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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에세이

연세춘추와의 인연(III)

2021. 3. 23. by 현강

                          I.

나는 가끔 <연세춘추>/Annals 주간 시절이, 참으로 힘겹고 어려운 시간이었는데, 왜 강렬하고 아름다운 색깔로 내 뇌리에 자주 떠오를까 의아할 때가 많다. 또 그 때의 고생스러웠던 큰 기억들은 시간과 더불어 점차 퇴색하고, 당시에 소소하고 단편적이었던 한 컷, 한 컷의 즐거웠던 작은 순간들이 덧칠되고 미화되어 밀도 있게, 또 낭만적으로 추억되는지 신기할 때가 많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고통 속에서 겪는 작은 행복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존재인 것 같다.

'연세춘추와의 인연(I)'올 올린 후, 당시 기자였던 안인자 교수가 내게 문자를 보내, “춘추와 함께 한 1년 반은 참으로 제 생의 황금기였어요”라는 술회했다. 나는 “와! 이 친구들도 그 시절을 아름답게 추억 하는구나”라는 생각에 조금 놀라고 크게 기뻤다. 

 

                        II.

<연세춘추>/Annals가 자리한 핀슨 홀에서 윗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평화의 집’ 이라는 카페가 있었다. 간단한 식사도 할 수 있는 이 카페를 당시에 내가 자주 이용했던 기억이다. 한갓지고, 가을이면 주위에 단풍이 아름다웠다. 밖에서 손님이 오셨을 때나, 동료 교수가 나를 찾을 때도, 부산하기 이를 데 없는 편집실을 거쳐야 하는 비좁은 주간실 보다는 이곳이 훨씬 편했다. 무엇보다 학생기자들과 어울리고 토론하기에 무척 좋았다. 이곳에서 학생기자들과 개인 상담도 많이 했던 기억이다.

백양로를 거쳐 굴다리를 지나 신촌 로타리로 가는 중간지점 오른 쪽에 춘추 단골 중국집 '태화루'가 있었다. 여기서 학생기자들과 왁자지껄하면서 급한 대로 짜장면으로 배 채우며 ‘소확행’을 만끽했던 기억도 새롭다.

 

<연세춘추>, Annals 를 통 털어 직원이 한 명 있었다. 나는 그 녀를 ‘미쓰 리’라 부르고, 학생들은 ‘누나’, ‘언니’로 통칭했다. 수상경력까지 있는 꽃꽂이 전문가인 그녀는 가난한 신문사를 재정적으로 잘 꾸렸고, 예닐곱 밑의 학생기자들을 마치 친동생처럼 정성스레 잘 보살폈다. 그녀는 학생기자들에 관해서는 물론 졸업한 기자들의 신상에 대해서도 가히 백과사전적 지식을 지녀, 내겐 가장 믿을 만한 정보소스였다. 내가 주간을 그만 두고 한참 뒤 하루는 미쓰 리가 내게 전화를 걸어, “교수님! 빅 뉴스에요. 강경화가 시집을 간데요”라고 소리쳤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미쓰 리는 연세대 여직원 사이에서 왕언니로 통했고, 후에 인사동에서 큰 꽃집 사장님이 되었다.

 

                          III.

<연세춘추> 주간 1년이 넘어가면서 나는 엄혹한 시대의 중압아래서 더 일하기가 너무 힘들어, 내심 학생들에게는 미안했지만, ‘춘추 탈출’을 결심하고 이를 위해 온갖 궁리를 다 해 보았다. 그러다가 결국 생각해 낸 방안이 외국에서 연구비를 받아 그것을 구실로 명분 있게 주간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마침내 독일로부터 훔볼트 연구비를 받게 되어 1977년 말  1년 예정으로 독일 만하임 대학교로 떠나게 된다. 그런데 학교에 알아보니, 내 연대 경력이 3년 미만이기 때문에 규정상 휴직 기간 중 봉급을 반 밖에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출국을 한 학기 늦춰 3년을 채우고 온전한 봉급을 받아야 할지, 아니면 그냥 떠나야 할지가 초점이었다. 고심 끝에 떠나기로 작정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주간직을 계속 수행하기는 심신이 너무 피폐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로서는 ‘춘추 탈출’이 ‘혹성 탈출’ 만큼 절실했다.

당시 이우주 총장님도 마지못해 허락하시며,

“아니, 몇 달을 더 못 참아? 그러면 나도 더 편하게 보내 줄 수 있잖아?” 하시며 무척 아쉬워 하셨다.

공항에는 많은 학생기자들이 나와 배웅을 해 주었다. 무척이나 미안하고 고마웠다.

 

                      IV.

<연세춘추> 주간을 그만 둔 후에도 나는 한참이나 위궤양으로 고생을 했다. 독일에서 귀국 후 하루는 내 주치의였던 세브란스 소화기 내과의 P교수님을 찾았다. 밖에서 기다리다가 간호사가 내 이름을 호명해서 막 진료실 앞으로 다가서다, 막 방문을 열고 나오는 앞 환자와 마주쳤다. 위(I)에서 언급한 중앙정보부 M이었다. 서로 눈이 부딪히자 둘 다 크게 놀랐다. 해쓱하고 지친 얼굴의 M은 내게 겸연쩍게 눈인사를 하고 황급히 발을 옮겼다.

 

순간 내가 늘 ‘가해자’로 인식하고 미워했던 M도 실은 나와 같은 피해자였다는 생각이 내 뇌리에 스쳤다. 그가 당시 유신체제의 지킴이를 진정 자신의 소명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그악스럽게 수행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분명 그도 빗나간 체제의 희생양임에 틀림없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가슴에 스며드는 동병상련의 진한 아픔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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