 대통령은 학습능력이 뛰어난 정치가였네. 노무현 정부의 초기와 후기, 특히 말기에 정책지향을 보면 그것을 분명히 알 수 있지. 노무현 정부는 처음에는 상대적으로 이념성이 강했고, 경직된 정책지향을 보였지만, 후기로 갈수록, 실용주의적이며 유연한 방향으로 바뀌었네. 그 때 나는 혼자 저 양반, 외국에 한번 나갔다 올 때마다, 생각이 열리는군이라고 생각했지. 그는 주위에 운동권을 많이 거느렸지만, 그들에게 포획되지 않았고, 그들을 적절히 제어했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문재인 대통령은 분명 차이가 드러나네. 문재인 대통령의 정책지향을 보면, 대단히 이념적이고, 경직적이네. 그리고 한번 집착하면 바꿀 줄 모르네. 문재인 정권의 정책 실패의 대부분이 바로 여기서 비롯되네. 정책 중 많은 것이 때 지난, 정제(精製)되지 않은 이념에서 비롯되었는데,  나는 그 때마다 586의 운동권의 강한 입김을 의식할 때가 많네. 실제로 많은 이가 궁금해 하는 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이러한 정치행태가 (우리가 몰랐던) 그의 본래의 모습인지, 아니면 그가 586 운동권의 포획되어 그들에게 끌려가기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네. 만약 그것이 주로 운동권의 영향력 때문이라면, 1980년대에 시작한 급진 학생운동권의 철지난 세계관이 아직도 한국 정치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게 아닌지.

 

J: 조국 전 장관이 국회 청문회에서 였던가요?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칭하더군요. 누구나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 사상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 자체는 문제가 아닌데, 국가 경영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사회주의를 동경한다는 것은 역시 큰 문제라고 봅니다. 게다가 NL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거 같아서요. 친북, 친중, 시장 배척 국가주의, 반일 민족주의 같은 정서가 외교와 경제정책에 은연중 반영되어 있다는 느낌입니다. 돌이켜 보면, 후반기 노무현 대통령은 이런 경향과 단절하였고 좌파로부터 좌측 깜박이 켜고 우측으로 간다고엄청 비판을 받았고 지지기반이 붕괴되었었지요. 문정부는 좌파로부터 비판받는 일은 없게 하다 보니 지지율은 유지되는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국기가 흔들리는 거 같아요. 교수님 생각은 어떠세요?

 

: 나는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은 폭넓게 이해되어야 하고, 유럽의 사민주의도 당연히 그 안에 포함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네. 그런데 한국의 진보세력들 중 많은 이들이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를 소아병적으로  거부하면서 이를 적대시하는데, 이는 무지의 소치이네. 현대의 다원적 민주주의는 자유를 근간으로 하고 있고, 이를 부정하면 그것은 이미 민주주의가 아니네. 우리가 마땅히 자유와 더불어 추구해야 할 평등도 국가의 힘을 바탕으로 강제되어서는 안되고, 당연히 자유의 너른 품안에서 싹터야 제 빛을 발할 수 있네.

시장경제의 개념도 마찬가지네. 현대 자본주의는 사유재산제와 시장경제를 근간으로 하면서, 정부가 시장경제의 부작용을 억제하고 경제의 안정적 성장을 위해 일정부분 경제에 관여하는 혼합경제체제(mixed economic system). 현대 복지국가도 바로 그 틀 속에서 이룩된 것이네. 따라서 우리의 관심을 시장경제를 보다 공정하게 가꾸는데 쏟아야지시장경제 개념 자체를 적대시한다면 이는 시대착오적인 관점이네. 세계화 시대에 시장경제와 척을 지면서 어떻게 국가를 경영한다는 얘긴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우리 위정자들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개념과 그 현대적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네.

 

J: 문재인 정부 초기 헌법개정안 만들면서, 헌법 전문에서 자유민주주의를 빼고 그냥 민주주의만 넣고서는, 그 이유를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만이 아니라 사회민주주의도 포괄하기 위해서라고 해명한 게 기억납니다. 문 정부 사람들의 편협함과 무지함에 놀랐었습니다.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평등과 함께 부르조아 민주주의라고 비아냥 받았던 그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혁명적 공산주의자들과 치열하게 싸운 역사는 모르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척 하는 것인지.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전통 사회주의자들과 싸우면서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의 기반하에 복지국가 건설에 나섰는데, 교수님은 우리나라에 유럽식 사회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보세요. 특히 제3의 길 같이 현대화된 사민주의가 가능할까요?

 

. 내가 1980년대에 강의시간에 자주 유럽의 사민주의를 소개했던 것을 기억하나. 브란트, 크라이스키, 팔메가 주도했던 1970년대 유럽의 사민주의는 내게 하나의 경이였네. 그들의 건강하고 미래지향적 진보주의가 바로 유럽을 공산주의의 위협에서 벗어나 현대 복지국가로 전진하게 만든 추동력이었네.

나는 늘 한국의 진보세력이 보다 건강하고, 미래지향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네. 그런데 한국의 집권세력이 아직도 레트로의 수렁에 빠져 <해방공간>의 좌우대결에서 패배했던 한을 되씹으며, 기회있을 때 마다 한국 현대사를 고쳐 쓰는 데 집착하는 것을 보면, 참 딱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네. 그렇게 해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훼손되고, 그들 자신도 함께 터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정신적 기반이 약화된다면, 거기서 얻을 것이 무엇인가. 한국의 현대사, 즉 경이적 산업화와 민주화의 역사는 피땀 흘려 좌, 우가 함께 이룩한 보람찬 역사이고, 굳이 따지자면, 산업화에는 보수정권의 기여가 훨씬 더 컸지 않나. 문재인 대통령이 외국에 나가서 대우받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닌가.

나는 유럽의 진보세력인 사민주의가 추구하는 좌. 우의 이념을 초월하는 실용주의적 중도좌파노선, 이른바 3의 길은 바로 우리 진보세력이 추구해야 할 길이라고 생각하네. 독일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총리시절(2003) ‘아젠다 2010’으로 불리는 노동개혁을 포함한 총체적 국가개혁을 추진하여, 통일후유증으로 경제부진의 늪에 빠져 허덕이는 독일을 다시 일으켜 세웠던 것을 배워야 하네. 그의 개혁정치가 소속당인 사민당과 자신의 견고한 지지기반인 노동계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이루어진 것이기에 더 값진 게 아니었나. 슈뢰더는 그 여파로 2005년 선거에서 패배하고 총리직에서 물러났네. 한국의 전직 총리가, 인기와 거리가 멀지만 꼭 필요한 국가개혁과제들을 외면한 채, 거침없이 <20년 집권>을 공언하며, 권력의 영속화를 겨냥했던 것과 얼마나 큰 차이인가

자네도 알다시피, 그간 줄기차게 자기 쇄신노력을 했던 유럽의 사민주의도 요즈음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나. 그런데 아직도 '레트로'의 폐쇄회로에 갇혀 보수격파에만 온 힘을 쏟는다면, 그들은 이미 미래세력이 아니네.  

나는 이른바 586 운동권이 그들이 젊은 시절 지녔던 보다 나은 세상을 겨냥한 변화에 대한 의지와 열정, 그 순수한 '원형질'을 바탕으로 더 건강하고, 미래지향적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것을 기대하네. 그들이 스스로 변화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기득권층으로, 시대에 뒤진 <꼰대>, 패거리 싸움과 권력영속화에만 집착한다면, 한국의 진보세력의 장래는 암울하다고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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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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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윤주명 2021.07.23 09:56 Address Modify/Delete Reply

    교수님 글 잘 읽었습니다. 요즘 선거를 앞두고 당선되면 돈주겠다는 공약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요 여기에 혹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러자면 다른 후보들도 다 유사한 공약을 내걸 것같습니다. 이래도 괜찮을지 걱정이 됩니다.

  2. 이보령 2021.07.24 16:39 Address Modify/Delete Reply

    경모재는 저의 배움터입니다.
    오늘도 "586 운동권과 한국정치"에 대한 옛 제자분과의 대담을 통하여 많이 배우고 갑니다. 늘 건강 하시고 행복한 나날이 이어지기를 빕니다.

  3. 김익로 2021.07.26 00:02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부총리님!!!
    그간도 선강하시죠? 사모님도요?
    서울은 연일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려 무척 힘든 날이 지속되고 있어 걱정입니다

    제자님과의 시국에 대한 대화를 읽어보면서 부총리님께서
    처음 교육부장관님으로 오셨을 때 받은 책 중에서 "자유와 평등의 변증법"이라는
    책이 생각났어요
    그 첵 속에 정치권에 대한 비판과 제언, 그리고 통일문제, 학생운동 등에 대한 방향성 제시 등
    주옥같은 많은 내용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을 해 봅니다
    벌써 약 25여년 전의 일이 됩니다만, 그때 그 책을 읽어보면서 제게는 생소한 개념으로
    느겼던 용어 중에서 문득 기억되는 '진영의식' '제3의 정치' 초기 월남인' 후기 월남인'
    '체제의 인간화(?), '적과 동지' ~~~ 등의 표현이 생각나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어떤 부분에서였는지는 희미합니다만 ~ '윤회는 있는데 변화는 없다(?)는 표현 -
    제 생각으로는 정치 권력자들의 행태를 정곡으로 질타하신 표현이었다고 이해하고~~ 가끔 저도
    핏대올릴 때 변형하여 어설프게 써먹곤 합니다만~~~ ㅎㅎㅎ
    정치인들의 고질적인 병증인 내로남불의 또 다른 질타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정치권을 포함하여 다음세대를 위한 통일교육 및 이념문제 등에 대한
    전도사적 역활을 하셔야 겠어요
    명강사님은? 부총리님께서 맡으셔야죠?
    ㅎ~ 오늘은 제가 주제넘게 너무 나갔나요? 죄송합니다!!!

    부총리님!!!
    포토갤러리에 올리신 밝은 모습, 사진으로 뵙고도 한결 마음이 놓입니다
    늘 편안하신 마음으로 더위에 농사일 무리하시지 않으시길 소망합니다.
    늘 사모님과 함께 건강에 유의하세요!!!
    - 김익로 올림 -

I.

나는 꽤 오래전부터 성공적 국정운영의 진수(眞髓) 이어가기쌓아가기라고 주장해 왔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제 궤도에 올라 정권교체가 일상화되면, 이념과 정책기조가 달라도 앞선 정권이 이룩한 긍정적 성과는 다음 정권이 승계하고, 그 위에 새로운 성과를 덧붙여야 한다는 얘기다. 그래야 역사가 쌓이고 나라가 발전한다.

물론 때때로 과거를 점검하고, 필요하면 누적된 적폐를 청산해야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이어갈 것과 버릴 것을 세심하고 공정하게 가려야 한다. 또한 그 변화의 수위가 체제의 근간을 흔들어서는 안 되고, 지난 정권이 이룩한 긍정적 성과까지 타기()하거나 뒤집어서는 안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성공한 나라는 독일이 아닌가 한다.

역사적으로 독일의 정치사는 오랫동안 정파 간의 치열한 반목과 갈등으로 점철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실패와 반인류적 나치 정권의 폭정도 그러한 역사 속에서 잉태된 것이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주요 정당 간 적정수준의 이념 및 정책 갈등을 통해 정치적 역동성을 유지하면서, 중도지향의 협치(協治)를 통하여 주요한 국가적 아젠다에 대해 폭넓은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데 성공하였다.

이렇게 된 데는, 서독의 첫 번째 정부인 아데나워(K. Adenauer) 정부가 자유시장경제와 사회적 개입주의 간의 화해를 추구하는 일종의 중도노선인 사회적 시장경제를 표방한 데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이후 독일은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지난 정권이 거둔 업적과 성과를 슬기롭게 승계, 축적하여, 역사적 단절이나 반전 없이 명실공히 오늘의 유럽 제1국이 되었다.

이러한 체제의 이어가기쌓아가기는 특히 국가가 중대한 과제를 해결하거나 위기에 대응할 때 더욱 빛났다. ’라인강의 경제기적‘, 동서독 간의 화해와 통일, 금융위기의 성공적 극복 등이 그 대표적 예이다. 독일은 이러한 자랑스런 역사를 통하여 첫 번째 총리였던 아데나워로부터 직전 총리인 콜(H. Kohl)에 이르기까지 누구 하나 빠짐없이 독일인의 마음속 명예의 전당에 성공적인 영웅상()으로 자리하고 있다. 축출, 탄핵과 수감, 자살 등으로 얼룩진 한국의 역대 대통령상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지 않는가.

 

II.

이어가기쌓아가기가 특히 요구되는 정책분야는 거시적, 장기적 관점에 입각해야 할 외교.안보와 교육부문이 아닐까 한다. 그 대표적 성공사례가 독일의 통일정책이다. 주지하듯이 독일 통일정책의 기조는 1969년 브란트(W. Brandt)가 총리로 취임하면서 표방했던 동방정책(Ostpolitik)‘ 이후 크게 바뀌지 않았다. 총리와 연정(聯政)의 파트너가 교체되어도 정책기조는 그대로 계승되었고, 다만 상황변화에 때라 얼마간의 조율과 보정(補正)이 있었을 뿐이다. 사민당(SPD) 출신의 브란트 총리가 단초를 연 동방정책은 1989년 기민/기사연합(CDU/CSU)의 (H. Kohl) 총리에 이르러 독일통일이라는 역사적 대업을 성취하면서 그 위대한 결실을 거두었다.

브란트는 동방정책이라는 획기적인 정책변화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줄곧 서독 내 다른 정당들의 반향과 국민의 여론의 추이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였고 그들과의 공감대를 확보하는데 큰 힘을 기울였다. 아울러 서방 동맹국과의 신뢰와 지지 확보에 추호의 흐트러짐이 없었고, 무엇보다 동방정책의 진척이 동서독 관계 개선을 넘어 유럽의 평화질서 구축에 크게 기여한다는 대의를 밝히고 명분을 쌓았다.

독일통일이라는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콜 총리는 통일로 향하는 마지막 과정에서 17세 연장이자 한 때 정적이었던 브란트 전총리를 자주 만나 협의하고 자문을 구했다. 그런가 하면, 독일 통일과정에서 큰 몫을 한 겐셔(H.-D. Genscher) 외교장관은 장장 18년간 장관직에 머물면서 통일의 꽃을 피우는데 크게 기여했는데, 그는 독일의 거대 정당인 기민당도 사민당도 아닌 연정 파트너인 소수당 자민당(FDP)소속이었다. 그런데 사민당의 슈미트(H. Schmidt) 총리나 기민당의 콜 총리도 겐셔리즘(Genscherism)’이란 용어까지 탄생시킨 그의 발군의 외교적 경륜과 협상능력이 통일로 가는 여정에서 불가결의 요소라는 것을 익히 알았고, 그 때문에 그를 계속 품에 안았다. 그 뿐이 아니다. 브란트 총리의 분신으로 알려진 에곤 바(E. Bahr)는 브란트를 도와 동방정책의 핵심 개념인 <접근을 통한 변화>를 창안하며 그 실행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는데, 그 또한 브란트가 물러난 뒤에도  뒤를 이은 슈미트 총리, 콜 총리 밑에서 통일을 위한 임무를 지속적으로 수행했다. 그는 이렇듯  정권을 초월하여 독일 통일정책을 중단없이 추진함으로써, 1990년 독일통일의 대업을 이끌어내는데 큰 몫을 했다.

이렇게 볼 때, 독일통일은 정파와 이념을 넘어서 이들 모두가 함께 참여한 장엄한 합주(), ‘이어가기쌓아가기의 아름다운 결실인 것이다.

 

III.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정권이 바뀌면 새 정부는 으레 기존 정권이 추진하던 주요한 정책들을 어김없이 뒤집는다. 개별 부처 차원에서도 전직 장관이 작심하고 추진했던 핵심정책을 별다른 논의 없이 파기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정권이 바뀌기가 무섭게 느닷없이 등장한 새로운 경제정책이 기업을 비롯한 다양한 경제주체들을 혼란의 소용돌이로 몰고 가고, 교육정책의 잦은 변화가 교사와 학부모, 학생 모두의 가슴에 응어리를 남긴다. 발전을 위해 쇄신과 정책변화는 필요하다. 다만 단기적 관점, 정제(精製)되지 않은 이념이나 혹은 인기영합적 관점에서 시도되는 설익은 정책변화들, 특히 정책의 단절, 불연속, 그리고 반전이 문제다. 이들은 국가자원의 엄청난 유실과 낭비, 민생의 혼란과 결손을 가져온다.

우리의 통일정책과 그 동전의 다른 면인 외교. 안보정책도 그간 자주 바뀌었고, 적지 않은 반전도 있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정책성과가 축적되지 못하고, 국론도 자주 분열되었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남북한 간의 화해. 협력 및 평화구축 노력은, 남북한 간 높은 수준의 긴장 속에서 강경일변도로 일관하면서 통일대박’‘만을 외쳤던 박근혜식 통일. 외교정책에 비해, 한결 진일보한 모습이었고, 분명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서둘렀고, 표피적 평화와 가시적 성과에 집착하며 지나치게 북한의 눈치보기에 바빠 허둥대다 제 길을 잃었다. 그 결과 정작 우리 안보의 초미의 관심사인 북핵 및 미사일 문제나 북한 동포의 민생과 인권 문제, 그 어디서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미로에서 헤매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신 햇볕정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정치권의 보다 깊은 대화와 초당적 협력, 남남갈등의 최소화 및 국민의 공감대 형성, 그리고 미국 등 동맹국과의 빈틈 없는 공조와 국제적 다자협력체계 구축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이를 위해 보다 긴 호홉으로 국내외 정책환경의 최적화를 기하는데 최상의 본보기를 보여 준, 브란트의 동방정책 추진과정을 면밀히 참고해야 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문재인 정부는 촛불혁명의 지상명령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지난 두 보수정권에 대해 역사상 유례없는 강력한 적폐청산 작업을 감행했다. 그 결과, 보수정권의 두 대통령과 사법부 수장을 비롯한 다수의 인사들이 영어의 몸이 되었고, 이들 정권이 시행했던 많은 정책과 사업, 그리고 그와 연루된 많은 고위 공직자들이 사법적, 행정적 심판의 대상이 되었다. 앞선 보수정부의 국정운영 과정에서 각종 국정논단과 적폐가 적지 않았고 그 청산은 필요하다는데 많은 이가 공감했다. 그러나 적폐척결 기간은 가능한 한 짧아야 했고,  수위는 적절한 수준에 머물러야 했다. 그리고 그 목적과 용도는 나라의 미래를 밝히기 위한 불쏘시개이어야 했다. 그런데 철퇴를 가하는 정도가 과도하고 장기화되면, 또 그것이 정권의 이익을 위해 남용되면, 헌정체제를 구성하는 주요 제도와 기관, 그리고 정부 정책의 권위와 신뢰가 위협받게 되고, 이는 불가피하게 체제능력의 약화와 민심의 이반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바로 어긋난 적폐청산의 깊은 수렁인 것이다. 현 문재인 정부가 앓고 있는 정치적 어려움의 큰 원인이 바로 여기서 비롯되고 있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적폐청산은 자칫 재생산되기 십상이다. 그런 맥락에서 앞으로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지난 정권에 대한 과도한 적폐청산 드라이브가 반복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크다. 상상하기조차 두려운 일이 아닌가.

 

IV.

미래는 역사의 단절이나 과거의 부정으로 건설되지 않는다. 더욱이 이념적 독선이나 <All or Nothing>, <적과 동지>의 준별(峻別)은 바른 미래로 가는 길을 차단하는 최대의 장애물이다.

에곤 바는 그의 책 <독일통일의 주역 빌리 브란트를 기억하다>에서 브란트의 세계관은 이것이냐 저것이냐(Entweder-oder)’식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이것과 마찬가지로 저것도 또한(Sowohl-auch)’에 상응했다고 술회한다. 그 때문에 브란트는 종종 정치적 야유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중도주의적 세계관은 국정운영의 이어가기’, ‘쌓아가기의 바탕이며, 독일 통일정책을 성공으로 이끈 추동력이었다.

 

거듭 말하거니와 역사는 생산적 승계와 축적의 산물이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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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보령 2021.06.12 15:30 Address Modify/Delete Reply

    독일의 현대사를 논거로 국정운영의 `이어가기`, `쌓아가기`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가르쳐주신 값진 글 잘 읽었습니다. 이 글을 몇몇 카페와 카톡으로 지인들과 공유하겠습니다.

I.

작년 이맘때 한 제자가 내게 물었다. “많은 교수님들이 정년퇴직하고 연세가 많아지면 글쓰기를 멈추시는데, 선생님은 아직 글쓰는 일에 꽤 천착하시는 듯합니다. 그 주된 동인(動因)이 무엇이지요?”

순간 나는 당황했다. 글 쓰는 일이 내겐 그냥 자연스런 일상인데, 새삼 그 이유를 물으니 대답이 조금 궁색해졌다. 그래서

전에 내 스승 한 분이 학자에게는 정년이 없다라고 자주 말씀하셨는데, 대체로 그런거지. 그게 내 일생의 업()이니까라고 얼버무렸다. 그러면서

옛날처럼 글에만 매달리지는 않네. 요즘처럼 농사철에는 농사짓는 일이 주업이지. 대신 농사지으면서 생각을 많이 하지. 그게 농한기에 글 쓸 준비작업이네. 어떻든 늘 머리 속에 글을 담고 사는 것은 사실이지라고 덧붙였다.

 

II.

그리고 나는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왜 나는 글을 쓰는가? 왜 아직도 책과 논문을 쓰고, 에세이도 쓰는가? 그에 대한 내 대답은 대체로 아래와 같다.

 

첫째는 글 쓰는 일이 즐겁고 재미있기 때문이다. 글 쓴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게 내게 크게 부담이 되고 고통을 준다면 나도 글쓰기를 포기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글 쓸 때 무척 즐겁고 행복하다. 특히 글 청탁을 받거나 데드라인에 쫓기지 않으면서, 내가 진정 쓰고 싶은 글을 쓸 때는 마치 창공을 나르는 새처럼 자유롭고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오른다. 나는 이러한 희열과 충만을 다른 어떤 일에서도 찾을 수 없다.

 

둘째는 나에게 좋은 글거리가 아직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평생 학자로 살았고, 몇 년간 정부에서도 값진 경험도 쌓았다. 그리고 구미(歐美) 여러 나라에 머물면서 비교적 다양한 공부와 경험을 고르게 축적했다. 무엇보다 나는 숨 가쁘게 전개된 세계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것도 그 변화의 진폭과 심도가 극심했던 한국에서, 지난 80 평생 실로 많은 체험을 했고 나름 깊이 고뇌하며 살았다. 이 모든 삶의 역정이 내게 숱한 글거리를 마련해 주었다.

일류 요리사가 상품() 신선한 식재료 앞에서 손수 일품요리를 만들고 싶은 충동을 느끼듯이, 나도, 비록 일류는 못 되더라도, 그간 내 뇌리에 켜켜이 쌓인 이 양질의 값진 제재()들을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게 아닌가? 나는 그것을 다듬고 펼치는 것이 내게 남은 사회적 책무라고 생각한다.

 

세 번째는 글 쓰는 일이 지닌 사회적, 교육적 의미 때문이다. 나는 늘 학문적 능력이 출중한 사회과학계의 많은 선배님과 동료들이 너무 일찍 절필(絕筆)하는 것을 무척 아쉽고 안타깝게 생각해왔다. 아니 얼마간 분노했다. 학인(學人)에게 글 쓴다는 일은,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사람들이 말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듯이, 학계와 사회와 소통하는 일상적이며 최상의 방식인데, 그것을 스스로, 앞서서 접는다는 것은, 자신의 평생의 업()을 방기하고 아예 말문을 닫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여겨진다. 한 명의 우수한 학자를 키우기 위한 막대한 사회적 투자를 고려할 때, 조기(早期) 절필로 인한 사회적 자산의 손실이 얼마나 큰가. 그런 맥락에서 나는 늘 죽을 때까지 글을 쓴다는 것이 우리 학계의 사회적 풍토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내 나이가 팔순을 넘고 보니, 내 제자 교수들도 정년퇴직하는 이가 해마다 늘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 평소에 사회과학자들의 학문적 전성기는, 지적 통찰력이 성숙되는 60세 이후라고 자주 말해 왔다. 그 말은 실제로 내 자신에 대한 자기 최면이자, 채찍질이기도 했다. 비록 가까운 제자들이지만, 환갑을 훌쩍 넘은 제자들에게 계속 공부하라”, “글쓰라고 채근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내가 아직 글을 쓰는 데는, 내 스스로가 본보기가 되어야겠다는, 작은 교육적 의미가 깔려있다.

 

III,

재작년 고성 산불로 집이 전소되어 수 많은 책들과 컴퓨터에 잠겨있던 숱한 자료들을 한 순간에 잃었을 때,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좌절과 아픔을 겪었다. 고심 끝에 불탄 자리에 작은 규모로 새집을 지어, 지난 주에 입주했다.

 

이 찬란하게 아름다운 봄날에, 새집에서 새 마음으로 다시 글쓰기를 시작한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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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보령 2021.05.19 15:15 Address Modify/Delete Reply

    현강재에 올려진 글들을 다 보고 나서 "어쩌면 글을 조리 있고 매끄럽게 잘 쓰시는지?" 하는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학창 시절엔 연세춘추 기자 생활을 하셨고 교수재직 중에는 연세춘추 주간 교수를 겸임하시면서 그 어렵던 시절에 글 쓰는 일로 이념적 번뇌와 시대적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었더군요.

    왜 지금도 글을 쓰시느냐는 제자의 질문에 글을 쓰는 일이 그냥 자연스러운 일상이라고 가볍게 답하셨지만, 이 글에서 밝히신 아직도 글을 쓰는 이유를 보니 더욱 존경스럽습니다.

    특히 세 번째 이유로 든 사회적, 교육적 의미 때문에 붓을 접을 수 없으며 후배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야겠다는 말씀에 고개가 숙어집니다.

    좋은 글 많이 써 주시고 늘 건강과 행복이 함께 하기를 빕니다.

  2. 양재진 2021.05.27 00:23 Address Modify/Delete Reply

    교수님...저도 그렇게 할게요. 좋은 글 오래오래 쓰시게 늘 건강하세요.

  3. 제자 2021.06.03 13:19 Address Modify/Delete Reply

    교수님 정말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글쓰기는 무궁무진한 예술과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매년 새로운 미술작품과 새로운 음악을 접하며 감탄하듯 신선한 글들을 보는 것이 무척 즐겁습니다.

  4. 서남수 2021.06.05 10:46 Address Modify/Delete Reply

    아름다운 새 집 입주를 축하드립니다! 이번 여름에 집 구경가도 되겠지요?

I.

1994년 7월 중순 한여름 오후, 나는 스웨덴의 스톡홀름의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스톡홀름 대학의 한 교수와 약속시간에 여유가 생겨 한가한 마음으로 거리 산책에 나섰던 길이다. 그런데 멀리서 내 쪽으로 다가오는 모자(母子)의 모습이 보였다. 중년의 서양 여성이 대여섯 살 쯤 되어 보이는 남자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오는데, 멀리서 보아도 그 애가 영락없는 한국 아이였다. 순간 나는 그 애가 스웨덴에 입양된 한국 아이라고 직감했다.

 

그들은 미쳐 나를 보지 못한 가운데, 아이가 엄마에게 종알종알 즐겁게 얘기를 건네며 내게 가까이 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들과 나의 간격이 한 열 발쯤 가까워졌을 때 모자가 동시에 나를 보고 흠찟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나는 그들에게 조용히 미소를 보냈다. 그러자 아이는 잠시 발걸음을 멈춘 채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고, 엄마는 자못 긴장한 낯빛으로 내게 얼마간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 나는 착잡한 심경으로 미소를 거두었다. 잠시 후, 서로가 엇갈리는 지점에 이르자, 그 서양 엄마는 내 눈빛을 애써 피하며 꼬마의 손목을 바짝 잡아채고 걸음을 재촉했다. 한시 라로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곧 서로 지나쳤다. 그리고 몇 걸음을 옮긴 뒤, 나는 하도 궁금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이는 걸음을 한껏 늦추며, 아예 고개를 뒤로 재치고 나를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고, 당황한 엄마는 얼마간 신경질적으로 아이를 가는 방향으로 계속 잡아당기고 있었다. 한마디로 아이가 엄마에 질질 끌려가는 형국이었다. 곤혹한 심경으로 나는 급히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한참 뒤에 나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제법 양측의 거리가 멀어진 그때 까지도 아이는 여전히 나를 연신 뒤돌아보며 엄마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무엇이 그 어린 아이를 그렇게 행동하게 만들었을까? 핏줄이 당겼나? 비슷한 모습의 미지의 인물에 대한 호기심인가?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나는 예민한 감성의 그 아이가 얼마 후 청소년기 질풍노도 시대에 겪게 될 정체성의 혼란이 미리 우려되어 가슴 저미는 아픔을 느꼈다.

 

II.

세계 제 2차 대전 이후, 전 세계에 입양된 아동의 수는 약 50만 명이다. 그 중 약 40%인 20만 명이 한국의 입양인이다. 가히 ‘입양아 수출국’이라는 오명을 벗어나기 어려운 형편이다. 그 중, 유럽으로 건너간 입양아가 6만을 넘고, 그 절반가량이 북유럽, 즉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3개국에 살고 있다. ‘수잔 브링크’의 나라 스웨덴의 한인 입양인도 약 1만 1000명이나 된다.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은 1991년에 개봉된 고 최진실 주연의 한국 영화로, 실존 하는 한 스웨덴 입양아의 방황을 그린 영화다.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수잔의 한국인 어머니는 생활고에 못 이겨, 네 살짜리 딸 신유숙을 눈물 속에 스웨덴으로 입양시킨다. 그 때 어머니는 딸 유숙에게 준 선물은 한복을 입은 작은 인형이었다. 스웨덴에서의 유숙의 앞날은 험난했고, 고통스러웠다. 낯선 환경과 생김새가 다른 사람들 틈에서 느끼는 소외감, 가족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무엇보다 새 엄마의 모진 학대 속에 13살 때 첫 번째 자살을 기도한다. 18세에 자립을 하게 된 유숙은 친모를 찾아 나섰지만 실패하고, 방황 속에 혼전임신과 실연 등 고통으로 점철된 나날을 보내다가, 한 스웨덴 선교사의 도움으로 친모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접한다. 딸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 온 유숙은 그토록 그리웠던 친어머니와 해후를 하고 기나긴 방황을 끝낸다.

20만 한국출생 국제입양아의 입양 이후의 삶은 각지 각색일 것이다. 개 중에는 착한 양부모의 헌신적 사랑과 배려 속에 행복한 삶의 기틀을 마련한 이들이 적지 않다. 놀랍게도 그간 프랑스에서만 두 명의 입양아 출신 장관이 탄생했다. 플레르 펠르랭(한국명 김종숙) 문화 컴뮤니케이션 장관과 장뱅상 플라세(한국명 권오복) 국가개혁 장관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가 하면, 양부모의 학대, 낮선 환경에 대한 부적응, 사회적 소외감 속에서 잘못된 길로 접어 든 이들도 무수히 많다. 어떤 경우이든, 입양아 대부분은 청소년기에 극도의 정체성혼란을 겪으며 힘겹게 인생의 고비를 넘긴다. 위에서 언급한 스잔 브링크가 친어머니를 만난 후, 국제입양을 반대하는 민권운동에 앞장 선 것도 자신의 불행했던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 때문일 것이다.

 

국제입양을 통해 새 자식을 품에 안은 양 부모들의 행태도 여러 갈래다. 적지 않은 부모들이 열린 마음으로 아이에게 모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리면서, 한국과의 태생적 인연을 소중하게 가꾸도록 세심하게 이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입양아가 한국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고 새 둥지에서 다시 출발할 것을 기대하며, 한국과의 흔적을 애써 지우기도 한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전자의 경우가 입양아들의 정체성 혼란을 줄이고 자연스런 정서적 성장을 유도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나는 그날, 스웨덴 거리에서 조우한 서양 엄마가 처음 내가 보냈던 미소에 대해 따스한 눈빛으로 화답했다면, 다가가 몇 마디 인사라고 나누고 아이의 손이라도 잡아 볼 참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나와 아이의 접촉을 크게 꺼리는 눈치여서 그럴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어쩌면, 그 서양 엄마의 반응은 그녀의 깊은 속내의 표현이라기보다, 전혀 마음이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당황한 가운데 빚어진 촌극일 수 있다. 여하튼, 그날 오래도록 나에게서 눈을 띠지 못했던 그 아이의 집착과 서양 엄마의 차가운 반응은 모두 내게 깊은 인상과 충격을 남겼다.

 

III.

그 날, 나는 혼란스러운 심경으로 스톡홀름 도심의 호텔로 돌아와 막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밖에서 소란스러운 구호와 힘찬 때창 소리가 들렸다. 나는 놀라서 창문을 열어 보니 수많은 젊은이들이 운집하여 깃발을 흔들며 열렬히 환호성을 토해내고 있었다. 놀라 프론트에 알아보니, 그날(7월 16일) 방금 전, 스웨덴이 미국 페서디나에서 열린 월드컵 준결승전에서 불가리아를 4:0으로 대파해서 흥분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이제 군중들의 숫자가 계속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분위기는 광란에 가깝게 고조될 터이니, 제대로 잠자기는 다 틀렸다고 지레 짐작했다. 그런데 웬걸, 한 시간쯤 지나자 창밖에 소요는 점점 잦아들더니, 두 시간이 가까워지자 거리는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다시 한 밤의 고요를 되찾았다. 아니 이럴 수가!

 

그날 밤, 나는 스웨덴인의 절제와 지나칠 정도의 이성적인 집단행동에 크게 놀랐다. 주지하듯이 영국이나 독일 등 유럽 여러 나라의 축구 열기, 특히 월드컵의 열풍은 가히 전설적이라 범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런데 축구 강국의 하나인 스웨덴이 1958년 자국에서 개최된 제 6회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한 후 실로 36년 만에 처음으로 3위에 올랐는데, 아무리 한밤중이라도 이 정도의 조촐한(?) 축제로 끝냈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스웨덴인은 남부 유럽은 물론, 중부 유럽세계에 비해, 감성보다 이성의 몫이 크게 작용하는 사람들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 나라는 열광적 애국주의의 정도가 전세계에서 가장 낮은 나라로 알려져 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우리가 4강에 올랐을 때, 전국을 휩쓸었던 환희와 열락의 물결과 비교해 보면, 그들의 지나칠 정도의 쿨한 성격은 가히 짐작이 가고 남을 것이다. 그 차디찬 이성이 수잔 부링크를 더 외롭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IV.

그날 밤, 나는 스톡홀름 거리에서 나를 뚫어지게 처다보던 그 어린 입양아의 놀란 눈망울이 계속 눈에 밟혀 잠을 크게 설쳤다. 우리와는 문화적 유전자가 다른 낮선 땅에서 그 어린 것이 어떻게 세상을 헤쳐 나갈지 걱정이 밀물처럼 계속 밀어 닥쳤다.

이제 그 아이도 30대 초반의 헌칠한 청년이 되었을 것이다.

 

부디, 부디 행복하기를 빈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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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보령 2021.04.29 09:41 Address Modify/Delete Reply

    1994년이면 30년이 가까워져 오는 세월인데 그날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이 글을 쓰신 걸 보면 그때 그 입양아에 대한 느낌이 얼마나 강렬했을까를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정체성 혼란을 겪어야 할 국제 입양아의 아픔을 생각해 봅니다.

    혼혈가수 인순이도 "부모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엉킨 실타래가 있었다. 엄마가 나와 동생을 입양 보내지 않고 끝까지 키워줘서 감사하다. 엄마는 엄마 나라 사람이고 아빠는 아빠 나라 사람이지만 그럼 나는?'이라는 의문과 갈등이 있었다."라며 어린 시절의 정체성 혼란의 아픔을 토로한 적이 있더군요.

    나은정보다 기른 정이란 말도 있고 아름다운 입양도 있지만, 불행한 입양, 특히 불행한 국제 입양만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2. 이강렬 2021.05.12 16:15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제 사위는 노르웨이로 입양된 한국인입니다. 30대 후반인 사위는 1살도 안되어 입양이 됐고, 제 사돈인 양부모는 사위 밑으로 여자 아이를 또 한명 입양을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사돈은 아이들은 정체성 혼란없이 반듯하게 잘 키웠습니다. 사위는 노르웨이 유수 기업에 엔지니어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위는 어릴적부터 노르웨이 친구들과 정말 잘 지내고 있고, 골목 대장 노릇을 했다고 합니다. 사돈 부부가 정말 사랑으로 잘 키웠습니다. 사돈은 한번 아이를 한국에 데리고와 친부모 찾기를 시도했고, 실패하자 사위는 깨끗이 단념했습니다. 지금도 사위는 시간만 나면 8시간을 운전해 양부모를 만나러 가고, 양부모도 시간만 나면 사위와 손주를 보려 모입니다. 저도 한국인 입양아들이 정체성 혼란으로 고통을 겪고, 잘못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기에 사위 케이스를 보며 신기하기도 했고,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교수님 글을 읽으며 가슴이 아려오네요.

  3. 현강 2021.05.15 06:11 Address Modify/Delete Reply

    이보령 이사장님과 이강렬 박사님의 말씀 모두 우리가 국제입양 문제에 접근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입양 문제는 한 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이슈라고 생각합니다. 참담했던 한국전쟁 이후 약 20년간 우리 형편이 너무 궁핍했을 때는 그 길이 불가피했을 뿐 아니라, 당사자 아동을 위해서도 구원의 손길이라는 측면이 강했었지요. 그러나 이후, 우리가 점차 살 만하게 된 이후 까지도 국제입양이 별로 줄어들지 않았다는 점은 그리 떳떳한 일이 못 될 겁니다.
    대체로 입양을 결행하는 부모들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선한 분들이고, 진정한 인간애를 실천하는 분들일 겁니다. 그러나 그분들도 세상 살아가면서, 이혼이나 가정형편의 변화 등으로 입양아들에게 최선을 다할 수 없게 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입양아들 중, 적지 않은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방황하다가 힘든 지경에 이르게 되는 듯합니다. 그러므로 이 박사님의 사위분처럼 성공적이고 아름다운 예가 있는가 하면, 수잔 브링크처럼 불행한 경우도 생기게 됩니다.
    국제입양은 보다 신중이, 그리고 사려 깊게 이루어져야 하며, 우리나라나 사회도 국제적으로 입양된 수많은 우리 형제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사랑, 그리고 가능한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I.

내가 윤동주 시인을 시를 통해 처음 만난 것은 1957년 고등학교 2학년 때다. 그 때까지 윤동주는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시인이었기에, 그에 대해 아무런 사전 지식이나 편견 없이 느끼는 그대로 그를 접할 수 있었다. 윤동주의 1955년 정음사에서 나온 증보판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는 나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순백의 시혼에 전율했다. 그의 시어(詩語)에서 전혀 때 묻지 않은 맑은 영혼을 읽을 수 있었다. 이제 온 국민의 애송시가 된 <서시>를 비롯해 <자화상>, <참회록>, <십자가>, <소년>. <별 혜는 밤>을 읽으며 식민지 지식인이 얼싸안았던 처절한 고독과 내면으로 깊게 파고드는 자아 성찰과 실존의식, 그리고 <서시>를 비롯해 그의 시 전편에 흐르는 부끄러움의 미학에 깊이 빠져 들어갔다.

 

내게 비친 윤동주는 순절에 이르는 애국혼이나 저항시인의 모습 보다는 고뇌하는 시대의 양심의 이미지에 더 가까웠다. 이후 나는 그의 삶의 궤적을 면밀히 추적하면서 그의 생각과 글과 행위, 그리고 그의 시와 삶이 놀라울 정도로 동일체화 되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런 의미에서 내 뇌리에 각인된 윤동주는 서정의 향기를 머금고 ‘참’을 지향하는 경건한 구도자(者)의 모습이었다.

 

II.

연세대 1학년 때, 교양 국어를 가르치시던 장덕순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좋아하는 시 하나씩 를 외어오라고 하셨다. 나는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열심히 암송해 갔다. 장 교수님의 호명에 따라 여러 학생들이 자신들의 애송시를 선 보였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은, 소월이나 청록파의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아니면 서정주나 정지용의 시를 즐겨 외웠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꽤나 멋 적은 표정으로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암송했더니 장 교수님이 시종 감동적인 눈빛으로 경청하시고, “자네 도대체 어떻게 윤동주를 알았나?”하시며 크게 기뻐하셨다. 장 교수님이 북간도에서 윤동주와 함께 자랐고 연희전문에서도 동문수학을 한 사실을 안 것은 그 훨씬 후의 일이다.

 

대학과 대학원 시절 또래 모임이나 쌍쌍파티 같은데서 노래를 강요당하면 나는 자주 시 낭송으로 대신했는데, 그 때 내 18번이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이었다. 돌이켜 보면 윤동주 문학은 일제의 폭압통치로 문화계가 모두 침묵, 아니면 친일해야 할 최후 암흑기에 그 찬란한 빛을 발했다. 태평양 전쟁이 터진 바로 1941년, 윤동주는 자신의 대표작 <서시>를 비롯하여 <별 헤는 밤>, <길>, <십자가>, <새벽이 올 때까지>를 보석같은 시들을 봇물처럼 쏟아냈다. 죽음을 몇 해 앞두고, 윤동주 문학의 절정기였던 그 해는 공교롭게도 내가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별 헤는 밤>은 제법 긴 시다. 내가 모임에서 그 시를 읊으면 분위기 깬다는 핀잔도 받았지만, 음률이 뛰어나서 구비 구비 음조를 달리하면서 낭송하면, 기대이상의 호의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

----

----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 옥(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 프

랑시스 장, 라이너 마리아 릴게,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나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별 헤는 밤>은 그의 다른 시들이 그렇듯이 슬프고 아름답다. 윤동주는 별 하나에 동경과 향수를 담아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짝을 맞춘다. 고향을 상실한 자의 고독과 그리움은 끝내 영원한 보금자리인 어머니를 향한다. 그러다가 마지막 구절에 이르러 묵시론적(默示論的) 암시를 한다. 나는 이 시를 낭송할 때 마다 윤동주의 슬픈 영혼이 느껴져 마지막에 이르면 조금 울컥하곤 했다.

 

III

1971년 초, 유학에서 돌아와 연세대를 찾았다가 예전에 연희전문 기숙사였던 ‘핀슨홀(현 윤동주 기념관)’ 바로 아래에 새로 건립된 <윤동주 시비>를 발견하고 기뻐서 가벼운 탄성을 올렸다. 윤동주가 육필로 쓴 <서시>가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1975년 가을, 내가 직장을 연세대로 옮기고 이듬해 바로 ‘핀슨홀’에 자리한 <연세춘추> 주간이 되었다. 고색창연한 석조건물인 ‘핀슨홀’은 1922년 연희전문학교의 기숙사로 지어졌는데, 윤동주 시인이 연전 재학시 2년여를 머물렀던 곳이다. 나는 연세춘추 주간으로 2년 가까이 일하는 동안, 한 때 윤동주가 실제 살았고 시심(詩心)을 키웠던 그 역사적 공간에서 호흡한다는 것이 무척 뿌듯하고 좋았다. 더욱이 그곳에서 나는 연세춘추가 시행하는 윤동주 문학상(시 부문)을 주관하면서 그 와의 숨은 인연을 더 깊게 다졌고, 그 과정에서 윤동주 자료 발굴에서 큰 몫을 했던 윤 시인의 실제(實弟) 윤일주(성균관대 교수 역임, 1927-1985) 교수도 만났다. 내가 머리로 그렸던 윤 시인과 모습이나 성품이 많이 닮았다.

 

IV.

1993년으로 기억되는 데, 연세대학교는 미국의 유명한 M컨설팅 회사에 의뢰해서 컨설팅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한번은 평가팀이 내가 재직하는 사회과학대학에 찾아 와 교수들에게 중간보고를 하면서 이런 저런 조언을 구했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은 연세대가 해방이후 다른 유수한 대학들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너무 적은 수의 장관들을 배출했다고 비판적으로 조명하며, 이를 앞으로 개선해야 할 주요한 포인트라고 지적했다.

분위기가 그리 딱딱하지 않기에, 그 때 내가 대체로 이렇게 속내를 피력했던 기억이다

“글쎄요. 해방이후 우리가 오랫동안 권위주의 체제에서 살았는데, 그들 정권들에 복무한 장관 숫자가 좀 적다고 너무 기죽을 이유는 없을 듯합니다. 그 대신 우리는 윤동주를 가졌잖아요. 저는 일제 강점기, 마지막 암흑기에 시대의 양심을 비췄던 윤동주 한 사람이 지닌 정신적 자산의 가치는 권위주의 시대의 수 십 명의 장관들 보다 훨씬 더 값지다고 생각 됩니다.”

나는 아직도 같은 생각이다. 만약 윤동주가 없었다면, 일제 강점기 마지막 단계의 한국 문화계의 풍경이 얼마나 초라했을까. 또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현존하는 윤동주의 마지막 작품 <쉽게 쓰여진 시> (1942년 6월 3일자)에서 그는 이렇게 조용히 절규한다.

----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 밖의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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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익로 2021.03.29 14:48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부총리님!!!
    주말동안 봄비가 내렸어요
    봄빛이 한층 짙어질 듯 합니다
    윤동주 시인에 대한 글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저도 윤동주 시인, '별 헤는 밤' 시를 무척 좋아하여
    노트에 붓으로 써놓고 자주 읽어 보기도 해요!!!ㅎㅎㅎ
    연세대와의 인연에 대한 부분은 알기 어려운 얘기들인데~~~
    동문된 입장에서 뿌듯하네요
    윤일주 교수님이시라는 분도 연세대에서 근무하셨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아요!!!
    얼마전 김형석 교수님 인터뷰 방송에서 윤동주 시인과 함께 공부하셨다는
    일화를 말씀하셨는데~~~ 한 분은 교과서에 나오시는 분이고 또 한 분은
    생존해 계신 분이라는 사실에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총리님!!!
    블로그에 자주 들리도록 하겠습니다
    늘 건강 유의하세요!!!
    김익로 올림
    김익로

  2. 현강재 현강 2021.03.31 20:03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귀하와 더불어 윤동주 형의 고결한 시혼(詩魂)을 가슴에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행복합니다.

                       I.

영국 현대사의 큰 별이었던 두 총리, 처칠(1874-1965)와 애틀리(1883-1967)는 전시에는 파트너, 그리고 평화시에는 라이벌이었다. 두 사람은 1940년부터 1955년까지 15년간 소용돌이치는 영국정치사에서, 권력을 서로 교체하며 한때는 동지로, 또 보다 더 긴 기간은 적수로 마주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시 연립내각(1940-1945)에서 처칠은 총리, 애틀리는 부총리로 함께 일했고, 전후에는 애틀리가 먼저 총리를 했고, 처칠이 그 뒤를 이었다.

전쟁의 영웅 처칠과 평화의 거인 애틀리는 당시 영국을 대표하는 보수, 노동 양대당의 지도자로서 함께 협력하고 좌절하며, 때로는 치열하게 다투었으나, 두 사람은 힘을 합쳐 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 전후 새 나라의 초석을 쌓는데 불멸의 공적을 남겼다.

 

그런데, 우리를 감동시키는 또 하나의 사실은 전쟁과 평화의 서사시의 두 주인공, 처칠과 애틀리는 평생 서로 깊게 존경하고 높게 평가하면서 참된 우정을 쌓았다는 사실이다.

 

                     II.

처칠과 애틀리는 일견해서 그 계급적인 배경, 정치관, 그리고 무엇보다 퍼스낼리티에 있어 크게 차이가 나는 대조적인 인물이다. 처칠은 카리스마가 넘치며, 모험을 즐기고, 유머러스하며, 매우 감성적인 사람이다. 그는 대중에게 영감을 부어넣는 뛰어난 웅변가이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탁월한 문필가로 영어 구사의 천재라는 평을 들었으며, 수채화에도 능했다. 처칠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시가와 중절모, 그리고 멋진 브이(V)자 제스처로 대중을 열광시켰고, 언제, 어디서나 압도적 존재감을 과시했다. 한마디로 그는 큰 구경(口徑)의 정치가였다.

이에 반해, 애틀리는 과묵하고 침착하며, 부끄럼을 크게 타며 무미건조한 성품이었다. 그는 미사여구보다 절제한 표현을 선호했다. 그의 비감성적인 연설은 평범하고 가끔은 진부하기 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전형이었다. 위기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며, 인내하고 깊게 사색 하며, 치밀하게 대안을 모색했다. 애틀리는 장기적 조망과 분석력을 겸비한 뛰어난 정책가(政策家)이자 행정의 달인이었다. 외모도 호방한 상남자인 처칠과 달리 전형적인 골샌님이었다.

처칠과 애틀리는 이러한 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적잖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두 사람은 젊었을 때 사회개혁가로서의 꿈을 지니고 있었다. 애틀리는 한때 런던의 빈민가인 이스트엔드(East End)에서 사회봉사에 헌신했고, 처칠은 30대 때 개혁지향의 자유당 정부에서 장관직을 수행하면서 영국이 복지국가의 첫걸음마를 떼는데 기여했다. 영국 복지국가의 설계자인 베버리지를 처음 정부로 끌어들인 것도 바로 처칠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똑같이 상원의 폐지를 지지하는 개혁적 면모를 보였다. 비록 당은 달랐어도, 처칠과 애틀리는 교조적 이념을 배격하고, 실용주의와 유연한 사고를 바탕으로 극단으로 과도하게 치우치지 않으며 개혁적 중도정치의 궤도를 지키려고 애썼다. 둘이 함께 했던 전시내각에서도 주요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 큰 이견이 없었던 것도 이러한 사고의 공통분모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처칠은 보수적 정치가였으나, 내면에 개혁적 열정을 지녔고, 애틀리는 그의 진보적 사상에도 불구하고, 다분히 보수적 풍미(taste, 風味)를 지닌 고전적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처칠과 애틀리는 심오한 애국심을 가졌으며, 영국의 군주제와 전통을 존중했고, 휴머니즘에 대한 투철한 의식을 지녔다. 더욱이 두 사람은 똑같이 공산주의를 단호하게 배격했고, 전후 공산주의의 세계적 팽창을 저지하는데 결연하게 앞장섰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애틀리는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과 더불어 유엔 결의를 주도하고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사들을 한국에 파견했다. 이러한 입장은 보수당의 처칠에게는 당연할 수 있으나, 연상 ‘좌 고수(左 , keep left)'를 외치는 당내 좌파의 끈질긴 반발을 극복해야 하는 애틀리로서는 실로 쉽지 않은 결단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늘 당파와 이념을 넘어 국리민복이라는 먼 지평을 응시했다.

 

                       III.

전시내각에서 처칠과 애틀리는 구국의 일념에서 정당라인을 초월하는 견고한 동반자 관계를 형성했다. 처칠은 뛰어난 리더십으로 난파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했고, 애틀리는 묵묵히 안에서 내정(內政)을 관리하며 전후 재건을 설계했다. <가디언>지는 이들의 성공적 동반자 관계에 언급하여 ‘처칠의 위대성과 애틀리의 인내’의 결과라고 평했다. 두 사람은 간혹 갈등이 있었으나, 그것이 개인적인 적대감으로까지 번지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영국정치의 전설적인 라이벌 디즈넬리와 글래드스턴과 크게 달랐다.

전쟁이 끝나자 두 사람은 다시 반대편에 섰다. 1945년 승전 2개월 만에 치러진 총선은 치열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결과는 애틀리 노동당의 대승으로 끝났다. 애틀리 부부는 패배로 마음이 상했을 처칠 부부를 크게 걱정했고, 선거가 끝나자 서둘러 처칠과 그의 부인 클레멘타인을 찾아 깊은 위로를 했다.

애틀리의 노동당 정부는 주요 기간산업의 국유화, 계획경제, 그리고 복지국가 건설로 집약되는 국정과제를 과감히, 그리고 성실히 수행하며, 현대 영국의 초석을 다졌다. 6년 뒤 권력의 추는 보수당으로 향했고, 처칠은 다시 다우닝 가의 주인이 되었다. 처칠은 애틀리가 이룩한 ‘전후 해결책(post-war settlement)’의 대부분을 대승적 관점에서 그대로 수용했다. 이렇게 마련된 이른바 영국의 ’전후 합의(post-war consensus)'는 1979년 대처리즘이 도래하기까지 전후 영국의 모든 정부들의 정책기조가 되었다. ’이어가기, 쌓아가기‘ 정치의 전범을 보인 것이다. 1955년 처칠은 다우닝가를 떠났고, 몇 달 뒤 애틀리도 20 여년간 지켰던 노동당의 리더십을 내려놓았다. 이렇게 처칠과 애틀리는 한 시대의 종언을 고했다.

 

애틀리는 영국 현대사에 끼친 그의 경이적인 업적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인이나 훗날 역사가들로부터 얼마간 과소평가되었고, 처칠이라는 초대형 정치인의 위대한 삶과 퍼스낼리티의 그늘에 묻힌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애틀리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치솟고 있다.

 

                       V.

이 두 사람이 정치마당을 떠나고 10년 뒤 1965년에 처칠이 서거했고, 그의 국장(國葬)이 거행되었다. 왕족이 아닌 시민으로서 영국 역사상 최초로 치러진 국장이었다. 구국영웅에 대한 예우였다. 그런데 운구(運柩)하는 사람들 중에 애틀리의 모습이 TV에 비쳤다. 극도로 쇠약한 몸으로 힘겹게 관의 한 귀퉁이를 들고 성바오로 대성당의 계단을 오르는 애틀리의 비틀거리는 모습을 영국 시민들은 아슬아슬한 심경으로 지켜보았다. 진한 감동의 여울이 모두의 마음을 적셨다. 애틀리는 병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생전에 처칠이 부탁했던 임무를 영광스럽게 수행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영국정치사에서 함께 한 40년의 세월, 특히 그들이 아름답게 수놓았던 전시 5년, 평화시 10년간의 깊은 신뢰와 존경의 관계는 실로 "영국정치의 연대기에서 미증유 (unprecedented in the annals of British politics)"(Leo MaKinstry)의 것이었다.

 

                        VI.

처칠과 애틀리가 함께 쓴 전쟁과 평화의 대(大) 서사시를 되돌아보며, 한국정치의 현실을 보니 가슴이 먹먹해 진다. 정녕 이 땅에서는 ‘아름다운 정치’, ’위대한 정치’는 불가능한 일인가.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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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문학의 어머니' 박완서 (1931-2011) 10주기를 맞아,

  부끄럼을 자주 타며, 그러면서도 늘 당당하고 더없이 따듯했던 그녀에게 아랫글을 바칩니다.

 

.                        I.

나는 어려서부터 부끄럼을 꽤 많이 탔다. 그래서 남들 앞에 나서기를 망설일 때가 많았고 별스럽지 않은 일에도 자주 얼굴을 붉혔다. 나이가 들면 나아지려니 했는데, 아직도 별로 나아질 기미가 없는 것을 보면 이것이 천성인 듯하다.

신문에 글은 자주 썼지만 1995년 처음 정부에 들어갈 때까지 한번도 TV나 라디오에 나간 적이 없었다. 여러 번 출연 요청이 있었으나 언제나 한 마디로 거절했다. TV 출연한다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렸고 얼굴이 달아올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TV에 자주 출연하는 다른 ‘스타 교수’들에 대해 비난하거나 질시하는 감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다만,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거니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천만다행인 것은 내가 꼭 해야 할 일을 할 때는 그 부끄럼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이다. 대학에서 강의할 때나, 학회에서 발표 할 때, 또 가끔 외부에서 특강을 할 때는 별다른 부담 없이 자연스럽게 임하곤 했다. 정부에 들어가 두 번 장관직을 수행하는 동안 수없이 TV에 출연했는데, 내심 불편한 심경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이게 내 일이다’라고 생각하니 수줍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때 수없이 대담, 토론, 특강 등에 나섰는데, 주저하는 마음이 생길 때 마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정치가였던 ‘앙드레 말로’를 떠올렸다. 말로는 드골 정권하에서 매우 성공적으로 문화상(文化相)직을 수행했는데, 당시 그는 시민과 잦은 소통을 통하여 대중의 의식 속에 정부의 문화정책을 깊숙이 심었다.  

 

그러나 정부에 있을 때도 천성적 부끄럼 증은 항상 나를 따랐다. 장관의 공식적 역할을 할 때는 멀쩡하다가도 비공식적 모임이나 사적인 어울림에서는 늘 이 병이 도지곤 했다. 장관을 하다 보면 직접 일과 연관되지 않는 외부 행사나 리셉션에 참여하는 일이 적잖은데, 그런 날이면 아침부터 마음이 불편하고 도통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특히 정치인, 재계 인사 등이 많이 참여하는 리셉션 때는 더 그랬다. 그런데 가게 되면, 별로 아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분위기에도 익숙하지 않아 주변에 잠시 머물다가 슬그머니 빠져나오곤 했다. 

장관을 그만 둔 후에는 TV 출연을 한 적이 없다. 생각만 해도 ‘부끄럽기’ 때문이다. 택시를 탔다가 기사가 우연히 내 얼굴을 기억하고 말을 걸어오면, 반갑기보다는 부끄러워 좌불안석이 된다. 이곳 속초/고성에 살며 마음 편한 것 중 하나가 여기서는 ‘익명성’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부끄러울 계기가 없기 때문이다. 

 

부끄럼을 타는 내 성격이 나를 소극적으로 만들고, 행동반경을 좁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내 스스로 그런 습성을 그리 나쁘게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부끄럼을 아는 마음을 잘 가꾸면 매우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기 때문이다.  

                             

                               II.

성격 탓인지, 나는 부끄럼을 아는 사람, 얼마간 ‘shy'한 사람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얼마 전에 돌아가신 박완서 선생님이 부끄러운 듯 짓는 수줍은 미소를 무척 좋아했다. 그 분은 팔순에도 언제나 소녀의 부끄러움을 간직하고 계셨다. 돌아가신 후, 박 선생님이 새색시 때 아기를 안고 찍으신 사진이 공개되었는데 거기에도 예의 때 묻지 않은 수줍은 미소가 빛나고 있었다. 박완서 선생님은 글이나 언행 모두 바르고 당당하셨던 분이다. 나는 그 분이 자신의 강직하고 올곧은 속내를 수줍고 따듯한 미소로 감싸고 계셨기에 더 좋아했던 것 같다. 박완서 선생님의 글,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는 그 분의 생활철학이 담긴 작품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 일으켰을 것으로 생각한다.  

 

<간디 자서전>을 보면 간디도 꽤나 부끄럼을 많이 탔던 사람이다. 영국서 공부하고 돌아와서 변호사 일을 시작했는데, 첫 변론에서 눈앞이 캄캄해 져서 아무 말도 못하고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주저앉는다. 스스로 자질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개인적 이득을 위해 다른 사람 앞에 나서는 일이 부끄럽고 떳떳치 못하다고 느꼈다. 결국 생계의 수단으로 변호사직을 하는 일을 포기했다. 그러던 그가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정책에 분노하면서, 결연히 인종차별 반대투쟁에 앞장을 선다. 공공선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천성적인 부끄러움을 극복한 것이다. 이후 그는 인도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도자로, 인도 건국의 아버지로, 그리고 금세기 마지막 성자로 보람찬 생애를 이어간다. 그의 비폭력저항운동의 근간이 되었던 ‘사티아그라타’(‘진리의 파지把持’) 정신은 ’불상해‘(不傷害), ’극기‘, ’금욕‘를 바탕으로 하는데, 나는 이 원칙들이 모두 부끄럼을 아는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간디는 자서전에서 자기가 워낙 부끄럼을 타기 때문에 유리한 점이 있는 데, 그것은 무슨 말을 할 때 그냥 내뱉지 않고 조심스럽게 되씹어 보고 말을 하기에 별로 말실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새겨 둘 만한 얘기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간디는 단순히 부끄럼을 탔던 순진한 사람이 아니라,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진리 파지’의 지렛대로 승화시켰던 위대한 사상가였다. 

 

석가는 두 가지 ‘깨끗한 법(二淨法)’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것’과 ‘남에게 부끄러워하는 것’이며, 이 두 법에 의해 세상은 보호된다고 설파하셨다. 우리는 흔히 남에게 부끄러워하는 것만을 생각하기 쉬운데,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자기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지난날을 되돌아보면서 낮 뜨거워 견디기 어렵고, 스스로 환멸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나는 스스로 부끄러워 할 줄 아는 마음은 실로 보배 같은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부끄러움이라는 잣대 없이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자기 성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III.

 

부끄러움은 우리의 피폐한 마음을 정화(淨化)시키는 위대한 힘을 갖고 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노래했던 윤동주의 시심이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것도, 바로 ‘염치’(廉恥)를 갈구하는 우리 내면의 순수한 욕구 때문이 아닐까.

 

박완서는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에서 중년여성인 화자(話者)를 통해 모처럼 찾아 온 ‘부끄러움의 통증’과 그것을 만인이 공유하고 싶은 간절한 심경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처음엔 나는 왜 내가 그 말뜻을 알아들었을까 하고 무척 미안하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몸이 더워오면서 어떤 느낌이 왔다. 아 아 그것은 부끄러움이었다. 그 느낌은 고통스럽게 왔다. 나는 마치 내 내부에 불이 켜진 듯이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나는 각종 학원의 아크릴 간판의 밀림 사이에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는 깃발을 퍼러덩 퍼러덩 휘날리고 싶다.”

                                             

 

                                       

                                                        <박완서, 새댁시절 시어머님과 함께>

                                                              < 첫 따님을 안고>                         

 

                                                   

                                                                        <영정사진> 

 



출처: https://hyungang.tistory.com/search/부끄럼에 대해 [현강재]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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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양재진 2021.02.05 16:00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부끄러움이 사라진 시대에 자신을 되돌아 보게 되네요.

  2. 이승종 2021.02.06 13:17 Address Modify/Delete Reply

    염치없이 살면서 염치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세상에 좋은 가르침 주시는 글 감사드립니다. 남 염치없는 것은 잘 알아왔는데 제가 염치없는 것 잘 몰랐던 것 새삼 돌이키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더욱 행복한 새해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3. 현강 2021.02.07 05:31 Address Modify/Delete Reply

    두 분 교수님, 제 글에 공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는 박 선생님 생전에 이런 저런 인연으로 꽤 여러 번 뵈었습니다.
    세상에는 글과 행동이 다른 작가들도 많은데, 선생님은 글 속에 당신이,
    그리고 당신 속에 글이 그대로 녹아있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부끄러움, 겸손,
    절제 속에 늘 바르고, 당당, 솔직하셨던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