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한 겨울 이맘때면, 지금부터 60여 년 전, 1951년 1. 4 후퇴 때 내가 겪었던 고단한 피난길이 자주 생각난다. 열 한 살짜리 소년이 체험한 그 해 겨울은 무척 혹독했다. 그러나 그 때 그 피난길은 힘겹고 고통스러웠던 아픈 추억 보다는, 철없던 어린 소년의 자의식(自意識)을 크게 키워 준 매우 값지고, 소중한 기억으로 내 뇌리에 남아 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1950년 12월 중순부터 이듬해 1월에 이르기 까지 약 한 달여의 경과가 내 머리에 아직도 비교적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는 일이 있다. 피난길 셋째 날, 충남 소정리에서 나는 지친 다리를 끌고 피난 대열을 따라 가다가, 문득 “먼 훗날 내가 이 극한의 체험을 잊지 않고 되새겨 보려면 일기는 못써도 간단한 메모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나름 역사기록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아니, 그럴 필요가 없지. 어떻게 내가 평생 이 처절한 고난의 역사를 잊을 수가 있을까? 결코 그럴 리 없지” 하며, 단호하게 그 생각을 떨쳐 버렸다. 그런데 군데군데 불분명한 대목들이 있지만, 당시 내가 겪은 일들 큰 줄거리가 아직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그 때 그 어린 소년이 판단이 크게 빗나가지 않은 것 같다.

 

다수의 정치학자들은 시민들의 의식과 삶에 가장 큰 충격을 주는 사건으로 전쟁과 경제공황을 꼽는다. 자의식의 성장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나의 청소년기도 한국전쟁, 그것도 1.4 후퇴를 분수령으로 전, 후로 갈린다. 서울에서 중산층 가정의 삼대독자 외아들로 태어난 나는 열 살까지 세상 물정 모르고 철없는 응석받이로 자랐다. 그러나 불시에 찾아 온 전쟁의 격랑과 그것이 몰고 온 치열한 실존적 체험이 무척이나 짧은 기간 동안에 나를 내적으로 크게 키웠다. 엄동설한에 생사를 넘나드는 피난대열 속에서 나는 매일 매일 애어른으로 바뀌어 갔다. 그 때 무엇보다 깊이 생각하는 버릇을 익혔던 것 같다. 늘 타인의 도움을 기다리던 화초 같던 소년이 나이답지 않게 세상 이치를 따져 보고, 고민하고, 스스로 결정하는 자율적인 소년으로 크게 변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1951년 1월의 피난길은 ‘ 참 나’를 찾아가는 고행의 순례길이었다. 아래에서 몇 번에 나누어 그 과정을 살펴본다.

 

                                       II.

1950년 12월 중순, 서울은 다시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승승장구, 북진을 계속하던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대량 개입으로 전황이 역전, 급기야 12월 4일에는 평양을 철수했고, 전선은 38선을 향해 밀려 내려오고 있었다. 동부전선에서 전설적인 흥남철수가 이루어진 것이 12월 15일 이었다. 북한군의 6.25 남침으로 세 달 가까이 공산치하에서 질곡의 세월을 보냈던 서울 시민들은 그 아픈 기억을 되살리며 너나 할 것 없이 피난길에 나설 채비를 시작했다. 이후 서울은 급속도로 비어갔다.

 

12월 20일로 기억한다. 아버지가 우리 식구들에게 구체적으로 피난 계획을 말씀 하셨다. 일단 엄마와 누나와 나는 평택 외가로, 그리고 증조할아버지와 조부모님, 그리고 네 명의 고모들은 아버님 고향인 용인으로 피난을 가야겠다는 말씀이셨다. 그리고 전황을 살펴보며, 이후의 행동을 결정하자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서울에 좀 더 머무르시다가 정 상황이 악화되면 그 때 서울을 떠나시겠다는 생각이셨다. 다음 날, 우리세 식구는 평택으로 떠났고, 곧 이어 아버지가 당시 90세의 증조할아버지를 비롯한 나머지 식구들을 용인으로 모셨다.

1950년 12월 중반부터 이듬해 1951년 1월 4일 서울이 북한군에게 함락되기 까지 불과 2주 남짓의 짧은 기간 동안에 서울은 완전히 공동화(空洞化) 되었다. 서울에 남은 것은 몸을 가누지 못하는 노인들과 환자들, 그리고 그 가족 극소수뿐이었다. 그 몇몇 안 되는 사람들 중에 작가 박완서가 포함되고 있었다. 그녀의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속편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를 보면, 텅 빈 서울과 그 안에서의 극한의 소외와 처절한 삶이 기록되어 있다. 이 소설들은 하루아침에 140만명 (1949년 통계)의 거대 인구가 썰물처럼 빠져 나간 허허한 대도시 속에 초개(草芥)처럼 남겨진 주변인들의 황폐한 생활사(生活史)에 대한 사실적, 구체적 기술이라는 점에서 매우 소중한 자료다.

 

                                                   II.

평택 외가에서 년 말을 맞았다. 외가라고 하지만 이미 외할아버지, 할머니는 타계하셨고, 외당숙을 비롯해서 외척 몇 분이 계셨다. 평택 읍내에서 한 20분 떨어진 외당숙 댁에 머물렀는데, 나는 아침만 먹으면 부리나케 평택역으로 달려가서 역전에서 서성거렸다. 전황도 궁금했고, 혹시 아버지가 내려오실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그랬던 것 같다. 역전에서 들은 바로는, 중공군의 ‘신정공세’로 유엔군의 서울 철수가 시간문제라는 것이었다. 불안감이 엄습했고 무엇보다 아버지의 안위가 크게 걱정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 1951년 새해를 맞았다. 나는 11살이 되었다. 마음은 초조하고 답답하기 그지없었지만, 어머니께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내색은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늘 그렇듯이 의연하셨다. 가사 외에 시간에는 차분하게 묵주신공을 열심히 드리면서, “걱정마라, 하느님이 도와주실 게다”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돌아보면 그 때 어머니가 30대 중반을 조금 넘기신 나이이셨는데, 어찌 그리 어른스러우셨는지 지금 생각해도 경탄스러울 뿐이다. 이미 그 때 어머니 나이의 두 배 이상을 살아 온 나는 아직 그 반도 못 따라가니 부끄러울 뿐이다.

1월 3일 밤으로 기억된다. 아버지께서 크게 지친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뒤늦게 서울을 빠져 나오셨다고 말씀하시면서, 정통한 소식에 따르면 유엔군의 철통 저지선이 오산-원주 선에 구축되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다음 날(1월 4일) 서울이 공산군에 의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튿날 아버지는 어머니와 한 동안 심각한 표정으로 말씀을 나누시더니. 전황이 위중하니 형편상 아버지 혼자라도 미리 남쪽으로 내려가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두 분 표정이 너무 단호 하셔서 나와 누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날 밤 늦은 시간에 아버지는 평택역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마지막 열차에 오르셨다. 평택역에 잠시 기착한 열차 주변은 한마디로 악머구리 끓듯 했다. 이미 기차 안은 피난민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는 초만원이었다. 기차지붕 위에도 많은 사람들이 촘촘히 웅크리고 앉았는데, 얼핏 보기에는 서로 엉켜있는 듯 했다. 김환기 화백의 1951년 작 <피난열차>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처절하고 훨씬 리얼한 장면이었다. 아버지는 기차 안으로의 진입이 불가능 하자, 이미 두 사람이 엉거주춤 서있는 기차 난간에 몸을 바짝 밀어 넣으며, 밖을 향해 서신 채로 떨어지지 않게 자신의 몸을 굵은 줄로 단단히 묶으셨다. 곡예 하듯 아슬아슬한 모습이었다. 그리고는 걱정 말라시며 우리들에게 작별을 고하셨다. 그 아찔한 모습을 보며 나는 울음이 북받쳤다. 멀리 점점 작아지는 열차의 난간에서 아버지는 우리에게 계속 손을 흔드셨다.

자정 가까운 시간, 살을 에는 추위에 집으로 돌아오면서 우리 세 식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통곡하고 싶은 심경이었지만,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애써 아픔을 삼켰다.

 

이틀 뒤 1월 7일 마침내 수원도 적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전선이 남하하면서 평택까지 포성이 은은히 들려왔다. 어머니 얼굴에 짙은 불안의 그림자가 드리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1월 9일, 공산군이 오산 가까이까지 내려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날 아침 어머니는 나와 누나에게 “도저히 안 되겠다. 우리도 피난을 떠나자”라고 결연하게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서둘러 채비를 하셨다. 내게는 두툼한 내복과 누빈 솜바지 저고리를 입히시고 방한모까지 씌우셨다. 피난 보따리를 챙기시는 데, 거기에는 평소에 어머니가 애지중지하시던 ‘싱거 재봉틀’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아니 이 무거운 것을 어떻게 가져가, 말도 안 돼”하고 이의를 제기했다. 그랬더니 어머니는, “피난 가서 무얼 먹고 사니, 바느질이라도 해야지”하시며 막무가내로 싱거 미싱을 단단히 묶으시고 멜빵에 이으셨다. 어머니는 금붙이와 옷가지 등을 고루 챙기시고, 내가 질 작은 등짐도 마련하셨다. 워낙 약골인 누나에게는 몸만 따라 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우리 세 식구가 막 떠나려는데, 외당숙께서 16살짜리 자신의 아들도 함께 데리고 가 달라고 어머니께 간곡하게 부탁을 하셨다. 말씀인 즉, 그 형(내 외 육촌)이 속은 어린애인데, 허우대는 커서 만약에 공산군이 여기까지 내려오면 군에 끌려갈게 불 보듯 뻔하니 부디 함께 가라는 것이었다. 나나는 내심 크게 반겼다. 매일 나와 친구처럼 어울리던 착한 형과 함께라면 피난길에서 큰 의지가 될 것 같았다. 싱거 미싱은 그 형이 메었고, 그 바람에 어머니의 짐이 많이 가벼워 졌다.

 

마지막 기차도 떠난 평택역은 황량했다. 그런데 마침 역 한 구석에 레일 위로 석탄 등을 나르는 작은 수례를 발견했다. 우리는 이 수례위에 짐을 싣고 밀어 보았더니, 웬걸 힘 안 드리고 잘 미끄러져갔다. 그렇게 수례를 밀며 철도를 따라 얼마를 갔다. 그러나 몇 Km 못가 철교를 만나니 더 이상 전진이 너무 위험했다. 다시 짐을 나누어지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피난대열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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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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