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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농사 삼재(三災)

2020. 8. 20. by 현강

                                      I.

이곳 고성에서 농사를 지으며 겪게 되는 크고 작은 어려움 중에 가장 힘든 것 세 가지를 꼽으라면 바람병충해’, 그리고 새떼가 아닐까 한다. 이들 세 가지 재해들의 피해는 정말 장난이 아니어서 가뜩이나 변변찮은 내 농작물 수확을 늘 반 토막 내곤 한다. 처음에는 꿰나 안타깝고 화도 치밀었지만, 이젠 앙앙불락하기보다는 그러려니하고 편하게 받아들이며 친환경적 차원에서 느긋하게 내 방식대로 대응한다.

 

                                       II.

우선 바람 얘기부터 시작하자. 이웃 속초 학사평과 내가 사는 고성 원암리는 워낙 바람이 세기로 이름난 곳이다. 과일나무에 막 꽃이 피기 시작하는 봄철과 과일 열매가 한창 익어가는 가을철에 여지없이 찾아드는 모진 강풍은 낙화(落花)와 낙과(落果)를 불러 과일 농사를 망쳐 놓는다.

그중 봄철 양간지풍’(양양과 간성 사이에서 부는 국지성 강풍)은 가히 전설적이다. 해마다 3월 중순에서 5월 초에 불어오는 이 바람은 불을 몰고 온다는 의미에서 화풍(火風)’이라고도 하는데, 2005년 양양 낙산사를 잿더미로 만들었고, 작년에는 우리 집(현강재)을 포함해 토성면의 몇 개 마을과 산지를 초토화했다. 광풍이라 불려 마땅할 이 거친 봄철 바람은 비단 화마만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막 개화하는 과수 꽃잎들을 여지없이 유린해 열매를 맺을 근거를 아예 없애 버린다.

이곳 가을바람도 만만치 않다. 특히 늦여름, 초가을 남쪽 열대 해상에서 발생한 태풍이 자주 한반도를 스쳐 동해 쪽으로 빠져나가는데 그때 이곳 속초/고성이 그 영향권에 드는 경우가 잦다. 비를 머금은 태풍이 휘몰아치면 잘 익어가던 과일들이 우수수 떨어져 다 된 농사를 망쳐 버리곤 한다.

 

그러다 보니 나도 바람 피해를 줄이는 방향으로 농사전략을 짜게 된다. 우리 집 과수 농사의 주종이 점차 봄철과 가을 강풍에 잘 견디는 블루베리, 아로니아, 보리수 등으로 바뀐 것도 그 때문이다. 그 중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사고에서도 끄떡없이 혼자 살아남았다는 아로니아는, 가히 명불허전, 모든 자연재해에 극강의 모습을 보여준다.

 

                                      III.

사람이 병으로부터 자유로 울 수 없듯이 채소나 과수와 같은 농작물도 한 해 내내 병충해의 위협 속에서 생명을 지탱한다. 그런데 나는 화학 약제, 살충제, 제초제를 전혀 쓰지 않고, 채소에 비닐멀칭조차 하지 않는다. 내가 병충해 방제를 위해 쓰는 것은 오직 희석한 목초액과 EM(effective micro-organisms)용액이 전부다. 말하자면 자연생태계에 피해를 줄 수 있는 일은 그 어느 것도 마다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일은 많고, 병충해의 피해는 막심하다. 속초에 아는 종묘상 주인은 내게 농사짓는다고 벌레 치다꺼리만 한다고 농담한다. 아무리 정성을 들여도 해마다 과수 두, 세 그루는 병충해로 시들시들 앓다가 죽는다. 사과, , 복숭아 등 과일들도 병충해에 시달려 한 귀퉁이가 벌레 먹던가 찌그러지는 등 제 꼴이 아니어서, 누가 와도 따서 권하기가 민망스러울 때가 많다. 내 농터에 오디()나무도 제법 되는데, 봄철이면 으레 힌 색 벌레가 번지고, 잎이 하얗게 변하며 말려 들어간다. 목초액을 뿌리고, 어떤 때는 호스로 물대포를 쏘기도 한다. 그래도 늘 수확은 반타작이 고작이다.

 

허나 해마다 수없이 농약을 살포해서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다른 집 과수나 채소보다 거칠고 못생겼으나 자연 친화적이고 속이 건강한 우리 집 농작물들이 ()’임을 실감하기에 앞으로도 지금까지의 농사방식을 바꿀 생각은 추호도 없다.

 

                                       IV.

시골에 살면 재잘거리는 새들의 새벽 합창 소리에 눈을 뜰 때가 많다. 또 이름 모를 작은 새의 매혹적인 모습에 흠뻑 빠질 때가 자주 있다. 이렇듯 새들은 자연이 선사하는 고마운 선물이고 그 중요한 일부이기도 하다. 그렇게 볼 때, ‘새떼를 재해로 치부한다는 것은 반자연적이며 몰인간적인 발상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한여름 폭염 속에서 땀 흘려 애써 가꾼 농작물을 쏜살같이 날라와 순식간에 먹어 치우는 새떼들은 안타깝게도 농사꾼에게 재해로 인식될 때가 많다.

새들은 무리 지어 움직일 때가 많고 그래서 그 피해도 크다. 한번 새떼가 돌개바람처럼 휘몰아치면 자칫 농작물이 초토화되기 일쑤다. 많은 이들이 허수아비 세우기, 나무에 종()달기, 그물망 치기 등을 해보지만 어떤 방제 방식도 그리 성공적이지 못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들 새들이 엄청난 미식가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체리, 딸기 등 가장 맛있는 과일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고, 그것도 가장 맛있을 때 때맞추어 취식하고, 때 지난 것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나는 농사 초기에 두어 이랑 딸기 농사를 해 보았는데, 딸기가 익어 제맛이 돌기 시작하면 새때가 여지없이 몰려들어 게걸스럽게 해치웠다. , 세 해 동안 이 놈들에게 진상을 거듭하다가 끝내 딸기 농사를 접었다. 항복을 선언한 셈이다. 촘촘히 그믈망을 치거나 온실재배를 하면 낳겠지만 그럴 생각까지는 없었다.

이들 미식가 조류들은 체리도 무척 좋아해서 빨갛게 익었다 하면 떼 지어 달려든다. 그런데 새들에게 비교적 관대한 우리 내외도 최상 진미(眞味)의 체리는 이들 난폭자들에게 통째로 양보할 생각이 없어 소극적이나마 우리 방식으로 맞서보곤 한다. 즉 새들은 대체로 접근하기 쉬운 나무 윗부분부터 공략하는데, 우리는 처음부터 손닿기조차 어려운 위쪽은 아예 포기하고, 중간 아래쪽 지키기에 전념한다. 그래서 나무 아래쪽 체리가 막 익기 시작하면, 서둘러서 선제적으로 그것부터 따먹는다. 말하자면 나무를 위, 아래 양대 세력권으로 나누고 공존, 공유 전략을 구사하는 셈이다. 그러나 그러다 보니 새들은 여유롭게 가장 맛있는 체리를 즐기는 데 비해, 우리는 조급한 마음에 덜 익은 체리를 허겁지겁 따 먹는 신세가 된다. 주객이 전도된 셈이다.

새들은 무화과도 무척 좋아한다. 그런데 얄미운 것은 이놈들이 무화과가 맛있게 익기가 무섭게 엄습하는데, 그것을 통째로 먹는 것이 아니라, , 두 입 쪼아먹고 날아간다는 것이다. 무화과는 과일이 무척 실해서 몇 개면 한 끼 요기도 되는데, 새들이 조금 비어 먹었다고 그냥 버리기는 너무 아깝다. 그래서 우리는 궁여지책으로 그놈들이 먹은 부분만 잘라내고 찜찜한 대로 나머지를 챙겨 먹는다. 말하자면 미식가 주인들이 드시고 남긴 잔식(殘食)을 아랫사람이 꾸역꾸역 찾아 먹는 셈이다. 이 또한 주객전도의 예가 아닌가.

 

새떼들의 농사 피해도 만만치 않으나, 그들도 우리처럼 자연에 기대어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적대시하기보다는 기본적으로 공존전략 아래 공유경제의 길을 모색하는 편이다. 그렇게 볼 때, 새들은 재해라기보다 껄끄러운 공생자(者)라고 할 수 있다.

 

 

 

                                      V.

농사를 지으며 겪게 되는 어려움은 이들 농사 삼재 이외에도, 봄철 가뭄, 한여름의 폭염, 때 없이 찾아오는 수해, 냉해 등 갖가지 자연재해들이 허다하다. 그 뿐인가. 일하다 보면, 늘 날고 기는 각종 벌레들에 시달리게 되고, 뱀과 말벌, 악성 진드기 등의 위험도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이들 어려움을 갚고 남을 농사가 선사하는 큰 기쁨들이 너무나 많다. 무엇보다 몸으로 부딪혀 자연과 호흡하고, 자신의 실존적 의미를 확인하며 영성을 키울 수 있다는 점은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천상의 선물이다.

뿐만 아니다. 내 나이에 아직도 흙냄새를 맡으며 건강하게 일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자연생태계를 해치지 않으면서 내가 일군 농터에서 손수 가꾼 깨끗한 농작물을 가장 신선할 때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세속적 즐거움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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