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경상북도로 넘어오니 점차 대구에 가까워진다는 생각에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으나 혹한과 과로로 몸은 천근만근이 되었다. 말을 건넬 기력도 없어 그냥 발걸음만 옮겼던 기억이다. 그러다가 조금 뒤처지면 피난대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잰걸음으로 따라가곤 했다. 겨울 해가 짧아 어둠이 일찍 찾아와 아무리 애써 걸어도 하루에 50리를 넘기기 어려웠다.

 

 상주읍은 제법 큰 고을이었다. 옥천 이후 거쳐 온 여느 마을들과는 달리 길도 넓고, 집들도 큼직큼직하고 정돈돼 있어 얼마간 도시풍을 느꼈다. 상주에서 묵은 다음날 새벽, 심기일전을 위해 다른 식구들이 깨기 전에 일찍 일어나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이곳저곳 살폈던 기억이다. 그러면서 훗날 이곳에 한번 들려 오늘 내가 이곳에서 느꼈던 인상을 다시 더듬어 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상주를 다시 찾지 못했다.

 

 상주에서 얼마를 더 가 낙동강에 이르렀다. 거기서 나룻배로 강을 건넜다. 낙동강변 곳곳에서 그 전 해(1950년) 8월의 치열했던 낙동강 전투의 잔해들을 볼 수 있었다. 폭격 맞아 크게 파손된 적군 전차가 모래사장에 비스듬히 누어있었고, 그 주위에 부서진 총기류, 일그러진 군모, 찢긴 군복 조각과 파편들이 즐비하게 널려있어 처절했던 전쟁의 기억을 되살려 주고 있었다.

 

 상주를 떠난 다음, 다음날, 밤늦게 한 마을에 도착했다. 이곳이 어디냐고 물으니 <인동>이라고 했다. 후에 찾아보니 현재는 구미시 (龜尾市) 인동동(仁同洞)이 그곳이다. 허기진 배를 움켜지고 구장댁을 찾았는데, 친절한 주인장은 흔쾌하게 방을 내 주셨다. 구장님 부인이 우리가 저녁을 하지 못했다는 말에 “찬이 없어도 드시겠냐”고 물으시더니 한 밤중에 정성껏 밥상을 차려주셨다. 찬밥을 더운물에 말아, 김치와 콩나물 무침 등으로 저녁을 들었는데, 점심도 건너뛰어 무척이나 배고팠던 터라 밥맛이 정말 꿀맛 같았다. 내가 허겁지겁 밥을 먹는 것을 보시더니, 구장님은 “꽤나 배가 고팠던 모양이네”아며 안쓰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셨다. 돌이켜 보아도 나는 일생 그날 늦저녁만큼 맛있는 식사는 해 본 기억이 없다. 훗날 어떤 분이 내게 자기소개를 하면서 “인동장씨(仁同張氏)입니다”라고 하기에, 내가 “그럼 경북 인동입니까”라고 재차 물으니, 그가 “맞습니다, 제 관향이 그곳 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래서 내가 “그곳 인심이 무척 좋은 곳입니다”라며, 내 피난길 일화를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또 한 번은, 가까운 친구가 뒤늦게 인동최씨(仁同崔氏)임을 알고, 그에게도 그 옛 이야기를 전하며, 친절했던 구장님 부부에 대한 고마운 심정을 토로한 적이 있다.

 

 대구에 가까워지니, 다시 이런저런 우려가 샘솟았다. 대구가 매우 큰 도시라는데 거기 가서 어떻게 아버지를 찾을지 걱정이 돼서 어머니께 여러 차례 물었던 기억이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아버지가 평택에서 혹한에 기차 난간에 매달려 떠나셨는데 무사히 대구까지 가셨는지 그 점도 염려가 되어 영 심사가 편치 않았다.

 

 게다가 피난길이 열흘을 넘기면서  내 몸이 극도로 피폐해지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눈치를 채실까 내색을 하지 않으면서 “이제 다 왔다”고 스스로를 격려하며 걸었다. 하지만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몸은 깊은 수렁에 가라앉는 느낌이었고, 무엇보다 대구 도착 전날부터 배탈이 크게 나서 배를 움켜쥐고 한발 한발을 힘겹게 옮겼다. 어머니가 걱정이 되셔서 “안 되겠다. 하루 쉬고 가자”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막무가내로 “다 왔는데, 무슨 말에요”라며 자못 필사적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평택을 떠난 후 열사흘이 되던 날, 저녁 무렵 대구에서 마침내 그립던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아버지와의 해후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이루어졌다. 아직도 우리를 보고 크게 놀라시던 아버지 모습이 역력하다. 온 가족이 서로 부둥켜안고 한동안 말도 잃은채 눈물범벅이 되도록 울었다. 고진감래(苦盡甘來)가 바로 그것이었다. 가족 재회의 기쁨이 워낙 컸기에 그 동안 피난길의 온갖 고초는 눈 녹듯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II.

 이렇게 1951년 1월 하순, 13일간, 장장 275 Km의 긴 피난길이 끝났다. 따져 보면, 영하 10도가 넘는 혹한에 700리 가까운 거리를 매일 약 50리+ 씩 주파한 셈이다. 그 때 내가 세는 나이로 열 한 살이었는데, 만으로 따지면 9년 4개월의 어린 나이였다. 그 먼 길에 투정 한번 안 부렸으니 지금 생각해도 대견한 일이다.

 

 그래도 우리는 형편이 낳은 편이었다. 어머니 수중에 얼마간 돈과 만약을 위해 준비했던 약간의 금붙이도 있었기에 다른 이들에 비해 그때그때 먹고 자는데 상대적으로 어려움이 적었다. 그런데 별 준비 없이 길을 떠났던 대부분의 피난민들, 특히 가족 중 아픈 이가 있거나 간난아이나 노인과 함께 했던 이들은 아비규환의 피난길에서 하루하루 생명을 부지하는 것 자체가 처절한 투쟁의 연속이었다.

 

 열사흘 동안의 피난길에서 나는 내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그간 가족의 품에서 화초처럼 고이 자라 온 나는 처음으로 야생의 거친 환경에서 들꽃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세상에 눈을 뜰 수 있었다. 무엇보다 삶과 죽음이 맞닿아 있는 극한의 세계를 가까이서 목도하면서,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자면 예기치 못했던 고난과 시련, 절망과 슬픔을 마주하게 된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러면서 어렴프시나마 그 비탄의 여울을 넘어 슬기롭게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 인생의 행로라는 것을 스스로 깨우쳤던 것 같다.

  또 13일 간의 피난길을 통해 나는 괄목할 만 큼 자신감을 배양했다. 어린마음이지만, 이 엄청난 난관을 극복했으니 앞으로 무슨 일이든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이후 나는 큰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1.4 후퇴 때 그 엄혹했던 피난길을 상기하면서 스스로를 채찍질을 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 피난행렬 속에서 내가 얻어낸 가장 큰 수확은 <걸으며 생각하는> 버릇이 아닌가 한다. 나는 700리길을 걸으며 온갖 생각을 다 했던 기억이다. 당장의 힘겨운 순간을 잊기 위해 가볍고, 즐거운 공상도 했지만, 그 보다는 피난행렬을 따라가며 겪었던 갖가지 인상적인 일들을 되새겨 보기도 하고, 앞으로 겪을지 모르는 미지의 시간들을 미리 걱정도 하고, 때로는 미래를 겨냥해 마음의 준비도 해 보았다. 그러면서 이리저리 따져보고 이치를 깊이 파고드는 '궁리(窮理)'하는 버릇을 익혔다.

말하자면 그냥 걷지 않고, 생각하며 걸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7백리 피난길이 그리 힘겹고 참담하지만 않았던 기억이다.

 

                                                   III.

 나는 걷기를 무척 좋아한다. 내가 산을 좋아하는 것도 걷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걸으면서 늘 ‘생각’한다. 이것저것 따져보고 이치를 깊이 캐어 본다. 그래서 생각이 정리가 안 되고 혼란스러우면, 자주 길을 나선다. 가능하면 산이 좋다. 산에서 걸으며 생각의 가닥을 다시 잡고 깊이 파고들면 문제가 조금씩 풀리는 것을 느낄 때가 많다.

 

 나는 이 <걸으며 생각하는> 버릇을, 이곳 시골에 와서 살면서 <일하며 생각하는> 습관으로 넓히려고 애쓰고 있다. 시골에서 농사일을 하다보면, 육체적으로 고달플 때가 많다. 그런데 그냥 몸만 움직이지 않고 동시에 머리로 궁리를 함께 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일도 수월해 지고, 가외의 수확을 걷을 때가 많다. 잡초를 뽑으려고 호미질만 거듭하면 그건 단순노동이다. 그러나 손으로 호미질을 하면서 머리로 생각을 파고들면 그건 동시에 공부가 된다. 나는 시골에 살면서, 여름에 농사에 전념하고 겨울에 글쓰기를 주로 한다. 그런데 겨울에 생산하는 내 글은 여름에 일하면서 열심히 사유했던 것들이 알알이 영근 열매라고 생각한다.

 

 나는 <걸으며 생각하는>, 그리고 <일하며 생각하는> 버릇을 1.4후퇴 피난길에서 그 실마리를 찾는다. 이것은 얼마간 견강부회(牽強附會)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7백리 피난행렬 속에서 만 열 살도 안 된 어린 소년이 나름 치열하게 생각하며 세상 이치를 따져 보고 자신을 키웠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직도 그 열사흘의 피난길이 이후 내 생애에서 <산티에고의 순례길>에 못지 않은 힐링 효과를 가져 왔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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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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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동률 2017.04.30 15:15 Address Modify/Delete Reply

    교수님의 <1.4후퇴와 피난길>...
    몽땅 프린트해서 덩치만 컸지 아직은 어린아이 같은 제 아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소식 여기저기서 듣고 있습니다만..늘 건강하십시오.

                           I.

<대전> 초입에 이르니, 길거리 전신주와 눈에 잘 뜨이는 집벽이나 문짝에 수 없는 알림 글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XX야 우리 대구로 간다>, <XX야 광주에서 만나자>, <XX야 아빠 무사하다> 등의 간단한 메모들이었는데, 피난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족과 헤어진 피난민들이 자신의 소식을 알리는 글들이었다. 많은 이들이 걸음을 멈추고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는 모습이 눈에 뜨였다. 나도 그 글들을 읽어 볼까 어머니께 여쭈어 보았더니, 어머니는 내게,

“그럴 필요 없다. 아버지는 대구로 내려 가셨다. 우리가 그곳으로 가면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잖아도 나는 앞으로 아버지를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 궁금했기에, 나는 어머니께 아버지와 무슨 말씀이 있으셨는지 재차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 만약 우리도 불가피하게 피난길에 나서게 된다면, 대구로 내려가 어디로 연락해야 되는지 아빠와 미리 다 얘기가 되었다. 아무 걱정 말고 그곳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라고 설명하셨다. 그 말씀에 나는 그런대로 마음이 놓였다.

 

대전 시내로 들어갔는데, 도립병원 못미처에 큰 개울이 있었다(나중에 확인하니 ‘대전천’이었다). 다리가 끊어져서 큰 돌을 띠엄띠엄 놓아 징검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돌들 사이가 너무 넓어 아이들은 펄쩍 뛰어야 겨우 앞으로 갈 수 있었다. 내 딴에는 무척 조심했는데도 개울을 거의 다 건널 즈음, 아차 하는 순간에 발을 잘못 디뎌 살엄음이 얼은 개울물에 빠지고 말았다. 차디찬 개울물이 허리춤까지 오르니 솜을 두어 지은 핫바지에 물이 차올라 무겁고 온몸이 얼어붙는 듯 했다. 별것 아닌 듯 헛웃음을 날렸지만, 정말 울고 싶었다.

 

대전을 빠져 나갈 무렵, 피난민 대열의 앞쪽이 웅성웅성하며 자꾸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웬일인가 알아보니, 큰 길목에서 군인들이 너무 많은 피난민들이 영남으로 내려간다고, 강제로 호남으로 보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어머니 얼굴이 금새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는 “안 되겠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대구로 가야한다“며, 우리들을 데리고 큰 흐름에서 옆으로 빠져 나왔다.

그러나 딱히 무슨 대책이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허망한 마음으로 한 동안 서 있는데,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피난민 대열 속에 친숙한 아저씨 얼굴이 보였다. 삼선교 가까이에서 잡화상을 하시는 고씨 아저씨인데, 우리 할아버지를 ‘어르신, 어르신’하고 따르던 분이었다. 나는 반가운 김에 ‘아저씨’하고 그 분께 달려갔다. 고씨 아저씨는 무슨 깃발을 들고 계셨는데, 거기에 무언가 관변 단체 이름이 적혀 있던 것 같았고, 그 뒤에 약 20명 가량 뒤를 따르는 청년들이 있었다. 아저씨는 그 단체의 대장으로 그들을 이끌고 대구로 가신다는 얘기였다. 우리 처지를 말씀드렸더니 어머니께, “걱정마십시오. 그냥 우리 대열에 끼시면 됩니다. 우리 가족이라고 얘기하면 보내 줄 것입니다”라고 별일 아니라는 듯 쉽게 말씀하셨다. 영남, 호남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에 이르렀다. 마치 큰 물길을 호남방향으로 튼 듯, 대부분의 피난민들이 그 쪽으로 가고 있었다. 나는 무척이나 긴장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고씨 아저씨가 휘적휘적 군인들에게 다가가 뭐라고 말씀하시니, 군인 한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호루라기를 호기있게 휙 불면서 우리 쪽을 영남 방향으로 큰 손짓을 했다. 그 바람에 우리는 그 대열에 묻혀 어렵지 않게 영남행을 할 수 있었다. 철체절명의 순간에 천우신조로 큰 고비를 넘긴 것이다.

 

                                      II.

<옥천>에서 우리는 오래된 개신교회 목사관에 숙박했다. 방이 정갈했고 아늑했다. 작고 아름다운 풍금이 있었고, 선반위에는 성경이 놓여 있었다. 나는 그 방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그동안 나를 옥죄던 전쟁과 피난이라는 살벌하고 긴박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마치 평화롭고 따스한 보금자리를 찾은 느낌을 받았다. 그날 밤, 천천히 잠에 빠져 들어가면서 부디 이 행복감이 영원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다. 그날 밤 나는 피난길에 나선 후 처음으로 모든 것을 잊고 편안한 잠을 잦다. 내가 훗날 독일어를 배우다가 ‘gemuetlich'(안락한, 아늑한, 기분이 좋은)라는 어휘를 처음 접할 때, 불현듯 그날 밤 내가 그 방에서 느꼈던 포근하고 안락한 정취를 연상했다.

 

그런데 비교적 또렷했던 내 기억이 충청북도에서 길을 잃고 헤맨다. <옥천>을 떠나 경상북도로 넘어갔는데, 그 경로가 확실치 않다. 분명한 것은 경북 <상주>로 갔다는 것이다. 피난민 대열을 따라 그 흐름대로 발을 옮겼고, 그 길목에 이렇다한 도시나 큰 마을이 없었던 것이 이유가 되겠지만, 그 행로가 내 기억의 창고에서 가장 희미하고 불분명한 부분이다. 그 나마 어렴풋이 내가 기억하는 것은 한 겨울의 칼바람을 맞으며, 강(혹은 큰 개울)을 따라 황량한 시골길을 마냥 걸었던 것, 그러다가 한 밤중에 광산을 끼고 높은 고개)를 넘었는데, 그 고개가 바로 경북으로 넘어가는 도계(道界)라는 얘기를 들었던 일 등이다. 그 날 밤 천신만고 끝에 고개를 넘어 작은 마을에 잘 곳을 마련했는데, 단지 산 하나를 넘었는데 집 주인 말투가 완전히 달라 놀랐다. 비교적 느리고 부드러웠던 충청도 사투리가 불시에 투박하고 억양이 뚜렷한 경상도 말씨로 바뀐 것이다.

나는 그동안 <옥천>에서 <상주>까지의 구체적 행로가 무척 궁금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생존해 계실 때, 한번 여쭤보았더니 어머니도 의 기억 창고도 그 부분에 관해서는 내 것 만큼 빈약했다. 내가 “내 기억에는 그 광산이 흑연광산이었던 것 같은데”라고 말씀드렸더니 “왜 생뚱맞게 흑연광산이야. 석탄광산이었던 것 같은데”라고 말씀하셨다. 지도로 살펴보니 옥천에서 상주로 넘어가는 길목은 옥천군, 영동군, 보은군, 괴산군 등 여러 곳이었다. 그런데 위쪽으로 보은군, 괴산군까지 올라갔을 것 같지는 않아 아마도 옥천군이나 영동군 어디를 통해 도계를 넘어갔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옛 기억을 더듬고 그 희미한 기억에 합당한 경로를 찾아 나섰다. ‘구글’을 통해 이런 저런 자료를 찾다가, 옥천지역 주간신문인 ‘옥천신문’에서 ‘옥천군 청산면 명티리’에 대한 기사를 발견했다. 내용인 즉, 그곳은 옥천의 동쪽 땅끝마을로 한때는 흑연광산으로 번성했으나 1970년대 이후 사양길로 들어가 90년대에 이르러 폐광이 된 지역인데, 현재는 10여 가구만 남았다는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 그곳에 흑연광산이 있었다는 사실에 필(feel)이 꽂혀, ‘옥천문화원’의 자료와 옥천군 지도를 통해 그곳에 관한 정보를 탐색했다. 그랬더니 여러 가지 점에서 내 기억과 대체로 맞아 떨어졌다. 옥천읍에서 명티리로 오는 길가에 큰 개울이 있고, 명티리에서 팔음산(해발 772m) 동쪽 능선을 타고 도계를 넘으면 상주시 화동면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팔음산 자락에 이었던 흑연광산의 이름이 ‘월명(月明)광산’이었다는 것이다. 백 퍼센트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그 추운 겨울날 한 밤중에 넘었던 그 높은 고개가 바로 그곳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다면 옥천읍에서 청산면 명티리를 거쳐 상주군(현재 상주시) 화동명 양지리로 넘어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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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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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1월 초의 추위는 살을 에는 듯 매서웠다. 많은 수의 남녀노소가 짐 보따리와 함께 떼 지어 움직이니 피난대열은 혼잡스럽기 그지없었다. 그 북새통에 아이들의 울음소리, 한발이라도 빨리 가려다 서로 얽혀 밀려 넘어지며 내지르는 고함소리, 가족을 잃고 비탄에 젖어 울부짖는 소리가 진동했다. 한마디로 아비규환이었다.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오직 ‘살겠다는’ 의지하나로 큰 물결을 이루며 남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평택>에서 <천안>까지는 주로 철로를 따라 갔던 기억이다. <성환> 가까이 갔을 때, 멀리 철로 주변에 시체가 두 구(具)가 나동그라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 눈에 기차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어머니가 황급히 손을 뻗혀 내 눈을 가리셨다. 그러나 그 순간 내 뇌리에 마지막 열차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자신을 묶으셨던 아버지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그 곳으로 달려갔다. 다행이랄까 모르는 사람들의 주검이었다. 기차에서 추락하면서 머리를 크게 다친 듯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고, 이미 시신을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그 때 나는 난생 처음 사람이 죽은 모습을 보았다. 무척 충격적이었다. 이후 철도 연변에 쓰러져 있는 시신들을 자주 보았다. 기차 지붕에 웅크리고 있거나 난간에 매달려 졸다가 기차가 한 밤중에 터널을 지날 때 부딪혀 떨어진 경우가 많았다. 매번 어머니가 말리셨지만, 나는 ‘만(萬)에 하나’ 어버지가 일을 당하셨으면, 외아들인 내가 시신을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에 현장으로 달려가곤 했다. 그러면서 내 딴에는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겼던 것 같다.

 

그러나 정작 경악한 일은 천안 역 앞에서 경험했다. 하행 군용기차 뒤편에 미군 탱크가 두 대 실려 있었는데, 피난민들이 벌 떼처럼 탱크로 기어오르다가 장전되어 있던 기관총을 건드려 총알이 마구 난사가 된 것이다. 순식간에 피난민 서너 명이 쓰러지고 탱크 주변은 피범벅이 되었다. 미군 헌병이 소리치며 말리는 데도 막무가내로 위험을 무릅쓰고 탱크로 오르던 피난민들이 참혹한 죽음을 당한 것이었다. 비명소리, 구호를 외치는 소리, 놀라 울부짖는 소리로 주위는 온통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사 장면을 나는 불과 3-4m 떨어진 곳에서 생생하게 보았다. 엄청난 충격으로 나는 그 순간 온 몸이 얼어붙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서 나는 사람의 생사가 이렇게 갈리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후 한 동안 그 피빛의 적나라한 장면이 눈에 자주 아른거려 나를 괴롭혔다.

 

                                      II

<천안>을 지나면서 그동안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공산군의 기세가 크게  꺾이었고, 전선(戰線)도 <오산> 근처에서 교착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에 피난민들은 한숨을 돌렸고 정서적으로도 안정을 되찾았다. 한 겨울이라 일찍 날이 어두워졌다. 하루 걸러 눈도 오니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날이 저물기 시작하면 다른 이들 보다 일찍 발걸음을 멈추고 잘 곳을 찾으셨다. 대체로 수소문해서 동네 구장이나 유지집을 찾아 사정을 얘기하고 저녁과 방값으로 비교적 넉넉하게 얼마를 건네곤 하셨다. 어떤 집에서는 안방을 내 주는 집도 있었다. 그래서 피난민치고는 비교적 잠자리는 괜찮았던 기억이다. 나는 따스한 방에서 지친 몸을 녹이면 그냥 잠에 빠져 들어갔다.

 

<전의>에서 어느 한의원 댁에서 잤다. 고풍어린 옛집이었는데 주인인 한의사는 그 동네 유지였다. 다음날 아침에 어머니가 주인께 부탁드릴 말씀이 있다고 해서 나도 어머니를 따라 그 댁 안방으로 들어 갔다. 그런데 왠일인지 어머니는 그 예의 싱가 미싱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계셨다. 의아했지만 여쭤보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에 앞서 형제로 보이는 두 소년이 미리 와서 주인에게 막 무슨 얘기를 꺼내고 있었다. 들어 보니 그들은  피난길에서 가족을 잃은 형제인데, 그간 갖은 고초를 겪으며 이곳까지 와서 어제 밤에는 이 집 머슴의 호의로 머슴방에서 끼어 잤다는 것이다. 이어 매우 영민해 보이는 윗 형이 진지한 어조로 아래와 같이 얘기했다. 얘기가 조리가 있었고, 목소리는 낭랑하고 당찬 느낌을 주었다.

 

 “저는 배재중학 1학년이고, 이 아이는 국민학교 5학년인 제 동생입니다. 저희들이 힘겹게 여기까지 왔습니다만, 이제 너무 지치고 수중에 돈 한 푼 없기 때문에 더 이상 무리를 하다가는 길에서 큰 일을 당할 것 같습니다. 어려우시겠지만, 어른께서 저희들을 얼마동안 거두어 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저는 건강해서 머슴 한명 몫은 넉넉히 할 수 있습니다. 저 혼자라면 어떻게 해 보겠는데, 이 추위에 저 어린 놈 굶는 꼴은 더 이상 못 보겠습니다. 도와 주시면 평생은인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그 형이 무척 존경스러웠다. 나보다 불과 몇 살 위인데, 어쩌면 저렇게 의젓할까. 그리고 어른스러울까. 그간 응석받이로 살았던 내가 무척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이집 주인께서 이들 형제를 받아 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으로 손을 웅켜잡고 그 장면을 지켜 보았다. 간절하게 기도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주인은 얼마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냉랭하게 대답했다.

 

“ 자네들 사정은 무척 딱하지만 내가 도울 형편이 못되네. 우리도 피난을 가야 할지 그냥 여기서 버텨야 할 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고, 우리 식솔도 많은데 거기에 두 식구를 더 보탠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네. 달리 방법을 강구해 보게 나.”

 

그 말을 듣고, 그 형은 잠시 머믓하였으나 크게 흔들리지 않은 표정으로 “잘 알겠습니다. 크게 결례를 했습니다”라며 큰 절을 하고 동생을 데리고 방을 나갔다. 나는 그 차가운 한의사가 무척이나 원망스러웠다. 가슴이 메어지는 듯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어 주인장이 어머니께 얼굴을 돌리고, “어제 잘 주무셨습니까. 그런데 뭐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라고 물었다. 어머니는 ”네 저도 긴한 청이 하나 있습니다"라고 운을 띠우시더니. "제가 피난길에 애지중지하던 싱거 미싱을 갖고 떠났어요. 새것이에요. 그런데 이게 너무 무거워서 큰 짐이 되네요. 어려우시겠지만 전쟁이 한 고비 넘길 때까지 이 것을 댁에 맡기고 떠났으면 하는데,  받아주실 수 있으실지요.“ 라고 말씀 하셨다. 그러면서 보자기를 풀어 재봉틀은 꺼내 보였다. 반짝 반짝 빛나는 신형 싱거 미싱의 미끈한 모습이 드러났다. 당시 시골에서는 쉽게 만나기 어려운 명품이었다. 그 순간 나는 그 한의사의 얼굴에 환하게 희색이 감도는 것을 보았다.

한의사는 곧 ”네, 물론이지요. 그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요. 제가 고이 잘 간수하겠습니다“라고 흔쾌하게 수락했다.

 

그 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아끼던 비싼 미싱을 이 무정한 한의사에게 통째로 맡긴다니 도대체 말이 되나. 그런데 어머니는 한의사의 대답을 듣자 공손히 고맙다고 말씀하시고는, 다음 순간 빠른 손놀림으로 미싱의 몸통만 남겨 놓고 그와 연결된 몇몇 부품과 연결나사들을 잽싸게 뽑으시는 게 아닌가. 이미 손을 보아 느슨하게 만들어 놓으셨던지 순식간에 일을 마치시고, 그것들을 미리 준비한 자그마한 꽃 주머니에 차곡차곡 담으셨다. 그리고 몸통만 한의사에게 건넸다. 나는 그 때 그 한의사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어머니의 슬기에 내심 감탄을 했다.

 

후일담이지만, 예의 그 싱거 미싱은 몇 달 뒤 서울이 수복되고 전선이 안정된 후, 아버지가 그곳에 들려 되찾으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우리가 무척이나 궁핍했던 1952년 대구 피난시절 바로 그 미싱으로 삯바느질을 하셔서 우리 가족 생계의 큰 부분을 책임지셨다.

 

그 날 나는 피난 행열을 따라 길을 가면서 그 형제들 걱정에 시종 우울했다. 어머니는 눈치를 채신 듯 내게 말씀하셨다.

"너무 걱정마라. 너 그 배재중학 형의 눈빛을 보았지. 그 의지와 용기면 어떤 어려움도 잘 헤쳐 나갈 것이다."

어머니의 그 말씀이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그래서 "그렇지, 엄마, 나도 그렇게 생각해" 라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면서  그들 형제를 위해 진심으로 하느님께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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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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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한 겨울 이맘때면, 지금부터 60여 년 전, 1951년 1. 4 후퇴 때 내가 겪었던 고단한 피난길이 자주 생각난다. 열 한 살짜리 소년이 체험한 그 해 겨울은 무척 혹독했다. 그러나 그 때 그 피난길은 힘겹고 고통스러웠던 아픈 추억 보다는, 철없던 어린 소년의 자의식(自意識)을 크게 키워 준 매우 값지고, 소중한 기억으로 내 뇌리에 남아 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1950년 12월 중순부터 이듬해 1월에 이르기 까지 약 한 달여의 경과가 내 머리에 아직도 비교적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는 일이 있다. 피난길 셋째 날, 충남 소정리에서 나는 지친 다리를 끌고 피난 대열을 따라 가다가, 문득 “먼 훗날 내가 이 극한의 체험을 잊지 않고 되새겨 보려면 일기는 못써도 간단한 메모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나름 역사기록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아니, 그럴 필요가 없지. 어떻게 내가 평생 이 처절한 고난의 역사를 잊을 수가 있을까? 결코 그럴 리 없지” 하며, 단호하게 그 생각을 떨쳐 버렸다. 그런데 군데군데 불분명한 대목들이 있지만, 당시 내가 겪은 일들 큰 줄거리가 아직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그 때 그 어린 소년이 판단이 크게 빗나가지 않은 것 같다.

 

다수의 정치학자들은 시민들의 의식과 삶에 가장 큰 충격을 주는 사건으로 전쟁과 경제공황을 꼽는다. 자의식의 성장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나의 청소년기도 한국전쟁, 그것도 1.4 후퇴를 분수령으로 전, 후로 갈린다. 서울에서 중산층 가정의 삼대독자 외아들로 태어난 나는 열 살까지 세상 물정 모르고 철없는 응석받이로 자랐다. 그러나 불시에 찾아 온 전쟁의 격랑과 그것이 몰고 온 치열한 실존적 체험이 무척이나 짧은 기간 동안에 나를 내적으로 크게 키웠다. 엄동설한에 생사를 넘나드는 피난대열 속에서 나는 매일 매일 애어른으로 바뀌어 갔다. 그 때 무엇보다 깊이 생각하는 버릇을 익혔던 것 같다. 늘 타인의 도움을 기다리던 화초 같던 소년이 나이답지 않게 세상 이치를 따져 보고, 고민하고, 스스로 결정하는 자율적인 소년으로 크게 변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1951년 1월의 피난길은 ‘ 참 나’를 찾아가는 고행의 순례길이었다. 아래에서 몇 번에 나누어 그 과정을 살펴본다.

 

                                       II.

1950년 12월 중순, 서울은 다시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승승장구, 북진을 계속하던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대량 개입으로 전황이 역전, 급기야 12월 4일에는 평양을 철수했고, 전선은 38선을 향해 밀려 내려오고 있었다. 동부전선에서 전설적인 흥남철수가 이루어진 것이 12월 15일 이었다. 북한군의 6.25 남침으로 세 달 가까이 공산치하에서 질곡의 세월을 보냈던 서울 시민들은 그 아픈 기억을 되살리며 너나 할 것 없이 피난길에 나설 채비를 시작했다. 이후 서울은 급속도로 비어갔다.

 

12월 20일로 기억한다. 아버지가 우리 식구들에게 구체적으로 피난 계획을 말씀 하셨다. 일단 엄마와 누나와 나는 평택 외가로, 그리고 증조할아버지와 조부모님, 그리고 네 명의 고모들은 아버님 고향인 용인으로 피난을 가야겠다는 말씀이셨다. 그리고 전황을 살펴보며, 이후의 행동을 결정하자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서울에 좀 더 머무르시다가 정 상황이 악화되면 그 때 서울을 떠나시겠다는 생각이셨다. 다음 날, 우리세 식구는 평택으로 떠났고, 곧 이어 아버지가 당시 90세의 증조할아버지를 비롯한 나머지 식구들을 용인으로 모셨다.

1950년 12월 중반부터 이듬해 1951년 1월 4일 서울이 북한군에게 함락되기 까지 불과 2주 남짓의 짧은 기간 동안에 서울은 완전히 공동화(空洞化) 되었다. 서울에 남은 것은 몸을 가누지 못하는 노인들과 환자들, 그리고 그 가족 극소수뿐이었다. 그 몇몇 안 되는 사람들 중에 작가 박완서가 포함되고 있었다. 그녀의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속편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를 보면, 텅 빈 서울과 그 안에서의 극한의 소외와 처절한 삶이 기록되어 있다. 이 소설들은 하루아침에 140만명 (1949년 통계)의 거대 인구가 썰물처럼 빠져 나간 허허한 대도시 속에 초개(草芥)처럼 남겨진 주변인들의 황폐한 생활사(生活史)에 대한 사실적, 구체적 기술이라는 점에서 매우 소중한 자료다.

 

                                                   II.

평택 외가에서 년 말을 맞았다. 외가라고 하지만 이미 외할아버지, 할머니는 타계하셨고, 외당숙을 비롯해서 외척 몇 분이 계셨다. 평택 읍내에서 한 20분 떨어진 외당숙 댁에 머물렀는데, 나는 아침만 먹으면 부리나케 평택역으로 달려가서 역전에서 서성거렸다. 전황도 궁금했고, 혹시 아버지가 내려오실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그랬던 것 같다. 역전에서 들은 바로는, 중공군의 ‘신정공세’로 유엔군의 서울 철수가 시간문제라는 것이었다. 불안감이 엄습했고 무엇보다 아버지의 안위가 크게 걱정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 1951년 새해를 맞았다. 나는 11살이 되었다. 마음은 초조하고 답답하기 그지없었지만, 어머니께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내색은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늘 그렇듯이 의연하셨다. 가사 외에 시간에는 차분하게 묵주신공을 열심히 드리면서, “걱정마라, 하느님이 도와주실 게다”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돌아보면 그 때 어머니가 30대 중반을 조금 넘기신 나이이셨는데, 어찌 그리 어른스러우셨는지 지금 생각해도 경탄스러울 뿐이다. 이미 그 때 어머니 나이의 두 배 이상을 살아 온 나는 아직 그 반도 못 따라가니 부끄러울 뿐이다.

1월 3일 밤으로 기억된다. 아버지께서 크게 지친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뒤늦게 서울을 빠져 나오셨다고 말씀하시면서, 정통한 소식에 따르면 유엔군의 철통 저지선이 오산-원주 선에 구축되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다음 날(1월 4일) 서울이 공산군에 의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튿날 아버지는 어머니와 한 동안 심각한 표정으로 말씀을 나누시더니. 전황이 위중하니 형편상 아버지 혼자라도 미리 남쪽으로 내려가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두 분 표정이 너무 단호 하셔서 나와 누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날 밤 늦은 시간에 아버지는 평택역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마지막 열차에 오르셨다. 평택역에 잠시 기착한 열차 주변은 한마디로 악머구리 끓듯 했다. 이미 기차 안은 피난민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는 초만원이었다. 기차지붕 위에도 많은 사람들이 촘촘히 웅크리고 앉았는데, 얼핏 보기에는 서로 엉켜있는 듯 했다. 김환기 화백의 1951년 작 <피난열차>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처절하고 훨씬 리얼한 장면이었다. 아버지는 기차 안으로의 진입이 불가능 하자, 이미 두 사람이 엉거주춤 서있는 기차 난간에 몸을 바짝 밀어 넣으며, 밖을 향해 서신 채로 떨어지지 않게 자신의 몸을 굵은 줄로 단단히 묶으셨다. 곡예 하듯 아슬아슬한 모습이었다. 그리고는 걱정 말라시며 우리들에게 작별을 고하셨다. 그 아찔한 모습을 보며 나는 울음이 북받쳤다. 멀리 점점 작아지는 열차의 난간에서 아버지는 우리에게 계속 손을 흔드셨다.

자정 가까운 시간, 살을 에는 추위에 집으로 돌아오면서 우리 세 식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통곡하고 싶은 심경이었지만,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애써 아픔을 삼켰다.

 

이틀 뒤 1월 7일 마침내 수원도 적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전선이 남하하면서 평택까지 포성이 은은히 들려왔다. 어머니 얼굴에 짙은 불안의 그림자가 드리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1월 9일, 공산군이 오산 가까이까지 내려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날 아침 어머니는 나와 누나에게 “도저히 안 되겠다. 우리도 피난을 떠나자”라고 결연하게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서둘러 채비를 하셨다. 내게는 두툼한 내복과 누빈 솜바지 저고리를 입히시고 방한모까지 씌우셨다. 피난 보따리를 챙기시는 데, 거기에는 평소에 어머니가 애지중지하시던 ‘싱거 재봉틀’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아니 이 무거운 것을 어떻게 가져가, 말도 안 돼”하고 이의를 제기했다. 그랬더니 어머니는, “피난 가서 무얼 먹고 사니, 바느질이라도 해야지”하시며 막무가내로 싱거 미싱을 단단히 묶으시고 멜빵에 이으셨다. 어머니는 금붙이와 옷가지 등을 고루 챙기시고, 내가 질 작은 등짐도 마련하셨다. 워낙 약골인 누나에게는 몸만 따라 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우리 세 식구가 막 떠나려는데, 외당숙께서 16살짜리 자신의 아들도 함께 데리고 가 달라고 어머니께 간곡하게 부탁을 하셨다. 말씀인 즉, 그 형(내 외 육촌)이 속은 어린애인데, 허우대는 커서 만약에 공산군이 여기까지 내려오면 군에 끌려갈게 불 보듯 뻔하니 부디 함께 가라는 것이었다. 나나는 내심 크게 반겼다. 매일 나와 친구처럼 어울리던 착한 형과 함께라면 피난길에서 큰 의지가 될 것 같았다. 싱거 미싱은 그 형이 메었고, 그 바람에 어머니의 짐이 많이 가벼워 졌다.

 

마지막 기차도 떠난 평택역은 황량했다. 그런데 마침 역 한 구석에 레일 위로 석탄 등을 나르는 작은 수례를 발견했다. 우리는 이 수례위에 짐을 싣고 밀어 보았더니, 웬걸 힘 안 드리고 잘 미끄러져갔다. 그렇게 수례를 밀며 철도를 따라 얼마를 갔다. 그러나 몇 Km 못가 철교를 만나니 더 이상 전진이 너무 위험했다. 다시 짐을 나누어지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피난대열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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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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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나는 대학에서 정치외교학과를 다녔다. 왜 딱히 그 전공을 택했는지는 조금 불분명하다. 그래도 내가 어려서부터 정치현상에 대해 관심이 컸던 게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한다. 중학교 1 학년부터 동아일보의 게재되었던 백광하의 명 정치단평 <단상단하(壇上壇下)>에 빠져 밥은 걸러도 그 칼럼은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정치라는 영역은 내 공부 대상이었을 뿐, 내가 직접 정치를 해 보겠다는 생각은 그 때나, 그 이후나 추호도 없었다. 내성적 성격이고 권력추구나 승부사 기질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내 스스로 정치라는 거칠고 혹독한 바닥에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단지 일찍부터 정치가 우리의 삶에서 무척 중요한 영역이라는 점을 절감했고, 그것을 관찰하고 판단하고 예측하는 일이 그리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대학 2학년 때 4.19 혁명을, 그리고 이듬해에 5.16을 겪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솟구쳤던 기대와 열망이 순시 간에 무너져 엄청난 좌절과 상실감에 휩싸였다. 그런 가운데 장준하와 함석헌의 <사상계>가 유일한 위안이자 희망의 푯대였다. 시대는 암울했지만, 졸업이 가까워지면서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거창한 꿈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그냥 어려운 현실 속에서 내가 해야 할 몫이 무엇인가를 모색하는 소박한 심정이었다.

 

                                  II.

  큰 방향은 비교적 일찍 정해졌다. 내가 워낙 다른 재주가 없고, 그나마 곧잘 하는 것이 공부와 글쓰기이니 앞으로 내가 할 일도 이 동네를 크게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했다. 다음, 내가 돈을 벌고 사적 이익을 챙기는 일 보다는 공공성을 띤 일, 명분이 있는 일을 좋아 하니 사적 영역보다는 공적 부문에서 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도 함께 했다. 그러면서 가능하면 내가 전공했던 정치학이 쓰임세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염두에 두었다.

 

  그렇게 방향을 정하니, 내가 갈 길은 학자, 언론인, 그리고 공직자 세 갈래였다. 셋 어느 것도 내 적성에 맞는 듯싶었고, 내심 얼마간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또 이들 일들이 모두 나름 가치 있는 일,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대학 은사 중 서석순 교수님이 계셨는데,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함께 하셨다. 학자이면서, 언론을 통해 사회적 기여를 하시는 그 분의 모습이 무척 근사해 보였다.

 

  그런데 학자의 길은 너무 멀어 보였다. 또 오랜 뒷받침이 필요한데 그게 부담스러웠다. 또 공직자가 되려면 어쩔 수 없이 고시를 거쳐야 되는 데, 고등고시 제도가 내가 대학 4학년 때 1962년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두어 해 후에 새로운 형태로 다시 시작한다는데 그걸 겨냥해 장기전을 편다는 게 무모해 보였다. 그래서 일단 신문기자가 되겠다는 작정을 했다. 대학 다니면서 한때 <연세춘추> 기자를 했던 것이 내가 이쪽으로 생각을 굳히는데 얼마간 작용을 했던 것 같다.

 

  언론사 시험을 치려면, ‘군필’이 필수였다. 때가 5.16 직후라 군대를 다녀오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모두가 군대를 빨리 가려고 애썼다. 그 때문에 신체검사가 꽤 까다로웠다. 그런데 눈이 나빠 신체검사에서 계속 떨어졌다. 내가 당시에는 희귀한 3대 독자라 6개월 복무면 군대를 필할 수 있는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응시 자격이 안 되어 언론사 시험은 포기했다. 무척 아쉬웠다. 궁리 끝에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 진학했다. 일단 거기서 학업을 이어 가면서 다시 내가 나아갈 길을 차분히 탐색해 보자는 심산이었다.

 

  행정대학원에서 두 학기를 마칠 무렵, 나는 공부 쪽으로 내 갈 길을 확정했다. 당시 서울대학교가 미국의 미네소타 대학교와 협약을 맺어 미네소타 대학으로부터 도서지원을 받았는데, 신간 사회과학 도서들 대부분이 행정대학원으로 왔다. 당시 도서관장 A 교수님의 조교를 하던 나는 정치학, 행정학, 사회학 분야의 최신 명저들을 매우 일찍, 손쉽게, 가까이 접할 수 있었다. 생전 처음 교육과정과 관계없이 내 스스로 즐겨서 자율적으로 공부하는 방식을 익혔다. 밤 새워 책을 읽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지적 충만감에 빠졌다. 그러면서 멀고 힘겨워도 이 길을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III.

  유럽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대학에 발을 붙이고 35여 년 간 교수로 재직했다.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이 무척이나 즐거웠고 행복했다. <일>하는 자체가 내게는 늘 <놀이>였다. 내가 재밌게 놀이를 하는데, 월급도 주고 세상에서 교수라고 대접도 해 주니 그 보다 좋은 직업이 있을까. 글에 밀려 밤샘도 많이 했지만, 힘들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우수한 제자를 키우는 일에도 큰 보람을 느꼈다. 정치학과 행정학을 넘나들며, 지적 관심을 현대공산주의 연구, 비교정책, 사회정책 등으로 넓혔다.

 

  유신시대, 그 어둡고 긴 터널을 거치는 동안, 또 5공 시절, 그리고 1987년 시민혁명 이후 까지 약 20년간 유수한 신문, 잡지 등에 수많은 정치평론을 썼다. 거듭되는 혼돈과 격랑 속에서 시대가 요구하는 발언을 하는 것이 내 사회적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대체로 비판적 논조였으나, 극단에 치우치거나 <진영논리>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면서 대학, 학회, 시민단체 등이 발간하는 신문이나 잡지, 뉴스레터를 직접 창간하거나 편집하는 일에도 꽤나 많이 관여했다. 그러다가 2003년에는 <중도개혁>의 기치 아래 사회지도층 인사 650명과 더불어 인터넷 신문 <업 코리아>를 창간하고 그 대표직을 맡았다. 끝내 좌초했으나 후회하지는 않았다. 돌이켜 보면 한 때 언론인이 되고자 했던 젊은 날의 열망과 바람이 내 내면 속에 잠류했다가 이렇게 여러 갈래로 용출한 것이 아닌가 싶다.

 

  문민정부가 출범한 후 1995년 말 교육부장관으로 부름을 받았다. 한 때 막연히 공직을 장래의 직업으로 생각해 본 적은 있었으나실 정치세계에는 근접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관직 발탁은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이후 참여정부에서 또 한 번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직을 맡았다. 국정에 두 번, 참여하면서 그간 이론적으로 연마했던 내 전공 지식과 언론에 투사했던 개혁의지를 국정에 실천적으로 접목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절박한 현안 과제의 수행 못지않게, 개혁의 관점에서 중. 장기적 정책기획을 하는 일에 큰 힘을 쏟았다. 특히 새로운 블루 오션으로 교육복지 분야를 개척하고, 교육정보화에 박차를 가하는 등, 정책쇄신에 큰 정성을 기울였다. 그간 학자로서 또 평론가로서 학습, 연마하고 고뇌하며 축적했던 내 모든 열정과 능력을 나랏일에 쏟았다. 벅차고 힘겨웠지만 몸과 마음을 후회 없이 불살랐던 기간이었다.

 

                                IV.

  얼마 전 나를 찾아 온 초로(初老)의 한 제자가 “30여 년 전 강의 시간에, 선생님께서 학자, 언론인, 공직자가 내가 대학 때 겨냥했던 세 가지 직업이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생각해 보니, 선생님은 결국 세 가지를 다 이루신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아!’ 하며 잠시 숨을 멈췄다. 그가 일깨워 주지 않았다면, 20대의 소박한 꿈과 이후의 내 생애를 연계해서 생각하지 못했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늘 사람의 생애는 흩어져 있는 낱낱의 기록이거나 성쇠(盛衰)의 과정이 아니라, 꿈을 향해 진행되는 축적과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나의 지난 삶의 역사가 한낱 빛바랜 기억들의 조각들이 아니라, 서로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누적적으로 진행되어 오늘의 나를 만들고, 또 앞으로의 내 여생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믿고 싶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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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장년’ 전병재 교수님

 

 

I.

전병재 교수님은 나와 30년 가까이 같은 대학교에서 함께 교수로 재직했던 분이다. 입학으로 따져 연세대학교 정법대학 세 해 선배로 여러 해 여의도에서 이웃으로 지냈고 전공도 전 교수님이 사회학, 내가 행정학이니 비교적 가까운 이웃 학문이어서 학문적으로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눠왔다. 국제회의에도 함께 참석했던 인연도 있다. 이런 저런 연고로 전 선배와는 이른바 ‘절친’은 아니지만, 실로 오랜 포도주처럼 곰삭은 사이이다. 내 머리에 떠오르는 전 교수님의 영상은 아직도 30년 전 함께 자카르타 행 비행기에 오르던 장년의 모습 그대로인데, 그가 벌써 8순이라니 정말 믿기지 않는다. 많은 이가 세월 따라 변했지만 그는 정말 한결같은 분이다. 가장 최근에 만난 것이 작년 가을쯤이었는데, 아직도 초로(初老)의 모습을 지닌 옛 선비풍의 단아한 풍모, 믿음직한 언행, 조용한 미소도 그렇거니와, 균형과 절제의 미덕을 갖춘 사고방식이나, 본질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도 옛날 그대로다.

 

II.

전병재 선배를 생각하면 내 입가에 웃음이 감돈다. 비교적 일찍 도미하여 누구보다 빨리 서양문물에 접하고 현대학문을 익힌 분인데, 서양사람 흉내 보다는 옛 선비들이 즐겨했던 서(書), 예(禮), 악(樂), 사(射)를 생활 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는 특이한 분이다. 학자로서 예절 바르고, 서예를 익히며 예스러운 시조와 창, 퉁소 등을 즐기는 것에 성이 차지 않아 활쏘기까지 하는 분이다. 그가 사직동 황학정을 자주 찾아 국궁을 즐겼던 것을 보면 문약한 선비가 아니라 약간의 한량기도 곁들인 문무겸전의 전인(全人) 지향의 선비라는 느낌이다. 그의 이러한 예스런 선비풍은 그의 고향인 경남 거창의 선비문화와 무관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거창을 일찍이 영남 사림파 계보의 중심적 인물이었던 김종직, 김굉필 등과 인연이 깊고, 특히 남명 조식을 필두로 하는 강우학맥은 영남 선비정신의 정신적 지주가 아니던가.

 

이렇듯 그의 행동거지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단아(端雅)한 선비의 이미지다. 추호의 흐트러짐이나 거친 면이 없이, 언제나 단정. 침착하고, 얼마간의 여유가 감돈다. 부드러운 가운데, 꼿꼿한 기개와 청정한 마음가짐이 엿보인다. 그와의 오랜 교유에서 나는 한 번도 그가 독선이나 과욕, 격정이나 흥분을 드러낸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흔히 만나는 시체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다.

 

전병재 교수는 동양 선비의 단아한 기풍 못지않게 서양의 젠틀맨십의 속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 늘 바르게 예를 지키며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가꾸고, 아울러 사회적 의무를 충실히 수행한다는 면에서 그는 영락없는 서양 신사의 품격을 지니고 있다. 그에게서 간혹 발견되는 얼마간의 귀족적 취향도 옛 영국의 젠트리를 닮은 측면이 없지 않다. 그리고 보면 고(高)수준의 인격과 학식을 갖춘 전인적 인간상(人間像)을 추구하는 데는 동서양의 별 차이가 없는 듯 하고, 그러한 맥락에서 그는 동서를 아우르는 선비이자 신사의 좋은 전범(典範)이 라고 말할 수 있다.

 

전병재 선배는 결코 큰 소리치고 드세게 나서고 으스대지 않는다. 그는 얼마간 한걸음 물러서서 침잠한 자세로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자신의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는 조용한 실천가이다. 그가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초대 학과장(1973-1975)으로서 학과 창설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고, 대학원 교학과장(1976-1978)으로서 초창기 연세대 대학원의 바탕을 세우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어 그는 연세대학교 문과대학장(1997-1999)으로서 대학의 학문성을 높이고, 인화를 도모하는 좋은 리더십을 선보였다. 세월이 유수 같아 그가 연세대학교에 봉직한 기간만 30년, 그리고 그 후 10여년이 지났다. 그러는 가운데, 그가 직접 산파역을 담당하고 심혈을 기울여 키웠던 연세대학교 사회학과가 이미 창립 40주년을 훌쩍 넘어 국내 사회학을 주도하는 우람스런 큰 나무로 성장했고, 그가 손수 키운 애제자가 연세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하는 큰 경

사까지 맞았다. 이렇게 볼 때, 그의 생애에서 가장 핵심 부분인 연세대학교에서의 삶의 족적은 성공과 축복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전병재 교수님은 그의 생애주기의 모든 단계에서 익힌 다양한 생활경험과 능력을 차곡차곡 쌓아, 거기서 수확한 결실과 지혜를 조용히, 그리고 고르게 주변과 나누며 오늘의 자신의 인격을 구축한 분이다.

 

III.

내가 전 교수님과의 추억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1985년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렸던 <아시아 사회과학연구회>(ASSREC)가 주최한 국제회의에 함께 한국대표로 참가했던 일이다. 그 때 우리는 왕복 항공 여행길을 같이 했고, 3일 간의 국제회의 기간을 포함하여 5일 간을 붙어 지내며 많은 생각을 나누며 서로를 익혔다. 이미 까마득한 옛일이 되어 버렸지만 그 몇일 간이 다시 아름다운 추억으로 다가온다.

 

그 회의에는 전 교수님과 나 이외에 이미 고인이 되신 고려대 사회학과의 홍승직 교수님도 함께 참여하셨는데, 내 기억으로는 홍 교수님은 다른 비행기를 타셨던 것 같다. 그래서 긴 비행시간 동안 전 교수님과 비교적 많은 생각을 나눴다. 평소에 말수가 많은 분이 아닌데, 그 때는 전 교수님이 스스럼없이 적잖은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다. 그래서 나는 전 교수님의 개인 역사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고향인 거창에서의 어린 시절, 그리고 부산에서의 고교 및 연세대 법학과 시절의 몇몇 기억을 되살리셨다. 특히 나는 그가 연세대 법학과 대학원 시절, 미국유학을 준비하면서 1963-1965년간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으로 고 함병춘 교수님이 주재한 <한국 사람들의 법의식에 관한 연구>의 현지조사에 직접 참여했던 얘기를 흥미있게 들었다. 그 조사는 한국에서 이루어진 가장 초기의 현대적 사회조사 중 하나였기에, 당시 전 교수님 말씀을

 들으며, 나는 그가 전공을 법학에서 사회학으로 바꾸신 데에 분명 그 조사연구가 크게 작용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발리 회의에서 가장 두드러졌던 일은 그 회의에 북한 대표들도 참여했다는 일이었다. 나는 10대 초 경험한 한국전쟁 때 이후 그곳에서 북한 사람을 처음 만났다. 적잖은 호기심과 얼마간의 긴장을 느꼈다. 회의장 자리 배치가 알파벳 순으로 되어 남 북한 대표단이 이어 앉았는데, 마침 내 옆자리부터 북한 대표단이 시작되어 사흘간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가까이 관찰하며 느낄 수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그들은 북한 사회과학원 소속 학자들이었는데, 그들 세 명 중, 상대적으로 목소리가 컸던 한 명은 분명 정치요원 같았다. 우리는 그들에게 예의를 갖춰 대하고 가능하면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들은 항상 함께 움직였고 서로를 의식하며 행동하는 듯 했는데, 무엇보다 어려웠던 것은 그들이 어떤 날은 우리 대표들에게 비교적 친절하게 대하고 다른 날은 무척 거칠고 공격적으로 대하는 등, 그들의 행동이 무척 불가측적이고 종잡을 수 없었던 일이다. 회의에서 그들 중 한명이 간략히 보고형식의 발표가 있었을 뿐, 별로 토론에 참여하지 않았고, 그렇다 보니 그들의 학술회의에의 기여는 전혀 없었다. 나는 하루를 지나고 나면서, 이들과의 지적 대화나 토론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 그냥 의례적인 대화만을 나눴다. 그런데 전병재 교수님은 사뭇 진지한 모습으로 시종 그들과의 대화를 꾀했던 기억이다. 현대 마르크시즘에 대해 지적 관심이 많았던 전 교수님은 북한에서의 마르크시즘 연구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묻는 듯 했다. 그리고 나서 내게, “아니 네오 마르크시즘의 개념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거에요. 전혀 대화가 이어지지 않으니” 라며 안타까워 했다.

 

발리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해변을 거닐며 천혜의 그곳 자연 풍광을 즐겼고, 밤에는 그림자 연극 등 그곳 특유의 예술행사에 참여하는 등 발리문화에 흠뻑 빠졌다. 회의를 마치고 자카르타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인도네시아의 정신적 고향으로 알려진 <족 자카르타>에 들렸다. 그곳에서 세계 3대 불교 유적지로 꼽히는 보로부두르(Borobur) 사원을 찾았는데, 그 규모의 웅장함과 낱낱의 정교함에 매료되어 감탄사를 연발했다. 기억나는 것 중 하나는 족 자카르타에서 전 교수님이 택시를 잡더니, 운전기사에게 그곳에서 가장 좋은 음식점으로 안내해 줄 것을 청했던 일이다. 운전기사는 곧장 어느 레스토랑으로 우리를 안내했고, 거기서 우리는 맛있게 인도네시아 식 스테이크를 들었다. 그러면서 나는 전 교수님이 좋은 음식의 풍미를 즐기는 미식가인 것을 직감했다. 약간의 귀족적 취향이 느껴지면서, 역시 '멋쟁이‘라는 생각을 했다.

 

 

IV.

2002년 정년 후 전 교수님은 불교와 마음공부에 심취하신 듯하다. 듣기로는 지리산 ‘고요한 소리’ 역경원에 머물며, 부처님이 직접 설법한 내용을 빠리어(범어)로 기록해 놓은 초기불전 ‘이띠붓따까’의 번역 사업에 참여하신다고 한다. 역경원의 어른인 활성스님이 바로 전 교수님의 고교 동창이라는 얘기도 함께 들었다. 전 교수님은 그의 새로운 공부를 ‘참 공부’라고 부른다는 전언(傳言)이었다. 보기에 따라 인생반전인 듯싶은데, 나는 그렇게 만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이 인생 2막의 새로운 시도임에는 틀림없지만, 사회심리학을 전공하며 평생 사람과 사람들 마음공부를 해 왔던 전 선배에게는 이제껏 해 왔던 마음공부의 ‘심화’ 과정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쨌든 전 선배가 이제 <반 스님>이 되셨으니 만나기 어렵겠다 싶었다. 가끔 그의 안부가 궁금했지만 불경연구와 명상세계에 침잠해 있는 분에게 연락하는 것도 도리가 아닌 것 같아 연락을 삼갔다.

 

그러던 중 2004년으로 기억하는데 내가 정부에 관계할 때 공무로 경남 창원에 갔었다. 그건데 그곳 교육감 하시는 분이 내게 느닷없이 “연세대에서 함께 계셨던 전병재 교수님 아시지요?”라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했더니 “혹시 통화라도 하시려면 제가 연결해 드리지요”라는 게 아닌가. 내가 반기며 그렇게 해 달라고 하니, 몇 분 후에 전 교수님과 전화 연결을 해 주었다. 그래서 유선을 통해서 나마 오랜 만에 전 교수님과 반가운 통화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때 상황이 긴 이야기를 할 형편이 아니어서 통화는 서로 안부를 나누는 수준에서 아쉽게 끝났다. 그러나 그의 편안한 음성과 조용한 웃음소리로 보아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가 작년에 실로 오랜만에 전 교수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정년퇴직 후 10년 째 강원도 고성에 사는 내가 모처럼 서울에 갔는데, 연세대 문과대학에 재직했던 교수 한 분이 내게 전화를 걸어 퇴직 교수 몇 분이 만나 담소하는 중에 내 얘기가 나와 목소리를 들을 겸 연락을 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시간에 여유가 있어 그 모임장소로 갔더니 웬걸 전 교수님이 그 자리에 함께 계셨다. 10여년 만에 반가운 해후였다. 그는 여전했다. 선비풍의 단정한 모습, 입가에 조용한 웃음, 대화에의 적절한 참여, 균형 잡힌 사고, 옛 모습 그대로였다. 8순이 내일인데 건강도 무척 좋아 보였다. 그와 헤어지면서 나는 생각했다. 그렇지 전 교수님이 크게 변 할리 없지. 원래 한결같은 분이 아닌가. 학문적으로 사람들 마음을 탐구하던 분인데, 이제 영성적으로 그 세계에 다가 갔지만, 공부꾼이 계속 공부를 하고 있고, 무엇보다 ‘참 공부’에 정진하신다니, 그 이상 행복한 삶이 어디 있겠나. 또 지리산 산자락에서 오랜 기간 마음수련에 전념하셨으니, 그 분의 좋은 품성이 변화하기 보다 더 내적으로 심화되었을 게 아닌가.

 

 

V.

그 후에 통화로 보아, 아마도 전 교수님은 이제 거창 고향으로 귀향하신 게 아닌가 싶다. 그가 어디에 사시던, 또 무엇을 하시던, 내 뇌리에 각인된 그의 모습은 청년이나 노년이 아닌 <품격있는 장년(壯年)>이다. 청년기에 만나, 함께 인생의 황혼에 이르렀는데, 그의 이미지가 영원한 장년으로 인식되는 것은 ‘웨’일까. 아마도 그가 평생 유가와 불교를 넘나들며 쌓아올린 ‘중용’(中庸)의 내공 때문이 아닐까.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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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466007540 2016.06.16 01:19 Address Modify/Delete Reply

    잘 읽고 가여~

                                I.                                

나는 학부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행정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유학을 가서 정치학과 행정학을 함께 했다. 평생 행정학과 교수로 재직했지만, 연구 내용으로 따지면, <정치학 바탕의 행정학> 내지 <행정학과 함께하는 정치학>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정치학과 행정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많은 경우 양자를 연계융합해서 공부하는 식이었다. 그러면서 내가 고집스럽게 정치학이나 행정학 중 한 영역을 고수하려고 필요이상 애쓰지 않은 걸 잘했다고 생각한다.

 

정치학은 보다 본질학문에 가깝고 이론적 성격이 강하다. 반면 행정학은 보다 실용학문의 속성이 뚜렷하며 실천적 측면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정치학과 행정학은 학문체계상 분류이지, 살아있는 정치와 행정의 세계는 서로 이어지며, 상호교호하며 보완한다. 따라서 행정을 외면한 정치나, 정치와 무관한 행정은 생각하기 어렵듯이, 학문의 세계에서도 정치학과 행정학의 통섭은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어느 쪽에 치중하느냐에 따라 이론과 실천 사이를 오가게 된다. 내 경우, 이론에 크게 기울어지면 실천 쪽이 허전하고, 실천에 역점을 두면 이론 쪽이 아쉬워서 일생 양쪽을 오갔다. 그러다 보니 이 나이가 되었다.

                                    

                                    II.

나는 학부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전공을 잘 선택했다고 느꼈으나, 그것이 지나치게 이론적이어서 구름 잡는 얘기가 많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따라서 실용성, 실천성에 대한 갈구가 있었다. 내가 석사과정에서 행정학을 전공한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런데 행정학 공부를 하다 보니 처음에는 그 실천적, 문제해결적 접근에 신선미를 느꼈으나, 점차 그 철학적, 이론적 빈곤에 대한 아쉬움이 싹텄고 그것이 불만으로 이어졌다. 그러면서 다시 내 내면세계에서 정치이론에 대한 갈망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유학지로 유럽을 선택한 것도 그곳에서 정치사상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막상 그곳에 도착해 보니 정치사상을 공부하려면 철학부에서 형이상학 위주의 공부를 더 많이, 또 깊게 해야 하고, 라틴어와 그리스어가 학위과정의 전제였다. 과정 자체도 벅차거니와 무엇보다 너무 관념에 치우쳐 실천과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점이 마음에 크게 걸렸다. 망설이다가 사회과학으로 다시 선회, 국가학(Staatswissenschft(en))을 전공했다. 내가 유럽에서 공부하던 1960년대 당시 독일, 오스트리아의 많은 고전적 대학에서 국가학의 이름으로 정치학을 가르쳤는데, 내용은 국가와 연관된 인접 사회과학들을 연계하여 공부하는 체계였다. 나는 그 학문의 틀 안에서 가능한 한 이론과 실천, 어느 쪽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공부를 끝내고 돌아와, 대학에 자리를 잡으려니 내게 모두 전공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정치학도 했고, 행정학도 했고 .. ”식의 어설프고 애매한 대답을 했다. 스스로도 딱히 어떤 것이 내 전공이라고 못 박아 얘기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무언가 명확한 것을 선호하는 이 땅에서는 “전공이 분명치 못하다”는 오해를 불러일으켜 자리를 잡는 과정도 그리 쉽지 않았다.

결국 행정학과에 둥지를 틀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학자들이 가능하면 ‘밥 먹는 체계’에 맞춰 공부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이 있었다. 말하자면 행정학과 교수면 행정학이나 착실히 연구하고, 인접 동네는 넘보지 말라는 요구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애초부터 스스로를 그 장벽 안에 가둘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행정학회 못지않게 정치학회에서 활동했고, 내 글의 많은 것이 내용상 정치와 행정을 잇고, 함께 엮어서 형상화하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1970, 80년대 권위주의 시대를 겪으면서, 많은 행정학자들이 행정학을 <관리기술학>으로 협의로 정의하고 그곳에 피난하면서, 정치세계와는 무관하게 구체적 실천문제에만 집중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공부 방식은 자칫 행정학을 권위주의 정치의 시녀로 만드는 것임을 강조하고, 시종일관 정치적 민주주의 없는 민주행정, 공정행정, 좋은 행정이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이 시기 내 글의 대부분은 체제비판의 관점에서 정치. 행정의 문제점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언론에 비판적 논조의 정치평론을 많이 썼다.

 

1980년대 말 부터 정책학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행정관리 쪽에 치중했던 행정학의 내용과 외연이 변화하기 시작했고, 정책을 매개로 정치와 행정의 가교가 마련되었다. 정책과정의 분석이나 분야별 정책연구를 하다보면, 자연 나라의 정치체제, 정치이념, 거시적 정책지향을 논의해야 하고, 아울러 구체적 정책의 설계, 관리, 집행 문제도 함께 따져 보아야 하므로, 정치와 행정은 자연 한 흐름 속에서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내 공부방식이 예전에 비해 한결 수월하게 수용되었다.

 

                                 

                                III.

나는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두 번 교육부장관직을 수행했다. 첫 번째는 문민정부 때이고, 두 번째는 참여정부 때였다. 한 부처 장관을 두 번 하는 것도 드문 일이거기와, 한 사람이 이념적 지향이 다른 정부에서 장관직을 맡는 일 또한 흔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나는 이 방면 연구학자로서 매우 풍성하고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나는 평생 정치 근처에도 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학자가 어떻게, 또 왜 장관직을 맡았느냐는 질문을 아직도 받고 있다. 나는 실제로 장관 임명 전에 김영삼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과는 일면식도 없었다. 따라서 내가 어떻게 장관직에 임용되었는지는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그러나 왜 그 일을 맡았는지에 대해서는 대답이 가능하다.

 

우선 문민정부나 참여정부가 다 국민이 뽑은 민주정부라는 점이다. 만약 그들 정부가 유신체제나 5, 6 공이었다면- 물론 그들 정부가 나를 그들 정부가 선택했을 리가 없지만- 나는 분명 거부했을 것이다. 두 번째는 그 자리가 중차대한 나라 일을 수행하는 추요직 (樞要職)이었기 때문이다. 국정에 참여하여 국리민복에 기여, 헌신하는 일은 매우 값진 일이고,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지 않은가. 그러므로 그 직책은 한번 몸을 바쳐 일할 만한, 또 그러기에 한마디로 거부할 수 없는 자리라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나는 장관직은 ‘엄청난 멍에이자, 축복’이라고 술회한 적이 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나를 크게 움직였던 것은 그 자리가 정치와 행정을 연구하는 학자인 나에게 엄청난 공부거리를 제공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대학 강단에서 이론으로만 가르치던 나에게, 장관직은 정치와 행정이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 그 감춰진 속살을 관찰, 체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최상의 매력적인 학습자료가 나를 강하게 유혹했던 것이다. 아울러 내가 정치와 행정, 그리고 정책을 오랫동안 강의하고 연구했기 때문에, 또 내가 맡을 교육이라는 영역 또한 내게 생소한 부문이 아니므로, 열심히 성심성의를 다하면, 그 직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것 같은 얼마간의 자신감(과 착각)이 함께 작용했던 것도 사실이다.

 

장관직은 바로 정치와 행정이 만나는 교차점에 있었다. 우선 장관은 실제로 적지 않게 정치가의 역할을 수행한다. 즉 장관은 국민으로부터 직접 선출된 대통령의 대리인으로서 그의 정치적 목표의 성취를 위하여 정책적으로 보좌하며, 국정전반에 걸친, 그리고 무엇보다 소관영역의 정책결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아울러 국회, 정당, 이익집단 및 시민사회 등을 상대로 상충하는 이해관계의 조정과 중재에 임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다른 한편 부처의 내부관리자로서 정책의 집행과정을 관리하며, 조직, 인사 및 예산을 총괄하는 등, 민간기업체의 ‘최고관리자’(CEO)와 유사한 행정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렇듯 한국의 장관은 2중 역할을 함께 수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폭넓게 행정을 공부해 온 학자들에게 장관직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익숙한 동네다. 아울러 그것은 엄청난 공부거리를 제공하고, 그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이론, 지식과 관점을 적용해 볼 수 있는 실천의 장을 제공한다. 또한 장관직 수행의 생생한 경험을 다시 학문적으로 환류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학문세계를 보다 풍요롭게 만드는데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IV.

나는 스스로 장관직의 수행이 정치. 행정학자로서 나를 크게 성장시켰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이론과 실천 사이를 맴돌며 그 어느 한쪽에 치우치면, 다른 쪽을 목말라 했던 나에게 양자를 연계, 융합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장관직을 떠난 후, 나는 그 경험으로부터 수확한 지식과 정보를 바탕으로 두 권의 책을 공저했고 10여 편의 논문을 썼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쓰는 글 속에도 분명 내가 수행했던 두 번에 걸친 장관직의 체험과 학습 그리고 그로부터 얻은 성찰이 알게 모르게 용해되리라고 확신한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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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4.07 21:37 Address Modify/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2. 현강 2016.04.08 04:59 Address Modify/Delete Reply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멀리 떨어져 있어 뵙기가 불편합니다.
    왠만하시면 제 이메일 ahnby@yonsei.ac.kr로 용건을 알려 주시면 제가 정성껏
    답을 드리겠습니다.

이 글은 2016년 1월 16일, 평택대학교에서 열렸던 < 이문영 교수님 서거 2주기> 추도식에서의 행한 나의 

추도사이다. 

 

 

우리 모두가 지극히 사랑하고 존경하는 소정(小) 이문영 선생님께서 하나님 곁으로 가신지 벌써 두해가 되었습니다. 이에 오늘 우리는 그를 추억하고 기리기 위해 이 자리에 함께 모였습니다. 특히 오늘 여기서 이 교수님의 주저(主著) 중 하나인 <인간. 종교. 국가>의 영문 번역 출간을 함께 축하할 수 있게 되어 더 의미 있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함께 해 주신 가족 여러분,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하는데 수고가 크신 평택대학교와 김문기 목사님, 그리고 책 (Man. Religion. State) 번역에 고생이 컸던 고창훈 교수님을 비롯한 여러 분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소정 이문영 선생님을 정말 남다른 분,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쉽게 만날 수 없는 큰 어른으로 기억합니다. 따라서 저는 오늘 그를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이 자리에서 감히 이문영의  선생님의 개성적 특성 몇 가지를 조명해 보며, 그의 삶을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저는 선생님이 소천하신 후, 한국행정학회 소책자에 기고한 추도사에서 선생님을 회고하며 그를 <지사(志士)형의 큰 학자>라고 집약해서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 함께 자리하신 모든 분들은 소정 선생님은 <지사>로서의 형극의 삶의 궤적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는 1970년대, 80년대에 걸쳐 불퇴전의 용기와 치열한 저항정신으로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싸우셨습니다. 세 번에 걸쳐 4년 6개월의 옥고를 치루셨고, 9년 6개월 이란 오랜 세월동안 해직되는 말 못할 고초를 겪으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정 선생님은 진정한 시대의 양심이자 민주화의 기념비적인 존재이십니다. 그래서 저는 그 분을 감히 우리 시대의 <마지막 의인(義人)이시다> 라고 서술했습니다.

 

그러나 이문영 선생님의 독특성, 그리고 그 어른의 남다른 점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민주투사로서의 그의 생애에 못지 않게, 독창적, 선구적 행정학자로서 평생 추호도 흐트러짐 없이 견실하게 학문적 활동을 함께 하셨습니다. 이 점이 실로 놀랐습니다. 이문영 선생님은 민주화 투쟁기간 중에도 <한국행정론>(1980), <민주사회를 위하여>(1983)등의 저작을 통하여 학자로서의 본분을 지키시며, <행정학의 한국화>를 위해 큰 몫을 하셨습니다. 이문영 교수님의 학자로서의 진면목은 그가 오랜 영어의 생활을 되로 하고 1984년 고려대학교에 복직한 이후의 그의 학자적 삶 속에서 더 역력히 드러납니다. 그는 정계의 숱한 유혹에도 불구하고, 결연히 권력의 세계와 멀리하고 다시 책상 앞으로 다가가 학문에 전념하면서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뛰어난 저작들을 남기셨습니다. <논어 맹자의 행정학>을 필두로 <인간. 종교, 국가>(1991), <협력형 통치>(2006), <겁 많은 자의 용기>(2008), <3.1 운동에서 본 행정학>(2011> 등의 대작을 연이어 출간하셨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조차 행정학적 사유와 탐구를 계속하셨고, 자신의 마지막 불꽃마저 온전히 자신의 학문에 바쳤습니다. 그의 행정학 연구 속에는 언제나 한국행정의 민주화와 한국화, 그리고 우리 사회의 문명화라는 명제가 살아 숨 쉬고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진정한 <지사형의 큰 학자>이셨습니다.

 

두 번째로 그는 <한결같은 분>, 그리고 <늘 열려있는 분>이셨습니다. 일생 가정과 교회와 학교에 충실하셨고, 평생 동안 오직 한 교회를 나가셨고, 늘 속과 겉,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셨고, 또 언제, 누구에게나 한결같으셨습니다. 그가 <역사적 원점>을 중시하는 것도 바로 이처럼 한결같음을 추구하는 그의 삶의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그런가 하면 이문영 선생님은 민주화 투쟁에서나 학문하는 과정에서도 언제나 늘 열려있는 분이셨습니다. 이문영 선생님은 그의 저서에서 ‘협력형 통치’와 ‘민회’를 강조하셨듯이, 민주화 운동에서도 늘 대화와 합의, 그리고 협력을 강조하셨습니다. 저서를 집필하는 과정에서도 스스럼없이 후배와 제자들에게 조언과 자문을 구하셨고, 글을 쓰신 이후에도 몇몇 제자들과 독회를 거듭하며, 내용을 다듬고 의미전달을 바르게 하기 위해 애쓰셨습니다. 이러한 점은 실제로 권위주의적 분위기가 풍미하는 당시 우리 학계에서 매우 드믄 일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천성적으로 민주적 인간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소정 이문영 선생님은 매우 <겸손하고, 뒤진 자에 대한 연민>이 남다른 분이셨습니다. 소정 선생님은 거짓 권위와 불의에 대해서는 정말 추상같은 분이셨습니다만, 천성이 착하고 순수한 선생님은, ‘작은 머슴’을 자처하는 그의 호에서 드러나듯이, 항상 자신을 낮추고, 절제와 배려가 몸에 배인 분이셨습니다. 선생님은 온 몸을 받쳐 민주화 투쟁을 하면서도, “의당 해야 할 최소한의 발언을 했을 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이처럼 세상을 향해서는 ‘최소한’을 요구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 최

소한을 위해 외롭게 온몸을 민주화 재단에 ‘최대한’으로 바쳐, 희생, 봉헌하셨습니다. 그는 특히 소외된 사람, 핍박받는 사람, 뒤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남다른 애정과 연민을 가지셨고, 그들에 대한 희생과 헌신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천성이 종교적 심성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문영 선생님은 좀처럼 우리 주변에서 찾기 어려운 <속깊은 행동인>(deep player)이셨습니다. 그는 언제나 깊이, 본질적으로 사색하고 거듭 성찰하고 또 언제나 명분과 의미있는 행동을 주도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는 눈에 드러난 현상보다 속에 잠겨있는 본질을, 그리고 공식적 제도 보다 그 안에 숨어있는 원리를 탐색하였고, 겉치레와 불필요한 수사(修辭)를 삼가셨습니다. 이렇듯 소정 선생님은 늘 ‘참’을 추구하셨고, 그런 의미에서 그는 천성적으로 철학적 심성이 몸에 배인 분이셨습니다.

 

이제 선생님의 저서 <인간. 종교. 국가> 미국행정. 청교도정신.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출간에 대해 몇 마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이 책을 번역한 고창훈 교수를 비롯한 여러 제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선생님의 글이 워낙 예화가 많고 현학적 냄새를 풍기지 않기 때문에 일견 그리 어려운 글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실제로 내용이 심오하고, 그 안에 이른바 사.문.철, 즉 역사, 문학, 철학이 다 들어가 있고, 결국은 행정학 이론과 실천이 함께 어우러지기 때문에 대단한 몰입과 지적 통찰력 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글입니다. 우리 글로도 그럴 진 데 그것을 외국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실로 대단히 어려고 힘겨운 작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년 전에 이 책의 번역 얘기가 나오기에 내심 “쉽지 않을 걸”했습니다. 그 후 다른 소식이 없기에 아마도 포기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번역이 완성되어 책으로 출간되었다니 정말 놀랍고 대단합니다. 여기 참여했던 여러분의 그간의 노고와 희생, 헌신에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따지고 보면 인간, 종교. 국가는 소정 선생님이 평생을 걸쳐 탐색하셨던 중심 주제들입니다. 소정 선생님은 특히 이 책에서 미국행정의 바탕이 된 청교도 정신과 마르틴 루터의 75개조를 논의하시면서, 한국 행정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이 책이 영어로 출간되어 외국인들도 이 책을 접할 수 있게 되어, 이제 이 책이 세계인의 책이 되었다는 점,  또 이 책을 통

하여 이제 많은 외국인들도 선생님의 정신적 제자가 된다는 사실이 무척 기쁘고, 고무적입니다.

 

소정 이문영 선생님을 생각하면, 저는 두 분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우선 그의 아내이며 평생 동지셨던 김석중 여사님이 떠오릅니다. 무척 명철하셨고 용기가 대단하셨습니다. 사모님은 전 생애에  걸쳐 선생님의 정신적 버팀목이셨습니다. 그리고 또 한  분, 추운 겨울 한기가 감도는 안방에서 90 가까운 연세에 수감학생들의 죄수복에 솜을 넣어 손수 꿰매고 계셨던 선생님의 노모의 모습이 눈에 아른 거립니다. 깊은 슬픔 속에서도 노모의 얼굴은 언제나 평화스러우셨습니다. 이 두 분 외에도 그의 사상과 행동에 큰 영향을 미쳤던 여러 분들, 즉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하셨던 소정의 의로운 아버지, 배선표 목사님, 함석헌 선생님, 공자, 맹자, 원효, 율곡, 마르틴 루터, 그리고 그의 정신적 요람이었던 배재학교, 교려대학, 갈릴리 교회가 떠오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1970년대 초부터 40여 년간 선생님을 가까이 모셨습니다. 언제나 큰 형님 같으셨고, 격의가 없으셨습니다. 특히 선생님께서 해직, 옥고를 치루시던 1972년부터 4-5년간, 고려대학교에서 이 선생님의 강의 대부분을 제가 대신 맡아 강의했던 일은 제게 더할 수 없는 자랑이며 영광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선생님과의 모든 추억이 제게는 큰 공부였고, 엄청난 교훈이었습니다. 아마 이 자리에 함께 하신 여러분들도 같은  심경이리라 믿습니다. 

 

저희들에게 아직도 선생님을 잃은 엄청난 상실감과 공허감이 너무 큽니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서 선생님과의 아름다운 추억과 넘치는 가르침을 되새기면서, 선생님을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추모하니 더없이 행복합니다.

 

우리의 큰 스승이신 소정 선생님, 당신과의 소중한 인연이 너무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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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1980년대 10년은 내 나이 40대였다. 한창 바쁘고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였는데 경제적으로는 항상 쪼들렸다. 80년대 중반은 슬하의 남매가 각각 고등학교, 중학교 다닐 때였다. 그런데 아파트를 조금 늘리려고 은행 융자를 받았는데, 그게 힘에 부쳐 매달 적자를 면하기 어려웠다. 생활비를 줄여 보려고 애를 썼지만 적자행진은 그치질 않았다. 궁리 끝에 나는 생활비를 줄이기 위한 특단의 조치를 고안했다. 일종의 가족 전체가 참여하는 강제 긴축 방안이었는데, 내용인 즉, 거실에 있는 아가리가 조금 큰 항아리 안에 내 월급에서 매달 지불해야 할 공과금, 학자금, 대출상환금, 이자 등을 미리 차감한 나머지 잔액을 넣어두고 가족 구성원 개개인에게 가족 생계비의 흐름을 고려하면서 각자 알아서 (양심껏) 꺼내 가라는 것이었다. 그 날 이후 거실 구석에서 은은한 아름다움을 뽐내던 하늘색 도자기 항아리가 자발적 긴축을 강요하는 차디찬 요물단지로 변신했다.

 

                                                   II.

매달 월급날이면 하늘색 도자기 항아리 안에 오천 원 권부터 동전까지 돈 크기별로 나누어 가지런히 배열된다. 월래 월급액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금액이지만, 그렇게 펼쳐 놓으면 처음 얼핏 보기에는 그런대로 제법 푼푼해 보인다. 그러다보니 처음 한, 두 달은 시행착오가 계속되었다. 식구마다 별 생각 없이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돈을 꺼내 썼고, 그러자 반달이 지나기가 무섭게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해서 다음 월급날 까지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이 불가피 했다. 이렇게 몇 달이 지나자, 식구들은 심기일전(心機一轉), 저마다 쓰임새를 크게 줄이는 방향으로 소비행태를 대폭 바꿨다. 너나없이 가급적 항아리에 가까이 다가가는 기회를 줄였고, 거기에 손이 가더라도 항아리 안의 재정 상태를 고려해서 '생각하며‘ 돈을 꺼내가게 되었다.

 

이러한 항아리 긴축방식의 성과는 놀라웠다. 불요불급(不要不急)한 지출의 대폭 감축을 통해 가계 재정은 안정되고 적자행진도 그쳤다. 그 과정에서 내가 가장 우려했던 것은  가족 구성원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모두 자신들의 자발적 참여와 소비행태의 변화에 대해 자부심이 있었고, 스스로 얼마간 대견하게 느끼는 듯 했다. 가족 구성원 간의 유대도 오히려 강화되는 듯싶었다.

항아리 긴축방식은 은행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여러 해 계속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가족 모두가 나름대로 ‘항아리 사용법’을 새롭게 터득했다. 항아리 속에 눈이 가면 일일이 세어 보지 않아도 한 눈에 잔액의 크기를 대충 파악하게 되었고, 다음 월급날짜까지의 잔여기간과 그때까지의 돈의 흐름, 그리고 다른 가족 구성원의 소비패턴 등을 두루 고려하면서, 일정 액수의 돈을 꺼내갔다. 처음에는 각자가 돈을 빼낼 때 얼마간 머뭇거리며 얼마를 꺼내 가야할지 망설이는 눈치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고려요소들을 순식간에 복합적으로 계산해서 별로 지체하지 않고 스스로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적정 액수를 뽑아냈다. 그 과정에서 다른 가족 구성원에 대한 배려가 늘 함께 했다. 내가 조금 줄이면 다른 가족이 그만틈 더 여유로워진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한 달 간의 돈의 흐름이 점차 안정되고 균형을 이루게 되어, 월급날 이전에 돈이 바닥을 드러내는 일이 한 번도 없게 되었다.

 

                                             III.

수년간 항아리 긴축방식을 시행하는 동안 나도 많은 것을 배웠다. 온 식구가 허리띠를 졸라 매야 되기 때문에 우선 내가 모범을 보이려고 애를 썼다. 그러면서 합리적 소비행태를 통하여 크지 않은 금액으로도 초라하고 궁색하지 않게 생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아이들도 많이 배운 것 같았다. 훗날 아들이 제 엄마에게 그 때 얘기를 하면서, 천원을 꺼내려 항아리 아가리에 손을 넣다가 결국 오백 원을 꺼내 곤 했는데, 그런 생활습관을 통하여 다른 가족 구성원에 대한 배려와 검약하는 생활습관을 익혔다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그 시절 나는 한창 스웨덴의 정치와 문화에 몰두하고 있었다. 항아리 긴축방식을 고안할 당시 내 머리에 떠 올렸던 것도 실은 어느 책에서 보았던 스웨덴 얘기였다. 스웨덴 젊은이들은 무리로 함께 어울리는 것을 좋아 하는데, 그럴 때면 으레 엄청나게 큰 술잔에 술을 한껏 붓고 전원이 한 명 한 명 차례로 돌아가며 마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몇 명이 마시든 처음 마시기 시작한 친구의 술의 양과 마지막 친구의 술의 양이 대체로 똑같이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상호 배려하는 생활습관에서 비롯된 것인데 그 책에서는 이를 ‘참여’와 '배려‘, ’유대‘를 중시하는 그들 문화적 특성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당시 적자 가계에서 벗어나야겠다는 현실적 필요 못지않게, 항아리 방식을 통해 온 가족이 참여를 통한 위기극복의 정신과 근검절약의 생활습관, 그리고 상호배려의 덕성이 함양하기를 내심 기대했었다. 그런데 이러한 희망은 하늘색 도자기 항아리를 매개로 기대 이상 충족된 것 같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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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영래 2015.10.11 19:39 Address Modify/Delete Reply

    안 교수님께

    안녕하십니까?
    사모님 건강은 어떠하신지요?

    오랜만에 블로그에 들려 도자기 항아리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설악산에는 벌써 얼음이 얼었다고 하는데,겨울이 오는 것 같습니다.
    지난 해 울산바위에 고교 졸업 50주년 기념 등반으로 올라 갔었는데,
    블로그에서 사진을 보니 새삼 그때가 생각이 납니다.

    환절기 건강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김영래 올림

  2. 현강재 현강 2015.10.13 03:52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김 교수님

    오랜만에 소식 고맙고 반가웠습니다.
    덕택에 저희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농한기에 접어들어 비교적 한가하게 깊어가는 가을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김 교수님도 부디 건강하시고 즐겁고 보람된 나난를 보내시기를 빕니다.

    현강 드림

                                              I.

  1965년 가을 나는 오스트리아 빈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해 봄에 이미 장학기관에서 시행하는 시험에 합격했고, 초 여름에 당시 외국 유학생들에게 의무적으로 과했던 문교부 유학시험을 거쳤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시험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오스트리아에 도착해서 빈(Wien)대학에 입학하려 하니, 입학 조건으로 독일어 구두시험을 합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무척 당황했다. 당시 내 독일어 실력은 책을 읽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으나, 말하기로 따지면 실제로 입도 때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더욱이 일주일 후로 구두시험 날짜까지 정해지자, 하늘이 깜깜해 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나와 함께 장학시험에 합격해서 같이 유학 온 K형은, 이미 한국에서 몇 해 동안 독일인 신부님에게 독일어 회화를 배워 유창하게 독어회화를 했다. 그런데 불가피하게 그와 함께 구두시험에 임해야 하니, 두 사람의 실력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날 것이기에 걱정이 더 컸다. 구두시험에 떨어져 한 학기 동안 입학도 못하고 방황하게 되면, 면목이 없어 장학기관을 어떻게 대 할까, 모든 게 걱정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독일어 회화가 일주일 동안 크게 향상 될 수는 없는 게 아닌가.

 

                                        II.

  밤새 궁리하다 다음 날 새벽 내 나름대로 해법을 찾았다. 그것은 면접자가 물을 만한 가능한 모든 예상 질문을 머리로 짜내서, 그에 구체적으로 대비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 상상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해서 나름대로 예상문제 100개를 마련했다. 거기에는 내 신상에 관한 것, 한국에 관한 것, 공부계획에 관한 것, 유럽과 오스트리아에 관한 것, 기타 상식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질문이 낱낱이, 또 포괄적으로 망라되었다. 여기서 벗어나는 질문은 있을 수 없다고 스스로 확신할 때까지 가능한 온갖 질문을 내 상상의 창고에서 모조리 끄집어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20개의 문제를 거기 덧붙였다. 단답형으로 120개니 이들 질문을 그룹으로 엮으면 아마 30개 쯤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는 그것을 내 서툰 독일어로 열심히 번역했다. 그렇게 애벌로 마련한 독어면접 예상문답지를 프란쯔라는 마음씨 좋은 기숙사 친구와 같이 앉아 한 구절, 한 구절 그럴듯한 독일어 문장으로 다듬었다. 누구나 편히 이해할 수 있는 중급수준의 일상회화 수준으로 바꾸는데 꼬박 이틀이 걸렸다. 어렵사리 작업을 마친 후, 프란쯔가, “정말 놀랬다. 한국 사람은 모두 이렇게 무모하고, 철저하냐. 아마도 여기서 빠져나갈 질문을 없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나는 프란쯔에게 총 120개의 질문을 독일어로 녹음기에 녹음을 해 달라고 청했다. 내 변변찮은 청취능력 때문에 답변은 고사하고 질문 자체를 알아듣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프란쯔는 거듭되는 내 무리한 부탁에도 순순히 응하면서 “정말 흥미롭다. 마치 내가 ‘톰소야의 모험’의 허클베리 핀이 된 기분이다”라고 말하며 흥분했다.

 

  그 법석을 떨고 나니 면접까지 나흘이 남았다. 나는 녹음기로 독일어 질문을 하나 하나 들어가며 문답지를 열심히 익혔다. 처음에는 까마득했는데, 밤낮없이 매달렸더니 이틀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내 얘기처럼 풀어나갈 수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얼마간 자신이 생겼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걱정하지 마라, 절대 실패할 수 없는 프로젝트다”라고 거듭 주문을 외었다. 그러면서 내 예상문제집을 K형에게 보여 주고 한 부 베껴 공부할 것을 권했다. 그랬더니 K형은 한번 훑어보더니 “놀랍네, 고맙지만, 그냥 내 평소 실력으로 대처하겠다”고 옆으로 밀어 놓았다. 내가 생각해도 K형의 독일어 회화 실력이면, 입학면접이야 너끈히 통과할 게 분명하기 때문에 더 권하지 않았다.

 

                                                 III.

  당일 나와 K형은 조금 일찍 면접장을 찾았다. 10여명의 피면접자가 같은 공간에 머무르면서 차례로 구두로 시험에 응했다. 내가 네 번 째 였고 K형이 그 다음이었다. 시험관이 합격, 불합격은 시험 끝난 후 방 앞에 고시하겠다고 미리 말했다. 그런데 나는 그것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K형에게 물어 알았다. 앞선 번호의 응시자들은 대체로 한 학기 이상 독일어 코스를 이수한 친구들이라 독일어를 곧잘 했다.

내 차례가 되었다. 바짝 긴장했다. 입술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시험관이 그걸 느꼈는지 웃으면서 내게 긴장을 풀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대여섯 가지 질문을 차례로 던졌다. 다행이 모두가 예상문제 안의 것들이었다. 나는 준비한대로, 그러면서도 그게 내 실력인 양, 짐짓 조금 머뭇거려 가면서, 여유 있게 답변을 했다. 시험관의 얼굴에 만족한 웃음이 감돌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내 쪽으로 다가오는 다음 차례의 K형을 보았다. 그 답지 않게 무척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K형은 구두시험 내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허둥댔다. 초점에서 벗어나는 대답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수험장에서 나오며 그는 낙담한 모습으로, “분명 낙방이야”라고 혼자말 처럼 중얼거렸다.

얼마 후, 합격자 명단이 붙었다. 둘 다 합격이었다. 등급도 나왔는데, 나는 두 번째 등급인 ‘gut'(good)이었고, 그는 마지막 등급인 ’befriedigend'(satisfactory)였다. 나는 제 실력보다 월등이 잘한 점수를 받았고, 그는 평소실력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점수를 받은 셈이었다. 그런데 웬걸 K형이 ‘살았네, 살았어’라고 펄쩍펄쩍 뛰면서 나보다 훨씬 더 기뻐했다. 그러면서 내가 의외로 유창하게 독일어로 대답하는데 충격을 받고, 자신의 페이스를 잃었다고 실토했다.

 

                                             IV.

  1978년 독일 훔볼트 재단 초청으로 1년간 만하임(Mannheim) 대학에 가 있었다. 방학이 되어 빈에 갔다가 예의 프란쯔를 만났다. 빈 II구에서 보건의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 대뜸 “나는 너를 보고 한국인 독한 것을 알았다”며 “요새도 예상문제집을 만드냐”고 물었다.

  1965년 가을 독일어 구두시험은 내 삶의 과정에서 겪었던 작은 에피소드다. 그러나 나는 그 후 큰 어려움에 처하면, 자주 그 때를 떠올린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걱정마라. 분명 길이있다”라고 분발을 촉구한다. .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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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eligkeit 2017.06.24 16:05 Address Modify/Delete Reply

    독어권 유학을 꿈꾸는 저로서, 많은 힘을 얻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