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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에세이

전병재 교수 팔순에 부쳐

2016. 6. 14. by 현강

‘영원한 장년’ 전병재 교수님

 

 

I.

전병재 교수님은 나와 30년 가까이 같은 대학교에서 함께 교수로 재직했던 분이다. 입학으로 따져 연세대학교 정법대학 세 해 선배로 여러 해 여의도에서 이웃으로 지냈고 전공도 전 교수님이 사회학, 내가 행정학이니 비교적 가까운 이웃 학문이어서 학문적으로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눠왔다. 국제회의에도 함께 참석했던 인연도 있다. 이런 저런 연고로 전 선배와는 이른바 ‘절친’은 아니지만, 실로 오랜 포도주처럼 곰삭은 사이이다. 내 머리에 떠오르는 전 교수님의 영상은 아직도 30년 전 함께 자카르타 행 비행기에 오르던 장년의 모습 그대로인데, 그가 벌써 8순이라니 정말 믿기지 않는다. 많은 이가 세월 따라 변했지만 그는 정말 한결같은 분이다. 가장 최근에 만난 것이 작년 가을쯤이었는데, 아직도 초로(初老)의 모습을 지닌 옛 선비풍의 단아한 풍모, 믿음직한 언행, 조용한 미소도 그렇거니와, 균형과 절제의 미덕을 갖춘 사고방식이나, 본질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도 옛날 그대로다.

 

II.

전병재 선배를 생각하면 내 입가에 웃음이 감돈다. 비교적 일찍 도미하여 누구보다 빨리 서양문물에 접하고 현대학문을 익힌 분인데, 서양사람 흉내 보다는 옛 선비들이 즐겨했던 서(書), 예(禮), 악(樂), 사(射)를 생활 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는 특이한 분이다. 학자로서 예절 바르고, 서예를 익히며 예스러운 시조와 창, 퉁소 등을 즐기는 것에 성이 차지 않아 활쏘기까지 하는 분이다. 그가 사직동 황학정을 자주 찾아 국궁을 즐겼던 것을 보면 문약한 선비가 아니라 약간의 한량기도 곁들인 문무겸전의 전인(全人) 지향의 선비라는 느낌이다. 그의 이러한 예스런 선비풍은 그의 고향인 경남 거창의 선비문화와 무관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거창을 일찍이 영남 사림파 계보의 중심적 인물이었던 김종직, 김굉필 등과 인연이 깊고, 특히 남명 조식을 필두로 하는 강우학맥은 영남 선비정신의 정신적 지주가 아니던가.

 

이렇듯 그의 행동거지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단아(端雅)한 선비의 이미지다. 추호의 흐트러짐이나 거친 면이 없이, 언제나 단정. 침착하고, 얼마간의 여유가 감돈다. 부드러운 가운데, 꼿꼿한 기개와 청정한 마음가짐이 엿보인다. 그와의 오랜 교유에서 나는 한 번도 그가 독선이나 과욕, 격정이나 흥분을 드러낸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흔히 만나는 시체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다.

 

전병재 교수는 동양 선비의 단아한 기풍 못지않게 서양의 젠틀맨십의 속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 늘 바르게 예를 지키며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가꾸고, 아울러 사회적 의무를 충실히 수행한다는 면에서 그는 영락없는 서양 신사의 품격을 지니고 있다. 그에게서 간혹 발견되는 얼마간의 귀족적 취향도 옛 영국의 젠트리를 닮은 측면이 없지 않다. 그리고 보면 고(高)수준의 인격과 학식을 갖춘 전인적 인간상(人間像)을 추구하는 데는 동서양의 별 차이가 없는 듯 하고, 그러한 맥락에서 그는 동서를 아우르는 선비이자 신사의 좋은 전범(典範)이 라고 말할 수 있다.

 

전병재 선배는 결코 큰 소리치고 드세게 나서고 으스대지 않는다. 그는 얼마간 한걸음 물러서서 침잠한 자세로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자신의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는 조용한 실천가이다. 그가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초대 학과장(1973-1975)으로서 학과 창설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고, 대학원 교학과장(1976-1978)으로서 초창기 연세대 대학원의 바탕을 세우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어 그는 연세대학교 문과대학장(1997-1999)으로서 대학의 학문성을 높이고, 인화를 도모하는 좋은 리더십을 선보였다. 세월이 유수 같아 그가 연세대학교에 봉직한 기간만 30년, 그리고 그 후 10여년이 지났다. 그러는 가운데, 그가 직접 산파역을 담당하고 심혈을 기울여 키웠던 연세대학교 사회학과가 이미 창립 40주년을 훌쩍 넘어 국내 사회학을 주도하는 우람스런 큰 나무로 성장했고, 그가 손수 키운 애제자가 연세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하는 큰 경

사까지 맞았다. 이렇게 볼 때, 그의 생애에서 가장 핵심 부분인 연세대학교에서의 삶의 족적은 성공과 축복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전병재 교수님은 그의 생애주기의 모든 단계에서 익힌 다양한 생활경험과 능력을 차곡차곡 쌓아, 거기서 수확한 결실과 지혜를 조용히, 그리고 고르게 주변과 나누며 오늘의 자신의 인격을 구축한 분이다.

 

III.

내가 전 교수님과의 추억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1985년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렸던 <아시아 사회과학연구회>(ASSREC)가 주최한 국제회의에 함께 한국대표로 참가했던 일이다. 그 때 우리는 왕복 항공 여행길을 같이 했고, 3일 간의 국제회의 기간을 포함하여 5일 간을 붙어 지내며 많은 생각을 나누며 서로를 익혔다. 이미 까마득한 옛일이 되어 버렸지만 그 몇일 간이 다시 아름다운 추억으로 다가온다.

 

그 회의에는 전 교수님과 나 이외에 이미 고인이 되신 고려대 사회학과의 홍승직 교수님도 함께 참여하셨는데, 내 기억으로는 홍 교수님은 다른 비행기를 타셨던 것 같다. 그래서 긴 비행시간 동안 전 교수님과 비교적 많은 생각을 나눴다. 평소에 말수가 많은 분이 아닌데, 그 때는 전 교수님이 스스럼없이 적잖은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다. 그래서 나는 전 교수님의 개인 역사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고향인 거창에서의 어린 시절, 그리고 부산에서의 고교 및 연세대 법학과 시절의 몇몇 기억을 되살리셨다. 특히 나는 그가 연세대 법학과 대학원 시절, 미국유학을 준비하면서 1963-1965년간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으로 고 함병춘 교수님이 주재한 <한국 사람들의 법의식에 관한 연구>의 현지조사에 직접 참여했던 얘기를 흥미있게 들었다. 그 조사는 한국에서 이루어진 가장 초기의 현대적 사회조사 중 하나였기에, 당시 전 교수님 말씀을

 들으며, 나는 그가 전공을 법학에서 사회학으로 바꾸신 데에 분명 그 조사연구가 크게 작용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발리 회의에서 가장 두드러졌던 일은 그 회의에 북한 대표들도 참여했다는 일이었다. 나는 10대 초 경험한 한국전쟁 때 이후 그곳에서 북한 사람을 처음 만났다. 적잖은 호기심과 얼마간의 긴장을 느꼈다. 회의장 자리 배치가 알파벳 순으로 되어 남 북한 대표단이 이어 앉았는데, 마침 내 옆자리부터 북한 대표단이 시작되어 사흘간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가까이 관찰하며 느낄 수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그들은 북한 사회과학원 소속 학자들이었는데, 그들 세 명 중, 상대적으로 목소리가 컸던 한 명은 분명 정치요원 같았다. 우리는 그들에게 예의를 갖춰 대하고 가능하면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들은 항상 함께 움직였고 서로를 의식하며 행동하는 듯 했는데, 무엇보다 어려웠던 것은 그들이 어떤 날은 우리 대표들에게 비교적 친절하게 대하고 다른 날은 무척 거칠고 공격적으로 대하는 등, 그들의 행동이 무척 불가측적이고 종잡을 수 없었던 일이다. 회의에서 그들 중 한명이 간략히 보고형식의 발표가 있었을 뿐, 별로 토론에 참여하지 않았고, 그렇다 보니 그들의 학술회의에의 기여는 전혀 없었다. 나는 하루를 지나고 나면서, 이들과의 지적 대화나 토론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 그냥 의례적인 대화만을 나눴다. 그런데 전병재 교수님은 사뭇 진지한 모습으로 시종 그들과의 대화를 꾀했던 기억이다. 현대 마르크시즘에 대해 지적 관심이 많았던 전 교수님은 북한에서의 마르크시즘 연구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묻는 듯 했다. 그리고 나서 내게, “아니 네오 마르크시즘의 개념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거에요. 전혀 대화가 이어지지 않으니” 라며 안타까워 했다.

 

발리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해변을 거닐며 천혜의 그곳 자연 풍광을 즐겼고, 밤에는 그림자 연극 등 그곳 특유의 예술행사에 참여하는 등 발리문화에 흠뻑 빠졌다. 회의를 마치고 자카르타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인도네시아의 정신적 고향으로 알려진 <족 자카르타>에 들렸다. 그곳에서 세계 3대 불교 유적지로 꼽히는 보로부두르(Borobur) 사원을 찾았는데, 그 규모의 웅장함과 낱낱의 정교함에 매료되어 감탄사를 연발했다. 기억나는 것 중 하나는 족 자카르타에서 전 교수님이 택시를 잡더니, 운전기사에게 그곳에서 가장 좋은 음식점으로 안내해 줄 것을 청했던 일이다. 운전기사는 곧장 어느 레스토랑으로 우리를 안내했고, 거기서 우리는 맛있게 인도네시아 식 스테이크를 들었다. 그러면서 나는 전 교수님이 좋은 음식의 풍미를 즐기는 미식가인 것을 직감했다. 약간의 귀족적 취향이 느껴지면서, 역시 '멋쟁이‘라는 생각을 했다.

 

 

IV.

2002년 정년 후 전 교수님은 불교와 마음공부에 심취하신 듯하다. 듣기로는 지리산 ‘고요한 소리’ 역경원에 머물며, 부처님이 직접 설법한 내용을 빠리어(범어)로 기록해 놓은 초기불전 ‘이띠붓따까’의 번역 사업에 참여하신다고 한다. 역경원의 어른인 활성스님이 바로 전 교수님의 고교 동창이라는 얘기도 함께 들었다. 전 교수님은 그의 새로운 공부를 ‘참 공부’라고 부른다는 전언(傳言)이었다. 보기에 따라 인생반전인 듯싶은데, 나는 그렇게 만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이 인생 2막의 새로운 시도임에는 틀림없지만, 사회심리학을 전공하며 평생 사람과 사람들 마음공부를 해 왔던 전 선배에게는 이제껏 해 왔던 마음공부의 ‘심화’ 과정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쨌든 전 선배가 이제 <반 스님>이 되셨으니 만나기 어렵겠다 싶었다. 가끔 그의 안부가 궁금했지만 불경연구와 명상세계에 침잠해 있는 분에게 연락하는 것도 도리가 아닌 것 같아 연락을 삼갔다.

 

그러던 중 2004년으로 기억하는데 내가 정부에 관계할 때 공무로 경남 창원에 갔었다. 그건데 그곳 교육감 하시는 분이 내게 느닷없이 “연세대에서 함께 계셨던 전병재 교수님 아시지요?”라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했더니 “혹시 통화라도 하시려면 제가 연결해 드리지요”라는 게 아닌가. 내가 반기며 그렇게 해 달라고 하니, 몇 분 후에 전 교수님과 전화 연결을 해 주었다. 그래서 유선을 통해서 나마 오랜 만에 전 교수님과 반가운 통화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때 상황이 긴 이야기를 할 형편이 아니어서 통화는 서로 안부를 나누는 수준에서 아쉽게 끝났다. 그러나 그의 편안한 음성과 조용한 웃음소리로 보아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가 작년에 실로 오랜만에 전 교수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정년퇴직 후 10년 째 강원도 고성에 사는 내가 모처럼 서울에 갔는데, 연세대 문과대학에 재직했던 교수 한 분이 내게 전화를 걸어 퇴직 교수 몇 분이 만나 담소하는 중에 내 얘기가 나와 목소리를 들을 겸 연락을 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시간에 여유가 있어 그 모임장소로 갔더니 웬걸 전 교수님이 그 자리에 함께 계셨다. 10여년 만에 반가운 해후였다. 그는 여전했다. 선비풍의 단정한 모습, 입가에 조용한 웃음, 대화에의 적절한 참여, 균형 잡힌 사고, 옛 모습 그대로였다. 8순이 내일인데 건강도 무척 좋아 보였다. 그와 헤어지면서 나는 생각했다. 그렇지 전 교수님이 크게 변 할리 없지. 원래 한결같은 분이 아닌가. 학문적으로 사람들 마음을 탐구하던 분인데, 이제 영성적으로 그 세계에 다가 갔지만, 공부꾼이 계속 공부를 하고 있고, 무엇보다 ‘참 공부’에 정진하신다니, 그 이상 행복한 삶이 어디 있겠나. 또 지리산 산자락에서 오랜 기간 마음수련에 전념하셨으니, 그 분의 좋은 품성이 변화하기 보다 더 내적으로 심화되었을 게 아닌가.

 

 

V.

그 후에 통화로 보아, 아마도 전 교수님은 이제 거창 고향으로 귀향하신 게 아닌가 싶다. 그가 어디에 사시던, 또 무엇을 하시던, 내 뇌리에 각인된 그의 모습은 청년이나 노년이 아닌 <품격있는 장년(壯年)>이다. 청년기에 만나, 함께 인생의 황혼에 이르렀는데, 그의 이미지가 영원한 장년으로 인식되는 것은 ‘웨’일까. 아마도 그가 평생 유가와 불교를 넘나들며 쌓아올린 ‘중용’(中庸)의 내공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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