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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에세이

1.4후퇴와 피난길 (IV)

2017. 4. 28. by 현강

                                       I.

 경상북도로 넘어오니 점차 대구에 가까워진다는 생각에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으나 혹한과 과로로 몸은 천근만근이 되었다. 말을 건넬 기력도 없어 그냥 발걸음만 옮겼던 기억이다. 그러다가 조금 뒤처지면 피난대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잰걸음으로 따라가곤 했다. 겨울 해가 짧아 어둠이 일찍 찾아와 아무리 애써 걸어도 하루에 50리를 넘기기 어려웠다.

 

 상주읍은 제법 큰 고을이었다. 옥천 이후 거쳐 온 여느 마을들과는 달리 길도 넓고, 집들도 큼직큼직하고 정돈돼 있어 얼마간 도시풍을 느꼈다. 상주에서 묵은 다음날 새벽, 심기일전을 위해 다른 식구들이 깨기 전에 일찍 일어나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이곳저곳 살폈던 기억이다. 그러면서 훗날 이곳에 한번 들려 오늘 내가 이곳에서 느꼈던 인상을 다시 더듬어 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상주를 다시 찾지 못했다.

 

 상주에서 얼마를 더 가 낙동강에 이르렀다. 거기서 나룻배로 강을 건넜다. 낙동강변 곳곳에서 그 전 해(1950년) 8월의 치열했던 낙동강 전투의 잔해들을 볼 수 있었다. 폭격 맞아 크게 파손된 적군 전차가 모래사장에 비스듬히 누어있었고, 그 주위에 부서진 총기류, 일그러진 군모, 찢긴 군복 조각과 파편들이 즐비하게 널려있어 처절했던 전쟁의 기억을 되살려 주고 있었다.

 

 상주를 떠난 다음, 다음날, 밤늦게 한 마을에 도착했다. 이곳이 어디냐고 물으니 <인동>이라고 했다. 후에 찾아보니 현재는 구미시 (龜尾市) 인동동(仁同洞)이 그곳이다. 허기진 배를 움켜지고 구장댁을 찾았는데, 친절한 주인장은 흔쾌하게 방을 내 주셨다. 구장님 부인이 우리가 저녁을 하지 못했다는 말에 “찬이 없어도 드시겠냐”고 물으시더니 한 밤중에 정성껏 밥상을 차려주셨다. 찬밥을 더운물에 말아, 김치와 콩나물 무침 등으로 저녁을 들었는데, 점심도 건너뛰어 무척이나 배고팠던 터라 밥맛이 정말 꿀맛 같았다. 내가 허겁지겁 밥을 먹는 것을 보시더니, 구장님은 “꽤나 배가 고팠던 모양이네”아며 안쓰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셨다. 돌이켜 보아도 나는 일생 그날 늦저녁만큼 맛있는 식사는 해 본 기억이 없다. 훗날 어떤 분이 내게 자기소개를 하면서 “인동장씨(仁同張氏)입니다”라고 하기에, 내가 “그럼 경북 인동입니까”라고 재차 물으니, 그가 “맞습니다, 제 관향이 그곳 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래서 내가 “그곳 인심이 무척 좋은 곳입니다”라며, 내 피난길 일화를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또 한 번은, 가까운 친구가 뒤늦게 인동최씨(仁同崔氏)임을 알고, 그에게도 그 옛 이야기를 전하며, 친절했던 구장님 부부에 대한 고마운 심정을 토로한 적이 있다.

 

 대구에 가까워지니, 다시 이런저런 우려가 샘솟았다. 대구가 매우 큰 도시라는데 거기 가서 어떻게 아버지를 찾을지 걱정이 돼서 어머니께 여러 차례 물었던 기억이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아버지가 평택에서 혹한에 기차 난간에 매달려 떠나셨는데 무사히 대구까지 가셨는지 그 점도 염려가 되어 영 심사가 편치 않았다.

 

 게다가 피난길이 열흘을 넘기면서  내 몸이 극도로 피폐해지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눈치를 채실까 내색을 하지 않으면서 “이제 다 왔다”고 스스로를 격려하며 걸었다. 하지만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몸은 깊은 수렁에 가라앉는 느낌이었고, 무엇보다 대구 도착 전날부터 배탈이 크게 나서 배를 움켜쥐고 한발 한발을 힘겹게 옮겼다. 어머니가 걱정이 되셔서 “안 되겠다. 하루 쉬고 가자”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막무가내로 “다 왔는데, 무슨 말에요”라며 자못 필사적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평택을 떠난 후 열사흘이 되던 날, 저녁 무렵 대구에서 마침내 그립던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아버지와의 해후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이루어졌다. 아직도 우리를 보고 크게 놀라시던 아버지 모습이 역력하다. 온 가족이 서로 부둥켜안고 한동안 말도 잃은채 눈물범벅이 되도록 울었다. 고진감래(苦盡甘來)가 바로 그것이었다. 가족 재회의 기쁨이 워낙 컸기에 그 동안 피난길의 온갖 고초는 눈 녹듯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II.

 이렇게 1951년 1월 하순, 13일간, 장장 275 Km의 긴 피난길이 끝났다. 따져 보면, 영하 10도가 넘는 혹한에 700리 가까운 거리를 매일 약 50리+ 씩 주파한 셈이다. 그 때 내가 세는 나이로 열 한 살이었는데, 만으로 따지면 9년 4개월의 어린 나이였다. 그 먼 길에 투정 한번 안 부렸으니 지금 생각해도 대견한 일이다.

 

 그래도 우리는 형편이 낳은 편이었다. 어머니 수중에 얼마간 돈과 만약을 위해 준비했던 약간의 금붙이도 있었기에 다른 이들에 비해 그때그때 먹고 자는데 상대적으로 어려움이 적었다. 그런데 별 준비 없이 길을 떠났던 대부분의 피난민들, 특히 가족 중 아픈 이가 있거나 간난아이나 노인과 함께 했던 이들은 아비규환의 피난길에서 하루하루 생명을 부지하는 것 자체가 처절한 투쟁의 연속이었다.

 

 열사흘 동안의 피난길에서 나는 내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그간 가족의 품에서 화초처럼 고이 자라 온 나는 처음으로 야생의 거친 환경에서 들꽃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세상에 눈을 뜰 수 있었다. 무엇보다 삶과 죽음이 맞닿아 있는 극한의 세계를 가까이서 목도하면서,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자면 예기치 못했던 고난과 시련, 절망과 슬픔을 마주하게 된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러면서 어렴프시나마 그 비탄의 여울을 넘어 슬기롭게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 인생의 행로라는 것을 스스로 깨우쳤던 것 같다.

  또 13일 간의 피난길을 통해 나는 괄목할 만 큼 자신감을 배양했다. 어린마음이지만, 이 엄청난 난관을 극복했으니 앞으로 무슨 일이든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이후 나는 큰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1.4 후퇴 때 그 엄혹했던 피난길을 상기하면서 스스로를 채찍질을 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 피난행렬 속에서 내가 얻어낸 가장 큰 수확은 <걸으며 생각하는> 버릇이 아닌가 한다. 나는 700리길을 걸으며 온갖 생각을 다 했던 기억이다. 당장의 힘겨운 순간을 잊기 위해 가볍고, 즐거운 공상도 했지만, 그 보다는 피난행렬을 따라가며 겪었던 갖가지 인상적인 일들을 되새겨 보기도 하고, 앞으로 겪을지 모르는 미지의 시간들을 미리 걱정도 하고, 때로는 미래를 겨냥해 마음의 준비도 해 보았다. 그러면서 이리저리 따져보고 이치를 깊이 파고드는 '궁리(窮理)'하는 버릇을 익혔다.

말하자면 그냥 걷지 않고, 생각하며 걸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7백리 피난길이 그리 힘겹고 참담하지만 않았던 기억이다.

 

                                                   III.

 나는 걷기를 무척 좋아한다. 내가 산을 좋아하는 것도 걷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걸으면서 늘 ‘생각’한다. 이것저것 따져보고 이치를 깊이 캐어 본다. 그래서 생각이 정리가 안 되고 혼란스러우면, 자주 길을 나선다. 가능하면 산이 좋다. 산에서 걸으며 생각의 가닥을 다시 잡고 깊이 파고들면 문제가 조금씩 풀리는 것을 느낄 때가 많다.

 

 나는 이 <걸으며 생각하는> 버릇을, 이곳 시골에 와서 살면서 <일하며 생각하는> 습관으로 넓히려고 애쓰고 있다. 시골에서 농사일을 하다보면, 육체적으로 고달플 때가 많다. 그런데 그냥 몸만 움직이지 않고 동시에 머리로 궁리를 함께 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일도 수월해 지고, 가외의 수확을 걷을 때가 많다. 잡초를 뽑으려고 호미질만 거듭하면 그건 단순노동이다. 그러나 손으로 호미질을 하면서 머리로 생각을 파고들면 그건 동시에 공부가 된다. 나는 시골에 살면서, 여름에 농사에 전념하고 겨울에 글쓰기를 주로 한다. 그런데 겨울에 생산하는 내 글은 여름에 일하면서 열심히 사유했던 것들이 알알이 영근 열매라고 생각한다.

 

 나는 <걸으며 생각하는>, 그리고 <일하며 생각하는> 버릇을 1.4후퇴 피난길에서 그 실마리를 찾는다. 이것은 얼마간 견강부회(牽強附會)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7백리 피난행렬 속에서 만 열 살도 안 된 어린 소년이 나름 치열하게 생각하며 세상 이치를 따져 보고 자신을 키웠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직도 그 열사흘의 피난길이 이후 내 생애에서 <산티에고의 순례길>에 못지 않은 힐링 효과를 가져 왔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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