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나는 대학에서 정치외교학과를 다녔다. 왜 딱히 그 전공을 택했는지는 조금 불분명하다. 그래도 내가 어려서부터 정치현상에 대해 관심이 컸던 게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한다. 중학교 1 학년부터 동아일보의 게재되었던 백광하의 명 정치단평 <단상단하(壇上壇下)>에 빠져 밥은 걸러도 그 칼럼은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정치라는 영역은 내 공부 대상이었을 뿐, 내가 직접 정치를 해 보겠다는 생각은 그 때나, 그 이후나 추호도 없었다. 내성적 성격이고 권력추구나 승부사 기질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내 스스로 정치라는 거칠고 혹독한 바닥에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단지 일찍부터 정치가 우리의 삶에서 무척 중요한 영역이라는 점을 절감했고, 그것을 관찰하고 판단하고 예측하는 일이 그리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대학 2학년 때 4.19 혁명을, 그리고 이듬해에 5.16을 겪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솟구쳤던 기대와 열망이 순시 간에 무너져 엄청난 좌절과 상실감에 휩싸였다. 그런 가운데 장준하와 함석헌의 <사상계>가 유일한 위안이자 희망의 푯대였다. 시대는 암울했지만, 졸업이 가까워지면서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거창한 꿈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그냥 어려운 현실 속에서 내가 해야 할 몫이 무엇인가를 모색하는 소박한 심정이었다.

 

                                  II.

  큰 방향은 비교적 일찍 정해졌다. 내가 워낙 다른 재주가 없고, 그나마 곧잘 하는 것이 공부와 글쓰기이니 앞으로 내가 할 일도 이 동네를 크게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했다. 다음, 내가 돈을 벌고 사적 이익을 챙기는 일 보다는 공공성을 띤 일, 명분이 있는 일을 좋아 하니 사적 영역보다는 공적 부문에서 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도 함께 했다. 그러면서 가능하면 내가 전공했던 정치학이 쓰임세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염두에 두었다.

 

  그렇게 방향을 정하니, 내가 갈 길은 학자, 언론인, 그리고 공직자 세 갈래였다. 셋 어느 것도 내 적성에 맞는 듯싶었고, 내심 얼마간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또 이들 일들이 모두 나름 가치 있는 일,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대학 은사 중 서석순 교수님이 계셨는데,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함께 하셨다. 학자이면서, 언론을 통해 사회적 기여를 하시는 그 분의 모습이 무척 근사해 보였다.

 

  그런데 학자의 길은 너무 멀어 보였다. 또 오랜 뒷받침이 필요한데 그게 부담스러웠다. 또 공직자가 되려면 어쩔 수 없이 고시를 거쳐야 되는 데, 고등고시 제도가 내가 대학 4학년 때 1962년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두어 해 후에 새로운 형태로 다시 시작한다는데 그걸 겨냥해 장기전을 편다는 게 무모해 보였다. 그래서 일단 신문기자가 되겠다는 작정을 했다. 대학 다니면서 한때 <연세춘추> 기자를 했던 것이 내가 이쪽으로 생각을 굳히는데 얼마간 작용을 했던 것 같다.

 

  언론사 시험을 치려면, ‘군필’이 필수였다. 때가 5.16 직후라 군대를 다녀오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모두가 군대를 빨리 가려고 애썼다. 그 때문에 신체검사가 꽤 까다로웠다. 그런데 눈이 나빠 신체검사에서 계속 떨어졌다. 내가 당시에는 희귀한 3대 독자라 6개월 복무면 군대를 필할 수 있는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응시 자격이 안 되어 언론사 시험은 포기했다. 무척 아쉬웠다. 궁리 끝에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 진학했다. 일단 거기서 학업을 이어 가면서 다시 내가 나아갈 길을 차분히 탐색해 보자는 심산이었다.

 

  행정대학원에서 두 학기를 마칠 무렵, 나는 공부 쪽으로 내 갈 길을 확정했다. 당시 서울대학교가 미국의 미네소타 대학교와 협약을 맺어 미네소타 대학으로부터 도서지원을 받았는데, 신간 사회과학 도서들 대부분이 행정대학원으로 왔다. 당시 도서관장 A 교수님의 조교를 하던 나는 정치학, 행정학, 사회학 분야의 최신 명저들을 매우 일찍, 손쉽게, 가까이 접할 수 있었다. 생전 처음 교육과정과 관계없이 내 스스로 즐겨서 자율적으로 공부하는 방식을 익혔다. 밤 새워 책을 읽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지적 충만감에 빠졌다. 그러면서 멀고 힘겨워도 이 길을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III.

  유럽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대학에 발을 붙이고 35여 년 간 교수로 재직했다.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이 무척이나 즐거웠고 행복했다. <일>하는 자체가 내게는 늘 <놀이>였다. 내가 재밌게 놀이를 하는데, 월급도 주고 세상에서 교수라고 대접도 해 주니 그 보다 좋은 직업이 있을까. 글에 밀려 밤샘도 많이 했지만, 힘들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우수한 제자를 키우는 일에도 큰 보람을 느꼈다. 정치학과 행정학을 넘나들며, 지적 관심을 현대공산주의 연구, 비교정책, 사회정책 등으로 넓혔다.

 

  유신시대, 그 어둡고 긴 터널을 거치는 동안, 또 5공 시절, 그리고 1987년 시민혁명 이후 까지 약 20년간 유수한 신문, 잡지 등에 수많은 정치평론을 썼다. 거듭되는 혼돈과 격랑 속에서 시대가 요구하는 발언을 하는 것이 내 사회적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대체로 비판적 논조였으나, 극단에 치우치거나 <진영논리>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면서 대학, 학회, 시민단체 등이 발간하는 신문이나 잡지, 뉴스레터를 직접 창간하거나 편집하는 일에도 꽤나 많이 관여했다. 그러다가 2003년에는 <중도개혁>의 기치 아래 사회지도층 인사 650명과 더불어 인터넷 신문 <업 코리아>를 창간하고 그 대표직을 맡았다. 끝내 좌초했으나 후회하지는 않았다. 돌이켜 보면 한 때 언론인이 되고자 했던 젊은 날의 열망과 바람이 내 내면 속에 잠류했다가 이렇게 여러 갈래로 용출한 것이 아닌가 싶다.

 

  문민정부가 출범한 후 1995년 말 교육부장관으로 부름을 받았다. 한 때 막연히 공직을 장래의 직업으로 생각해 본 적은 있었으나실 정치세계에는 근접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관직 발탁은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이후 참여정부에서 또 한 번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직을 맡았다. 국정에 두 번, 참여하면서 그간 이론적으로 연마했던 내 전공 지식과 언론에 투사했던 개혁의지를 국정에 실천적으로 접목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절박한 현안 과제의 수행 못지않게, 개혁의 관점에서 중. 장기적 정책기획을 하는 일에 큰 힘을 쏟았다. 특히 새로운 블루 오션으로 교육복지 분야를 개척하고, 교육정보화에 박차를 가하는 등, 정책쇄신에 큰 정성을 기울였다. 그간 학자로서 또 평론가로서 학습, 연마하고 고뇌하며 축적했던 내 모든 열정과 능력을 나랏일에 쏟았다. 벅차고 힘겨웠지만 몸과 마음을 후회 없이 불살랐던 기간이었다.

 

                                IV.

  얼마 전 나를 찾아 온 초로(初老)의 한 제자가 “30여 년 전 강의 시간에, 선생님께서 학자, 언론인, 공직자가 내가 대학 때 겨냥했던 세 가지 직업이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생각해 보니, 선생님은 결국 세 가지를 다 이루신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아!’ 하며 잠시 숨을 멈췄다. 그가 일깨워 주지 않았다면, 20대의 소박한 꿈과 이후의 내 생애를 연계해서 생각하지 못했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늘 사람의 생애는 흩어져 있는 낱낱의 기록이거나 성쇠(盛衰)의 과정이 아니라, 꿈을 향해 진행되는 축적과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나의 지난 삶의 역사가 한낱 빛바랜 기억들의 조각들이 아니라, 서로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누적적으로 진행되어 오늘의 나를 만들고, 또 앞으로의 내 여생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믿고 싶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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