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1994년 7월 중순 한여름 오후, 나는 스웨덴의 스톡홀름의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스톡홀름 대학의 한 교수와 약속시간에 여유가 생겨 한가한 마음으로 거리 산책에 나섰던 길이다. 그런데 멀리서 내 쪽으로 다가오는 모자(母子)의 모습이 보였다. 중년의 서양 여성이 대여섯 살 쯤 되어 보이는 남자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오는데, 멀리서 보아도 그 애가 영락없는 한국 아이였다. 순간 나는 그 애가 스웨덴에 입양된 한국 아이라고 직감했다.

 

그들은 미쳐 나를 보지 못한 가운데, 아이가 엄마에게 종알종알 즐겁게 얘기를 건네며 내게 가까이 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들과 나의 간격이 한 열 발쯤 가까워졌을 때 모자가 동시에 나를 보고 흠찟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나는 그들에게 조용히 미소를 보냈다. 그러자 아이는 잠시 발걸음을 멈춘 채 동고라진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고, 엄마는 자못 긴장한 낯빛으로 내게 얼마간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 나는 착잡한 심경으로 미소를 거두었다. 잠시 후, 서로가 엇갈리는 지점에 이르자, 그 서양 엄마는 내 눈빛을 애써 피하며 꼬마의 손목을 바짝 잡아채고 걸음을 재촉했다. 한시 라로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곧 서로 지나쳤다. 그리고 몇 걸음을 옮긴 뒤, 나는 하도 궁금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이는 걸음을 한껏 늦추며, 아예 고개를 뒤로 재치고 나를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고, 당황한 엄마는 얼마간 신경질적으로 아이를 가는 방향으로 계속 잡아당기고 있었다. 한마디로 아이가 엄마에 질질 끌려가는 형국이었다. 곤혹한 심경으로 나는 급이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한참 뒤에 나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제법 양측의 거리가 멀어진 그때 까지도 아이는 여전히 나를 연신 뒤돌아보며 엄마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무엇이 그 어린 아이를 그렇게 행동하게 만들었을까? 핏줄이 당겼나? 비슷한 모습의 미지의 인물에 대한 호기심인가?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나는 예민한 감성의 그 아이가 얼마 후 청소년기 질풍노도 시대에 겪게 될 정체성의 혼란이 미리 우려되어 가슴 저미는 아픔을 느꼈다.

 

II.

세계 제 2차 대전 이후, 전 세계에 입양된 아동의 수는 약 50만 명이다. 그 중 약 40%인 20만 명이 한국의 입양인이다. 가히 ‘입양아 수출국’이라는 오명을 벗어나기 어려운 형편이다. 그 중, 유럽으로 건너간 입양아가 6만을 넘고, 그 절반가량이 북유럽, 즉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3개국에 살고 있다. ‘수잔 브링크’의 나라 스웨덴의 한인 입양인도 약 1만 1000명이나 된다.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은 1991년에 개봉된 고 최진실 주연의 한국 영화로, 실존 하는 한 스웨덴 입양아의 방황을 그린 영화다.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수잔의 한국인 어머니는 생활고에 못 이겨, 네 살짜리 딸 신유숙을 눈물 속에 스웨덴으로 입양시킨다. 그 때 어머니는 딸 유숙에게 준 선물은 한복을 입은 작은 인형이었다. 스웨덴에서의 유숙의 앞날은 험난했고, 고통스러웠다. 낯선 환경과 생김새가 다른 사람들 틈에서 느끼는 소외감, 가족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무엇보다 새 엄마의 모진 학대 속에 13살 때 첫 번째 자살을 기도한다. 18세에 자립을 하게 된 유숙은 친모를 찾아 나섰지만 실패하고, 방황 속에 혼전임신과 실연 등 고통으로 점철된 나날을 보내다가, 한 스웨덴 선교사의 도움으로 친모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접한다. 딸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 온 유숙은 그토록 그리웠던 친어머니와 해후를 하고 기나긴 방황을 끝낸다.

20만 한국출생 국제입양아의 입양 이후의 삶은 각지 각색일 것이다. 개 중에는 착한 양부모의 헌신적 사랑과 배려 속에 행복한 삶의 기틀을 마련한 이들이 적지 않다. 놀랍게도 그간 프랑스에서만 두 명의 입양아 출신 장관이 탄생했다. 플레르 펠르랭(한국명 김종숙) 문화 컴뮤니케이션 장관과 장뱅상 플라세(한국명 권오복) 국가개혁 장관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가 하면, 양부모의 학대, 낮선 환경에 대한 부적응, 사회적 소외감 속에서 잘못된 길로 접어 든 이들도 무수히 많다. 어떤 경우이든, 입양아 대부분은 청소년기에 극도의 정체성혼란을 겪으며 힘겹게 인생의 고비를 넘긴다. 위에서 언급한 스잔 브링크가 친어머니를 만난 후, 국제입양을 반대하는 민권운동에 앞장 선 것도 자신의 불행했던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 때문일 것이다.

 

국제입양을 통해 새 자식을 품에 안은 양 부모들의 행태도 여러 갈래다. 적지 않은 부모들이 열린 마음으로 아이에게 모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리면서, 한국과의 태생적 인연을 소중하게 가꾸도록 세심하게 이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입양아가 한국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고 새 둥지에서 다시 출발할 것을 기대하며, 한국과의 흔적을 애써 지우기도 한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전자의 경우가 입양아들의 정체성 혼란을 줄이고 자연스런 정서적 성장을 유도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나는 그날, 스웨덴 거리에서 조우한 서양 엄마가 처음 내가 보냈던 미소에 대해 따스한 눈빛으로 화답했다면, 다가가 몇 마디 인사라고 나누고 아이의 손이라도 잡아 볼 참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나와 아이의 접촉을 크게 꺼리는 눈치여서 그럴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어쩌면, 그 서양 엄마의 반응은 그녀의 깊은 속내의 표현이라기보다, 전혀 마음이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당황한 가운데 빚어진 촌극일 수 있다. 여하튼, 그날 오래도록 나에게서 눈을 띠지 못했던 그 아이의 집착과 서양 엄마의 차가운 반응은 모두 내게 깊은 인상과 충격을 남겼다.

 

III.

그 날, 나는 혼란스러운 심경으로 스톡홀름 도심의 호텔로 돌아와 막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밖에서 소란스러운 구호와 힘찬 때창 소리가 들렸다. 나는 놀라서 창문을 열어 보니 수많은 젊은이들이 운집하여 깃발을 흔들며 열렬히 환호성을 토해내고 있었다. 놀라 프론트에 알아보니, 그날(7월 16일) 방금 전, 스웨덴이 미국 페서디나에서 열린 월드컵 준결승전에서 불가리아를 4:0으로 대파해서 흥분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이제 군중들의 숫자가 계속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분위기는 광란에 가깝게 고조될 터이니, 제대로 잠자기는 다 틀렸다고 지레 짐작했다. 그런데 웬걸, 한 시간쯤 지나자 창밖에 소요는 점점 잦아들더니, 두 시간이 가까워지자 거리는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다시 한 밤의 고요를 되찾았다. 아니 이럴 수가!

 

그날 밤, 나는 스웨덴인의 절제와 지나칠 정도의 이성적인 집단행동에 크게 놀랐다. 주지하듯이 영국이나 독일 등 유럽 여러 나라의 축구 열기, 특히 월드컵의 열풍은 가히 전설적이라 범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런데 축구 강국의 하나인 스웨덴이 1958년 자국에서 개최된 제 6회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한 후 실로 36년 만에 처음으로 3위에 올랐는데, 아무리 한밤중이라도 이 정도의 조촐한(?) 축제로 끝냈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스웨덴인은 남부 유럽은 물론, 중부 유럽세계에 비해, 감성보다 이성이 몫이 크게 작용하는 사람들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 나라는 열광적 애국주의의 정도가 전세계에서 가장 낮은 나라로 알려져 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우리가 4강에 올랐을 때, 전국을 휩쓸었던 환희와 열락의 물결과 비교해 보면, 그들의 지나칠 정도의 쿨한 성격은 가히 짐작이 가고 남을 것이다. 그 차디찬 이성이 수잔 부링크를 더 외롭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VI.

그날 밤, 나는 스톡홀름 거리에서 나를 뚫어지게 처다보던 그 어린 입양아의 놀란 눈망울이 계속 눈에 밟혀 잠을 크게 설쳤다. 우리와는 문화적 유전자가 다른 낮선 땅에서 그 어린 것이 어떻게 세상을 헤쳐 나갈지 걱정이 밀물처럼 계속 밀어 닥쳤다.

이제 그 아이도 30대 초반의 헌칠한 청년이 되었을 것이다.

 

부디, 부디 행복하기를 빈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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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보령 2021.04.29 09:41 Address Modify/Delete Reply

    1994년이면 30년이 가까워져 오는 세월인데 그날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이 글을 쓰신 걸 보면 그때 그 입양아에 대한 느낌이 얼마나 강렬했을까를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정체성 혼란을 겪어야 할 국제 입양아의 아픔을 생각해 봅니다.

    혼혈가수 인순이도 "부모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엉킨 실타래가 있었다. 엄마가 나와 동생을 입양 보내지 않고 끝까지 키워줘서 감사하다. 엄마는 엄마 나라 사람이고 아빠는 아빠 나라 사람이지만 그럼 나는?'이라는 의문과 갈등이 있었다."라며 어린 시절의 정체성 혼란의 아픔을 토로한 적이 있더군요.

    나은정보다 기른 정이란 말도 있고 아름다운 입양도 있지만, 불행한 입양, 특히 불행한 국제 입양만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2. 이강렬 2021.05.12 16:15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제 사위는 노르웨이로 입양된 한국인입니다. 30대 후반인 사위는 1살도 안되어 입양이 됐고, 제 사돈인 양부모는 사위 밑으로 여자 아이를 또 한명 입양을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사돈은 아이들은 정체성 혼란없이 반듯하게 잘 키웠습니다. 사위는 노르웨이 유수 기업에 엔지니어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위는 어릴적부터 노르웨이 친구들과 정말 잘 지내고 있고, 골목 대장 노릇을 했다고 합니다. 사돈 부부가 정말 사랑으로 잘 키웠습니다. 사돈은 한번 아이를 한국에 데리고와 친부모 찾기를 시도했고, 실패하자 사위는 깨끗이 단념했습니다. 지금도 사위는 시간만 나면 8시간을 운전해 양부모를 만나러 가고, 양부모도 시간만 나면 사위와 손주를 보려 모입니다. 저도 한국인 입양아들이 정체성 혼란으로 고통을 겪고, 잘못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기에 사위 케이스를 보며 신기하기도 했고,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교수님 글을 읽으며 가슴이 아려오네요.

봄바다

포토갤러리 2021. 4. 18. 05:45 |

봄철 동해 북부 바다는 잔잔할 때가 드물다. 일렁이는 파도는 늘 기운차고 역동적이다. 봄바다를 따라 양양-속초-고성으로 올라가면 세계 어디에 이렇게 청정하고, 아름다운 바다/바닷가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칸, 니스, 몬케카를로의 지중해 연안 리비에라 보다 단연 윗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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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보령 2021.04.18 08:15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저에게는 보물섬과 같은 현강재에서 영랑호 주변의 벚꽃풍경과 동해안의 봄바다 절경을 잘 감상했습니다. 서울에도 여의도 윤중로와 과천 서울대공원의 벚꽃이 볼만한데 올해는 코로나 19 때문에 한 번도 못 가보고 양재천변 벚꽃길을 한번 걸어본 것이 전부였습니다. 부총리님의 사진 촬영 솜씨도 글솜씨 못지않게 예사롭지 않음에 또 한 번 놀랐습니다.

  2. 현강재 현강 2021.04.18 19:42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이사장님 과찬이십니다. 사진은 아직 똑딱이 수준이지요 이곳 속초/고성에는 산, 바다, 호수, 계곡이 모두 천하일품이라 혼자 보기 아까울 때가 많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계절의 여왕 5월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난적 코로나도 아름다운 계절의 위력 앞에 굴복하기를 기대합니다.

벚꽃엔딩

포토갤러리 2021. 4. 18. 05:18 |

옛날에는 진해, 청주, 군산 등 전국에 유명 벚꽃 명소가 몇 군데였는데, 이제 전국 곳곳에 벚꽃 명소가 즐비하다. 우리 세대에게는 창경원 밤벚꽃이 기억에 많이 남든다. 

속초-양양-고성에도 영랑호, 설악산 목우재, 속초 종합운동장 근처, 남대천 둔치길 등 벚꽃 명소가 많다. 올해는 벚꽃이 만개했을 때, 서울에 갔다 오는 길에 절정 시기를 놓쳤든데, 그래도 아쉬워 끝물에 영랑호를 찾아 몇 커트를 찍었다.

그런데 설상가상 내 컴퓨터가 고장이 나 뒤늦게 이제야 몇장 올린다.

 

이어서 설악산 목우재를 찾았으나 코로나 19로 주차를 금지해서 내리지 못하고 드라이브 스루 하며 벚꽃엔딩을 아쉬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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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을 점수제에서 등급제로 전환하고 내신 반영 비중을 높이는 내용의 ‘2008학년도 이후 새 대입제도’에서 수능 1등급의 비율이 4%로 확정됐다. 수능 1등급 7%를 요구해온 열린우리당 교육위 소속 의원들의 요구를 교육부가 힘겹게 물리친 결과다.

27일 여의도 렉싱턴호텔에서 열린 교육당정회의에 앞서 안병영부총리와 열린우리당 교육위원들이 얘기를 나누고 있다.

안병영(安秉永)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과 열린우리당 교육위 의원들은 27일 새 대입제도와 관련한 최종 당정협의를 갖고, 논란이 됐던 수능 1등급 비율을 4%로 확정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2008학년도부터 수능이 점수제에서 9등급제로 바뀌는 데 대해 '변별력이 떨어진다'는 반발이 일부 있는 상황에서 1등급 분포를 지나치게 넓히면 대학 등으로부터 '본고사를 치르게 해달라'는 요구가 강하게 들어올 수밖에 없다는 논리로 열린우리당 의원들을 설득했다"고 말했다.

열린우리당 관계자는 "우리는 7%가 합리적이라는 의견을 분명히 밝힌 뒤, 다만 교육부 고시사항이니까 교육부 견해를 존중하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이날 정부와 여당 간의 이견이 봉합됨에 따라 교육부는 28일 '2008학년도 이후 새 대입제도 확정안'을 발표할 계획이다.

(박정현/황성헤 기자)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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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준화 틀 지키면서 엘리트 교육도 키울것"

안병영(安秉永·사진)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은 8일 "평준화의 기본틀은 지키되 보완하겠다"며 "똑똑한 학생들이 자질을 더 빼어나게 키울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겠다"고 말했다.

 

 

 

안 장관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공교육과 엘리트교육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다”고 전제한 뒤 “교육이 경쟁력 있고 다양하게 바뀌는 것을 제한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안 장관은 그러나 평준화 보완과 엘리트 교육을 위해 특목고나 자립형 사립고를 확대할 것이냐는 질문에는 “나는 기본 개념을 말한 것이지 특목고나 자립형 사립고를 말한 게 아니다”며 구체적인 답을 피했다.

안 장관은 “일부에서 나를 ‘보수’라 하는데 나는 예전에는 ‘진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며 “정책 전문성과 합리성을 갖고 교육에 대한 국민 기대와 열망을 바르게 수용하겠다는 의미에서 나는 ‘국민 코드’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안 장관은 “사교육비 경감 대책은 당초 이달 말까지 발표하려고 했지만 연구기관 간에 좀더 긴밀한 협의가 필요해 늦춰질 것 같다”고 밝혔다.   박중현기자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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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내가 윤동주 시인을 시를 통해 처음 만난 것은 1957년 고등학교 2학년 때다. 그 때까지 윤동주는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시인이었기에, 그에 대해 아무런 사전 지식이나 편견 없이 느끼는 그대로 그를 접할 수 있었다. 윤동주의 1955년 정음사에서 나온 증보판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는 나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순백의 시혼에 전율했다. 그의 시어(詩語)에서 전혀 때 묻지 않은 맑은 영혼을 읽을 수 있었다. 이제 온 국민의 애송시가 된 <서시>를 비롯해 <자화상>, <참회록>, <십자가>, <소년>. <별 혜는 밤>을 읽으며 식민지 지식인이 얼싸안았던 처절한 고독과 내면으로 깊게 파고드는 자아 성찰과 실존의식, 그리고 <서시>를 비롯해 그의 시 전편에 흐르는 부끄러움의 미학에 깊이 빠져 들어갔다.

 

내게 비친 윤동주는 순절에 이르는 애국혼이나 저항시인의 모습 보다는 고뇌하는 시대의 양심의 이미지에 더 가까웠다. 이후 나는 그의 삶의 궤적을 면밀히 추적하면서 그의 생각과 글과 행위, 그리고 그의 시와 삶이 놀라울 정도로 동일체화 되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런 의미에서 내 뇌리에 각인된 윤동주는 서정의 향기를 머금고 ‘참’을 지향하는 경건한 구도자(者)의 모습이었다.

 

II.

연세대 1학년 때, 교양 국어를 가르치시던 장덕순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좋아하는 시 하나씩 를 외어오라고 하셨다. 나는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열심히 암송해 갔다. 장 교수님의 호명에 따라 여러 학생들이 자신들의 애송시를 선 보였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은, 소월이나 청록파의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아니면 서정주나 정지용의 시를 즐겨 외웠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꽤나 멋 적은 표정으로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암송했더니 장 교수님이 시종 감동적인 눈빛으로 경청하시고, “자네 도대체 어떻게 윤동주를 알았나?”하시며 크게 기뻐하셨다. 장 교수님이 북간도에서 윤동주와 함께 자랐고 연희전문에서도 동문수학을 한 사실을 안 것은 그 훨씬 후의 일이다.

 

대학과 대학원 시절 또래 모임이나 쌍쌍파티 같은데서 노래를 강요당하면 나는 자주 시 낭송으로 대신했는데, 그 때 내 18번이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이었다. 돌이켜 보면 윤동주 문학은 일제의 폭압통치로 문화계가 모두 침묵, 아니면 친일해야 할 최후 암흑기에 그 찬란한 빛을 발했다. 태평양 전쟁이 터진 바로 1941년, 윤동주는 자신의 대표작 <서시>를 비롯하여 <별 헤는 밤>, <길>, <십자가>, <새벽이 올 때까지>를 보석같은 시들을 봇물처럼 쏟아냈다. 죽음을 몇 해 앞두고, 윤동주 문학의 절정기였던 그 해는 공교롭게도 내가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별 헤는 밤>은 제법 긴 시다. 내가 모임에서 그 시를 읊으면 분위기 깬다는 핀잔도 받았지만, 음률이 뛰어나서 구비 구비 음조를 달리하면서 낭송하면, 기대이상의 호의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

----

----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 옥(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 프

랑시스 장, 라이너 마리아 릴게,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나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별 헤는 밤>은 그의 다른 시들이 그렇듯이 슬프고 아름답다. 윤동주는 별 하나에 동경과 향수를 담아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짝을 맞춘다. 고향을 상실한 자의 고독과 그리움은 끝내 영원한 보금자리인 어머니를 향한다. 그러다가 마지막 구절에 이르러 묵시론적(默示論的) 암시를 한다. 나는 이 시를 낭송할 때 마다 윤동주의 슬픈 영혼이 느껴져 마지막에 이르면 조금 울컥하곤 했다.

 

III

1971년 초, 유학에서 돌아와 연세대를 찾았다가 예전에 연희전문 기숙사였던 ‘핀슨홀(현 윤동주 기념관)’ 바로 아래에 새로 건립된 <윤동주 시비>를 발견하고 기뻐서 가벼운 탄성을 올렸다. 윤동주가 육필로 쓴 <서시>가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1975년 가을, 내가 직장을 연세대로 옮기고 이듬해 바로 ‘핀슨홀’에 자리한 <연세춘추> 주간이 되었다. 고색창연한 석조건물인 ‘핀슨홀’은 1922년 연희전문학교의 기숙사로 지어졌는데, 윤동주 시인이 연전 재학시 2년여를 머물렀던 곳이다. 나는 연세춘추 주간으로 2년 가까이 일하는 동안, 한 때 윤동주가 실제 살았고 시심(詩心)을 키웠던 그 역사적 공간에서 호흡한다는 것이 무척 뿌듯하고 좋았다. 더욱이 그곳에서 나는 연세춘추가 시행하는 윤동주 문학상(시 부문)을 주관하면서 그 와의 숨은 인연을 더 깊게 다졌고, 그 과정에서 윤동주 자료 발굴에서 큰 몫을 했던 윤 시인의 실제(實弟) 윤일주(성균관대 교수 역임, 1927-1985) 교수도 만났다. 내가 머리로 그렸던 윤 시인과 모습이나 성품이 많이 닮았다.

 

IV.

1993년으로 기억되는 데, 연세대학교는 미국의 유명한 M컨설팅 회사에 의뢰해서 컨설팅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한번은 평가팀이 내가 재직하는 사회과학대학에 찾아 와 교수들에게 중간보고를 하면서 이런 저런 조언을 구했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은 연세대가 해방이후 다른 유수한 대학들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너무 적은 수의 장관들을 배출했다고 비판적으로 조명하며, 이를 앞으로 개선해야 할 주요한 포인트라고 지적했다.

분위기가 그리 딱딱하지 않기에, 그 때 내가 대체로 이렇게 속내를 피력했던 기억이다

“글쎄요. 해방이후 우리가 오랫동안 권위주의 체제에서 살았는데, 그들 정권들에 복무한 장관 숫자가 좀 적다고 너무 기죽을 이유는 없을 듯합니다. 그 대신 우리는 윤동주를 가졌잖아요. 저는 일제 강점기, 마지막 암흑기에 시대의 양심을 비췄던 윤동주 한 사람이 지닌 정신적 자산의 가치는 권위주의 시대의 수 십 명의 장관들 보다 훨씬 더 값지다고 생각 됩니다.”

나는 아직도 같은 생각이다. 만약 윤동주가 없었다면, 일제 강점기 마지막 단계의 한국 문화계의 풍경이 얼마나 초라했을까. 또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현존하는 윤동주의 마지막 작품 <쉽게 쓰여진 시> (1942년 6월 3일자)에서 그는 이렇게 조용히 절규한다.

----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 밖의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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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익로 2021.03.29 14:48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부총리님!!!
    주말동안 봄비가 내렸어요
    봄빛이 한층 짙어질 듯 합니다
    윤동주 시인에 대한 글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저도 윤동주 시인, '별 헤는 밤' 시를 무척 좋아하여
    노트에 붓으로 써놓고 자주 읽어 보기도 해요!!!ㅎㅎㅎ
    연세대와의 인연에 대한 부분은 알기 어려운 얘기들인데~~~
    동문된 입장에서 뿌듯하네요
    윤일주 교수님이시라는 분도 연세대에서 근무하셨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아요!!!
    얼마전 김형석 교수님 인터뷰 방송에서 윤동주 시인과 함께 공부하셨다는
    일화를 말씀하셨는데~~~ 한 분은 교과서에 나오시는 분이고 또 한 분은
    생존해 계신 분이라는 사실에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총리님!!!
    블로그에 자주 들리도록 하겠습니다
    늘 건강 유의하세요!!!
    김익로 올림
    김익로

  2. 현강재 현강 2021.03.31 20:03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귀하와 더불어 윤동주 형의 고결한 시혼(詩魂)을 가슴에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행복합니다.

 

교육부가 역대 어느 때보다 바쁜 현안 부서로 떠오르고 있다. 문민 정부가 화두로 삼은 ‘교육 개혁’을 정책 수단을 통해 현장에 접목하고 있으며,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한총련 사태의 뒷수습을 맡았는가 하면, 한의대 사태 역시 진원지가 학원인 탓에 보건복지부 대신 사태 해결의 ‘총대’를 짊어졌다. 정치학과 행정학을 전공한 학자로서 교육부에 입성한 안병영 교육부장관은 사태를 해결하는데 원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를 만나 교육계 언저리에서 발생하는 현안들에 대한 입장을 들었다.

 

* 교육 개혁의 요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두고 지속적으로 개혁 과제를 실행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볼때, 그동안 진행된 개혁 작업에는 비판 받을 점이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진행 되어온 개혁의 성과와 어려움, 앞으로의 과제를 밝혀 주십시오

현재 추진하고 있는 교육 개혁은 과거와 다릅니다. 여기서 과거와 다르다 함은, 이번 개혁이 구조적 틀을 완전히 바꾸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광복 이후 이제껏 계속되어온 교육 체제는 획일적·규제위주·공급자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특성화하고, 자율적이며 학습자 중심인 체제로 바꾸려는 것입니다.

이는 세계화·정보화 시대에 대비하기 위한 국가 전략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개혁 과제의 수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1~3차 보고를 통해 제시된 개혁 과제는 모두 1백2개에 이르는데, 현재까지 전부 또는 일부 시행하고 있는 것은 41개입니다. 교육개혁을 추진해온 지 1년 남짓한 시점에서 성과를 말하기에는 이른감이 있으나, 대체로 보아 초등·고등 교육 분야에서는 일정한 성과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문제는 중등 교육이 대학 입시라는 벽에 부딪혀 기대한 만큼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미래는 낙관적입니다.

 

 

*한총련 사태 당시 학생들의 행동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한총현 사태는 정부·대학 당국은 물론 언론·시민사회 등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민주화가 진척되면 스러질 것이라는 낙관론에 기대어 일부 학생운동 세력이 폭력화·반체제화해도 아무도 이를 지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사회 분위기를 틈타 대학생들은 벌거벗은 폭력을 휘두르고, 주체사상이나 공산주의 같은 교조주의에 사로잡혀 반사회적 언행을 일삼는 불가사의한 일을 저질러 왔습니다.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는 이들 학생에게 이론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좌파 성향지식인이나 재야인사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런데 문민 시대 이후 이들은 거의 대부분 제도권으로 들어왔습니다. 지속적인 이론적 자양분을 공급받지 못한 결과, 형해화·교조화한 사상 체계와 관료화·전체주의화한 규율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이같은 사정을 잘 알면서도 문제점을 지적 했다가는 반동·보수라는 비난을 받을까 봐 정당한 목소리를 내지 못한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사회에 비판적 이성과 행동하는 양심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교육부는 한총련 사태의 재발 방지책으로 학사 관리를 철저히 하고, 총학생회의 각종 자금원을 차단한다는 방안을 내놓았습니다. 또 다른 방안은 없습니까?

교육부는 대학이 그동안 학생 지도에 다소 느슨해지고 무관심해진 경행을 중시해 학생 지도 체제를 정비해 교수들이 좀더 세심하게 학생 지도에 임할수 있도록하고, 학생 활동 공간 배정 및 운영에 대해 합리적이고 철저한 지도 방안을 강구할 것입니다. 학생회관이나 교내 건물·시설 등이 화염병 제조창·집하장이 되고, 수배 학생들의 기식처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학생들의 과격 행동을 자제시킬 교육적 방도는 무엇입니까?

장기적으로 우리 사회에 건강한 민주적 시민 문화가 확산되는 일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만약 중·고등학교 교육 과정에서 우리 학생들이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자유롭게 토론하며, 서로가 생각을 나누는 습관과 능력을 키웠더라면 대학에 들어와 주체[사상 따위 교조주의의 사상적 포로가 되 않았을 것입니다. 북한의 주체사상이 얼마나 전근대적인가 하는 점은 외국에 나가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몇 년 전 유럽에서 열린 학술회의 때 그쪽의 좌파 성향 지식인들과 대화 할 기회가 있었는데 , 이들도 한결같이 오늘날의 북한을‘사상적·정치적 금치산국’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학생들이 해외에 나가 견문을 넓히는 일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학생들의 소행이 아무리 괘씸해도 ‘교육차원’에서 학생들을 다스리는 방법은 ‘사법차원’과 달라야 하는 것 아닙니까?

지나친 관용은 더 큰 불행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또 사법 처리와 학칙에 의한 학사 징계는 별개 성격으로 봐야 합니다. 학생이 사법 처벌을 받았다면, 그 행동 내용에 따라 학생으로서 학칙에 의한 처벌을 당연히 따로 받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이 오히려 교육 원칙에 충실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총련 사태에서와 달리 한의대 사태에서는 교육부가 원칙을 저버렸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대형 제적 사태를 막아 보자는 생각과, 교육 외적 현안으로 학생 또는 학교에 교육부가 밀리는 사태를 단절해 보자는 생각 사이에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한의대생들의 집단 수업 거부 행위는 한 ·약 분쟁이 라는 요인이 작용하여 교육 정상화를 가로막았닫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유사한 사례가 반복될 경우 교육 부실화를 초래할 우려가 있어 처음에는 어떤 규정도 개정을 인가해 주지 않을 방침이었습니다. 그러나 수업 정상화를 위한 대학별 자구 노력을 파악하기 위해 현지점검단을 파견한 결과. 대학측의 열의와 상당수 학생들의 수업정상화 노력을 확인할 수 있어 조건부로 학칙 개정안을 승인했던 것입니다. 원칙을 벗어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의대게 제적 문제와는 별도로 한의대생들의 유급 문제는심각합니다.이 때문에 내년 학사 관리와 신입생 선발 작업에 상당한 혼란이 올 것으로 예상됩니다.

유급된 4천5백여 학생들은 96학년 1학기 동안 수강할 예정이던 과목을 다시 이수하여야 하며, 이를 배려하기 위한 어떠한 편법도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97학년도 한의대 신입생 선발 문제는 대학의 수용 능력과 교육과정 운영 여건 따위를 전반적으로 검토래 결정해야겠지만, 현재 여건으로는 96학년도에 비해 감축이 불가피 합니다. 다만 대폭 감원하면 한의과대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과 학부모에게 선의의 피해를 주게되고 사회적 충격도 클 것이 우려되므로, 해당 대학의 여건을 고려해 적정 규모를 결정할 계획입니다.

 

*장관께서는 취임 이후 줄곧 교욱에 대한 개인의 소신을 밝히기를 주저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 삼아 교육이 나아갈 바에 대한 장관의 견해를 밝혀 주십시오.

저는 교육을 생각할 때 무한 경쟁과 더불어 사는 인류 공동체라는 두가지 명제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무한경쟁은 바로 창의성교육과 연결되며, 더불어 사는 인류 공동체는 인간화 교육과 직결됩니다. 저는 특히 인간화 교육을 위하여 유아교육·특수교육·학습부진아 교육·중도 탈락자 교육·해외 귀국 자녀에 대한 적응 교육등 다섯 가지 분야를 따로 장관 프로젝트로 삼아 진흥책을 마현하고 있습니다. 그밖에 산적한 교육 현안 가운데 장관 재임 동안 곡 해결해 보고 싶은 일은 사교육비를 줄이는 것입니다. 머지 않아 개설될 멀티 미디어 교육센터도 바로 이같은 취지에서 창안한 기구입니다. 앞으로 이를 통해 교육 정보를 종합 서비스함으로써 학생 스스로 과외를 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는 한편 , 교육 방송과 학교 현장에서 방과 후 교육 활동을 활성화해 사교육 분야를 공교육 안으로 끌어들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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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준 기자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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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나는 가끔 <연세춘추>/Annals 주간 시절이, 참으로 힘겹고 어려운 시간이었는데, 왜 강렬하고 아름다운 색깔로 내 뇌리에 자주 떠오를까 의아할 때가 많다. 또 그 때의 고생스러웠던 큰 기억들은 시간과 더불어 점차 퇴색하고, 당시에 소소하고 단편적이었던 한 컷, 한 컷의 즐거웠던 작은 순간들이 덧칠되고 미화되어 밀도 있게, 또 낭만적으로 추억되는지 신기할 때가 많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고통 속에서 겪는 작은 행복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존재인 것 같다.

'연세춘추와의 인연(I)'올 올린 후, 당시 기자였던 안인자 교수가 내게 문자를 보내, “춘추와 함께 한 1년 반은 참으로 제 생의 황금기였어요”라는 술회했다. 나는 “와! 이 친구들도 그 시절을 아름답게 추억 하는구나”라는 생각에 조금 놀라고 크게 기뻤다. 

 

                        II.

<연세춘추>/Annals가 자리한 핀슨 홀에서 윗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평화의 집’ 이라는 카페가 있었다. 간단한 식사도 할 수 있는 이 카페를 당시에 내가 자주 이용했던 기억이다. 한갓지고, 가을이면 주위에 단풍이 아름다웠다. 밖에서 손님이 오셨을 때나, 동료 교수가 나를 찾을 때도, 부산하기 이를 데 없는 편집실을 거쳐야 하는 비좁은 주간실 보다는 이곳이 훨씬 편했다. 무엇보다 학생기자들과 어울리고 토론하기에 무척 좋았다. 이곳에서 학생기자들과 개인 상담도 많이 했던 기억이다.

백양로를 거쳐 굴다리를 지나 신촌 로타리로 가는 중간지점 오른 쪽에 춘추 단골 중국집 '태화루'가 있었다. 여기서 학생기자들과 왁자지껄하면서 급한 대로 짜장면으로 배 채우며 ‘소확행’을 만끽했던 기억도 새롭다.

 

<연세춘추>, Annals 를 통 털어 직원이 한 명 있었다. 나는 그 녀를 ‘미쓰 리’라 부르고, 학생들은 ‘누나’, ‘언니’로 통칭했다. 수상경력까지 있는 꽃꽂이 전문가인 그녀는 가난한 신문사를 재정적으로 잘 꾸렸고, 예닐곱 밑의 학생기자들을 마치 친동생처럼 정성스레 잘 보살폈다. 그녀는 학생기자들에 관해서는 물론 졸업한 기자들의 신상에 대해서도 가히 백과사전적 지식을 지녀, 내겐 가장 믿을 만한 정보소스였다. 내가 주간을 그만 두고 한참 뒤 하루는 미쓰 리가 내게 전화를 걸어, “교수님! 빅 뉴스에요. 강경화가 시집을 간데요”라고 소리쳤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미쓰 리는 연세대 여직원 사이에서 왕언니로 통했고, 후에 인사동에서 큰 꽃집 사장님이 되었다.

 

                          III.

<연세춘추> 주간 1년이 넘어가면서 나는 엄혹한 시대의 중압아래서 더 일하기가 너무 힘들어, 내심 학생들에게는 미안했지만, ‘춘추 탈출’을 결심하고 이를 위해 온갖 궁리를 다 해 보았다. 그러다가 결국 생각해 낸 방안이 외국에서 연구비를 받아 그것을 구실로 명분 있게 주간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마침내 독일로부터 훔볼트 연구비를 받게 되어 1977년 말  1년 예정으로 독일 만하임 대학교로 떠나게 된다. 그런데 학교에 알아보니, 내 연대 경력이 3년 미만이기 때문에 규정상 휴직 기간 중 봉급을 반 밖에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출국을 한 학기 늦춰 3년을 채우고 온전한 봉급을 받아야 할지, 아니면 그냥 떠나야 할지가 초점이었다. 고심 끝에 떠나기로 작정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주간직을 계속 수행하기는 심신이 너무 피폐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로서는 ‘춘추 탈출’이 ‘혹성 탈출’ 만큼 절실했다.

당시 이우주 총장님도 마지못해 허락하시며,

“아니, 몇 달을 더 못 참아? 그러면 나도 더 편하게 보내 줄 수 있잖아?” 하시며 무척 아쉬워 하셨다.

공항에는 많은 학생기자들이 나와 배웅을 해 주었다. 무척이나 미안하고 고마웠다.

 

                      IV.

<연세춘추> 주간을 그만 둔 후에도 나는 한참이나 위궤양으로 고생을 했다. 독일에서 귀국 후 하루는 내 주치의였던 세브란스 소화기 내과의 P교수님을 찾았다. 밖에서 기다리다가 간호사가 내 이름을 호명해서 막 진료실 앞으로 다가서다, 막 방문을 열고 나오는 앞 환자와 마주쳤다. 위(I)에서 언급한 중앙정보부 M이었다. 서로 눈이 부딪히자 둘 다 크게 놀랐다. 해쓱하고 지친 얼굴의 M은 내게 겸연쩍게 눈인사를 하고 황급히 발을 옮겼다.

 

순간 내가 늘 ‘가해자’로 인식하고 미워했던 M도 실은 나와 같은 피해자였다는 생각이 내 뇌리에 스쳤다. 그가 당시 유신체제의 지킴이를 진정 자신의 소명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그악스럽게 수행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분명 그도 빗나간 체제의 희생양임에 틀림없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가슴에 스며드는 동병상련의 진한 아픔을 느꼈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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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연세대 백양로를 따라 걷다 보면, 본관 가까이 왼편에 나지막한 언덕이 나온다. ‘시인의 언덕’이라 불리는 이 언덕 위에 윤동주 시비(1968년 건립) 있고 그 뒤편에는 2층 규모의 고색창연한 작은 석조건물이 하나 있다. 당시 <연세춘추>가 이 건물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건물은 일년 사계절을 늘 아름답게 품에 안았고, 돌집이라 특히 여름에는 시원했다.

‘핀슨홀(현 윤동주 기념관)’로 불리는 이 건물은 1922년 연희전문학교의 기숙사로 지어졌는데, 윤동주 시인이 1940년 후배 정병욱(훗날 서울대 국문과 교수)과 함께 하숙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까지 2년여를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연세대 캠퍼스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인 이 건물은 밖에서 보면 2층이지만, 내부로 들어가며 다락층도 있어 실제로는 3층인 셈이다. 핀슨홀에서 가장 인상적인 공간은 바로 3층 다락방인데, 뻐기창이라 불리는 지붕 밖으로 튀어나온 머창을 통해 빛이 들어오는 아늑한 곳이다. 윤동주 시인이 신입생 시절 바로 여기 머물렀다. 젊은 동주가 도머창을 통해 멀리 청송대 너머로 별과 달, 하늘을 바라보며 꿈을 키웠던 바로 그 역사적 공간이다. 나는 윤동주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이 건물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II.

내가 주간으로 있을 때, <연세춘추>는 대체로 열 댓명, 그리고 영자신문 Annals는 대여섯명의 학생기자가 있었다. 춘추는 매주, 그리고 Annals는 한 달에 한번 발간이 되었다. 춘추사 기자들과 Annals 기자들은 분위기와 색깔이 달랐다. 춘추사 기자들은 대체로 외모에 별로 관심이 없고, 떠들썩하고 열띤 분위기에 시국문제에 예민하게 반응을 했는데 비해, Annals기자들은 보다 단정하고, 조용하며, 매사에 비교적 쿨(cool)하게 반응했던 것 같다. 같은 날 춘추와 Annals의 편집회의를 해 보면, 그 차이가 더 확연했다. 그러나 두 기자 그룹 간의 사이는 무척 좋았고 서로 아꼈다.

재미있는 일은, 한 번 Annals에 정치적으로 위험수위를 넘는 기사가 나왔다. <연세춘추>였다면 적어도 배포중지가 되었을 터인데, 아무 문제없이 지나갔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았는데, 하나의 가능성은 기관원들의 영어가 모자랐거나, 못 보았거나, 아니면 영자로 나오는 신문이라 그 영향력과 파장을 다소 낮게 평가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여하튼 주간인 나는 아슬아슬한 심경으로 그 한 주를 넘겼다.

춘추나 Annals 모두 일 중심의 집단이라기보다 확대된 가족 같은 공동체 분위기가 두드러졌다. 내적 결속과 선. 후배간의 유대가 무척 강했다. 그래서 한, 두해, 어떤 때는 몇 년 전 퇴사한 선배들도 고향처럼 신문사에 내왕하며 후배들을 격려하고, 함께 어울렸다. 그러다 보니 주간인 나도 그 모두를 한 식구처럼 대하고 스스럼없이 교유했다. 그래서 얼마 전 퇴사한 춘추의 김수길(전 JTBC 대표이사/중앙일보주필)군이나 Annals의 강경화(전 외교부장관)양도 자주 얼굴을 비쳤다. 내가 <연세춘추>를 낭만적으로 추억하는 큰 이유가 아마 이러한 <연세춘추> 특유의 정겹고 도타운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III.

위에서 언급한 대로, 그 때 춘추와 Annals 기자들은 한결같이 우수하고 성실했다. 그래서 그 후 40여년의 세월 속에 많은 풍파를 겪으면서도 그 대부분이 우리 사회의 걸출한 인재로 우뚝 섰다. 짧은 기간 동안 이 처럼 제제다사(濟濟多士)가 집중적으로 모인 경우는 연세춘추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다. 정말 고맙고 다행한 일이다.

 

우선 편집국장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내가 주간일 때, 첫 번째 편집국장이었던 박성학(신방과)군은 언론인으로 뛰어난 자질을 갖춘 좋은 재목이었는데, 일찍 도미하여 미국에서 사업을 했다. 비즈니스를 하면서 영화 등에 관한 저서를 발간하고 현재는 오지에서 규모 있는 개척사업을 하는 환경운동가가 되었다. 두 번째 편집국장인 서병훈(정외과)군은 숭실대(정치학)교수로 자유주의 사상 특히 J. S. Mill 연구의 대가로 정치사상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며 칼럼니스트로도 이름을 날렸는데, 지난 2월 정년퇴임을 했다. 내가 주간 직을 그만 둔 직후, 편집장을 맡았던 이용주(신방과)군은 조선일보 기자로 재직 중 젊은 나이로 아깝게 일찍 세상을 등졌고, 그에 뒤를 이은 편집국장 강상현(신방과)군은 얼마 전 까지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고 현재 연세대학교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모두가 글 솜씨가 출중했는데, 박성학은 특히 편집능력이 뛰어낫고, 서병훈은 리더십과 정치감각이, 그리고 강상현은 통합능력과 인품이 훌륭했다. 모두 발군의 인재들로 일당백(一當百)이었다.

 

내가 주간으로 일할 때, <연세춘추>를 거쳐 간 학생기자들이 20여명이 되는데, 그 중 가장 많이 진출한 분야가 학계이고, 언론계, 관계가 그 뒤를 이었다. 또 이선효(경영학과,전 라코스테대표/현 네파대표)군 등 몇몇 친구들은 다양한 비즈니스 분야에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내가 아는 범위에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학계를 보면, 위에서 언급한 서병훈, 강상현 외에 전상인(서울대 환경대학원, 사회학), 정연구(한림대, 미디어스쿨), 안인자(동원대, 도서관학), 김복순(명지대, 국문학), 허철(연세대 원주의대, 의학) 등이 있다. 연세의대 정신과에 재직하다 독립한 이성훈(정신의학)박사는 탁월한 수면 및 뇌 과학 연구가로 인문, 사회 융합분야에 다수의 저서를 출간한 한국 정신의학계의 이색적인 존재다. 재학 중 연세문화상(학술부문)을 수상한 이력을 갖고 있다. 이밖에 내가 주간을 그만 둔 후 같은 해 입사했던 서영조(편집국장, 동의대, 정치학), 이호근(전북대 로스클, 사회법) 교수도 학계의 주목받는 탁월한 연구자들이다

언론계에도 여러 명이 진출했는데, 위에서 언급한 김수길, 이용주 외에 유명 가수 알리의 아버지 조명식(전 디지털 타임즈 대표이사)이 있다.

외무고시에 김종훈(법학과, 전 알제리 대사), 정만영(정외과, 전북 국제관계대사) 두 명이 합격했는데, 두 명 모두 춘추사의 튼실한 대들보들이었다. 그런가 하면, 최대용(행정학과, 전 대통령직속 국가브랜드 위원회 사업단장) 박사는 행정고시 출신으로 정부에서 정년퇴임 후 연세대 글로벌행정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이밖에 정계에 진출한 2선 의원인 이원복(신학과, 인천 남동구출신)군과 시민운동가 출신으로 문재인 정부에서 청와대 시민사회 수석을 역임한 김거성(신학과)군도 그 시절 연세춘추에서 활동했던 빼어난 재목들이다.

 

같이 학생기자로 활동했던 김종훈-송혜진 커플은 연세춘추를 매개로 백년가약을 맺었고, 나는 김창회, 최대용, 서영조의 주례를 섰다. 그런가 하면 강상현은 내 천주교 대자인데, 현재는 잠실 7동 성당 총회장으로 나이롱 신자인 나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신심이 두텁다.

내가 주간을 하던 당시, 그리고 그 전후 시기의 연세춘추 기자들 중 다수와는 아직도 자주, 그리고 밀도 있게 교류하고 있다. 이제 60대 중반에 이른 그들과 나 사이는 사제지간이라기보다 스스럼없는 친구에 가깝다. 서병훈, 강상현 교수가 주로 그 중계역을 맡고 있다.

주요 분야별로 이야기하다 보니, 정작 자신의 생활 영역에서 보람된 삶을 개척한 다수, 특히 여기자들의 이름을 거명하지 못했다. 미안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들 한 명, 한 명을 나는 아직 모두 뚜렷이 기억하고 있고 가깝게 느끼고 있다. 이 기회를 빌려, 그들 모두에게 간곡한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IV.

Annals 이야기도 여기서 빼어 놀 수 없다. 소수 정예였던 Annals 출신들도 언론계, 학계, 그리고 특히 외교계에 성공적으로 사회진출을 했다. 내가 주간할 당시 Annals의 편집장은 김창회(신방과) 군이었는데, 그는 언론계로 진출하여 연합통신 전무로 은퇴했다. 그에 뒤를 이은 장성준 (행정과) 군은 미국에서 사회학 교수(Baylor 대학)로 재직 중이고, 다음 편집장 배득종(행정과)군은 현재 연세대 글로벌행정학과 교수로 재직하는 한국 행정학계의 거목이다. 그런가 하면 캐나다의 명문 UBC 정치학과의 박경애(정외과)박사는 한때 북미한국정치학회 회장을 역임한 북미의 대표적 북한 전문가다.

 

얼마 전에 사임한 강경화 외교부 장관도 Annals 출신이다. 당시에도 그녀는 유능함과 지성미로 많은 이에게 회자되었다. 그런가 하면 외교부 차관을 역임하고 현재 유엔대사로 재직 중인 조현대사도 그 때 Annals 기자로 활약했다. 인도대사로 재직 중 ‘대사의 인도 리포트’라는 책을 출간해 공부하는 대사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이에 덧붙여 흥미로운 대목은 미국의 전 대통령 트럼프가 김정은과 북미 정상회담을 할 때, 트럼프의 통역을 맡았던 이연향(종교음악과)도 Annals 기자였다는 사실이다. 이제 중년을 넘겨 중후한 모습이지만 당시에는 소녀같은 가냘픈 용모의 대학 초년생이었다. 함께 Annals 기자를 했던 강경화, 조현, 이연향 세 사람이 같은 시기에 국제무대에서 각광을 받았으니, 이들을 멀리서 지켜보는 내 입장에서는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V.

촌음을 아껴 써야 하는 학창 시절, 대부분의 시간을 <연세춘추>/Annals와 씨름을 하면서 힘겨운 세월을 보냈던 그들이 사회에 나가 이렇게 큰 결실을 거둔 일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 각각의 인생 여정에서 이들이 펼쳤던 각고의 노력과 열정에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한때 나마 스승으로서 이들을 품에 안았던 나로서는 너무나 벅차고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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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1976년 3월 초, 내가 한국외국어대학에서 연세대로 직장을 옮긴 후 한 학기가 지난 때였다. 총장(이우주)님이 나를 보자고 연락을 주셨다. 왜 나를 부르실까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아 의아해 하면서 찾아뵈었더니, 나보고 대학신문인 <연세춘주>와 영자신문 Annals 주간을 맡으라는 것이었다. 그러시면서 내가 학창시절에 연세춘추 기자를 했던 이력이 있고, 나이도 젊어 학생기자들과 교감을 잘 할듯해서 발탁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얼떨결에 "네“하고 답하고 총장실을 나왔다. 나는 그 때까지만 해도 내 앞에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가시밭길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II.

나는 원래 어려서부터 언론에 관심이 많았고, 대학시절 한때는 장래 직업으로 기자를 꿈꾸기도 했었다. 그래서 대학신문의 주간을 맡는다는 일이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고, 좋은 신문을 만드는데 대한 얼마간의 자신감과 그에 따른 설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적인 바람은 내가 주간으로 첫 걸음을 내디딘 후, 반시간도 안되어 산산히 부서졌다. 주간 자리에서 내가 받은 첫 전화는 연세대에 파견된 중앙정보부의 M 이라는 사람의 전화였다. 그는 내게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간단히 자기소개를 하고, 이어 압도하는 어투로 “다음호의 일면 톱은 ***로 하시지요”라고 지시하듯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그거야 우리가 알아서 결정할 일이지요. 여지껏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앞으로는 기관에서 신문내용에 관여하는 일은 없어야 됩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랬더니 M은 대뜸 “아니 이 양반이 세상을 전혀 모르는군, 내가 당장 내려가겠소”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나는 “앞으로 기관에 계신 분의 신문사 출입은 절대 안 됩니다. 한 걸음이라도 신문사에 발을 내디디면 내가 문제를 크게 삼겠습니다.”라고 응수했다.

이렇게 10여분 격앙된 목소리로 말다툼을 하면서, 나는 비로소 내가 사는 시대의 엄혹함을 절감했다. 때는 유신말기, 온 대학이 동토(凍土)처럼 꽁꽁 얼어붙은 가운데 학내에서 불온(?)한 낙서가 몇 자만 등장해도 온 대학을 뒤집어 당사자 색출에 나서는 칠흑 같은 어두운 시대였다. 학생처에 몇 명의 기관원이 거의 상주했다. 학도호국단은 이미 정권의 통제아래 들어갔고, 이들의 남은 관심사는 아직 명맥이 남아 기회있는 대로 저항을 일삼는 연세춘추의 숨통을 막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주간이 된 계기도 기관의 <연세춘추> 통제 과정에서 야기되었다. 당시 취재부장이었던 김수길(경영학과 3, 전 JTBC 대표이사/중앙일보주필)군이 연세춘추의 인기 칼럼인 ‘백양로’에 쓴 글을 트집 잡아 학교에 압력을 가해 그를 내쫓고 주간교수를 나로 교체한 것이었다.

 

               III.

<연세춘추>/Annals 주간으로 재직했던 2년 가까운 세월은 지금 되돌아보아도 실로 노심초사와 고난의 연속이었다. 우선 격무에 시달렸다. 강의 시간 외에는 거의 신문사에서 일과 씨름하며 살았다. 신문이 인쇄되는 토요일 밤 풍경을 잠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광화문 조선일보 외간부에서 새 신문 인쇄를 위해 초교, 재교를 거쳐 최종교정본을 꼼꼼히 살펴보고, 이른바 ‘OK’를 놓고 나면 으레 시간은 11시를 훨씬 넘긴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라 쫓기는 마음으로 급히 뛰어나와 가까스로 마지막 택시를 잡아타고 우이동 입구까지 이르면 대략 12시 가깝게 된다. 통금 때문에 더 이상 갈 수 없다는 택시에서 떠밀리듯 내려, 잰 걸음으로 어둑한 산중턱을 돌아 손병희 선생 묘소 근처의 내 옛집에 닿으면 12시 반을 넘는다. 지친 몸을 눕혀 겨우 몇 시간 눈을 붙인 후, (일요일) 새벽이면 벌써 전화통에 불이 붙는다. 새로 인쇄된 연세춘추를 보고 갖가지 논란이 빚어지는 것이다.

당시 내가 30대 중반, 한창 나이였기에 <연세춘추>의 과중한 업무는 그런대로 몸은 견딜 만 했다. 그런데 관계 기관의 감시와 통제가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하루하루보내기가 숨이 막힐 정도로 괴롭고 힘들었다. 기관원들은 신문을 낼 때 마다 번번이 거칠게 시비를 걸었고, 언필칭 휴간이나 배포중지를 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들과의 다툼이 거의 일상화되었고, 그들 눈에는 녹록치 않은 내가 눈에 가시였다. 나는 만약의 ‘필화’사태에 대비해서 학생들이 쓴 기사를 일일이 점검하고, 정도가 지나치면 그 수위를 낮추거나, 문맥이나 어구를 고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갈수록 일종의 검열관이 되어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자멸감(自蔑感)을 느낄 때가 많았다.

다행히 학생기자들은 내 고충을 이해해서 사보타주하거나 내게 가시적으로 반발하거나 불만을 토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주간인 내가 방패막이 되어 자신들의 글을 임계선(臨界線) 이하로 고쳐 줄 것을 믿고 거침없이 위험수위를 넘기며 시국에 대한 울분을 글로 토로하곤 했다.

나는 최소한 대학언론의 명분을 지키고 나에 대한 학생기자들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으면서, 당국의 철퇴를 피하는 ‘Golden Mean’을 찾으려고 고심했다. 그러나 그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 아니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 고뇌는 점점 깊어갔고, 그것은 내 신체적 건강을 해치는 수준으로 번져갔다. 연세춘추 주간으로 반년이 지나면서부터 나는 위궤양으로 시달리기 시작했고, 일 년이 지나자 체중이 10 Kg이 빠졌다. 나는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려워 총장님께 여러 차례 주간 교체를 청했으나, 번번이 “대안이 없다”라는 말씀으로 일축하셨다.

그래도 <연세춘추>는 실로 엄혹했던 유신말기에 대학언론 중 가장 결기 있게 민주화를 외쳤던 신문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 때문에 핍박과 고초도 더 컸다. 다른 대학 신문사 주간들은 내게 그러고 어떻게 버티냐고 자주 물었다.

 

                  IV.

그 질곡 속에서도 <연세춘추>의 주간으로써 느끼는 보람과 기쁨이 적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주간으로 일했던 2년 가까이의 세월이 없었다면, 내가 연세대에서 보냈던 30년 넘는 세월이 훨씬 메마르고 캠퍼스에서 느꼈던 낭만적 정서도 크게 줄었을 것이다.

우선 학생기자들이 좋았다. 놀라운 일은 우수한 학생들이 대거 기자를 지망했고, 거기서 뽑힌 친구들은 하나같이 빼어난 재목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글 잘 쓰고 당차고 기개 있는 정예(精銳)들을 선배기자들이 엄선해서 뽑았다. 주간인 나는 충원과정에 개입하지 않고, 최종 면접에 형식적으로 참가해서 추인만 했다. 그들 나름의 팀워크와 투쟁 전열을 갖추기 위해 그래야만 될 것 같아서였다.

학생기자들은 시대의 양심으로, 또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로서 대학의 명예와 존엄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무엇보다 그들의 순수와 열정, 그리고 용기가 돋보였다. 나는 기관원들의 감시와 통제 속에서 학생기자들을 보호하며, 그들의 열망과 의기에 찬물을 끼얹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면서 이것이 내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나와 학생기자들과의 관계는 무척 가까웠다 (물론 이것은 내 생각이고, 그들 생각은 달랐을 수도 있다). <교수-학생> 관계라기보다 <가족>과 <동지> 같았다.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았고, 시대적 아픔을 공유하며, 같은 지평을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 때 나도 한창 젊었던 시절이라 그들과 비교적 격의 없이 어울렸던 것 같다. 대체로 일주일에 두, 세 번을 그들과 저녁을 함께 했고, 여름방학에는 단체로 해수욕장을 찾았고 겨울에는 연수를 떠나 산행도 같이 했다. 한번은 쌍쌍파티도 했던 기억이다. 그들은 글 쓸 때는 투사를 닮았으나, 놀 때는 어린아이처럼 착하고 순진무구했다. 학교 앞 중국집 자장면 한 그릇에도 만족했고, 늘 떠들썩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즐거워했다. 나도 그 정서에 휩쓸려 그들과 함께 있을 때는 대학시절의 낭만이 되 살아오는 느낌을 갖곤 했다.

나는 그들이 어려운 시기에 대학신문을 만든다는 구실로 학업을 게을리 할까 걱정 되어, 매 학기 성적이 평균 B학점이 되지 않으면 퇴사시킬 것을 공표하고, 학기말이면 성적표 제출을 의무화 했다. 그러나 곧 이것이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학생기자 대부분이 성적이 빼어났고, 뒤로 크게 처지는 학생은 한명도 없었다.

나는 보다 질 높은 신문을 만든다는 명분으로 학교에 청해서 연세춘추가 자리하고 있는 ‘핀슨 홀’ 위층에 ‘조사연구실’을 마련했다. 이들에게 공부방을 만들어주려는 속셈에서였다. 이들은 이 방을 요긴하게 이용하는 듯해서 기뻤다.

 

                   V.

지난 2017년 겨울, 그 때 고락을 함께 했던 학생기자들 15명과 40년 만에 해후를 했다. 대부분이 이미 퇴직을 했고, 꽃 같던 여학생 기자들이 이제 환갑을 넘어 머리가 희끗한 할머니가 되었다. 세월의 강을 넘어 옛 기억을 소환하며 모두 그 아련한 시절로 돌아가 손을 맞잡았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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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강렬 2021.03.15 13:48 Address Modify/Delete Reply

    그 시절이 참 아련합니다. 제가 75년도에 유신 반대를 하다가 퇴학을 당하고 안기부 와 경찰의 감시 아래 고통의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교수님과 친구들은 학교에서 그 어려움을 당하셨지요. 제가 80년 복적 후 졸업해 82년 연합통신에 들어가서 외신부에서 근무할 때 '보도 지침'이 데스크 책상에 매일 쌓였습니다. 0000는 보도하지 말 것, 0000는 축소해 기사화 할 것 등등입니다. 돌아보면 엄혹한 시기였지만 그때의 민주 회복, 언론 자유에 대한 열정과 갈망이 부끄럽지는 않았구나 생각이 듭니다. 요즘 '기레기'라고 조롱 받는 후배 기자들을 보면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수님 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