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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여든 번째 맞는 세모(歲暮)

2020. 12. 31. by 현강

I.

경자년, 한 해가 저문다. 내가 태어난 후 여든 번째 맞는 세모(歲暮)다. 대체로 세모에는 덧없이 보낸 지나는 해에 대한 아쉬움과 새로 시작하는 한 해에 대한 희망이 함께 교차하는데, 올해에는 새해를 향한 불빛은 어득한 채, 깊은 상실감 속에서 온통 울적한 기분에 휩싸인다.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에 갇혀있는 느낌, 아니 칠흑 같은 어둠속에 침잠해 있는 무거운 심경이다.

나이 탓일까. 코로나 때문일까, 아니면 시국 탓일까. 아마 이 모든 게 다 겹쳐 증폭된 탓일 게다. 여하튼 보내는 해는 유례없이 힘겨운 한 해였다. 오죽하면 며칠 전 <타임(Time)>지가 2020년을 역대 <최악의 해>라고 정의했을까. 정말, ‘테스’형에게 “세월이 왜 이래”라고 묻고 싶은 심경이다. 할 말이 많아 글이 분명 길어질 것 같아 그 걱정부터 앞선다.

 

II.

세모에 나를 울적하게 만드는 요인들 중에 내 나이가 한 몫 하는 게 사실이다. 내일이면 여든에 하나가 더 보태질 테니, 도대체 어쩌다 이 나이가 됐나 내 스스로가 믿기 어렵다. 돌이켜 보면 내 나이 20, 30 대에는 60세 이후의 내 삶에 대해 생각조차 해 본 기억이 없다. 40대에 들어서면서 간혹 60세 이후를 머리에 떠올려 보았지만, 그냥 50대의 연장선 위에서 ‘이어지는 삶’ 정도로 생각했지, 그 나이에 짊어질 내 존재의 의미와 삶의 양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해 본 기억이 없다. 60대 내지 정년 이후의 삶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 50대에 들어서면서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그 때 내가 내린 결론은 단순했다. “서울을 떠나자, 가능하면 멀리, 그리고 보다 자연에 가깝게. 그러면서 내 마음이 가리키는 대로, 가능한 한 내 의지대로 살자”가 그것 이었다. 나의 속초/고성 행에 대해 많은 지인들이 어려운 결단이라고 했는데, 내겐 그것이 당시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내 마음속에 깊이 잠겨있던 숨은 욕구와 바람이 자연스레 현화(現化)한 것이기 때문이다.

시골 생활이 새해면 15년째 접어든다. 그 사이 나 자신은 물론 이곳 시골의 풍정도 많이 변했다. 해가 갈수록 농사짓기에 힘이 부치고, 특히 작년 큰 산불을 겪고 난 후 부터는 몸도 마음도 예전 같지 않다고 느낄 때가 많다. 기후변화도 약여(躍如)해서, 겨울이면 으레 몇 차례 찾아오던 폭설이 지난 몇 해 동안 깜깜 무소식이고, 금방 쏟아질 듯 빽빽이 밤하늘을 가득 채웠던 별들도 그 수가 눈에 띠게 줄었다. 이제 동화 같은 설국(雪國)의 풍경도 밤하늘을 보석처럼 수놓던 별들의 잔치도 점차 옛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그런가 하면 농촌의 주택이나 삶의 양식이 빠르게 현대화되어 이젠 도시와 별로 다를 게 없고, 서울 가는데 처음에는 5시간 가까이 걸렸는데, 요즈음은 2시간 반으로 크게 줄었다. 시골스러운 분위기는 점차 줄어들고, 이젠 서울 변두리쯤으로 바뀌는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의도했던 ‘탈(脫) 서울’의 벅찬 꿈은 반쯤 실패한 셈이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것은, 나를 이곳 원암리로 유인했던 집 뒤에 울창한 청정 소나무 숲이 지난 번 산불로 완전히 사라졌고, 군데군데 아직 베어가지 않은, 껍질이 반쯤 벗겨진 칙칙한 모습의 나목(裸木)들이 을씨년스럽게 줄지어 서있는 모습이다. 이 모든 게 나를 울적하게 만든다.

 

III.

세모에 내 마음을 어둡게 만드는 데 큰 몫을 한 것은 역시 코로나 19라는 희대의 국제 역병이다. 올 초까지 만해도 오늘 같은 ‘대참사’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머지않아 전 세계에 이 역병에 걸린 확진자가 1억에 이를 전망이고, 먼 나라도 옆집 드나들듯 했던 세계화 시대에 나라마다 빗장을 걸어 잠그기에 바쁘다. ‘언택트’, ‘뉴노멀’이 생활 속에 파고든지 이미 오래고, 이제 전 세계가 애타게 백신에 목을 매고 있다. 그 동안 세계대전도 경제공황도 인간을 이렇게 비참하고 왜소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이 격변과 반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는 그간 인류가 쌓아올렸던 찬란한 문명과 과학, 그리고 이성이 하염없이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음을 목도한다. 세계 일류국가인 미국이, 그리고 유럽의 선진 국가들이 오늘처럼 초라하고 같잖게 보인 적이 있었던가. 무릇 인간의 부족함을 절감하는 나날이다. 어쩌면 세계사가 코로나를 분수령으로 그 '이전 시대'와 '이후 시대'로 크게 나뉠 개연성이 없지 않다. 

우리 눈을 주변으로 돌릴 때, 무엇보다 소상공인들, 고용취약계층이 하루하루 겪어야 하는 현실적 고통과 실존의 불안은 보다 절실하다. 코로나 19라는 팬데믹이 드리운 온갖 어둠의 그림자가 그간 인간이 이웃과 약자, 그리고 자연에게 저지른 온갖 만행들, 핵무기 무한경쟁, 생태계 파괴, 이기적 욕망에의 탐닉 등이 빚어낸 업보라는 입장에 본질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그 충격과 피해가 일차적으로 우리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계층들을 향하고 있다는 아이로니에 좌절하지 않을 수 없다.

 

IV.

돌이켜 보면, 가는 해 내내 우리는 마치 아수라장과 같은 정쟁(政爭)터에서 부대끼며 살았다. 우리는 민주화가 진척되면, 정치가 안정되고 사회, 경제적으로도 더 발전하고, 민심도 더 온유해 지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이 모든 기대를 철저하게 배신하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 진영화는 이제 그 첨예화의 극을 달리고 있다. 정계는 물론, 언론계, 종교계, 시민사회, 아니 가족 사이도 좌, 우 양극으로 나뉘어 대립과 불신, 증오와 비타협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중원(中原)은 한껏 비좁아지고, 중도(中道)는 길을 잃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권력욕과 독선, 그리고 비이성과 비관용이 자리 잡았다. 정치의 세계가 날이 갈수록, 뻔뻔하고, 포악 해져서 마치 흉물스러운 괴물을 보는 것 같다. 이제 그 동네에서 국리민복, 공공선과 휴머니즘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무엇보다 정치 영역에서의 이성(理性)의 복원이 가장 시급하다. 이렇게 된 데는 권력분점과 협치를 가볍게 여기는 집권세력의 책임이 가장 크다. 그러나 야당은 물론, 다수의 시민 개개인도 이 진영화(陣營化)정치의 아수라장에서 취한 자신들의 편향된 정치행위에 대해 자성해야 할 여지가 크다. .

그런데 안타깝고, 서글픈 일은 정치 영역에서의 이성의 상실이 우리만 의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세계 강대국의  지도자들, 예컨대, 곧 자리에서 물러 날 트럼프나 푸틴도, 시진핑도, 그리고 얼마 전 그만 둔 아베도 글로벌 비전과는 아랑곳없이 예측불허의 정치공작과 눈앞의 이익에 급급 하는 저급 정치의 고수들이 아닌가. 세모에 나를 경악시킨 가장 큰 우스개는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 1호가 다름 아닌 트럼프라는 사실이다. 이처럼 우리가 눈앞의 현실에서 눈을 돌려 세계를 조망해도 그 어디에서도 희망의 불꽃은 보이지 않는다.

 

V.

쓰고 보니 넋두리로 점철된 요설(饒舌)만 늘어놓은 느낌이다. 바로 내일이면 새해인데, 한풀이 굿판을 벌리고 있는 것 같아 스스로가 부끄럽다. 그러나 한 해의 끝자락에, 바로 새해 첫날에 앞서, 허심탄회하게 요즈음 내 심경을 훌훌 털어놓고 보니 마음은 홀가분하다. 이렇게 자신이 서있는 자리를 다시 확인하고, 그것을 매개로 타인과의 교감의 발판을 마련하는 일도 그리 무의미한 일만을 아니지 않을까 여겨진다.

그러나 이 엄중한 시기에 우리가 정작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이 어둠의 심연에서 몸을 일으켜 보다 겸허한 심경으로 우리 주변에서부터 꺼져가는 작은 희망의 불씨를 하나하나 찾아 정성스레 지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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