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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윤동주의 "별 헤는 밤"

2021. 3. 26. by 현강

I.

내가 윤동주 시인을 시를 통해 처음 만난 것은 1957년 고등학교 2학년 때다. 그 때까지 윤동주는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시인이었기에, 그에 대해 아무런 사전 지식이나 편견 없이 느끼는 그대로 그를 접할 수 있었다. 윤동주의 1955년 정음사에서 나온 증보판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는 나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순백의 시혼에 전율했다. 그의 시어(詩語)에서 전혀 때 묻지 않은 맑은 영혼을 읽을 수 있었다. 이제 온 국민의 애송시가 된 <서시>를 비롯해 <자화상>, <참회록>, <십자가>, <소년>. <별 혜는 밤>을 읽으며 식민지 지식인이 얼싸안았던 처절한 고독과 내면으로 깊게 파고드는 자아 성찰과 실존의식, 그리고 <서시>를 비롯해 그의 시 전편에 흐르는 부끄러움의 미학에 깊이 빠져 들어갔다.

 

내게 비친 윤동주는 순절에 이르는 애국혼이나 저항시인의 모습 보다는 고뇌하는 시대의 양심의 이미지에 더 가까웠다. 이후 나는 그의 삶의 궤적을 면밀히 추적하면서 그의 생각과 글과 행위, 그리고 그의 시와 삶이 놀라울 정도로 동일체화 되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런 의미에서 내 뇌리에 각인된 윤동주는 서정의 향기를 머금고 ‘참’을 지향하는 경건한 구도자(者)의 모습이었다.

 

II.

연세대 1학년 때, 교양 국어를 가르치시던 장덕순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좋아하는 시 하나씩 를 외어오라고 하셨다. 나는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열심히 암송해 갔다. 장 교수님의 호명에 따라 여러 학생들이 자신들의 애송시를 선 보였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은, 소월이나 청록파의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아니면 서정주나 정지용의 시를 즐겨 외웠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꽤나 멋 적은 표정으로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암송했더니 장 교수님이 시종 감동적인 눈빛으로 경청하시고, “자네 도대체 어떻게 윤동주를 알았나?”하시며 크게 기뻐하셨다. 장 교수님이 북간도에서 윤동주와 함께 자랐고 연희전문에서도 동문수학을 한 사실을 안 것은 그 훨씬 후의 일이다.

 

대학과 대학원 시절 또래 모임이나 쌍쌍파티 같은데서 노래를 강요당하면 나는 자주 시 낭송으로 대신했는데, 그 때 내 18번이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이었다. 돌이켜 보면 윤동주 문학은 일제의 폭압통치로 문화계가 모두 침묵, 아니면 친일해야 할 최후 암흑기에 그 찬란한 빛을 발했다. 태평양 전쟁이 터진 바로 1941년, 윤동주는 자신의 대표작 <서시>를 비롯하여 <별 헤는 밤>, <길>, <십자가>, <새벽이 올 때까지>를 보석같은 시들을 봇물처럼 쏟아냈다. 죽음을 몇 해 앞두고, 윤동주 문학의 절정기였던 그 해는 공교롭게도 내가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별 헤는 밤>은 제법 긴 시다. 내가 모임에서 그 시를 읊으면 분위기 깬다는 핀잔도 받았지만, 음률이 뛰어나서 구비 구비 음조를 달리하면서 낭송하면, 기대이상의 호의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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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 옥(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 프

랑시스 장, 라이너 마리아 릴게,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나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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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별 헤는 밤>은 그의 다른 시들이 그렇듯이 슬프고 아름답다. 윤동주는 별 하나에 동경과 향수를 담아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짝을 맞춘다. 고향을 상실한 자의 고독과 그리움은 끝내 영원한 보금자리인 어머니를 향한다. 그러다가 마지막 구절에 이르러 묵시론적(默示論的) 암시를 한다. 나는 이 시를 낭송할 때 마다 윤동주의 슬픈 영혼이 느껴져 마지막에 이르면 조금 울컥하곤 했다.

 

III

1971년 초, 유학에서 돌아와 연세대를 찾았다가 예전에 연희전문 기숙사였던 ‘핀슨홀(현 윤동주 기념관)’ 바로 아래에 새로 건립된 <윤동주 시비>를 발견하고 기뻐서 가벼운 탄성을 올렸다. 윤동주가 육필로 쓴 <서시>가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1975년 가을, 내가 직장을 연세대로 옮기고 이듬해 바로 ‘핀슨홀’에 자리한 <연세춘추> 주간이 되었다. 고색창연한 석조건물인 ‘핀슨홀’은 1922년 연희전문학교의 기숙사로 지어졌는데, 윤동주 시인이 연전 재학시 2년여를 머물렀던 곳이다. 나는 연세춘추 주간으로 2년 가까이 일하는 동안, 한 때 윤동주가 실제 살았고 시심(詩心)을 키웠던 그 역사적 공간에서 호흡한다는 것이 무척 뿌듯하고 좋았다. 더욱이 그곳에서 나는 연세춘추가 시행하는 윤동주 문학상(시 부문)을 주관하면서 그 와의 숨은 인연을 더 깊게 다졌고, 그 과정에서 윤동주 자료 발굴에서 큰 몫을 했던 윤 시인의 실제(實弟) 윤일주(성균관대 교수 역임, 1927-1985) 교수도 만났다. 내가 머리로 그렸던 윤 시인과 모습이나 성품이 많이 닮았다.

 

IV.

1993년으로 기억되는 데, 연세대학교는 미국의 유명한 M컨설팅 회사에 의뢰해서 컨설팅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한번은 평가팀이 내가 재직하는 사회과학대학에 찾아 와 교수들에게 중간보고를 하면서 이런 저런 조언을 구했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은 연세대가 해방이후 다른 유수한 대학들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너무 적은 수의 장관들을 배출했다고 비판적으로 조명하며, 이를 앞으로 개선해야 할 주요한 포인트라고 지적했다.

분위기가 그리 딱딱하지 않기에, 그 때 내가 대체로 이렇게 속내를 피력했던 기억이다

“글쎄요. 해방이후 우리가 오랫동안 권위주의 체제에서 살았는데, 그들 정권들에 복무한 장관 숫자가 좀 적다고 너무 기죽을 이유는 없을 듯합니다. 그 대신 우리는 윤동주를 가졌잖아요. 저는 일제 강점기, 마지막 암흑기에 시대의 양심을 비췄던 윤동주 한 사람이 지닌 정신적 자산의 가치는 권위주의 시대의 수 십 명의 장관들 보다 훨씬 더 값지다고 생각 됩니다.”

나는 아직도 같은 생각이다. 만약 윤동주가 없었다면, 일제 강점기 마지막 단계의 한국 문화계의 풍경이 얼마나 초라했을까. 또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현존하는 윤동주의 마지막 작품 <쉽게 쓰여진 시> (1942년 6월 3일자)에서 그는 이렇게 조용히 절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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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 밖의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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