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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에세이

1969/1970년 겨울, '빈 숲속의 이야기'

2018. 12. 30. by 현강

                     I.

  1969년 가을, 오스트리아 빈(Wien)에서 나는 박사학위 공부의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 때 나는 내 처와 막 첫돌을 지난 딸 수현이와 함께 빈(Wien) 교외 볼퍼스베르그(Wolfersberg)라는 동네에 살고 있었다. 그곳은 유명한 ‘빈 숲(Wiener Wald)’에서 멀지 않은 작고 아름다운 동화 같은 마을인데, 주위의 목가적인 풍경이 일품이었다. 내가 살던 집은 지방에 사는 돈 많은 출판업자의 작은 별장이었다. 나는 운 좋게 집과 정원을 보살펴 주는 조건으로 그 집 별채를 세내지 않고 빌려 쓰고 있었다. 제법 큰 정원에는 체리나무를 비롯해 다양한 종류의 과일나무, 꽃나무들이 가득했고 내가 사는 별채 앞에도 예쁜 장미 꽃밭이 있어, 봄, 여름에는 마치 집 전체가 꽃잔치를 벌리는 것 같았다.

 

  말하자면 내가 그 집 관리인이었는데, 정원사가 계절마다 와서 전지(剪枝)를 하는 등 정원을 보살펴 주기 때문에 실제로 나는 그곳에 그냥 사는 것 외에 딱히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주인내외는 한 달에 한번 정도 주말에 와서 하루 자고 갔는데, 그 때마다, 그 집이 한동안 비어있었는데 우리가 집을 잘 지켜줘서 이제 안심이 된다며 고맙다고 인사를 하곤 했다.

 

  돌이켜 보면 그 집에 살았던 약 1년 반이 내 빈 유학시절 중 가장 평온하고 행복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공부도 순조로웠고 삶도 안정되었다. 그 때 한 가지 걱정은 내 처가 두 번째 아이를 가졌는데, 이듬해 6월경 출산 예정시기가 내가 공부를 마칠 때 쯤, 말하자면 내게 가장 힘겹고 벅찬 시기와 겹친다는 것이었다. 이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내가 공부에 피치를 올려 둘째가 출산하기 한, 두 달 전에 공부를 끝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다가오는 겨울이 내 유학생활의 마지막 고비라고 생각하고, 한껏 마음을 다잡고 공부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II.

  호사다마(好事多魔)랄까. 그러나 이 호(好)시절이 오래가지 않았다. 그해 10월 중순 경 오랜만에 별장을 찾았던 주인내외가 집을 돌아 본 다음에, 다소 상기된 얼굴로 내게 “혹시 별장 안채를 쓰지 않았냐” 고 물었다. 나는 그런 적이 없었으므로 아니라고 대답했다. 주인과 처음부터 안채는 쓰지 않기로 약속해서 우리 내외는 당연히 그 룰을 지켜왔는데, 주인의 의외의 물음에 조금 황당하게 느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주인은 집을 떠나며 매우 굳은 얼굴로 내게 다가와 “대단히 미안하지만 10월 말까지 집을 내 주어야 겠다”고 말했다. 예상치 못했던 통고에 나는 무척 당황했지만, “알겠다”는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주인의 갑작스런 통고를 들으며, 우리 내외는 곧장 일이 이렇게 된 경위를 쉽게 추론할 수 있었다. 몇 주 전, 빈(Wien) 의대에 다니는 주인집 아들이 여자 친구와 함께 와서, 안채에서 하루 동안 시험공부를 하겠다고 말했다. 조금 꺼림직 했지만, 나는 굳이 마다 할 이유가 없어, 그렇게 하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그 날 저녁 어스름이 내릴 때 쯤 인사를 하고 집을 나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내 처가 “애인사이인 것 같지”라고 말했던 기억이다. 그 후 이 주쯤 지난 후 그들이 또 한 차례 찾아와서 공부 명목으로 하루 종일 안채에 머물다 돌아갔다. 그런데 그들이 아마 안채에 머물면서 집안을 조금 어지럽혔던지, 그렇지 않더라도 누가 왔다간 흔적을 남기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리고 주인집 내외는 그것을 우리가 한 일로 오해를 한 게 틀림없었다.

 

  우리의 추론은 실제로 확인됐다. 집주인 내외가 집 바로 건너편에 있는 성당 노(老)신부님께 우리를 믿고 집을 맡겼는데, 안채까지 사용해서 나가라고 통고했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신부님이 “베네딕트(내 세레명)가 그랬을 리가 없다”고 강하게 나를 변호하며 곧 추위가 닥치는데 너무 심하다고 말씀하셨는데도, 주인은 “이미 끝난 일”이라고 차갑게 말했다는 것이다. 나는 경위를 묻는 신부님께, 주저하다가 그 집 아들이 두 번 다녀간 얘기를 했다. 그랬더니 신부님은 환하게 웃으시며, “그러면 그랬겠지. 이제 아무 걱정 말게나, 내가 전화를 해서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주인 생각을 바꾸어 놓을게”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정작 내 마음은 이미 그 집을 떠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었다. 우선 그 집에 더 머물기 위해 주인에게 구차하게 지난 일을 들먹이는 것 자체가 내 자존심에 허락지 않았다. 또 내게 그 얘기를 듣고, 크게 곤혹스러워 할 집 주인 내외의 얼굴을 떠 올리니, 내가 힘들더라고 그냥 덮어버리는 게 낳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말씀드리니 신부님은 펄쩍 뛰셨다. 말씀인 즉, 그렇게 내가 물러나면, 그 주인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 한국 청년에게 집을 빌려 주었더니 이런 일이 있었다”며 떠들고 다닐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국 “네 나라까지 욕보이게 된다”는 것이었다. 신부님 말씀이 마음에 크게 걸렸으나, 나는 떠날 생각을 굳혔고 내 처도 동의했다. 그래서 조촐한 선물을 가지고 주인내외를 찾아가 그간 고마웠다는 인사를 드렸다.

 

                             III.

  그런데 두 주(週) 사이에 새 보금자리를 구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동분서주했으나 월말이 다 되도록 마땅한 방을 구하지 못했다. 입술이 바짝 마르고 있었다. 그럴 즈음 맞은편 성당의 신부님이 내게 긴히 할 말씀이 있다고 나를 부르셨다. 가서 뵈었더니 정 갈 데가 없으면 빈 숲 초입에 있는 공소(公所) 사택(舍宅)으로 가는 게 어떻겠냐고 물으셨다. 공소는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외진 지역의 교회 지소(支所)를 말하는 데, 대체로 지역 교우(敎友) 중심으로 운영되며, 일요일에 한번 신부님이 오셔서 미사를 집전하는 곳이다. 내게 공소 내의 사택에 거주하며 공소를 관리해 달라는 말씀이셨다. 순간 나는 ‘궁즉통(窮則通)’이라더니 바로 이런 것이 구나 싶어 즉석에서 쾌히 승낙했다. 엄동설한이 닥치는데, 임신부와 간난아이를 데리고 갈 곳이 없어 막막하기 그지없었는데, 우선 거처할 곳이 마련될 수 있다니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그런데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신부님이 “고맙네, 고맙네”를 연발하며 와락 나를 껴안으시는 게 아닌가. 신부님의 의외에 반응에 나는 다소 의아했으나,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내가 공소를 찾은 후였다.

 

  다음날 아침 신부님을 도와 부제(副祭)로 성당에서 일하는 친구 발터(Walter)가 나를 찾아왔다. 공소로 안내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내가 왜냐고 물으니, “가보면 알 걸세. 실은 그 공소 사택이 무척 열악해. 그래서 벌써 두 해째 비워두고 있어. 갓난아기랑 한 겨울을 거기서 나기는 크게 무리야. 신부님이야 공소를 자네에게 맡기면 큰 짐을 덜게 되어 다행이다 싶으신 모양이지만, 네 친구로서 나는 걱정이 태산 같아,” 하는 게 아닌가.

 

                              IV.

  공소는 동네에서 얼마간 떨어져 빈 숲 초입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외지고 황량해서 마치 ‘그림’ 동화의 <헨델과 그레텔>이 길을 찾아 헤매던 깊은 숲속에 들어 온 듯 했다. 공소, 사택 모두 무척 낡고 쇠락했고, 집 모습은 마치 옛날 강원도 화전민이 살던 너와집과 비슷했다. 평소 당찬 내 처도 첫마디가 “여기서 어떻게 살지”라며 고개를 모로 저었다. 나도 순간 마치 천국에서 지상으로 떨어진 느낌이었다. 그러나 내겐 입주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겨울 숲 속은 침울하고 음산했다. 바람이 세차게 불면, 주위의 나무들이 서로 부딪혀 마치 괴기영화에나 나옴직한 무시무시한 소리를 냈다. 거기에 멀리 들짐승 우는 소리까지 들리면 온몸에 소름이 돋곤 했다. 그런가 하면 워낙 낡고 오래 된 집이라 문과 창틀이 모두 취약해서 위부 침입에 대해 제대로 방비를 할 수 없어, 늘 긴장과 불안을 안고 살아야 했다. 열 손실도 커서 난로에 아무리 불을 때도 방의 온도가 17도 이상 오르지 않았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춥고 눈이 자주 왔다. 또 눈이 왔다하면 무릎 까지 찼다. 교우들이 언제라도 공소에 참례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아랫마을로 이어지는 길목까지 눈을 말끔 치워야 하는 데, 이 일이 정말 힘겨웠다. 눈이 많이 온 날은 꼭두새벽에 나서서 동이 훤히 틀 때까지 몇 시간 동안 정신없이 눈을 치웠다. 어떤 때는 애써 한껏 눈을 치고 돌아서면, 방금 치운 곳에 다시 눈이 소복이 쌓여 다시 되돌아가 눈을 치워야 했다.

  내가 맡은 <공소지기>일도 만만치 않았다. 공소 안팎을 늘 청결하게 청소를 해야 하고 때 없이 찾아오는 교우들을 응대해야 했다. 특히 신부님이 오셔서 미사를 집전하는 일요일이 다가오면, 이미 토요일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당일에도 제의(祭衣)준비부터 시작해서 대체로 부제와 복사가 해야 할 온갖 사제 보조 역할을 혼자 도맡아서 해야 했다. 전 과정에서 시나브로 내 처의 도움이 컸던 것은 물론이다. 교우들은 그간 을씨년스럽던 공소에 생기가 돌고, 일요일 미사도 격식을 갖춰 빈틈없이 진행된다며 무척 좋아했다. 제일 기뻐하시는 분은 역시 본당 신부님이셨다. 나는 그 때마다 내 소소한 역할에 대해 얼마간의 보람과 자부심을 느꼈다.

실제로 가장 마음이 시렸던 것은 한 겨울에 처와 아기를 숲속 집에 놓아두고 시내로 나가는 일이었다. 한 주일에 적어도 두 번은 대학에 나가야 되는데, 특히 수요일 오후 세미나가 저녁 6시가 넘어 끝나기 때문에 나간 김에 시장까지 들려 집에 돌아오자면 대체로 9시경이 된다. 겨울 산 속은 오후 4시가 조금 지나면 어둡기 때문에, 몸까지 무거운 안식구는 내가 돌아 올 때까지 아기와 함께 5, 6시간 공포에 떨어야 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빈 숲은 베토벤의 교향곡 6번 <전원>과 요한 스트라우스의 유명 왈츠곡 <빈 숲속의 이야기>의 무대이다. 봄의 향기와 생동감,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 새들의 지저귐이 잠자던 우리의 미적 감성을 일깨워 주는 생명의 요람이다. 그러나 그 해 겨울 빈 숲속의 이미지는 다분히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나그네>의 음울하고 어두운 정조(情調),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그곳 숲 속의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 보고 싶었다. 어떤 때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느껴보려고 애써 보기도 했고, 또 때로는 스님의 동안거(冬安居)에 비유해 자위하기도 했다. 그러나 눈앞의 현실은 너무나 냉혹했다.

정황이 그러하니 실제로 그 겨울 동안 내 가장 절박한 목표는 공부보다도 세(네?) 식구가 별고 없이 이 혹독한 동절기를 견뎌내는 것이었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 겨울, 내 삶의 목표 중 가장 앞선 순위는 단연 ‘생존’이었다.

 

  결국 나는 빈 숲 속에서 아름답고 찬란한 생명의 봄을 맞이하지 못하고, 긴 겨울의 끝자락 2월 말에 시내로 거처를 옮겼다. 박사학위 논문을 마무리하고 학위시험(Rigorosum)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생존’을 넘어 ‘성취’에 전념하는 새 보금자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석 달 후 마침내 나는 고단했던 5년 여의 공부를 끝냈다. 그리고 한 달 뒤 둘째 광선이가 태어났다.

 

                     VI.

  2012년 나는 아내와 오스트리아를 방문했다. 오랜만에 볼퍼스베르그의 옛집과 정든 성당, 그리고 빈 숲의 예의 공소를 찾았다. 옛 집과 성당은 시간이 멈춘 듯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빈 숲 속의 공소 자리에는 현대식의 새 성당이 들어섰고 주위도 많이 변해 있었다. 새 성당, 빈 14구의 ‘코르돈 교회’(Kordon Kirche) 앞에서 나는 '그 겨울의 공소‘를 추억하며 깊은 감회에 젖었다.

 

<사진 1> 1968년 가을, 꼭 반세기 전에 내 처가 갓난 첫 아이 수현이를 안고 옛 집 현관 앞에 서 있는 모습이다.

 

 

 

 

 

<사진 2> 집 맞은 편의 성당(St.Josef am Wolfersberg)

 

 

<사진 4> 빈 숲속의 새 성당(Kordon Kir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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