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단상'에 해당되는 글 167건

  1. 2017.03.10 두 교장 선생님 이야기 (3)
  2. 2017.01.01 새해 새 아침에
  3. 2016.12.15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4. 2016.11.29 65-75세가 '전성기'? 왜
  5. 2016.11.03 '대통령과 현인' 재록(再錄) (1)
  6. 2016.10.10 인생삼모작을 실험하며
  7. 2016.09.08 가을의 문턱에서 (3)
  8. 2016.07.10 빈소를 다녀와서 (3)
  9. 2016.05.10 <스승의 날>에 생각나는 일
  10. 2016.04.08 황당 이제(二題) (3)

                                   I.

1957년 3월 이맘 쯤, 내가 막 경기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 새 봄을 맞았던 때였다. 학교가 웅성웅성하더니 이내 우리 학교의 조재호 교장선생님과 서울고등학교의 김원규 교장선생님이 서로 자리를 맞바꾸게 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모두가 반신반의하면서, 하나 같이 “말도 안 돼”라며 불만을 토로했다. 당시 경기고와 서울고는 서로 자웅을 다투는 천하의 맞수였고, 양교의 두 교장 선생님들 역시 중등교육계에 거목으로 서로 다른 교육철학과 리더십에 따라 학교를 키우고 있었다. 특히 서울고의 김 교장선생님은 스파르타식 엘리트 교육으로 서울고를 급성장시켜 경기고의 입지를 크게 위협하던 분이기에, 우리의 입장에서는 라이벌 학교의 수장을 교장으로 모시게 된다는 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더욱이 근엄한 어버지 이미지로 전교생의 존경을 받던 조재호 교장 선생님이 우리 곁을 떠나신다니 그 점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어떤 학생은 대놓고, “아니 서울고에 목숨을 바치셨다는 분이 왜 이리로 와. 거기서 묻히셔야지”라며 목청을 높였던 기억이다. 그러면서도 많은 학생들의 마음 한 구석에는 김 교장 선생님에 대한 인간적 호기심과 그의 역동적, 쇄신적 리더십에 대한 얼마간의 기대가 일렁이고 있었다.

 

결국 며칠 뒤 어느 따스한 봄 날, 두 교장선생님이 상호 교체되는 흔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장안의 화제였음도 물론이다. 그 날 경기고 학생들은 화동언덕에서 경복궁 돌담 쪽에, 그리고 서울고 학생들은 신문로에서 광화문 쪽에 도열하여 서로 떠나가시는 교장선생님을 배웅하고, 새로 오시는 분을 마중했던 기억이다. 나는 꽤나 착잡한 심경이었다.

 

당시 교장 선생님은 으레 아침 조회에서 훈화를 통해 자신의 세상 보는 관점과 교육관을 피력하고 학생들의 생활지도를 하셨다. 따라서 교장 선생님의 말씀은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나도 경기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극명하게 대비되는 위의 두 분 교장 선생님을 모셨고, 그 분들로부터 각기 다른 방식으로 “물들여 졌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두 종류의 이질적 ‘유전자’가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이후 내 삶의 궤적 곳곳에 영향을 미쳤다.

 

                                     II.

조재호 교장선생님은 경기고 16회 대선배로 도쿄 고등사범을 나와 경복중학교 교장을 거쳐 1954년 경기고 교장으로 부임하여 약 3년간 봉직하셨다. 이후 서울고 교장을 거쳐 서울교대 초대 학장을 지내셨다. 그는 일제 강점기, 방정환, 윤극영, 마해송 등과 더불어 <색동회>를 창설했고, 훗날 그 회장직을 맡으시는 등 시대를 앞서가신 선구적 교육자였다. 그런가 하면 그는 1955년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이라는 실로 간결하고 격조 높은 경기고등학교 교훈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조재호 교장님은 근엄한 성품과 출중한 인격을 갖춘 교육자로 평생 인성교육과 전인교육에 헌신하셨다. 그는 “말을 물가로 데려가도 물까지 먹일 순 없다”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동기부여의 리더십을 강조했고, 당장의 성과를 올리는 일보다 사람의 바탕을 바로 세워 장차 큰일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확고한 교육관을 지니셨다.   

 

한편 김원규 교장 선생님은 실제로 경기고 교장으로보다 서울고 교장으로 역사에 크게 기록된 분이다. 그는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영문과 출신으로 서울고 초대교장(1946)으로 11년간 봉직하면서 스파르타 식 엘리트 교육을 매개로 서울고를 경기고의 맞수로 크게 키우셨다. 또한 그의 투철한 교육관과 수범(垂範)을 통하여 서울고 졸업생들에게 평생 간직할 정신적 유산을 많이 남긴 분이다. 그가 조회 때 마다 가장 자주 훈시했던 말씀은 ‘너희는 어디가서나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돼라’였다. 이 어구(語句)는 서초동 서울고 본관 우축 화단에 자연석위에 새겨져 <서울고의 정신>으로 계승되고 있다. 엘리트 교육에 대한 그의 투철한 신념과 열정은 서울고 학생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쳐, 많은 서울고 졸업생들에게 그는 아직도 살아있는 전설이자 기념비적 인물로 남아있다. 그의 이러한 공덕을 기려 2001년에 서울고 교정에 그의 흉상을 세워졌다.

김 교장님은 그가 재직했던 서울고와 경기고를 영국의 ‘이튼(Eaton) 스쿨’로 가꾸겠다는 간절한 꿈을 가지고 계셨다. 그래서 영국의 웰링턴이 나톨레옹과의 워털루 전투에서 승전하고 돌아와서 행한 연설 ‘월털루의 승전은 이튼교의 교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를 자주 언급하셨다. 또한 김원규 교장은 특히 바른 생활습관을 강조했고, 그것이 생활화되어야 한다는 점을 자주 일깨웠다. 그는 ‘깨끗하고 부지런하고 책임을 져라'고 말씀을 귀가 아프도록 하셨고, 그 구체적 실천방법까지 제시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게을러진다고 모든 학생들의 바지 주머니를 꿰매도록 한 것이 그 예이다.

 

흥미있는 일은 김원규 교장과 조재호 교장은 여러 가지 점에서 극명하게 서로 대조되는 교육자라는 점이다. 우선 용모부터 크게 다르다. 김 교장은 흰 얼굴에 헌칠한 키, 움푹 파인 눈 등 얼마간 서양신사 같은 인상인데 비해, 조 교장은 기골이 장대하나 얼굴은 촌부(村夫)의 모습이었다. 김 교장님은 얼굴에는 약간의 오만과 신경질적인 빛이 스치는데 비해, 조 교장님은 근엄하면서 후덕한 전형적인 옛 어른의 모습 그대로였다.

두 분은 교육철학에서도 확연히 차이가 났다. 김 교장님은 철저하게 수월성 위주의 엘리트 교육을 지향했다. 다분히 목표지향적이었고, 성과주의에 대한 집착이 컸다. 그가 교장직을 수행하면서 가장 중시했던 교육지표는 ‘서울대학교에 몇 명을 진학시키느냐’ 였다. 그가 우수한 교사의 발탁과 수업평가에 온 정성을 쏟았던 것도 그 때문 이었다. 그래서 암행어사처럼 교실 뒷문으로 잠입하여 수업을 직접 참관하는 경우도 잦았다. 그럴 때면 수업 중이던 선생님들이 크게 긴장하여 목소리가 떨리곤 했다. 이에 반해 조재호 교장은 지식교육 보다 인격형성을 중시했고 단기적, 가시적 결과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장기적 교육성과에 더 역점을 두었다.

 

김원규 교장은 일화가 무척 많았다. 서울고 교장시절, 아침 지각생을 잡으려고 쫓아 가다가 발을 다쳐 한 동안 지팡이를 짚고 다녔던 것도 유명한 얘기다. 이에 반해 조재호 교장은 강당 뒷동산을 거닐다가 수업을 빠지고 아카시아 꽃나무 아래서 깊이 잠을 자고 있는 학생을 보고 그냥 지나쳤다가 나중에 교장실로 불러 따듯한 훈화 한마디로 평생 잊지 못할 감명을 남기셨던 후덕한 분이다.

김원규 교장은 매우 열정적, 헌신적으로 교육에 임했고, 그 분의 리더십 아래 학교는 역동적 분위기 속에 변화의 물결이 일렁였다. 그러나 규제가 많았고, 늘 얼마간의 긴장이 감돌았다. 이에 비해, 조 교장 휘하의 학교는 평온하고 넉넉한 분위기 속에서 그가 창안한 교훈처럼 자유, 문화, 평화가 넘실댔다.

                                       

                                         III.

당시 두 교장 선생님에 대한 평가는 학생마다 달랐다. 그런데 나는 원래 조재호 교장선생님의 팬이었고, 그 분이 세상 사는 모습을 존경했다. 그분이 알게 모르게 내게 가르쳐 주신 몇 가지 덕목들, 인성존중, 상생(相生)지향, 포용적 리더십, 장기적 조망, 종합적. 균형적 사고 등은 이후 내 삶의 양식과 사고체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세상을 보는 그의 진지한 태도와 따스한 마음, 그리고 스스로를 내 세우지 않는 겸양지덕(謙讓之德)은 내가 인생의 큰 그림을 그리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큰 바위 얼굴처럼 나를 정신적으로 압도하는 큰 힘이 있으셨다.

 

이에 반해 나는 김원규 교장 선생님에 대해서는 얼마간 비판적이었고, 다분히 유보적인 입장이었다. 그 분의 교육에 대한 열정에 대해서는 십분 존경스러웠으나, 과도한 경쟁 및 승부의식, 성과주의, 지나친 엘리트 의식과 독선은 언제나 내 마음의 걸렸다. 그런데 나는 살아가면서, 신기하게도 내 사고 속에 깊이 잠복해 있는 ‘김원규 유전자’에 가끔 깜짝 놀라곤 한다. “욕하면서 배운다”고 나는 이미 그에게 크게 물들어 있는 것이다.

나는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거실이나 방에서 나오면서 전등을 끄지 않으면, 그 때 마다 호되게 야단을 쳤다. 대학 연구실 조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 김원규 교장 선생님이 아침 조회에서 자주 하셨던 “독일 나치 군인들은 적군인 소련에 포로수용소에 잡혀 있을 때도 결코 쓸 때 없이 전등을 켜지 않았고, 방을 나갈 때면 언제나 솔선해서 전등을 껐다. 절전은 생활화 되어야한다”는 말씀을 회상했다. 절제와 청결, 시간약속 등 일상의 생활습관들에서도 그 분으로부터 학습한 것이 너무나 많다. 또 내가 정부에서 일할 때에 ‘일 벌레’라는 별명을 자주 들었다. 또 겉으로 대범한 척해도 의외로 목표지향적이고, 성과에 집착한다는 비판도 들었다. 그럴 때 마다, 나는 아차하며 내 안에 몰래 숨 쉬고 있는 ‘김원규 유전자’를 발견하곤 했다.

                                     

                                          IV.

 

대체로 볼 때, 나는 인생의 큰 그림을 그리거나 중, 장기 계획을 하는 과정에서는 조재호 교장 선생님으로 부터, 그리고 단기적 목표추구나 일상적 생활습관에서는 김원규 교장 선생님으로 부터 더 많은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당시, 두 분 교장 선생님은 50대 초, 중반으로 역량이나 경륜으로 볼 때 인생의 최절정기에 계셨다. 나도 생애주기에서 더없이 중요한 청소년기에 한국 중등 교육계의 큰 별이셨던 이 두 분에게서 사사(師事) 받고, 두 분의 정신세계의 정수(精髓)를 접할 수 있었던 일은 실로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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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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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3.21 21:22 Address Modify/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2. 현강재 현강 2017.03.22 18:15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제 이메일 주소는 ahnby@yonsei.ac.kr입니다

  3. 서남수 2017.03.24 10:49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저는 김원규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직접 배우지는 못했습니다만 이분에 관한 이야기는 제가 서울고를 다닐 때는 물론 졸업한 후에도 선배들이나 선생님들로부터 수없이 들었습니다.
    김 교장선생님이 나중에 경기고 교장선생님으로 자리를 옮기셨다는 말씀을 오늘 처음 들었습니다. 더구나 안 부총리님께서 그 유명하신 김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직접 배우셨다는 말씀은 참 경이롭게까지 느껴집니다. 한 분의 훌륭한 교육자가 얼마나 큰 흔적을 길게 남기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생각합니다. 직접 뵌 적을 없지만 제게도 존경심이 저절로 우러나는 분입니다.

새해 새 아침에

삶의 단상 2017. 1. 1. 07:22 |

  새해 첫날이다. 새벽 이른 시간, 하루 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이다. 곧 새 아침이 밝아올 것이다. 젊은 시절에 느꼈던 설렘과 세찬 박동, 결의와 다짐은 이제 일렁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냥 조용히 기도하고 싶은 심경이다.

 

  우선 나라 걱정이 크다. 변화에 대한 기대와 더불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우려가 착종한다. 나를 포함해 시민, 정치인, 언론, 검찰과 판관들 모두 새해 새 아침에 묵념하는 자세로 치열하게 자기 성찰을 했으면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내면 속의 깊이 숨어있는 온갖 부정의하고 떳떳치 못한 요소들을 과감히 걸러내고, 오직 본질 추구와 나라사랑, 그리고 사회통합의 정신으로 다시 태어났으면 좋겠다. 그리고 함께 난국을 돌파하기를 희원한다.

 

  다음 우리 국민 모두가 보다 절제하는 덕성을 생활화 했으면 한다. 새해 경제 형편이 크게 어려운 가운데, 사회경제적 양극화는 심화되고, 대부분의 가계도 기울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반세기에 걸친 ‘확장시대’를 거치면서 절제의 미덕을 많이 잃었고, 과소비에 지나치게 익숙해 졌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큰 우주와 자연 속에 작은 존재로 생각하면, 검약하고 소박한 생활이 기본이다. 절제는 또한 마음속 탐욕을 물리치고 몸을 건강하게 만드는데 더 없이 좋은 삶의 방식이다. 따라서 심신 모두에게 크게 이롭다. 특히 어린이, 젊은이들이 생애 주기의 앞 단계에서 절제의 미덕을 익히면, 훗날 파란만장한 인생을 항해하는데 그것보다 값진 자산은 없다.

 

  개인적으로 감사한 마음이 앞선다. 크게 볼 때 가족들도 별고 없고, 나 자신도 이 나이에 이 만한 건강을 유지하고 내일을 위해 작은 계획이라도 세울 수 있다는 게 정말 큰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부디 내년 새해 새 아침에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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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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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는 자주 자신이 한 말을 잊고 산다. 아니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잦다. 오랜 만에 만난 제자가 내게 “그 때 선생님이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라고 옛 이야기를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나 자신은 그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할 때가 적지 않다. 더구나 그가 진지한 얼굴로, “그 때 그 말씀이 제가 유학시절 몇 번 위기를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어요”라고 말할 때는 무척이나 당황스럽다. 그러면서 내심 미안하고 고맙기 그지없다. 아마 교직에 오래 있었던 다른 분들도 이런 경험이 꽤 있었을 듯싶다.

 

                            II.

얼마 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어떤 자리에서 전에 교육부에 함께 있었던 K 국장을 만났다. 그와 이런 저런 대화를 하던 도중, 그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교수님을 장관으로 두 번 모셨습니다. 20 년 전 공무원 초년병이었던 사무관 시절, 그리고 그 후 과장 때였지요. 그런데 장관님을 생각하면 머리에 떠오르는 게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라는 어구입니다. 그 말씀을 자주 하셨어요. 국정에 임하는 공무원의 자세를 말씀하실 때나, 정책토론을 할 때에도 빼 놓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실제로 나는 그렇게 말했던 구체적 기억이 전혀 없다. 그러니 분명 내가 의도적으로 미리 준비하고 한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순간 그 말이 나를 꽤나 감동시켰다. 내가 정말 꼭 하고 싶었던 말이기 때문이다. 아마 무의식 중에 가슴 속에 깊이 잠겨 있다가 부지불식간에 그 때 그 때  튀어 나왔던 것 같다.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라는 말은 동어반복에 가까운 무척 평범하고 일상적인 어구다. 지적인 표현과도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 짧은 말 안에 일의 성취와 연관된 많은 것이 들어있다. 그래서 내가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에 전율을 느꼈던 것 같다. 나는 집에 오면서 그 말을 계속 되씹었다.

 

우선 매사에 마음이 중요하다. 일에 대한 동기와 성취욕구, 열정과 헌신이 모두 마음에서 비롯된다. 마음이 없거나, 마음이 흔들리면 일을 의무감에서 적당이 하거나 일 하는 시늉에 그치기가 쉽다. 따라서 일에 몰두하려면 우선 마음을 가다듬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공직자의 경우 나라 사랑하는 마음과  공공심(公共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그 마음도 정성이 깃들어야 제 빛을 발한다. “정성을 다하면 돌 위에도 풀이 난다”는 옛말도 그 때문이다.

 

                               III.

나는 그 동안 살아오면서 유능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온갖 시험에서 수석을 놓치지 않는 뛰어난 공부꾼, 아이디어가 섬광처럼 반짝이는 재주꾼, 남들이 힘겨워 하는 일을 일사천리로 처리하는 실력자, 어려울 때 더 돋보이는 발군의 위기관리자....이들은 언제나 내게 선망과 경이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들 능력자들이 나를, 그리고 내 마음을 통째로 흔들어 놓은 경우는 드물었다. 오히려 언제나 나를 깊은 감동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던 사람들은 뜻 있는 일에 지극한 정성을 다하는 속 깊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당장 크게 두드러지지 않을지 모르나 우리 사회 곳곳에서 나라를 지켜주는 버팀목이다. 유능인(有能人)들은 간혹 자신의 능력이나 재주만 믿고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있다. 아니 마음이 함께하지 않는 능력은 자칫 위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지성인(至誠人)’은 옳은 일에 꾸준히 자신의 온 정성을 쏟는 ‘마음이 성숙한’ 인간형이다. 나는 공직에 있을 때, 함께 일하는 공무원들이 유능인이 되기에 앞서 나랏일에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헌신하는 참된 '지성인'이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말’이 자주 튀어 나왔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마음공부’, ‘마음수련’, ‘마음가꾸기’ 등의 개념을 좋아 한다. 그것이 모든 것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한다”라는 말이 더 없이 옳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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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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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얼마 전 정년을 1년 가까이 앞둔 제자 교수 한 명이 나를 찾아 왔다. 그는 교수로서 마지막 한 해를 보내는 착잡한 심경을 토로하며 정년 후 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내게 많이 물었다. 나는 지난 10년간의 내 삶의 과정을 되돌아보며 허심탄회하게 그에게 답했다. 혹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그와의 대화 내용을 아래에 1문 1답식 으로 정리해 보았다.

 

                             II.

문: 우선 정년 후에 그 많은 책들을 어떻게 하셨어요. 저도 이제 교수연구실을 비워야 하는 데, 집의 서제에도 책이 넘치고 어디 보관할 때가 없어요. 이번 기회에 아예 제 삶을 에워 쌓던 책의 그늘에서 완전히 헤어나고 싶습니다.

답: 나도 정년퇴직 때 책을 반 이상 정리했네. 도서관에 많이 보냈지. 그런데 지금은 가끔 후회하네. 학자에게 책이 무기가 아닌가. 책이 없으면 힘이 빠지네. 본질적 사색에 도움이 되고 지적 영감을 줄 수 있는 책들, 특히 ‘현대적 고전’들은 가능하면 간수하게. 그런 책들은 시간이 갈수록 빛이 나네.

 

문: 선생님! 저는 이제 공부는 접을 생각입니다. 교수생활 30년에 많이 지쳤고, 또 이 나이에 무슨 연구입니까. 조금 편하게 즐기면서 여생을 보낼까 합니다.

답: 자네처럼 유능한 학자가 공부를 접다니. 무슨 말인가. 학자는 평생직업이네. 자넨 아직 건강하고 연금도 타니 기본적 생활에 걱정이 없지 않나. 지금부터 진짜 공부를 하고 업적을 남길 나이네. 인문. 사회과학자에게 퇴직 연령인 만 65세부터 이후 적어도 10년 간은 최고의 절정기네. ‘전성기’란 말일세. 알찬 수확을 거둘 나이에 그만 두다니.

 

문: 정년퇴직 후가 전성기라니 무슨 말씀입니까. 이제 심신이 노쇠하고 지적 능력도 떨어지는데 또 공부에 매달리라니, 그것은 무모한 일이고, 일종의 노욕입니다.

답: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퇴직을 하면, 제도권을 떠나네. 학생들 가르치고 정규적으로 논문도 써야 하는 틀에 박힌 공적 의무에서도 벗어나네. 얼마나 홀가분한가 .이제 자유로운 영혼으로 하고 싶었던 일만 하면 되네. 시간도 나니 취미생활을 할 수도 있고, 봉사활동도 할 수 있네. 그러나 그런 일을 하면서도 절대 손에서 책을 놓지는 말게나. 공부꾼이 공부를 멀리하면 마음이 불편해서 삶 자체가 균형을 잃네. 학자에게 공부와 집필은 그가 아직 살아있다는 징표네. 또 노년기에 공부만큼 ‘힐링’ 효과가 좋은 묘약은 없네.

 

문: 무슨 공부를 하라는 말씀입니까. 또 전공에 매달려서 연부역강한 후배 교수들과 겨루란 말씀입니까.

답: 꼭 그런 얘기는 아니네. 무어랄까. 이제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경지랄까, 꾸밈없이 남을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레 내 내면의 소리를 담아 글을 써보게나. 나도 거기에 이르기에는 까마득하지만 나름대로 그런 노력을 하고 있네. 인문. 사회과학자는 연륜과 더불어 안목이 성숙되고 생각이 깊어지네. 그래서 큰 학자들의 대작들이 노년기에 나오는 경우가 많네. 그렇게 볼 때, 연령적으로 6,70 대는 학자로서 한창 물오른 최상의 전성기이네. 이 때 공부를 접다니, 자네와 같은 뛰어난 공부꾼이 할 얘기가 아니네. 일종의 직무유기네.

 

문: 그러면, 선생님이 요즈음 공부하는 방식을 말씀해 주십시오. 참고할까 합니다.

답: 나는 이미 70대 후반에 접어들었으니, 한창 전성기의 자네의 경우와는 사정이 조금 다를 걸세. 그러나 내 생각을 얘기해 보겠네.

 

첫째, 이제 전공의 벽을 뛰어 넘게나. 세상이 정해 준 학문 간의 경계는 부질없는 것이네. 아예 사회과학과 인문과학의 벽도 허물고 여러 영역의 학문적 성과를 두루 수확해서 자네 식으로 새로 반죽을 하게나. 요새 많이 얘기하는 융합과 재창조네. 대학에 있을 때는 학과와 전공에 따라 밥 먹는 체계가 다르니 이게 쉽지 않지만, 이제 거리낄게 뭐가 있나. 그게 바로 천의무봉이네.

 

둘째, 공부할 때, 또 특히 글을 쓸 때, 그 안에 자네의 전 생애를 담게나. 사회과학자에게는 책에서 익히는 공부 못지않게 삶의 체험이 무척 중요하네. 그들은 자신의 생애과정 속에서 많은 통찰력과 아이디어를 얻고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인생역정이 그에게 최대의 공부 밑천이네. 생각해 보게나. 다산 정약용이 멀리 강진까지 유배를 가지 않았다면, 민생을 담은 그의 빼어난 정책론이 나왔겠나.

 

셋째, 내가 요즈음 쓰는 글의 주제는 대체로 그간의 내 공부와 인생체험을 준거로, 문제의식이나 내용에 있어 ‘내가 제일 잘 쓸 수 있다’ 고 자신할 수 있는 것들 만 고르네. 3년 전에 출간한 <왜 오스트리아 모델인가>가 그렇고, 작년에 쓴 <5.31 교육개혁, 그리고 20년>도 마찬가지네. 말하자면 자신의 ‘고유성’이 두드러지는 주제를 택한다는 말일세.

또 10년 전만 해도 장기적 조망아래 공부계획을 세웠는데, 요즈음은 주로 중기, 단기로 하네. 내 나이를 감안한 것이지. 조금 큰 주제를 구상해도, 그 성과가 1-2년 단위로 줄이어 나올 수 있도록 배열한다는 얘기네.

 

문: 농촌에 생활하시는 게 선생님 연구에 도움이 되십니까?

답: 아직까지는 그렇다네. 주로 여름에는 농사짓고, 겨울에는 글 쓰는 게 내 일과인데, 실제로 글의 구상은 여름에 많이 하네. 농삿일하면서 머리는 계속 움직이니까. 많이 생각하고, 그것도 치열하게 생각하려고 노력하지. 그러면 대체로 가을로 접어들면서 글의 방향이 대강 정리가 되네. 내가 서울에 살며, 온갖 잡다한 일상의 소용돌이 속에 파묻혔다면, 이게 가능했을까. 그런 의미에서 얼마간 세속과 등지고 사는 이곳 생활에 만족하네.

자연은 인간에게 엄청난 지적 영감과 삶의 활력을 선사하는 화수분이네.

 

                         III.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여러 해 전에 들은 인상적인 일화를 상기했다. 아래 인용구는 제자의 정년퇴임에 참석했던 90 문턱의 노(老)은사의 말씀이다.

 

“내가 정년을 할 때는 이 나이까지 살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어요. 그래서 정년 후에 공부를 접고, 그렁저렁 여행이나 다니며 재미있게 사는 데에만 열중했지요. 그러다 보니 90이 다 되었습니다. 이제 후회막급입니다. 지난 20년 넘는 세월 동안 여유 있는 마음으로 계속 연구에 정진했다면, 아마 한, 두 편의 대작을 썼을 거라는 생각이에요.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제자와 후학들은 부디 제 전철을 밟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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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심기가 너무 불편하다.  아래에 약 4년전에 <현강재>에 올렸던 글을 다시 올린다.  그 때 내가 걱정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 옆에는 현인 대신 무녀(巫女)가 있었다.

 

대통령과 현인(賢人)

삶의 단상 2012.12.26 08:53 |

                          

                                I.

  나는 평소에 대통령 가까운 거리에 현인(賢人)이 한명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는 굳이 아는 것이 많고 지혜가 출중한 글자 그대로의 현인일 필요는 없다. 그 보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사람, 그리고 사심이 없는 사람이면 된다. 굳이 비서실장이나 특보, 수석과 같은 직책을 맡지 않아도 된다. 다만 그 사람이 언제라도 대통령에게 다가갈 수 있고, 대통령도 그 사람을 크게 신뢰해서 평소에도 그와 고민을 나누고, 중요한 결정에 앞서 그의 의견을 묻는 관계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대통령이 그런 사람 하나 옆에 두기가 무어 그리 어렵겠느냐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게다. 사심 없는 상식인, 그러면서 대통령과 서로 신뢰하고 깊이 교감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대통령을 옆에 둔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고, 그게 가능하다면, 그것은 대단한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번에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가 적절치 못한 사람을 새 수석 대변인으로 임명하는 것을 보고 또 그런 생각을 했다.

 

                              II.

  매사에 상식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상식인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사에 대해 많은 이가 공유하는 적절한 지식과 경험이 있어야 하고, 상황을 편견 없이 인지할 수 있는 건강하고 신중한 판단능력이 있어야 한다. 대체로 그런 사람은 합리성과 균형감각을 갖추고 얼마간의 상생의지가 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 주변에 많은 이들은 그에 이르기에 몇 % 부족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심이 없다는 것도 말이 쉽지, 실제로 그런 사람이 그리 흔치 않다. 자신의 입신이나 눈앞의 작은 이익에 급급한 사람은 많아도 국리민복이나 공공성을 먼저 생각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더욱이 정치주변에서 움직이는 사람들 대부분이 권력욕이 남달리 강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나라 전체와 큰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하기 보다는 정권과 당리당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처럼 막상 찾자면 사심 없는 상식인도 흔치 않은데, 그런 사람을 대통령이 제대로 찾아내서 지근(至近)에 두고,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교감, 소통, 자문한다는 일은 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대통령 주변에는 사람이 많아도 그런 사람은 드물다. 내가 ‘현인 한 사람’이라고 말한 것도 그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국왕이나, 대통령 혹은 수상의 배우자가 그 ‘현인’ 구실을 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집안의 야당’ 운운 하는 것도 거기서 나온 말이다. 그런데 우리 대통령 당선자는 싱글이니 그런 배우자도 없다.

 

                               III.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는 정치가로서 좋은 자질을 많이 갖추고 있다. 애국심이 강하고 원칙을 중시하며 결단성과 카리스마도 있다. 영민함도 느껴진다. 그런데 많은 국민들이 그녀에게 가장 우려하는 것은, 폭넓게 의견을 나누고, 함께 고민하고 교감하며, 생각을 여과(濾過)하는 ‘소통능력’의 부족이다.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후보자 간에 세 차례 정책토론이 있었는데, 나는 박근혜 후보자에게서 예행연습이 부족했거나 아예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정책토론은 선거과정의 ‘꽃’이다. 따라서 이를 위해서 각 후보자는 마땅히 여러 차례 예행연습을 해야 한다. 자신을 한껏 풀어 놓고, 여러 전문가들과 자유롭게 논박하면서 스스로의 강점을 보강하고 빈틈을 메우는 고된 작업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그런 흔적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박근혜 당선자는 정책결정과정의 최종단계에서 얼마간 혼자 고민하고 홀로 결정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나라의 정책결정과정에서는 끊임없는 토론이 필요하며, 그 마지막 단계에서는 최종적으로 사안을 심도있게 검토하는 공동의 숙고과정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박근혜식 결정과정을 보면, 전체 과정에서 의견수렴과 토론이 부족하고, 특히 마지막 검토과정에서 그녀는 언제나 혼자인 것 같다. 대통령은 ‘외로운 결정자’라고 하지만, 그녀의 경우 그 정도가 너무 지니치다.

 

  대통령 당선자의 ‘내게 맡겨라’ 식의 정치 스타일은, 그간 모든 고난과 역정을 홀로 헤쳐 온 그녀 특유의 인생역정과 무관하지 않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나랏일을 혼자 결정해서는 안 된다. 무엇 보다 자신에 대한 과신(過信)은 금물이다. 그것은 자칫 독선과 아집, 그리고 사고의 폐쇄회로에 빠지기 쉽다. 그보다는 인간은 누구나 과오를 저지를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해서, 함께 고뇌하고, 함께 결정해야 한다. 혼자 쓴 ‘모범답안’은 대부분 모범답안이 아니다.

 

  많은 대통령 연구가들이 입을 모으는 것이, 성공한 대통령은 남다른 소통, 교감, 그리고 설득능력을 갖췄다는 것이다. 아무리 자질이 뛰어나고 정책적 관점이 출중하더라도 소통능력이 부족하면 결국은 실패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그 재직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측근에 겹겹이 에워 쌓여 청와대라는 구중궁궐(九重宮闕)에 갇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평소에 소통능력이 탁월하던 사람도 결국은 ‘불통’(不通)에 의해 ‘결정무능력자’로 전락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청와대 입성하기 전부터 ‘국민 대통합’과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을 자신의 ‘입’으로 발탁하니 어찌 걱정이 안 될 것인가.

 

                              III.

  나는 197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 신문, 잡지에 정치평론은 많이 썼다. 그런데 글을 넘기기 전에, 늘 연구실에 대학원생 조교에게 글을 읽혔다. 그러면서, “상식에 어긋나는 것만 지적하게‘하고 부탁했다.

 

  정책을 결정할 때나, 사람을 발탁할 때, 마지막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결정이 ‘상식’에 어긋나지 않느냐를 점검하는 것이다. 상식은 국민수준의 통찰력이고, 국민의 평균적 마음이다. 그런데 대통령의 결정이 국민생각과 크게 괴리가 있으면, 그건 큰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소통하는 대통령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할지 몰라도 결정적 낭패는 절대 겪지 않는다.

 

  그런데 소통은 무엇인가. 소통은 자신의 둘러싸고 있는 장벽을 스스로 깨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을 자유롭게 해방하는 것이다. 소통은 또한 타인에 대한 신뢰, 인간성에 대한 믿음이다. 타인을 신뢰하고, 그들이 내게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으면, 소통에 나서게 된다. 아니 소통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된다. 신뢰를 사회적 자산으로 높이 평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새 대통령이 국민을 신뢰하고, 그들 누구. 어떤 부류와도 진심으로 소통할 생각을 한다면, 그래서 진정으로 국민대통합의 대장정(大長程)에 나선 다면, 굳이 대통령 곁에 현인이 없어도 무슨 상관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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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만곤 2016.11.03 10:30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부총리님!
    주제넘은 말씀이지만,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을 울립니다.
    4년 전이었다면 두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이라도, 늦었지만, 이 순간에라도, 이 글 좀 읽었으면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덧붙이고 싶은 것은, 남의 앞에 나서야 할 사람들도 역시 그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루하루 편안하신 나날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아래 파일은 중앙선데이 제500호 (2016/10/9)에 수록된 내용이다.

인생 삼모작을 실험하며 중앙SUNDAY.m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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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험한 산을 오르려면, 산 정상 가까이 ‘깔딱고개’라는 데가 있다. 다리가 아프고, 숨이 차서 한 걸음도 더 옮기기 어려운 지점인데, 그것만 넘으면 정상까지 큰 힘 안 드리고 오를 수 있는 산행의 마지막 고비다. 그런데 요즈음 내 심경은 마치 막 깔딱고개를 넘은 등산인의 느낌이다.

 

  올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그나마 이곳은 ‘재난’ 수준이었다는 서울에 비해 기온이 3-4도 낮았지만 그래도 여기 와서 처음 겪는 폭염이었다. 덥다고 농사일을 소홀이 할 수 없어 한낮의 뙤약볕만 피하면서 농터에서 잡초와의 치열한 전쟁을 치렀다. 농터 300 평, 집 앞 잔디와 뒤뜰 화단 200평, 도합 500평을 농약, 제초제 쓰지 않고 비닐/부직포 피복 없이 관리한다는 게 결코 예삿일이 아니다. 몸무게도 5월 이후 매달 1Kg 씩 빠져 30대 이후 처음 75Kg를 기록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매년 한 여름이면 한, 두 번 허리나 발목 통증으로 고생을 하는데, 올 해는 별 탈 없이 ‘깔딱고개’를 넘긴 것이다. 잘 버텨 준 내 몸에게 감사한다.

 

  지난 주 40여일 만에 잠시 서울에 다녀왔다. 오랜 만에 만난 친구들이 세월이 너무 빨리 달려간다고 푸념하며, “벌써 9월이 아닌가. 올해도 다 간 거야”를 되 뇌였다. 나는 세월이 빠르다는 데는 동의했으나, 올해도 다 갔다는 데는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직도 황금 같은 네 달이 남았는데. 여년(餘年)이 그리 길지 않은 우리에게 네 달이 어딘가.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이제 시작이야”라고 작게 속삭였다.

 

  ‘깔딱고개’을 넘었으니, 이제 시간은 내 편이다. 그간 밀어두었던 산행도 하고, 인적 끊긴 바닷가도 나가 봐야지. 한가한 마음으로 청명한 하늘, 황금들녘, 안개 낀 설악의 연봉도 바라보아야지. 얼마 후면, 만산홍엽(滿山紅葉)이 내 마음을 적실 것이고, 그리고 또 얼마 안가, 첫사랑을 닮은 흰 눈이 내리겠지. 아 참! 오랫동안 소홀이 했던 ‘현강재’에도 자주 글을 올려야지. 무엇보다 밀린 공부를 하고 내 영혼을 담은 글을 써야지. 이 모든 일이 내게 얼마나 가슴 뛰게 하는 일인가. 또 얼마나 호젓한 산촌의 가을, 그리고 초겨울에 어울리는 일들인가.

 

  앞으로 네 달, 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시간을 벅찬 마음으로 내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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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정욱 2016.09.08 11:12 Address Modify/Delete Reply

    선생님 잘 지내고 계신지요. 자주 연락올려야 하는데, 너무 송구스럽습니다. 오랜만에 선생님 새로운 글귀를 보니, 너무나 반갑고 좋습니다. 지난 번에 보내 주신 "기억 속에 보좌 신부님"은 제가 다 읽고 나서, 저 혼자만 읽기엔 아까워서 어머니께 권해 드렸습니다. 이번 폭염 속에서 건강히 잘 지내셨다는 글귀를 보니, 너무 다행입니다. 항상 선생님, 사모님 그리고 가족분들 모두 행복하고 건강하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조금 늦었지만, 선생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다음에는 직접 찾아뵙고 인사올리겠습니다.

    서정욱 올림

  2. 작은물방울 2016.09.11 15:29 Address Modify/Delete Reply

    소박한 선생님의 글 읽을 때마다 저 자신도 빨려드러 갑니다 향상 건강하시고 좋은 글 고대하겠습니다

  3. 2016.09.18 16:47 Address Modify/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빈소를 다녀와서

삶의 단상 2016. 7. 10. 10:07 |

                                   I.

  불과 한 달 안에 가까운 친구 두 명이 저 세상으로 떠났다. 위중한 것은 알았지만 좀 더 버틸 줄 알았는데 둘 다 너무 서둘러 떠났다. 그들이 아픈 게 마음에 걸려 새 에세이집 <기억속의 보좌신부님>이 출간하기가 무섭게 가장 먼저 보냈는데, 한발 늦어 둘 다 병상에서 책을 펼쳐 보지도 못하고 갔다. 돌아보니 최근 두, 세 해 사이에 주위의 친구들이 너무 많이 세상과 작별했다. 이미 황혼으로 기운지 오래된 나이이니, 한편으로 그럴만하다고 받아들이면서도 반세기 이상 가까이 교유했던 오랜 친구들이 하나하나 미지의 멀 길을 떠나 이제 더 이승에서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젊었을 때는 가까운 친구가 세상을 떠나면, 엄청난 경악과 충격으로 받아들였고 그 여운도 무척 오래갔다. 그 때가 그래도 <순수의 시대>였다는 느낌이다. 그런데 이제 나이가 들고 그런 일이 워낙 잦다 보니, 친지의 죽음과 그에 대한 반응도 얼마간 <일상화>되어가는 느낌이다. 그런 가운데 쉽게 체념하고 슬픔에 익숙해지며 <일상화>의 수렁에 빠져 들어가는 자신이 참 못마땅하다. 빈소에서 만난 친구들도 잠시 망자(亡者) 에 대한 추억과 아쉬움을 나눈 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소소한 세상 얘기로 화제를 돌린다. 나이 들어 감성이 무뎌져서 그런 건지 아니면 우리도 어차피 조만간 뒤 따라 갈 터라는 초월적 관념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러한 <일상화>의 여울 속에서 죽음 앞에 서는 우리의 자세가 무언가 제 빛을 잃어 간다는 느낌이다.

 

 

                              II.

  내가 20 즈음이었으니 아주 오래 된 얘기다. 가친(家親)의 아주 가까운 친구 한 분이 갑자기 뇌출혈로 작고를 하셨다. 아버지가 죽마고우의 죽음을 크게 애통해 하셨고, 우리 가족도 큰 슬픔으로 받아 들였다. 한 숨만 푹푹 내 쉬시는 아버지를 뵙기가 딱해서, 온 식구가 며칠 동안 어버지 눈치만 살피며 조심조심 지냈다. 그런데 발인 날, 장지에 다녀오셔서 나와 저녁 겸상을 하셨던 아버지가 밥 한 그릇을 어렵기 않게 해 치우셨다. 상심(傷心)으로 식사도 제대로 드시기 어려우실 것으로 지레 짐작했던 나는 조금 실망했다. 그래서 당돌하게 얼마간 비아냥하는 어투로 어른께 말씀을 건넸다.

 

“그렇게 슬퍼하시더니, 식사는 그냥 잘 하시네요”

그랬더니 아버지는 무척 쓸쓸한 낯빛으로,

“어떻하겠니, 산 사람은 살아야지”

라고 답하셨다. 나는 더 이상 대꾸할 말을 잃었다.

 

  훗날 소설가 박완서 선생이 자신의 금쪽같은 아들을 잃고서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 속에서도 다시 밥상에 다가서는 자신을 향해 자책하시는 글을 쓰신 것을 읽었다. 그러면서 나는 옛날 아버지 말씀을 기억했다.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 속에서도 관중을 웃겨야 했던 광대의 얘기를 담은 해리 골든(Harry Golden)의 단편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The Show must go on)나 퀸(Qween)이 처음 부르고 그 후 여러 번  리메이크된 같은 이름의 노래도 인생의 이러한 잔인한 단면을 읊은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일상화>를 통한 슬픔의 극복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기제인지 모르겠다.

 

 

                                III.

   빈소에 다녀 온 날 저녁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자이언티>의 노래 <양화대교>가 내 마음을 크게 적셨다. 그래서 가까운 친지들에게 메일을 보내면서,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 그래 그래>라고 써 보았다. 건강한 가운데 행복하다면 그 이상 바랄게 무얼까 싶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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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제자 2016.07.13 00:41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저도 며칠전 사랑하는 외할머님을 하늘나라로 모셨습니다. 큰 시름에 잠겨있었는데 선생님의 글에 큰 힘을 얻고 갑니다. 더운 날씨에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2. 서남수 2016.07.14 11:32 Address Modify/Delete Reply

    지난 달 그 먼 고성에서 상경하셔서 저희 모친상 문상해주셔서 깜짝 놀랐고 너무 감사했습니다.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 역시 지난 해에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올해 어머니까지 떠나시니 요즘 삶과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하곤 합니다.
    불교에서는 돌아가신 분을 위해 흔히 49재를 올리는데 이를 7-7재라고도 부른답니다. 돌아가신 지 매 7일마다 재를 올리다가 마지막 일곱번째 올리는 재를 49재라고 한다더군요. 이번 토요일이 벌써 5재가 됩니다. 매주 재에 참석하면서 어머니께서 살아계셨을 때를 추억하고 또 추모합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마음을 추스르고 또 마음에서 떠나보내드리는 연습도 합니다. 49재 때에는 이승에서의 인연을 훌훌 털어벌이시고 내세에 더 좋은 인연들을 만나시도록 축원드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부총리님 내외분께서도 오래오래 아프시지 말고 행복하시길 빕니다.

  3. 현강 2016.07.14 22:30 Address Modify/Delete Reply

    서 장관님, 그리고 이름 모를 제자에게
    가까운 분이 세상을 떠나셔도 우리 마음에 자리하고 한 줄기 빛처럼 사랑과 영감을 준다면
    그 분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슬픔을 딛고 감사의 념으로 추모하시기 바랍니다.

                        I.

  1997년으로 기억된다. 그러니 벌써 19년 전 얘기다. 당시 나는 김영삼 문민정부에서 교육부 장관을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대통령께서 <스승의 날>에 옛 스승 들을 모시고 점심을 하는데 장관도 합석하라는 전갈이었다. 참석자는 김 대통령의 서울대학교 문리대 철학과 스승이셨던 안호상 초대 문교부 장관과 고형곤 박사, 그리고 이름이 기억되지 않는 경남고 스승 한 분, 그리고 대통령과 나, 다섯 명이었다.

 

                       II.

  당시 안호상(1902-1999) 박사님은 95세의 고령이셨다. 초대 문교부 장관 재직 중, ‘한 백성(일민)주의’를 주창하고 한국의 교육이념으로 ‘홍익인간’을 정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던 민족사상 연구가로 기개 높고 깐깐한 성품이셨다. 기존 역사학계를 식민사학으로 비판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고집스럽게 <통일신라 국경 북경설>을 주장하셨던 재야사학계의 거목이셨다. 일찍이 1920년대에 독일 유학을 하셨고, 이광수의 중매로 한 때 <렌의 애가>의 모윤숙 시인과 결혼해 유명세를 타셨지만, 결국 두 분의 사랑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훔볼트 재단 모임 등에서 몇 번 뵈었는데, 언제나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시고, 엄숙한 표정이 인상적이셨다. 악력이 대단하셔서 악수할 때 손이 아플 정도였다.

 

  한편 고형곤(1906-2004) 박사님은 한 때 전북대학교 총장과 국회의원도 지내셨는데, 특히 선(禪)에 대한 심오한 연구로 이름난 한국 철학계의 원로이셨다. 고건 전 총리의 부친으로도 널리 알려지셨는데, 당시 아흔이라는 연세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정하셨다.

  또 한 분, 김영삼 대통령의 경남고등학교 은사이셨던 선생님은 여든을 갓 넘으셨을 연배였는데, 90줄의 두 어른과 함께 계시니 상대적으로 젊어 보였다. 쾌활한 성격으로 말씀을 좋아하시는 느낌이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세는 나이로 70이셨고, 나는 57세였다. 그러니 그 자리에는 90대 두 분, 80대, 70대, 그리고 50대가 함께 하고 있었다. 나는 대통령의 스승 되시는 한국 철학계의 전설적인 두 어른과 함께 하는 쉽지 않은 기회이어서 얼마간 들떠 있었다. 어른들 말씀에 내가 끼어들 것도 아니고, 그냥 <옵서버>로 앉아 당대의 큰 어른들 말씀에 귀 기울이며 소중한 기억이나 챙기고 인생 공부만 하면 되는 자리이니 얼마나 기막힌 계제인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장관 일정에 이런 모처럼의 기회는 오랜 가뭄 뒤에 한 차례 빗줄기 처럼 청량했다. 그런데...

 

                     

                             III.

  김영삼 대통령의 간략한 사은(謝恩)의 말씀에 이어 식사가 시작되었다. 칼국수나 소찬은 아니었으나 그리 풍성한 식단은 아니었던 기억이다. 딱히 화기애애하지는 않았으나, 대화 분위기는 좋은 편이었다. 김 대통령은 워낙 말 수가 적은 분이시기도 하지만 은사들 앞이니 시종 다소곳한 편이셨고, 고형곤 박사님도 하실 말만 골라서 하셨다. 시종 좌중을 압도하며 분위기를 주도한 이는 역시 안호상 박사님이셨다. 자신의 박람강기(博覽強記)를 뽐내시듯, 주제를 바꿔가며 종횡무진 말씀을 많이 하셨다. 그런데 안 박사님 말씀 사이사이에 틈새를 자주 비집고 들어가, 때로는 안 박사님의 말씀을 거들고, 때로는 자신의 생각을 곁들어가면서,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내셨던 분이 김 대통령의 경남고 은사셨다. 그 분은 안 박사님이 주도하는 판세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일인 독주는 용인하지 않으시겠다는

듯, 가끔 견제구를 던져가며, 나름 자신의 몫을 톡톡히 했다.

 

  그런데 식사가 종반으로 들어갈 무렵, 예상치 않은 사달이 났다. 그 이름 모를 김 대통령 경남고 은사께서 말씀 도중 느닷없이 안호상 박사님을 향해

  “선생님, 백수(白壽)는 하셔야 지요”라고 말씀 하시는 게 아닌가.

  그 순간, 나는 ‘아차’했다. 물론 덕담으로 드린 말씀이지만, 안 박사님 성품에 그 말을 그냥 넘기시지 않을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 이어 안 박사님이 목청을 크게 높이시며 역정을 내셨다.

 

“아니, 이 양반아. 내가 지금 아흔 다섯이고 이처럼 건강한데, 몇 년 만 더 살고 가라는 얘기요”. 이에

크게 당황한 대통령의 옛 은사는 손사래까지 처가며,

“아니, 그 말씀이 아니라...” 하며, 극구 변명을 했지만, 안 박사님의 노염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다른 이들도 곤혹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가운데, 점심식사는 파장을 맞았다.

 

 

                              IV.

  그날 ‘백수’ 하시라는 말씀에 크게 화를 내셨던 안호상 박사님은 그 후 두 해 뒤인 1999년 아흔 일곱에 저 세상으로 가셨다. 고형곤 박사님은 더 장수하셔서 2004년 아흔 아홉 연세에 서거하셨다. 평생 타고난 건강을 자랑하셨던 김영삼 대통령도 작년에 구십 문턱을 넘기시지 못하고 별세하셨다. 그 날, 점심 마지막 무렵 판을 깨셨던 김 대통령의 경남고 은사의 생사는 알 수가 없으나 그 분의 낙천적 성격으로 보아 꽤 오래 사셨을(아니면 살고 계실)것으로 미루어 짐작된다.

 

  지난 20년 동안 우리나라의 고령화는 세계에 유례없이 빠르게 진행되어, 최근의 통계에 따르면 전국에 100세 이상 노인의 수가 1만 5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놀라운 얘기다. 안호상 박사님이 요사이 사셨다면 아마 호기 있게 120세는 장담하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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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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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 이제(二題)

삶의 단상 2016. 4. 8. 06:30 |

                   I.

  이곳 속초/고성에 살면서 좋은 점 중의 하나는 가까이에 좋은 온천이 많다는 것이다. 서울사람들은 속초하면, 으레 척산온천을 떠 올리지만, 그곳 외에도 주변 콘도 등지에 쾌적하고 물 좋은 양질의 온천이 많이 있다. 대체로 시설도 좋고 경치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온천 값도 무척 싸서 한 몫에 사면 9만원이면 30장을 내 준다. 그런데 정말 좋은 것은 탕에 손님이 별로 없어 북적이지 않는 다는 점이다. 주말을 피해 조금 한가한 시간에 가면, 거짓말처럼 홀로 <황제목욕>을 즐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서울에 살 때 보다 훨씬 자주 목욕탕을 찾는다. 적어도 온천욕에 관한 한 이곳에서 대단한 호사를 누리고 있다.

 

  그런데 지난 주 조금 황당한 일이 있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H 콘도 온천에 갔는데, 그날도 마침 욕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 오늘도 황제목욕이구나 싶었는데, 왠걸 10분도 안돠어 장대한 몸집의 등 뒤에는 용트림 문신을 한 40대의 거한이 들어왔다. 조금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그는 곧 욕장을 휘저으며 분탕질(?)을 하는데 정말 가관이었다. 욕탕에서 큰 소리로 흥얼거리는 것은 물론이고, 별로 크지 않은 냉탕에 둘어가서는 풍덩거리며 개헤엄을 쳐서 온통 주위에 물바다를 만드는가 하면, 비누 묻은 수건을 아무데나 내 팽개치는 등 하는 행동거지가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나는 급히 샤워를 하고 욕탕에서 나왔다.

 

 

                         II.

  바로 그날 오후,

 

오랜만에 속초에 나갔다가 내 처가 느닷없이 “오랜 만인데, 영화나 보러갈까” 해서 나도 ‘좋지’하고, 여러 영화를 동시에 상영하는 <메가박스>를 찾았다. 대체로 영화를 보러 갈 때는, 영화 내용, 영화평도 점검하고, 인기도 참조하여, 말하자면 나름 생각해서 미리 영화를 정하고 가는데, 그 날은 가서 정할 요량으로 무작정 영화관으로 향했다. 가서 보니 별로 신통한 게 없었다. 그런데, 마침 그럴 사한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마이 디어 그랜파>라는 영화였다. 상영시간이 임박해서 이것저것 따질 형편도 못돼 그냥 그것을 보기로 마음을 정했다. 제목으로 미루어 볼 때 할아버지와 손자 간에 빚어지는 정겹고, 따스한 얘깃거리가 틀림없고, 얼마간 감동이 일렁이고, 어쩌면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장면도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무엇보다 주연이 명품 연기자인 <로버트 드 니로> 이니 수준 이하의 작품은 아닐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매표소 아가씨에게 영화제목을 얘기했더니, 그녀가 입가에 살짝 미묘한 웃음을 보이며, “좌석을 정하세요. 관객은 두 분뿐이십니다”라며 좌석표를 내 보였다. 뭔가 찜찜했다. 매표원의 살짝 웃음도 그렇거니와 관객이 단 두 명이라니. 이건 좀 너무 한 게 아닌가 싶었다.  텅 빈 방안 정중앙에 둘이 앉으니, 너무 호젓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온천탕에서 혼자 목욕을 할 느끼는 충만한 기분과는 거리가 멀었다. 뭔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것 같아 심기가 불편했다.

 

  그런데 그 불안한 예감이 적중했다. 상영 10분 쯤 지나자 “아뿔싸, 이거 잘못 들어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용인 즉, 72세의 특수부대 출신의 엽기적 할아버지와 변호사 연수 중인 고지직한 ‘범생이’ 손자 두 사람이 플로리다 여행을 하면서 펼치는 좌충우돌 로드무비인데, 인생 황혼기 남성의 과격한 욕망과 외설스런 욕설이 영화 전편에 여과 없이 투사되는 저질의 블랙 코미디였다. 지나쳤다 싶었던지, 영화는 말미에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그랜파가 세상의 성공공식만을 쫓는 외눈박이 손자에게 보다 넓고, 다양한 세계를 보여 주기 위한 속 깊은 인생수업이었다는 식의 무리한 의미 부여를 꾀한다. 그러나 영화가 이미 더럽고 음습한 웅덩이 속에서 너무 오랫동안 허우적거렸기 때문에, 그러한 반전이나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내재적 소스와 잠재력을 모두 소진해 버렸다. 한마디로 어이없는 실소(失笑)만 자아내는 저급한 3류 미국 영화였다. 나는 영화가 끝나기 무섭게 자리를 떴다.

 

  나오면서 비로소 포스터를 살펴보니, 영화의 원제목이 ‘더티 그랜파’ (Dirty Granpa)가 아닌가. 그러면 그렇지, 내용도 모르고 즉흥적으로 영화관에 들어갔으니 나의 불찰이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이 영화가 올 초에 미국에서 개봉 당시 박스오피스에서 1위를 차지했고, 그에 앞서 개최되었던 아메리칸 마켓 모니터링 시사회에서 9.3이라는 경이적인 평점을 받았던 수작이라는 것이다. 그걸 보며, 나는 참 미국 사람들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와 비교해 볼 때, 멍청이 우리 부부를 빼면 저질 영화를 위해 한자리도 배려하지 않은 속초의 관객 수준이 그 보다 훨씬 높은 게 아닐까.

 

여하튼 그 날 나는 조금 황당한 일을 거푸 두 번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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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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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태종수 2016.04.17 12:05 Address Modify/Delete Reply

    안병영 학형, 오랫만이외다. 그동안 안녕하시지요. 한참만에 문득 궁금해서 들렀습니다.욕보셨네요. 나도 로버트 드 니로의 연기를 좋아하고 그의 새로운 영화라고해서 볼 마음이 있었는데 'Rotten Tomatoes'의 평점이 형편없어 가보지 않았습니다. 아 그리고 고 방희덕형 가족을 내가 여러번 안터넷 검색을 통해서 찾았습니다. 노스 캐롤라이나 주에 큰 딸 지인이가 살고 그 남동생들도 다 미국에 살더군요. 희덕 형 부인 양영애 여사와도 연락이 되어서 한 두 달 전에 애틀란타 우리 집에 다녀 가셨습니다. 미국 자손들과 반년쯤 같이 지내고 나머지 반년은 한국에서 지낸다고 하시더군요. 아마 한 달 전쯤 귀국하셨을 것입니다. 주위에 봄이 한참이니 안형이나 나나 이제는 기억에만 남아있는 우리 젊음의 봄이 그립습니다. 건강하세요.

  2. 현강재 현강 2016.04.17 13:21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태종수 학형께
    그러잖아도 궁금해서 한번 연락을 드리려 했는데, 소식주시니 반갑고 고맙습니다.
    고 방희덕 교수 소식 고압습니다. 부디 온 가족이 행복하기를 빌 뿐입니다.
    참, 두어 달 전에 우연한 기회에 태형과 가까운 부천의 김원경형과 통화를 했습니다. 재혼한
    부인이 치매로 고생을 한다는 안타까운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착한 친구가 마음고생이 큰 듯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주변을 보면, 유명을 달리한 친구들도 많고, 아픈 친구들도 적지 않아
    정말 우리가 많이 늙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생이 얼마가 되든, 열심히 살다가 덜 부끄러운 모습으로 가는 수 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옛날, 태형이 날쌘 몸짓으로 농구, 야구하던 생각이 납니다. 늘 조용했지만, 운동할 때는 놀랍게 역동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아직도 그 바탕이 있으니, 건강하시리라 믿습니다. 늘 건안하시고 가내 행복이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3. 1465891091 2016.06.14 16:58 Address Modify/Delete Reply

    좋은소식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