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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반세기만에 제자 상봉

2022. 8. 8. by 현강

I.

석 달 쯤 전 일이다. 스승의 날 전후 였던 것 같다. 핸드폰이 울려 받았더니, 낯선 목소리로 누가 선생님, 저는 고려대학교 행정학과 70 학번 제자 B 입니다. 대학 다닐 때 농구를 했는데 혹시 기억나시나요?”라고 물었다. 나는 겸연쩍은 목소리로 미안하네요. 기억이 잘 안 나네요.”라고 답했다. 큰맘 먹고 전화를 했을 터인데, 실상 그렇게 대답하자니 미안하기 짝이 없는 심경이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그러시겠지요. 워낙 오래됐으니까요. 저는 그간 미국에 이민을 가서 수십 년 그곳에 살다 최근에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저를 따듯하게 보살펴 주셨던 일이 자주 생각이 나서 귀국한 김에 꼭 한번 뵙고 싶어 전화를 드렸습니다. 시간을 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지난 6월 말 서울 압구정동에서 B군과 반세기 만에 해후를 했다. 나를 만난다니 여러 친구가 함께 나가자고 했다며 당시 내 강의를 같이 듣던 친구 네 명이 함께 나왔다. 모두 70이 넘어 노인이 된 오랜 제자들과 이른 저녁에 만나 음식점이 문을 닫아야 한다고 재촉하는 밤 10시까지 쉬임 없이 이야기꽃을 피웠다.  즐겁고 행복했다. 그리고 무척 고마웠다.

 

II.

나는 1971년부터 한 5년간 고려대에 강의를 많이 나갔다. 고인이 되신 이문영 교수님이 유신 이후 자주 영어의 몸이 되셔서 이 선생님 대강을 맡아서 하다 보니, 거의 전임처럼 몇 년간 고대에 출강했다. 그러면서 많은 제자들과 인연을 맺었다. 개중에는 뛰어난 학자들, 유명 정치인, 출중한 고위관료들도 적지 않다. 훗날 모교 총장이 된 친구도 있다. 여기 현강재에 올렸던 <천하에 아까운 사람, () 김광조 박사>도 한때 교육부에서 함께 일했던 고대 출신 옛 제자 이야기다.

 

우선 고대 출신들은 인사를 잘 한다. 내가 전혀 기억 못 하는 제자들도 멀리서부터 달려와 인사를 하는 예가 자주 있다. 한번은 내가 처음 장관을 하던 1990년대 중반, 국회에 출석해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런데, 생면부지의 한 사람이 내게 가까이 다가와 무척 반기며 넙죽 절을 했다. 국회의원 베지를 달고 있기에 내가 의원님이신 듯한데, 혹시 저를 아시나요?”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 제가 국회의원 홍준표입니다. 선생님께 고대 행정학과에서 배웠습니다. 그땐 제 이름이 지금과는 달랐지요.”라고 답하는 게 아닌가. 나는 웃으며 그 유명한 홍의원이 내 제자인 줄 몰랐네요라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

 

흔히 고대 출신은 신의(信義)’가 남 다르다 하는데, 내 경험으로는 그게 맞는 말인 것 같다. 아직도 적지 않은 고대 출신 제자들과 반세기 전에 맺은 인연이 이어지고 있고, 그들과의 관계에서 늘 진정성과 깊은 정을 느낀다. 내가 두 번 장관직을 수행할 때에도, 정계, 관계에 진출한 고대 출신 제자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한번은 다른 부처와 협업하는 일인데, 일이 너무 잘 풀려 신기하다 했는데, 후에 그 부처 담당 실장이 나를 찾아와 자신이 옛 고대 제자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말없이, 소리 않나 게, 그러면서 진심을 다해 내게 도움을 주곤 했다. 그 때마다 고마웠고 감동도 컸다.

 

III.

그날 압구정동 모임은 무척 화기애애했다. 대화 도중 줄곧 웃음꽃이 만발했다. 사제지간에 만남이라기보다, 오랜 친구들의 격의 없는 모임에 가까웠다. 한 친구가 선생님을 만난다니, 나오겠다는 친구들이 하도 많아 좀 추려서 저희들만 대표로 나왔습니다라며 능청을 부렸다.

 

내게 전화했던 B군은, 고대에 농구선수 케이스로 입학했는데, 도중에 몸이 아파 농구를 그만 둘 형편이 되어 정신적으로 방황할 때에 내 도움을 받았다는 얘기였다. 나는 아무리 기억을 되살리려 해도 생각이 날 듯, 말 듯 가물가물해서 시종 미안했다. B 군은 미국에 가서 의류사업으로 꽤 성공을 거뒀다고 했다. 자신의 대형 매장에 미국인 매니저 네 명을 두었는데, 그 들을 신뢰하고 일을 맡겼더니 예상을 뛰어넘는 사업 성과를 올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선생님이 조직관리론 시간에 권한의 위임을 특히 강조하셨던 일이 생각나서, 그대로 했는데 그게 주효한 거지요라고 말해 나를 기쁘게 했다.

 

네 명의 제자들을 반세기 전 나의 젊은 날의 초상(肖像)’에 대해 다투어 얘기했다. 그 때 내 나이 30대 초반이었으니, 그들과는 나이가 열 살 남짓 차이에 불과했었는데, 선생 임네하고 어른 노릇을 했을 내 자신이 내심 부끄러웠다. 내 면전이니 대체로 좋은 기억들을 되 살렸는데, 두어가지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장기려 박사님 말씀을 하셨던 일이 아직도 인상적이에요”.

한 번은 유신 반대 데모로 전 학생이 데모 현장에 나갔고, 불과 다섯 명이 남아서 당연히 휴강이 될 줄 알았는데, 묵묵히 그냥 수업을 하셨어요. 그날 고대 법대에서(당시 행정학과가 법대에 소속해 있었다) 강의를 하셨던 교수님은 선생님과 법학과의 현승종 교수님 두 분뿐이셨어요.”

젊으셨지만 근엄한 모습이셨어요. 머리가 엄청 기셨구요. 행동거지가 이문영 선생님과 비슷해서 젊은 이문영이라고 수군거렸지요.

나는 화제가 자꾸 내 쪽으로 옮겨 오는 게 면구스러워, 자주 그들의 근황을 물었는데, 대체로 사업을 하는 친구들이었고 놀랍게도 대부분이 아직도 현역들이었다.

 

IV.

오랜 세월의 강을 넘어 옛 제자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목에서 나는 내 평생직업이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이었다는 데 대해 다시 한번 고마움을 느꼈다. 다른 직종의 사람들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어찌 이런 가슴 뿌듯한 충일감을 느낄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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