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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회색빛 새해맞이

2022. 1. 30. by 현강

I.

새해를 맞아 몇몇 가까운 친지들과 전화로 의례적인 덕담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마음은 큰 바위에 짓눌린 듯 무겁고 칠흑 어둠에 갇힌 듯 답답하기 짝이 없다. 한 마디로 세상이 온통 회색빛이다. 되돌아보아도 새천년의 동이 튼 후 이처럼 처절하게 울적했던 새해맞이는 기억에 없다. 몇 가지 이 우울함의 원천을 찾아 그 뿌리를 되짚어본다.

 

II.

우선 한 살 더 보탠 내 나이도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 요인의 하나가 아닐까, 여든하고 또 둘이라니! 믿기지 않는 나이다. 지난 해 마지막 달인 12월 한달 사이에 내 고등학교 동기 다섯 명이 세상을 떠났다. 그중에는 불과 몇 달 전에 멀쩡한 모습으로 저녁을 함께했던 친구도 있었다. 이젠 친구의 부음을 접해도 그리 놀라지도 않는다. 그저 나보다 몇 걸음 빨랐다는 심경이다. 그러면서 저승과 이승의 거리가 무척 가깝게 느껴진다.

사정이 그런데도, 나는 작년에 2019년 고성산불로 불탄 집터에 새집을 지었다. 집짓는 과정이 무척 힘겨웠다. 이사를 하면서 “아니 이 나이에 몇 년을 더 살겠다고” 자문하며 쓰게 웃었다.

새해 인사를 주고받으며 많은 이가 “건강이 제일”이라며, “다른 생각 말고, 건강만 챙기세요”라고 말한다. 고마운 얘기다. 그러나 ‘건강만’ 챙기라는 말은 선 듯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 ‘생존’과 ‘연명’에만 급급 하라는 얘기 같아서다. 이미 내 인생이 황혼에 이른지 오래지만, 생존을 넘어 여생을 보다 의미 있게 보내고 싶은 열망이 아직 내 마음속에서 강하게 일렁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앞으로 그 ‘삶의 의미 찾기’가 그리 쉽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자주 나를 엄습하는데 있다. “너는 이제 끝났어!”라는 또 하나의 내면의 목소리가 나를 울적하게 만든다.

 

II.

나를 짓누르는 우울증의 또 하나의 원천은 세계를 휩쓸고 있는 코로나라는 전대미문의 역병이다. 그 여파로 온 세계가 이른바 ‘코로나 블루’를 심하게 앓고 있다.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이리 오래 갈 줄은 몰랐다. 그러나 그것이 아직도 변이를 거듭하며 계속 기승을 부리고 있고, 그것이 끝나도 또 다른 역병이 내습할지 모른다는 우려까지 겹쳐 우리의 마음을 불안하고 어둡게 만들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의 광풍으로 그간 세계화로 꽤나 가까워 졌던 나라간의 거리가 아스라이 멀어졌고, 전지구적으로 글로벌 격차는 물론, 국내적으로 사회경제적, 교육적 격차도 크게 벌어졌다. 그런가 하면 선진국을 자처하던 북미나 유럽의 여러 나라들도 체면을 한껏 꾸겼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고만장했던 인간은 하루아침에  눈만 빼꼼히 내놓은 탈을 쓴 페르소나가 되어 한 낮 마스크 한 장에 목매는 왜소한 존재로 전락했다. 그동안 인간이 우리를 품고 있는 자연과 동종(同種)의 인류를 비롯한 세상의 뭇 생물체들에게 가했던 패악에 대한 업보라는 관점과 더불어 인류의 내일에 대한 각종의 불길한 시나리오까지 겹쳐 이제 온 세계인이 너나없이 이 심층적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당장 코로나 확진자 수가 크게 줄어든다고 우리가 이 깊고 끝이 안 보이는 어두운 우울의 터널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 같다.

 

III.

그리고 또 하나,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한국정치의 현주소이다. 막바지로 치닫는 대선 정국에서 우리는 한국 민주주의의 전진과 희망 대신에 그 암울한 미래와 마주하게 된다. 미래에 대한 큰 그림, 비전과 정책 대신에 막장 드라마를 방불케 하는 온갖 비방과 폭로, 간계와 술수가 난무하고, 폭주하는 포퓰리즘과 첨예화되는 진영화가 선거전의 큰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공론형성을 위한 애써야 할 언론도 선정주의에 빠져 전혀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많은 이가 좌절감 속에서 ‘깜’이 못되는 후보자들 중에서 ‘차악(次惡)’의 후보를 찾고 있다.

문제는 1987년 이 땅에 민주주의의 여명이 열린 후, 이제 반세기에 가까워 오고 있는데, 아직도 한국 민주정치는 그 문화, 제도, 사람 모두에서 앞으로 나아가기보다 날이 갈수록 크게 뒷거름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암담하기 짝이 없는 한국정치의 오늘과 그것이 투사하는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가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IV.

이처럼 겹겹이 쌓인 우울의 깊은 늪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어차피 ‘인생은 고해’이니, 혹은 '만사가 업보’이니 하고 체념할까. 아니 달관할까. 그런데 문제는 이 심층적 우울의 원천이 나 홀로 마음을 바꿔서 눈 녹듯 풀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죽음을 마주하며 투병중인 시대의 지성 이어령은 ‘썰물과 밀물 사이의 갯벌’이 있음을 일깨우며 ‘선한 인간이 이긴다는 것’을 믿으라고 말한다. 백번 믿고 매달리고 싶은 메시지다. 그런데도 내 마음은 여전히 공허하고 회의에 차있다.

 

V.

내일 모래면 구정, 설날이다. 적어도 올 해 만은 구정부터 새해를 시작한다고 생각하자. 그리고 이제 우울의 원천 찾기보다, 희망의 씨앗 찾기와 가꾸기에 더 힘을 쏟자. 바로 우리 세대가 내 나라를 세계의 최빈국에서 10위권의 선진국으로 끌어 올린 기적의 장본인 (張本人)세대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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