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작년 이맘때 한 제자가 내게 물었다. “많은 교수님들이 정년퇴직하고 연세가 많아지면 글쓰기를 멈추시는데, 선생님은 아직 글쓰는 일에 꽤 천착하시는 듯합니다. 그 주된 동인(動因)이 무엇이지요?”

순간 나는 당황했다. 글 쓰는 일이 내겐 그냥 자연스런 일상인데, 새삼 그 이유를 물으니 대답이 조금 궁색해졌다. 그래서

전에 내 스승 한 분이 학자에게는 정년이 없다라고 자주 말씀하셨는데, 대체로 그런거지. 그게 내 일생의 업()이니까라고 얼버무렸다. 그러면서

옛날처럼 글에만 매달리지는 않네. 요즘처럼 농사철에는 농사짓는 일이 주업이지. 대신 농사지으면서 생각을 많이 하지. 그게 농한기에 글 쓸 준비작업이네. 어떻든 늘 머리 속에 글을 담고 사는 것은 사실이지라고 덧붙였다.

 

II.

그리고 나는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왜 나는 글을 쓰는가? 왜 아직도 책과 논문을 쓰고, 에세이도 쓰는가? 그에 대한 내 대답은 대체로 아래와 같다.

 

첫째는 글 쓰는 일이 즐겁고 재미있기 때문이다. 글 쓴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게 내게 크게 부담이 되고 고통을 준다면 나도 글쓰기를 포기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글 쓸 때 무척 즐겁고 행복하다. 특히 글 청탁을 받거나 데드라인에 쫓기지 않으면서, 내가 진정 쓰고 싶은 글을 쓸 때는 마치 창공을 나르는 새처럼 자유롭고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오른다. 나는 이러한 희열과 충만을 다른 어떤 일에서도 찾을 수 없다.

 

둘째는 나에게 좋은 글거리가 아직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평생 학자로 살았고, 몇 년간 정부에서도 값진 경험도 쌓았다. 그리고 구미(歐美) 여러 나라에 머물면서 비교적 다양한 공부와 경험을 고르게 축적했다. 무엇보다 나는 숨 가쁘게 전개된 세계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것도 그 변화의 진폭과 심도가 극심했던 한국에서, 지난 80 평생 실로 많은 체험을 했고 나름 깊이 고뇌하며 살았다. 이 모든 삶의 역정이 내게 숱한 글거리를 마련해 주었다.

일류 요리사가 상품() 신선한 식재료 앞에서 손수 일품요리를 만들고 싶은 충동을 느끼듯이, 나도, 비록 일류는 못 되더라도, 그간 내 뇌리에 켜켜이 쌓인 이 양질의 값진 제재()들을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게 아닌가? 나는 그것을 다듬고 펼치는 것이 내게 남은 사회적 책무라고 생각한다.

 

세 번째는 글 쓰는 일이 지닌 사회적, 교육적 의미 때문이다. 나는 늘 학문적 능력이 출중한 사회과학계의 많은 선배님과 동료들이 너무 일찍 절필(絕筆)하는 것을 무척 아쉽고 안타깝게 생각해왔다. 아니 얼마간 분노했다. 학인(學人)에게 글 쓴다는 일은,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사람들이 말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듯이, 학계와 사회와 소통하는 일상적이며 최상의 방식인데, 그것을 스스로, 앞서서 접는다는 것은, 자신의 평생의 업()을 방기하고 아예 말문을 닫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여겨진다. 한 명의 우수한 학자를 키우기 위한 막대한 사회적 투자를 고려할 때, 조기(早期) 절필로 인한 사회적 자산의 손실이 얼마나 큰가. 그런 맥락에서 나는 늘 죽을 때까지 글을 쓴다는 것이 우리 학계의 사회적 풍토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내 나이가 팔순을 넘고 보니, 내 제자 교수들도 정년퇴직하는 이가 해마다 늘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 평소에 사회과학자들의 학문적 전성기는, 지적 통찰력이 성숙되는 60세 이후라고 자주 말해 왔다. 그 말은 실제로 내 자신에 대한 자기 최면이자, 채찍질이기도 했다. 비록 가까운 제자들이지만, 환갑을 훌쩍 넘은 제자들에게 계속 공부하라”, “글쓰라고 채근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내가 아직 글을 쓰는 데는, 내 스스로가 본보기가 되어야겠다는, 작은 교육적 의미가 깔려있다.

 

III,

재작년 고성 산불로 집이 전소되어 수 많은 책들과 컴퓨터에 잠겨있던 숱한 자료들을 한 순간에 잃었을 때,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좌절과 아픔을 겪었다. 고심 끝에 불탄 자리에 작은 규모로 새집을 지어, 지난 주에 입주했다.

 

이 찬란하게 아름다운 봄날에, 새집에서 새 마음으로 다시 글쓰기를 시작한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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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보령 2021.05.19 15:15 Address Modify/Delete Reply

    현강재에 올려진 글들을 다 보고 나서 "어쩌면 글을 조리 있고 매끄럽게 잘 쓰시는지?" 하는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학창 시절엔 연세춘추 기자 생활을 하셨고 교수재직 중에는 연세춘추 주간 교수를 겸임하시면서 그 어렵던 시절에 글 쓰는 일로 이념적 번뇌와 시대적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었더군요.

    왜 지금도 글을 쓰시느냐는 제자의 질문에 글을 쓰는 일이 그냥 자연스러운 일상이라고 가볍게 답하셨지만, 이 글에서 밝히신 아직도 글을 쓰는 이유를 보니 더욱 존경스럽습니다.

    특히 세 번째 이유로 든 사회적, 교육적 의미 때문에 붓을 접을 수 없으며 후배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야겠다는 말씀에 고개가 숙어집니다.

    좋은 글 많이 써 주시고 늘 건강과 행복이 함께 하기를 빕니다.

  2. 양재진 2021.05.27 00:23 Address Modify/Delete Reply

    교수님...저도 그렇게 할게요. 좋은 글 오래오래 쓰시게 늘 건강하세요.

  3. 제자 2021.06.03 13:19 Address Modify/Delete Reply

    교수님 정말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글쓰기는 무궁무진한 예술과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매년 새로운 미술작품과 새로운 음악을 접하며 감탄하듯 신선한 글들을 보는 것이 무척 즐겁습니다.

  4. 서남수 2021.06.05 10:46 Address Modify/Delete Reply

    아름다운 새 집 입주를 축하드립니다! 이번 여름에 집 구경가도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