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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김동길 교수님을 추억하며

2022. 11. 8. by 현강

I.

김동길 교수님이 서거하셨다. 부음을 접하니, 한국 현대사와 함께한 그의 파란만장했던 생애가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내가 연세대 2학년 때, 그가 30대 초반 젊은 나이로 같은 대학의 사학과 전임으로 부임하셨고, 내가 연세대 교수로 간 1970년대 중반 이후 10여 년 간 같은 대학에 함께 재직하셨으니, 김 교수님과 나와의 개인적 인연도 꽤 오래되었다. 그러나 김 교수님과 나는 어쩌다 만나면 서로 반기는, 말하자면, 그냥 잘 아는 사이였을 뿐, 서로  깊은 대화를 나눈 기억은 많지 않다. 대체로 그는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공적존재였고, 나는 시청자나 독자로 그를 멀리서 바라보며 지냈다. 그러면서 때로는 그의 관점을 공감, 지지했고, 때로는 그렇지 않아 내심 못마땅한 적도 적지 않았다.  나는 단연 젊은 김동길, 그 이후의 김동길 보다 훨씬 더 좋아했다.  

 

내가 기억하는 김동길 교수님은 무척 직설적인 분이셨다. 뛰어난 말솜씨에 풍자와 해학이 곁들여져 늘 그 나름의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하셨지만, 그는 언제나 자신의 생각은 주저하거나 에두르지 않고 직접적으로, 거침없이 피력하셨다. 그런 면에서 그는 자신의 신념에 무척 투철한 분이셨고, 얼마간 독불장군의 기질이 강했던 분이다.

그가 한참 유신체제에 치열하게 저항하던 시절, 나는 안병무 교수님, 문동환 목사님들과 함께 역시 유신반대 운동에 앞장섰던 고려대의 고 이문영 교수님께 아래와 같이 여쭤본 적이 있다.

비슷한 연배에 다 같이 대학에 계시고, 서로 익히 잘 아시는 개신교 지도자들이신데, 왜 김동길 교수님과는 함께 행동하지 않으세요?”

이에 대한 이문영 교수님의 아래와 같은 대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김 교수님은 혼자 뛰셔야 더 빛이 나는 분이시지요. 워낙 개성이 강하시고, 그 분 나름의 스타일이 있으시니까”.

그러면서 이 교수님은 내게 아래와 같은 김동길 교수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 하나를 해 주셨다.

김동길 교수님이 아주 어렸을 때, 워낙 장난이 심해서 어머님께서 세수대야에 얼굴을 닦으라고 물을 떠다 주면, 으레 하라는 세수는 안 하고 온통 물을 휘접고 산지사방으로 물을 뿌려, 마루를 난장판으로 만드셨다고 한다. 그래도 생각이 깊으신 김 교수님 모친은 아들의 기를 키워주기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으시며 다시 세수물을 떠다 주셨다고 한다.

 

나는 여기서 그를 연상하면 떠 오르는 몇 가지 기억들, 특히 그의 인간적인 면모와 연관되는 몇 개의 장면들을 되살려 보고자 한다.

 

II.

첫 번째 기억은, 위에서 잠시 언급된, 김 교수님의 모친, 방 여사님에 관한 것이다. 나는 1960년대 초 연세대 재학 중 잠시 학교 뒤편에서 하숙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현 김옥길 기념관 자리)에 김동길 교수님 댁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오가며 김 교수님의 모친인 방 여사님을 자주 뵐 수 있었다. 방 여사님은 늘 만면에 웃음기를 띠시며, 동네 대소사를 도우시고, 가난한 이웃들을 따듯하게 돌 보셔서, ‘동네 어머니로 통하셨다.

 

아직도 강렬하게 뇌리에 각인된 장면이 하나 있다. 그 해 여름에 심한 가뭄이 들어, 대부분이 우물이나 펌프에 의존하는 동네 사람들이 물이 부족해 큰 고생을 했다. 그러자 댁에 수도가 있던 방 여사님은 집 옆문으로 수도 호스를 밖으로 길게 뽑아 큰 함지박(흔이 말하는 다라이)에 계속 물을 내 보내셔서, 동네 사람들을 도우셨다. 아직도 눈에 선한 것은, 함지박 뒤에 차례를 기다리는 버킷과 양동이들이 줄지어 길게 늘어선 가운데, 방 여사님 께서는 부지런히 집 안팎을 오가시며, 물 흐름을 조정하시고, 물심부름 나온 아이들을 도와 정성스레 버킷에 대신 물을 담아 주시던 모습이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입을 모아. “저런 대단한 모친이시니, 혼자 남매(김옥길, 김동길)를 큰 그릇으로 멋지게 키우셨지라고 말했다.

 

III.

1970년대 초에 나는 종로에서 우연히 김 교수님과 마주쳤다. 김 교수님은 내게 반갑게 다가오셔서, “안 교수, 그러잖아도 한번 만나고 싶었네. 잠시 말씀 좀 나누세하시며 나를 YMCA로 데리고 들어가셔서, 매우 진지한 모습으로 아래와 같은 질문을 하셨다.

내가 독일 기독교민주당에 관심이 큰 데, 그게 실제 어떤 정당인가? 그리고 한국에서 그런 정당을 만든다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나?”

나는 아는 대로 독일 기민당에 관해 말씀을 드리며, 내 짧은 소견으로는 그런 정당이 이 땅에서 성공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대답했던 기억이다. 그랬더니, 무척 실망한 빛으로,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둔 정당이 제 구실을 한다면, 한국 정치를 크게 정화시키고,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으로 올릴 수 있을 것으로 믿었는데라고 안타까워 하셨다.

그 때, 나는 김 교수님이 현실 정치에 무척 관심이 크시고, 경우에 따라 직접 참여하실 뜻이 있으실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울러, 그의 그런 사고의 저변에는 권력에 대한 욕구나 의지보다는, 그가 평생 신봉하는 기독교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IV.

1987년 민주화가 이루어지자, 권위주의 정권에 대항하다 오랫동안 대학을 떠나셨던 여러 교수님들이 다시 돌아오셨다. 김동길 교수님도 그 분들 중 한 분이셨다. 1988년 당시 나는 연세대의 교무처장으로, 그 분들이 그간 겪으신 고초와 희생에 대해 대학 차원에서 얼마간 보상을 해드릴 계획을 짜고 이를 수행했다. 우선 밀린 월급을 찾아 드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뒤처진 호봉을 새로 조정하는 등 세부 작업을 해서, 한 분, 한 분 뵙고 말씀을 나눴다. 대체로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워낙 개인적 사안이기 때문에 어떤 교수님은 대학 측의 안을 꼼꼼히 챙겨 보시고 약간의 이의를 제기하는 분도 계셨다.

그런데 김동길 교수님은 크게 달랐다. 내 얘기를 다 들으시지도 않고, 내 제안서를 그냥 덮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학교가 쫓겨난 사람을 다시 불러 주신 것만 해도 백번 고마운데, 무슨 보상이라니? 아무 것도 않하셔도 괜찮습니다. 굳이 주시겠다면 마다하지 않겠지만, 얼굴 뜨겁게 이걸 내가 어떻게 들여다 봐요? 그냥 뜻대로 하세요.”

그는 끝내 제안서를 챙겨 보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동안에도 학교가 못난 사람을 위해 여러 가지로 애 많이 썼어요. 나는 고맙다는 말씀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말을 줄였다.“ 그렇게 그와의 면담은 단 10분 만에 끝났다.

그와의 면담에서 나는 김동길 교수님의 대인배기질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내 속이 확 트이면서, ”그래, 역시 김동길은 뭐가 달라도 크게 다르지라고 혼자 쾌재를 불렀다.

 

V.

그가 평생 사셨던 집은 바로 연세대와 이화여대에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그 일대 대신동, 봉원동에는 이북 출신, 개신교를 신봉하는 이화여대, 연세대 교수님들이 많이 사셨다.  그 분들 대부분이 이미 세상을 떠나셨다. 한 시대가 막을 내렸다는 느낌이다. 그 중 대표적 존재였던 김옥길, 김동길 남매분은 평생 각각 두 대학교와 깊은 인연을 맺으시며, 삶을 통해 한  시대를 상징적으로 증언하셨다. 김동길 교수님은 유언으로 자신의 몸과 집을 그가 각별히 사랑했던  연세와 이화 두 대학교에 나누어 바치셨다. 삼가 두 분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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