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영국 현대사의 큰 별이었던 두 총리, 처칠(1874-1965)와 애틀리(1883-1967)는 전시에는 파트너, 그리고 평화시에는 라이벌이었다. 두 사람은 1940년부터 1955년까지 15년간 소용돌이치는 영국정치사에서, 권력을 서로 교체하며 한때는 동지로, 또 보다 더 긴 기간은 적수로 마주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시 연립내각(1940-1945)에서 처칠은 총리, 애틀리는 부총리로 함께 일했고, 전후에는 애틀리가 먼저 총리를 했고, 처칠이 그 뒤를 이었다.

전쟁의 영웅 처칠과 평화의 거인 애틀리는 당시 영국을 대표하는 보수, 노동 양대당의 지도자로서 함께 협력하고 좌절하며, 때로는 치열하게 다투었으나, 두 사람은 힘을 합쳐 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 전후 새 나라의 초석을 쌓는데 불멸의 공적을 남겼다.

 

그런데, 우리를 감동시키는 또 하나의 사실은 전쟁과 평화의 서사시의 두 주인공, 처칠과 애틀리는 평생 서로 깊게 존경하고 높게 평가하면서 참된 우정을 쌓았다는 사실이다.

 

                     II.

처칠과 애틀리는 일견해서 그 계급적인 배경, 정치관, 그리고 무엇보다 퍼스낼리티에 있어 크게 차이가 나는 대조적인 인물이다. 처칠은 카리스마가 넘치며, 모험을 즐기고, 유머러스하며, 매우 감성적인 사람이다. 그는 대중에게 영감을 부어넣는 뛰어난 웅변가이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탁월한 문필가로 영어 구사의 천재라는 평을 들었으며, 수채화에도 능했다. 처칠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시가와 중절모, 그리고 멋진 브이(V)자 제스처로 대중을 열광시켰고, 언제, 어디서나 압도적 존재감을 과시했다. 한마디로 그는 큰 구경(口徑)의 정치가였다.

이에 반해, 애틀리는 과묵하고 침착하며, 부끄럼을 크게 타며 무미건조한 성품이었다. 그는 미사여구보다 절제한 표현을 선호했다. 그의 비감성적인 연설은 평범하고 가끔은 진부하기 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전형이었다. 위기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며, 인내하고 깊게 사색 하며, 치밀하게 대안을 모색했다. 애틀리는 장기적 조망과 분석력을 겸비한 뛰어난 정책가(政策家)이자 행정의 달인이었다. 외모도 호방한 상남자인 처칠과 달리 전형적인 골샌님이었다.

처칠과 애틀리는 이러한 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적잖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두 사람은 젊었을 때 사회개혁가로서의 꿈을 지니고 있었다. 애틀리는 한때 런던의 빈민가인 이스트엔드(East End)에서 사회봉사에 헌신했고, 처칠은 30대 때 개혁지향의 자유당 정부에서 장관직을 수행하면서 영국이 복지국가의 첫걸음마를 떼는데 기여했다. 영국 복지국가의 설계자인 베버리지를 처음 정부로 끌어들인 것도 바로 처칠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똑같이 상원의 폐지를 지지하는 개혁적 면모를 보였다. 비록 당은 달랐어도, 처칠과 애틀리는 교조적 이념을 배격하고, 실용주의와 유연한 사고를 바탕으로 극단으로 과도하게 치우치지 않으며 개혁적 중도정치의 궤도를 지키려고 애썼다. 둘이 함께 했던 전시내각에서도 주요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 큰 이견이 없었던 것도 이러한 사고의 공통분모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처칠은 보수적 정치가였으나, 내면에 개혁적 열정을 지녔고, 애틀리는 그의 진보적 사상에도 불구하고, 다분히 보수적 풍미(taste, 風味)를 지닌 고전적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처칠과 애틀리는 심오한 애국심을 가졌으며, 영국의 군주제와 전통을 존중했고, 휴머니즘에 대한 투철한 의식을 지녔다. 더욱이 두 사람은 똑같이 공산주의를 단호하게 배격했고, 전후 공산주의의 세계적 팽창을 저지하는데 결연하게 앞장섰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애틀리는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과 더불어 유엔 결의를 주도하고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사들을 한국에 파견했다. 이러한 입장은 보수당의 처칠에게는 당연할 수 있으나, 연상 ‘좌 고수(左 , keep left)'를 외치는 당내 좌파의 끈질긴 반발을 극복해야 하는 애틀리로서는 실로 쉽지 않은 결단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늘 당파와 이념을 넘어 국리민복이라는 먼 지평을 응시했다.

 

                       III.

전시내각에서 처칠과 애틀리는 구국의 일념에서 정당라인을 초월하는 견고한 동반자 관계를 형성했다. 처칠은 뛰어난 리더십으로 난파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했고, 애틀리는 묵묵히 안에서 내정(內政)을 관리하며 전후 재건을 설계했다. <가디언>지는 이들의 성공적 동반자 관계에 언급하여 ‘처칠의 위대성과 애틀리의 인내’의 결과라고 평했다. 두 사람은 간혹 갈등이 있었으나, 그것이 개인적인 적대감으로까지 번지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영국정치의 전설적인 라이벌 디즈넬리와 글래드스턴과 크게 달랐다.

전쟁이 끝나자 두 사람은 다시 반대편에 섰다. 1945년 승전 2개월 만에 치러진 총선은 치열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결과는 애틀리 노동당의 대승으로 끝났다. 애틀리 부부는 패배로 마음이 상했을 처칠 부부를 크게 걱정했고, 선거가 끝나자 서둘러 처칠과 그의 부인 클레멘타인을 찾아 깊은 위로를 했다.

애틀리의 노동당 정부는 주요 기간산업의 국유화, 계획경제, 그리고 복지국가 건설로 집약되는 국정과제를 과감히, 그리고 성실히 수행하며, 현대 영국의 초석을 다졌다. 6년 뒤 권력의 추는 보수당으로 향했고, 처칠은 다시 다우닝 가의 주인이 되었다. 처칠은 애틀리가 이룩한 ‘전후 해결책(post-war settlement)’의 대부분을 대승적 관점에서 그대로 수용했다. 이렇게 마련된 이른바 영국의 ’전후 합의(post-war consensus)'는 1979년 대처리즘이 도래하기까지 전후 영국의 모든 정부들의 정책기조가 되었다. ’이어가기, 쌓아가기‘ 정치의 전범을 보인 것이다. 1955년 처칠은 다우닝가를 떠났고, 몇 달 뒤 애틀리도 20 여년간 지켰던 노동당의 리더십을 내려놓았다. 이렇게 처칠과 애틀리는 한 시대의 종언을 고했다.

 

애틀리는 영국 현대사에 끼친 그의 경이적인 업적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인이나 훗날 역사가들로부터 얼마간 과소평가되었고, 처칠이라는 초대형 정치인의 위대한 삶과 퍼스낼리티의 그늘에 묻힌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애틀리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치솟고 있다.

 

                       V.

이 두 사람이 정치마당을 떠나고 10년 뒤 1965년에 처칠이 서거했고, 그의 국장(國葬)이 거행되었다. 왕족이 아닌 시민으로서 영국 역사상 최초로 치러진 국장이었다. 구국영웅에 대한 예우였다. 그런데 운구(運柩)하는 사람들 중에 애틀리의 모습이 TV에 비쳤다. 극도로 쇠약한 몸으로 힘겹게 관의 한 귀퉁이를 들고 성바오로 대성당의 계단을 오르는 애틀리의 비틀거리는 모습을 영국 시민들은 아슬아슬한 심경으로 지켜보았다. 진한 감동의 여울이 모두의 마음을 적셨다. 애틀리는 병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생전에 처칠이 부탁했던 임무를 영광스럽게 수행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영국정치사에서 함께 한 40년의 세월, 특히 그들이 아름답게 수놓았던 전시 5년, 평화시 10년간의 깊은 신뢰와 존경의 관계는 실로 "영국정치의 연대기에서 미증유 (unprecedented in the annals of British politics)"(Leo MaKinstry)의 것이었다.

 

                        VI.

처칠과 애틀리가 함께 쓴 전쟁과 평화의 대(大) 서사시를 되돌아보며, 한국정치의 현실을 보니 가슴이 먹먹해 진다. 정녕 이 땅에서는 ‘아름다운 정치’, ’위대한 정치’는 불가능한 일인가.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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