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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멧돼지 소동

2021. 9. 13. by 현강

                   I.

한 달 전 쯤이다. 저녁 어스름에 효소 항아리들 근처에서 거뭇한 물체가 보이는 듯 해서 가까이 다가갔더니 웬걸 큰 개 같은 놈 하나가 놀라 나를 스치고 도망을 갔다. 옆구리를 그냥 조금 스쳤는데도 꽤 묵중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깜짝 놀라 도망간 쪽으로 눈을 돌리는데, 뒤를 따라오던 내 처가 큰 소리로 멧돼지야!”하고 소리쳤다. 이미 저만치 달아난 놈의 뒷모습을 보니 중간 크기의 멧돼지가 틀림없었다. 그 순간 나는 멀쩡하던 다리가 풀려 엉거주춤 그 자리에 반쯤 주저앉았다.

 

                   II.

이후 일주일간 우리 집 효소 항아리들은 큰 수난을 당했다. 지난 두 해 동안 수확해 담그어 놓은 블루베리, 오디, 보리수, 매실의 효소 항아리(항아리라기 보다 독이라 불러 마땅한 제법 큰 규모의 옹기) 아홉 개 중 다섯을 깨고, 그 내용물을 포식한 것이다. 경위는 이렇다. 내가 멧돼지와 조우한 다음 날 아침, 나가 보니 블루베리 항아리 두 개가 땅에 나동그라져 있었고, 깨고 먹다 남은 내용물들이 밖으로 흘러나와 주변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아니 도대체 그 큰 독을 어떻게 넘어뜨리고, 더구나 그것을 깰 수 있었을까.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 놀랍기 그지없었으나, 멧돼지의 둔중한 몸집과 입 밖으로 돌출한 날카롭고 발달한 송곳니를 떠올리며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후 하루씩 걸러가며, 오디, 보리수, 매실 효소 항아리를 차례로 작살을 냈다.

그 한 주일 동안 우리도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첫날 블루베리 두 독이 무참히 깨진 후, 나머지 독들 주변에 제법 큰 철 사다리 두 개로 방어벽을 치고 그 사이사이에 크고 작은 장애물을 옮겨 놓았으나, 멧돼지 떼의 막강한 위력에 별로 힘을 쓰지 못했다. 일 주일이 되던 날, 나는 할 수 없이 남은 네 독 속의 효소액들을 일일이 걸러서 여러 병에 옮겨 담아 창고에 저장했다.

 

매년 수확한 블루베리, 오디 등 중 품질이 좋은 놈은 제때 먹거나 냉동 저장하고, 나머지 일부는 쨈을 만들고, 그리고 반쯤 남은 것은 효소로 담가 저장한다. 그런데 2 년전 고성 산불로 효소 항아리 10여 개를 날리고, 그 후 지난 두 해 동안 공들여 저장한 효소들이 이번에 수난을 당한 것이다. 장독대에 십여 개의 간장, 된장, 고추장 독들은 모두 멀쩡한데, 유독 이들 효소 항아리들만 집중 공격을 받은 것은 이것들이 달콤하고 맛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시골 살며 겪게 되는 이색 체험이거니 하고 그냥 웃으며 넘기려는데, 내 처는 그게 아니었다.

아니 지난 2년간 블루베리, 오디 농사의 반은 날라갔잖아. 그 옹기값만 해도 얼만데!”

푸념이 만만치 않다.

 

                        III.

시골마다 야생 멧돼지로 인한 농작물 피해가 해마다 늘어간다. 그런데 비교적 우리 동네는 그간 멧돼지 피해가 크지 않았다. 더욱이 고성 산불로 집 뒤 소나무 숲이 초토화된 후, 근처에 멧돼지가 서식할 곳이 마땅치 않아, 멧돼지 걱정은 전혀 하지 않고 지냈다.

그런데 그 일이 있기 며칠 전, 새벽에 농터에 나가보니 그 동안 보지 못했던 제법 큰 짐승 발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크기로 보아 자주 보는 동네 개나 고라니의 그것은 아니었다. 의아했지만 그냥 잊고 넘겼다. 그런데 이번에 멧돼지 소동을 겪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멧돼지 위험이 늘 있었고, 그에 따른 일화도 적지 않았다. 그 중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멧돼지와 풍산개와의 혈전 이야기다. 10년 전에 들은 얘기인데, 이웃 동네 어른 한 분이 새벽에 풍산개 둘을 데리고 우리 집 뒤 소나무 숲속 산책을 나갔다가 멧돼지를 만났다고 한다. 곧장 싸움이 벌어졌는데, 피 튀기는 치열한 혈전이었다고 한다. 개 주인이 독려하는 가운데, 풍산개 두 마리가 멧돼지를 앞뒤에서 협공하는 바람에, 처음에는 판세를 압도하던 멧돼지가 끝내 뒷걸음을 쳤다고 한다.

실은 나도 멧돼지를 아주 가까이서 본 경험이 있다. 7, 8년 전이다. 차로 내 처와 고성 세계 잼버리 수련장 근처 호젓한 산길을 가다가 가까이서 질주하는 검은 갈색의 야생 멧돼지를 보았다. 가히 200 Kg는 넘을 듯한 큰 놈인데, 목에서 등에 걸쳐 빳빳한 털을 곤두세우고 옆으로 삐져나온 송곳니를 들어내고 무섭게 달려가고 있었다. 마치 가쁜 숨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 큰 몸통을 짧은 다리로 지탱하며 폭주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차 안에 있었는데도 공포스러웠고,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IV.

멧돼지 소동 며칠 후, 원암리 이장님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내용인 즉, “혹시 밤에 총소리가 나도 놀라지 마십시오. 멧돼지 피해가 커서 엽사 한 분을 모셨습니다였다. 그러나 이후 한 밤중에 총소리도 없었고, 동네에 멧돼지 피해 소식도 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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