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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인생 삼모작'의 머리글

2021. 8. 26. by 현강

빠르면 내달 중순쯤 내 새 에세이 집 <인생 삼모작>이 <21세기 북스>사에서 출간된다. 부제는 '세 못자리에서 거둔

중도주의적 생활철학'이다. 여기 우선 그 머리글인 '글 머리에'를 선 보인다. 

 

I.

서울태생인 나는 젊은 시절부터 언젠가 노후에 시골에 가서 다른 삶을 살아 보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15년 전 정년퇴임에 앞서 마지막 학기가 무섭게 이곳 속초/고성으로 내려왔다. 처음 2년 가까이 속초에 살다가, 이후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로 옮겨 와서, 한여름에는 농사짓고, 겨울에는 글 쓰며, 남들이 다니는 큰 길가에서 얼마간 비켜서서 한적하게 살고 있다.

 

인공()의 작품인 거대도시를 떠나, 중간단계인 소도시를 거쳐 마침내 자연의 품인 농촌에 연착륙하면서 내 삶의 양식도 많이 변했다. 평생 책상머리나 지키던 내가, 땀흘려 노동하며 살아가는 새로운 일상에서 배우는 게 너무나 많다. 무엇보다 나라의 동북쪽 끝 변방에서, 아늑한 자연에 파묻혀 바깥세상을 멀리 조망하며 사색한다는 것은 내겐 무척 신선한, 그리고 얼마간 경이로운 삶의 체험이다. 내가 이곳에 자리 잡은 후 자주 <인생 삼모작>을 되뇌며, 특히 지적, 예술적 작업을 하는 사람에게 노후의 자연의 품은 엄청난 영감과 상상력의 원천이라고 말해 온 것도, 이 산 경험에서 우러난 내 나름의 메시지였다.

 

그러나 호사다마랄까. 재작년 여든 문턱에서 고성산불로 하루아침에 내 삶의 기둥이자 학문의 보금자리였던 <현강재(玄岡齋)>가 소진되었다. 불길 속에 잔해만 남은 집터와 초토화된 주위 환경을 보며, 나는 망연자실, 크게 좌절했다. 가까스로 마음을 추슬러 그래, 이제 다시 시작하자!”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불탄 자리에 새집을 지었다. 그리고 내 삶도 새로 짓기로 마음을 정했다. 나를 무섭게 짓눌렀던 산불의 악몽에서 벗어 나는데 농사일이 큰 몫을 했다.

 

II.

내가 살아 온 지난 80년의 세월을 되돌아보면, 천지개벽에 견줄만한, 격동의 연속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해방의 환희와 전쟁의 아픔을 겪고, 한국역사의 가장 역동적인 시간인 산업화와 민주화의 험난한 도정을 함께했다. 그 사이 우리 사회는 크게 바뀌어 1차 산업 위주의 농경사회에서 이제 바야흐로 4차 산업혁명의 문턱에 이르렀고, 향리문화에 젖어있던 우리네 의식세계도 이제 글로벌리즘을 겨냥하고 있다. 단언컨대, 한 생애에 이처럼 극적인 역사적 소용돌이, 온갖 영욕과 명암을 고르게 체험한 세대는 일찍이 없었다.

 

나는 사회과학자는 책을 통해서 보다, 삶의 과정을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우며, 삶 속에 용해되지 않은 사회과학적 지식은 겉핥기, 흉내 내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 의미에서 비록 신산(辛酸)한 세월이었지만, 내게 다양한 사유()와 공부 밑천을 마련해 준 파란만장하고 변화무쌍한 지난 시대에 대해 내심 고마운 생각이 없지 않다. 돌이켜 보면 그간 내가 겪은 세상 모든 게 내게 알찬 공부거리가 아니었나 싶다.

 

나는 젊어서 유럽의 작은 중립국에 유학해서 새로운 세계, 3의 관점을 익혔고, 오랜 학자생활을 거쳐 민주화 이후 두 번 국정에 참여해서 내가 익힌 이론을 실천의 장에서 검증하는 값진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이제 황혼 녘에 자연으로의 귀의를 통해 삶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얻으려고 애쓰고 있다. 나의 중도주의적 삶의 철학도 이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III.

10년쯤 전에, 제자인 연세대 정무권 교수가 내게, 세 번째 못자리인 속초/고성에서 건져 올린 사유의 편린을 그때그때 글로 옮겨 보라며 손수 블로그를 만들어 주었다. 돌이켜 생각해도 참 고마운 일이다. 이후 나는 이곳에서의 삶의 과정에서 느끼고, 생각하는 갖가지 단상(斷想)들을 한땀 한땀 정성스레 수놓는 심정으로 내 블로그에 올렸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그 대부분이 그간 그렇게 <현강재>(https:// hyungang. tistory.com)에 올렸던 글 중에서 가려 뽑은 것들이다.

 

이 글들은 대체로 최근 몇 년 사이에 쓴 산문 형식의 글들인데, 그 주제들을 보면 내 생활 주변의 소소한 작은 이야기부터, 비교적 무거운 정치. 사회적 주제에 이르기까지 무척 다양하다. 그리고 시간상으로도 내 어린 시절부터 최근까지 전 생애에 걸쳐 있다. 모든 글이 데드라인의 압박 없이, 마음에 내켜 쓰고 싶을 때, 머리와 가슴에 와닿는 주제에 대해, 마치 창공을 나르는 종달새처럼 자유롭게, 그리고 먼 들판을 바라보는 허허로운 심경으로 부담 없이 쓴 글들이다. 그러다 보니, 이 책 속에 부지불식간에 내 평소의 생각과 관점, 내 세계관, 그리고 내 전 생애가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이 책을 펴는데,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 우선 솔선해서 출판사를 주선해 주신 알라딘의 조유식 사장님과 책 출판을 허락하고 모든 편의를 보아주신 김영곤 사장님과 신승철 이사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온갖 정성을 다해 책을 멋지게 꾸며주신 함성주 시인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아울러 손수 글 전편을 정성껏 읽고 교열과 더불어 세세한 조언을 아끼지 않은 제자 연세대 양재진 교수께도 마음속 고마움을 전한다.

 

천생 도시여자인 그녀가 먼 시골까지 따라와 나와 <인생 삼모작>을 함께 하며, 병약한 몸으로 아마도 그녀의 마지막 건축작품이 될 새 <현강재>를 짓는데 온갖 고생을 다 한 내 반려자에게 이 책을 바친다.

 

20218

멀리 울산바위가 보이는 <현강재>에서

 

안병영

 

 

안병영_210902표지--.pdf
8.87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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