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단상'에 해당되는 글 167건

  1. 2020.06.28 농사예찬 (5)
  2. 2020.05.26 어쩌다 '코로나' 소동 (10)
  3. 2020.05.13 그 해 겨울, 벽난로의 낭만 (4)
  4. 2020.05.04 고성산불, 연례행사? (3)
  5. 2020.04.26 현강재의 추억
  6. 2020.04.04 바로 1년 전 오늘 (4)
  7. 2019.03.06 어느 불자의 보시(布施) 이야기(재록) (2)
  8. 2019.03.01 리스본행 야간열차
  9. 2019.02.26 마침내 스마트폰? (2)
  10. 2018.11.23 YS를 추억하며 (1)

농사예찬

삶의 단상 2020. 6. 28. 09:55 |

                                  I.

요즘 농사일이 무척 바쁘다. 새벽 동트기 전에 농터에 나가 몇 시간 일하고, 늦은 오후 햇볕이 가라앉기 시작하면 다시 일하러 나간다. 잡초 뽑고, 이제 끝물에 이른 보리수, 오디와 지금 한창인 블루베리를 딴다. 가물면 물주고, 간간이 곁가지 전지도 한다. 온통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일거리다. 그 중 많은 일이 처의 도움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들이다. 가끔 힘에 부친다고 느껴지지만, 그런대로 아직 할 만 하다.

얼마 전 딸아이가 전화로, ‘아버지, 도대체 왜 아직 농사를 지세요. 너무 힘드시잖아요. 거기서 뭐 변변히 수확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무리하실 이유가 도대체 뭐에요라고 따지며 농사를 접으라고 다그쳤다. 나는 그냥 허허 웃고 말았다.

 

                                   II.

농사일을 금전적으로 보면 밑지는 장사인 게 사실이다. 엄청난 노력과 시간을 투입하지만, 거기서 얻는 가시적 수입은 전혀 없고, 수확하는 것도 대단치 않다. 거두는 것은 전부 우리 내외가 소비하고, 남는 것은 가끔 서울 자식들에게 보낸다. 그러다 수확기에 때맞춰 손님이라도 오면 조금 싸주는 정도다. 그래도 농사지어 얻은 채소와 과일이 우리에게 요긴한 먹거리를 제공하고, 무엇보다 농사일은 나에게 일하는 재미, 시골 사는 의미를 부여하며, 내 공부에도 도움이 된다. 그래서 나는 남는 장사라고 생각한다.

 

내가 경작하는 땅은 약 300평 정도다. 그 중 채소밭이 한 30평 정도고 나머지는 모두 과수다. 우리가 아는 이름의 거의 온갖 채소는 고르게 다 심었고, 과일나무도 포스트 포디즘의 <다품종 소량생산>의 흐름에 따라 갖가지 종류가 다 있다. 다양한 과일이 초여름부터 늦가을까지 줄이어 열리는데, 그 중 가장 많이 수확하는 것이 요즘 한창인 블루베리다.

농약, 제초제는 전혀 쓰지 않고 채소밭에 비닐멀칭도 하지 않는다. 내가 농약 대신 쓰는 것은 목초액이 전부다. 말하자면 으로 농사를 짓는 셈이다. 그러자니 일이 엄청 많고, 병충해 때문에 큰 고생을 한다. 10년 이상 농사를 지었지만 제대로 모양을 갖춘 사과나 배를 따 먹어 본 기억은 없다. 대체로 바람과 새, 그리고 벌레들에게 반 이상을 헌납하고 나머지는 우리가 먹는다. 농사를 좀 아는 지인이 와서 내가 농사짓는 방식을 보고, 혀를 차며 사서 고생하는 미련 농법이라고 명명했다.

 

그런데 좀 자랑 같지만, 내 농터에는 잡초가 거의 없다. 한마디로 무척 정갈하다. 아침, 저녁 부지런히 뽑기 때문이다. 그리고 열매가 열리지 않는 나무도 병들어 찌든 나무도 수명이 다할 때까지 정성껏 열심히 가꾼다. 내 품에 들어온 나무면, 그 기여(寄與)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그리고 똑같이 소중히 다룬다. 그들도 나와 같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III.

나는 이곳 속초/고성에 오기 전에는 평생 책상머리에서, 함량 미달의 머리만 쓰며 살았다. 그러다가 몸을 부려 땀 흘려 농사를 지으면서 또 하나의 다른 세상에 눈을 떴다. 신세계의 체험이다. 그러면서 내가 마침내 균형적 삶을 살고 있다는 자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농촌생활이 내게 더할 수 없는 큰 선물을 준 것이다. 그래서 여름에는 열심히 농사짓고, 겨울에는 힘닿는 대로 글을 쓰는 삶을 택했다.

 

 아직은 농사짓는 일 자체가 내게 즐거움을 준다. 청신한 새벽공기 속에 멀리 운무에 쌓여 신비한 느낌을 주는 울산바위를 바라보며 일을 시작할 때는 늘 가슴이 설렌다. 자연 속 파묻혀 하루를 보내는 일도 내 정신세계를 맑게 한다. 온갖 잡념, 증오, 분노가 사라진다.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니, 쫓기지 않고 수확에 연연하지 않아 마음이 편하다. 그리고 스스로 땀 흘려 거둔 먹거리가 내 삶의 값진 양식이 된다는 사실이 나를 기쁘게 한다.

 

작년 고성산불로 내 삶의 기둥이었던 <현강재>가 소진된 후, 크게 좌절했던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도 바로 농사일이었다. 불탄 집의 잔해와 초토화된 주위 풍경을 보고 망연자실했던 나는 일단 서울행을 작정했지만, 결국 며칠 못 가 이곳으로 되돌아 왔다. 그 무서운 불길이 천만다행으로 우리 집 농터를 비껴갔고, 봄을 맞아 막 새싹이 돋아나는 그곳의 작물들과 나무들이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농사일은 실로 엄청난 힐링 효과가 있었다. 농터에서 일하면서 나를 무섭게 짓누르던 산불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황폐한 주위 환경에 아랑곳없이 힘차게 뻗어가는 새싹들의 아름다운 합창과 그 엄청난 생명력 속에서 나는 희망의 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IV.

농사일은 일응 육체노동에 틀림없다. 하지만 손과 몸을 부려 일하면서, 동시에 사람의 머리는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 때문에 일하면서 뇌 활동을 통해 온갖 상상력과 학습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그러므로 활용하기 따라서는 육체노동을 정신노동과 병행할 수 있다.

 

노동의 학습효과는 내가 20대 후반 외국에서 공부할 때 스스로 체득했다. 한창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던 1967년 여름 방학 때 나는 두 달 여 동안 오스트리아 린쯔(Linz)에 있는 훼스트(Voest)라는 세계적 규모의 제철공장에서 일을 한 적이 있었다. 백면서생인 내게 매우 과중한 노동이었다. 그런데 나는 철판을 나르는 일을 하면서, 일이 얼마간 익숙해지자 노동과 동시에 뇌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공부 걱정 때문에 생각해 낸 궁여지책이었다. 그러면서 그 기간 동안 학위논문의 기본 골격과 줄거리를 마련하고 주요 쟁점도 많이 정리했다. 고되게 몸을 움직이면서, 머리는 명징하게 돌아간다는 사실에 나 스스로도 크게 놀랐다. 가을 새 학기를 맞아 논문 지도교수와 상담을 하는데, 교수님이 내게 안군, 논문이 엄청나게 진척됐네. 방학 동안 도서관에서만 지냈던 모양이네,“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농사일을 하면서, 요즘도 나는 늘 뇌를 가동한다. 일상적인 상상, 공상, 심지어 망상까지 다 한다. 젊은 날의 아름다운 추억들, 옛사랑의 그림자를 더듬기도 하고, 얼마 남지 않은 내 여생을 얼마간 착잡한 마음으로 미리 내다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 중 많은 시간을 농사철이 끝난 후, 늦가을부터 쓰게 될 책과 논문에 집중한다. 비록 갖춰진 서재에서 책이나 학술자료와 더불어 하는 작업은 아니지만, 농터에서 일하며 자유롭게 하는 학습은 그 열린 시공만큼이나 천의무봉(天衣無縫)의 힘이 있다. 컴퓨터에 다가가기 전에 머리로 쓰는 글이라 다소 거칠지만, 큰 그림과 숨은 그림을 볼 수 있는 나름 야생(野生)의 특성이 있다. 그러다가 새로운 아이디어나 논리의 실마리를 찾으면 재빨리 메모를 해 둔다. 급격하게 쇠잔해 가는 기억력에 대한 대비책이다.

 

나는 농사일이 내 학문적인 활동에 손해를 끼치기보다는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여름 한 철 농사일로 단련된 몸과 그때 축적한 무수한 생각들의 조각들을 모아 겨울에 글을 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몇 년에 한 권씩 나오는 내 저작들은 여름 농사의 결실이다.

 

이렇게 볼 때, 분명 농사일은 엄청나게 남는 장사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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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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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강렬 2020.06.29 12:23 Address Modify/Delete Reply

    농사일을 하시면서 힐링하시는 것 100% 공감을 합니다. 저는 지금하고 있는 회사 일을 핑게로 8년전부터 짓던 농사일을 3년전에 잠시 접었지만 마음은 밭에 가 있습니다. 때가 되면 다시 농부가 되고 싶습니다. 분명 농사일은 어렵기는 하지만 남는 결과는 손해가 아닌 이익입니다. 다만 체력이 항상 문제입니다. 교수님 성격상 그러시지 못하겠지만 쉬엄쉬엄 하실 필요도 있습니다. 건안하시길 빕니다.

  2. 허욱 2020.06.29 23:31 Address Modify/Delete Reply

    코로나 19로 세상이 많이 어렵습니다. 5개월 이상 코로나 상황이 이어져 사람들이 많이 지쳐있고, 경제적 어려움과 미래의 불안감에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근자에 안부 인사를 못드려 궁금하던 차에 교수님께서 블로그 현강재를 다시 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방문했습니다. 올해 쓰신 글들을 다 읽었습니다. 성경 고린도전서의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 이란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사모님께서 지으신 멋진 집 현강재와 기적같이 구한 노르웨이 벽난로는 불에 타 사라졌지만, 오늘도 고성의 하늘아래에서 농사를 지으며 심신을 벼리고 계신 교수님이 바로 살아있는 현강재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뜨거운 여름, 농사 일로 수고하시는 교수님의 상상 속 한 켠에 우리 국민이 POST 코로나 시대를 살아갈 지혜가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무더위와 장마 중에도 벌써 겨울이 기대됩니다. 더욱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기도합니다.

  3. 전영평 2020.06.30 18:34 Address Modify/Delete Reply

    현강재 재 개통을 뒤늦게 나마 축하드립니다

  4. 이근우 2020.07.21 14:17 Address Modify/Delete Reply

    농사와 학문, 옛 선비의 겸손한 모습이 그려집니다. 몸을 게으르게 놓아두지 않는 일종의 수행의 의미가 더욱 청정한 사고를 낳을 것 같습니다. 청빈낙도의 정신이 어두운 서울 하늘 위에 반짝입니다.

  5. 김항규 2020.08.22 11:09 Address Modify/Delete Reply

    아침과 저녁으로 열심히 농산물을 가꾸면서도 농민 스스로가 해야 할 일과 자연과 하늘에 맡겨야 할 일을 구분하여 겸손히 기다릴 줄 아는 진정한 농심을 교수님으로부터 배워봅니다.
    고린도전서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3:6)라고 말한 사도 바울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I.

작년 말 가까운 제자 C군이 내게 전화를 걸어 아들 주례를 부탁했다. 이곳 속초/고성으로 온 후 웬만해서는 주례를 사양해 왔는데, C군과의 각별한 관계 때문에 이번에는 거절하지 못하고 순순히 응락했다. 혼주인 C군은 연세대 행정학과 75학번 옛 제자인데, 특히 내가 <연세춘추> 주간을 할 때 학생기자로 유신말기의 어려운 시기를 함께 헤쳐나갔기에 나와의 인연이 무척 깊고 오래되었다. 더욱이 내가 30여 년 전 C군 주례를 했기 때문에 아들 주례까지 맡게 되면 ‘부자’ 주례를 하게 되는 셈이다. 결코 흔치 않은 일이 아닌가. 그런데 더 신기했던 일은 결혼 예정일이 다음 해(2020년) 2월 29일이었다. 이 날은 4년마다 윤년이 되어야 찾아오는 달력에서 가장 드물게 등장하는 날짜인데, 그날이 바로 52년 전에 내가 멀리 이국 땅 알프스 산록의 작은 성당에서 내 처와 손을 맞잡았던 나의 결혼기념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그 날을 기쁘게 마음에 새겼다.

 

                     II.

작년 말 중국 무안에서 발생한 ‘코로나 바이러스’는 올 2월 중순에 들어서면서 우리나라에도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청정지역으로 알려진 이곳에서도 2명의 확진자가 발생해서 점차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급기야 2월 23일 정부는 감염 위기경보를 ‘심각’으로 격상했다.

그런데 바로 그날 오후부터 나는 약간의 발열과 오한, 그리고 얼마간의 인후통을 느꼈다. 기침은 없었다. 며칠간 겨우내 크게 자란 잡초들을 뽑느라고 조금 무리했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처음에는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런데 웬걸 밤새 몸을 뒤척이며 앓는 소리를 냈다. 아침에 인후통은 가셨는데 열이 떨어지지 않았다. 작년 고성산불에 체온기도 타버려 실제로 재보지는 못했지만, 체온이 좋이 38도 가까이 될 듯싶었다. 거울로 보아도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급한대로 해열제를 먹어도 열이 조금 내려가다 다시 올라갔다. 기분이 영 언잖았다. 하필 코로나가 창궐하는 이 때에, 그것도 주례를 며칠 앞선 이 시점에서 발열이라니, 이게 무슨 변고인가.

 

자연히 코로나 19가 우려되었지만, 지난 몇 주 간의 나의 생활궤적에 비추어 바이러스에 감염될 가능성은 거의 전무했기에 스스로 고개를 모로 저었다. 그러나 불편한 심경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다음날 (25일) 아침 서울서 아들이 들이 닥쳤다. 제 엄마한테서 내 이야기를 듣고 걱정이 돼서 온 모양인데, 내 이마를 만져보더니 일단 서울로 가자고 서둘렀다. 며칠 후 결혼식에 가자면, 어차피 시외버스를 이용해야 하는데, 아들 승용차로 안전하고, 쉽게 갈 수 있기에 우리 부부는 주저 없이 따라나섰다.

서울에 온 후, 그 다음날(26일) 까지 열도 조금 내리고 한결 몸이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그렇게 낳는가 싶었는데, 다음날(27일) 아침부터 다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해열제를 먹어도 별 소용이 없었다. 불길한 생각이 자꾸 고개를 들어, 잘 아는 동네 내과를 찾았다. 의사 선생님은 그간의 정황이나 몸상태로 보아 코로나 19는 분명 아닌 듯하나, 검체검사를 받기 전에는 확언을 하기는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하도 답답해서 모래 결혼식 주례가 예정되어있는 내 형편을 얘기하면서, “선생님이시면 어떻하시겠어요?”라고 유치한 질문을 던졌다. 그는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제가 어떻게 그 대답을 합니까? 교수님 스스로 결정하셔야지요.”라며, “주례를 하지 않으실 수 있으시면, 그게 최선의 방법이지요.”라고 답했다. 정답은 분명한데, 내가 실천하기 어려운 답이었다.

 

                       III.

나는 실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결혼식을 이틀 앞두고, 주례를 하지 않겠다고 통보를 하는 것은 너무 얄팍하고, 어른답지 못하다고 느껴져 그것은 일단 대안에서 제외했다. 그렇다면 주례를 해야 하는데, 내 스스로의 느낌은 물론, 객관적으로도 코로나 감염 확률이 무척 낮으므로 눈을 딱 감고 감연히 주례에 나서는 것이 어떨까, 그것도 분명 하나의 대안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뇌리에 담는 순간, 동시에 이에 맞서 최악의 시나리오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런데, 내가 만약에, 백에 하나 코로나 19에 감염되었다면?”이 그것이었다. 순간 나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만약 바이러스 비말이 불과 수십 센치 앞에 서서 주례사를 경청하는 신랑, 신부에게 튀게 된다면, 아니 더 나아가 식장을 가득 매운 하객들에게도 그 음습한 영향이 미친다면, 그것은 실로 상정하기 조차 무서운 참담한 상황이 아닌가. 그리고 비록 미세하지만 그 작은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내가 주례로 나선다면 그것은 범죄행위와 다름없는 게 아닐까. 생각이 이에 미치자, 즉시, 내가 가능한 빨리 검체검사를 받아 비감염자인 것을 스스로 확증하는 이외에는 달리 해답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서대문구청 옆 선별진료소는 제법 붐볐다. 일단 등록을 마치고 집에서 세 시간 기다려 연락을 받고 진료소로 갔다. 27일 오후 4시였다 그런데 여기에 새로운 암초가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담당 의사에게 검사결과가 언제 나오느냐고 문의하니, “이틀 정도”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간곡하게 내 사정을 얘기하며, 좀 더 일찍 알 수 없겠느냐고 묻자 그 분은 단호한 어조로, “당장 주례를 할 수 없다고 말씀하세요. 아무리 빨리 챙겨도 내일 밤까지 결과가 나올 가능성은 반이 안 됩니다”라는 것이었다. ‘아차, 한발 늦게 왔구나’라는 생각이 엄습하며 무척이나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일단 검체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별 소용이 없을 것 같았으나, 구청 보건소 담당직원에게 가능한 한 빨리 결과를 알려 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집에 돌아오니 암담한 심경이었다. 만약 검체검사 결과가 내일 밤까지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리 궁리해도 답이 안 나왔다. 고심 끝에 나를 대신해서 주례를 맡아 줄 착한 후배 교수 한 분을 머리에 담아 놓았다. 그러면서 제발 내일 한밤중에 그에게 곤궁한 전화를 거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다. 스트레스가 쌓여서 그런지 열은 38도 근처를 오르락내리락하며 떨어질 기세를 보이지 않았고 입술과 목이 타서 계속 물만 들이켰다. 그렇게 안절부절 서성거리며 28일 하루를 천년처럼 보냈다.

 

오후 6시, 애타게 기다리던 전화가 왔다. 예상대로 음성판정이었다. 나는 고맙다는 말을 연발했다. 진정으로 감사한 심경이었다. 굳게 닫혔던 세상이 훤히 열리는 기분이었다.

신기한 것은 결과 통보를 받고 나자 그토록 끈질기게 나를 괴롭히던 발열 증세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잠자리에 들 때쯤은 평온을 다시 찾았다. 그리곤 실로 엿 세 만에 긴 단잠을 푹 잘 수 있었다.

 

                     IV.

다음 날, 코로나 소용돌이에도 불구하고 결혼식장은 놀랍게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행복한 얼굴로 해맑게 웃는 신랑, 신부의 모습이 돋보였고, 이들을 축복하러 식장을 찾은 친지, 동료들로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붐비고 있었다. 나는 주례사 말미에, “신랑, 신부는 오늘 코로나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이 자리에 함께하신 하객 여러분들께 평생 감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나의 어줍잖은 코로나 해프닝은 끝났다. 내가 평생 약 300회 주례를 섰는데, 이번처럼 크게 혼난 것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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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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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만곤 2020.05.26 13:01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부총리님의 글은 당연한듯 그렇긴 하지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이런 글에서 더욱 빛난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결례를 무릅쓰고 대놓고 말씀드리면
    "부총리님! 이 글은 최곱니다!" 했으면 좋겠습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도 걸핏하면 잘난 척하기만 하고 별 수 없구나 싶은데
    이런 글이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을 것입니다.
    부총리님, 외람된 말씀, 죄송합니다.

  2. 이근우 2020.05.31 18:09 Address Modify/Delete Reply

    네. 부총리님,
    그 마음 고생하신 것 충분히 실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종 통보를 받으신 순간의 그 안도는
    비슷한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당일 예식장 맨 앞줄에 가만히 앉아 계시는 모습을
    보고 황급히 인사만 드렸을 때 실은 많이 편찮은 기색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 때는 코로나 창궐로 초비상 시기라서 자세히 여쭙지도 못했습니다. 이제 그 사정을 알 수 있게 되어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아무리 아수라장 같은 세상이라도 코로나 이전 세상이 그립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닥친 커다란 시련입니다.
    이번 시련을 용케 극복한다면 자연에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이 필요해 보입니다.
    부총리님, 또 한번의 구사일생 경험 어쩔 수 없었지만
    이제는 다시는 하시지 않으시기를...

  3. 서남수 2020.06.02 17:54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부총리님, 현강재를 다시 열어주셔서 감사하고 또 반갑습니다^^ 현강재를 통해 자주 뵙겠습니다.

  4. 이근우 2020.06.03 06:33 Address Modify/Delete Reply

    장관님께서도 들어오셨네요.
    반가운 분들 뵐 수 있어서 좋습니다.
    이곳이 만남의 광장이 되면 옛 정을 떠올리며 하루하루가 일촌이 될 것 같습니다.
    코로나로 멀어지고 있는 빗속의 돌담길 다정하게 끝까지 걸을 수 있겠 습니다.

  5. 서남수 2020.06.05 09:26 Address Modify/Delete Reply

    이근우 감사를 여기서 보네^^ㅎ 반갑네!

  6. 최대용 2020.06.30 22:37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정작 당사자인 저는 이제 글을 보고 황송한 마음으로 댓글을 올립니다.
    지인의 귀뜸이 없었으면 황당한 무례로 일관할 뻔 했습니다.
    교수님께서 코로나 말씀은 하셨습니다만 미욱한 저는 교수님의 이런 고뇌와 곤혹은 간과하고 아들 결혼식에만 신경썼었습니다.
    교수님께서 생사위중의 심각한 고뇌와 염려를 안고 코로나 검사의 난관을 넘어 결혼식 주례를 하여 주신 데 대해 거듭 거듭 감사드립니다.
    이글을 진작 보았으면 지난 번에 뵈었을 때 인사와 화두가 되었을텐데 일언반구도 못하여 죄송하고 아쉬운 마음입니다.
    존경하옵는 교수님의 사랑과 지도에 감사드리며 저희 가족과 각별한 인연에 교수님 결혼기념일과 아들 내외의 결혼식 일자가 같은 것도 기쁜 의미 이상으로 생각합니다. 아들 내외는 직장생활 잘하며 알콩달콩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곳에 새싹과 새순이 돋듯 사모님이 특기를 발휘하시면 푸른 과원에 성채가 세워지리라고 봅니다.
    교수님과 사모님 오래 오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기회되는 대로 자주 찾아 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
    최대용 올림

  7. 현강재 현강 2020.07.01 01:51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최박사가 내 글을 보지 않기를 바랐는데, 결국 보고 말았군. 검체검사 여부를 두고 얼마간 마음고생을 한 건 사실이지만, 전혀 "생가위중의 심각한 고뇌와 염려" 수준과는 거리가 먼 얘기네. 그리고 일이 어쩌다 그렇게 진행된 것이지, 최박사가 잘못한 것은 1도 없네. 내겐 이제 재미있는 추억으로, 그리고 최박 일가와의 각별한 인연으로 아름답게 뇌리에 남아있는 에피소드이네. 지난 번 이곳에 왔을 때, 최박 부부와 원우내외의 행복한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네. 늘 건행하기를 비네.

  8. 김영래 2020.07.12 21:48 Address Modify/Delete Reply

    안 교수님께

    최근 올리신 글 잘 읽었습니다.
    지난 2월 마음 고생이 크셨습니다.
    코로나19로 일상이 바뀌어 저는 주로 수원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요즈음은 그곳 강원도 고성에 계시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습니다.
    의미있게 삶은 사시는 안 교수님과 사모님에게 천주님의 가호가 있기를 바랍니다.

  9. 현강재 현강 2020.07.17 11:21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김만곤 교장선생님, 서남수 장관님, 그리고 김영래 교수님, 이렇게 제 블로그에서 뵙게 되어 무척 반갑고 고맙습니다. 어려운 시기를 건강하신 가운데 잘 넘기시기를 빕니다.

  10. 양재진 2020.08.12 23:42 Address Modify/Delete Reply

    교수님께 들었던 얘기인데, 글이 더 재미있네요. 소설이 영화보다 재밌는 이유겠지요. 그건 그렇고, 당일에 주례서라면 주례서주실 그 착한 후배 교수님이 누군지 궁금합니다. 나중에 만나뵈면 알려주세요. 건강하시구요.

                                l.

2008년 이곳 원암리에 새집, 현강재를 짓기 시작할 무렵부터 나는 벽난로를 간절히 원했다. 그러면서 하얗게 눈덮힌 겨울 따스한 벽난로 옆에 비스듬이 누워 한가로이 책을 읽어나 음악을 듣는 정경을 떠올리곤 했다. 설계부터 시공까지 집 짓는 과정을 도맡았던 처에게 내가 주문했던 것은 단지 그것 하나였다.

 

공사가 꽤 진행되었을 때, 내가 벽난로를 잊지 말라고 다시 일깨웠다. 그러자 처는 걱정 말라며 벽난로가 들어앉을 자리와 벽에 연통이 나갈 구멍까지 마련했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하루는 벽난로를 보러 가자며 서울 강남의 어느 건축자재 전문 백화점으로 데리고 갔다. 다양한 철제 벽난로 중에 내 마음에 들었던 것은 놀웨이제 벽난로였다. 무엇보다 요란스럽지 않고 간단해서 좋았다. 가게 주인도 잘 고르셨습니다. 성능도 뛰어나고 작아도 기품이 있지요라며 한껏 부추겼다. 그런데 값이 너무 비쌌다. 내 기억으로는 700만원을 요구했던 것 같다. 그 반값 정도를 예상했던 우리는 결국 벽난로 사는 일을 뒤로 미루고 되돌아 왔다. 아쉬웠지만 별도리가 없었다.

 

공사가 막바지에 들어서면서, 내 처는 자주 자금이 딸린다고 걱정을 했다. 그러더니 하루는 미안한 얼굴로, “아무래도 벽난로 설치는 뒤로 미루어야 겠다고 말했다. 나는 볼멘소리로 내가 당신한테 주문했던 게 딱 그거 하난데 그것도 어려워라고 불평을 했지만, 꽤나 돈에 쪼들리는 것을 알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현강재가 완공되어 입주한지 한 달 쯤 됐는데, 고성군에서 연락이 왔다. 내용인 즉, 우리 집이 경관이 아름다운 집으로 선정이 되었으니 상금을 타러 군청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 내 처에게 군에 그런 것 신청을 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처는 그런 적이 없다며, 다만 얼마 전에 토성면에 건축 관계하는 분이 집 안팎 사진 몇 장을 보내달라고 청해서 준공검사에 필요한 듯싶어 그대로 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럼 그 분이 우리를 대신해서 신청한 게 아닐까라고 추정했다. 나중에 보니 그 주측이 맞았다.

 

다음 날, 우리는 함께 군청으로 갔다. 가는 도중 내 처가 상금이 얼마나 될까. 100만원, 아니 그래도 200은 되지 않을까라며, 무엇보다 자기 작품(?)이 인정을 받아 기분이 좋다고 즐거워했다. 그런데 의외로 상금은 거금 500만원이었다. 우리는 크게 놀랐다. 그러면서 거의 동시에 벽난로!”를 외쳤다.

                       

                                      ll.

며칠 후, 내 처가 양평에 벽난로를 보아 둔 것이 있다며, 나를 그곳으로 데리고 갔다. 전에 강남에서 내가 골랐던 바로 그 놀웨이산 벽난로인데, 흥정은 의외로 빨리 진행되어 500만원으로 낙착됐다. 바로 경관이 아름다운 집상금, 바로 그 가격이었다. 우리는 모든 게 그림처럼 맞아 떨어져 신기 가득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다음 날, 양평 난로 가게 사장님이 직접 벽난로를 차에 싣고 와서 설치해 주셨다. 무쇠 벽난로가 워낙 무거워 나와 둘이 땀을 뻘뻘 흘리며 겨우 일을 마무리했다. 그런데 떠나기에 앞서 그가 웃으면서, “교수님! 오늘 저는 난로가 아니라 낭만을 설치하고 갑니다라고 말했다. 예사롭지 않은 말투였다. 나는 멋진 말씀이네요. 그런데 혹시 저를 아세요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제가 작년까지 시사저널기자였습니다. 전에 교수님이 정부에 계실 때 제가 단골로 몇 번 인터뷰를 했었는데, 혹시 알아보실까 했더니 끝내 못알아 보시더군요라는 게 아닌가. 나는 너무 민망해서 제가 워낙 면치(面癡)라서, 죄송합니다를 거듭했다. 그러면서 예상치 못했던 인연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III.

그 해 겨울, 새로 설치한 벽난로 곁은 우리 세 식구, 나와 내 처 그리고 작년에 하늘나라로 떠난 반려견 애리가 가장 선호하는 명당 자리였다. 그 해 따라 큰 눈이 기록적으로 자주 내렸다. 현강재가 며칠 동안 원전히 눈에 갇혔는데, 난로 곁은 언제나 천상의 낭만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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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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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익로 2020.05.18 20:45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부총리님!!!
    드디어 현강재가 다시 문을 열게 되었음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꼭 1년하고 1달이라는 시간이 '잃어 버린 천국'의 공간을
    침묵으로 지켜왔군요!!!
    새글이 올라온지 달포가 지난 오늘에야 현강재를 방문케 되었지만~~~
    너무다 다행이고 제 마음 또한 기쁘기 한량없는 것은 어쩜일까요?
    그간의 상심을 잘 관리하시었기에 이 아름다운 봄 날, 돋아오른 새 순처럼
    말끔히 치유되었으리라 믿고 싶습니다!!!

    부총리님!!!
    벽 난로의 낭만에 대하여~~~ 흥미로운 일화입니다!!ㅎㅎ
    말 그대로 낭만 그 이상입니다!!!
    그러나 사모님의 솜씨가 빛을 발한 명작인데~~~너무 아쉽!!!ㅇㅇ

    부총리님~~다시 현강재를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심에 감사를
    드리오며, 예전보다 더 여유롭고 풍성한 원암리 농사꾼이시길 기원드립니다!!!

    김익로 올림

  2. 현강재 현강 2020.05.20 09:12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김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간 많은 분들께 심려를 끼쳤습니다.
    앞으로는 좋은 소식만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요즘 이곳은 코로나 우려에도 불구하고, 봄 향기가 천지에 가득합니다.
    부디 건강, 성취, 행복을 두루 누리시길 빕니다.

  3. 이근우 2020.06.03 09:42 Address Modify/Delete Reply

    추억이 가슴에 저며듭니다.
    벽난로의 낭만이 빨리 되돌아오기를
    기원합니다.

  4. 최 종 률 2020.06.29 14:03 Address Modify/Delete Reply

    반가, 반가, 반갑습니다. 우선 제 꿈인 난로가 바로 안박사댁에 모셔졌군요. 축하합니다. 저는 어린시절부터 불장난을 좋아해서 평생 난로가 꿈으로 살아 있습니다. 서초동에 살때 한 10년 벽난로있는 집에서 살
    았는데 난로는 역시 눈 오는 날이 제격입니다. 한데 그 난로때문에 집사람과 자주 부부싸움을 했습니다. 추운 겨울날 눈이 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만사제치고 벽난로를 피웠는데 문제는 나중에 뒷처리하는 것이 제몫이었습니다.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재를 치우고 나면 다시 장작을 피우곤 했는데 그때마다 누가 재를 치우느냐로 아내와 아웅다웅 했습니다. 일을 도와주는 아주머니는 일주일에 두번 오는데 아주머니가 올때는 날씨가 좋아 벽난로를 피울 일이 없었습니다. 또하는 장작을 사는 일인데 교수님이 말씀하신 강남 난로집에 부탁하곤 했습니다. 장작은 반드시 참나무(oak tree)라야 하는데 난로집에서 보낸 참나무속엔 30% 정도 소나무를 끼워넣었어요. 이게 우리나라 상인들의 수준이지요. 그때마다 난로집에 전화를 걸어 불평을 해도 별수 없었습니다. 서초동 집을 떠나면서 벽난로도, 핀란드 난로도 꿈에만 남아 있습니다. 몇해전에 기흥에 쬐꼬만 cottage를 장만했는데 아무리 봐도 난로 놓을 자리가 마땅찮아 늘 아쉽습니다. 밖에 나가 어디에 굴뚝을 뚫을까 아무리 둘러봐도 자리가 없고 안에서도 난로 놓을 자리가 없어 답답합니다. 난로가 있으면 눈 내리는 날은 꼭 기흥집에 가고 싶을텐데 그게 없으니까 눈이 와도 무덤덤합니다. 괜히 난로 얘기에 맘이 들떠서 수다를 떨었습니다. 많이 즐기시며 더러운 세상을 잊고 지내시길 빕니다. 서울 최종률 드림

      I.

51, 오전까지 날씨가 멀쩡했는데, 오후에 접어들면서 건조주의보가 내린 가운데 바람이 점차 거세지기 시작했다. 저녁녘이 되자 흔히 화풍이라 불리는 양강지풍의 진면목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몰아치는 강풍에 이제 막 아름다운 연두색으로 옷을 갈아입은 나무들이 허리가 휘도록 흔들리고, 바람소리도 마치 괴기영화에서처럼 공포스런 굉음을 내며 고막을 휘저었다. 봄철 이곳에서는 늘 겪는 현상인데, 그날따라 불안한 마음이 잔물결처럼 일렁였다. 그러면서 작년 44. 고성 산불의 악몽이 머리를 스쳤다.

 

9시가 넘어 침대에 편하게 누어 jtbc‘팬덤싱어를 시청하고 있는데, 서울의 C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급한 목소리로 지금 TV에서 그곳 토성면에서 또 산불이 났다는데, 알고 있지라고 내게 물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며 몰랐는데, 고맙네라고 전화를 끊고, 부리나케 밖으로 뛰어나갔다. 사위를 들러보니 다행히 어디서도 화염이 내뿜는 붉은 기운이 감지되지 않았다. 아주 가까운 곳은 아닌 듯싶어 일단 안심하고, TV를 뉴스로 돌렸다. 발화지점이 도원리였다. 북쪽으로 약 6, 7km 지점이고 그 사이에 저수지와 군부대, 그리고 지난 불로 벌거숭이가 된 산이 있으니 당장 위급한 상황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전화에 불이 붙었다. 서울의 아들, 딸과 친지들이 tv를 보고 걱정이 돼서 야단이 났다. 문제는 이미 태풍급으로 거세진 강풍과 바람의 방향이었다. 그런데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솟뚜껑보고 놀란다라는 얘기처럼 작년의 악몽이 자꾸 떠 올랐다. 지난 해 산불 때, 병원약속 때문에 서울에 갔었던 내 처는 더 불안한 듯, “일단 대피할 준비를 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그렇게 위급한 상황은 아니라고 얘기했지만, 이미 한 밤중이고 이런 강풍이 계속되면, 작년의 경험으로 불길이 몇 km 질주하는 것은 순시간이라는 사실 때문에 나도 마음이 흔들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서울서 아들애가 전화로 일단 대피하세요라고 성화를 했다. TV를 보니 불길은 더 확산되고 있고, 그곳 인근 주민들은 이미 대피를 했다고 한다. 10시경, 우리도 대피하기로 마음을 모았다. 그리 화급한 상황은 아니었는데도, 나나 내 처나 이것저것 챙길 생각이 없었다. 작년 산불로 모두 불타 귀중한 물품도 없었거니와, 그간 갖추지 않고 살아도 별로 불편하지 않았던 경험이 작용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이 나이에 대피하면 죽을 일도 아닌 데 황급하게 수선 떨기가 싫었다. 나는 급한대로 설합속에 usb와 최근 작업하던 자료들을 넣어 한 가방 들었고, 내 처는 추을지 모른다며 겨울 오버 하나를 달랑 들었다.

 

 

차를 타고 속초로 나왔고, 아들애가 tv를 보며 핸드폰으로 중계를 했다. 다행히 바람이 도원리 북동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고 했다. 산불은 여전히 기승을 부리며 확산되고 있었으나, 바람 반대 편에 있는 우리 집은 위험권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었다. 새벽 130분경, 우리는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다시 tv를 켜고, 그간 못 받은 전화와 문자 메시지에 답을 하며 빨리 날이 밝아 헬기가 떠서 본격적인 진화작업을 하기를 학수고대했다.

 

 

       II.

밤새 수 십통의 전화와 문자 메시지를 보낸, 친지 여러 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작년에 이어 이번에 다시 심려끼쳐 죄송하기 짝이 없다.

늙마에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이색체험을 거듭하는 내 팔자도 스스로 흥미롭다. 오늘도 아직 새벽 시간인데, 밖에는 또 예의 '양강지풍이 그 위세를 떨치며 휘몰아 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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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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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동면 2020.05.04 16:10 Address Modify/Delete Reply

    밤 늦도록 뉴스를 보며 마음을 졸였었는데, 다행입니다. 화마로부터 고성 지역이 안전하기를 기원합니다.

  2. 김만곤 2020.05.10 09:56 Address Modify/Delete Reply

    무얼 들여다보고 있는데 아내가 뉴스를 보며 "저곳이 그 어른 계시는 곳 아닌가?" 했습니다.
    얼른 지도를 열어놓고 뉴스를 보고 있었습니다.
    부총리님!
    부디 편안하시기 바랄 뿐입니다.

  3. 현강재 현강 2020.05.13 07:22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김만곤 교장 선생님!

    번번히 심려끼쳐 죄송합니다. 늘 고마운 심경입니다.
    건강과 행복을 빕니다.

현강재의 추억

삶의 단상 2020. 4. 26. 14:20 |

현강재가 불탄 후, 잊으려 해도 자주 생각이 난다.  10년 반 쯤 그곳에 살았는데, 그 기간이 내 인생에서 매우 소중했던 시절이기에 더 그런듯 싶다.  많은 이들이 현강재를 찾았는데, 아래에 몇몇 신문과의 인터뷰 기사를 싣는다. 인터뷰 내용은 다 생략하고 현강재를 묘사한 부분만 여기 옮긴다.  마지막 인터뷰는 산불 후, 전화로 인터뷰한 것이다.

 

 

* 조선일보(2008/09/25) 한삼희의 환경칼럼

안병영씨네 손수지은 다섯 번째 집

 

몇 가지 묻고는 집 지은 현장으로 갔다. 미시령터널을 나와 속초 시내로 들어가기 전 어느 마을 외곽이었다. 안 교수 부인이 설계도 하고 인부도 직접 부려 지었다는 집이다. 1m쯤 쌓은 석축 위에 올린 단층집인데 겉 벽엔 투박한 연갈색 석재를, 지붕은 스페인 양식의 황색 기와를 썼다. 어떻게 보면 황토집을 닮았고, 어떻게 보면 세련된 현대식 주택이었다. 뒤쪽은 얕은 산이고 둘레는 소나무밭, 마당엔 키 큰 감나무가 서 있었다.

내부는 대담하게 설계했다. 가로 5m, 세로 3m 정도의 유리창으로 덮은 거실 천장이 가장 눈에 띄었다. 눈이라도 와서 쌓인다면 눈 속에 사는 셈이 된다. 내벽은 흰색 페인트를 질감을 살려 칠했고 기둥, 대들보는 옹이 무늬가 살아 있는 소나무를 썼다. 방마다 큼지막한 유리창을 내서 눈 가는 곳마다 설악의 사계절이 보이게 돼 있었다. 집 전체가 환하고 자연 친화적으로 지어졌다는 느낌이었다. 부부가 서로 어느 방에 있건 고개만 돌리면 말을 걸 수 있도록 공간도 통하게 만들었다. 원목 느낌을 살린 수납장 하며 방문을 울퉁불퉁한 두꺼운 유리로 만든 것까지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안 교수 부인 윤정자씨는 평생 5번 집을 지었다. 젊어서부터 집 짓기와 마당가꾸기에 관심이 많아 집에 건축, 원예잡지가 쌓였다고 한다. 유럽 등지에서 외국생활을 할 때도 TV 채널은 '하우징 &가드닝' 프로에 고정됐다. 처음 집을 지어본 것은 1973년 서울 우이동에서다. 없는 돈에 집을 지으려다 보니 직접 나섰다. 빨간 벽돌집이었는데 예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1978년엔 연희동에 집을 지었다. 영종도에서 캔 차돌을 쪼아 겉벽에 붙였는데 지금은 아들이 산다. 그 뒤로 아파트 살던 부모님과 딸네한테도 각각 집을 지어줬다. 이젠 윤씨가 일을 한다면 모이는 전속 팀이 생길 정도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9/25/2008092501503.html

 

* 조선일보(2012/10/27)

문갑식의 하드보일드

농부가 된 부총리 왜 몰랐을까 은둔의 즐거움’‘

 

만산홍엽(滿山紅葉)이란 말은 이맘때의 설악산에 딱 맞는다. 상강(霜降) 추위가 덮쳐 더 선명해진 풍경과 알싸해진 공기에 둘러싸인 '현강재(玄岡齋)'는 볕 좋은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있었다.

40평 남짓한 공간은 천장이 높아 시원했고 창틈으로 햇빛이 쏟아졌다. 비 내리는 날에는 자연의 풍금 소리가, 눈 쏟아지는 밤에는 묵화(墨畵)처럼 추억이, 맑은 날에는 별의 합창이 들릴 것이다. 둥그런 공간 사이 자리 잡은 창틀은 산수화 한 폭을 담은 액자였다. 가깝게는 달마봉, 멀리는 울산바위가 계절에 따라 변색하는 것이다.

거기서 안병영(安秉永·71) 전 교육부장관은 네 번째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농부(農夫)가 된 부()총리는 새벽 4시 일어나고 한철에는 8시간쯤 땅을 가꾼다. 400평 중 250평엔 과실수, 100평엔 농사를 짓는다. 설악과 동해와 제 힘으로 가꾼 결실을 함께 맛보는 삶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0/26/2012102601693.html

 

* 중앙SUNDAY(2016/05/01)

중앙SUNDAY 편집국장 인터뷰 선비 안병영

 

새벽길을 달려 2시간여-.미시령 넘어 웅자한 울산바위를 뒤로하고 닿은 곳 고성군 토성면....내외가 직접 욕조·변기·벽난로 같은 소품과 인테리어 마감재를 골라 하나 하나 꾸몄다는 집은 그 자체로 갤러리입니다. 벽을 두지 않아 단절되지 않고 하나의 공간으로 흐르듯이 꾸민 실내 구조에,높이 솟은 천장 한가운데를 유리창으로 덮어 채광 효과를 더했습니다. 굳이 집 밖으로 나가지 않더라도 거실에서 변화무쌍한 하늘시계의 움직임과 절기의 변화를 느낄 수 있게 말이죠.
집의 바깥 둘레로는 철따라 피어나는 갖가지 꽃들과 나무들,과실수가 어우러져 무릉도원에라도 온 듯 황홀경에 빠지게 합니다.

 

* 동아일보(2019/04/06)

귀농안병영 부총리 집도 불타지나가는 차 타고 가까스로 대피

고성=한성희 기자 , 고도예 기자 입력 2019-04-06 03:00 수정 2019-04-06 03:00

 

선생님, 얼른 대피하세요.”

4일 오후 8시경. 강원 고성군 원암리 자택(사진)에서 책을 읽고 있던 안병영 전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78)은 제자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자택 인근에서 큰 산불이 났으니 빨리 피하라는 다급한 목소리였다. 산불이 난 지 40분 이상 지난 때였다. 산불은 이날 오후 717분 원암리 일성콘도 인근에서 시작됐다. 안 전 부총리의 집에서 걸어서 약 30분 거리인 곳이다.

 

안 전 부총리는 전화를 끊자마자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자 바람에 불씨가 날려 왔다. 멀리서는 큰 불길이 솟고 있었다. 안 전 부총리는 바로 도로까지 뛰어나가 손을 흔들었다. 마침 지나던 승용차를 얻어 타고 동네를 벗어났다. 아내는 서울에 가고 집에 없었다.

 

안 전 부총리는 2006년부터 아내와 함께 강원 속초에서 살다가 2008년 원암리에 집을 짓고 거처를 옮겼다. 안 전 부총리가 책을 내기 위해 2년간 준비해 온 자료들은 모두 재로 변했다. 서울의 자녀 집에 머물고 있는 안 전 부총리는 농사지으며 글 쓰고 자연을 벗 삼아 지낼 수 있었던 보금자리가 사라져버려 허망하다면서도 마지막으로 달려 나가는 차 하나를 천우신조로 잡아타고 빠져나왔으니 집이 사라진 건 아무것도 아니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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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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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고성 산불이 난지 벌써 오늘로 만 1년이 되었다.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집이 전소되고 무엇보다 그간 책을 쓰려고 모았던 온갖 자료들, 특히 애지중지 간직해 온 USB 열 개까지 모두 잃은 후 너무 허망해서 한동안 넋이 나간 느낌이었다. 곧바로 새로 컴퓨터를 사고 다시 글을 쓸 채비를 했으나, 도무지 책상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컴퓨터 앞에 앉았다가도 한숨 크게 쉬고 손가락만 몇 번 만지작거리다가 그냥 일어나기가 일수였다. 몸은 멀쩡한데 마음이 따르지 않았다. 그렇게 1년을 보냈다.

 

그런데 그나마 내 마음을 잡아준 것은 농사일이었다. 산불이 났을 때, 이미 농사철에 접어들었고, 그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농터와 알뜰히 가꿨던 대부분의 과수는 다행히 큰 피해 없이 화마를 피했고, 파릇파릇 솟아오르는 나무의 새싹들이 초토화된 주위 산림과 묘한 대조를 이루며 내 마음을 움직였다. 자식들이 이 기회에 시골 생활을 거두고 서울로 올라오라고 성화를 했지만, 단 나흘 서울에 머물다가 다시 고성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열심히 농사에 전념했다. 그러면서 마음이 가라앉았다.

 

   II.

작년 오늘, 이맘때면 늘 찾아오는 양강지풍(양양과 간성사이에 부는 국지성 강풍)’이 기승을 부려, 초속 30m에 이르는 대형 태풍급 강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게다가 몇 달째 비가 오지 말라 산천초목은 바싹 메말라 있었다. 나는 그날 속초의 K형과 C형과 함께 속초에서 점심을 하고 벚꽃구경차 영랑호를 찾았다. 어제까지 한창 흐드러지게 피었던 영랑호변에 벚꽃도 강풍에 힘없이 나부끼며 흩날리고 있었다. 바람 때문에 차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그냥 스치듯 호반을 한 바퀴 돌고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내 처는 병원약속 때문에 서울에 가서 나 혼자 간단히 요기를 끝내고, 어둑해 지는 7시 반경 커튼을 닫았다. 그러면서 집안에까지 크게 들리는 세차고 요란한 바람소리에 마음이 불안했다.

 

8시를 조금 넘어설 때쯤, 전화가 왔다. 몇 년 전 퇴직 후 귀촌해서 산 너머 신평리에 사는 제자 노성호 군이었다. 그는 매우 다급한 목소리로, “저는 마침 일이 있어 창원에 내려왔는데, 방금 집사람 전화를 받고 말씀드립니다라며, “교수님! 원암리 위쪽에서 큰 불이 났어요. 빨리 피하세요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다급히 윗도리를 챙겨 입고 상황을 살필 겸 오른편 작은 현관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바람이 워낙 세서 아무리 힘을 써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바람의 영향이 적은 뒷창문을 간신히 열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순간 상황의 심각성을 직감할 수 있었다. 주위는 온통 연기로 가득했고 불길도 멀지 않은 곳 여기저기서 치솟고 일고 있었다. 무엇보다 사방으로 흩날리는 불씨가 온 세상을 뒤엎고 있어 눈 앞을 가릴 지경이었다. 나는 뒤 돌아보지 않고 그냥 정신없이 큰 길가로 뛰었다. 200m 거리를 폭풍처럼 질주했다. 막상 큰길에 나와보니 자옥한 연기 속에 우선 내가 피신할 길목조차 분간이 어려웠다. 무엇보다 불길이 바람 방향 따라, 솔나무 숲길 따라, 또 불씨가 튀는 대로 마구잡이로 번져 가기 때문에 산불 발원지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성천리 쪽도 이미 곳곳에 불길이 퍼져 있었다. 근처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절체절명의 위기감 속에 고립무원이라는 절박한 느낌이 엄습했다. 마치 재난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이 판국에 뛰어 봤자 소용없고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혹 뒤늦게 달려오는 차가 있으면 그 편에 위기를 탈출하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둠이 더 짙어지면서, 여기저기서 솟아오르는 시뻘건 화염이 더 극명하게, 더 위협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마침 울산바위 쪽에서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차가 있었다. 나는 길 한가운데로 다가가서 힘껏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그 차는 오히려 무섭게 가속을 하며 거침없이 앞으로 치닫는 게 아닌가. 나는 놀라 황급히 길가로 몸을 피했다. 절망감이 무섭게 엄습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자옥한 연기 사이로 또 하나의 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지막 차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길 한가운데로 나가 손을 한껏 흔들었다. 그런데 이 차는 가까이 오면서 속도를 크게 줄여 내 앞에 천천히 멈쳐섰다.. 그리고 젊은 운전자는 타시지요라고 내게 나직이 말했다. 나는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며 재빨리 차에 올랐다. 구사일생이자, 천우신조가 아닐 수 없었다,

차가 성천리로 향하는 동안, 불길이 때로는 가까이서 동행했다. 나는 마음이 다급해서 운전자에게 좀 더 빨리 달리시지요라고 청을 했다. 그랬더니 운전자는, “. 연기 때문에 잘 보이지가 않아서라고 짤막하게 대답을 했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해지는 부끄럽지 짝이 없는 염치없는 주문이었다.

차가 용천 바닷가에 이르니 큰 불길 하나는 우리를 앞질러 이미 속초 시내 진입을 서두르고 있었다. 나를 태워준 고마운 운전자는 나를 속초 시외버스터미널까지 데려다주었다. 그에게 이름과 전화번호를 청했더니 거듭 고사하다가 마지못해 내게 알려주었다.

 

   III.

고성 생활 12년 동안 세간살이, 옷가지, 소장품 등은 물론 책들도 쓸만한 것은 모두 서울에서 이곳 현강재(玄岡齋)로 옮겼다. 그간 집 안팎도 정성껏 아름답게 가꿨다. 그래서 바야흐로 내 집 현강재의 완성도(完成度)가 소박한 내 꿈의 경지에 가장 근접하게 이르렀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했다. 어디 그 뿐인가. 내가 늘 아끼고 자랑삼던 집 뒤에 울창한 소나무 숲도 그 청정한 기운과 함께 모두 사라져 버렸다. 나이 80을 몇 달 앞두고 이런 일을 당하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는 잔인한 현실 앞에서 나는 실로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목숨을 건졌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다음 순간 스스로 숙연해 짐을 느꼈다. 그리고 고마운 마음이 샘솟았다. 만약 그 날 저녁 제자 노성호군의 원거리 전화가 없었다면, 그리고 극적인 상황에서 나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던 마음 착한 운전자 김 선생이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때문에 나는 그날 밤부터 이튿날 새벽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걸려오는 친지들의 휴대폰 안부전화를 받으며, 비교적 밝은 음성으로 걱정마시게, 아무 일도 없네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 * *

이 기회에 불초 소생은 고성 산불 이후 전화, 문자 메시지를 통해, 혹은 직접 어려운 발걸음을 통해 저를 위로하고 격려해 주신 수많은 친지, 제자 들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의 덕택으로 저는 얼마간의 설레는 가슴과 새로운 결의 속에 목하 <인생 4모작>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간 휴면 상태에 있던 <현강재>도 다시 개통합니다. 여러분의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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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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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무권 2020.04.11 15:03 Address Modify/Delete Reply

    드디어 현강재가 다시 문을 열었군요. 많은 분들이 다시 열리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교수님의 인생 4모작이 더욱 풍성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 신동면 2020.04.19 13:25 Address Modify/Delete Reply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화마가 남긴 아픔에서 벗어나셔서 감사합니다. 현강재에 올라 오는 고성 소식을 기대하겠습니다.

  3. 이준연 2020.04.24 06:56 Address Modify/Delete Reply

    할아버지 외손자 블로그 구경왔어요! 머리가 복잡할 때 할아버지 글보고 힐링하고 가요! 항상 사랑합니다!

  4. 김만곤 2020.05.10 09:47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부총리님!
    들은 이야기인데도 가슴을 두근거리며 읽었고,
    끝부분에서는 눈물겨웠습니다.
    오래오래 마음 편안하신 생활을 하시게 하려는 무슨 운명 같은 걸 느낍니다.

                             I

언론계 출신인 내 가까운 친구 S 는 독실한 불자 (佛者 ). 천주교 신자인 나도  그를 따라 이곳저곳 전국의 사찰을 자주 찾는다 . 나는 고즈넉한 산사의 법당에서 서양 작은 마을의 오래된 옛 성당이나 공소를  찾았을 때와 흡사한 느낌을 갖을 때가 많다 . 아래 글은 오래 전에 S 로 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인상적으로 뇌리에 남아  여기 옮긴다 . 아래 II 의 화자 (話者 )S .

 

                             II  

1993 11 , 한국 불교계의 큰 별 성철스님이 입적하셨다 . TV 를 통해 성철스님의 다비식을 지켜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 그의 다섯 상좌 중 한 분이 눈에 익어 , 자세히 살펴보니 TV 화면에 등장한 W 스님은 나와 중학교 동기동창으로 재학시설 무척 가깝게 지냈던 죽마고우 K 가 아닌가 . W 스님이 면벽좌선 10 으로 유명한 선승 (禪僧 )으로 해인사 선원장을 지냈다는 것은 한참 후에 알게 되었다 . 그가 절에 들어간 이후 외부와의 접촉을 일체 끊고 오직 수행에만 전념했기에 그동안 수소문을 해도 행방이 묘연했던 것이다 . 하루라도 빨리 스님을 만나보고 싶어졌다 .

 

그해 12 월 어느 날 나는 집사람의 해인사 참배 길에 대신 안부를 전하고 가까운 시일 안에 뵐 수 있을지 물었다 . 그로부터 마침 상경할 일이 있으니 그때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 1993 12 월 중순 여의도에서 저녁을 함께하며 40 년만의  해후를 즐겼다 . 그는 가볍게 술 한잔을 나눌 만큼 소탈했고 정다움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 시간 가는 줄도 모른 채 정담을 나누었다 . 모처럼의 짧은 만남이 무척 아쉬웠다 .

 

마침 이날은 월급날이라 내 속 주머니에는 두툼한 월급봉투가 들어 있었다 . 이대로 헤어지기가 섭섭해 수표한장 (10 만원 )을 꺼내 스님의 주머니 속에 불쑥 집어 넣었다 . 스님은 무슨 돈을 내게 주느냐 , 기자가 웬 돈이냐 고 극구 사양했지만 나는 모처럼 서울에 왔으니 요즘 잘나가는 책도 사보고 남대문시장도 둘러보고 영화도 한편 관람하고 내려가라 고 권했다 .

나는 절에 다니면서 여러 스님들과 교류했다 . 나는 평소 스님이라고 산속에만 묻혀 살 것이 아니라 세상과 자주 만나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

그런 심정으로 스님에게 감히 (?) 용돈을 드린 것이다 .

 

그날 밤 그렇게 스님과 작별했다 . 밤늦은 시간 귀가해 집사람에게 W 스님과 만난 얘기를 나누고 월급봉투를 내놓았다 . 봉투를 열어본 집사람이 큰돈 한 장이 빈다는 것이었다 . 나는 월급봉투를 일일이 세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 그런데 100 만 원이 모자란다는 것이었다 . 나는 봉투 속에 100 만원 짜리 수표가 들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 내가 기억하는 것은 10 만원 짜리 수표 한 장을 스님께 건낸 것이 전부인데 ....... 나의 불찰이었다 . 10 만원이 100 만 원이 되었으니 참으로 난감했다 . 당시로서는 100 만원이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 무엇보다 집사람은 내가 월급을 타면 둘째 놈에게 그동안 미뤄왔던 컴퓨터를 사주기로 굳게 약속했던 터라 평소에 안 하던 바가지까지 긁었다 . 심지어는 스님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면 안 될까 라고 까지 말했다 .

 

다음날 아침 이른 시간에 스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 “S 기자 , 무슨 그런 큰돈을 내게 주었어 ”. 그러나 나는 그래 잘못 갔어 , 10 만원만 제 하고 나머지 90 만원을 돌려주게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 그 대신 유용하게 쓰시게 라고 짤막하게 속에도 없는 말을 하고 말았다 . 쏟아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는 게 아닌가 .

 

그 날 아침 출근길 , 도로확장공사장을 지나게 되었다 . 도로 한편에서는 크레인이 대형 H 빔을 반대편 도로로 운반하고 있었다 . 그런데 크레인 기사의 조작실수로 들어올린 H 빔이 공중에서 도로 한가운데로 떨어지면서 내 승용차를 덮쳤다 .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고 나는 순간 정신을 잃었다 . 119 구조대가 도착 , 찌그러진 차문을 부수고 어렵사리 나를 끄집어내는 순간 눈을 떴다 . 승용차는 악살박살이 났는데 , 나는 외상 하나 없이 멀쩡했다 . 천운이었다 . 지켜봤던 모두가 기적이라고 했다 . 나는 나도 모르게 부처님 고맙습니다 를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모른다 . 아웅산 사건 때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후 , 10 년 만에 다시 한번 죽음의 골짜기를 벗어난 것이다 . 그러면서 어제 저녁 스님에게  의도치 않게 크게  보시 (?)한 공덕이 날 살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났다 . 들리는 말에 의하면 스님은 지병을 앓고 있었는데 늘 주머니가 비어있는 학승이라 누구에게 손 내밀 수가 없어 차일피일 수술을 미루다가 마침 목돈이 생겨 입원 수술을 받게 되었고 그 이후 건강을 회복했다는 것이다 . 그 소식에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나무 관세음보살 이 나왔다 .

 

                    III

나는 위의 이야기를 역시 불자인 C 형에게 전했다 . 불교에 공부가 깊은 C 형은 곧장 이를 '부주상 (不住相 ) 보시의 위력 '인과의 엄중함과 불보살의 가피력 으로 설명했다 부주상보시란 상 ()에 얽매이지 않는 조건 없는 보시를 의미하는데 , 그 복덕이 마치 동방 허공을 젤 수 없음과 같이 한량없다고 한다 . 또 인간이 겪는 세상만사는 내가 지어 온 업 (, 인과 )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인데 , S 형의 착한 마음 , 보시하는 마음이 곧 불보살의 마음이기 때문에 그런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빚어졌다는 것이다 .

 

출처 : 현강재 (2015/08/01)

 


* 위의 스님 W 는 어제 (3 5 ) 입적한 대한불교종 해인총림 수좌 (首座 )

  원융 (圓融 )스님이다 . 삼가 스님의 명복을 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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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윤주명 2019.12.24 10:49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정말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든 따스하고 신비로운 이야기입니다. 교수님 덕분에 이야기 거리가 하나 더 생겼습니다. 감사합니다.

  2. 성기옥 2020.12.30 13:06 Address Modify/Delete Reply

    감동적이네요
    1993년에 값진 보시를 하셨군요
    네이버를 통해 뵙게되어 반갑습니다
    건강하시고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I.

나는 내가 예전에 살았던 곳을 무척 그리는 편이다. 이제 나이가 80 문턱에 이르렀고 그런대로 변화무쌍한 세월을 보냈으니 국내외에서 내가 그간 머물었던 곳도 꽤나 많았다. 따져보니 한 20여 차례 옮겨 살았다. 그런데 되돌아보면 그 한 곳 한 곳이 다 내 마음의 고향같이 느껴진다.

 

어쩌다가 옛날에 살았던 도시나 동네 근처에 가는 길이 있으면, 나는 무리를 해서라도 옛집과 옛터를 찾아 나선다. 외국의 경우, 대체로 내가 살던 집과 이웃 동네가 마치 그간 시간이 멈췄던 듯 옛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데 비해, 한국에서는 변화의 폭이 커서 몇 년 후에 찾아가도 완전히 딴 세상이 되어버린 경우가 많다. 그러나 어떤 공간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옛 시간은 그 언저리에 그대로 남아 맴돌며 나를 반기고 낭만을 곁들여 옛 추억을 쏟아 놓는다. 그곳에서 나는 옛날로 돌아가 전에 그곳에 남겨 두었던 나의 영혼의 한 조각과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눈다.

 

어떤 이는 자신이 곤고한 삶을 보냈던 곳은 끔찍하고 진저리가 나서 다시 돌아보기도 싫다고 하는데, 나는 내가 어렵고 힘겨운 시간을 보냈던 옛 장소가 더 나를 무섭게 끌어당기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옛터를 찾을 때면 늘 가슴이 설레고 마음 한구석이 찡하다. 어쩌다 10대초에 피난시절을 보냈던 대구나 부산에 가면, 으레 까마득한 옛날 내가 살았던 가난한 동네, 내가 다녔던 산비탈 판자집 피난학교 터를 찾아 나선다. 이제 천지개벽을 한 듯 완전히 딴 세상이 되어 버렸지만, 그 근처에서 옛 추억으로 이끄는 작은 흔적이나 한 가닥 실마리라도 찾아보려고 기웃거린다. 그러다가 아직 남아있는 비좁은 골목이나 계단, 허물어진 돌담이라도 만나면, 오랜 친구를 만난 듯 기쁘고 반갑다. 눈물이 핑돌 때도 있다. 그리고 나는 곧 그 자리에서 티 없이 맑은 10대 소년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옛터를 뒤에 하고 돌아설 때면, 늘 쓸쓸하고 아쉽다. 그러면서 다시 그곳에 남기고 가는 나의 분신이 안쓰럽다. “다시 와야지” 속으로 다짐한다.

 

             II.

며칠 전 낮 시간에 T.V를 켜고 채널을 돌리는데, 분위기 있는 영화 하나가 스쳤다. 되돌아가 보니, 제레미 아이언스 주연의 <리스본행 야간열차>였다. 아이언스는 내가 좋아하는 배우다. 훤칠한 키에 지적이면서 중후한 멋을 지닌 ‘꽃 중년’(이젠 ’꽃노년‘?)이다. 가톨릭 고위 성직자로도 잘 나오는 그는 영화 ’미션‘에서 내게 큰 울림을 주었다. 영화는 이미 끝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기가 막힌 명대사가 나왔다. 나는 그 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을 받았다. 내가 옛터를 찾을 때 마다 느꼈던 감정을, 이 보다 더 문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아니 실존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포털사이트에 접속해 보니,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을 쓴 이는 베를린대학의 철학교수이자 작가인 파스칼 메르시아였다. 그러니 이 명대사도 그의 작품이다. 그럼 그렇지. 역시 철학 냄세가 나더니. 이  책은 2004년 출간 이래 독일에서만 150만부를 판매, 현재까지 3년 연속 아마존 베스크셀러 10위권을 고수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즉시 책을 주문했다.

 

나를 열광시킨 그 명대사는 아래와 같다. 다시 읽어보아도 역시 일품(逸品)이다.

 

우리가 어느 곳을 떠날 때

우리 스스로의 무언가를 뒤에 남기고 간다.

우리가 가버린다고 해도 우리는 거기서 머문다.

거기에 다시 가야만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우리 안의 물건들이 거기에 있다.

어느 장소에 간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에게

여행을 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여행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고독을 마주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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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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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스마트폰?

삶의 단상 2019. 2. 26. 08:28 |

                         I.

  얼마 전 교육부에 같이 있던 분이 나를 찾아와서 함께 담소를 나누던 중, 내 핸드폰이 울려 전화를 받았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분이 대뜸,

  “아니 한때 교육정보혁명에 앞장서던 분이 아직 폴더폰이라니요. 요새 그 폰 쓰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어요. 빨리 바꾸세요.” 라며 펄쩍 뛰었다.

나는 무안해서 하루에 한, 두 번 전화하고 받는 게 고작인데, 무슨....” 하며 얼버무렸다. 그러면서 스스로 내가 문명의 이기에 대해 감수성이 무딘 편이라는 것을 자인했다.

 

                      II.

  그런데 보다 근원적으로 따져 보면, 모든 게 내가 기계치(機械癡)라는 데서 시작하는 것 같다. 나는 누구나 쉽게 사용하는 전기 기구나 전자제품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절절맨다. 내 손이 가면 으레 고장이 나거나 오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집에서 그냥 수동으로 한 번에 작동되지 않고 절차가 조금 복잡한 각종 전기.전자 및 생활용품들은 내 손에서 거리가 멀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전구를 갈아 끼거나 부서진 의자를 고치는 일도 다 내 처의 몫이다. 내 손이 가면 더 말썽이 나니까  아예 건드리지 못하게 한다. 홈뱅킹은 물론 버스표 인터넷 예매도 할 줄 모른다. 길가의 자판기도 사용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내가 만사에 워낙 서툴러서 그랬는데, 그러다 보니 테크놀로지에 적응하기를 꺼리는, 아니 얼마간 그것을 혐오하는 러다이트(ludite)’가 되어버린 것 같다.

 

  나는 자동자 운전도 못한다. 실제로 처음부터 아예 배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연구년에 내가 갈 외국 대학을 선택할 때도, 대중교통이 좋은 도시, 교수 아파트가 대학 구내에 있는 대학을 찾았다. 내가 살 집을 오랫동안 연희동에서 찾았던 것도 내가 봉직했던 연세대학교에 걸어서 다니기 위해서였다. 여행을 좋아하는데, 웬만해선 혼자 외국여행 하는 것은 꺼린다. 출입국 절차나 항공기 갈아타는 과정을 생각하면 정부터 떨어지기 때문이다.

 

 

                             III,

  그러나 꼭 해야 하는 일은 비록 그것이 기계/전자 놀이라도 작심하고 한다. 내가 인터넷을 1990년 즈음부터 시작했는데, 당시 내 나이 또래의 동료 교수들 대부분이 컴맹이었다. 시대의 흐름으로 보아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료 교수들에게 앞으로 교수 노릇을 제대로 하자면 이것 못하고는 불가능하다며 극구 권했던 기억이다. 그에 앞서 내가 학교에서 교무처장 보직을 맡고 있었는데, 그 때도 유능한 전산 전문가 직원을 활용해서 주요한 교무자료를 많이 전산화했다. 그래서 교무위원회에 올리는 안건들을 한결같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전산자료로 뒷받침해서, 사안마다 처장이 누누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도록 했다.

 

  두 번 교육부장관을 하면서도 나는 교육정보화에 온 힘을 기울였다. 교육정보화에는 여.야가 따로 없고, 이 혁명적 변화과정에서 한발 늦으면 영원히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그 성과는 실로 놀라웠다. 20044월 칠레 센티에고에서 열렸던 APEC 교육장관회의에서 내가 <E-learning in Korea>라는 주제 발표를 했는데, 뒤이은 토론에서 각국의 장관들이 이의 없이 한국의 교육정보화 수준이 세계에서 가장 앞섰다는 것을 공인했다. 그 때 벅차던 감회는 지금도 새롭다. 내가 주도했던 1997EBS TV 수능방송과 2004EBS 인터넷 수능방송이 성공적으로 출범할 수 있었던 것도, 그동안 쌓아 온 교육정보화의 저력 때문이었다.

 

 

                       IV.

  이처럼 내가 내 평생직업을 위해 필수라고 느꼈을 때, 혹은 국정에 참여하면서 그것이 '나라의 운명'과 결부된다고 생각할 때, 결연하게, 또 재빨리 평소에 꺼리는 기계/전자놀이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 놀이는 내겐 거기 까지였다. 그것이 그냥 내 일상의 필요와 편익을 위한 것이라면, 나는 늘 그것 없이 견디는 편을 택했다. 조금 불편해도 천성적으로 기계에 매달리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 핸드폰이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 나갈 때, 대학도 그 거센 바람에 휩쓸렸다. 강의가 끝나면 모든 학생들이 부산하게 핸드폰부터 챙겼고, 복도나 교정에서도 핸드폰을 귀에 달고 다녔다. 나는 학생들에게, “자네들, 그러다가 생각하는 능력을 잃게 된다고 수없이 경고했다. 그러나 마이동풍이었다.

 

  나 자신은 핸드폰 없이 쭉 지냈다. 그러다가 정년퇴직하고, 2007년에 이곳 속초/고성으로 귀촌했다. 당시 이곳에 연()착륙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서울과 필요 이상 교류를 하지 않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핸드폰이 없어서 별로 불편하거나 아쉬울 게 없었다. 그런데 내가 워낙 산을 좋아해서 자주 설악산에 오르는데, 서울의 자식들이 내가 맨몸으로 산행하는 것을 무척 걱정했다. 급기야 핸드폰을 사 들고 와서 지참할 것을 강요했고, 거절할 이유가 마땅치 않아 내가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 때, 그 애들이 나를 설득했던 명분인 즉, “그것 없이 아버지는 편할지 몰라도, 우리가 너무 힘들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우격다짐으로 핸드폰을 사용하게 된 지도 어언 10년이 넘었다.

 

  그러나 내 구식 핸드폰은 전화를 걸고 받을 때, 글자 그대로 (phone)’으로 쓰일 뿐 다른 용도로는 쓰이지 않는다. 늘 지니고 다니지도 않는다. 그래서 어쩌다 전원이 끊어져도 2, 3일 모르고 지내는 일이 허다하다. 그런가 하면 가끔 핸드폰으로 내게 긴 글이나, 동영상, 사진들을 전송하는데, 내 구식 폴더폰으로는 그것들이 잘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결례할 때도 적지 않다.

SNS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옛날에 한 선배의 성화 때문에 페이스북에 등록을 했는데, 곧 그게 실수인 것을 알았다. 수많은 사람이 친구요청을 하는데, 그들 모두와 소통하자면 엄청난 시간과 노력, 정성이 필요했다. 거기서 노닥거리기에는 내 여생이 짧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장 끊었다.

 

 

                        V.

그런데 나는 요즈음 스마트폰으로 말을 바꿔 탈까 고민하고 있다. 내 마음을 크게 움직인 것은 스마트폰의 사진 기능 때문이다. 이곳 동해안, 설악산의 풍광이 일품인데, 그것을 담으려면 번번히 사진기를 따로 들고 나가야 한다. 그런데 요사이 스마트폰 사진기능이 출중해서 그것 하나면 족할 것 같다. “마침내 스마트폰?”이 될지, 아니면 어쩌다 스마트폰?”이 될지 모르나, 스마트폰 자체는 이제 폴더블로 바뀌는 마당에늦깎이로  때 지난 스마트폰이라도 하나 장만할까 목하 궁리 중이다.

 

이래저래 처음 귀촌할 때 내가 가졌던 단순한 삶(simple life)”에 대한 순수한 꿈은 자꾸 허물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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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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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익로 2019.03.03 19:04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부총리님!!!

    기대됩니다~~~곧, 새 스마트폰이요!!!
    저도 몇 번이나 말씀드리려고는 했지만``` "차마"였습니다.
    부총리님의 ~"단순한 삶"~ 이 부분을 저도 최대한 지켜드릴려고
    참아 왔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이제는 운을 떼셨으니 빨리 바꾸시길 요구합니다.ㅎㅎㅎ
    제가 찍은 멋진 사진들로 보답해 드리겠습니다!!!
    부총리님, 고대하겠습니다.
    김익로 올림

  2. 현강 2019.03.07 11:05 Address Modify/Delete Reply

    이번달 안에 바꿀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기계라고 바꾸고 조작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심기가 불편해 지네요.

YS를 추억하며

삶의 단상 2018. 11. 23. 05:52 |

           I.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 3주기가 되었다. 나는 그의 문민정부에서 교육부장관으로 1년 8개월 동안 일했기 때문에 그에 대해 남다른 감회를 느낀다. YS는 정치인으로서 한국 현대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논의와 평가는 그동안 다양하게 펼쳐졌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정치학자로서 나는 장관으로 있는 동안 비교적 지근거리에서 YS의 정치적 리더십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그래서 할 얘기가 많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의 인간적 면모와 연관해서 내가 겪은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할까 한다.

 

         II.

나는 1995년 말, YS로부터 임명장을 받을 때 처음 그를 대면했다. 그 전날 개각발표하기 약 1시간 전 그로부터 전화를 받고, 10여분 대화를 나눴던 것이 그와의 사전 접촉의 전부였다. 그러나 워낙 오랫동안 언론을 통해 그를 자주 접했던 탓에 초면임에도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후 내가 장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그와는 많은 공식적, 비공식적 만남이 있었다. 특히 내가 YS대통령 공약사업인 <5.31 교육개혁>의 주무 장관이었기 때문에 다른 장관들 보다는 잦은 접촉이 있었던 편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와 단둘이 대면해서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눌 기회는 별로 없었다. 그 때문에 그와는 <일의 관계>를 넘어서는 인간적 상호작용은 거의 없었던 기억이다.

 

YS의 리더십 스타일이 부처 일에 일일이 간섭하기 보다는 장관을 믿고, 그에게 일을 맡기는 편이였으므로 나는 장관직을 수행하면서 대통령을 의식하거나 눈치를 보는 일이 별로 없었다. 특히 당시에 청와대의 내 상대역이 박세일 수석이었는데(그 때, 그는 청와대에서 가장 진보적인 인사였다), 그와는 오래 가까운 사이였고 그가 매사에 나를 적극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에 청와대를 부담스럽게 느낀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장관으로서 나의 정책자율성은 매우 높았고, 인사에 관한 권한도 컸다.

 

그런데 하루는 우연히 마주친 동료 O장관이 내게 “영감님(대통령)이 왜 자네를 그렇게 좋아하지?” 라며 말을 건네는 게 아닌가. O장관은 나와 중고등학교 동창으로, YS와는 5년 임기를 같이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나는 반신반의하면서 “그럴 리가” 했더니, 그는 “아냐, 내가 괜히 빈말 하겠나”라고 답했다. 나는 쑥스러워 더 묻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III.

이후 나는 장관직에서 물러나서 연세대로 돌아갔고, YS도 임기말에 IMF 사태로 큰 홍역을 치루고 상도동옛집으로 귀환했다. 나는 실의에 젖어있을 그를 부담 없이 한번 찾아뵙고 싶었다. 그런데 댁을 몰라 박세일 수석에게 동행을 청했더니, 그가 흔쾌히 앞장을 섰다. 그래서 이름만 듣던 상도동댁을 찾아갔다. 집이 생각보다 크지 않았고 조촐했다. 응접실도 무척 수수하고, 약간 협소한 느낌이었다. 어느 한구석도 대갓집 분위기가 없어 편했다. YS가 매우 반겨서 정말 잘 왔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몇 년 후, 가친이 돌아가셨다. 그런데 세브란스 빈소에 아무 예고도 없이 YS가 문상을 오셨다. 나는 황망히 그를 맞으며 “웬일이시냐”고 했더니, “그럼 내가 와야지, 누가 오나” 고 담담히 대답했다.

일이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 후 내 아들이 명동성당에서 결혼을 하는데, YS의 K 비서실장이 내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는 “각하가 곧 식장으로 떠나십니다”라는 게 아닌가. 나는 크게 놀라서 그에게, “백번 고마운 일이나, 격에 맞지 않으시고 송구스러워 내가 불편하다”며 제발 말려달라고 간청을 했다. 얼마 후 K실장이 겨우 그를 안으로 다시 모셨다고 전화가 왔다,

 

             IV.

2003년 12월 중순을 넘어 갈 즈음, 이수성 전 국무총리가 내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는 연말도 되었으니 문민정부 때 함께 일했던 장관들이 한번 YS를 모셨으면 좋겠다며, 23일 저녁으로 날짜를 정했으니 꼭 나오라고 말했다. 나는 참석하겠다고 답하면서 오랜만에 YS를 만나게 되어 내심 무척 기뻤다.

 

그런데 그 후 며칠 사이에 예상치 못했던 일이 빚어졌다. 내가 노무현 참여정부의 교육부총리로 입각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개각 발표 날이 YS를 뵙기로 한 23일, 바로 그날이었다. 나는 무척 괴로웠다. 그날 그 모임에 참석하자니 우선 YS를 뵙기가 민망했다. YS 입장에서 볼 때, 내게 얼마간 배신감이 들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더욱 그러했다. 그렇다고 불참하지니 그것도 예가 아니었다. 나가겠다고 약속해 놓고 불편한 자리라서 피한다는 게 얼마나 얄팍한 일인가.

그날 온 종일 가슴에 그늘을 안고 지냈다. 그러잖아도 온 가족이 반대하는데 입각을 결정해서 마음이 불편하기 그지없는데, 이 일까지 겹치니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고민 끝에 결국 나는 그날 저녁 YS를 뵙기로 결정했다. 그러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하게 느껴졌다. “가야지, 가서 YS의 언짢은 눈총을 받는 편이 낳지”.

 

나는 시간에 맞춰 약속장소로 나갔다. YS는 미리 와 계셨다. 나를 보자 YS는 손을 번쩍 들고 빙긋이 웃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모두가 들을 정도로 큰 소리로 “내가 오늘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어. 아니, 안 장관을 발탁하다니. 내가 노무현 대통령을 다시 봤어. 정말 기쁜 날이야”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오늘은 내 옆에 앉으시게”하며, 옆 자리를 내 주었다.

 

예상을 뛰어 넘는 YS의 반응에 나는 무척 놀랐고, 크게 감동했다. 그는 역시 큰 구경(口徑)의 정치가였다. 그러면서 나는 그가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숱한 격랑을 헤치며 우뚝 솟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그 특유의 금도( 度)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 순간 나는 그의 좌우명 '대도무문(大道無門) '을 떠 올렸다.

 

 

서거 3주기를 맞아 여유 만만한 모습으로 빙긋이 웃는 YS가 무척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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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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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윤주명 2019.12.24 14:39 Address Modify/Delete Reply

    교수님 글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