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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독일의 양심' 헬무트 슈미트 (Helmut Schmidt)

2022. 6. 16. by 현강

               I.

1982년 서독의 제5대 총리 헬무트 슈미트가 총리직에서 물러날 때, 누구도 그가 최후의 위대한 독일인으로 추앙될 것을 예감하지 않았다. 슈미트는 총리로서 뛰어난 위기관리자였으나, 그의 전임자인 브란트의 동방정책이나 그 후임자인 콜의 독일통일과 같은 괄목할 만안 역사적 업적을 내세울 것이 없었고, 그 특유의 아집과 오만, 그리고 냉정함이 적지 않은 사람의 눈에 거슬렸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후 세월과 더불어 서독의 정치, 경제, 종교, 스포츠 등 모든 영역에서 수많은 한때의 명사들이 하나, , 그 빛을 잃거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나, 오직 한 사람, 슈미트는 날이 갈수록 높게 재평가되어 이제 최고의 총리’, ‘독일인 최상의 도덕적 권위’, ‘최고의 현인’, ‘독일의 양심으로 살아남았다.

 

독일의 유명 주간지 슈피겔2010년 독일인들에게 현존하는 인물 중,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물었다. 여기서 당시 91세였던 고령의 슈미트가 교황을 크게 제치고 최상위에 올랐다. 메르켈 총리가 4, 교황 베네딕트 16세가 7, 그리고 양철북으로 유명한 노벨상 수상 작가 균터 그라스가 10위였다. 슈피겔은 이를 슈미트 현상이라 명명하고, 그가 ”’독일을 가장 바르게 체화(體化)한 인물이라고 해석했다. 놀랍게도 상위 랭커 6명이 모두 정치인(, 현직 총리, 대통령, 장관등)이었다. 슈피겔은 이를 아직 독일인들이 국가에 대한 믿음을 떨치지 않았음을 보여 주었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결코 독일인이 정치인들을 무턱대고 신뢰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독일에도 정치에 대해 혐오, 불만, 조소가 널리 퍼져있다. 독일인 직군(職群)별 신뢰도 조사(Statista Research Department 16.11.2011)에 따르면, 주요 직업 중 의사(57%), 법관(56%), 종교인(37%) 등에 대한 신뢰도가 높고, 정치인(3%)이 가장 낮다. 이렇게 볼 때, 정치에 대한 독일인의 믿음이 무척 낮은데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지도적 정치인 중에 도덕성을 갖춘 신뢰할 만한 정치인이 많다는 사실이다.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이른바 슈미트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슈미트의 삶의 여정을 돌아보며, 그 해답을 구해 보자.

 

                 II.

슈미트는 한자(Hansa)도시 함부르크에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제2차 대전에 참전하고, 함부르크 대학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전공했다. 이후 얼마간 관료 생활을 거쳐 정치에 투신했다. 사생아로 태어나 외국에 망명, 반나치 투쟁에 하며 파란만장한 청년기를 보낸 브란트와 대조가 된다. 슈미트는 브란트 정부에서 국방장관, 경제장관, 재무장관을 역임하며 국정의 주축인 경제 및 안보 분야에서 견고한 경력을 쌓은 후, 브란트가 간첩사건으로 총리직을 물러나자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슈미트의 총리 재임기간 독일은 엄청난 위기의 시대였다. 전세계적인 경기침체와 더불어, 두 자리수의 인플레이션, ’적군파(RAF)’ 테러리즘과 신냉전의 도래 등 갖가지 위기가 겹쳤다. 그는 1974년 총리 취임 제1성에서 안정과 완전고용을 내세우며, 기본법의 유지와 그 바른 실천에 대한 결의를 표명했다. 이는 동방정책의 열광 속에 장미빛 행복감(euphorism)이 넘쳤던 브란트 시대와는 판이하게 달라진 상황 인식이었다. 이후 슈미트는 냉철한 이성과 실용주의적 문제해결력을 바탕으로 거듭되는 위기를 슬기롭게 돌파하며 독일 역사상 최상의 위기관리자, 최고의 항해사(Navigotor: Klaus Boelling)’로서 국내외에 명성을 떨쳤다. 그는 엘리트 출신으로 자신의 출중한 능력을 바탕으로 사회적 안정화에 기여하는 이른바 일상적 카리스마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슈미트의 정치적 리더십은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자신이 겪은 사회적 낙인을 새 시대를 여는 카리스마로 전환한 브란트의 비일상적 카리스마와 극명하게 대조된다.

 

무엇보다 슈미트는 두 번의 오일쇼크를 성공적으로 극복하며 독일의 경제성장을 견인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아울러 그는 지스카르 데스탱 프랑스 대통령과 더불어 선진국 클럽 G7회의를 제안하여 성사시켰고, 유럽통화제도 (EMS)를 출범시켜 유럽통합을 위한 새로운 차원을 열고, 유럽 단일통화, ‘유로로 향하는 길목을 다졌다. 대외정치적으로 그는 브란트의 노선을 계속 이어가며, 동서독 간의 교류를 지속적으로 확대했다. 그런가 하면, 슈미트는 1975년 범 유럽적 평화질서를 구축한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KSZE)’의 최종의정서(헬싱키협정) 채택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슈미트는 특히 국제적으로 높게 평가되었다. 지스카르 데스탱은 그를 현대적 대정치가(statesman)의 화신이라고 칭송했는가 하면, 1975‘Financial Times’는 그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고, 1979‘Economist’지는 그를 서방세계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명료한 이성을 지닌 유일한 인물이라고 상찬했다.

 

197710월 이른바 독일의 가을로 불리는 적군파 테러리즘의 광풍은 그가 총리 시절, 겪었던 가장 큰 위기이자 도전이었다. 당시 극좌 테러조직인 적군파가 루프트한자항공기를 납치, 90여명의 승객과 승무원을 인질로 복역중이던 테러범의 석방을 요구했다. 승객의 안전을 위해 테러범의 요구를 들어 줘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지만, 슈미트는 이에 굴하지 않고 특공대를 특파하여 인질 전원을 구출했다. 결국 적군파에 피납된 한스-마르틴 슐라이어 독일 산업연맹(BDI) 회장이 희생되는 불상사가 있었으나, 슈미트는 끝까지 테러리스트와는 협상하지 않는다라는 원칙을 지켰다. 이 위기극복 사례는 슈미트에게 ”‘의 총리라는 이름과 함께, 슈미트의 정치적 리더십을 대중들에게 각인시킨 결정적 계기였다. 무엇보다 인간성이 야만으로 추락하는 것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정치적 원리는 어디에도 없다는 그의 신념과 이의 올골찬 결행은 문명세계로부터 엄청난 존경과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1975년 이후 구 소련은 핵탄두를 탑재한 SS20 중거리 핵미사일을 동독과 동유럽에 배치하여 심대한 안보위기를 조성했다. 이에 미국을 비롯한 서방측은 나토(NATO)의 이른바 이중결의(Doppelbeschluss)’로 맞대응을 하게 된다. 그 내용인 즉, 197912월 나토 회원국들은 소련과 협상해서 기왕에 배치된 중거리 핵미사일의 철수를 유도하되, 그것이 실패할 경우 1983년 서독을 비롯한 서유럽에 중거리 핵미사일(퍼싱-II 미사일)을 전면 배치한다는 것이었다. 슈미트는 나토의 이중결의를 지지한다는 정치적 결단을 내렸고, 이는 서독 국민들과 자신의 당인 사민당 내부에서 치열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서독 내의 평화주의자와 환경주의자들 및 대학생들의 반대는 격렬했다. 그러나 슈미트는 전쟁광이라는 날선 비난과 정권의 추락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추호도 흔들리지 않았다. 1982년 정권이 교체된 후, 결국 퍼싱 II 미사일은 기민당의 헬무트 콜 총리에 의해 서독에 배치된다.

 

                            III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슈미트는 자신의 고향 함부르크에서 발간되는 독일의 유력한 주간신문 디 짜이트(die Zeit)’의 공동 발행인/편집인으로 인생 제2막을 올렸다. ‘위기 관리자’, ‘실천가(Macher)“로서 정책집행에 앞장섰던 슈미트는, 이제, 저널리스트로서, 정치 해설과 해석, 그리고 정치 및 정책의 조언자로서, 새로운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그가 그동안 축적한 국정 경륜과 실용주의적 현실감각, 글로벌한 안목과 경제적, 군사적 전문성 등이 여기서 큰 몫을 했다. 이후 슈미트는 90세가 넘기까지 수많은 정치평론과 저술, 강연, 대담 등을 통해 독일의 정치와 사회에 깊숙이 관여하면서, 총리재임 때와는 다른 차원의 막강한 영향력을 구사했다. 많은 이가 그의 최상의 경력은 정치를 떠난 후, 함부르크에서 일군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평론가로서 슈미트는 자신의 생각을 언제나 언제나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슬기로운 조언과 더불어 가차 없는 비판과 그 특유의 빈정댐도 여전했다. 노년의 온화함이나 추호의 인기영합적 시도도 없었다. 그는 세계 금융자본의 폭주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세계화된 금융시장의 감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아울러 무역 및 국제수지에서 엄청난 잉여를 남기고 있는 독일의 유럽정책과 국가적 에고이즘에 대해서 날 선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슈미트의 논조는 총리재직시에 비해 더 자유로웠고, 진보적 색채가 더 짙어졌다. 천의무봉(天衣無縫), 그의 필봉은 후임자인 콜총리를 비롯해서, 슈뢰더와 메르켈 총리의 리더십과 정책에 대해서도 주저 없이 논박했다. 그러면서 때로는 다문화 사회를 지식인의 환상‘, 지구온난화에 대한 논란을 히스테리라고 공격하는 등 시대정신과 동떨어진 주장도 거침없이 쏟아냈다. 가끔 거칠지만, 냉철과 지성을 갖춘 독립적인 조언가로서 이런 슈미트의 변함 없는 모습에 대해 국내외의 많은 이가 열광했다. 그가 한창 총리 때 자주 논란이 되었던 오만과 냉정도 이제 슈미트의 최상의 인기품목이 되었다.

 

2008년 슈미트의 90회 생일을 맞자, 독일은 유례없는 축제 분위기였다. 언론은 그를 가리켜 영원한 총리‘, ’독일인의 최애총리‘, ’독일인의 양심‘, ’기념비 자체라고 상찬을 아끼지 않았다. 고령까지 이어지는 그의 왕성한 저작활동에 대해 세상은 헨리-난넨 (Henri-Nannen-Preis, 2010))’상과 밀레니움 밤비(Millenium Bambi, 2011)’상으로 보답했다. 밀레니움 밤비는 심사평에서 그는 다수의 정치인들이 결여하고 있는 칼날같은 사고력과 확고한 도덕성을 갖췄다라고 평했다. 날이 갈수록 독일인들은 그를 더 좋아하고 신뢰했고, 그에 대한 수요는 국내외적으로 차고 넘쳤다.

 

                                IV

왜 독일인이 헬무트 슈미트에 열광하는가? 그 가장 큰 요인은 실용주의자 슈미트를 감싸고 있는 도덕성과 책임의식이 아닐까 한다. 그는 거창한 이론이나 비전을 앞세우지 않고 냉철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실용주의적 문제해결에 앞장섰으나, 그의 정치적 결정과 행위에는 늘 도덕적 목적과 책임의식이 함께 했다. 그가 적군파 테러리즘에 대해 자신의 정치적 생애를 걸고 결연히 맞선 것이나, ‘퍼싱 II’ 핵미사일의 서독 배치를 둘러싼 정치위기 때 전국을 휩쓴 반전, 반핵 인파와 폭발적인 당내 비판에도 추호의 흔들림이 없었던 것도, 그가 단순한 실리추구의 실용주의자였다면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민당 출신 총리였으나, 그의 사고의 지평은 늘 당의 경계를 넘었고, 글로벌한 관점과 균형감각, 그리고 역사에 대한 책임을 중시했다. 그가 사민당이 배출한 최고의 기민당 정치가라는 자못 희화적인 역설적 평가를 받은 것도 그 때문이다.

 

정치가 슈미트는 팔방미인이었다. 냉철한 지성미로 국내외를 매료시켰을 뿐아니라, 뛰어난 말 솜씨와, 글 재주, 그리고 드믈게 잘 생긴 그의 모습도 그의 인기를 부추겼다. 그는 특히 바흐작품에 정평있는 건반연주자이기도 했다. 슈미트는 체인 스모커로도 유명해서, TV 인터뷰에서도 거침없이 줄담배를 피우며 말을 나눴다. 당연히 비난의 대상이 될 일인데, 금연의 세계적인 물결 속에서도, 독일 사회는 그에게 공공건물에서 마음 놓고 흡연할 수 있는 사면권을 주며, ‘마지막 흡연자라고 이름 붙였다.

 

무엇보다 독일인이 그를 사랑하는 것은 그의 꾸밈없고, 직설적인 성품, 냉철한 이성과 자기 절제, 열정과 오만이 곁들인 개성, 거침없지만 그렇다고 중뿔나게 자신만을 앞세우지 않는 그 특유의 인간적인 매력 때문이 아닐까 한다. 많은 이가 그의 이러한 모습을 그의 고향 한자도시 함부르크를 연상하며 한자인 다운(hanseatisch)’ 면모라고 평하기도 한다.

 

 

                  V.

헬무트 슈미트는 몇 차례 한국을 방문했고, 그때마다 한반도 평화정착과 통일에 대해 유익한 조언을 했다. 1996년 방문 당시 독일 대사관 만찬에 나도 초대받았다. 10 여명이 저녁을 함께 했는데, 말 잘하는 슈미트가 그 날은 비교적 말을 아껴 별로 기억에 남는 대화는 없었다. 그런데 역시 소문처럼 슈미트는 드물게 잘 생겼고, 언동에 품위가 있었다. 다만 아쉬웠던 것은 유럽인치고 키가 너무 작다(170cm)는 인상이었는데, 독일 대중언론에서도  그가 조금만 더 컸으면 얼마나 더 멋질까라는 안타까움를 피력했던 기억이 났다. 김영삼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김 대통령 보다 근소하게 더 컸다.

그것은 한마디로 미남 배우 톰 크루즈에게서 느끼는 아쉬움 비슷한 것이었는데, 아마도 이는 슈미트라는 대 스타의 완성미를 기대하는 많은 이의 선의의 바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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