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대전> 초입에 이르니, 길거리 전신주와 눈에 잘 뜨이는 집벽이나 문짝에 수 없는 알림 글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XX야 우리 대구로 간다>, <XX야 광주에서 만나자>, <XX야 아빠 무사하다> 등의 간단한 메모들이었는데, 피난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족과 헤어진 피난민들이 자신의 소식을 알리는 글들이었다. 많은 이들이 걸음을 멈추고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는 모습이 눈에 뜨였다. 나도 그 글들을 읽어 볼까 어머니께 여쭈어 보았더니, 어머니는 내게,

“그럴 필요 없다. 아버지는 대구로 내려 가셨다. 우리가 그곳으로 가면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잖아도 나는 앞으로 아버지를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 궁금했기에, 나는 어머니께 아버지와 무슨 말씀이 있으셨는지 재차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 만약 우리도 불가피하게 피난길에 나서게 된다면, 대구로 내려가 어디로 연락해야 되는지 아빠와 미리 다 얘기가 되었다. 아무 걱정 말고 그곳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라고 설명하셨다. 그 말씀에 나는 그런대로 마음이 놓였다.

 

대전 시내로 들어갔는데, 도립병원 못미처에 큰 개울이 있었다(나중에 확인하니 ‘대전천’이었다). 다리가 끊어져서 큰 돌을 띠엄띠엄 놓아 징검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돌들 사이가 너무 넓어 아이들은 펄쩍 뛰어야 겨우 앞으로 갈 수 있었다. 내 딴에는 무척 조심했는데도 개울을 거의 다 건널 즈음, 아차 하는 순간에 발을 잘못 디뎌 살엄음이 얼은 개울물에 빠지고 말았다. 차디찬 개울물이 허리춤까지 오르니 솜을 두어 지은 핫바지에 물이 차올라 무겁고 온몸이 얼어붙는 듯 했다. 별것 아닌 듯 헛웃음을 날렸지만, 정말 울고 싶었다.

 

대전을 빠져 나갈 무렵, 피난민 대열의 앞쪽이 웅성웅성하며 자꾸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웬일인가 알아보니, 큰 길목에서 군인들이 너무 많은 피난민들이 영남으로 내려간다고, 강제로 호남으로 보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어머니 얼굴이 금새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는 “안 되겠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대구로 가야한다“며, 우리들을 데리고 큰 흐름에서 옆으로 빠져 나왔다.

그러나 딱히 무슨 대책이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허망한 마음으로 한 동안 서 있는데,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피난민 대열 속에 친숙한 아저씨 얼굴이 보였다. 삼선교 가까이에서 잡화상을 하시는 고씨 아저씨인데, 우리 할아버지를 ‘어르신, 어르신’하고 따르던 분이었다. 나는 반가운 김에 ‘아저씨’하고 그 분께 달려갔다. 고씨 아저씨는 무슨 깃발을 들고 계셨는데, 거기에 무언가 관변 단체 이름이 적혀 있던 것 같았고, 그 뒤에 약 20명 가량 뒤를 따르는 청년들이 있었다. 아저씨는 그 단체의 대장으로 그들을 이끌고 대구로 가신다는 얘기였다. 우리 처지를 말씀드렸더니 어머니께, “걱정마십시오. 그냥 우리 대열에 끼시면 됩니다. 우리 가족이라고 얘기하면 보내 줄 것입니다”라고 별일 아니라는 듯 쉽게 말씀하셨다. 영남, 호남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에 이르렀다. 마치 큰 물길을 호남방향으로 튼 듯, 대부분의 피난민들이 그 쪽으로 가고 있었다. 나는 무척이나 긴장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고씨 아저씨가 휘적휘적 군인들에게 다가가 뭐라고 말씀하시니, 군인 한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호루라기를 호기있게 휙 불면서 우리 쪽을 영남 방향으로 큰 손짓을 했다. 그 바람에 우리는 그 대열에 묻혀 어렵지 않게 영남행을 할 수 있었다. 철체절명의 순간에 천우신조로 큰 고비를 넘긴 것이다.

 

                                      II.

<옥천>에서 우리는 오래된 개신교회 목사관에 숙박했다. 방이 정갈했고 아늑했다. 작고 아름다운 풍금이 있었고, 선반위에는 성경이 놓여 있었다. 나는 그 방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그동안 나를 옥죄던 전쟁과 피난이라는 살벌하고 긴박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마치 평화롭고 따스한 보금자리를 찾은 느낌을 받았다. 그날 밤, 천천히 잠에 빠져 들어가면서 부디 이 행복감이 영원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다. 그날 밤 나는 피난길에 나선 후 처음으로 모든 것을 잊고 편안한 잠을 잦다. 내가 훗날 독일어를 배우다가 ‘gemuetlich'(안락한, 아늑한, 기분이 좋은)라는 어휘를 처음 접할 때, 불현듯 그날 밤 내가 그 방에서 느꼈던 포근하고 안락한 정취를 연상했다.

 

그런데 비교적 또렷했던 내 기억이 충청북도에서 길을 잃고 헤맨다. <옥천>을 떠나 경상북도로 넘어갔는데, 그 경로가 확실치 않다. 분명한 것은 경북 <상주>로 갔다는 것이다. 피난민 대열을 따라 그 흐름대로 발을 옮겼고, 그 길목에 이렇다한 도시나 큰 마을이 없었던 것이 이유가 되겠지만, 그 행로가 내 기억의 창고에서 가장 희미하고 불분명한 부분이다. 그 나마 어렴풋이 내가 기억하는 것은 한 겨울의 칼바람을 맞으며, 강(혹은 큰 개울)을 따라 황량한 시골길을 마냥 걸었던 것, 그러다가 한 밤중에 광산을 끼고 높은 고개)를 넘었는데, 그 고개가 바로 경북으로 넘어가는 도계(道界)라는 얘기를 들었던 일 등이다. 그 날 밤 천신만고 끝에 고개를 넘어 작은 마을에 잘 곳을 마련했는데, 단지 산 하나를 넘었는데 집 주인 말투가 완전히 달라 놀랐다. 비교적 느리고 부드러웠던 충청도 사투리가 불시에 투박하고 억양이 뚜렷한 경상도 말씨로 바뀐 것이다.

나는 그동안 <옥천>에서 <상주>까지의 구체적 행로가 무척 궁금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생존해 계실 때, 한번 여쭤보았더니 어머니도 의 기억 창고도 그 부분에 관해서는 내 것 만큼 빈약했다. 내가 “내 기억에는 그 광산이 흑연광산이었던 것 같은데”라고 말씀드렸더니 “왜 생뚱맞게 흑연광산이야. 석탄광산이었던 것 같은데”라고 말씀하셨다. 지도로 살펴보니 옥천에서 상주로 넘어가는 길목은 옥천군, 영동군, 보은군, 괴산군 등 여러 곳이었다. 그런데 위쪽으로 보은군, 괴산군까지 올라갔을 것 같지는 않아 아마도 옥천군이나 영동군 어디를 통해 도계를 넘어갔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옛 기억을 더듬고 그 희미한 기억에 합당한 경로를 찾아 나섰다. ‘구글’을 통해 이런 저런 자료를 찾다가, 옥천지역 주간신문인 ‘옥천신문’에서 ‘옥천군 청산면 명티리’에 대한 기사를 발견했다. 내용인 즉, 그곳은 옥천의 동쪽 땅끝마을로 한때는 흑연광산으로 번성했으나 1970년대 이후 사양길로 들어가 90년대에 이르러 폐광이 된 지역인데, 현재는 10여 가구만 남았다는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 그곳에 흑연광산이 있었다는 사실에 필(feel)이 꽂혀, ‘옥천문화원’의 자료와 옥천군 지도를 통해 그곳에 관한 정보를 탐색했다. 그랬더니 여러 가지 점에서 내 기억과 대체로 맞아 떨어졌다. 옥천읍에서 명티리로 오는 길가에 큰 개울이 있고, 명티리에서 팔음산(해발 772m) 동쪽 능선을 타고 도계를 넘으면 상주시 화동면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팔음산 자락에 이었던 흑연광산의 이름이 ‘월명(月明)광산’이었다는 것이다. 백 퍼센트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그 추운 겨울날 한 밤중에 넘었던 그 높은 고개가 바로 그곳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다면 옥천읍에서 청산면 명티리를 거쳐 상주군(현재 상주시) 화동명 양지리로 넘어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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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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