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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김형석 현상'

2023. 10. 31. by 현강

                      I.

  1984, 미국의 레이건이 역대 최고령 대통령으로 재선에 성공하자, 선친(先親)께서 무척 기뻐하셨다. 내가 의아해하니, 선친은 내 나이 또래의 70대 중반의 노인이 세계 최강국의 대통령직을 두 번씩 맡게 됐으니, 내게도 큰 힘이 되고 격려가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당시만 해도 70을 넘으면 상노인(上老人)으로 여겨질 때라, 나는 그러실만하다고 쉽게 수긍을 했다. 그런데 그간 노령화가 크게 진전되어, 82세의 현직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재선을 준비하고 있고 그에 맞서는 트럼프 전직 대통령도 80세 턱밑의 나이니, 40년도 안 되는 세월 동안에 나이가 주는 함의(含意)가 크게 변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세는 나이로 104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신문에 기고하고 흐트러지지 않은 매무새로 강연과 방송 출연을 계속하는 한국 최고령 철학자 김형석 교수님의 모습에는 모두가 경탄해 마지않는다. 100세를 넘겨 살기도 어렵지만, 그 나이가 되면 하루하루 연명(延命)하기도 힘겨우리라 여겼는데, 김 교수님은 예나 다름없이 꾸준히 활동하며 의미있는 삶을 통하여 만인에게 자신감과 영감을 선사한다는 게 도시 믿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오늘 실로 많은 이가 그를 통하여 자신의 나이를 재해석하고 스스로의 삶의 의지를 북돋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그의 실존적 의미를 김형석 현상이라 불러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II.

  김형석 교수님이 1954-1985년 간 30년 넘어 연세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셨다. 따져보면, 나도 그 기간 중에 연세대 학생, 그리고 교수로 14년 간 김 교수님과 같은 교정을 거닐었으니, 나와 선생님과의 인연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실제로 나는 어쩌다가 김 교수님을 먼발치서 뵙곤 했을 뿐, 그 분의 강의를 듣거나 그와 말씀을 나누는 등 대면적 기회를 갖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내가 연세대 2, 3 학년때 김 교수님은 이미 고독이라는 병’(1960)영원과 사랑의 대화’(1961)로 낙양의 지가를 올리셨기 때문에, 그가 어떤 분인가는 일찍부터 나름으로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나는 학창 시절에는 김 교수님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베스트셀러 작가로 한창 유명세를 타실 때가 바로 4.19 혁명(1960)‘5.16 쿠데타’(1961)와 시기적으로 겹쳤고, 그 질풍노도 시대에 정치학도인 내 관심은 온통 한국의 현실과 정치에 쏠려 있었고, 절제된 어조로 삶의 의미를 논하는 김 교수님의 철학적 인생관은 내 마음을 크게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나 어쩌다 늦은 밤 방송에서 이성과 감성의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듣는이의 심금을 울리는 김 교수님의 말씀을 듣노라면 나도 모르게 그가 인도하는 사랑과 영원의 세계로 빨려들 때가 있었다.

  그런데 내 기억으로는 김형석 교수님은 대체로 1980년대 이후 2010년대 초반까지 약 30여 년간 세인의 관심에서 사라지셨다. 아니 어찌 보면 그는 그 기간 중 거의 잊혀진 존재였다. 그러다가 약 10년 전, 2010년대에 진입한 이후 100세를 바라보는 노() 철학자의 존재가 다시 언론에 부각되면서 그는 마치 부활하듯 수면 위로 크게 부상했다. 돌이켜 보면, 그의 오랜 잠류(潛流) 기간은 한국이 거센 폭풍과 천둥을 동반하며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한 숨가쁜 시기였다. 이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의 고답적(高踏的) 인생철학은 얼마간 뒷전으로 밀렸던 게 아닌가 싶다. 또 그 기간은 선생님이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사모님을 보살피시랴 개인적으로 힘드셨던 시간과도 얼추 겹친다. 그러나 그의 연대기(年代記)를 살펴보면 그 시간대에도 김 교수님은 저작활동을 비교적 꾸준히 계속하셨다. 세월이 그로부터 멀어졌을 뿐, 그는 언제나 자신의 제자리를 지키셨다.

  김형석 교수님은 2010년대 이후 다시 각광을 받으시면서 크게 달라진 점은, 그가 예전보다 더 과감히 한국의 현대사와 마주하며 정치적 발언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과거에는 현대인의 고뇌와 개인의 인생사에 크게 관심을 집중했고, 첨예한 세상사와 사회문제, 특히 현실 정치 사안에 대해서는 대체로 입을 다무셨다, 그러나 2010년대 재등장 이후 김 교수님의 관심사는 그 진폭이 넓어졌고, 그 발언 강도도 높아졌다. 그리고 어조도 보다 직설적으로 바뀌었다. 한마디로 그는 이제 거리낌이 없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 높은 연세가 주는 자유로움?  천의모봉(天衣無縫)의 경지? 아니면 그 나름의 역사에 대한 책임의 발로일까?

그는 이와 연관하여 스스로 이렇게 대답한다.

자신을 위한 꿈은 사라졌지만 사회를 위한 꿈은 강해졌다.”

 

                       III.

  장수하는 철학자들이 많다. 외국의 유명 철학자 중에는 아마도 백 살 문턱까지 살았던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이 가장 장수하지 않았나 싶다. 김형석 교수님이 평생 가장 가까운 친구로 여겼던 김태길, 안병욱 교수님도 다 90을 넘기셨다. 김 교수님이 만인의 관심의 표적이 되는 데는 분명 그의 나이가 큰 몫을 한다. 오늘 우리 동시대인으로 안창호 선생의 설교를 직관하고 시인 윤동주와 같은 반 친구로 대화를 나눴던 사람이 누가 있을까. 말하자면 그의 긴 삶의 도정은 살아있는 한국 현대사의 서사이고, 그는 바로 그 산 증인이다. 따라서 그의 글과 말씀 대부분도 그 첫 번째 실마리를 그가 몸소 겪은 생생한 체험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그는 그 체험을 깊은 인문학적인 성찰을 통해 우려내어 한 줄의 교훈적 메시지로 멋지게 담아낸다.

  김형석 교수님은 열 일곱 살 때 안창호 선생의 설교를 들으며 자신의 삶의 목표와 방향을 정했다고 하니, 그의 삶의 철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안창호 선생임이 분명하다. 김형석 사상의 두 개의 축인 애국· 애민 정신과 기독교를 가장 바르게 체화한 이가 바로 안창호 선생이 아닌가.

  아울러 그의 사상의 가장 큰 발원지이자 요람은 단연 기독교다. 그가 수학한 숭실중학교, 일본의 조치대학, 그리고 오래 봉직한 연세대학교가 모두 대표적 기독교 대학이고, 그들 품속에서 김 교수님의 사상이 싹텄고, 자라고  여물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교조와 교리에 매달리거나 언필칭 종교를 앞세우는 고집쟁이, 말쟁이 기독교인이 아니라 진리의 내면화, 그 생활화를 추구하는 속 깊은 종교인이다.  그의 많은 글이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도 인류애와 맞닿는 진정성 짙은 그의 종교적 심성 때문이 아닐까.. 그는 자신의 종교관을 아래와 같이 명료하게 정리하고 있다.

  “종교가 만약에 교리가 되면 인간이 구속된다. 종교는 진리로 내 안에 들어와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자유로워진다.”

 

                              IV.

  나는 17년 전 이곳 속초/고성으로 내려온 후, 줄곧 지인과 제자들에게 학자의 전성기는 60-75세이다라고 말해 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김 교수님도 자주 똑같은 말씀을 하신다. 다만 그는 학자를 인생으로, 또 전성기를 황금기로 표현하신다. 또 재미있는 것은, 한 번은 내 제자 한 사람이 내게 선생님은 80을 넘기셨으니, 그럼 전성기는 지나셨나요?”라고 묻기에 내가 아니네. 아직 건강이 그만하니 당연히 전성기는 연장되고 있다네라고 장난스레 답을 했는데, 김 교수님도 근자에는 살아보니 열매를 맺는 60-90이 가장 소중하다라며 은근히 황금기의 진폭을 앞, 뒤로 늘리신다. 추세로 볼 때, 뒤 시점은 계속 연장될 전망이다.

  아래에 김 교수님의 어록 몇 개를 정리해 본다. 평범한 말씀 같으나 황혼에 이른 내게 크게 공감하는 내용이라 여기 옮긴다. 독자들도 되씹어 보셨으면 한다.

불행한 경험은 손해가 아니다

감정적으로 매마르면 늙어버린다

나이가 들면 기억력은 쇠퇴하지만 사고력은 증진된다

요새는 정신적으로 젊은 내가 신체적으로 늙은 나를 업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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