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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에세이

1978년 겨울, 파리 (1)

2014. 1. 14. by 현강

                                                    I.

   1978년, 내 나이 38세 때, 그 한 해를 훔볼트 연구교수(Humboldt Fellow)로 독일 만하임 대학에서 보냈다. 그 해 12월 말, 나는 얼마 후 귀국을 앞두고, 처와 어린 남매를 대동하고 파리 겨울 여행을 떠났다. 파리 시내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작은 호텔에 묵었는데, 투숙객들이 모두 한국인들이어서 마치 서울 어디 변두리 호텔 같은 분위기였다. 그 때 한창 중동경기가 치솟을 때라, 투숙객 중에는 휴가차 파리를 찾은 중동 노동자들이 많았다. 그들이 사막의 열기를 몰고 왔는지, 호텔 전체에 활기가 넘쳤고, 마치 축제 현장 같은 들뜬 분위기였다.

   나는 추운 겨울에 아이들 데리고 구경 다니는 것도 수월치 않아 저녁에는 조금 일찍 돌아와 호텔 지하에 있는 바에 내려가곤 했다. 한 해 내내 쿨(cool)하기 짝이 없는 독일 사람들 틈에서 남의 나라 말만 하고 살다가, 동포들이 우리말로 왁자지껄, 시끌벅적하는 분위기를 접하니, 무척이나 정겹게 느껴졌다. 그래 술도 못하면서 운무처럼 담배연기 자욱한 지하 바에 자주 내려가 기웃거렸다. 그러면서 거기서 누군가 의외에 인물, 반가운 사람을 만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정말 그곳에서 생각지 못했던 몇 분을 만났다.

 

 

                                                    II.

   이틀째 되던 날 저녁, 간단한 식사도 할 겸해서, 가족과 함께 그 지하 바에 내려갔다. 그런데 웬걸 저쪽 귀퉁이에서 미당(未堂) 서정주 시인이 혼자 술을 드시고 있었다. 전에 뵌 적은 없으나, 지면이나 화면을 통해 자주 익혔던 분이라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한국의 ‘보들레르’ 미당 선생을 여기서 뵙다니,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이미 노경(老境)에 드셨으나, 뚜렷한 윤곽의 구리 빛 얼굴, 짙은 눈썹, 이마의 깊은 주름, 잔잔한 미소에 날카롭고 형형한 눈매가 특징적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오랜 세월의 영욕과 굴곡이 그대로 새겨 있었다. 내가 한국외국어대학 교수로 있을 때(1972-1975), 가까이 모셨던 전후문학의 대표작가 ‘오발탄’의 이범선 선생도 ‘역사를 간직한’ 그런 ‘깊은’ 얼굴이셨다. 그런데 그날 미당 선생의 행색은 마치 갓 등산에서 돌아 온 젊은이처럼 점퍼에 진 바지 차림의 날렵한 모습이셨다. 내가 가까이 가서 넙죽 “미당 선생님, 여기서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라고 인사를 드렸더니, 그는 무척이나 환한 얼굴로 “아니, 내가 여기 내려와 사흘 째 자작을 하고 있었는데, 도대체 내 얼굴 알아보는 놈이 하나도 없었어. 그런데 젊은이는 나를 어떻게 알아 보나”라며 크게 반기셨다.

 

   말씀인 즉, 경향신문사의 청으로 풍류객처럼 유럽 곳곳을 돌며 인상기를 써서 보내시는데, 마침 파리에서 며칠 머무신다는 것이었다. 내가 “ 천하의 미당 선생님을 여기서 뵈었으니, 제겐 일생일대의 큰 행운입니다” 라고 말씀 드렸더니, 미당 선생은 “자네,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는 군”하시며, 파안대소, 어린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그리고는 “자네 문학을 좀 아나, 내 시를 한번 평해 보게 나”, “내 시 말고, 또 누구 시를 좋아하나”, 등 많은 말씀을 하셨다. 그러다가 내가 시인 고은을 언급하자, “고은이는 내 아들과 진배없는 사람이야”라며 그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내비치셨다. 그러시더니 호텔 옆 가게에서 예쁜 반지를 보아 두셨다며, 아무리 말려도, 굳이 나가셔서 그것을 사다가 내 처 손가락에 끼어 주시고, 내 두 아이 각각에게 친필로 자신의 시 “국화 옆에서”를 손수 써 주시며, “ 너희가 크면, 이게 큰 기념이 될게다”라고 말씀 하셨다. 가족을 올려 보내고, 그날 나는 미당 선생과 밤늦도록 대작했다.

 

 

                                                      III.

   시인 서정주(1915-2000)에 대한 평가는 폄훼와 상찬으로 엇갈린다. 나는 그의 친일행각 등을 익히 알고 있었으나, 민족적 소재와 정서를 바탕으로 우리 말, 우리 글에 업겁의 혼을 입힌 그의 문학적 성취가 워낙 크고 경이롭기 때문에, 마음 한 구석에 진한 안타까움을 간직한 채, 그의 문학은 그냥 ‘문학으로’ 평가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아직 성숙하지 않았다”는 그의 아호, 미당(未堂)의 뜻처럼, 그도 불완전한 인간의 하나가 아닌가. 따라서 그가 죽은 후 고운의 <미당담론>을 접했을 때에도, 가슴이 무척 아렸다.

 

   그날 이후 나는 서정주 선생을 뵙지 못했다. 2000년 12월 24일 캐나다 밴쿠버의 UBC에서 그의 부음을 들었다. 그가 마지막 순간에 ‘선운사 동백꽃’을 떠올렸을까, 아니면 허허로운 ‘동천(冬天)’을 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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