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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어쩌다 '코로나' 소동

2020. 5. 26. by 현강

                     I.

작년 말 가까운 제자 C군이 내게 전화를 걸어 아들 주례를 부탁했다. 이곳 속초/고성으로 온 후 웬만해서는 주례를 사양해 왔는데, C군과의 각별한 관계 때문에 이번에는 거절하지 못하고 순순히 응락했다. 혼주인 C군은 연세대 행정학과 75학번 옛 제자인데, 특히 내가 <연세춘추> 주간을 할 때 학생기자로 유신말기의 어려운 시기를 함께 헤쳐나갔기에 나와의 인연이 무척 깊고 오래되었다. 더욱이 내가 30여 년 전 C군 주례를 했기 때문에 아들 주례까지 맡게 되면 ‘부자’ 주례를 하게 되는 셈이다. 결코 흔치 않은 일이 아닌가. 그런데 더 신기했던 일은 결혼 예정일이 다음 해(2020년) 2월 29일이었다. 이 날은 4년마다 윤년이 되어야 찾아오는 달력에서 가장 드물게 등장하는 날짜인데, 그날이 바로 52년 전에 내가 멀리 이국 땅 알프스 산록의 작은 성당에서 내 처와 손을 맞잡았던 나의 결혼기념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그 날을 기쁘게 마음에 새겼다.

 

                     II.

작년 말 중국 무안에서 발생한 ‘코로나 바이러스’는 올 2월 중순에 들어서면서 우리나라에도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청정지역으로 알려진 이곳에서도 2명의 확진자가 발생해서 점차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급기야 2월 23일 정부는 감염 위기경보를 ‘심각’으로 격상했다.

그런데 바로 그날 오후부터 나는 약간의 발열과 오한, 그리고 얼마간의 인후통을 느꼈다. 기침은 없었다. 며칠간 겨우내 크게 자란 잡초들을 뽑느라고 조금 무리했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처음에는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런데 웬걸 밤새 몸을 뒤척이며 앓는 소리를 냈다. 아침에 인후통은 가셨는데 열이 떨어지지 않았다. 작년 고성산불에 체온기도 타버려 실제로 재보지는 못했지만, 체온이 좋이 38도 가까이 될 듯싶었다. 거울로 보아도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급한대로 해열제를 먹어도 열이 조금 내려가다 다시 올라갔다. 기분이 영 언잖았다. 하필 코로나가 창궐하는 이 때에, 그것도 주례를 며칠 앞선 이 시점에서 발열이라니, 이게 무슨 변고인가.

 

자연히 코로나 19가 우려되었지만, 지난 몇 주 간의 나의 생활궤적에 비추어 바이러스에 감염될 가능성은 거의 전무했기에 스스로 고개를 모로 저었다. 그러나 불편한 심경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다음날 (25일) 아침 서울서 아들이 들이 닥쳤다. 제 엄마한테서 내 이야기를 듣고 걱정이 돼서 온 모양인데, 내 이마를 만져보더니 일단 서울로 가자고 서둘렀다. 며칠 후 결혼식에 가자면, 어차피 시외버스를 이용해야 하는데, 아들 승용차로 안전하고, 쉽게 갈 수 있기에 우리 부부는 주저 없이 따라나섰다.

서울에 온 후, 그 다음날(26일) 까지 열도 조금 내리고 한결 몸이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그렇게 낳는가 싶었는데, 다음날(27일) 아침부터 다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해열제를 먹어도 별 소용이 없었다. 불길한 생각이 자꾸 고개를 들어, 잘 아는 동네 내과를 찾았다. 의사 선생님은 그간의 정황이나 몸상태로 보아 코로나 19는 분명 아닌 듯하나, 검체검사를 받기 전에는 확언을 하기는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하도 답답해서 모래 결혼식 주례가 예정되어있는 내 형편을 얘기하면서, “선생님이시면 어떻하시겠어요?”라고 유치한 질문을 던졌다. 그는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제가 어떻게 그 대답을 합니까? 교수님 스스로 결정하셔야지요.”라며, “주례를 하지 않으실 수 있으시면, 그게 최선의 방법이지요.”라고 답했다. 정답은 분명한데, 내가 실천하기 어려운 답이었다.

 

                       III.

나는 실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결혼식을 이틀 앞두고, 주례를 하지 않겠다고 통보를 하는 것은 너무 얄팍하고, 어른답지 못하다고 느껴져 그것은 일단 대안에서 제외했다. 그렇다면 주례를 해야 하는데, 내 스스로의 느낌은 물론, 객관적으로도 코로나 감염 확률이 무척 낮으므로 눈을 딱 감고 감연히 주례에 나서는 것이 어떨까, 그것도 분명 하나의 대안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뇌리에 담는 순간, 동시에 이에 맞서 최악의 시나리오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런데, 내가 만약에, 백에 하나 코로나 19에 감염되었다면?”이 그것이었다. 순간 나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만약 바이러스 비말이 불과 수십 센치 앞에 서서 주례사를 경청하는 신랑, 신부에게 튀게 된다면, 아니 더 나아가 식장을 가득 매운 하객들에게도 그 음습한 영향이 미친다면, 그것은 실로 상정하기 조차 무서운 참담한 상황이 아닌가. 그리고 비록 미세하지만 그 작은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내가 주례로 나선다면 그것은 범죄행위와 다름없는 게 아닐까. 생각이 이에 미치자, 즉시, 내가 가능한 빨리 검체검사를 받아 비감염자인 것을 스스로 확증하는 이외에는 달리 해답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서대문구청 옆 선별진료소는 제법 붐볐다. 일단 등록을 마치고 집에서 세 시간 기다려 연락을 받고 진료소로 갔다. 27일 오후 4시였다 그런데 여기에 새로운 암초가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담당 의사에게 검사결과가 언제 나오느냐고 문의하니, “이틀 정도”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간곡하게 내 사정을 얘기하며, 좀 더 일찍 알 수 없겠느냐고 묻자 그 분은 단호한 어조로, “당장 주례를 할 수 없다고 말씀하세요. 아무리 빨리 챙겨도 내일 밤까지 결과가 나올 가능성은 반이 안 됩니다”라는 것이었다. ‘아차, 한발 늦게 왔구나’라는 생각이 엄습하며 무척이나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일단 검체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별 소용이 없을 것 같았으나, 구청 보건소 담당직원에게 가능한 한 빨리 결과를 알려 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집에 돌아오니 암담한 심경이었다. 만약 검체검사 결과가 내일 밤까지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리 궁리해도 답이 안 나왔다. 고심 끝에 나를 대신해서 주례를 맡아 줄 착한 후배 교수 한 분을 머리에 담아 놓았다. 그러면서 제발 내일 한밤중에 그에게 곤궁한 전화를 거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다. 스트레스가 쌓여서 그런지 열은 38도 근처를 오르락내리락하며 떨어질 기세를 보이지 않았고 입술과 목이 타서 계속 물만 들이켰다. 그렇게 안절부절 서성거리며 28일 하루를 천년처럼 보냈다.

 

오후 6시, 애타게 기다리던 전화가 왔다. 예상대로 음성판정이었다. 나는 고맙다는 말을 연발했다. 진정으로 감사한 심경이었다. 굳게 닫혔던 세상이 훤히 열리는 기분이었다.

신기한 것은 결과 통보를 받고 나자 그토록 끈질기게 나를 괴롭히던 발열 증세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잠자리에 들 때쯤은 평온을 다시 찾았다. 그리곤 실로 엿 세 만에 긴 단잠을 푹 잘 수 있었다.

 

                     IV.

다음 날, 코로나 소용돌이에도 불구하고 결혼식장은 놀랍게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행복한 얼굴로 해맑게 웃는 신랑, 신부의 모습이 돋보였고, 이들을 축복하러 식장을 찾은 친지, 동료들로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붐비고 있었다. 나는 주례사 말미에, “신랑, 신부는 오늘 코로나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이 자리에 함께하신 하객 여러분들께 평생 감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나의 어줍잖은 코로나 해프닝은 끝났다. 내가 평생 약 300회 주례를 섰는데, 이번처럼 크게 혼난 것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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