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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권력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 빌리 브란트 (Willy Brandt)

2022. 6. 6. by 현강

널리 알려졌듯이 브란트(1913-1992)는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 이미 10대 때 급진적 사회주의에 투신하였다가 1933년 나치의 탄압을 피해 노르웨이로 망명한다. 이후 노르웨이가 나치독일의 수중에 들어가자 다시 스웨덴으로 건너가 줄기차게 반파시스트 운동에 참여한다. 브란트는 스칸디나비아 망명 시기 동안, 그곳의 비교조적, 실용주의적 사회민주주의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후 스칸디나비아 사민주의는 그의 이념적 준거틀이 되었다.

브란트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로 돌아와 사민당에 재입당했으나 나치 때 조국을 떠났다는 사실 때문에 한때 배신자로 부당하게 비판을 받는 등 숱한 고초를 겪는다. 이후 브란트는 서독 정계에서 빠르게 부상하였으나, 그의 정치역정은 가시밭길이었다. 브란트는 그의 신선한 개혁 이미지가 불러일으키는 공감과 열광의 물결 못지않게 숱한 공격과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세 번째 시도에서 그는 끝내 정권을 잡았다.

 

브란트는 이른바 (()일상적 카리스마(ausseralltaeglicher Charisma)’의 좋은 예기 아닐까 한다. 사회의 주변에서 낙인찍히고, 차별화되며, 소외된인물이 특정한 역사적, 위기적 상황에서 이 낙인을 카리스마로 전환시키는 불굴의 리더십이 그것이다. 그는 외롭고 험난한 길목에서 쓰러지거나 매몰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딛고 일어나, 그 질곡을 동력으로 삼아 우뚝 솟았다.

브란트는 자신의 출생과 과거에 대한 모진 비난과 모욕, 비열한 비판에 대해 지나친 대응이나 증오를 표출하지 않았다. 변명도, 그렇다고 용서도 하지 않은 채, 내적 평형을 잃지 않으면서 담담히 넘겼다. 감수성이 예민한 브란트는 그의 정치 행로에서 자주 마음을 크게 다쳤다. 그러나 그 깊은 내상(內傷)이 크게 곪고 터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그를 큰 구경(口徑)의 인간미 넘치는 성숙한 정치인으로 키워냈다.

 

브란트는 사람은 선과 악을 함께 지니고 있다는 현실적인 인간관을 갖고 있었다. 다른 이에게 지나친 요구를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그 누구도 소홀히 하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그는 거친 정치무대에서 한 번도 상대방을 단언적으로 초토화하는 식의 모진 평가를 하거나 인간적 모욕을 주지 않았다. 대신 그들에게서 늘 무언가 훌륭한 점을 찾았고 그 점을 평가했다. 1968-1974년간 경제협력장관으로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에플러(Erhold Eppler)그의 인간성은 그의 (뛰어난) 수사(修辭)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고 말하며, 브란트는 권력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die humanste Form der Macht)’이라고 상찬했다.

그의 인간적 성숙의 한 부분은 권력과의 거리였다. 그는 늘 얼마간 권력과 거리를 두었고, 정치(politische Geschaefts)가 틈입하지 못하는 공간을 마련했다. 이 차단막을 통해 그는 자신의 내구성을 유지했다. 그는 마치 경험 많은 어른이 낯선 아이를 다루듯이 권력을 다뤘다. 그는 드물게 말을 잘하는 연설가였지만, 사석에서는 늘 말을 아끼고 경청하기를 즐겼다. 그는 정치권력의 본질은 신뢰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늘 온몸으로 보여 주었다.

무엇보다 그는 철두철미한 민주주의자였다. 머리로서만 민주주의를 꿈꾼 게 아니라 그의 체질과 삶 자체가 그랬다. 브란트는 평생토록 민주주의를 '모험'했다(mehr Demokratie wagen). 누군가 민주주의자로서 브란트를 평하면서, 그와 비교할 때 독일 사회주의의 대선배인, 배(Ausgust Bebel)이나 슈마허(Kurt Schmacher)는 독재자였다고 말했다. 그렇듯 민주주의가 그의 정치적 일상, 실제의 업무 속에 자연스레 용해되어 있었다.

 

정치인으로 브란트의 인간성의 깊이를 표상하는 가장 강렬한 장면은 그가 1970년 우울한 초겨울 어느 날, 바르샤바의 유대인 위렵탑 앞 차디찬 대리석 위에서 무릎을 꿇은 역사적 사건이었다(아래 사진 참조). 그것은 두 차례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아우스비츠의 천인공노할 살육을 저지른 독일인의 만행, 그 역사의 빚, 역사의 짙은 그림자로부터 벗어나, 서방과 동방의 모든 이웃들에게 변화된 독일, 더 낳은 독일, 그리고 그가 즐겨 말하던 다른 독일(das andere Deutschland)’을 보여 주는 상징적 모습이었다. 이 극적인 사건은 세계 속에서 독일의 도덕적 위상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브란트는 늘 좋은 독일인이 되고자 한다면, 우선 좋은 유럽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같은 맥락에서 그가 평생 갈구했던 독일통일도 유럽과 세계평화의 큰 틀 속에서 이루어야 할 꿈이었다.

브란트가 총리로 재직한 5년 간의 시간은, 콜과 메르켈의 16, 그리고 아데나워의 14년에 비하면 크게 짧은 기간이었다. 그러나 그 기간 중 그는 독일인에게 예언자의 소명을 충실히 수행했다. 만인에게 황야로부터 벗어나는 길’(킨신저)을 설파하고, 앞장서서 동방정책의 주된 경로를 탐색하며 그 길을 반듯하게 닦았다.

 

1974년 총리직 사퇴는 그에게 세계를 겨냥한 새로운 경력의 시작이었다. 그는 총리직을 그만둔 후에도, 오랜 기간 사회주의 인터네셔널의 수장으로, 또 제1, 3세계를 아우루는 남북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세계평화와 국제개발에 크게 공헌했다. 남북위원회는 1980브란트 보고서를 발간하여, 세계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며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여기서 전문가들은 발전도상국가들의 가장 절박한 문제인, 식량, 기후문제 및 자원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 제안들을 제시하고, 새롭고 보다 공정한 세계경제 질서를 요구했다. 세계시민 브란트의 이름은 세계의 어떤 무대에서도 늘 존경과 신뢰의 징표였다.

 

브란트와 더불어 동방정책을 설계하고 그 실천과정에서 브란트의 최고의 책사이자 막후실력자로 활동하며, 브란트의 분신이라 불렸던 에곤 바(Egon Bahr)가 그의 죽음 가까이에서 행한 마지막 인터뷰의 몇 대목은 매우 인상적이다.

 

: 당신은 브란트를 베를린으로, 외교부로, 또 총리실로 줄곧 따라갔지요. 왜 그랬나요?

: 무엇보다 그가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이지요. 정치가 그의 인품을 타락시키지 않았어요. 그가 지나간 길목 어디에도 정치적 시신(屍身)이나 부상자를 남기지 않았어요.“

: 당신은 동방정책의 설계자가 아닙니까?

: 그렇게 말하시면 굳이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겠어요. 그러나 거기 하나 보탠다면, 부란트가 건축주()였지요.

: 브란트에게서 가장 기억나는 말은?

: ”평화가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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