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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꽃길만 걸으셨지요"

2020. 10. 22. by 현강

I.

작년으로 기억된다. 속초에 사는 지인 두 분과 점심을 했다. 두 사람 다 나와 동년배로 나와 비슷한 시기에 속초/고성으로 내려와 노년을 보내는 분들이다. 이곳에서 처음 만났지만, 한국사회의 인간관계가 늘 그렇듯이 따지고 보면 친구의 친구들이고, 한국 현대사의 온갖 풍파를 함께 겪으며 동시대를 함께 살아 왔기 때문에 공통의 경험을 바탕으로 상호간에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만나면 가끔 옛 추억을 더듬으면서, 어린 아이들처럼 자주 “그랬지”, “그 때 그랬었지” 하며 맞장구를 치기도 하고, 요즘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면서 때로는 함께 기뻐하거나 감탄하고, 때로는 비분강개하거나 안타까워 할 때도 많다.

그날도 이런 저런 얘기를 꽃피우는 가운데, 그 중 한분이 느닷없이 “안 교수님, 교수님은 평생 꽃길만 걸으셨지요”라고 내게 물었다. 그러자 다른 한 분도 곧, “그렇지요. 일생 순탄하셨잖아요”라며, 거들었다. 순간 나는 얼마간 당황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분들 말씀에 내심 얼마간 반발이 느껴졌다. 그래서, “꽃길이라니요. 제 인생도 그렇게 녹록치 않았습니다” 라며 얼버무렸다.

II.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 ‘꽃길’ 질문이 계속 내 귓가에 맴돌았다. 내 지난 생애가 꽃길이었던가 아니면 가시밭길이었던가. 그러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지난날을 되돌아보았다.

'꽃길‘을 넉넉한 가운데, 여유 있게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그리고 즐기며 사는 인생여정으로 정의한다면, 나는 분명 그런 삶을 살지는 않았다. 내 생애의 대부분은 무척 힘겹고 팍팍했고, 늘 바삐 쫓기며 살았다. 세속적인 사치나 쾌락을 탐하거나 누리지도 않았고, 여유를 즐길 겨를도 없었다. 항상 숨이 목에 차있었다. 그래서 정년 이전의 내 삶을 되돌아보면 지겨울 정도로 힘들었다는 생각부터 든다. 오죽 힘겨웠으면, 20 년전 60문턱에서 내 처가, “당신, 10년 더 젊어지면 좋겠어?”라고 내게 물었을 때, 내 대답이 “아냐, 그 지겨웠던 50대를 되풀이 할 생각, 전혀 없어, 진정이야”라고 답했을까. 그런데 세속적 잣대로 볼 때, 내 50대는 대학교수로서 절정에 이르렀고, 그 사이에 2년 가까이 장관까지 지냈던 내 생애 최고의 시간이었다.

그나마 내가 얼마간 심신의 안정을 찾고 내 삶의 주인이 됐다고 느낀 것은 10여 년 전, 이곳 속초/고성으로 온 후 부터가 아닌가 한다. 그런데 타인들은 오히려 내가 이곳으로 오기 전까지의 그 숨 가쁘고 고단했던 삶의 여정을, 명문대학 교수-장관을 거쳤다는 그럴싸한 경력 때문에 ’꽃길‘로 보는 것 같다.

III.

20대 후반, 외국에서 유학을 할 때 이후 나는 하루 5시간의 수면시간을 아직도 지키고 있다. 중. 장년기에는 밤샘도 밥 먹듯 했다. 나처럼 재주 없고 능력도 부치는 사람이 무언가 이루려면, 잠을 줄여 남보다 더 일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무슨 일을 하거나 완벽을 추구했고, ‘올인’를 했다. 그러자니 삶이 고달프고 힘겨울 수밖에 없었다.

나의 이런 ‘올인’ 인생을 크게 거들어 준 것은 쾌락주의(hedonism)와는 거리가 먼 내 성벽이 아니었나 싶다. 경건주의자는 아니지만, 나는 천성이 ‘즐기는 것’, ‘누리는 것’에 대해 별로 흥미가 없다. 게다가 재주가 없어 그나마 조금 끄적이는 공부 이외에는 세상에 할 줄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골프는 물론 자동차 운전도 못하고, 바둑이나 ‘고스톱’도 할 줄 모른다. 술도 거의 안하고, 노래방도 가지 않는다. 식성이 좋아 무엇이나 잘 먹어, 미식가와는 거리가 멀다. 친구를 좋아하지만, 지나치게 어울리는 편은 아니다. 그래서 그랬던지 한번은 잘 아는 선배교수 한 분이 연민어린 눈빛으로 나를 보면서, “안 교수, 당신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살아?”라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무엇보다 나의 ‘올인’ 인생에 크게 도움을 주었던 것은 타고난 건강이었다. 평생 큰 병을 앓지 않았고, 무리를 해도 곧 회복되었다. 나이 팔십에 300평 농사를 지으며,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부모님이 내려 주신 건강 때문이 아닌가 한다.

IV.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내 생애의 대부분을 ‘내가 좋아 하는 일’, ‘잘하는 일’ 그리고 ‘보람되다고 느끼는 일’을 하며 살았다. 내 꿈이나 적성으로 볼 때, 세상에 별처럼 수많은 직업 중에 위에 세 박자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직업은 교수/학자의 길 이 유일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평생 그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이 내려주신 큰 축복이었다. 그렇다면, 필경 그게 '꽃길'이 아니었을까. 30여 년 간 교수직을 수행하면서 한 번도 그 일에 염증을 느끼거나, 가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늘 가슴이 벅찼고 자랑스러웠다. 일을 하는 과정에서 힘겹고, 고달프게 느끼고, 자주 좌절했던 것은 순전히 내 능력 부족과 과욕 때문이었지, 일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교수직은 내게 아직도 성직(聖職)의 의미를 지닌다.

두 번 정부에 참여하면서, 고뇌가 무척 컸다. 그러나 그 일을 잘하면 국리민복에 기여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내 학문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개연성 때문에 그 일에 ‘올인’했다. ‘일벌레’라는 별칭이 항상 따랐다. 한번은 퇴임하는 실장 한분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내게 건넨 말이, “장관님, 조금은 즐기면서 하십시오. 옆에서 볼 때, 마치 생사를 걸고 일을 하시는 것 같아요.”였다.

V.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해서 한국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온갖 풍파를 겪으며 나이 팔십에 이르기 까지, 그래도 내가 평생, 하고 싶은 일, 보람되다고 느끼는 일을 열심히 하며 꾸역꾸역 살아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행복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인생 황혼녘에 겪은 지난해 불난리를 포함해서, 그간에 있었던 온갖 힘겹고, 숨 가쁘고, 가슴 아팠던 어려운(그 때 그 때는 절체절명으로 느꼈던) 순간들도 내 생애의 큰 물줄기를 생각하면 얼마간 무리해서 한낮 에피소드들로  치부할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 혹시 누가 내게 다시 “꽃길만 걸으셨지요”라고 물으면, 크게 머믓거리지 않고, ''네, 그렇지요”라고 대답할 듯 하다. 물론 그 때, 묻는 이의 의도와 대답하는 내 생각은 다를 수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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