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단상'에 해당되는 글 167건

  1. 2018.11.01 혜화동 연가(戀歌) (2) (4)
  2. 2018.10.27 혜화동 연가(戀歌) (1) (3)
  3. 2018.08.20 천하에 아까운 사람, 고(故)김광조 박사
  4. 2018.04.16 에필로그
  5. 2018.02.16 시지프스의 바위 (5)
  6. 2017.12.04 40년 만의 해후
  7. 2017.10.12 가을 여정(旅情) (2)
  8. 2017.08.22 딸과의 약속 (2)
  9. 2017.06.26 '학점 인프레' 유감
  10. 2017.05.02 내 사랑 영랑호 (5)

                         

                       I.

혜화동 로터리에 이르렀다. 이곳은 혜화동의 모든 것이 시작되고 마무리되는 글자 그대로의 터미널이다. 모든 만남, 때로는 반가운 얼굴, 혹은 달갑지 않은 얼굴과의 해후도, 그리고 그와의 헤어짐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저녁녘이면 직장인들은 여기서 버스나 전차에서 내려 자신의 보금자리로 향했고, 다음 날 아침 어김없이 다시 이곳을 찾았다. 이 일대에 사는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이 로터리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처음으로 이성에 대해 눈을 떴고, 로터리 주변의 프라타너스 그늘에서 사랑이 움트고, 익어갔다. 그러다가 이별의 아픔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 일대에서 젊은 날을 보낸 많은 이들의 뇌리에는 혜화동 로터리를 배경으로 한 갖가지 추억과 낭만이 수백 장의 사진첩으로 겹겹이 쌓여있다. 혜화동 로터리는 특히 내가 중. 고등학교에 다닐 때, 여러 해 동안 안국동-광화문으로 가는 버스의 시발점이자 종점이었기 때문에 그 나이 때에 있었음 직한 숱한 추억이 그 주변에 깃들어 있다.

 

로터리 오른 쪽 코너에는 유서깊은 혜화동 우체국이 있다. 여기서부터 반월형으로 둥글게 돌아 전차길에 이르는 길이 혜화동 로터리에서 가장 사람들이 붐비는 지점이다. 버스가 여기서 정차하고, 상점들이 밀집해 있기 때문에 로터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혜화동 로터리라고 하면 곧장 이곳이 연상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곳의 대표적 명소는 혜화동 우체국, 동양서림, 그리고 중국집 금문 (金門)이다. 그래서 나는 무엇보다 이들이 아직 남아 있는지, 또 있다면 어떻게 변했는지가 크게 궁금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들 셋이 모두 의연히 제 자리에 옛 이름을 그대로 지닌채 건재하다는 사실이다. 그 뿐만 아니었다. 그 왼쪽 건너편에 파출소와 주유소도, 그리고 동양서림 바로 옆에 자리한 약국도, 그리고 저 멀리 전차길 가까이에 빵집 까지도 옛날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여봐라는 듯이 한눈에 들어왔다. 한마디로 큰 그림은 예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상가의 업종과 배열이 반세기 저 너머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고, 세월따라 디테일은 달라졌지만 그 변화의 폭도 그리 크지 않아 옛 모습을 회상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가슴이 따듯해 졌다. 분명 여기서 고속 질주하던 시간이 아주 느리게 감속 운행한 것이 분명했다. 성형수술을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잔주름의 아름다운 여배우의 모습을 연상했다.

이 한폭의 그림을 보면서, 나는 급속한 세상 변화에 아무 고민없이 즉응(卽應)하기 보다 제 고유의 모습을 지키면서 적절하게 변화에 대응하는 능력도 역시 혜화동 특유의 문화와 전통의 힘이 아닐까 생각했다.

 

                             II.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것은 혜화동 우체국이었다. 신식건물로 새 단장을 했고, ‘살아있는 우체국(Live Post)’ 이란 이름으로 이제 우편업무와 더불어 그 안에서 커피도 팔고 지역홍보도 하는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우리 세대에게는 혜화우체국은 바로 그 앞에서 1947년 몽양 여운홍이 피살되었기 때문에 더 기억에 남는다. 어렸을 때, 내 가까운 형이 혜화초등학교 때 바로 그 극적인 현장을 목격했다며 몇 차례 실감 나는 연기를 내게 선보였다. 그래서 나는 한때 마치 내가 그 장면을 직접 본 것처럼 착각이 들기도 했다.

 

동양서림 역시 옛 이름을 그대로 지닌 채, 크게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건재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이 책방은 내가 중학교 입학했던 1953년에 역사학자 이병도의 따님이자 장욱진 화백의 부인인 이순경 여사가 <호구지책으로> 문을 열었다고 들었다. 이후 동양서림은 60 여년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책을 통해 이 지역에 지식과 문화의 향기를 전파해 온 혜화동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이 서점은 현재 <서울 미래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고 한다. 쇠락일로의 종이책 서점이 격변하는 세월 속에서 모진 풍파를 겪으며 온라인과 전자책 시대까지 한 곳에 버텨왔다는 것은 정녕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개인적으로 내가 이 서점에 남다른 애착을 느끼는 까닭이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 하교길에 바로 동양서림 앞에서 버스에서 내렸는데, 마치 일과처럼 으레 책방으로 직진했다. 그래서 적어도 반 시간 이상, 어떤 때는 두어 시간 동안 그 안에서 서성이며 신간 잡지와 각종 서적들을 골라 읽다가 어둑어둑할 때쯤 책방을 나오곤 했다. 그렇듯 이 서점에서 공짜로 책을 읽으면서 나는 세상에 대한 관심과 통찰력을 키우고, 지적, 정서적 잠재력을 함양했다. 장사하는 책방을 자신의 독서실로 활용했던 나의 몰염치와 안면몰수에 대해 서점 측은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뒤에 이 서점에 발걸음이 잦았던 문인, 지식인들이 무척 많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시인 김수영, 성춘복, 그리고 고대 김준엽 총장도 이 서점의 단골 손님이었다고 들었다.

 

역사를 자랑하는 중국집 금문(金門) 여전히 그 자리에, 옛 이름, 옛 모습을 그대로 지닌 채 엄존하고 있었다. 70년 전에 화상(華商)이 처음 문을 연 이래 이 음식점은 이 일대에서 얼마간 고급진 중국집으로 알려져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평소에 이 집을 드나든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웠고, 친지 중 누가 상급학교에 합격하거나 인근의 학교를 졸업할 때 비로소 하객 중 하나로 이곳을 찾곤 했다. 가까운 동네 형이 보성고등학교 졸업할 때 따라갔다가 이곳에 들려 고구마탕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인근 동숭동(대학로)에는 서울 문리대과 법대, 의대를 겨냥했던 유명 중국집 진아춘(進雅春)과 공락춘(共樂春)이 있었다. 그러나 1975년 서울대학교가 옮겨간 후 잘 나가던 이 두 집은 모진 서리를 맞았다. 그래서 공락춘은 이미 역사에서 사라진지 오래고, 까마득한 옛날 1925년에 문을 열어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던 진아춘은 몇 번 자리를 옮겨 명륜동 어디서 아직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III.

혜화동 우측 로터리에서 내가 잊지 못할 장소의 하나는 명륜동을 향하는 코너 2층에 있었던 <전원(田園) 다방>이다. 이름부터 낭만적인 그 곳은 내가 대학교 다닐 때 혜화동 일대의 많은 친구들과 늘상 모여 정담을 나누며 살갑게 교류하던 아지트였다. 현재도 예전처럼 아래층에는 빵집이, 그리고 이층 바로 전원다방 자리에는 <A Twosome Place>라는 커피집이 있었다.

 

내가 다녔던 K 고등학교 동기들이 혜화동 일대에 많이 살았는데, 그 중 다수가 전원다방 단골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수시로 그곳을 찾았다. 아무 때나 그곳에 가면, 한 두 명 반가운 얼굴들을 만날 수 있기에 굳이 별도의 약속 없이도 그 곳을 향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20대 초 황금기, 풋풋하고 싱그럽던 우리는 거기에서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며 우정을 키웠다. 젊은 날의 꿈과 사랑, 고뇌와 낭만을 논하고, 나라와 세상 걱정도 하고, 때로는 연애상담도 했다. 대학교 2학년 때 4.19, 그리고 다음 해에 5.16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격랑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자주 열정적으로 정치토론도 하고, 암담한 현실에 대해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많은 일이 전원다방에서 이루어졌다. 나는 거기서 뻐끔담배를 배워 20년 동안 줄담배를 피었다. 그런가 하면 우리 몇몇은 이 다방에서 대학 입학 후 첫 여름방학에 강원도 무전여행을 모의했고, 결국 결행했다. 돌이켜 보면, 그 시절 우리는 때로는 지나치게 진지했고, 또 어떤 때는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듯 미성숙했기 때문에 더 애착이 가는, 우리의 젊은 날, 옛 모습이 오늘 사무치게 그립다.

20년 전 쯤인가, 우리 자칭 이른바 <전원다방파()>들 중 쉽게 연락이 되는 친구 6.7명이 시내에서 함께 모였다. 개중에는 자주 만나던 친구도 있었지만, 오랜만에 보는 얼굴도 있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에 어깨가 조금 처져있었으나 옛날의 호기는 여전했다, 이제 환갑이 가까우니 자주 만나자는 약속을 나누며 헤어졌다. 그리고 다시 10 여년이 지나 몇 해 전에 재회했다. 모두 은퇴했고 인생의 황혼길에 있었다. 깊게 주름진 노안(老顔)을 서로 마주 보며 쓸쓸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화제가 혜화동 전원다방에 이르면서 점차 목소리가 높아지고 환한 웃음꽃이 피기 시작했다. 전원다방을 촉매로 우리는 서서히 20대 초의 약동하는 청년으로 회춘(回春)하고 있었다.

                                   

                                    IV.

옛 전원다방 앞에서 택시를 기다리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천만다행인 것은 1970년대 초에 이곳에 등장했던 흉물스러운 고가도로가 그간 사라져 시야가 훤히 트였다는 사실이다. 옛날이나 다름없이 한가한 느낌을 주는 건너편 로터리는 그 일대의 가톨릭타운을 이어주는 주요한 연결고리다. 시선을 혜화동성당으로 향하면서 나는 다시 옛 추억에 잠겼다.

 


'삶의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침내 스마트폰?  (2) 2019.02.26
YS를 추억하며  (1) 2018.11.23
혜화동 연가(戀歌) (2)  (4) 2018.11.01
혜화동 연가(戀歌) (1)  (3) 2018.10.27
천하에 아까운 사람, 고(故)김광조 박사  (0) 2018.08.20
에필로그  (0) 2018.04.16
글쓴이 현강재 현강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김익로 2018.11.12 20:03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부총리님!!!
    그간도 건안하시죠?
    혜화동 연가(1)(2)잘 읽었습니다.
    혜화로터리를 중심으로한 골목골목길에 그렇게도
    유서깊고 생생한 역사의 현장이 숨어 있는지 처음 알았어요!!!
    저고 가까이 대학로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근무한 적이 있어
    그쪽 위치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부총리님의 글을 읽고는
    다시 한 번 차근차근 돌아보고픈 마음이 생겼습니다.
    언제 시간을 들여 발품을 팔아볼까 합니다.
    이제 가을도 저만큼 멀어지고 있는 듯 합니다.
    늘 건강에 유의하시며 평강하옵시길 기도합니다.
    - 김익로 올림 -

  2. 강세진 2018.11.17 07:43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부총리님 글 재미있게 잘읽었습니다.
    창경초 동성중고를 졸업한 덕에 혜화동 연가는 비롯 더 앞전이지만 제 추억속에도 많은 것들이 겁치고 오버랩됩니다
    로터리에 있는 금문은 지금도 동기들과 동창회를 여는 장소가 되어 있습니다

  3. 현강 2018.11.18 02:57 Address Modify/Delete Reply

    추억이 많이 겹치는 군요. 반갑습니다. 초등학교 다닐때, 삼선교-동소문고개-혜화동성당(백동성당)-동성중고교-대학로-수의과대학을 거쳐 창경초등학교까지 그 먼길을 타박 타박 걸어 다녔습니다. 돈암동 제 옆집에 동성중고 교감(후에 아마 교장?)이셨던 김성수(별명이 '염소'라고 들었습니다) 선생님이 사셨고 동성다니는 그 아들 훈이와는 무척 가까웠습니다. 동성 친구들이 많았는데, 하나같이 착한 모범생들이었던 기억입니다. 한때 장면박사가 교장을 하셨고, 김수환 추기경님도 동성출신이지요.

  4. 서재명 2018.12.15 12:36 Address Modify/Delete Reply

    감회깊게 읽었습니다. 잘 아는 대상이라 실제 함께 동행했던것 같은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다시 한번 현강의 문재를 느끼면서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I.

지난 6월 초여름 햇살이 유난히 따가웠던 날이었다. 병원약속이 있어 오랜만에 서울에 갔다. 그런데 예상보다 일이 일찍 끝나 다음 약속까지 두 시간이 비었다. 서울에 갈 때면 으레 그곳에 머무는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스케줄을 촘촘히 짜는 데 그날은 예상치 않게 시간 여유가 생긴 것이다. 두 시간 동안 무엇들 할까 곰곰이 생각하며 병원 문 앞을 나오는데, 문득 섬광처럼 혜화동이 떠 올랐다. 순간 나는 옳지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아무 망설임 없이 택시를 잡았다. 혜화동은 내 어린 시절과 20대 중반까지의 청년기에 많은 추억과 낭만이 깃들어 있는, 마치 옛사랑의 그림자와 같은 곳이다.

 

혜화동으로 가는 동안 오늘은 잊고 지내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네. 내일이면 멀리 떠나간다고..’ TV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배경음악으로 인기를 끌었던 리메이크 된 노래 혜화동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리운 옛친구들의 얼굴과 그들과 어울리던 혜화동 골목길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마지막으로 혜화동을 스치듯 지나간 것도 10여 년 전이니, 그곳을 잊고 살았던 기간이 너무 길었다. 그런데 여유시간이 두 시간이니 택시로 오가는 시간을 빼면 막상 그곳을 둘러 볼 시간은 고작 1시간 남짓이다. 마음이 급했다. 나는 택시 운전사에게 명륜동 성대 입구에서 내려 달라고 청했다.

 

                          II.

나는 돈암동에서 태어나서 20대 중반까지 그곳에 살았지만, 바로 동소문 고개 너머의 혜화동/명륜동과 인연이 무척 깊었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혜화동은 대체로 혜화동과 명륜동의 통칭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혜화동 성당을 다녔고, 그 부속 혜화유치원 출신이기도 하다. 그래서 내 어린 시절의 많은 추억과 사연들이 혜화동성당과 이어진다.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치는 동안에도 많은 친구들이 혜화동에 살아 그들과 그곳에서 어울리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내 유년기, 사춘기, 청년기의 추억과 낭만, 희비애환의 큰 부분이 혜화동 일대와 깊이 얽혀있다. 그래서 빛바랜 사진 같은 1950, 60년대 혜화동의 풍경을 머리에 떠올리면, 곧장 내 내면에서 아련한 그리움과 설레임, 그리고 애잔한 서정(抒情)일렁인다.

 

혜화동, 명륜동 일대는 원래 조선시대 성균관에 물자를 대는 상업의 공간이었으나, 1920년대 이후 조선인 중산층, 지식인의 새로운 주거공간으로 급부상,  격조와 세련미를 갖춘 서울의 대표적인 중산층 동네로 발전했다. 이후 그곳은 전통과 현대가 사이좋게 공생하면서 특유의 그윽한 지적, 문화적 향기를 풍겼다. 1950, 60년대를 돌아보면, 그곳에 특히 문화, 예술계 인사들이 많이 살았다. 마해송, 장욱진, 조병화, 한무숙, 장발이대원 등 당대의 기라성같은 문인, 예술가들이 일찍부터 거기에 둥지를 틀었다. 인근의 성북동에도 김광섭, 김기창, 조지훈, 최순우, 김환기, 윤효중 등이 살았고, 한용운의 심우장, 전형필의 간송미술관, 이태준고가도 바로 거기에 있다. 가히 혜화동-성북동 문화벨트라 칭해 전혀 손색이 없지 않은가. 그리  넓지 않은 지역에 이처럼 한국의 대표적 문화계 인사들이 모여 살았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이 밖에 유홍열, 이해남, 이가원 등 유명 교수들, 그리고 장면, 오위영김상협, 나용균, 홍종인, 오재경, 조영식 등 정치인, 언론인, 교육가들도 여기에 살았다. 재계, 금융계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 우리 세대 중에는 이수성 전총리, 이인호 전 러시아 대사, 정근모 전 과기처 장관, 마종기 시인 등이 그 당시 혜화동, 명륜동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던 내 몇 살 위 선배들이다.

 

많은 시인, 음악가들이 혜화동을 시제와 악상의 주제로 삼았다. 혜화동에 오래 살았던 조병화는 이곳을 나의 터미널이라 명명했고, 역시 그곳 출신인 강은교는 황혼이 유난히 아름다운 곳으로 추억했다. 그런가 하면 피아노맨(김세정)참 눈이 부셨어 혜화동 거리에서 너를 본 날을 노래했다.

 

혜화동에 가까워지면서 내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이곳 저곳 골목에서 옛친구들이 장난기 서린 웃음 띤 얼굴로 뛰쳐나오면서, 당장 내 이름을 부를 것 같은 환상에 젖는다. 그 중에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친구들이 적지 않았다.

 

                             III.

명륜동 큰길가에서 택시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성균관대학교 쪽으로 접어들었다. 주위가 크게 달라졌지만 양쪽에 상가들이 즐비한 것은 예전이나 다를 바 없었다. 성균관대학교가 크게 변해 있었다. 정문은 없어지고 학교 앞이 크게 트였다. 옛것을 지키면서 세계화에 발맞춰 개방체제를 지향한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듯 했다. 한번 기웃거리면서 학교의 변한 모습도 살펴보고, 명륜당의 그윽한 정취도 맛보고 싶었다. 그러나 꾹 참고 그냥 지나쳤다. 거기서 혜화동으로 넘어가는 윗길은 제법 멀어 시간이 한참 걸렸다. 내 기억 속에 옛날에는 이곳에 너른 앵두밭이 있었는데, 상전벽해(桑田碧海), 이제 모두 사라졌고, 새로 조성된 복잡한 주택가 속에 내 추억의 실마리를 더듬을 수 있는 곳은 별로 없었다.

 

옛 보성중고등학교도 자취를 감췄다. 눈에 선한 너른 운동장과 붉은 벽돌건물 대신 거기에는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이라는 생소한 건물과 과학고등학교가 들어서 있었다. 명문사학으로 혜화동 깊숙이 터줏대감처럼 자리했던 보성학교가 없어졌다는 게 마음을 허전하게 만들었다. 다만 그 건너에  경신학교는 아직 건재한 듯 해서 작은 위안이 되었다.

혜화초등학교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무척 반가웠다. 혜화초등학교는 왕년에 혜화동, 명륜동은 물론 성북동, 돈암동 일대를 통틀어 최고의 명문이었다. 그래서 내가 초등학교 입학할 할 때, 기대했던 혜화가 아닌 창경초등학교로 배정되자 우리 부모님이 무척이나 안타까워하시던 기억이 새롭다. 19509.28 수복 후에 나는 결국 부모님의 성화로 결국 혜화초등학교로 전학을 했으나, 1.4 후퇴 때 다시 피난을 가게 되는 바람에 실제로 한 두 달 혜화에 다녔던 것 같다. 이렇게 혜화초등학교와의 인연은 짧았지만, 고모, 누나, 그리고 대부분의 성당친구들이 다 그곳을 다녀 혜화 얘기는 늘 귀에 달고 다녔다. 지금도 생각나는 얘기가 혜화가 소풍을 가려면 꼭 비가 온다는 속설이다. 혜화초등학교 주변에는 골목마다 많은 중. 고등학교 친구들이 살았고, 내 처도 혜화 뒷담 근처에 살았다. 20년전 쯤인가, 내 처와 함께 그녀의 옛집을 찾았더니 놀랍게도 고풍스러운 기와집 한옥이 거의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놀랍고 반가웠던 기억이 새롭다. 나는 골목길을 따라 잠시 그 집을 다시 찾아볼까 생각했으나 곧 포기했다. 시간도 없었거니와 그 보다는 십중 팔구 이미 자취를 감췄거나 크게 바뀌었을 오늘의 그 집 모습을 보고 내 스스로 실망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주마간산식으로 스쳐 가는데 한, 두 군데 전시장과 공연장의 모습도 보였다. 작은 박물관도 있었다. 혜화동, 명륜동 특유의 예술과 문화의 향기가 전승되는 듯 느껴져서 반가웠다. 이 일대는 지난 반세기 동안 크게 변했다. 그러나 신식건물 사이에 비록 개조된 모습이지만 아직 기와지붕의 옛 한옥들이 제법 많이 남아있고, 곳곳에 골목길들이 살아있어 크게 낯설지 않았고, 여기저기서 반세기 저 너머의 옛 풍정을 아련히 되새길 수 있었다. 골목으로 접어들수록 한옥도 많이 남아있고, 혜화동 고유의 특성과 정취가 더 진하게 우러날 게 분명한데, 시간에 쫓겨 그럴 수 없는 게 못내 아쉽고 안타까웠다. 몇 발자국만 더 가면 진짜배기 속살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을 외면하고 큰 길가 겉껍데기 파사드(facade)만 스쳐보니 크게 잘못된 게 분명했다. 그래서 혼자 다짐했다. 다음에는 꼭 충분한 시간을 갖고 여유있게 다시 찾아와야지. 그 때는 옛 추억을 공유하는 혜화동 친구 한, 두명을 불러 함께 오면 더 좋겠지. 아니면 내 처와 함께.

 

혜화초등학교에서 로타리 쪽으로 조금 더 내려가면 뒤에 복개한 개천 옆에 국무총리를 역임한 장면박사(1899-1966)의 집이 있었다. 겉모습이 옛 그대로였다. 문이 조금 열려있어 다가가 보니 <장면 가옥>이라는 팻말과 함께 문화재로 등록되어 집안이 시민들에게 공개되어 있었다. 아무리 바빠도 이곳을 지나칠 수 없어 집안으로 발을 옮겼다.

 

운석(雲石) 장면(1899-1966) 박사는 이 집이  1937년에 건립된 이래 쭉 여기 살았다. 교육자, 종교인, 외교관, 정치가로 일세를 풍미했던 그는 현대 한국정치사에서 매우 드물게 깨끗하고, 청렴한 정치인으로 대한민국 건국에 공로가 컸고, 특히 초대 주미대사로 한국전쟁 발발 직후, 유엔군의 참전을 이끄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불행히도 5.16 구테타로 물러나는 바람에 역사적으로 저평가되었으나, 그는 한줄기 청신한 빛처럼 한국민주주의 역사에서 잊지 못할 정치인이다.

장면가옥은 그리 크지 않은 규모로 아담한 느낌을 주었다. 한식, 일식, 서양식이 혼합된 주거양식이어서 마치 한국의 근. 현대사를 집약해 놓은 것 같았다. 옛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안채와 사랑채를 둘러보니 한 올의 사치나 허식(虛飾)이 없이 정갈하고 단정했다. 마치 생전의 장면박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장면가옥에서 조금 더 내려오니 왼편에 국내 최초의 한옥 동주민센터인 혜화동주민센터가 있었다. 겉모습으로도 한옥의 멋과 품격, 그리고 정겨움이 풍겨 보기 좋았다. 이곳도 한번 기웃거리고 싶었으나, 시계를 보니 혜화동 일대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포기했다. 그리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삶의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YS를 추억하며  (1) 2018.11.23
혜화동 연가(戀歌) (2)  (4) 2018.11.01
혜화동 연가(戀歌) (1)  (3) 2018.10.27
천하에 아까운 사람, 고(故)김광조 박사  (0) 2018.08.20
에필로그  (0) 2018.04.16
시지프스의 바위  (5) 2018.02.16
글쓴이 현강재 현강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조덕규 2018.10.28 22:18 Address Modify/Delete Reply

    우리 젊은 시절의 꿈과 추억이 배어있는 그곳, 혜화동 골목과 로타리, 그 이름만 들어도 그리워지는 우리의 영원한 고향일세.
    어떻게 그 많은 골목과 인물들의 발자취를 60년의 세월을 뛰어 너머 온전히 기억하시는가. 덕분에 나도 친구들과 어울려 즐거웠던 아련한 그 시절을 회상할 수 있었네. 잘 읽었네.

  2. 강세진 2018.11.16 21:39 Address Modify/Delete Reply

    최종적으로 창경? 혜화? 어디 다니셨어요? 궁금합니다. 010-7641-0077 창경29회 졸업생 강세진입니다

  3. 강세진 2018.11.16 21:42 Address Modify/Delete Reply

    혹여 창경졸업하신 안병영부총리님 아니신가 여쭈어 봅니다

 * 작년 이맘때 급서(急逝)한 고 김광조 박사의 서거 1주기 추도모임이 8월 11일 유네스코아시아태평양 국제이해교육원에서 있었다. 김 박사는 1955년 경주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대학교에서 교육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0-2008 년간 교육부에 근무했다. 마지막 직책이 교육인적자원부 차관보였다. 이어 그는 2009-2017 년간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지연본부 본부장을 지냈다. 아래 글을 그날 내가 한 추도사다.  


          천하에 아까운 사람, 고(故)김광조 박사


우리 모두가 진정으로 좋아하고, 사랑하며, 또 내심 존경하는 김광조 박사가 우리 곁을 떠난 지 오늘로 만 1년이 되었습니다. 한 해가 지났지만  김광조라는 귀중한 인재를 잃은 충격과 상실감은 여전하고 가슴 시린 안타까움과 그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은 오히려 더 사무치는 느낌입니다.


돌이켜 볼 때, 김광조 박사는 능력과 인품 모두에 있어 탁월한 인재였습니다. 그는 교육부, 월드뱅크, 그리고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본부에서 일하는 동안 어디서나 누구도 감히 따를 수 없는 치밀한 기획력과 강한 추진력, 그리고 창의성으로 큰 족적은 남겼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일에 대한 열정과 헌신은 가히 전설적이었습니다. 

교육부에서 그는 <5.31 교육개혁>의 창안 및 집행과정에서 발굴의 능력을 과시하였고, 교원정책, 고등교육, 직업교육, 평생교육, 그리고 인적자원개발정책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주지하듯이 그는 2006년 <글로벌 인재포럼>의 창설주역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월드뱅크에서  Senior Education Specialist로 일하면서, 중국, 중남미, 인도양, 아라비아 반도에 이르기 까지 세계 곳곳을 누비며 소외지역의 교육발전을 위해 크게 공헌을 하였습니다. 월드뱅크로부터 최상의 평가를 받은 것은 물론입니다. 그런가 하면 유네스코 아태지역본부장이라는 막중한 직책을 수행하는 동안 유네스코 정신을 선양하고 낙후된 지역의 문화유산을 발굴하고, 전승, 보존하는 데 앞장을 섰습니다. 그는 몸소 아태지역의 후미진 오지 곳곳을 돌며 현장에서 해답을 찾는 에너지 넘치는 현장답사형 지도자였습니다. 김광조 박사는 이렇듯 해외에서 견문을 넓히고 업적을 쌓으면서 걸출한 세계인으로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우리는 동아일보가 언젠가 그를 <10년 후 세계를 빛낼 100인>의 한 명으로  선정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김광조 박사는 능력뿐만 아니라 인품과 인간성에 있어서도 남다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아랫사람, 동료들, 그리고 윗사람 모두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는 매우 드문 유형의 인재였습니다. 누구나 그와 더불어 일하고 싶어하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늘 밝게 미소짓는 얼굴과 적절히 깃들인 유머로 그는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서로 어울려 한마음으로 일하도록 고무. 격려 했습니다. 저는 그와 일하는 동안, 한 번도 그의 어둡고 그늘진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지식인 특유의 오만이나 냉소주의도 그에게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풍부한 인간성은 특히 조직이 어렵고 힘들 때, 위기에서 빛을 발했습니다. 그가 떠난 후 태국의 유수한 신문인 <Bankok Post>에 실린 김 박사를 기리는 장문의 Special Report에 따르면, 그가 본부장으로 일할 때 한 동안 아태본부는 최악의 재정위기에 허덕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김 박사 특유의 포용적 리더십과 열정으로 그 절체절명의 위기를 비교적 단기에 극복했다고 전합니다.


그는 무엇보다 겸손한 인간이었습니다. 하버드에서 박사를 하고 교육부의 고위직을 두루 거쳤지만, 그는 언제, 누구에게나 겸손하고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언필칭 ‘촌놈’이라고 부르기를 즐겨했습니다. 저는 그의 이러한 풍부한 인간성이 그가 이룬 그 많은 업적의 바탕이자 인격적 바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점이 우리가 그에게서 배워야 할 큰 덕목이라고 믿습니다.


그런가 하면 김광조 박사는 예술과 문화에 남다른 감각과 조예, 그리고 능력을 갖췄습니다. 그의 방패연 만들기는 가히 장인 수준이고, 대금과 더불어 뒤늦게 배운 클래식 기타 또한 많은 이들 앞에서 독주 공연하는 실력이었습니다. 저는 그가 늘 자랑하던 자신의 고향, 바로 한국의 문화수도인 ‘경주의 아들’ , ‘혜초의 후예’ 답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듯 리더십, 능력과 인품을 고루 갖춘 세계인, 문화인 김광조 박사는 모든 맥락에서 비단 교육부를 넘어, 한국 공무원의 귀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런 고루 갖춘 빼어난 재목을, 이 아름다운 보석을 어디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김광조 박사가 유네스코 아태본부장을 마치게 되자, 그를 아는 모든 이가 이제 그의 성숙한 리더십과 열정적, 창조적 에너지가 나라를 위해 더 큰 빛을 발할 것이라는 데 누구도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의 급서에 우리 모두가 말을 잃고 하늘의 무심함에 가슴을 쳤습니다. 


김광조 박사를 추억하면서 저는 잠시 그의 철학과 정신세계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교육자의 아들로 태어나서 평생 교육에 헌신하면서 인류의 미래는 교육에 있다는 굳은 신념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는 특히 소외지역, 그늘진 변방의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고, 그러기에 그 아이들에게  보다 밝은 미래를 선사하는 데 온갖 정성과 노력을 경주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교육복지의 모범적 실천자였습니다. 이렇게 된 데는 그의 월드뱅크와 유네스코 아태지역본부에서의 경력과 산 체험이 크게 작용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어디서 태어나고 어떤 상황에 처해도 ‘양질의 교육’ a quality education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그의 신념을 자주 피력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들 아이들이 더 낳은 미래를 만들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역설했습니다.

김광조 박사는 특히 행복과 평화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그것을 선양하는데 놀라운 열정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모든 이가 배움과 삶의 과정에서 행복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행복의 원천은 바로 가정이라는 점을 자주 설파했습니다. 이는 사랑하는 아내, 두 아들과 더불어 더 없이 모범적인 가정을 꾸며 온 그의 삶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김광조 박사는 특히 말년에 평화에 몰두하면서 평화의 전도사로 자처하며, 자신을 평화에 봉헌할 뜻을 자주 피력했습니다. 그의 큰 비전은 ‘보다 지속가능하고, 평화롭고, 형평에 걸 맞는 세상’ a more sustainable, peaceful and equitable world'를 구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회 있을 때 마다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그의 음악적 자질을 살려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그의 평화의 메시지는 분명했습니다. “우리가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교육을 통하여 평화의 씨앗을 모든 이의 마음에 심어야 한다”는 게 그 요지였습니다. <교육을 통한 평화>, 그것이 그가 모든 열정을 다해 추구하였던 자신의 미래 역할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이 유언과 같은 메시지를 특히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Bangkok Post는 그를 가르켜 ‘A True Champion of Education and Peace'라고 명명했습니다.


저는 김광조 박사와 남다른 인연이 있습니다. 1970년대 중반 당시 투옥된 이문영 교수님을 대신해서 고려대학교 행정학과에 강의를 나갔는데, 그 때 74학번인 김 박사를 직접 가르쳤습니다. 이런 연분 때문에 제가 교육부에 있을 때나, 나온 후에도 비교적 격의 없이 그와 사적인 대화를 자주 나눴습니다. 

그런데 바로 작년 5월 말, 그가 아태지역본부장 퇴임을 앞두고 잠시 귀국했을 때,  김영철 당시 강원도 부교육감과 함께 강원도 고성으로 저희 집을 찾아 왔습니다.  5월의 꽃향기 아래 화사한 봄날이었습니다. 그는 무척 건강해 보였고, 귀국을 앞두고 조금 들떠있었습니다. 그 때 김 박사는 저와 함께 제 농사터를 돌면서 한창 익어 가는 체리와 오디, 보리수를 따서 입에 넣으며 자신의 농사지식을 펼쳐 보였습니다. 그런데 10년 농사꾼인 저 보다 아는 게 훨씬 많았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 웬일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선생님, 제가 원래 ‘촌놈’ 출신이 아닙니까”라고 대답해서 함께 크게 웃었습니다. 그 때도 그의 관심은 온통 평화였습니다. 그러면서, “완전 귀국하면 제가 클래식 기타를 들고 와서 평화를 연주하겠습니다. 아마 제 기대 이상의 실력에 놀라실 것입니다”라며, 내게 오기 전날 손수 만든 새 방패연 두 개를 선사했습니다. 그 때 받은 방패연은 그가 본부장으로 떠나기 며칠 전 만들어 주었던 두 개의 다른 방패연과 함께 제 거실에서 매일 저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 연들을 볼 때 마다 저는 자랑스러운 내 제자 김광조와 만난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사람, 겉과 속이 모두 아름다운 사람, 그리고 천하에 아까운 사람, 김광조는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날이 갈수록 더 선명한 모습으로, 더 사무치게 그리운 얼굴로 우리를 찾아와 새벽처럼 우리의 영혼을 깨우며, 우레와 같은 목소리로 ‘교육을 통한 평화’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삶의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혜화동 연가(戀歌) (2)  (4) 2018.11.01
혜화동 연가(戀歌) (1)  (3) 2018.10.27
천하에 아까운 사람, 고(故)김광조 박사  (0) 2018.08.20
에필로그  (0) 2018.04.16
시지프스의 바위  (5) 2018.02.16
40년 만의 해후  (0) 2017.12.04
글쓴이 현강재 현강

댓글을 달아 주세요

에필로그

삶의 단상 2018. 4. 16. 05:47 |

당초 3월로 예정했던 <복지국가와 사회복지정책>(다산출판사)의 출간이 다소 늦어지고 있다.  5월에나 나올 것 같다.  그간 내용을 좀 더 다듬고, 책 말미에 <에필로그>를 덧붙였다. <에필로그>에는 이 책이 쓰게 된 의도와 한국 복지국가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간략히 서술했다. 아래에 <에필로그>를 담는다.

 

 

                                       에필로그

 

 

                                     I.

복지국가의 등장으로 서구사회의 시민들은 이미 성취한 공민권(civil rights)과 정치권(political rights)에 이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권(social rights)을 보장받게 된다. 그러나 복지국가로의 도정은 어느 나라에서나 그리 평탄한 길이 아니었다. 복지국가의 역사는 나라마다 그 나라 특유의 역사문화적 유산과 사회경제적 형편, 그리고 정치제도적 틀 속에서 어렵사리 한 걸음씩 보다 인간다운 사회를 지향하며 가시밭길을 헤쳐 온 결과이다. 아직 불완전하지만 시나브로 복지국가는 우리 곁에 다가와 있다.

 

현대 복지국가는 한결같이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경제적 역동성과 사회적 결속을 함께 이루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이념적으로 따지자면 자유와 평등의 변증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혁명적 체제변화를 추구하기보다 점진적, 합의적 개혁을 통하여 시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고 과도한 사회적 불평등을 줄이는 데 역점을 둔다. 성공적 복지국가들은 하나같이 이념적 편향이나 교조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이상을 추구하되 차디찬 현실과 마주하며 민생정치의 관점에서 합의적, 실용주의적으로 문제에 접근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현대 복지국가의 대명사인 스웨덴의 대표적 사민당 이론가인 비그포로스는 복지국가의 길을 잠정적 유토피아를 향하여 작업가설(working hypothesis)을 세우고 이를 실천ㆍ검증하는 작업이라고 명명했다. 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우리도 한국이라는 시()와 공()을 바탕으로 우리의 문제해결을 위해 냉철하게 현실을 분석하고 상황에 맞는 작업가설을 세우고 이를 효율적으로 실천ㆍ검증하며 깊은 성찰 속에 우리의 유토피아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따라서 교조적 유토피아에 집착하거나 서구 선진국가의 복지국가의 시스템이나 정책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은 삼가야 할 일이다.

 

그런데 우리의 형편은 어떠한가. 복지국가나 사회복지정책이 쟁점으로 부상하면 으레 이념적으로 편이 갈리어 결렬한 대결적 양상을 연출하기가 일쑤이다. 그런 과정에서 정제되지 못한 이데올로기를 앞 세워, 이슈를 시장 대 반()시장의 관점으로 환원하거나 심지어는 체제유지 대 체제변혁의 문제로 비화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러한 이념적 양극화 현상은 한국형 복지국가를 보다 합리적, 사회합의적으로 모색하는 데 결정적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 사회복지정책에서 규범적 고려는 필요하나 그것은 기능적 필요와 경제사회적 여건과 연계되어 논의되어야 한다. 이 책은 복지국가 담론을 좌, 우의 설익은 교조주의에서 해방시켜 논의의 기본적 축을 실용주의적 접근과 정책분석의 차원으로 옮겨 보자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 책을 집필한 네 명의 필자는 아래의 논점에 대해 관점을 같이 한다.

 

1) 사회복지는 국가, 시장, 가족, 비영리조직 등 다양한 복지제공주체들이 수행하는 복지활동의 총합이다. 국가가 국민 전체의 복지증진을 위해 가장 큰 책임을 지고 있으나, 복지혼합(welfare mix)의 관점에서 개별 주체 간의 적절한 역할분담에 대한 합리적 논의가 중요하다.

 

2) 사회복지정책은 경제정책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사회투자적 관점에서 사회복지정책을 합리적으로 설계하면 경제발전과 고용성장에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다. 경제정책과 사회복지정책의 선순환이 가능함으로 경제와 사회의 통합적 인식이 필요하다.

 

3) 사회복지정책은 실용주의와 점진개혁에 중심축을 두고 정책혼합(policy mix)을 구성해야 한다. 보편주의 대 선별주의, 공공부문 대 민간부문, 평등 대 효율 간의 날 세운 이념적 논박보다는 개별 정책영역과 전체적 복지지형을 고려하여 실용적이고 지속가능한 사회복지 정책수단을 찾아가야 한다.

 

4) 한국 복지국가는 발전의 역사가 짧고 아직 내용도 미흡하며, 제도적 기반도 정치적 지지도 취약하다. 그런 가운데 나날이 늘고 있는 사회적 위험과 복지수요에 대응하여 복지국가로의 도정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그것이 이념이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추구되어서는 안 되며, 현실의 증거에 기반한 열린 토론과 합리적인 정책분석, 그리고 사회적 합의를 거쳐야 한다.

 

                                       II.

 

한국사회는 이제 1인당 국민소득 3만불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총체적 경제성과에도 불구하고 그 성장의 뒤안길에는 짙은 그늘이 길게 깔려있다. 우선 해마다 빈부격차가 벌어지고 있으며 안정적 중산층의 비율이 줄어들고 있다. 이와 더불어 사회적 이동성의 저하로 사회계층구조가 고착화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러한 경제적 양극화와 사회적 이동성 저하는 우리사회의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고 사회적 활력을 낮춰 한국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에 저해가 될 뿐만 아니라, 이 나라 국민으로서의 자부심과 행복지수를 크게 떨어뜨린다. 아마도 거시적, 종합적 정책개혁 없이는 이러한 부정적 추세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우선 복지국가와 사회복지정책의 차원에서 우리가 크게 고려할 사항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사회는 가속화되는 고령화와 지식사회로의 전이 속에서 신ㆍ구 사회적 위험 모두에 맞서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속적 고용(sustainable employment)을 유지하는 가운데 국민 복지를 증진하기 위해서는 유연안정성(flexicurity)'과 평생학습의 개념을 슬기롭게 적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의 결합이 필수적이며, 아울러 견고한 사회보장체제가 이를 강력하게 뒷받침해 줄 필요가 있다. 이와 더불어 생애주기에 걸친 평생학습체제의 구축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하지만 이들 모든 정책분야에서 본질적 개혁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이 중 사회보장체제, 특히 소득보장 분야만 하더라도 빈틈이 많고 소득대체율이 너무 낮다. 기초보장제도의 사각지대가 광범하게 존재할 뿐만 아니라, 쌍용차 사태 등에서 보듯이 중산층 근로자들조차도 실업과 노령으로 인한 소득상실의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따라서 우선 기초보장 사각지대의 해소와 중산층도 의지할 수 있는 탄탄한 소득보장제도를 확립하는 가운데 노동시장의 유연화 조치와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을 결합해 나가야 한다.

 

둘째, 우리 사회의 가속화되는 소득격차와 사회적 이동성의 저하를 막아야 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능력과 성과에 따른 보상과 이에 따른 시장의 불평등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사회경제적 차이 때문에 타고난 능력을 계발하지 못하고 계층의 사다리를 올라가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부정의하고 지속적 성장을 이룰 수 없다. 따라서 국가는 소득보장의 강화와 더불어 시민들이 변화하는 노동시장의 수요에 부응할 수 있게 성인기 평생교육과 훈련을 제공해 지속적 고용을 위한 직업능력 배양에 힘써야 한다. 인지능력이 형성되고 자아와 성취동기가 발달하는 유아와 초등학교 시기도 매우 중요하다. 특히 저소득계층과 낙후지역의 아동들도 중산층이 누리는 교육기회를 공적으로 제공받을 수 있게 해 출발선의 평준화를 이루어야 한다. 공보육과 공교육의 역할 강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다.

 

셋째, 사회보장제도의 지속가능성과 효율성 제고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친복지 진영에서는 보장율만 높이려하고, 재정적 지속가능성과 효율성에 대한 강조는 우파적 시각 혹은 시장논리로 여기고 터부시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회보장제도의 보장율을 높이게 되면, 이에 부응하는 재원을 확보해야 한다. 퇴직()금 시장으로 흘러들어가는 복지자원을 국민연금의 보장성강화를 위한 재원으로 활용하고, 정치적 부담이 있더라도 사회보험료 인상 등 증세에 대한 국민적 동의를 구하는 노력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재정적 지속가능성을 확보해야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얻고 미래 세대의 부담도 덜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복지증세를 하더라도 예산 제약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따라서 동일 재원으로 최대의 사회복지 효과를 보도록 사회보장제도를 효율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특히, 사회복지서비스 전달체계의 비효율성을 최소화하고 지역사회의 특성에 맞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 분권화 및 경쟁방식 도입, 민관협력, 복지수급자의 선택권 확대 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와 함께 지역주민에 대한 책임성을 확보하기 위해 주민참여 및 사회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 민간기관에 대한 내실 있는 관리감독도 필요하다. 이 모든 것들을 통해 안정된 재정적 기반위에 양질의 서비스가 제공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복지국가의 물질적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해 경제의 활력과 혁신을 도모해야 한다. 경제와 복지를 상충관계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경제발전이 복지국가 발전의 충분조건은 아닐지라도, 가장 중요한 필요조건이다. 경제발전 없이는 고용도 복지를 위한 재원확보도 어렵다. 시대에 뒤떨어진 규제를 없애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고, 혁신과 창업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혁신은 경쟁과 창조적 파괴를 의미한다. 앞서 지적했듯이, 구조조정의 낙오자들에 대한 소득보장과 전직 훈련이 충분하게 공적으로 주어져야 할 것이다. 복지와 경제의 선순환은 혁신과 사회적 안전망의 결합 속에 꽃을 피울 것이다.

 

한국복지국가는 발전의 기로에 서 있다. 이제 복지를 좌우의 문제도 이념의 문제도 아닌, 우리사회의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는 유용한 수단의 하나로 바라보자. 작업가설을 세우고, 현실의 증거에 기반해 한국형 유토피아를 만들어 가자. 이 책이 유용한 작업가설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마지 않는다.

 

20184

 

안병영, 정무권, 신동면, 양재진

'삶의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혜화동 연가(戀歌) (1)  (3) 2018.10.27
천하에 아까운 사람, 고(故)김광조 박사  (0) 2018.08.20
에필로그  (0) 2018.04.16
시지프스의 바위  (5) 2018.02.16
40년 만의 해후  (0) 2017.12.04
가을 여정(旅情)  (2) 2017.10.12
글쓴이 현강재 현강

댓글을 달아 주세요

시지프스의 바위

삶의 단상 2018. 2. 16. 09:03 |

지난 두달 동안 제자들과 함께 쓰는 책을 마무리하느냐 무쩍 바뻤다. 아마 3월 중 나올 새 책 <복지국가와 사회복지정책> (다산출판사)의 머리글을 아래에 옮긴다. 이 책이 나오기 까지의 역정이 그 안에 담겨있다.

 

 

                         머리글

 

  필자가 <다산출판사> 강희일 사장님과 이 책을 쓰기로 처음 계약을 한 게 1978년이었다. 그러니 이 책은 세상의 빛을 보는 데 만 40년 걸렸다. 비록 제때 약속을 지키지 못했지만, 나는 그 장구한 세월 동안 이 글빚을 하루도 잊지 않고 살았고, ‘좋은 책을 쓰고 싶은 열망을 조금도 식히지 않았다. 그 동안 책 제목도 <복지행정>에서 <사회복지정책>으로 그리고 마침내 <복지국가와 사회복지정책>으로 바뀌었고, 책의 구성과 내용도 당초의 구상과는 사뭇 달라졌다.  책의 분량도 두배 이상 증가했다. 무엇보다 크게 변한 것은 저자가 네 명으로 는 것이다.

 

  그동안 나는 나름대로 이 책 집필에 그리 소홀히 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런데 책이 제법 진척이 되어 고비를 넘겼다 싶을 때면, 중요한 학교 보직을 맡거나 정부에 들어가게 되어 한동안 손을 놓게 되곤 하였다. 그런데 일을 마치고 돌아와 보면, 미리 썼던 내용이 학문적 추세에 뒤떨어져 이미 낡은 것이 되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새로운 결의로 번번히 다시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주, 커다란 바위를 산 꼭데기로 밀어 올려 정상 근처에 이르면 그 바위가 다시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시지프스의 신화>를 떠 올렸다.

 

  힘겨워도 좋은 책을 써야겠다는 욕심 속에 숱한 고통과 몇 번의 좌절을 맛본 후, 나는 결국 몇 년전 연부역강(年富力強)한 제자 세 명과 공동집필을 하기로 작정했다. 고맙게도 정무권(연세대), 신동면(경희대), 양재진(연세대) 세 교수가 흔쾌하게 동의했다. 그들은 연세대 대학원 시절 내가 이 책의 집필 때문에 고심하는 모습을 옆에서 가까이 지켜본 제자들이다. 이들은 이미 복지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고 있는 학계의 큰 별들로 성장했고 하나같이 청출어람(靑出於藍), 스승인 나를 뛰어넘은 지 오랜 학자들이다.

 

  네 명의 필자는 그간 학제적(學際的) 연구모임인 <사회정책연구회>에서 자주 만나 학문적 교류를 지속하고 있다. 더욱이 네 사람은 늘 한국 사회에 최적화된 복지국가 모형이 무엇인가에 대해 심층적인 토론을 함께 해 왔다. 따라서 그러한 지적 교감이 아마도 이 책 속에 자연스레 스며들었을 것으로 확신한다.

 

  이 책은 아래에 구체적으로 밝혔듯이 네 명이 일단 절 별로 나누어 집필했다. 아울러 지난 1년 반에 걸쳐 네 차례의 워크숍을 통해 각자의 원고를 함께 읽고 토론을 통해 합의 하에 첨삭, 수정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그리고 완결된 원고를 다시 돌려 서로 콤멘트를 주고받고, 각자가 마지막으로 다듬었다. 이 과정에서는 사제 간, 선후배 간의 사적 관계는 완전히 배제되고, 모든 관계는 좋은 책만들기 위한 일의 관계로 환원되었다. 네 명이 합의했던 집필원칙은 글은 가능한 한 쉽게, 그러나 내용은 풍부하게하자는 것이었다.

 

  이 책은 복지국가를 논의의 중심축으로 하여, 사회복지 정책과정과 복지제도를 살펴보고, 이어 한국의 사회복지정책을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집필과정에서 필자들의 사회복지학, 행정학, 정치학, 정책학, 사회학, 정치경제학 지식이 학문의 벽을 넘어 총동원되었다. 따라서 책 자체도 어느 하나의 학문분과에 귀속되는 저서라고 규정하기는 어렵다. 이 책은 대학교 고학년, 대학원 학생들을 위한 교재로는 물론, 이 방면에 관심이 큰 정치가, 전문행정관료, 복지정책 전문가 및 지성인 들에게도 두루 유용할 것으로 생각된다.

 

  꽤나 외람된 말씀이지만, 필자들은 감히 이 책이 우리가 열망했던 좋은 책의 반열에 올랐다고 자부한다. 아울러 이 책은 어떤 복지국가냐의 논란 속에 있는 오늘 한국의 현실에서 가장 절실하고 시의적절한 책이라고 감히 말 할 수 있다.

 

  필자 네 명 중 막내인 양재진 교수가 간사 역할을 하며 책의 준비 및 출판과정에서 크게 수고했다. 책의  목차 구성에서부터 네 번의 워크숖 주선, 글 재촉, 출판사와의 조정작업에 이르기까지 온갖 궂은 일을 다 맡았다. 그의 당찬 추진력과 열성이 없었다면, 시지프스의 고통을 더 이어 갔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 책의 출간을 가장 기뻐할 사람은 아마도 내가 아닐까 생각한다. 40년 이끼낀 묵은 약속을 지키게 된 것도 그렇거니와, 여든 문턱에서 50대의 옛 애제자들과 함께 책을 집필할 수 있었다는 것은 더 없는 축복이 아닌가. 학자로서 어디 그 이상의 행복이 있을까.

 

  다산의 강희일 사장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지난 40년간 그는 줄곧 내가 언젠가 책을 끝낼 것을 믿어 주셨다. 그러면서 한 번도 책 재촉을 하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그의 무한신뢰가 좋은 책을 써야겠다는 내 결의를 다지게 만들었던 게 아닌가 싶다. 시간에 쫓기면서도 치밀하고 알뜰하게 편집 및 출판과정을 보살 펴 주신 양선영 편집부장께도 큰 고마움을 전한다.

 

           

                                       설악산 기슭 현강재에서

 

                                               집필자를 대표해서 안 병영 씀

'삶의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하에 아까운 사람, 고(故)김광조 박사  (0) 2018.08.20
에필로그  (0) 2018.04.16
시지프스의 바위  (5) 2018.02.16
40년 만의 해후  (0) 2017.12.04
가을 여정(旅情)  (2) 2017.10.12
딸과의 약속  (2) 2017.08.22
글쓴이 현강재 현강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서남수 2018.02.18 15:19 Address Modify/Delete Reply

    "좋은 책"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한 동안 새 글을 올리지 않으셔서 좀 의아한 생각까지 들었는데 그 동안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을 하시느라 바쁘셨군요. 아직 내용을 알 수는 없으나 복지 문제를 이념적으로만 바라보는 우리나라 실정에서 부총리님의 새 저서는 복지국가를 향한 중요한 이론적, 실제적 이정표가 되리라 믿습니다. 거듭 축하드립니다.

  2. 현강 2018.02.19 09:30 Address Modify/Delete Reply

    서 장관님, 대단히 고맙습니다.
    글을 올리고 나니 제 자랑을 한 듯해서 마음이 조금 불편합니다.
    그런데 저로서는 감회가 남달라서 그 심경을 머리글에 토로했습니다.

  3. 김익로 2018.02.20 21:33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부총리님!!!
    <복지국가와 사회복지정책> 3월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雪裏春色이라더니 40년전 출간 약속시 이미 '안'시지프스의
    산고는 숙성되고 있었다고 믿습니다.
    부총리님, 다시 한 번 존경과 축하를 드립니다.
    그리고 정무권,양재진 교수님!!!
    안부전해 올리오며 축하를 드립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4. 현강 2018.02.21 10:12 Address Modify/Delete Reply

    김익로님 고맙습니다.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격려해 주셔서 아직도 늘 옆에서 보살펴 주시는 것 처럼 느낌니다.
    날씨가 풀리면 꼭 북한산 한번 같이 오릅시다.
    올해에도 댁내에 건강과 행복이 충만하기를 빕니다.

  5. 김익로 2018.02.26 14:21 Address Modify/Delete Reply

    예, 부총리님!!!
    서울 오실 때 연락 주십시요!!!
    좋은 코스를 생각해 놓고 기다리겠습니다!!!

40년 만의 해후

삶의 단상 2017. 12. 4. 13:43 |

  내가 30대 중후반 한창 때 (1976-1977년간), 연세대에서 대학신문 <연세춘추> 주간을 했다. 그런데 얼마 전 그 때 고락을 함께 했던 학생기자들 15명과 40년 만에 다시 만났다.

  <연세춘추>는 실로 엄혹했던 유신말기에 대학언론 중 가장 앞장서서 결기 있게 민주화를 외쳤고, 그 때문에 사찰, 배포중지 등 적지 않은 탄압과 고초를 겪었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같이 빼어난 학생들이 대학신문기자를 지망했고, 한, 두해 앞선 선배기자들이 그 중에서 글 잘 쓰고 당차고 기개 있는 새 기자들을 엄선해서 뽑았다. 주간인 나는 인선과정에 개입하지 않고, 그냥 추인만 했다. 그래야 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그들은 시대의 양심으로, 또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로서 대학의 명예와 존엄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을 불살랐다. 무엇보다 그들의 순수와 열정이 돋보였다. 당시 나는 수많은 기관원들의 감시와 압박 속에서, 학생기자들을 보호하며 그들의 열망과 용기에 찬물을 끼얹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했다. 그러자니 하루하루가 무척이나 힘겹고 애타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그 어려웠던 시절, 당시에는 하루빨리 그 질곡에서 벗어나고 싶기만 했던, 그 절망과 좌절의 순간들이 늘 내게 가슴 뛰는 낭만으로 다가오니,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들과의 해후 전날부터 가슴이 설랬다.

 

  <교수-학생> 관계라기보다 <가족>과 <동지> 같았던 그들을 40년 만에 다시 만나니, 실로 감개가 무량했다. 곧 40년이라는 아득한 세월의 강을 뛰어 넘어 격의없는 담소를 나누며, 오랜만에 함께 많이 웃었다. 같이 늙어가다보니 모두가 이제 친구가 되어 있었다.

  20대 초 꽃 같던 여학생 기자들이 이제 환갑을 넘은 할머니가 되었고 머리에 이미 힌 서리가 앉았다. 정년을 몇 년 앞둔 몇몇 교수들을 제외하면, 대사, 고위관료, 국회의원, 언론인인 그들의 직함 앞에 전(前)자를 붙여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그 중 한 명인 유명 가수 <알리> 아빠가 딸 때문에 인사를 많이 받았다.

 

마지막 사진은 40년 전 1977년 1월 <연세춘추> 설악산 수련회 때 찍은 사진이다.

 

 

 

 

 

 

'삶의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필로그  (0) 2018.04.16
시지프스의 바위  (5) 2018.02.16
40년 만의 해후  (0) 2017.12.04
가을 여정(旅情)  (2) 2017.10.12
딸과의 약속  (2) 2017.08.22
'학점 인프레' 유감  (0) 2017.06.26
글쓴이 현강재 현강

댓글을 달아 주세요

가을 여정(旅情)

삶의 단상 2017. 10. 12. 05:22 |

                                         I.

  나이가 들수록 농사짓는 일이 힘겨워 무덥고 길었던 여름철이 지나자 어딘가 훌쩍 떠나고 싶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자주 아팠던 내 처도 그런대로 건강이 얼마간 회복되어 오랜만에 가을 여행 얘기를 꺼냈다. 그래서 합의한 것이 유럽여행이었다. 이런 저런 궁리를 하다가 결국 여행사 <투어>를 따라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다행히 천안 사돈 내외와 속초 K형 내외가 함께 가기로 해서 힘을 얻었다. 그래서 지난 9월 19일부터 30일까지의 11박 12일의 이른바 <동구 및 발칸 7개국 여행>을 다녀왔다.

 

  일행이 23명이었는데, 중, 장년 층 여성이 다수였고, 거기에 평균 나이 <78세+>의 6명의 우리 노인그룹이 끼었다. 여행은 강행군이었다. 불과 11일 동안에 7개국을 돌았으니, 정말 <주마간산>식, <번갯불에 콩 구어 먹는>식 여행이었다. 어떤 날은 국경을 세 번이나 넘나들며, 명소 중심으로 점을 찍듯 10여개 도시를 스쳤다. 무척 힘겨웠지만, 시종 얼마간 고무된 기분이었다. 우선 절기가 좋았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계절에 차창밖에 펼쳐지는 풍요한 들녘을 바라보며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모처럼의 유럽여행을 만끽했다. 몸이 시원찮은 내 처는 어려운 코스는 미리 포기하며 컨디션을 조율했다. 그러나 80세 전후의 상노인들이 중. 장년층과 동일한 스케줄을 소화하며 별로 뒤처지지 않고 잘 따라다녔다는 것도 나름 대견한 일이 아닌가.

 

  나와 내 처에게는 이번 여행은 가을 서정을 담은 추억여행이었다. 아스라한 옛날 (1965-1970년)에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그곳에서 결혼하고 남매를 낳았다. 그래서 오스트리아는 내게 20대 후반 청년기의 온갖 추억이 깃 들인 제2의 고향이다. 이후에도 이런 저런 일로 독일, 체코, 헝가리는 여러 번 들렸기 때문에 이번 여행지역은 비교적 익숙한 곳이다. 실제로 이번 방문지 중 진짜 초행길은 보스니아 한 곳이었다. 하지만 옛 추억을 더듬고 되새김하면서 불현듯 뇌리에 떠오르는 기억의 조각들을 낙수(落穗) 줍듯 차곡차곡 가슴에 담는 재미도 쏠쏠했고, 과거에 그냥 지나 쳤던 문물과 풍정들을 이번 여행길에서 재음미, 재해석하면서 새로운 깨달음과 가슴 벅찬 감흥을 느낀 것도 알찬 수확이었다.

 

  여정이 불과 12일이었는데, 그 사이에도 계절의 변화는 빠르고 섬세했다. 분명 초가을에 시작한 여행이었는데, 돌아 올 즈음에는 가을이 무르익어 곳곳에서 나뭇잎이 노랗고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 짧은 기간 중에 운무(雲霧)에 싸인 알프스 기슭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아드리아 해변에 이르는 먼 길을 누비면서 가슴에 스며드는 가을의 정취와 갖가지 색깔의 이국적 풍정을 고르게 즐겼다.

 

 

                                     II.

  우리가 방문한 7개국은 인접해 있으나 나라마다 다양한 역사와 문화를 지녔고 생활수준에서도 차이가 컸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전형적인 선진 서방 유럽국가인 데 비해, 체코, 헝가리와 발칸반도에 있는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및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는 구(舊) 동구 공산권 국가였다. 체코와 헝가리는 민주화 이후 크게 발전을 해서 이미 구태를 일신, 모든 면에서 서방국가에 근접하고 있었다. 민주화 이후 몇 년 지난 후까지 도시 건물의 오래 찌든 때가 씻기지 않아 검회색 빛이 두드러졌던 프라하와 부다페스트는 이제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밝게 빛나고 있었다. 발칸반도에 있는 구(舊) 유고슬라비아 국가 간에도 차이가 컸다. 가톨릭문화권인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서방화의 속도가 빠른데 비해, 무슬림과 정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1990년대 발칸내전의 피해가 컸던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는 아직도 낙후되어 지난 시대를 머금고 있었다. 7개국을 돌며, 정치체제와 역사. 문화가 인간의 삶에 미치는 지대한 영향을 다시 한번 절감할 수 있었다.

 

 거듭 말하거니와 이번 여행지는 내게 전혀 낯선 곳이 아니었다. 빈과 뮌헨, 잘츠부르크는 내가 살았거나 옆집처럼 자주 방문했던 품안의 도시들이고 다른 곳들도 두어 곳을 제외하면 적어도 한, 두 차례 들렸던 곳들이다.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눈앞에 보이는 것을 흥미 있게 <구경>하기보다는, 현상 속에 깊이 담겨져 있는 본체적인 것을 심안(心眼)에 비추어 바라보는 이른바 <정관(靜觀)적 접근>을 해 보려고 애를 썼다. 별로 성공한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러한 노력이 이번 여행의 의미를 더 한 것은 사실이다.

 

  이번 유럽여행에서 크게 인상적이었던 것 이제 한국인들의 시간 및 공동체 관념이 무척 높아 졌다는 것이었다. 12일 짧지 않은 여행기간 중, 23명의 일행들 모두가 모든 약속시간을 칼날같이 지켰고, 각자가 자율적인 가운데 적절한 양보와 배려로 한 번도 눈살 찌푸리는 일이 없었다는 일이다. 이게 어디 쉬운 일인가.

 

 

                                     III.

  우리 6인방이 딴에 노익장을 자랑했지만, 무리한 여행의 뒤끝은 만만치 않았다. 팽팽한 긴장 속에 아슬아슬하게 여행을 마쳤으나, 귀국 후 내 처는 여독으로 몸져누었다. 열흘을 크게 앓다가 어제야 겨우 일어났다. 천안의 사부인도 며칠 고생하셨다는 소식이다.

 

 오늘 아침 내가 처에게 물었다.

  “역시 무리였지, 괜한 짓을 한 것 아냐”

그러자 내 처가 해쓱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냐. 좋았어. 정말 잘했던 것 같아”

'삶의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지프스의 바위  (5) 2018.02.16
40년 만의 해후  (0) 2017.12.04
가을 여정(旅情)  (2) 2017.10.12
딸과의 약속  (2) 2017.08.22
'학점 인프레' 유감  (0) 2017.06.26
내 사랑 영랑호  (5) 2017.05.02
글쓴이 현강재 현강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2017.11.05 17:38 Address Modify/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2. 현강재 현강 2017.11.10 06:39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김 총장님

    오랜만입니다. 그간 안녕하셨지요.
    새해가 찾아왔나 하면 순식간에 년말이 다가오니 세월이 정말 빨리 가네요.
    부디 건강하게, 또 보람차게 잘 지내시기 빕니다.

딸과의 약속

삶의 단상 2017. 8. 22. 20:25 |

                          I.

  1995년 12월 20일, 벌써 20년 저 너머의 오래된 얘기다. 그날 저녁을 먹고 서재에 앉았는데, SBS에서 교양 PD를 하는 딸애가 노크했다. 내 방을 찾은 일이 흔한 일이 아니기에 나는 그녀를 반겨 맞았다. 그랬더니 불쑥

  “아빠, 만약에, 정말 만약에 말이야, 아빠에게 장관을 하라고 하면 하실꺼야”라고 묻는 게 아닌가.

의외였다. 평소에 말 수가 많지 않고 그런 류의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아니, 결코 그런 일이 없겠지만,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걸, 뭐가 아쉬워서 이제 와서 장관을 하겠니”.

그랬더니, 딸애는 다시 심각한 표정으로

  “그럼 나하고 약속해. 절대 안 하신다고.”라고 다그쳤다.

나는 분명히 답했다.

  “물론, 그거야 어렵지 않지, 절대 안 할게.”

 

                               II.

  그런데 정말 세상일은 알 수가 없다. 그 이튿날,  오전 11시 개각 발표에 앞서 9시 40분경,  나는 김영삼 대통령의 전화를 받았고, 20분 가까운 설왕설래 끝에 교육부장관직을 수락했다. 당시 나는 언론에 자주 정치평론을 썼으나, 실제 정치권과는 아무런 교류가 없었고 더구나 한 번도 장관직 하마평에 오른 적도 없었다. 그런 나에게 대통령이 개각 발표 직전에 장관직을 청했다는 것 자체가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일이거니와 대통령이 강권한다고 그 청을 받아들인 나 자신도 분명 평소에 내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날 나는 일면식도 없었던 대통령으로부터 불쑥 전화를 받고 무척 당황해서 막무가내로 못하겠다는 말만 되풀이 했는데, 김영삼 대통령은 시간에 쫓기면서도 여유가 있었고 무척이나 집요했다. 마침내 그의 청을 받아들이면서, 나는 꽤나  참담한 심경이었다. 그 순간

  “지금 너는 일생일대에 실수를 하는 거야”라고 스스로를 모질게 힐책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전날 했던 ‘딸과의 약속’이 떠올랐다. 하루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큰 소리를 친 내가 부끄러웠다.  돌덩이를 품에 안은 듯 가슴이 먹먹했다.

 

  그날은 하루 종일 정신이 없었다. 여기저기서 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축하보다는 걱정하는 소리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가까운 이들 눈에도 천생 백면서생인 내게 장관직은 전혀 걸맞지 않았던 게 분명했다. 오후에는 내 연구실에서 간단한 기자회견이 있었다. 저녁에는 김준엽 전 고대총장님이 베푸시는 망년 만찬이 있었다. 망설이다가 어른과의 약속이라 참석을 했다. 당시 연말이면 김 총장님께서 20명 쯤 가까운 사람들을 불러 저녁을 하셨는데, 참석하신 분 대부분이 내게는 선배들이셨다. 이구동성으로 “의외였다”는 말씀이셨고,  내가 느끼기에도 모두 걱정스런 눈빛이었다.

  그날, 하루 종일 바삐 움직이면서도 문득 문득 딸과의 약속이 뇌리를 스쳤다. 그 때마다, “그 애를 무슨 낯으로 보나” 하는 무척이나 불편한 심경이었다.

  밤, 조금 늦은 시간에 딸이 회사에서 돌아왔다. 딸애는 굳은 얼굴로 고개만 까딱하고 이층 제 방으로 올라갔다.

 

  다음날 이른 아침, 내가 잠에서 깼는데, 마루에서 두런두런 소리가 나서 귀를 기울였다. 아내와 딸의 대화였다. 들어 보니,

  딸애는 “아빠가 그동안 언론에 민주화하자고 글도 많이 쓰고, 교수 서명에 앞장서고, 시민운동에도 관여했는데, 그게 모두 결국 이러자고 그런 것 아니야”라며 제 애비에 대해 강한 실망을 토로했고, 내 처는 “왜 그러니, 네 아빠는 너보다 내가 더 잘 알지, 네 아빠는 평생 정치나 관직에는 추호의 뜻이 없던 사람이다. 그 근처에 가본 적도 없는 거 너도 잘 알잖니. 그러잖아도 힘들어 하는데, 너까지 이러면 어떡하니”라며 다독거리고 있었다. 난감했다.

  나는 선뜻 나가기가 민망해서, 일찍 출근하는 딸애가 직장에 갈 때까지 죄지은 사람처럼 안방에서 머뭇거렸다. 그 후에도, 딸애와의 냉전은 한 두 주(週) 계속 되었던 것 같다. 내겐 꽤나 마음이 무거운 시간이었다.

 

                                  III.

  그리고 20년이 흘렀다. 문득 생각이 나서 작년에 이미 나이가 50 턱밑에 닿은 딸애에게 물었다.

  “너 생각나지, 네가 20년 전에 장관 발표나기 전 날, 내방에 찾아와서 내게 ‘장관하면 안 된다’고 엄포 놓았던 거”

그러나 딸애는 의외에 답변을 했다.

  “그랬었나. 그날 내가 왜 그랬지. 아! 그런 것 같기는 하네”

내가 재차 물었다.

  “장관된 다음에는 네가 나를 꽤나 괴롭혔는데, 그건 또 왜 그랬니”

그에 대한 대답도 내 예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거야 아빠가 교수하는 게 더 좋아서 그랬겠지. 장관하고 아빠는 어울리지도 않고. 이것저것 걱정스러워서 그랬지.”

딸애는 마치 남에 얘기하듯 주워섬겼다.

 

아니, 이건 반전(反轉)이 아닌가.

 

  나는 생각했다. 세월 탓에 딸애의 결기와 감성이 무디어 져서 그런가. 그럴 수도 있겠지.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지 않아. 아니면 그 때 그 애가 그리 심각하지 않게 말한 것을 내가 너무 무겁게 받아 들였던 것인가. 아니, 분명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생각 같아서는 “에끼, 애비 속을 그렇게 태우고 이제 와서 고작 한데는 소리가 그것이냐” 라고 한 마디 호되게 쏘아 붙이고 싶었지만, 그냥 꾹 눌러 참았다.

 

  돌이켜 보면, 당시 주변의 그런 걱정스런 눈빛과 언사(言辭)가 나를 더 긴장하게, 그리고 스스로를 바로 세우게 만들었고, 이 땅에서 장관직이 선망의 직책이 아니라, 얼마간 부끄러운 ‘혐오직’이라는 점을 일깨워 주었던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삶의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40년 만의 해후  (0) 2017.12.04
가을 여정(旅情)  (2) 2017.10.12
딸과의 약속  (2) 2017.08.22
'학점 인프레' 유감  (0) 2017.06.26
내 사랑 영랑호  (5) 2017.05.02
두 교장 선생님 이야기  (3) 2017.03.10
글쓴이 현강재 현강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서남수 2017.08.24 14:16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저도 딸을 키워봐서 다소 짐작이 갑니다.
    따님이 그렇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던 것처럼 대답한 것은, 아마도, 부총리께서 따임의 당초 우려와는 달리 장관직을 잘 수행하신 것으로 평가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때는 아빠가 행여 초심을 잃지 않을까 걱정했었지만 그 뒤 그렇게 처신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어떤 시점에서는 부총리님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쑥스러워서 그런 생각의 변화를 직접 말씀드리지 않고 마치 잘 기억나지 않는 척 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딸들은 영원히 아빠 편이지요.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ㅎㅎ

  2. 현강 2017.08.25 06:39 Address Modify/Delete Reply

    관심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딸바보' 서장관님의 해석에 완전 동의는 어렵고 한 70% 받아들이겠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들 속내를 알기가 어렵네요.

                            I.

 한 10년 전 얘기다. 가까운 제자 교수가 내게 대학에서 정년퇴임을 하게 돼서 좋은 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대뜸, “우선 시험성적 매기지 않게 돼서 그 점이 제일 좋은데“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채점한다는 일이 워낙 쉽지 않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게 점점 더 어려워지더군. 그래서 학기말이 되면, 채점할 일이 나를 꽤나 옥죄였네. 그래서 종강하고 시험이 끝나도 성적 제출하기 까지는 실제로 내게 방학이 방학이 아니었지“라고 답했다.

 

 채점은 평가행위의 일종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늘 다른 사람과 주위의 사물, 혹은 정황을 평가하고 그에 따라 대응한다. 그런데 실제로 공정한 평가는 그리 쉽지 않다. 때로는 정보의 부족이나 선입관, 편견 때문에, 혹은 이해타산이나 대세에 눌려 그릇된 평가를 할 때가 적지 않다. 그런데 자신의 오판(誤判) 때문에 자신이 손해를 보게 되면 그건 스스로가 책임질 일이니 어쩔 수 없으나, 채점의 경우는 그 결과가 타자인 학생에게 미치게 되니 이는 예사 일이 아니다. 더욱이 날이 갈수록 학교 성적이 학생들의 취업이나 유학 등에서 주요한 요소로 간주되므로 자칫 잘못된 채점은 당사자에 진로와 생애과정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어 채점할 때는 실로 신중에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때문에 나는 40년 가까운 교수생활을 하면서 채점하는 일을 무척이나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무엇보다 성적 매길 때, 학생과의 친소(親疏)나 인간관계의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꽤나 신경을 썼다. 그래서 언제나 이름이 가리도록 시험답안지를 철(綴)한 후 채점을 했고, 아무리 수강생이 많아도 채점과정에서 조교나 어느 누구의 도움도 빌리지 않았다. 주위가 정돈된 분위기에서, 가능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채점에 임했고, 평가기준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 가능한 한 채점 도중 자리를 뜨지 않았다. 또 필수적으로 재검을 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을 해도 부족한 인간의 평가 행위인지라 채점 후 언제나 일말의 회의가 남아있었고 마음이 명경(明鏡)처럼 맑고 편치 못했다. 그래서 채점은 교수가 짊어져야 할 숙명적인 멍에처럼 느낄 때가 많았다.

 

 채점할 때 적정수준의 변별력은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수준 차이를 가려서 비교적 엄격하게 점수를 매겼다. 그러다보니 내게 좋은 성적을 받은 학생들은 꽤 자부심을 느꼈던 것 같다. 졸업 후 수 십년 후에 만난 어떤 제자는 ‘그 때 선생님 과목 둘 모두 A 학점을 받아, 친구들이 무척 부러워했습니다“ 라며 자랑스러워했다. 그러가 하면, 다른 제자는 ”성적이 잘 안 나와 재수강을 했는데도 점수가 덜 좋았습니다. 가차 없으시더군요“라고 섭섭했던 속내를 드러내기도 했다.

 

 내 경우, 엄정한 채점에 집착하다보니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 자제, 혹은 평소에 친근했던 학생들이 좋지 않은 점수를 주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 때문에 나를 믿고 내가 속한 학과에 아들을 보냈던 무척 가까운 친구와 관계가 소원해 지기도 했다. 마음이 아팠지만 구구한 변명은 하지 않았다. 공정한 채점은 교수의 자존심이자, 그가 윤리적으로 지켜야 할 마지노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II.

 내가 대학을 다녔던 1950년대 말, 60년대 초에는 대학생들이 점수에 크게 집착하지 않았던 기억이다. 그래서 공부바탕이 뛰어난 친구들 중에도 학점이 형편없던 친구가 많았고 더러는 그것을 마치 훈장처럼 드러내 기도 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교수들도 채점에 크게 고심하지 않았던 것 같다. 조교에게 채점을 맡기는 풍조가 만연돼 있었고, 수강생이 많으면 교수가 선풍기를 돌려 시험답안지기 나르는 방향에 따라 점수를 매긴다는 우스개가 이미 그 때에도 회자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학점이 취업이나 진학에서 주요한 몫을 하게 되면서 학생들이 학점에 집착하게 되었고, 교수들도 이에 배전의 신경을 쓰게 되었다. 그러면서 학점 ‘관대화’ 경향이 점차 심화되었다. 돌이켜 보면, 이미 30년 전에도 수강생 대부분에게 A학점을 주어 ‘A 폭격기’라는 별칭을 듣는 교수가 있었던 기억이다. 그러나 이른바 ‘학점 인프레’ 문제가 사회적 쟁점으로 부상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 아닌가 한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학점 인프레 현상은 우리 대학사회에서 이미 보편화된 것 같다. 서울 시내 대부분 대학들에서 졸업성적 평균 A학점 이상 취득 졸업생이 반을 넘어서고 있고, 심한 경우는 70%에 이른다고 한다. 이른바 SKY 대학의 경우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라니 딱한 일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외국의 세계적 명문대학의 경우도 유사한 학점 인프레 때문에 골치를 앓는다는 것이다. 도대체 학생 반 이상에게 최고 평점을 준다면, 엘리트 교육의 산실이라는 대학에서 학점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학점 인프레 현상은 대학 스스로 자신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행위이다. 열심히 공부한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 간 차이가 없어진다면 그건 정의로운 일이 아닐뿐더러, 절차탁마(切磋琢磨) 해야 할 학생들의 학력신장에 악영향을 미친다. 또 양질의 강의를 멀리하고 쉽게 후한 점수를 받을 수 있는 강의로 학생들이 몰리면 대학의 교육과정이 근본적으로 왜곡된다. 그런가 하면 학점 인프레는 대학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떨어뜨려 종국에는 취업 및 진학 시장에서 학점이 평가요소에서 배제되거나 저평가되는 부작용을 낳게 된다. 이 모든 것을 감안할 때, 교수가 후한 점수를 남발하면, 대학 존재의 의미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

 

                                          III.

 최근 대학들은 상대평가의 강화와 재수강 횟수 제한 등 다양한 제도적 수단을 통하여 학점 인프레를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제도개선에 앞서 공정한 학점 매기기는 교수 윤리의 가장 주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과도한 학점 인프레는 교수가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방기(放棄)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교수가 자신의 직분을 바르고 책임 있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좋은 강의와 더불어 필히 엄정한 평가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교수는 어디 아무나 하나’

'삶의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 여정(旅情)  (2) 2017.10.12
딸과의 약속  (2) 2017.08.22
'학점 인프레' 유감  (0) 2017.06.26
내 사랑 영랑호  (5) 2017.05.02
두 교장 선생님 이야기  (3) 2017.03.10
새해 새 아침에  (0) 2017.01.01
글쓴이 현강재 현강

댓글을 달아 주세요

내 사랑 영랑호

삶의 단상 2017. 5. 2. 18:22 |

                         I.

얼마 전에 내 처가 느닷없이 내게 물었다.

“만약에 내가 먼저 세상을 뜨면, 당신 혼자 여기 원암리(내가 사는 동리 이름)에 그냥 살겠어요?”

 

나는 별로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아니, 그럴 생각 없는데. 당신 없이 혼자 농사를 어떻게 져. 떠나야지”

그러자 내 처는,

“그럼, 서울로 되돌아가겠다는 얘기네”

이에 대해 내 대답은 단호했다,

“아니. 내가 왜 서울로 다시 가. 그곳이 진저리나서 내려 왔는데”

그러자 내처는 답답한 듯,

“여기는 떠나겠다. 그런데 서울은 안 가겠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라고 재차 물었다.

 

나는 숨을 한번 크게 내 쉰후 ,

“ 만약에, 그럴리 없겠지만 정말 만약에 말이야, 당신이 먼저 죽으면, 나는 영랑호 주변에 한 20평짜리 몇 년 된 아파트 하나를 구해서 거기 혼자 살 거야. 당신 내가 영랑호 좋아 하는 것 잘 알잖아. 경관이 일품이지, 매일 새벽 산책할 수 있지. 시외버스 터미널과 시장 가깝고, 버스 편도 좋잖아, 대형병원도 호숫가에 있고. 그뿐인가. 몇 발자국 이면 바닷가 아냐. 세상에 그런 데가 어디 있어. 특히 나처럼 운전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딱이지.“

 

이렇게 혼자 주절거리다, ‘아차 너무 나간 것 아닌가’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내 처가,

“당신, 이제 보니 나 먼저 보내고 살 궁리 다 해 놓았군. 그러면 벌 받아”라고 일침을 가했다. 그리고는 “당신 좋아하는 거 보기 싫어서라도 좀 더 살아야겠네요.”라고 말을 맺었다. 뒤끝이 만만치 않다.

 

 

사실 나는, 그 며칠 전, 영랑호 주변을 혼자 걷다가, 문득 “만약 내가 혼자된다면”의 가정아래 앞의 시나리오를 한번 스치듯 생각해 보았다. 그랬던 터라 눈치 없이 내 처가 서운할 정도로 대답이 막힘없이 술술 나왔던 것이다.

 

 

                                    II.

나는 속초/고성에 오기 전에는 속초의 청초호는 알았지만 영랑호는 들어 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가까이에 영랑호라는 천혜의 보고를 발견하고는 ‘아니 세상에 이런 곳이'’ 하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속초 서북부에 자리한 영랑호는 바다와 맞닿아있는 이른바 석호로 둘레 7.8Km, 약 36만평의 아름다운 자연호수다. 영랑호라는 이름은 신라 화랑인 ‘영랑’이 이 호수를 발견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근거하고 있단다. 이름난 철새도래지로 백로의 무리인 고니와 청둥오리, 가창오리 등이 늦가을부터 봄까지 월동한다. 고니의 비상하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다. 때로는 현란한 군무도 펼쳐진다.  봄철 벚꽃과 가을 단풍도 단연 일품이다. 겨울 눈 속에 영랑호는 신비의 설국이다. 영랑정, 범바위 등 이름난 관광명소가 있는가 하면, 카누경기장과 가까이는 옛 화랑 후예들이 마상무예 체험단지도 있다.

 

영랑호를 한 바퀴 돌자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전체 호수가 시야에 들어올 때도 있지만, 구비 구비 돌 때가 많은 데, 눈 앞에 펼쳐지는 장면이 그 때마다 바뀌고, 저마다 특색있는 정경을 선 보인다. 멀리 설악의 연봉과 장엄한 울산바위가 보이는가 하면, 범바위 같은 절경을 만나기도 하고, 때로는 숲속에 감쳐진 신비한 연못에 당도하기도 한다. 해돋이와 해넘이가 모두 장관이다. 호수를 가운데 두고 산과 바다, 꽃과 나무, 철새와 바위가 함께 펼치는 자유변주곡은 네 계절 어느 때도 관객들을 황홀의 경지로 몰고 간다. .

 

11년전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영랑호 한 바퀴 도는데, 대체로 1시간 20분 걸렸다. 그 때믄 마치 경보 선수처럼 빠른 속도로 걸었다. 그런데 이제 여유를 가지고 주변을 즐기면서 걷는다. 그러다 보니 1시간 4-50분이 걸린다. 나이 탓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내가 점차 탐미주의적으로 바뀌는 것이 아닌가 싶다. 호수가 주위의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호홉하고 있어 그 점이 최상의 매력 포인트인데,  최근 주변에 고급아파트가 건축되는 등, 인공화, 세속화, 현대화의 격류가 점차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호수 특유의 '자연미'가 상실될까 우려가 된다.    

 

내 처는 내가 영랑호에 홀딱  반했다고 말한다. 아름다운 호수인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지나치게 거기에 탐닉해 있다는 것이다. 그럴까. 그럴 수도 있겠지. 어떻든 영랑호가 이곳 속초/고성에서의 내 삶을 보다 풍요롭고 사색적으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부디, 아니 결단코 내가 이 근처에 아파트를 얻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삶의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딸과의 약속  (2) 2017.08.22
'학점 인프레' 유감  (0) 2017.06.26
내 사랑 영랑호  (5) 2017.05.02
두 교장 선생님 이야기  (3) 2017.03.10
새해 새 아침에  (0) 2017.01.01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0) 2016.12.15
글쓴이 현강재 현강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최아무개 2017.05.03 08:23 Address Modify/Delete Reply

    영랑호 너무 좋죠^^
    제대로 보셨네요^^

  2. 전은경 2017.05.04 07:28 Address Modify/Delete Reply

    지금 출근길 선생님의 '기억속의 보좌신부님'을 읽다가 너무 감명받아 선생님께 꼭 감사의 편지라도 보내야지하면서 현강재가 어딜까 하면 인터넷 쳐보니 이렇게 쉽게 감사의 말을 전할 수있게 되네요. 신기합니다. 이렇게 진실된 좋은글 읽게 해주셔서 감사드리고 다기한번 진실되게 삶을 살아야 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3. 현강 2017.05.05 04:27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제 글을 좋게 읽고, 글까지 주시니 고맙습니다.

  4. 손윤식 2017.05.16 14:33 Address Modify/Delete Reply

    교수님, 그리고 사모님, 잘 지내시지요?
    가끔 몰래 현강재에 들어와
    남기신 글, 재미있게 읽곤 합니다.

    얼마전에는 교수님 수필집에서 읽은 연희관 317호실을 보여 주고 싶어서,
    아이들과 연희관 부근을 다녀 왔습니다.

    가끔 현강재에 들어와 교수님이 남기신 흔적을 찾는 것이
    제게는 작은 즐거움입니다.
    교수님, 그리고 사모님, 늘 건강하세요~

  5. 현강 2017.05.17 04:40 Address Modify/Delete Reply

    손윤식 군
    무척 고맙네. 그런데 내가 실제로 자네가 생각하는 만큼 근사한 사람이 아니라서
    미안한 심경이네.
    부인도 안녕하시지. 가내 평강과 행복, 보람을 비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