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1994년 7월 중순 한여름 오후, 나는 스웨덴의 스톡홀름의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스톡홀름 대학의 한 교수와 약속시간에 여유가 생겨 한가한 마음으로 거리 산책에 나섰던 길이다. 그런데 멀리서 내 쪽으로 다가오는 모자(母子)의 모습이 보였다. 중년의 서양 여성이 대여섯 살 쯤 되어 보이는 남자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오는데, 멀리서 보아도 그 애가 영락없는 한국 아이였다. 순간 나는 그 애가 스웨덴에 입양된 한국 아이라고 직감했다.

 

그들은 미쳐 나를 보지 못한 가운데, 아이가 엄마에게 종알종알 즐겁게 얘기를 건네며 내게 가까이 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들과 나의 간격이 한 열 발쯤 가까워졌을 때 모자가 동시에 나를 보고 흠찟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나는 그들에게 조용히 미소를 보냈다. 그러자 아이는 잠시 발걸음을 멈춘 채 동고라진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고, 엄마는 자못 긴장한 낯빛으로 내게 얼마간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 나는 착잡한 심경으로 미소를 거두었다. 잠시 후, 서로가 엇갈리는 지점에 이르자, 그 서양 엄마는 내 눈빛을 애써 피하며 꼬마의 손목을 바짝 잡아채고 걸음을 재촉했다. 한시 라로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곧 서로 지나쳤다. 그리고 몇 걸음을 옮긴 뒤, 나는 하도 궁금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이는 걸음을 한껏 늦추며, 아예 고개를 뒤로 재치고 나를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고, 당황한 엄마는 얼마간 신경질적으로 아이를 가는 방향으로 계속 잡아당기고 있었다. 한마디로 아이가 엄마에 질질 끌려가는 형국이었다. 곤혹한 심경으로 나는 급이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한참 뒤에 나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제법 양측의 거리가 멀어진 그때 까지도 아이는 여전히 나를 연신 뒤돌아보며 엄마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무엇이 그 어린 아이를 그렇게 행동하게 만들었을까? 핏줄이 당겼나? 비슷한 모습의 미지의 인물에 대한 호기심인가?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나는 예민한 감성의 그 아이가 얼마 후 청소년기 질풍노도 시대에 겪게 될 정체성의 혼란이 미리 우려되어 가슴 저미는 아픔을 느꼈다.

 

II.

세계 제 2차 대전 이후, 전 세계에 입양된 아동의 수는 약 50만 명이다. 그 중 약 40%인 20만 명이 한국의 입양인이다. 가히 ‘입양아 수출국’이라는 오명을 벗어나기 어려운 형편이다. 그 중, 유럽으로 건너간 입양아가 6만을 넘고, 그 절반가량이 북유럽, 즉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3개국에 살고 있다. ‘수잔 브링크’의 나라 스웨덴의 한인 입양인도 약 1만 1000명이나 된다.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은 1991년에 개봉된 고 최진실 주연의 한국 영화로, 실존 하는 한 스웨덴 입양아의 방황을 그린 영화다.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수잔의 한국인 어머니는 생활고에 못 이겨, 네 살짜리 딸 신유숙을 눈물 속에 스웨덴으로 입양시킨다. 그 때 어머니는 딸 유숙에게 준 선물은 한복을 입은 작은 인형이었다. 스웨덴에서의 유숙의 앞날은 험난했고, 고통스러웠다. 낯선 환경과 생김새가 다른 사람들 틈에서 느끼는 소외감, 가족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무엇보다 새 엄마의 모진 학대 속에 13살 때 첫 번째 자살을 기도한다. 18세에 자립을 하게 된 유숙은 친모를 찾아 나섰지만 실패하고, 방황 속에 혼전임신과 실연 등 고통으로 점철된 나날을 보내다가, 한 스웨덴 선교사의 도움으로 친모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접한다. 딸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 온 유숙은 그토록 그리웠던 친어머니와 해후를 하고 기나긴 방황을 끝낸다.

20만 한국출생 국제입양아의 입양 이후의 삶은 각지 각색일 것이다. 개 중에는 착한 양부모의 헌신적 사랑과 배려 속에 행복한 삶의 기틀을 마련한 이들이 적지 않다. 놀랍게도 그간 프랑스에서만 두 명의 입양아 출신 장관이 탄생했다. 플레르 펠르랭(한국명 김종숙) 문화 컴뮤니케이션 장관과 장뱅상 플라세(한국명 권오복) 국가개혁 장관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가 하면, 양부모의 학대, 낮선 환경에 대한 부적응, 사회적 소외감 속에서 잘못된 길로 접어 든 이들도 무수히 많다. 어떤 경우이든, 입양아 대부분은 청소년기에 극도의 정체성혼란을 겪으며 힘겹게 인생의 고비를 넘긴다. 위에서 언급한 스잔 브링크가 친어머니를 만난 후, 국제입양을 반대하는 민권운동에 앞장 선 것도 자신의 불행했던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 때문일 것이다.

 

국제입양을 통해 새 자식을 품에 안은 양 부모들의 행태도 여러 갈래다. 적지 않은 부모들이 열린 마음으로 아이에게 모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리면서, 한국과의 태생적 인연을 소중하게 가꾸도록 세심하게 이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입양아가 한국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고 새 둥지에서 다시 출발할 것을 기대하며, 한국과의 흔적을 애써 지우기도 한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전자의 경우가 입양아들의 정체성 혼란을 줄이고 자연스런 정서적 성장을 유도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나는 그날, 스웨덴 거리에서 조우한 서양 엄마가 처음 내가 보냈던 미소에 대해 따스한 눈빛으로 화답했다면, 다가가 몇 마디 인사라고 나누고 아이의 손이라도 잡아 볼 참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나와 아이의 접촉을 크게 꺼리는 눈치여서 그럴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어쩌면, 그 서양 엄마의 반응은 그녀의 깊은 속내의 표현이라기보다, 전혀 마음이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당황한 가운데 빚어진 촌극일 수 있다. 여하튼, 그날 오래도록 나에게서 눈을 띠지 못했던 그 아이의 집착과 서양 엄마의 차가운 반응은 모두 내게 깊은 인상과 충격을 남겼다.

 

III.

그 날, 나는 혼란스러운 심경으로 스톡홀름 도심의 호텔로 돌아와 막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밖에서 소란스러운 구호와 힘찬 때창 소리가 들렸다. 나는 놀라서 창문을 열어 보니 수많은 젊은이들이 운집하여 깃발을 흔들며 열렬히 환호성을 토해내고 있었다. 놀라 프론트에 알아보니, 그날(7월 16일) 방금 전, 스웨덴이 미국 페서디나에서 열린 월드컵 준결승전에서 불가리아를 4:0으로 대파해서 흥분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이제 군중들의 숫자가 계속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분위기는 광란에 가깝게 고조될 터이니, 제대로 잠자기는 다 틀렸다고 지레 짐작했다. 그런데 웬걸, 한 시간쯤 지나자 창밖에 소요는 점점 잦아들더니, 두 시간이 가까워지자 거리는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다시 한 밤의 고요를 되찾았다. 아니 이럴 수가!

 

그날 밤, 나는 스웨덴인의 절제와 지나칠 정도의 이성적인 집단행동에 크게 놀랐다. 주지하듯이 영국이나 독일 등 유럽 여러 나라의 축구 열기, 특히 월드컵의 열풍은 가히 전설적이라 범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런데 축구 강국의 하나인 스웨덴이 1958년 자국에서 개최된 제 6회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한 후 실로 36년 만에 처음으로 3위에 올랐는데, 아무리 한밤중이라도 이 정도의 조촐한(?) 축제로 끝냈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스웨덴인은 남부 유럽은 물론, 중부 유럽세계에 비해, 감성보다 이성이 몫이 크게 작용하는 사람들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 나라는 열광적 애국주의의 정도가 전세계에서 가장 낮은 나라로 알려져 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우리가 4강에 올랐을 때, 전국을 휩쓸었던 환희와 열락의 물결과 비교해 보면, 그들의 지나칠 정도의 쿨한 성격은 가히 짐작이 가고 남을 것이다. 그 차디찬 이성이 수잔 부링크를 더 외롭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VI.

그날 밤, 나는 스톡홀름 거리에서 나를 뚫어지게 처다보던 그 어린 입양아의 놀란 눈망울이 계속 눈에 밟혀 잠을 크게 설쳤다. 우리와는 문화적 유전자가 다른 낮선 땅에서 그 어린 것이 어떻게 세상을 헤쳐 나갈지 걱정이 밀물처럼 계속 밀어 닥쳤다.

이제 그 아이도 30대 초반의 헌칠한 청년이 되었을 것이다.

 

부디, 부디 행복하기를 빈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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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보령 2021.04.29 09:41 Address Modify/Delete Reply

    1994년이면 30년이 가까워져 오는 세월인데 그날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이 글을 쓰신 걸 보면 그때 그 입양아에 대한 느낌이 얼마나 강렬했을까를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정체성 혼란을 겪어야 할 국제 입양아의 아픔을 생각해 봅니다.

    혼혈가수 인순이도 "부모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엉킨 실타래가 있었다. 엄마가 나와 동생을 입양 보내지 않고 끝까지 키워줘서 감사하다. 엄마는 엄마 나라 사람이고 아빠는 아빠 나라 사람이지만 그럼 나는?'이라는 의문과 갈등이 있었다."라며 어린 시절의 정체성 혼란의 아픔을 토로한 적이 있더군요.

    나은정보다 기른 정이란 말도 있고 아름다운 입양도 있지만, 불행한 입양, 특히 불행한 국제 입양만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2. 이강렬 2021.05.12 16:15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제 사위는 노르웨이로 입양된 한국인입니다. 30대 후반인 사위는 1살도 안되어 입양이 됐고, 제 사돈인 양부모는 사위 밑으로 여자 아이를 또 한명 입양을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사돈은 아이들은 정체성 혼란없이 반듯하게 잘 키웠습니다. 사위는 노르웨이 유수 기업에 엔지니어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위는 어릴적부터 노르웨이 친구들과 정말 잘 지내고 있고, 골목 대장 노릇을 했다고 합니다. 사돈 부부가 정말 사랑으로 잘 키웠습니다. 사돈은 한번 아이를 한국에 데리고와 친부모 찾기를 시도했고, 실패하자 사위는 깨끗이 단념했습니다. 지금도 사위는 시간만 나면 8시간을 운전해 양부모를 만나러 가고, 양부모도 시간만 나면 사위와 손주를 보려 모입니다. 저도 한국인 입양아들이 정체성 혼란으로 고통을 겪고, 잘못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기에 사위 케이스를 보며 신기하기도 했고,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교수님 글을 읽으며 가슴이 아려오네요.

I.

내가 윤동주 시인을 시를 통해 처음 만난 것은 1957년 고등학교 2학년 때다. 그 때까지 윤동주는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시인이었기에, 그에 대해 아무런 사전 지식이나 편견 없이 느끼는 그대로 그를 접할 수 있었다. 윤동주의 1955년 정음사에서 나온 증보판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는 나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순백의 시혼에 전율했다. 그의 시어(詩語)에서 전혀 때 묻지 않은 맑은 영혼을 읽을 수 있었다. 이제 온 국민의 애송시가 된 <서시>를 비롯해 <자화상>, <참회록>, <십자가>, <소년>. <별 혜는 밤>을 읽으며 식민지 지식인이 얼싸안았던 처절한 고독과 내면으로 깊게 파고드는 자아 성찰과 실존의식, 그리고 <서시>를 비롯해 그의 시 전편에 흐르는 부끄러움의 미학에 깊이 빠져 들어갔다.

 

내게 비친 윤동주는 순절에 이르는 애국혼이나 저항시인의 모습 보다는 고뇌하는 시대의 양심의 이미지에 더 가까웠다. 이후 나는 그의 삶의 궤적을 면밀히 추적하면서 그의 생각과 글과 행위, 그리고 그의 시와 삶이 놀라울 정도로 동일체화 되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런 의미에서 내 뇌리에 각인된 윤동주는 서정의 향기를 머금고 ‘참’을 지향하는 경건한 구도자(者)의 모습이었다.

 

II.

연세대 1학년 때, 교양 국어를 가르치시던 장덕순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좋아하는 시 하나씩 를 외어오라고 하셨다. 나는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열심히 암송해 갔다. 장 교수님의 호명에 따라 여러 학생들이 자신들의 애송시를 선 보였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은, 소월이나 청록파의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아니면 서정주나 정지용의 시를 즐겨 외웠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꽤나 멋 적은 표정으로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암송했더니 장 교수님이 시종 감동적인 눈빛으로 경청하시고, “자네 도대체 어떻게 윤동주를 알았나?”하시며 크게 기뻐하셨다. 장 교수님이 북간도에서 윤동주와 함께 자랐고 연희전문에서도 동문수학을 한 사실을 안 것은 그 훨씬 후의 일이다.

 

대학과 대학원 시절 또래 모임이나 쌍쌍파티 같은데서 노래를 강요당하면 나는 자주 시 낭송으로 대신했는데, 그 때 내 18번이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이었다. 돌이켜 보면 윤동주 문학은 일제의 폭압통치로 문화계가 모두 침묵, 아니면 친일해야 할 최후 암흑기에 그 찬란한 빛을 발했다. 태평양 전쟁이 터진 바로 1941년, 윤동주는 자신의 대표작 <서시>를 비롯하여 <별 헤는 밤>, <길>, <십자가>, <새벽이 올 때까지>를 보석같은 시들을 봇물처럼 쏟아냈다. 죽음을 몇 해 앞두고, 윤동주 문학의 절정기였던 그 해는 공교롭게도 내가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별 헤는 밤>은 제법 긴 시다. 내가 모임에서 그 시를 읊으면 분위기 깬다는 핀잔도 받았지만, 음률이 뛰어나서 구비 구비 음조를 달리하면서 낭송하면, 기대이상의 호의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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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 옥(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 프

랑시스 장, 라이너 마리아 릴게,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나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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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별 헤는 밤>은 그의 다른 시들이 그렇듯이 슬프고 아름답다. 윤동주는 별 하나에 동경과 향수를 담아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짝을 맞춘다. 고향을 상실한 자의 고독과 그리움은 끝내 영원한 보금자리인 어머니를 향한다. 그러다가 마지막 구절에 이르러 묵시론적(默示論的) 암시를 한다. 나는 이 시를 낭송할 때 마다 윤동주의 슬픈 영혼이 느껴져 마지막에 이르면 조금 울컥하곤 했다.

 

III

1971년 초, 유학에서 돌아와 연세대를 찾았다가 예전에 연희전문 기숙사였던 ‘핀슨홀(현 윤동주 기념관)’ 바로 아래에 새로 건립된 <윤동주 시비>를 발견하고 기뻐서 가벼운 탄성을 올렸다. 윤동주가 육필로 쓴 <서시>가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1975년 가을, 내가 직장을 연세대로 옮기고 이듬해 바로 ‘핀슨홀’에 자리한 <연세춘추> 주간이 되었다. 고색창연한 석조건물인 ‘핀슨홀’은 1922년 연희전문학교의 기숙사로 지어졌는데, 윤동주 시인이 연전 재학시 2년여를 머물렀던 곳이다. 나는 연세춘추 주간으로 2년 가까이 일하는 동안, 한 때 윤동주가 실제 살았고 시심(詩心)을 키웠던 그 역사적 공간에서 호흡한다는 것이 무척 뿌듯하고 좋았다. 더욱이 그곳에서 나는 연세춘추가 시행하는 윤동주 문학상(시 부문)을 주관하면서 그 와의 숨은 인연을 더 깊게 다졌고, 그 과정에서 윤동주 자료 발굴에서 큰 몫을 했던 윤 시인의 실제(實弟) 윤일주(성균관대 교수 역임, 1927-1985) 교수도 만났다. 내가 머리로 그렸던 윤 시인과 모습이나 성품이 많이 닮았다.

 

IV.

1993년으로 기억되는 데, 연세대학교는 미국의 유명한 M컨설팅 회사에 의뢰해서 컨설팅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한번은 평가팀이 내가 재직하는 사회과학대학에 찾아 와 교수들에게 중간보고를 하면서 이런 저런 조언을 구했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은 연세대가 해방이후 다른 유수한 대학들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너무 적은 수의 장관들을 배출했다고 비판적으로 조명하며, 이를 앞으로 개선해야 할 주요한 포인트라고 지적했다.

분위기가 그리 딱딱하지 않기에, 그 때 내가 대체로 이렇게 속내를 피력했던 기억이다

“글쎄요. 해방이후 우리가 오랫동안 권위주의 체제에서 살았는데, 그들 정권들에 복무한 장관 숫자가 좀 적다고 너무 기죽을 이유는 없을 듯합니다. 그 대신 우리는 윤동주를 가졌잖아요. 저는 일제 강점기, 마지막 암흑기에 시대의 양심을 비췄던 윤동주 한 사람이 지닌 정신적 자산의 가치는 권위주의 시대의 수 십 명의 장관들 보다 훨씬 더 값지다고 생각 됩니다.”

나는 아직도 같은 생각이다. 만약 윤동주가 없었다면, 일제 강점기 마지막 단계의 한국 문화계의 풍경이 얼마나 초라했을까. 또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현존하는 윤동주의 마지막 작품 <쉽게 쓰여진 시> (1942년 6월 3일자)에서 그는 이렇게 조용히 절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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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 밖의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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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익로 2021.03.29 14:48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부총리님!!!
    주말동안 봄비가 내렸어요
    봄빛이 한층 짙어질 듯 합니다
    윤동주 시인에 대한 글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저도 윤동주 시인, '별 헤는 밤' 시를 무척 좋아하여
    노트에 붓으로 써놓고 자주 읽어 보기도 해요!!!ㅎㅎㅎ
    연세대와의 인연에 대한 부분은 알기 어려운 얘기들인데~~~
    동문된 입장에서 뿌듯하네요
    윤일주 교수님이시라는 분도 연세대에서 근무하셨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아요!!!
    얼마전 김형석 교수님 인터뷰 방송에서 윤동주 시인과 함께 공부하셨다는
    일화를 말씀하셨는데~~~ 한 분은 교과서에 나오시는 분이고 또 한 분은
    생존해 계신 분이라는 사실에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총리님!!!
    블로그에 자주 들리도록 하겠습니다
    늘 건강 유의하세요!!!
    김익로 올림
    김익로

  2. 현강재 현강 2021.03.31 20:03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귀하와 더불어 윤동주 형의 고결한 시혼(詩魂)을 가슴에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행복합니다.

                       I.

영국 현대사의 큰 별이었던 두 총리, 처칠(1874-1965)와 애틀리(1883-1967)는 전시에는 파트너, 그리고 평화시에는 라이벌이었다. 두 사람은 1940년부터 1955년까지 15년간 소용돌이치는 영국정치사에서, 권력을 서로 교체하며 한때는 동지로, 또 보다 더 긴 기간은 적수로 마주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시 연립내각(1940-1945)에서 처칠은 총리, 애틀리는 부총리로 함께 일했고, 전후에는 애틀리가 먼저 총리를 했고, 처칠이 그 뒤를 이었다.

전쟁의 영웅 처칠과 평화의 거인 애틀리는 당시 영국을 대표하는 보수, 노동 양대당의 지도자로서 함께 협력하고 좌절하며, 때로는 치열하게 다투었으나, 두 사람은 힘을 합쳐 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 전후 새 나라의 초석을 쌓는데 불멸의 공적을 남겼다.

 

그런데, 우리를 감동시키는 또 하나의 사실은 전쟁과 평화의 서사시의 두 주인공, 처칠과 애틀리는 평생 서로 깊게 존경하고 높게 평가하면서 참된 우정을 쌓았다는 사실이다.

 

                     II.

처칠과 애틀리는 일견해서 그 계급적인 배경, 정치관, 그리고 무엇보다 퍼스낼리티에 있어 크게 차이가 나는 대조적인 인물이다. 처칠은 카리스마가 넘치며, 모험을 즐기고, 유머러스하며, 매우 감성적인 사람이다. 그는 대중에게 영감을 부어넣는 뛰어난 웅변가이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탁월한 문필가로 영어 구사의 천재라는 평을 들었으며, 수채화에도 능했다. 처칠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시가와 중절모, 그리고 멋진 브이(V)자 제스처로 대중을 열광시켰고, 언제, 어디서나 압도적 존재감을 과시했다. 한마디로 그는 큰 구경(口徑)의 정치가였다.

이에 반해, 애틀리는 과묵하고 침착하며, 부끄럼을 크게 타며 무미건조한 성품이었다. 그는 미사여구보다 절제한 표현을 선호했다. 그의 비감성적인 연설은 평범하고 가끔은 진부하기 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전형이었다. 위기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며, 인내하고 깊게 사색 하며, 치밀하게 대안을 모색했다. 애틀리는 장기적 조망과 분석력을 겸비한 뛰어난 정책가(政策家)이자 행정의 달인이었다. 외모도 호방한 상남자인 처칠과 달리 전형적인 골샌님이었다.

처칠과 애틀리는 이러한 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적잖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두 사람은 젊었을 때 사회개혁가로서의 꿈을 지니고 있었다. 애틀리는 한때 런던의 빈민가인 이스트엔드(East End)에서 사회봉사에 헌신했고, 처칠은 30대 때 개혁지향의 자유당 정부에서 장관직을 수행하면서 영국이 복지국가의 첫걸음마를 떼는데 기여했다. 영국 복지국가의 설계자인 베버리지를 처음 정부로 끌어들인 것도 바로 처칠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똑같이 상원의 폐지를 지지하는 개혁적 면모를 보였다. 비록 당은 달랐어도, 처칠과 애틀리는 교조적 이념을 배격하고, 실용주의와 유연한 사고를 바탕으로 극단으로 과도하게 치우치지 않으며 개혁적 중도정치의 궤도를 지키려고 애썼다. 둘이 함께 했던 전시내각에서도 주요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 큰 이견이 없었던 것도 이러한 사고의 공통분모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처칠은 보수적 정치가였으나, 내면에 개혁적 열정을 지녔고, 애틀리는 그의 진보적 사상에도 불구하고, 다분히 보수적 풍미(taste, 風味)를 지닌 고전적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처칠과 애틀리는 심오한 애국심을 가졌으며, 영국의 군주제와 전통을 존중했고, 휴머니즘에 대한 투철한 의식을 지녔다. 더욱이 두 사람은 똑같이 공산주의를 단호하게 배격했고, 전후 공산주의의 세계적 팽창을 저지하는데 결연하게 앞장섰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애틀리는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과 더불어 유엔 결의를 주도하고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사들을 한국에 파견했다. 이러한 입장은 보수당의 처칠에게는 당연할 수 있으나, 연상 ‘좌 고수(左 , keep left)'를 외치는 당내 좌파의 끈질긴 반발을 극복해야 하는 애틀리로서는 실로 쉽지 않은 결단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늘 당파와 이념을 넘어 국리민복이라는 먼 지평을 응시했다.

 

                       III.

전시내각에서 처칠과 애틀리는 구국의 일념에서 정당라인을 초월하는 견고한 동반자 관계를 형성했다. 처칠은 뛰어난 리더십으로 난파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했고, 애틀리는 묵묵히 안에서 내정(內政)을 관리하며 전후 재건을 설계했다. <가디언>지는 이들의 성공적 동반자 관계에 언급하여 ‘처칠의 위대성과 애틀리의 인내’의 결과라고 평했다. 두 사람은 간혹 갈등이 있었으나, 그것이 개인적인 적대감으로까지 번지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영국정치의 전설적인 라이벌 디즈넬리와 글래드스턴과 크게 달랐다.

전쟁이 끝나자 두 사람은 다시 반대편에 섰다. 1945년 승전 2개월 만에 치러진 총선은 치열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결과는 애틀리 노동당의 대승으로 끝났다. 애틀리 부부는 패배로 마음이 상했을 처칠 부부를 크게 걱정했고, 선거가 끝나자 서둘러 처칠과 그의 부인 클레멘타인을 찾아 깊은 위로를 했다.

애틀리의 노동당 정부는 주요 기간산업의 국유화, 계획경제, 그리고 복지국가 건설로 집약되는 국정과제를 과감히, 그리고 성실히 수행하며, 현대 영국의 초석을 다졌다. 6년 뒤 권력의 추는 보수당으로 향했고, 처칠은 다시 다우닝 가의 주인이 되었다. 처칠은 애틀리가 이룩한 ‘전후 해결책(post-war settlement)’의 대부분을 대승적 관점에서 그대로 수용했다. 이렇게 마련된 이른바 영국의 ’전후 합의(post-war consensus)'는 1979년 대처리즘이 도래하기까지 전후 영국의 모든 정부들의 정책기조가 되었다. ’이어가기, 쌓아가기‘ 정치의 전범을 보인 것이다. 1955년 처칠은 다우닝가를 떠났고, 몇 달 뒤 애틀리도 20 여년간 지켰던 노동당의 리더십을 내려놓았다. 이렇게 처칠과 애틀리는 한 시대의 종언을 고했다.

 

애틀리는 영국 현대사에 끼친 그의 경이적인 업적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인이나 훗날 역사가들로부터 얼마간 과소평가되었고, 처칠이라는 초대형 정치인의 위대한 삶과 퍼스낼리티의 그늘에 묻힌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애틀리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치솟고 있다.

 

                       V.

이 두 사람이 정치마당을 떠나고 10년 뒤 1965년에 처칠이 서거했고, 그의 국장(國葬)이 거행되었다. 왕족이 아닌 시민으로서 영국 역사상 최초로 치러진 국장이었다. 구국영웅에 대한 예우였다. 그런데 운구(運柩)하는 사람들 중에 애틀리의 모습이 TV에 비쳤다. 극도로 쇠약한 몸으로 힘겹게 관의 한 귀퉁이를 들고 성바오로 대성당의 계단을 오르는 애틀리의 비틀거리는 모습을 영국 시민들은 아슬아슬한 심경으로 지켜보았다. 진한 감동의 여울이 모두의 마음을 적셨다. 애틀리는 병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생전에 처칠이 부탁했던 임무를 영광스럽게 수행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영국정치사에서 함께 한 40년의 세월, 특히 그들이 아름답게 수놓았던 전시 5년, 평화시 10년간의 깊은 신뢰와 존경의 관계는 실로 "영국정치의 연대기에서 미증유 (unprecedented in the annals of British politics)"(Leo MaKinstry)의 것이었다.

 

                        VI.

처칠과 애틀리가 함께 쓴 전쟁과 평화의 대(大) 서사시를 되돌아보며, 한국정치의 현실을 보니 가슴이 먹먹해 진다. 정녕 이 땅에서는 ‘아름다운 정치’, ’위대한 정치’는 불가능한 일인가.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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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문학의 어머니' 박완서 (1931-2011) 10주기를 맞아,

  부끄럼을 자주 타며, 그러면서도 늘 당당하고 더없이 따듯했던 그녀에게 아랫글을 바칩니다.

 

.                        I.

나는 어려서부터 부끄럼을 꽤 많이 탔다. 그래서 남들 앞에 나서기를 망설일 때가 많았고 별스럽지 않은 일에도 자주 얼굴을 붉혔다. 나이가 들면 나아지려니 했는데, 아직도 별로 나아질 기미가 없는 것을 보면 이것이 천성인 듯하다.

신문에 글은 자주 썼지만 1995년 처음 정부에 들어갈 때까지 한번도 TV나 라디오에 나간 적이 없었다. 여러 번 출연 요청이 있었으나 언제나 한 마디로 거절했다. TV 출연한다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렸고 얼굴이 달아올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TV에 자주 출연하는 다른 ‘스타 교수’들에 대해 비난하거나 질시하는 감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다만,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거니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천만다행인 것은 내가 꼭 해야 할 일을 할 때는 그 부끄럼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이다. 대학에서 강의할 때나, 학회에서 발표 할 때, 또 가끔 외부에서 특강을 할 때는 별다른 부담 없이 자연스럽게 임하곤 했다. 정부에 들어가 두 번 장관직을 수행하는 동안 수없이 TV에 출연했는데, 내심 불편한 심경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이게 내 일이다’라고 생각하니 수줍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때 수없이 대담, 토론, 특강 등에 나섰는데, 주저하는 마음이 생길 때 마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정치가였던 ‘앙드레 말로’를 떠올렸다. 말로는 드골 정권하에서 매우 성공적으로 문화상(文化相)직을 수행했는데, 당시 그는 시민과 잦은 소통을 통하여 대중의 의식 속에 정부의 문화정책을 깊숙이 심었다.  

 

그러나 정부에 있을 때도 천성적 부끄럼 증은 항상 나를 따랐다. 장관의 공식적 역할을 할 때는 멀쩡하다가도 비공식적 모임이나 사적인 어울림에서는 늘 이 병이 도지곤 했다. 장관을 하다 보면 직접 일과 연관되지 않는 외부 행사나 리셉션에 참여하는 일이 적잖은데, 그런 날이면 아침부터 마음이 불편하고 도통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특히 정치인, 재계 인사 등이 많이 참여하는 리셉션 때는 더 그랬다. 그런데 가게 되면, 별로 아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분위기에도 익숙하지 않아 주변에 잠시 머물다가 슬그머니 빠져나오곤 했다. 

장관을 그만 둔 후에는 TV 출연을 한 적이 없다. 생각만 해도 ‘부끄럽기’ 때문이다. 택시를 탔다가 기사가 우연히 내 얼굴을 기억하고 말을 걸어오면, 반갑기보다는 부끄러워 좌불안석이 된다. 이곳 속초/고성에 살며 마음 편한 것 중 하나가 여기서는 ‘익명성’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부끄러울 계기가 없기 때문이다. 

 

부끄럼을 타는 내 성격이 나를 소극적으로 만들고, 행동반경을 좁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내 스스로 그런 습성을 그리 나쁘게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부끄럼을 아는 마음을 잘 가꾸면 매우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기 때문이다.  

                             

                               II.

성격 탓인지, 나는 부끄럼을 아는 사람, 얼마간 ‘shy'한 사람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얼마 전에 돌아가신 박완서 선생님이 부끄러운 듯 짓는 수줍은 미소를 무척 좋아했다. 그 분은 팔순에도 언제나 소녀의 부끄러움을 간직하고 계셨다. 돌아가신 후, 박 선생님이 새색시 때 아기를 안고 찍으신 사진이 공개되었는데 거기에도 예의 때 묻지 않은 수줍은 미소가 빛나고 있었다. 박완서 선생님은 글이나 언행 모두 바르고 당당하셨던 분이다. 나는 그 분이 자신의 강직하고 올곧은 속내를 수줍고 따듯한 미소로 감싸고 계셨기에 더 좋아했던 것 같다. 박완서 선생님의 글,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는 그 분의 생활철학이 담긴 작품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 일으켰을 것으로 생각한다.  

 

<간디 자서전>을 보면 간디도 꽤나 부끄럼을 많이 탔던 사람이다. 영국서 공부하고 돌아와서 변호사 일을 시작했는데, 첫 변론에서 눈앞이 캄캄해 져서 아무 말도 못하고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주저앉는다. 스스로 자질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개인적 이득을 위해 다른 사람 앞에 나서는 일이 부끄럽고 떳떳치 못하다고 느꼈다. 결국 생계의 수단으로 변호사직을 하는 일을 포기했다. 그러던 그가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정책에 분노하면서, 결연히 인종차별 반대투쟁에 앞장을 선다. 공공선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천성적인 부끄러움을 극복한 것이다. 이후 그는 인도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도자로, 인도 건국의 아버지로, 그리고 금세기 마지막 성자로 보람찬 생애를 이어간다. 그의 비폭력저항운동의 근간이 되었던 ‘사티아그라타’(‘진리의 파지把持’) 정신은 ’불상해‘(不傷害), ’극기‘, ’금욕‘를 바탕으로 하는데, 나는 이 원칙들이 모두 부끄럼을 아는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간디는 자서전에서 자기가 워낙 부끄럼을 타기 때문에 유리한 점이 있는 데, 그것은 무슨 말을 할 때 그냥 내뱉지 않고 조심스럽게 되씹어 보고 말을 하기에 별로 말실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새겨 둘 만한 얘기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간디는 단순히 부끄럼을 탔던 순진한 사람이 아니라,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진리 파지’의 지렛대로 승화시켰던 위대한 사상가였다. 

 

석가는 두 가지 ‘깨끗한 법(二淨法)’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것’과 ‘남에게 부끄러워하는 것’이며, 이 두 법에 의해 세상은 보호된다고 설파하셨다. 우리는 흔히 남에게 부끄러워하는 것만을 생각하기 쉬운데,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자기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지난날을 되돌아보면서 낮 뜨거워 견디기 어렵고, 스스로 환멸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나는 스스로 부끄러워 할 줄 아는 마음은 실로 보배 같은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부끄러움이라는 잣대 없이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자기 성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III.

 

부끄러움은 우리의 피폐한 마음을 정화(淨化)시키는 위대한 힘을 갖고 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노래했던 윤동주의 시심이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것도, 바로 ‘염치’(廉恥)를 갈구하는 우리 내면의 순수한 욕구 때문이 아닐까.

 

박완서는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에서 중년여성인 화자(話者)를 통해 모처럼 찾아 온 ‘부끄러움의 통증’과 그것을 만인이 공유하고 싶은 간절한 심경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처음엔 나는 왜 내가 그 말뜻을 알아들었을까 하고 무척 미안하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몸이 더워오면서 어떤 느낌이 왔다. 아 아 그것은 부끄러움이었다. 그 느낌은 고통스럽게 왔다. 나는 마치 내 내부에 불이 켜진 듯이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나는 각종 학원의 아크릴 간판의 밀림 사이에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는 깃발을 퍼러덩 퍼러덩 휘날리고 싶다.”

                                             

 

                                       

                                                        <박완서, 새댁시절 시어머님과 함께>

                                                              < 첫 따님을 안고>                         

 

                                                   

                                                                        <영정사진> 

 



출처: https://hyungang.tistory.com/search/부끄럼에 대해 [현강재]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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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양재진 2021.02.05 16:00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부끄러움이 사라진 시대에 자신을 되돌아 보게 되네요.

  2. 이승종 2021.02.06 13:17 Address Modify/Delete Reply

    염치없이 살면서 염치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세상에 좋은 가르침 주시는 글 감사드립니다. 남 염치없는 것은 잘 알아왔는데 제가 염치없는 것 잘 몰랐던 것 새삼 돌이키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더욱 행복한 새해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3. 현강 2021.02.07 05:31 Address Modify/Delete Reply

    두 분 교수님, 제 글에 공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는 박 선생님 생전에 이런 저런 인연으로 꽤 여러 번 뵈었습니다.
    세상에는 글과 행동이 다른 작가들도 많은데, 선생님은 글 속에 당신이,
    그리고 당신 속에 글이 그대로 녹아있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부끄러움, 겸손,
    절제 속에 늘 바르고, 당당, 솔직하셨던 분입니다.

                   I.

트롯트 열풍이 대단하다. T.V 방송국마다 토롯트 경연을 펼치고 성악, 발라드 등 다른 장르의 가수들도 이제 별로 주저하지 않고 트롯트의 세계를 기웃거린다. 서민들의 정서와 애환을 품속에 담아 그 100여년의 역사가 바로 한국의 사회사(社會史)이면서도 ‘유치’의 팻말을 떼지 못하고 뒷전에 밀렸던 트롯트가 단걸음에 실지회복(失地回復)을 했고, 트롯트 스타들이 하루아침에 줄지어 탄생했다. 트롯트의 폭발적 열기는 코로나의 질곡 속에서도 식을 줄을 모른다.

 

트롯트가 치솟는 인기의 배경에는 오랫동안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2, 3류 인생으로 살다가 일약 스타덤에 오른 몇몇 어제까지의 ‘무명가수’들의 인생 스토리텔링이 한 몫을 했다. 오랜 무명의 모진 세월을 딛고 마침내 인생역전에 성공한 그들의 인생사가 우리 마음을 촉촉이 적시고, 또 많은 이에게 희망의 불씨를 지피기 때문이다.

 

                  II.

비단 트롯트 뿐 아니라, 근래에 부쩍 늘어난 각종, 다수의 T.V 음악경연 프로그램을 보면서 세상에 가수를 꿈꾸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크게 놀랐다. 그리고 음악적 자질이 뛰어난 지망생들도 하늘의 별처럼 많다는 사실에 함께 놀랐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무명으로 출발한다. 개중에는 드물게 일찍부터 각광을 받고, 비교적 순탄하게 대가수로 성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대부분은 중도에서 좌절, 탈락, 포기하거나, 아니면 꽃 같은 세월을 무명가수로 전전하며 힘든 인생역정을 거치게 된다.

 

그런데 무명가수들의 모습도 무척 다양하다. 어떤 이는 세찬 파도에 지치고 한 맺힌 모습인데, 다른 이는 묵묵히 한길을 정진하는 구도자의 초탈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세상에 크게 알려 지지 않았지만, 그들의 작은 세계에서는 이미 높은 평가와 유명세를 타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언더그라운드의 스타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그런데 뒤늦게 무명의 설음을 디디고 스타로 입신에 성공한 사람들은 대체로 몇 가지 특징을 공유하는 것 같다. 우선 그들은 대체로 긍정적, 낙관적인 사고를 지녔고, 어려움 속에서도 꾸준히 절차탁마(切磋琢磨)를 계속해 내공을 쌓으며 자신을 가꾸어 온 사람들이다. 말하자면 늘 준비하며 때를 기다렸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러한 덕성과 능력을 지녔다고 모두 큰 가수가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실제로 많은 이는 스타가 될 수 있는 온갖 좋은 조건을 갖췄으면서, 갖가지 사회적, 개인적 이유로 인생역전에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도 무수히 많다. 아니 어쩌면 그런 경우가 대부분일지 모른다. 그래서 인간사에는 늘 짙은 그림자와 애잔한 멜로디가 함께 한다.

 

나는 새로 탄생한 토롯트 스타들 중에 장민호에 주목했다. 그는 아이돌 가수로 출발하여, 발라드, 토롯트를 전전하며 20여년 무명생활을 딛고 눈가에 잔주름이 생긴 40대 중반에 이르러 빛을 보게 된 반전인생의 주인공이다. 그런데 그는 노래도 잘하지만, 오랜 동안 겪어야 했던 무명의 설음과 풍찬노숙(風餐露宿)의 세월 속에서도 인간으로서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바른 모습을 보여 준다. 단정한 용모, 따듯하고 배려 깊은 행동거지, 진솔한 심성이 화면에 그대로 묻어났다.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미스터 토롯트 '진'에 오른 임영웅도 상대적으로 무명의 세월은 짧아도, 노래실력이나 반듯한 언행, 서정(敍情)의 깊이가 그가 그동안 얼마나 성실하게 내공을 쌓아왔나를 알려준다. 결코 쉽게 그 자리에 오른 청년이 아니다.

 

                III.

최근 트롯트 세계에서 벌어지는 풍경이, 실제로 우리 사회의 많은 영역에서 비슷한 곡조로 끊임없이 펼쳐진다. 자신의 소우주(小宇宙)에서 스타로 발돋움 하려는 수많은 젊은이들, 그 치열한 경쟁과정에서 많은 이가 일찍 포기하고 딴 길을 찾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 길목에서 머뭇거리며 늙도록 끝없이 세월을 낚는다. 과거 사법고시, 행정고시가 그 대표적 예다. 고시라는 신기루를 쫓다가 좌초한 수많은 인생, 그들의 깊은 한(恨)과 뼈를 깎는 아픔, 그들이 마주했던 ‘통곡의 벽’은 아마도 당사자 말고는 누구도 헤아리기 어려울 것이다. 또 국가적 차원에서 볼 때도, 그 과정에서 터무니없게 사라져간 인적 자원의 손실이 얼마나 클까.

 

나는 이 세상에서 펼쳐지는 온갖 ‘경연’이 보다 공정하고 투명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숨어있는 보석’들이 제대로 빠짐없이 발굴되기를 염원한다. 그리고 단계마다 적절한 ‘패자부활전’이 있어서 아깝게 탈락하는 이들에게 재기의 기회를 줄 것을 기대한다. 그리고 젊은이들의 꿈의 표적이 될 수 있는 멋진 일거리, 그냥 일자리가 아니라 그들의 꿈을 품어 줄 그런 ‘꿈자리’가 더 늘어나고, 자칫 그 꿈을 찾는 길목에서 길을 잃거나 헤매는 친구들에게 제때 적절한 길로 인도해 줄 사회적 장치가 더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요원한 얘기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전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경연에서 당장 밀린 후보자도 다음 기회를 찾거나, 아니면 다른 꿈자리를 넘볼 수 있기 때문에, 승자와 패자 간의 아스라한 격차도 줄어들고 패자가 승자를 보다 좀 더 격의 없이 축하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러면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오늘의 살벌한 경연무대가 보다 축제에 가까워 질 수 있지 않을까.

                   

               IV.

그리고 우리 사회가 오랜 무명의 세월을 떨치고 찬연한 새 운명을 개척한 극소수의 송가인, 임영웅을 환호하는데 그치지 말고, 아직 어둠 속에 묻혀있는 대다수 <무명가수>의 오늘의 삶과 그들의 내일에 대해 보다 따듯한 관심을 기울였으면 좋겠다.

솔직히 나는 최근 T.V에 펼쳐지는 많은 음악경연무대를 보면서, 그 치열한 경쟁 과정에서 연출되는 온갖 극적인 장면, 전율의 순간, 그리고 특히 승패가 엇갈리는 그 마지막 클라이막스를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이긴 자의 인간승리와 환희에 공감하기에 앞서, 패배한 자의 좌절과 아픔이 밀물처럼 가슴으로 밀려왔기 때문이다. 교수시절에도 그랬다. 내가 행정학과 교수이기 때문에 매년 행정고시가 끝나면, 많은 제자들의 희비가 갈린다. 그때 마다 나는 합격한 제자에게 짧게 축하하고, 불학격한 제자들을 길게, 그리고 깊게 위로했다. 마음은 늘 <무명가수>의 편에 있었다.

 

           V.

오늘도 언젠가 찾아 올 해뜰날을 희원하면서 고군분투하는 수많은 젊은 <무명가수>들에게 진심을 담아 따듯한 위로와 격려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내일은 정말 좋은 일이 너에게 생기면 좋겠어” (김윤아의 ‘Going home'에서).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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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경자년, 한 해가 저문다. 내가 태어난 후 여든 번째 맞는 세모(歲暮)다. 대체로 세모에는 덧없이 보낸 지나는 해에 대한 아쉬움과 새로 시작하는 한 해에 대한 희망이 함께 교차하는데, 올해에는 새해를 향한 불빛은 어득한 채, 깊은 상실감 속에서 온통 울적한 기분에 휩싸인다.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에 갇혀있는 느낌, 아니 칠흑 같은 어둠속에 침잠해 있는 무거운 심경이다.

나이 탓일까. 코로나 때문일까, 아니면 시국 탓일까. 아마 이 모든 게 다 겹쳐 증폭된 탓일 게다. 여하튼 보내는 해는 유례없이 힘겨운 한 해였다. 오죽하면 며칠 전 <타임(Time)>지가 2020년을 역대 <최악의 해>라고 정의했을까. 정말, ‘테스’형에게 “세월이 왜 이래”라고 묻고 싶은 심경이다. 할 말이 많아 글이 분명 길어질 것 같아 그 걱정부터 앞선다.

 

II.

세모에 나를 울적하게 만드는 요인들 중에 내 나이가 한 몫 하는 게 사실이다. 내일이면 여든에 하나가 더 보태질 테니, 도대체 어쩌다 이 나이가 됐나 내 스스로가 믿기 어렵다. 돌이켜 보면 내 나이 20, 30 대에는 60세 이후의 내 삶에 대해 생각조차 해 본 기억이 없다. 40대에 들어서면서 간혹 60세 이후를 머리에 떠올려 보았지만, 그냥 50대의 연장선 위에서 ‘이어지는 삶’ 정도로 생각했지, 그 나이에 짊어질 내 존재의 의미와 삶의 양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해 본 기억이 없다. 60대 내지 정년 이후의 삶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 50대에 들어서면서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그 때 내가 내린 결론은 단순했다. “서울을 떠나자, 가능하면 멀리, 그리고 보다 자연에 가깝게. 그러면서 내 마음이 가리키는 대로, 가능한 한 내 의지대로 살자”가 그것 이었다. 나의 속초/고성 행에 대해 많은 지인들이 어려운 결단이라고 했는데, 내겐 그것이 당시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내 마음속에 깊이 잠겨있던 숨은 욕구와 바람이 자연스레 현화(現化)한 것이기 때문이다.

시골 생활이 새해면 15년째 접어든다. 그 사이 나 자신은 물론 이곳 시골의 풍정도 많이 변했다. 해가 갈수록 농사짓기에 힘이 부치고, 특히 작년 큰 산불을 겪고 난 후 부터는 몸도 마음도 예전 같지 않다고 느낄 때가 많다. 기후변화도 약여(躍如)해서, 겨울이면 으레 몇 차례 찾아오던 폭설이 지난 몇 해 동안 깜깜 무소식이고, 금방 쏟아질 듯 빽빽이 밤하늘을 가득 채웠던 별들도 그 수가 눈에 띠게 줄었다. 이제 동화 같은 설국(雪國)의 풍경도 밤하늘을 보석처럼 수놓던 별들의 잔치도 점차 옛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그런가 하면 농촌의 주택이나 삶의 양식이 빠르게 현대화되어 이젠 도시와 별로 다를 게 없고, 서울 가는데 처음에는 5시간 가까이 걸렸는데, 요즈음은 2시간 반으로 크게 줄었다. 시골스러운 분위기는 점차 줄어들고, 이젠 서울 변두리쯤으로 바뀌는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의도했던 ‘탈(脫) 서울’의 벅찬 꿈은 반쯤 실패한 셈이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것은, 나를 이곳 원암리로 유인했던 집 뒤에 울창한 청정 소나무 숲이 지난 번 산불로 완전히 사라졌고, 군데군데 아직 베어가지 않은, 껍질이 반쯤 벗겨진 칙칙한 모습의 나목(裸木)들이 을씨년스럽게 줄지어 서있는 모습이다. 이 모든 게 나를 울적하게 만든다.

 

III.

세모에 내 마음을 어둡게 만드는 데 큰 몫을 한 것은 역시 코로나 19라는 희대의 국제 역병이다. 올 초까지 만해도 오늘 같은 ‘대참사’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머지않아 전 세계에 이 역병에 걸린 확진자가 1억에 이를 전망이고, 먼 나라도 옆집 드나들듯 했던 세계화 시대에 나라마다 빗장을 걸어 잠그기에 바쁘다. ‘언택트’, ‘뉴노멀’이 생활 속에 파고든지 이미 오래고, 이제 전 세계가 애타게 백신에 목을 매고 있다. 그 동안 세계대전도 경제공황도 인간을 이렇게 비참하고 왜소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이 격변과 반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는 그간 인류가 쌓아올렸던 찬란한 문명과 과학, 그리고 이성이 하염없이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음을 목도한다. 세계 일류국가인 미국이, 그리고 유럽의 선진 국가들이 오늘처럼 초라하고 같잖게 보인 적이 있었던가. 무릇 인간의 부족함을 절감하는 나날이다. 어쩌면 세계사가 코로나를 분수령으로 그 '이전 시대'와 '이후 시대'로 크게 나뉠 개연성이 없지 않다. 

우리 눈을 주변으로 돌릴 때, 무엇보다 소상공인들, 고용취약계층이 하루하루 겪어야 하는 현실적 고통과 실존의 불안은 보다 절실하다. 코로나 19라는 팬데믹이 드리운 온갖 어둠의 그림자가 그간 인간이 이웃과 약자, 그리고 자연에게 저지른 온갖 만행들, 핵무기 무한경쟁, 생태계 파괴, 이기적 욕망에의 탐닉 등이 빚어낸 업보라는 입장에 본질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그 충격과 피해가 일차적으로 우리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계층들을 향하고 있다는 아이로니에 좌절하지 않을 수 없다.

 

IV.

돌이켜 보면, 가는 해 내내 우리는 마치 아수라장과 같은 정쟁(政爭)터에서 부대끼며 살았다. 우리는 민주화가 진척되면, 정치가 안정되고 사회, 경제적으로도 더 발전하고, 민심도 더 온유해 지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이 모든 기대를 철저하게 배신하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 진영화는 이제 그 첨예화의 극을 달리고 있다. 정계는 물론, 언론계, 종교계, 시민사회, 아니 가족 사이도 좌, 우 양극으로 나뉘어 대립과 불신, 증오와 비타협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중원(中原)은 한껏 비좁아지고, 중도(中道)는 길을 잃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권력욕과 독선, 그리고 비이성과 비관용이 자리 잡았다. 정치의 세계가 날이 갈수록, 뻔뻔하고, 포악 해져서 마치 흉물스러운 괴물을 보는 것 같다. 이제 그 동네에서 국리민복, 공공선과 휴머니즘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무엇보다 정치 영역에서의 이성(理性)의 복원이 가장 시급하다. 이렇게 된 데는 권력분점과 협치를 가볍게 여기는 집권세력의 책임이 가장 크다. 그러나 야당은 물론, 다수의 시민 개개인도 이 진영화(陣營化)정치의 아수라장에서 취한 자신들의 편향된 정치행위에 대해 자성해야 할 여지가 크다. .

그런데 안타깝고, 서글픈 일은 정치 영역에서의 이성의 상실이 우리만 의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세계 강대국의  지도자들, 예컨대, 곧 자리에서 물러 날 트럼프나 푸틴도, 시진핑도, 그리고 얼마 전 그만 둔 아베도 글로벌 비전과는 아랑곳없이 예측불허의 정치공작과 눈앞의 이익에 급급 하는 저급 정치의 고수들이 아닌가. 세모에 나를 경악시킨 가장 큰 우스개는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 1호가 다름 아닌 트럼프라는 사실이다. 이처럼 우리가 눈앞의 현실에서 눈을 돌려 세계를 조망해도 그 어디에서도 희망의 불꽃은 보이지 않는다.

 

V.

쓰고 보니 넋두리로 점철된 요설(饒舌)만 늘어놓은 느낌이다. 바로 내일이면 새해인데, 한풀이 굿판을 벌리고 있는 것 같아 스스로가 부끄럽다. 그러나 한 해의 끝자락에, 바로 새해 첫날에 앞서, 허심탄회하게 요즈음 내 심경을 훌훌 털어놓고 보니 마음은 홀가분하다. 이렇게 자신이 서있는 자리를 다시 확인하고, 그것을 매개로 타인과의 교감의 발판을 마련하는 일도 그리 무의미한 일만을 아니지 않을까 여겨진다.

그러나 이 엄중한 시기에 우리가 정작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이 어둠의 심연에서 몸을 일으켜 보다 겸허한 심경으로 우리 주변에서부터 꺼져가는 작은 희망의 불씨를 하나하나 찾아 정성스레 지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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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윤주명 2021.01.02 13:44 Address Modify/Delete Reply

    교수님 글 잘 읽었습니다. 요즘처럼 어지러운 정치현실을 보면서 1980년대 교수님께서 자유민주주의의 바탕에서 여야를 아우르는 대화합의 담론을 용기있게 펼치시던 때가 그립습니다.

  2. 김항규 2021.01.03 09:36 Address Modify/Delete Reply

    2021년 늦게 새해 인사드립니다.
    새해 첫날은 잘 보내셨는지요?
    교수님은 저에게는 늘 자신있어 하시고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시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80줄에 들어서시면서 약간 의기소침해 하시는 개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게 되니 저 또한 우울해지는 기분입니다.
    교수님의 사고와 행동을 바라보며 노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늘 배워가며 흉내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올 해도 저희들에게 강건하심과, 소망을 선물해주시는 분이 되셔야 합니다.
    모쪼록 건안하십시요~~

  3. 제자 2021.01.04 09:43 Address Modify/Delete Reply

    선생님, 2021년 새해 건강하세요

  4. 현강재 현강 2021.01.10 02:48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부족한 사람과 변변찮은 글에 관심과 사랑을 안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부디 새해에 가내에 건강, 사랑, 행복이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I.
처음 청남(菁南) 선생으로부터 ‘현강(玄岡)’이라는 아호를 받고, 나는 급한 대로 옥편을 찾아보았다. 그랬더니 한자로 ‘현(玄)’은 검(붉)다, 멀다, 아득하다, 심오하다, 하늘 등의 뜻과 함께 노자. 장자의 도에 이르기 까지 실로 다양한 의미를 지녔고, ‘강(岡)’은 산등성이, 고개, 작은 산 등을 뜻했다. 쉽게 ‘아득히 보이는 작은 산’ 정도로 이해해도 그 그림이 낭만적으로 가슴에 다가왔다. 또 여기에 노장철학을 곁들여 보다 심오한 뜻을 부여해도 내 생활철학의 관점과 그리 멀지 않게 느껴져 그 철학적 무게가 크게 부담스럽지 않았다. ‘현강’이라는 음(音)또한 듣기에 그리 경박하지 않고, 다분히 진중하고, 사려 깊은, 그러면서 어딘가 결의에 찬 울림이 있어 좋았다. 그래서 무척 마음이 끌렸다. 하지만 누구에게 내 아호를 대놓고 말하기가 쑥스럽고, 부끄러워 마치 혼자 숨겨놓은 보물처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2007년 내가 정년퇴직을 하자 제자 40명이 글을 모아 내 정년기념 문집을 냈는데, 놀랍게도 그 제목이 <큰 스승 현강 안병영>이었다. 알고 보니 청남선생과 인연이 있었던 그 제자가 거기에 필자로 참여하면서 내 아호를 공개했던 것이었다.. 그 책의 출간이 내게 알리지 않은 채 진행되었기 때문에 나는 인쇄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이 책의 제목은 물론, 이 책 속에 옛날에 청남선생과 함께 찍은 사진(아래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청남 선생은 안타깝게도 그 때 뵌 후 얼마안가 타계하셨다.

  


                            II.
그때 청남선생은 설명을 곁들인 아호, ‘현강재(玄岡齋)’라는 내 서재 이름, 그리고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구절을 변용한 ‘처무위지행학불언지교 (處無爲之行學不言之敎)’를 크고, 작은 것으로 두 장을 써 보내 주셨다. 대서예가의 작품들이기 때문에 하나 같이 명품이었다. 청남선생은 서예가를 넘어 심오한 구도자의 풍모를 지녔는데, 한 때 해인사에 출가했다가 환속 후 노장사상에 크게 심취하셨던 분이다. 그가 내게 보내 주신 위의 글귀도 그의 이러한 사상적 바탕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된다.
모두 액자에 넣어 고성 내 서재에 걸어 놓았는데, 안타깝게도 아호 뜻풀이 액자와 현강재 액자, 그리고 작은 <도덕경> 액자가 모두 작년(2019) 고성 산불에 사라졌다. 그러나 다행히 큰 <도덕경> 액자는 서울집에 있었기에 화마를 피했다.

                         

                            III.
아호는 삶의 지향 내지 수양의 방법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인물에 대한 특성을 반영하기도 한다고 한다. 청남 선생이 내 아호를 지으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일단 내 아호를 내가 지향해야 할 내 삶의 지침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깊은 뜻은 알지 못하나 평소에 “있는 그대로의 자연” 내지 “자연 그대로의 삶”을 뜻하는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사상은 내게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고, 또 말년의 내 삶의 방식과 흡사해서, 청남 선생이 내 앞날을 미리 꽤 뚫어 보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래 액자는 아호에 대한 설명 글귀이다. 실물은 불에 타버렸으나 다행이 사진이 남아 있었다. 나는 한국지성사를 공부하는 제자인 안동대학교의 이병갑 교수에게 뜻풀이를 청했다.

 


내 아호는 <주역>의 58번째 중택태괘(重澤兌卦)〔태는 형통하니, 곧아야 이롭다(兌亨 利貞). 두 못이 나란히 있어 한 못이 마르면 다른 한쪽이 채워주는 형상이니, 군자는 이런 이치로 벗들과 학문을 하고 익힌다.(麗澤兌 君子以朋友講習)]에서 비롯되는데, 의역을 하면 교육활동을 통하여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줄 괘로 해석된다. 이어 아호를 해설한 글귀는 “큰 인품은 천 사람을 담고, 어진 덕성은 사해를 길하게 한다〔大盛千人, 仁吉四海.〕”는 뜻이 된다.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내용이나, 내 부족함을 채워줄 지향 목표라면,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서재에 걸어 두었던 아래의 액자도 화마에 사라졌다. 자주 올려다보며 흐뭇해 했는데 아깝기 그지없다.

 

그러나 아래의 노자 도덕경 액자는 서울에 두었기에 다행히 불길을 피했다. 백번 다행한 일이다.
이 글귀는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성인은 무위의 일을 하며, 말하지 않는 가르침을 행한다 〔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라는 구절을 변용한 것인데, 굳이 해석하자면, “무위의 행위를 하고, 불언의 가르침을 배운다〔處無爲之行, 學不言之敎〕”라는 뜻이다. 실로 금과옥조와 같은 내용이 아닌가. 


                                  IV.
이제 나는 아호를 누가 불러주지 않아도, 내 마음 속에 고이 담아 나를 바르게 세우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도구로 삼으려 한다. 그러면 더없이 유용한 삶의 지침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또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아호의 참뜻이 내 안에서 체화될 날이 오지 않을까.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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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근우 2020.12.06 15:36 Address Modify/Delete Reply

    현강 선생님,
    참 멋있는 호를 지니셨습니다.
    이글은 그런 멋있는 스토리가 있는 연유로
    한편의 아득한 아름다운 인생소설을 읽는 듯합니다.
    우리들이 너무 재미없는 삶을 살고 있구나
    하는 허전함이 항상 있는데
    아쉬움과 진한 울림이 있어 또 한번
    되돌아보게 되며 부럽습니다.

  2. 김만곤 2020.12.08 21:37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부총리님!
    부총리님의 아호에 대해 오랫동안 볼 적마다 제가 다 자랑스러웠습니다.
    부총리님은 어떻게 생각하신다 해도 이미 세상 사람들은 다 기억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멋진 호는 길이 남을 것이어서 어떤 학자는 수많은 호를 지어 자신과 견주어보지 않았을까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그 멋진 아호의 이미지처럼 늘 강건하시기 바랄 뿐입니다.

  3. 현강재 현강 2020.12.09 05:31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이 박사님, 김 교장선생님, 여기서 만나니 더 반갑군요.
    연말 잘 보내시고 새해에는 코로나 시름에서 벗어나 더욱 건강.행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I.

과거에는 문인, 학자, 예술가들은 이름 외에 별칭으로 아호(雅號)를 가졌다. 흔히 집안 어른이나, 스승 혹은 친구들이 지어서 불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아호에는 자신의 인생관, 좌우명, 출신(지), 선호 등을 담았는데, 많은 이가 2종 이상의 아호를 가졌다.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서화가인 김정희(金正喜)는 추사(秋史)를 비롯하여 완당(阮堂)ㆍ시암(詩庵)ㆍ예당(禮堂)ㆍ노과(老果) 등 200여개(일설에는 503개)를 가졌다. 단연 기록보유자가 아닐까 한다. 그런가 하면, 김소월(金素月 김정식), 김영랑(金永郎 김윤식), 이육사(李陸史 이원록), 박목월(朴木月 박영종) 등 한국의 대표 시인들은 우리에게 주로 아호로 기억되고 본명은 거의 잊혀졌다. 역시 천하의 묵객들에게는 돌림자를 따라 정해지는 본명보다 자신의 숨결이 감도는 풍아(風雅)한 아호가 제 격이 아닐까 한다

 

우남(雩南 이승만), 백범(白凡 김구), 해공(海公 신익희), 인촌(仁村 김성수), 몽양(夢陽 여운형) 등 한국 현대사의 이름있는 정치인들도, 본명 보다 아호로 불릴 때 우리에게 그 정치적 이미지가 더 선명하게 부각된다. 한글학자 주시경(한뫼), 최현배(외솔), 허웅(눈뫼)은 아호를 순수 우리말로 지어 우리의 얼을 아로새겼고, 사상가 함석헌은 아호를 씨알, 바보새로,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은 옹기로 지어, 민초(民草)를 연상케 하는 토속적 은유를 통하여 자신의 추구하는 세계관을 담았다.

 

                                    II.

 

아호가 때로는 짓궂은 유머로 혹은 풍자로 쓰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선생(1892-1968)이 하루는 가까이 지내는 정인보(鄭寅普)선생(1893-1950)를 찾아, 위락당(爲樂堂)이라는 아호를 권했고, 정인보 선생은 이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그 후 얼마 후, 가람선생이 정인보 선생을 다시 찾아 크게 웃으면서, “여보게, 자네 아호를 거꾸로 읽어보게!”라는 것이 아닌가. 거꾸로 읽으면, ‘당나귀’가 되는데, 워낙 정(鄭)씨 성(姓)이 당나귀를 뜻하기 때문에 이에 빗대어 놀려댄 것이다. 그런데 이에 못지않게 흥미로운 일은, 정인보 선생이 크게 놀림을 당하고도, 가람이 건네 준 아호 위락당에서 가운데 ‘락’ 자만 빼고, 자신의 호를 위당(爲堂)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당대의 국학의 대가, 두 분이 아호를 둘러싸고 주고받은 수 싸움이 역시  고수답지 않은가. 무엇보다 끝내 서로를  격의없이 품에 안은 그 결말이 너무 아름답다.

 

                                    III.

 

우리 앞 세대만 해도 아호를 지닌 분들이 꽤 되었던 것 같은데, 우리 세대에 이르러는 이미 아호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문인, 학자, 예술가 들 가운데 아호를 가진 사람도 드물거니와, 아호를 지녀도 누가 기억하고 불러주는 이가 별로 없어 그냥 사장(死藏)되기가 일쑤이다. 

 

나는 일찍부터 아호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그 필요성도 별로 느끼지도 않았다. 또 마음 한 구석에 아호를 갖는 것  자체가 괜히 잰체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그 때문에 따로 아호를 갖지 않았다. 그런데 약 30 년 전에 영남 제일의 서예가인 청남(菁南) 오재봉 (吳濟峰) 선생(1908-1991)께서 내게 손수 ‘현강(玄岡)’ 이라는 아호를 지어 주셨다. 내 제자 한 사람과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청남 선생은 나를 한번 만나 보신 후, 따로 청을 드리지도 않았는데, 손수 아호를 지어 내게 보내셨다. 고맙게 그지없었다. 음과 뜻 모두 내 마음에 꼭 들었다. 그래서 은밀하게 가슴에 안았다.

 

이후 10여년 지나, 이곳 속초/고성으로 온 후, 나는 새로 지은 집을 현강재로, 그리고 새로 개설한 블로그 역시 현강재라 부르면서, 은연중에 내 아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혼자 좋아서 읊조리는 수준이지, 아호를 뭇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장광설(長廣舌)하거나 많은 사람이 불러주기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IV.

그러면서 내심으로 적어도 가까운 친구나 제자 몇 명 정도는 내 아호를 기억하고 장난스레 불러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작은 기대마저 산산이 깨졌다. 내 아호가 공개된 지 10여년이 지나도 나를 현강이라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면서 나는 이미 아호의 시대는 지났다는 것을 절감했다. 보다 직설적, 직면(直面)적이고 단순화, 명료화를 지향하는 오늘의 세태에서 얼마간 여유를 가지고, 넌지시, 조금은 은밀하게, 그리고 뭔가 함축성을 지니며 은근히 다가가는 아호 접근법은 전혀 맞지 않는 게 분명하다. ‘현강재’는 그냥 안병영의 불로그 이름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안병영이라는 공식적 명칭 이외에 어찌보면 그 이름보다 더 의미 있는 인간의 총체성, 즉 그의 꿈이나 인격, 인간적 향기를 표상하는 또 하나의 의미복합체는 불필요할 뿐 아니라 세상을 복잡하게 만드는 군더더기일 뿐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불현듯 김춘수의 ‘꽃’이 연상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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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작년으로 기억된다. 속초에 사는 지인 두 분과 점심을 했다. 두 사람 다 나와 동년배로 나와 비슷한 시기에 속초/고성으로 내려와 노년을 보내는 분들이다. 이곳에서 처음 만났지만, 한국사회의 인간관계가 늘 그렇듯이 따지고 보면 친구의 친구들이고, 한국 현대사의 온갖 풍파를 함께 겪으며 동시대를 함께 살아 왔기 때문에 공통의 경험을 바탕으로 상호간에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만나면 가끔 옛 추억을 더듬으면서, 어린 아이들처럼 자주 “그랬지”, “그 때 그랬었지” 하며 맞장구를 치기도 하고, 요즘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면서 때로는 함께 기뻐하거나 감탄하고, 때로는 비분강개하거나 안타까워 할 때도 많다.

그날도 이런 저런 얘기를 꽃피우는 가운데, 그 중 한분이 느닷없이 “안 교수님, 교수님은 평생 꽃길만 걸으셨지요”라고 내게 물었다. 그러자 다른 한 분도 곧, “그렇지요. 일생 순탄하셨잖아요”라며, 거들었다. 순간 나는 얼마간 당황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분들 말씀에 내심 얼마간 반발이 느껴졌다. 그래서, “꽃길이라니요. 제 인생도 그렇게 녹록치 않았습니다” 라며 얼버무렸다.

II.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 ‘꽃길’ 질문이 계속 내 귓가에 맴돌았다. 내 지난 생애가 꽃길이었던가 아니면 가시밭길이었던가. 그러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지난날을 되돌아보았다.

'꽃길‘을 넉넉한 가운데, 여유 있게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그리고 즐기며 사는 인생여정으로 정의한다면, 나는 분명 그런 삶을 살지는 않았다. 내 생애의 대부분은 무척 힘겹고 팍팍했고, 늘 바삐 쫓기며 살았다. 세속적인 사치나 쾌락을 탐하거나 누리지도 않았고, 여유를 즐길 겨를도 없었다. 항상 숨이 목에 차있었다. 그래서 정년 이전의 내 삶을 되돌아보면 지겨울 정도로 힘들었다는 생각부터 든다. 오죽 힘겨웠으면, 20 년전 60문턱에서 내 처가, “당신, 10년 더 젊어지면 좋겠어?”라고 내게 물었을 때, 내 대답이 “아냐, 그 지겨웠던 50대를 되풀이 할 생각, 전혀 없어, 진정이야”라고 답했을까. 그런데 세속적 잣대로 볼 때, 내 50대는 대학교수로서 절정에 이르렀고, 그 사이에 2년 가까이 장관까지 지냈던 내 생애 최고의 시간이었다.

그나마 내가 얼마간 심신의 안정을 찾고 내 삶의 주인이 됐다고 느낀 것은 10여 년 전, 이곳 속초/고성으로 온 후 부터가 아닌가 한다. 그런데 타인들은 오히려 내가 이곳으로 오기 전까지의 그 숨 가쁘고 고단했던 삶의 여정을, 명문대학 교수-장관을 거쳤다는 그럴싸한 경력 때문에 ’꽃길‘로 보는 것 같다.

III.

20대 후반, 외국에서 유학을 할 때 이후 나는 하루 5시간의 수면시간을 아직도 지키고 있다. 중. 장년기에는 밤샘도 밥 먹듯 했다. 나처럼 재주 없고 능력도 부치는 사람이 무언가 이루려면, 잠을 줄여 남보다 더 일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무슨 일을 하거나 완벽을 추구했고, ‘올인’를 했다. 그러자니 삶이 고달프고 힘겨울 수밖에 없었다.

나의 이런 ‘올인’ 인생을 크게 거들어 준 것은 쾌락주의(hedonism)와는 거리가 먼 내 성벽이 아니었나 싶다. 경건주의자는 아니지만, 나는 천성이 ‘즐기는 것’, ‘누리는 것’에 대해 별로 흥미가 없다. 게다가 재주가 없어 그나마 조금 끄적이는 공부 이외에는 세상에 할 줄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골프는 물론 자동차 운전도 못하고, 바둑이나 ‘고스톱’도 할 줄 모른다. 술도 거의 안하고, 노래방도 가지 않는다. 식성이 좋아 무엇이나 잘 먹어, 미식가와는 거리가 멀다. 친구를 좋아하지만, 지나치게 어울리는 편은 아니다. 그래서 그랬던지 한번은 잘 아는 선배교수 한 분이 연민어린 눈빛으로 나를 보면서, “안 교수, 당신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살아?”라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무엇보다 나의 ‘올인’ 인생에 크게 도움을 주었던 것은 타고난 건강이었다. 평생 큰 병을 앓지 않았고, 무리를 해도 곧 회복되었다. 나이 팔십에 300평 농사를 지으며,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부모님이 내려 주신 건강 때문이 아닌가 한다.

IV.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내 생애의 대부분을 ‘내가 좋아 하는 일’, ‘잘하는 일’ 그리고 ‘보람되다고 느끼는 일’을 하며 살았다. 내 꿈이나 적성으로 볼 때, 세상에 별처럼 수많은 직업 중에 위에 세 박자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직업은 교수/학자의 길 이 유일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평생 그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이 내려주신 큰 축복이었다. 그렇다면, 필경 그게 '꽃길'이 아니었을까. 30여 년 간 교수직을 수행하면서 한 번도 그 일에 염증을 느끼거나, 가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늘 가슴이 벅찼고 자랑스러웠다. 일을 하는 과정에서 힘겹고, 고달프게 느끼고, 자주 좌절했던 것은 순전히 내 능력 부족과 과욕 때문이었지, 일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교수직은 내게 아직도 성직(聖職)의 의미를 지닌다.

두 번 정부에 참여하면서, 고뇌가 무척 컸다. 그러나 그 일을 잘하면 국리민복에 기여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내 학문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개연성 때문에 그 일에 ‘올인’했다. ‘일벌레’라는 별칭이 항상 따랐다. 한번은 퇴임하는 실장 한분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내게 건넨 말이, “장관님, 조금은 즐기면서 하십시오. 옆에서 볼 때, 마치 생사를 걸고 일을 하시는 것 같아요.”였다.

V.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해서 한국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온갖 풍파를 겪으며 나이 팔십에 이르기 까지, 그래도 내가 평생, 하고 싶은 일, 보람되다고 느끼는 일을 열심히 하며 꾸역꾸역 살아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행복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인생 황혼녘에 겪은 지난해 불난리를 포함해서, 그간에 있었던 온갖 힘겹고, 숨 가쁘고, 가슴 아팠던 어려운(그 때 그 때는 절체절명으로 느꼈던) 순간들도 내 생애의 큰 물줄기를 생각하면 얼마간 무리해서 한낮 에피소드들로  치부할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 혹시 누가 내게 다시 “꽃길만 걸으셨지요”라고 물으면, 크게 머믓거리지 않고, ''네, 그렇지요”라고 대답할 듯 하다. 물론 그 때, 묻는 이의 의도와 대답하는 내 생각은 다를 수 있겠지만, 말이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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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익로 2020.10.25 01:08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부총리님!!!
    일전에 어느 두 분으로부터 "평생 꽃길만 걸으셨지요"라는 말씀에 대하여 얼마간 내심 수궁하기
    어려웠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올리신 글을 읽어 내려가면서 조마조마했는데 ~~~ 끝이 멋집니다!!!
    분명 부총리님의 "꽃길"은 "올인" 또는 "축복"의 또 다른 이름임에 틀림없는 듯 합니다!!!
    적어도 부총리님의 치열했던 '두 번의 장관직'의 뒷면을 그 두 분을 포함한 일반 사람들은
    알지 못하니 그저 단순히 "꽃길"이라 하시겠죠?
    그러니 부총리님께서는 순간 좀 억울(?)하셨구요~~~ㅎㅎ

    부총리님, 외람되지만 제가 다시 대변해 보겠습니다


    "교수님은 평생 꽃길만 걸으셨지요"라는 어느 두 분의 말씀에
    순간 나는 조금 억울(?)했다
    나의 '빡빡했던 삶', '올인 인생'을 알기나 하오?

    그러나 가만히 다시 짚어보니
    '내가 좋아하는 일', '잘 하는 일', 그리고 '보람되다고 느끼는 일'에
    올인할 수 있었다는 것은 바로 큰 축복이지 않나!

    그럼 이 "축복"이라는 것의 또 다른 이름,
    곧 "꽃길"이 맞다
    그렇다 "꽃길", 큰 축복이고 올인 인생 맞다

    그 두 분의 말씀도 맞소이다!

  2. 현강재 현강 2020.10.25 07:53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고맙습니다. 내 심경을 헤아려 내 글을 잘 집약해 주셨습니다. 늘 신세만 지니. 이거 원!

  3. 현강재 현강 2020.10.26 03:59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위의 제 글을 읽고, 허욱 박사님이 구상 시인의 시 <꽃 자리>를 보내 주셨습니다.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를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을 맛본다"

  4. 김항규 2020.12.07 16:29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저도 골프도 못치고 노래방도 잘 안가고 술도 못먹는 그렇지만 먹는 것은 아무 것이나 잘먹는 사람입니다.
    그런 것들이 저에게 가끔은 콩플렉스로 느껴졌는데 교수님이 그러시다니 위로가 됩니다.
    하지만 저는 국궁을 배워서 매일 아침 운동겸 취미겸 즐기고 있습니다.
    그동안 학계에 중사하는 분들과만 주로 교류하다가 요즘에는 활터에서 사회의 여러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만나는 즐거움도 있습니다.
    80연세에 타고난 건강으로 잘 지내시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사람들과 교류하다보면 저의 심리 경계선을 무단으로 훌쩍 침범해들어와 일방적으로 저를 단정지어 판단해버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꽃길을 살아왔는지 여부는 정말 주관적인 평가인데 말씀이죠.

  5. 현강재 현강 2020.12.09 05:25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김 교수님, 국궁을 하신다고요. 멋진 활시위를 그려봅니다.
    년말 년시에 건. 행하게요.

                                   I.

되돌아보니, 80년 가까운 내 생애에서 8년을 조금 넘는 기간을 해외에서 보냈다. 처음 오스트리아 빈(Wien)에서 5년 남짓 유학 생활을 했고, 이후 독일 만하임(Mannheim), 미국 시라큐스(Syracuse), 그리고 캐나다 벤쿠버(Vanquver)에서 각각 1년씩 그곳 대학에 연구교수로 있었다. 이들 유럽과 북미의 여러 나라, 도시들은 저마다 삶의 양식과 지적, 문화적 특성에 차이가 있어, 거기서 보낸 세월은 내 삶을 풍성하게 하고, 공부와 생각을 여물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많은 영감과 숱한 추억을 남겼다.

영국의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해마다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를 순위를 매겨 발표하고 있다. 안전과 보건, 문화, 환경, 교육, 인프라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하여 랭킹을 정하는데, 빈이 몇 년째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고, 벤쿠버도 늘 호주의 멜버른과 더불어 최상위 2, 3위를 다툰다. 그리고 만하임 옆 도시로 내가 한때 제집 드나들 듯했던 하이델베르크도 자주 최상위권에 진입한다. 이렇듯 내가 주거환경 및 삶의 질의 관점에서 세계 최상의 도시들에서 살았던 데 대해, 뒤늦게 놀란다. 그것은 분명 하나의 행운이었다.

사정이 이럴진 데, 보기에 따라서는, 내가 의도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만 골라 마음먹고 찾아다닌 느낌 마저 준다. 사실은 전혀 그게 아닌데 말이다.

여기서는 이들 도시 중 내가 가장 오래 머물렀고, 또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빈 얘기를 하고자 한다.

 

                                    II.

빈은 참 아름다운 도시다. 풍광도 그렇고, 문화와 예술도 그렇다. 도시 면적의 절반 이상이 공원, 숲 등 녹지로 이루어져 얼마 전 세계 최고의 녹색도시로 선정되기도 했다. 알프스에서 제공되는 신선한 식수는 예부터 명성이 높아, 빈의 말()은 파리에 가면 좀처럼 물을 마시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물을 담은 물통을 따로 매달고 갔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그런가 하면 도시 곳곳이 빼어난 역사유적지이자 문화유산의 보고(寶庫)여서, 도시산책 자체가 역사기행의 의미를 지닌다. 무엇보다 이 도시의 음악과 미술, 건축, 연극 등은 그 미학적 특성과 창의성이 돋보여, 빈에서는 세계 어디서도 향유할 수 없는 최상의 문화와 예술을 일상 속에서 즐길 수 있다.

 

나는 빈에서 유학 생활을 하면서, 학문과 지식의 함양 못지않게, 격조 높은 문화와 예술에 접하고 그것을 통해 문화적 감수성을 높일 수 있었던 것을 큰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게 나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한동안 나와 기숙사에서 한방을 썼던 독일 유학생 슈미트는 빈의 문화와 예술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 빈 대학에서 이른바  문화학기’(文化學期 / Kultursemester)를 보내려고 한 학기 예정으로 왔었다. 그런데 그 기간이 턱없이 모자라 한 학기를 더 연장했다. 그는 주말이면, 으레 콘서트, 오페라, 연극을 찾거나. 미술관을 비롯한 각종 전시장과 공연장을 순회했다. 당시 빈 국립 오페라 하우스학생 입석 입장료가 우리 돈으로 단돈 몇 천원 정도였으니, 누구나 별 부담 없이 세계 최고의 오페라를 감상할 수 있었다. 이처럼 빈은 고급문화를 대중문화로 전환시키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었다. 슈미트는 유학을 마치고 독일로 돌아가면서, 내게 자기는 이제 문화인으로 거듭났고, 그것은 자신의 일생일대의 자산이 되었다고 흡족해 했다.

 

                                      III.

나는 그곳에 살면서, 특히 세기말(世紀末) 의 지성문화와 예술에 깊이 빠져있었다. 세기말, 노쇠한 합스브르크 제국은 바야흐로 황혼길에 접어드는데, 그곳에서 문화와 지성이 미증유의 황금기를 구가했다는 것은 자못 역설적이다. 빈은 그 이른바 벨 에포크’(좋았던 시절) 시대에, 루네상스 시대의 피렌체에 견줄만한,  천재들과 반항아들의 경연장이었다. 세기말 빈의 두드러진 특색은 융합과 재창조였다. 모든 예술장르와 학문분야가 서로 분리되지 않고 긴밀하게 상호 교류했고, 이 통섭과 융합의 과정을 통해 놀라운 혁신과 재창조를 이룩했다. 그 과정 속에서 그들을 지적 경계를 거침없이 넘나들며 새로운 세계를 창조했다. 기존의 전통은 파괴되거나 훼손되기보다는 새 작품 속에 녹아 들어갔고, 옛것과 새것은 절충되기보다는 융합되었다,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빈의 '카페하우스'는 바로 이러한 지적, 문화적 경계를 뛰어넘는 담론의 장이자 새 역사의 창작공간이었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 출간된 1900년 앞뒤 세기말 빈은 유럽지성사에서 감히 어떤 도시도 범접할 수 없는 독보적 자리를 차지한다, 전통의 해체와 재구성 속에서 현대적 자아를 추구했던 세기말 빈은 모더니티를 넘어 포스트모더니즘을 앞서서 형상화하고 있었다. 클림트, 실레, 코코슈카, 지테, 바그너, 브루크너, 볼프, 말러, 쇤베르크, 프로이트, 마흐, 볼츠만 등이 새 문화의 지평을 여는데 큰 몫을 했다. 오늘 많은 이가 말하는 통섭은 바로 세기말 빈 지성문화의 공통분모였다.

 

19191차대전이 끝난 후, 거대제국 합스부르크의 잔해 위에 오스트리아는 인구 7백만의 작은 나라로 다시 태어난다. 빈은 생존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약소국에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정신적 제국이었다. 나라는 나락으로 떨어졌는데, 빈은 거의 모든 학문과 예술, 지성과 문화영역에서 지적 황금기를 구가했다. 음악과 문학 및 각가지 시각 및 공연예술은 물론 의학, 심리학과 정신분석학, 논리학과 철학, 자연과학, 경제학과 법학 등 주요 학문분야 마다 고유의 학파를 형성하며 학문적 위세를 떨쳤다. 물론 거기에는 세기말 빈의 연속과 심화라는 측면이 크게 작용했다. 1930년대 초 히틀러의 침공이 있기까지 지속된 빈의 지성문화는 마치 꺼지는 불꽃이 마지막 힘을 다해 찬연한 광채를 발하는 것과 같은 신비한 힘을 지녔다.

당시 빈의 사회과학의 학문적 세계만 보아도, 빈 경제학파의 계보는 미제스, 슘페터, 하이에크로 이어졌는데, ‘기업가 정신창조적 파괴의 개념으로 경제 및 경영학의 혁신의 물결을 일으킨 슘페터는 1919년 오스트리아의 재무부장관을 지냈다. 그는 훗날 민주주의 이론을 발전시켜 정치학자로서도 대가의 경지에 이른다. 현대 경영학의 창시자 드러커도 빈에서 생장하며, 어린 시절 슘페터로부터 깊은 영감을 받았다. 그런가 하면 현대 법학의 태두, 켈젠은 법실증주의와 순수법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 일반체계이론(genral system theory, GST)의 창시자 베르탈란피, 게임이론의 대가 모르겐슈타인, 경험주의 사회학의 거장 라자스펠트도 그 시절 모두 빈 대학 교수로 활동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학제간(學際間) 연구와 혁신적 방법론을 통해 새로운 학문세계의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 빈 특유의 문화적 유전자인 융합과 재창조를 웅변적으로 실천한 학자들이다.

오스트리아의 지성사를 집필한 존스턴은 책에서 한 시대에 혁명적 영향력에서 프로이트, 후설, 비트겐슈타인, 켈젠 또는 노이라트에 버금갈 만한 철학자나 사회이론가를 배출한 나라는 없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여기서 나라이라는 도시로 바꾸어 써도 크게 다르지 않다.

 

                                      IV.

나는 빈에서 5년 남짓 살면서, 거기서 결혼을 하고, 아이 둘을 낳았다. 공부하면서 가정도 꾸려야 했기에 하루하루 정신없이 지냈다. 그러다 보니, 이 도시가 선사하는 갖가지 살기 좋은 조건들을 고르게 누리지 못했음은 물론, 내가 열망했던 빈의 정신세계 속에도 제대로 깊숙이 진입해서 그 진수(眞髓)를 파지하기보다는, 늘 그 언저리에서 맴돌다 말았다. 그래서 아직도 아쉬움이 크다. 그러나 내 찬란한 20대 후반, 5년간을 그 격조높은 정신적 공간에서 실존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큰 축복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미 반세기 저 너머, 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면,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맴돈다. 무엇보다 나는 빈에서 살면서, 고단한 삶이라 힘들었으나, 별로 불쾌했던 기억이 없다. 내가 만났던 은사, 친구, 이웃 모두가 호의적이었고, 인정이 넘쳤다. 한 마디로 그곳  사람들이 그렇게 좋았다.그래서 내게 빈은 내가 살았던 가장 좋은 사람들의 도시로 추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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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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