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 단상

4월 1일이면 생각나는 사람

2024. 4. 1. by 현강

                            I.

2004년 4월 1일, 새벽 2시, 나는 노무현 정부의 교육부총리로 <EBS 인터넷 서비스>를 개통했다. 지금부터 꼭 20년 전 일이다. 그런데 그 것은 내가 이미 1997년 7월 김영삼 정부의 교육부 장관으로 천심만고 끝에 <EBS T.V 위성방송>을 출범시킨 지 7년 가까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만사가 지나고 보면 다 때가 돼서 자연스레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일을 주도하는 입장에서 보면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일대 결전일 때가 많다.  위의 두 번의 프로젝트가 다 그랬다. 특히 e-러닝 시대의 총아인 인터넷 서비스의 개통은 최대 10만 명이 동시에 접속할 수 있는 사상 초유의 대형 실험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고 그 과정이 무척이나 힘겨웠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동영상 서비스 사이트 중 가장 큰 것이 접속 2만 명 미만이었다). 그 때 나는 정부(교육부, 정통부)와 민간부문(EBS, KT 등 통신사업자 등) 및 학교 간의 치밀한 협력 체제를 바탕으로 하는 이 대형 사업을 총괄 지휘하면서 개통을 앞두고 엄습하는 중압감과 고조되는 긴장 속에 매일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마지막 15일을 남기고는 교육부는 장관실을 비롯한 모든 방에 <D-15>라는 상황판이 붙었고, 그 숫자가 나날이 줄어들었다. 그런데 주위의 반응은 그리 호의적이 아니었다. 다수의 언론은 회의적이어서 ‘인터넷 대란’이 필지의 사실인 양 보도했고, 심지어는 청와대도 깊은 우려와 불신의 눈빛을 보냈다. 정치적으로도 꽤나 부담스러웠던 것은, 개통 시점이 4월 15일 국회의원 선거를 보름 앞두고 있었던 점이었다. 4월 1일 EBS 인터넷 서비스 개통 성패가 총선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 불문가지(不問可知)였다.

4월 1일 새벽 2시 개통에 앞서 나는 EBS 상황실에서 극도의 긴장 속에 진대제 정통부 장관과 고석만 EBS 사장과 더불어 EBS 인터넷 서비스의 역사적인 연착륙을 지켜보았다. 그날 아침 날이 밝으면서 모든 언론은 EBS 인터넷 서비스가 성공했음을 일제히 보도했다. 만인이 우려했던 ‘대란’없이 이 힘겨웠던 역사(役事)가 기적적으로 성공한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날, EBS 인터넷 서비스 개통과 같은 날짜에 이 보다 훨씬 대규모의 또 하나의 국책 사업이 첫발을 내디뎠다. 그것은 1992년 착공해서 국토의 대동맥을 잇는 서울-부산 간의 고속철도, 즉 ‘KTX(Korea Train Express)’의 역사적 출범이었다. 온 국민의 초미의 관심사였음은 물론이었다. 그런데 그날 아침에 개통된 KTX는 처음부터 삐거덕 거렸다. 이런 저런 문제가 생겨 적잖은 우려를 낳았고 언론도 이를 낱낱이 지적하며 비판적으로 보도했다. 파란 불이 켜진 EBS 인터넷에 대조적으로 대망의 KTX는 붉은 색의 경고등이 켜진 셈이다.

                                                 

                                      II.

개통 첫날 4월 1일 EBS 인터넷은 순항했다. 대란은커녕 작은 사고도 없이 오후로 접어들었다. 우려했던 개통 초기 접속자 폭증으로 인한 서버다운, 끊김 형상, 접속지연 등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나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터질지 몰라 전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한마디로 좌불안석이었다.

그런데 그날 오후 2시 경 내게 전화가 왔다. 의외로 전화를 건 사람은 같은 날, KTX를 주관한 건설교통부의 강동석(姜東錫) 장관이었다. 그는 예의 차분한 목소리로 “안 장관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어려울 줄 알았는데 크게 성공을 거두셨습니다. 너무 기뻐 전활 드립니다”라는 게 아닌가.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나는 너무 놀랐다. 나는 내 코가 석자라 KTX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강 장관은 자신이 처한 그 어려운 와중에 내게 전화를 걸어 축하를 하다니, 그가 보여준 금도(襟度)와 배려심에 순간 나는 크게 놀라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이어 진한 감동과 자괴심이 세차게 밀려 왔다. 그래서 “아니 강 장관님, 형편이 꽤나 어려우실 터인데, 제게 축하 전화를 다 하시다니요.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데 KTX는 어떻게 하지요. 너무 힘드실 텐데.”라며 말을 흐렸다. 그랬더니 그는 “네. 당장은 어렵습니다만, 곧 제 궤도에 오를 것입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라며 얼마간의 여유와 자신감을 내 비쳤다.

 

그와 전화를 끝낸 후, 나는 한동안 멍하기 앉아 있었다. 당장 눈앞에 내 일에만 집착해서 거기 매달려 죽자 사자 아등바등하던 내 모습이 그렇게 왜소하고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도 강 장관님의 본을 받아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자 한 사람이 떠올랐다. 7년 전 <EBS T.V. 위성방송>을 개통할 때 EBS 원장(이후 사장)으로 수고했던 박흥수 교수님이었다. 박 교수님은 연세대 사회과학대학의 동료 교수님이었는데, 이후 EBS를 맡아 당시 교육부장관(1995-1997)이던 나를 도와 EBS T.V. 수능방송 출범에 큰 몫을 하셨던 분이다. 그런데 그동안  오래 격조했던 터였다.

생각이 그에 미치자, 나는 곧장 박 교수님께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오늘 EBS 인터넷이 성공적으로 개통되었다는 말씀과 함께 7년 전 EBS 수능이 첫 발을 뗄 때 박 교수님이 보여 줬던 헌신과 공적을 크게 치하하며 깊은 감사를 드렸다. 박 교수님은 무척 반기시며 고마워했다. 강동석 장관님에게서 배운 것을 그대로 실천한 셈이다.

다행이 KTX는 개통 후 두어 주 지난 후 부터는 강 장관님이 예견한 대로 제 궤도에 올라 아무 말썽 없이 순항했다. 언론도 큰 성공임을 인정했고, 온 국민이 기뻐했다.

                                         

                                            III.

그렇다면 이 글의 장본인인 강동석 장관은 어떤 분인가? 그는 1938년 생, 전문관료 출신으로, 옛 교통부에서 기획관리실장, 해운항만청장 등 교통 및 물류분야의 주요 보직을 두루 역임했다. 공직 퇴직 후에는 인천국제공항공사, 한국전력 등 공기업을 맡아 대형 국책사업을 추진하며 CEO로서의 추진력과 문제해결능력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다. 그는 특히 1990년대 초 인천공항을 처음 건설할 때, 신공항 건설공단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2년 반 동안 간이 숙소에서 기거하며 건설 현장을 지휘해서 거대한 갯벌을 매립하는 대역사(大役事)를 거쳐 세계 최고 수준의 미래형 신공항을 건설한 기념비적 인물이다. 그런가 하면 그는 한전 사장 재직 중 윤리 경영을 앞세워 회사 내 만연했던 리베이트를 척결하는 큰일을 해 냈다. 한 마디로 강 장관은 전문적 업무능력과 헌신 및 도덕성 모두를 갖춘 한국의 대표적 관료 출신 장관이다. 그런 그였기에 KTX가 초기 단계에서 다소 차질이 생겨도 크게 흔들리지 않고, 내게 그 개선을 자신했던 것이 아닐까.

 

                                           IV.

장관시절, 개인적으로 나는 강동석 장관과는 아무런 교류가 없었다. 일주일에 한번, 국무회의에서 멀리 얼굴을 마주 했으나,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눈인사나 나누는 게 고작이었다. 국무회의에서 그는 늘 합리적이고 차분한 모습을 보였다. 필요 이상 나서지는 않았지만, 건설교통부에 관계되는 사안에 대해서는 비교적 성실히 소통하고 논의하는 편이었다. KTX의 추진상황에 대해서도 대체로 2주에 한번 정도 그 진척 상황을 간략히 보고하고, 주요 논점과 건설교통부의 대응전략을 제시했다. 그 모든 방식이 모법답안에 가까웠다.

장관이기에 앞서 행정학자인 나는 특히 ‘사람’에 관심이 커서 늘 장관 한 사람, 한 사람의 리더십을 눈여겨보곤 했는데, 강 장관도 그 주요 대상의 한 분이었다. 그는 성공적인 관료출신 장관의 전형적 예였다. 하지만 그는 단기적, 기능적 역할에 강한 여느 관료출신 장관들에 비해 미래 조망능력이나 사고의 폭이 컸고, 특히 대형 사업의 추진과 관리에는 비범한 능력을 지녔다. 2012년 정부가 여수 엑스포를 앞두고 70대 중반의 강 장관을 조직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나는 강동석 장관께  늘 관심이 컸고  또 고마운 심경이었으나 당시 장관일이 워낙 바쁘고 계속 일에 쫓겨 마음뿐이었지 그와는 끝내 차 한 잔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도 미안하고 아쉽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도 이제 80대 후반에 접어들었으니 예전 모습은 아닐 터이고,  그러나 어디선가 단정한 매무세로 조용히 황혼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부디 오래 도록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빈다. 이 글을 통해 고마운 심경으로 빚진 자의 따듯한 안부를 전한다.

 

.

'삶의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수환 추기경님 인터뷰  (2) 2024.02.18
데드라인  (4) 2024.02.02
'김형석 현상'  (2) 2023.10.31
기차길옆 작은 집  (8) 2023.07.06
만남과 헤어짐  (4) 2023.04.09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