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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타계한 친구들의 전화번호

2024. 9. 13. by 현강

             I

나이가 80대 중반에 이르니, 가까운 친구들 다수가 세상을 떠났다. 얼마전 내가 나온 고등학교 홈 페이지에 들어가니 동기생들의 생존률 52.5%”라고 공지되어 있었다. 한국 남성의 평균수명이 81세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 나이에 고교 동기가 아직 반 이상 살아있다니 매우 준수한 성적이다. 그러나 앞으로 친구들의 부음을 더 자주 듣게 될 터이고 그때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과의 옛 추억의 편린들을 되살리며 인생무상을 체감할 것이다

 

            II.

내 핸드폰 <연락처>란에 친구들을 비롯해 가까운 지인들의 전화번호가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내가 오래전 이곳 강원도 고성으로 내려온 후 서울과의 교류가 뜸해져 실제로 거기 담긴 이름들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연락처를 살펴보면 거기에 이미 타계한 친구들의 이름이 지워지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고, 그 숫자가 제법 된다. 내가 굼뜨고 게을러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차마’ 지우지 못하고 그냥 남겨둔 탓이었다. 어찌보면 이미 세상을 등진 친구들이 내 핸드폰 속에는 계속 그냥 살아 있는 셈이다.

그 중 적지 않은 수가 지난 몇 년 사이에 타계한 친구들이어서, 생각 같아서는 당장 내가 그들에게 전화를 걸면, 예나 다름없이  정겹게 응답하며 반길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그들은 이미 저세상 사람들인데 하고, 야멸차게 몇 번 그들 이름을 삭제할까 하다가 결국 그러지 못했다. <연락처>에서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면 그들이 내게서 영영 떠나갈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III.

인생 황혼기에 접어 들면서, <생사관(生死觀)>도 확실히 바뀌는 것 같다. 젊었을 때는, 가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그 충격과 파장이 무척 컸고, 그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러면서 그가 딴 세상 사람이 되면서 그와는 영원히 단절(斷絶)’된다는 주체하기 어려운 절망감에 휩싸여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었다. 그런데 이제 친구들의 죽음이 잦아지면서, 그 충격도 무뎌졌고, 체념도 빨라졌다.

그런데 그 보다는 죽음을 보는 관점 자체가 크게 달라졌다는 느낌이다. 젊었을 때는 죽음은 아주 먼 곳에 있고 내 일상과는 무관한 딴 세상 일인 듯 싶었는데, 이제 그 것이 내 가까이 다가와 있고 죽고 사는 게 정말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생각이 커졌다. 그래서 그것이 그리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가까운 친구의 타계도 나보다 한발 앞선 일”  정도로 여겨지고 그들과 내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머므는는 듯 느껴져, 얼마간 담담한 심경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면서 내 기억 속에 살아 있는 한, 그들은 죽은 게 아니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일렁인다. 그들은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지만, 그들과의 갖가지 추억들은 내 기억 속에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고, 그것들이 아직도, 그리고 앞으로도 나와 정서적으로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며, 따사한 가을 햇살처럼 내 삶에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잊혀지지 않는 한 분명 내게 살아있는 존재인 것이다.

 

             IV.

그래도 언제든 날을 잡아 내 핸드폰 <연락처>에 타계한 친구들의 전화번호를 한몫에 지울 생각이다. 그들의 이름이 점점 늘어나는 것도 보기 그렇고, 또 그 낱낱의 이름을 보면 어쩔 수 없이 처연(凄然)한 생각이 들어 마음이 언짢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들이 엄연히 내 기억 속에 살아있고 이름을 삭제한다고 그 기억이 희석될 리 없는데, 구태여 그들의 이름을 거기 애써 수록해 둘 이유가 없을 듯해서다.

나는 그날 옛 친구들의  이름 하나 하나를 지우면서 이승에서의 나와의 아름다운 인연을 다시 한번 깊게 되새기고, 진심으로 그들의 명복을 빌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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