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한국행정포럼 2014 봄(통권 144호, 한국행정학회)호에 수록된 고() 이문영 교수님의 추도사이다.

 

                               I.

  지난 1월 16일, “민주투사, 노학자 이문영 고려대 명예교수 별세”라는 뉴스에 접하면서 실로 만감이 교차한다. 우리 시대의 마지막 의인(義人)울 잃은 공허함과 슬픔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한국 민주화에 기념비적인 존재이면서, 행정학자로서의 본분을 한시도 잊지 않으셨던, 지사형의 큰 학자 이문영 교수님의 생애와 공헌은 앞으로 언제까지나 “시대와 함께 한 행정학자”로서 한국 행정학의 역사에 길이 남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래에서 민주투사로서의 그의 삶과 행정학자로서의 그의 기여를 함께 논의하고자 한다. 여기서 방점은 당연히 후자에 놓여 지나, 그의 삶에서 두 가지가 함께 융합되어 있어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II.

  소정(小丁) 이문영 교수님의 민주화 투쟁의 가시밭길은 1960년 4월 19일 이후,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대학교수들의 시위에서 시작한다. 그 때 그의 나이 33세였다. 그는 1965년에는 무장군인들의 고려대 난입을 항의하는 고대교수회의 항의문을 본관 앞에서 낭독한다. 1970-1973년간 김재준 목사와의 동인지 <제 3일>에 30여회에 걸쳐 <아나로기아>를 집필하며, 성서와 행정이론을 인용하여, 촌철살인의 명품 정치비평을 쏟아 놓는다. 이후 소정은 1970년대, 80년대에 걸쳐 불퇴전의 용기와 치열한 저항정신으로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열일곱 번 잡혀가 세 번에 걸쳐 4년 6개월의 옥고를 치루고, 9년 6개월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해직되는 고초를 겪는다. 이렇듯 시대의 양심으로,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온 몸을 바쳐 한국 민주화에 봉헌하던 그의 40대, 50대는 한국 현대사와 민주화의 산 기록이다. 작년 그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필자가 “그 고난의 시절이 어떻게 회고 되세요”라고 여쭸더니, 그의 대답은 “당시 나는 무척 행복했고, 지금도 그렇게 추억된다”였다. 이 기간 중에도 그는 <한국행정론>(1980), <민주사회를 위하여>(1983) 등의 저작을 통하여 학자로서의 자신의 본분을 잃지 않는다.

 

  이문영 교수님은 사유의 깊이와 통찰력에 있어 행정학자 중 단연 독보적인 존재로서, 한국 행정학 제1세대 중 가장 먼저 행정학의 한국화에 정성을 기울인 학자였다. 그의 첫 저서 <행정학>(일조각, 1962)은 독창적 체계과 논리구성으로 마땅히 한국의 자아준거적 행정학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1963년, 한국 행정학계가 미국행정학 모방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정책자문, 용역 등으로 박정희 군사정권에 깊이 관여하던 그 시절, 소정 선생은 당시의 한국행정학계를 성찰적, 비판적으로 조명하면서, 1) 행정학 연구는 마땅히 제도의 소개보다는 그 위에 숨어있는 원리를 설명해야 하고, 2) 한국의 행정현실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실현가능한 모델을 탐색해야 하며, 3) 돈 벌고 명예를 올리는 일보다 본업인 연구에 열중해야 한다“(한국에 있어서 행정학 연구현황,” 법률행정논집 4)고 설파하여. 한국행정학의 이정표를 제시하는 선각자적인 주장을 폈다. 그는 무엇보다 한국행정학이 권위주의 정권에 복무하는 ‘기술관리학’ 으로 전락하는 것을 크게 우려했고, 그런 맥락에서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던 ‘발전행정’에 대해서도 비판적 입장을 강력하게 표명했다.

 

  이문영 교수님의 학자로서의 진면목은 그가 오랜 영어의 생활을 뒤로 하고, 1984년 고려대학교에 다시 복직한 이후의 그의 학자적 삶에서 역력히 드러난다. 정계의 숱한 유혹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연히 권력의 세계와 멀리하고 다시 책상 앞으로 다가와 학문에 전념하면서 시로 누구도 다를 수 없는 뛰어난 저작활동을 계속한다. 특히 그는 1992년 정년퇴임 이후에도 경기대 등에서 강의를 계속하면서, <논어, 맹자의 행정학>(1996), <인간. 종교. 국가>(1991), <협력형 통치>(2006), <겁많은 자의 용기>(2008), <3.1 운동에서 본 행정학>(2011) 등의 대작들을 연이어 출간했다. 이문영 교수님은 이들 저서들에서 유교와 기독교의 고전, 한국과 서양의 근. 현대사를 아우르고, 행정을 정의하는 세 범주, 즉 ‘사람과 일, 그리고 방법’에 준거하면서, ‘마땅히 지켜야 할 최소’를 바탕삼아 그 특유의 독창적인 학문세계를 펼치고 있다. 이들 저서들은 그 속에 소정의 심오한 행정학적 사유와 민주화 운동의 체험, 그리고 육화한 신앙이 융합되어 ‘기술’ 위주 아닌 ‘정신’ 위주의 ‘새 문명’을 지향하는 새로운 행정철학으로 재창조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접하는 통상적인 행정학 저술들과 크게 다르다.

 

  이문영 교수님의 학문적 열정과 집념은 실로 경이롭다. 이 교수님은 정년하실 즈음, 필자에게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따랐으니, 부디 내가 마음에 담고 있는 책 몇 권을 마칠 때까지 건강을 주셔야 된다”고 하나님께 간곡히 청원을 드렸다고 얘기하셨다. 그가 자신의 마지막 저서인 <3.1 운동의 행정학>을 집필하던 중, 오랜 병고로 더 이상 글쓰기가 어렵게 되자 뒤의 두 장(章)은 구술로 마무리 하셨다. 필자가 이 교수님을 이 책을 끝내신 직후 찾아뵈었더니, 매우 평화스럽고 만족스러우신 얼굴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술회하시던 기억이 새롭다. 그는 감옥에서 조차 행정학적 사유와 탐구를 계속하셨고, 자신의 생의 마지막 불꽃마저 온전히 자신의 학문에 바쳤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평생 학자로서 영원한 ‘현역’이셨다. 많은 사회과학자들이 정년 이전에 사실상 학문에서 손을 떼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교수님의 학문하는 올곧은 자세는 실로 후학들에게 값진 전범으로, 큰 교훈을 남기셨다.

 

  소정 이문영 교수님은 고려대학교 행정학과를 세우고, 가꾸고, 그 정신적, 학문적 바탕을 마련하셨다. 그가 키워낸 기라성 같은 학자들, 그의 감화를 받은 수많은 제자들, 그들 모두에게 그는 존경과 자존심, 그리고 지향해야 할 정신적 목표였다.

 

  이문영 교수님은 그의 저서에서 ‘협력형 통치’와 ‘민회’를 강조하셨듯이, 학문하는 과정에서도 학계의 가까운 동료 및 제자들과의 협력적 상호작용을 중요시하셨고, 다른 이의 관점을 열심히 경청하셨다. 그는 저서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스스럼없이 후배와 제자들에게 조언과 자문을 구하셨고, 집필 이후에도 몇몇 제자들과 독회를 거듭하며, 의미전달을 바르게 하기 위해 글을 다듬고 손질하셨다. 정년이후 집필하신 책들은 하나같이 정성호(경기대), 윤견수(고려대), 김동환(중앙대) 제 교수들과 잦은 독회를 거쳐, 그리고 고창훈(제주대), 김문기(평택대) 교수 등 많은 이의 조언을 들어 마무리하셨다.

 

                                         III.

  소정 선생은 거짓 권위와 폭정에 대해서는 실로 치열하게 저항하신 민주투사이셨으나, 천성이 착하고 순수한 선생은, ‘작은 머슴’을 자처하는 그의 호에서 드러나듯이, 항상 자신을 낮췄고, 절제와 배려가 몸에 배인 분이셨다. 그는 일생 가정과 학교와 교회에 충실하셨고, 속과 겉이 같았고, 언제, 누구에게나 늘 한결같으셨다. 그는 일상의 삶 속에서도 자신이 좋아하셨던 어귀, ‘이로움을 보면, 그것이 의에 합당한지 따져보라’는 ‘견리사의(見利思義)’의 정신을 어김없이 실천한 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큰 바위 같은 의인(義人)의 면모를 지니신 분이셨다.

 

  이문영 교수님은 민주주의의 적과 온 몸으로 외롭게 맞섰던 그 엄혹한 시절의 모진 고난에 대해서도 “의당 해야 할 최소한의 발언을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한낮의 수사(修辭)가 아니라 그의 신념이자, 철학이다. 우리 시대의 고뇌하는 행정철학자이시자 종교가인 소정선생은 ’정도를 넘어선 최대‘가 아닌 ’마땅히 지켜야 할 최소한‘을 주장하셨다. 그러나 그는 ”최소를 지키기란 쉽지 않다. 자기희생을 동반하지 않으면 최소를 지킬 수 없다“라고 말한다. 그가 주장하는 ’최소한‘의 철학이 비폭력으로, 또 개인윤리, 사회윤리, 자기희생으로 이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세상을 향하여 ’최소한‘을 요구하면서, 정작 자신은 그 최소한을 위해 외롭게 온몸을 민주화 재단에 ’최대한‘으로 바쳐 희생, 봉헌했다.

 

  소정의 실존적 삶 속에는 늘 하나님 사랑, 나라 사랑, 그리고 행정학 사랑이 함께 용해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철학과 인격에 융합, 재창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깊은 뿌리에는 오늘의 그를 만든 사람들, 소정의 의로운 아버지, 사랑의 버팀목 어머니, 평생 아내이며 동지였던 김석중 여사, 배선표 목사, 함석헌 선생, 공자, 맹자, 원효, 율곡, 마르틴 루터가 있었고, 그의 정신적 요람이었던 배재학교, 고려대학, 갈릴리 교회가 버티고 있었다.

 

                                      IV.

  소정 선생님과의 필자의 인연은 올해로 43년 되었다. 스승처럼, 큰 형님처럼 가까이 모셨던 그 세월동안 필자는 그로부터 학문적으로, 정신적으로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너무나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14 년 연상이셨지만, 한 번도 말씀을 놓으신 적이 없으셨다.

 

  그가 해직, 옥고를 치르시던, 1970년대 초, 중반 필자가 이 교수님의 고려대학교 강의를 대신 맡았던 일은 나에게 큰 자랑이며 영광이다. 1987년 민주화의 열풍 속에 6. 29 선언이 있던 날, 내 연구실 문을 크게 여시면서, 환한 얼굴로 “안 교수, 명예혁명입니다”라고 크게 외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소정 선생님이 옥고를 치르실 때, 창동 선생님 댁을 찾으면, 집 옆에 감시초소가 세워져 오가는 사람을 일일이 점검했다. 한 겨울, 온 집안에 냉기가 차 있었고, 거실에 작은 난로에는 불기가 꺼져 있었다. 추위에 나무가 비틀려 마루바닥이 거북 등처럼 부풀어 올라 있던 기억이 있다 사모님도 민주화에 동참하시기 위해 밖에 나가셨고, 약간의 온기가 감도는 안방에는 선생님의 90 노모가 수감 학생들의 죄수복에 솜을 넣어 손수 꿰매고 계셨다. 그 때 막 청소년기를 벗어나던, 훗날 모두 박사가 된 1남 2녀, 현아, 선포, 선아는 그 어려움 중에도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아 활기찼고, 집안에는 언제나 평화와 사랑이 감돌고 있었다.

 

  엄혹한 권위주의 시절, 이문영 교수님은 겁 많고 용기마저 없었던 우리 모두를 대신해서 민주화에 앞장 스셨고, 평생 뚜벅 뚜벅 큰 걸음으로, 바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행정학의 민주화와 한국화, 그리고 우리 사회의 문명화를 위해 헌신하셨던 큰 어른이시다. 그가 행정학이라는 학문공동체에서 오랜 세월 우리와 함께 계셨다는 사실, 아니 그가 우리와 동시대인이셨다는 사실은 분명 우리 모두의 행운이었고 축복이었다.

 

  온 행정학회 회원들과 더불어 소정 선생의 영면을 빈다.

 

 

                                                                                    안병영 (연세대 명예교수)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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