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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에세이

1951년 초여름, 열 한살 소년의 고뇌

2019. 1. 30. by 현강

 

              

 

                    I

대구에 피난 온 후, 19514, 새로 이사한 곳이 종로 영남일보사 건너편 조광(朝光)양복점 2층이었다. 처음 몇 달 동안 살았던 칠성동 기찻길 옆 어두운 빈민촌에 비하면 주거조건이 훨씬 낳아졌다. 그 집 2층에는 피난민 세 가구가 살았는데, 우리는 길가 창문 옆 다다미 6장 방에 살았다. 윤동주가 일본 유학 때 쓴 시, ‘쉽게 쓰여진 시에는 육첩() 방은 남의 나라라는 시구(詩句)가 나오는데, 바로 그 규모의 크지 않은 방이었다. 여기서 어머니, 누나와 세 식구가 함께 살았다. 아버지는 우리를 이곳으로 옮겨 놓으시고 그해 3월 서울이 재탈환 (再奪還)되자 직장 선발대를 따라 서울로 올라가셨다.

 

열 한살 소년인 나는 한복 삯바느질을 하셨던 어머니의 옷 주문, 배달과 잔심부름하는 것으로 소일했다. 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어려운 형편이라 그 얘기는 입밖에도 내지 못했다. 그러자니 한가할 때는 무료를 달랠 겸 창턱에다 턱을 괴고 번화한 종로 거리를 내려다볼 때가 많았다. 종로는 온종일 사람과 차로 붐볐고 늘 장바닥처럼 시끌벅적했다. 내 관심은 특히 마주 보이는 길 건너편 영남일보 앞마당에 쏠려 있었다. 신문이 나올 시간이 가까워지면 내 나이 또래에 남루한 차림의 피난민 신문팔이 소년들이 몰려와 왁자지껄했다. 그러다가 신문을 받아 들면 마치 단거리 선수처럼 한껏 내달려 순식간에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난리법석이 끝나면 신문사 앞마당에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텅 빈 고요가 깃들고 초여름 햇살이 한가하게 내려앉는다. 매일 거듭되는 그 역동과 반전의 모습을 거의 놓치지 않고 보는 것이 내 일과였다.

 

 

                    II

5월 하순 어느 날, 나는 영남일보사 앞마당 신문팔이 아이들 무리에서 조금 떨어져 혼자 서성이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서울 돈암동 같은 동네에 살던 가까운 친구 세영이었다. 반가운 김에 나는 한걸음에 달려가 그를 부둥켜안았다. 그의 사연은 무척 기구했다. 피난길에 온 식구가 뿔뿔이 헤어져 혼자 천신만고 끝에 대구까지 왔고, 우연히 먼 친척을 만나 그 집에 머무는데, 눈치가 보여 오늘 처음으로 신문을 팔러 나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바삐 신문을 받아 파는 요령을 알려주고 오늘 일이 끝나면 우리 집에 들르라고 얘기했다. 그날 저녁 내가 만난 세영이는 여리고 착해 빠졌던 과거의 그가 아니었다. 세상 풍파를 다 겪은 듯 담대하고 초연하기까지 했다. 손을 잡고 위로하는 내 어머니에게, “걱정 마세요.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렇게 살아남았는데 이제 두려울 게 없어요라며 짐짓 웃음까지 지어 보이며 사는데 자신감을 내보였다. 그를 보내고 어머니는 모진 세상이 아이를 저렇게 바꾸어 놓았구나하시며 한참을 우셨다.

 

그 후 세영이는 내게 자주 들려 당시 우리 집 주메뉴였던 수제비를 함께 먹으며, 그가 신문팔이와 갖가지 막일을 하며 겪은 무용담을 털어놓곤 했다. 그러면서 대구 가까이 까지 함께 왔다가 피난민 인파 속에서 안타깝게 손을 놓쳐버린 세 살 위 형 얘기를 자주했다. “분명 대구 어디엔가 있을 거야. 내가 신문 파는 이유도 그 형을 만나기 위해서야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 나올 때가 가까이 되자,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창턱에 턱을 괴고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길거리에 씩씩한 모습으로 세영이가 나타났다. 나는  밑을 내려다보며 손을 입에 모으고 세영아하고 그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도 병영아하고 맞장구 치며 손을 크게 휘저었다. 이어 그는 펄쩍펄쩍 뛰면서 , 어제 우리 형 만났어. 멀쩡히 잘 있어라고 외쳤다. 그 말에 나도 기뻐 축하해를 연발했다. 그러자 세영이는 이따 들릴 게, 기다려라고 짧게 소리치며 고개를 돌렸다. 종로 한복판, 차와 사람 소리가 얽혀 악머구리 끓듯 하는 북새통에서 우리는 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가 형을 만났다는 기쁜 소식을 잠시라도 빨리 어머니에게 알리려고 고개를 안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한, 두 걸음 옮기는데, 길거리에서 -하며 차가 급정거할 때 들리는 금속성의 마찰음이 들렸다. 나는 급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웅성거리는 가운데, 군인 찦차 앞에 세영이가 피를 흘리며 흐트러져 누어있었고 차에 탔던 군인 두 명이 황급이 차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순간 나는 온몸이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겨우 정신을 차려 외마디 소리처럼 엄마, 엄마를 외쳤다. 그리고 말을 잃은 채 엄마에게 손가락으로 그 쪽을 가리켰다. 어머니는 아니 세영이 아니냐고 크게 놀라시며, 내 손을 잡고 급히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우리가 사고현장에 도착했을 때 찦차는 이미 세영이를 싣고 떠난 후였고, 바닥에는 두어 군데 선연한 핏자국만 남아있었다. 아직 그곳에서 서성이는 몇몇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워낙 삽시간에 일어난 일이고, 사고가 나자 군인들이 즉시 차에서 내려와 그를 싣고 사라졌기 때문에 그 이상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정황으로 볼 때 중상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어머니와 나는 물어물어 대구 시내 외곽에 있는 육군 병원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모른다는 대답만 들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심경이었으나 아무 힘없는 피난민 모자는 안타까워 발을 종종 구르는 외에 달리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III

그날 그 사건은 나, 열한 살 소년에게 엄청난 마음에 상처를 안겨 주었다. 무엇보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양심의 가책에 견딜 수가 없었다. 시간상으로 따져 볼 때, 그가 나와 몇 마디 대화를 마치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찦차가 덮쳤으니, 애초에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아니 설혹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더라도 그 이상 대화를 이어가지 않고, “당장 내려갈 게하며 급히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면 아마도 별일이 없었을 것 같았다. 그러니 내가 그 참혹한 사고의 유발자였다.

나 어제 형을 만났어라고 작약(雀躍)하던 그의 밝은 모습과 길거리에 쓰러져 있던 그의 흐트러진 모습이 계속 오버랩 되면서, 가슴이 쥐어짜듯 저리고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나는 그가 죽었을까 걱정이 되었다. 사고 현장을 물들였던 핏자국으로 보아 중상이 확실하고, 그것이 자칫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미치면 나는 미칠 것 같았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부정적인 상상이 증폭되어 급기야 나는 그가 죽었을 것이라는 확신에 가까이 이르게 되었다. 그러면서 급기야 내가 그를 죽였다는 망령된 생각이 계속 엄습했다.

 

그날 이후, 나는 하루 한순간도 이 처절한 고뇌의 심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말수가 적어지고 밤잠을 설치는가 하면 끼니마저 자주 걸렀다. 그러니 옆에서 내 심경을 헤아리는 어머니의 걱정은 태산 같았다. 어머니는, “네 잘못이 아니야. 번잡한 길에서 빨리 자를 몰았던 그 군인들이 잘못한 거야. 그리고 세영이는 좀 다쳤겠지, 죽었을 리 없어. 너무 괴로워하지 말고 대신 하느님께 기도해하시며 나를 달래셨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내 마음을 어루만질 수가 없었다. 그때 나는 양심(良心)’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확연하게 인식했던 것 같다. ‘내 양심에 가책이 되는데, 어떻게 내 마음이 편안할 수가 있을까’. 그런데 문제는 내가 그 양심의 가책을 보상할 수 있는 아무런 수단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나는 갈수록 자책(自責)과 자학(自虐)의 깊은 늪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러면서 열한 살짜리 소년은 그때 양심’’삶과 죽음에 대한 온갖 철학적 사유를 그 나름의 방식으로 다 체험했던 것 같다. 훗날 내가 실존철학에 접하면서 즉시 ‘1951년 초여름의 나를 추억했고, ‘실존의 개념이 전혀 생소하지 않게 내게 다가왔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후 한 달이 가까워도 그로부터 아무 소식이 없었다. 나는 분명 그가 죽었기 때문이라고 단정했다. 그런 가운데 나는 점점 더 야위고 파리하게 시들어 갔다.

 

 

                         IV

사고 후 꼭 한 되던 날, 나는 집 근처 만경관(영화관) 옆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뒤에서 병영아!”하고 내 이름을 부르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나는 세영이임을 직감했다. 그러면서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뒤를 돌아보니, 서너 발자국 뒤에서 그가 밝게 웃고 있었다. 나는 꿈같은 현실 앞에 압도되어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내게 다가오는 그는 한 다리를 크게 절고 있었다.

 

극장 앞 작은 공터에서 그는 그간의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사고 순간 정신을 잃었고 눈을 떠보니, (우리 모자가 찾아갔던 바로 그) 육군병원 침대 위였다는 것이다. 양다리와 팔목 등의 복합골절로 장시간 수술이 끝난 후였는데, 다행히 생명에 지장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후 병원 측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거의 치유가 되어 어제 퇴원을 해서 우리집을 찾아가는 길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급한대로 형은 만났어?”, “다리는 어때?”하고 두서없이 물었다. 병원측이 연락해서 형은 곧 만났고, 아직 심하게 저는 한쪽 다리도 시간이 지나면 완쾌된다고 말했다.

 

그의 사연을 들으며 내 가슴은 계속 벅차올랐고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었다. 그리고 연상, “세영아 미안하다, 모든 게 내 잘못이다”, “고맙다를 연발했다. 그는 오히려 걱정 많이 했지, 미리 연락하지 못해 미안하다, “네가 사고와 무슨 상관이 있어, 그날 내가 재수가 없었던 거지라며 웃으며 나를 달랬다.

그러는 그가 내게 관세음보살처럼 느껴졌고, 나 자신은 무간지옥 (無間地獄)에서 단숨에 극락(極樂)에 오른 기분이었다.

 

                      

                        V.

그의 무사한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크게 기뻐하시며 연상 흐르는 눈물을 닦으셨다.

그러면서,

 

세영아, 정말 고맙다. 네가 우리 병영이를 살렸구나라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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