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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에세이

장발의 수난시대

2013. 2. 11. by 현강

                                I.

  1971년 초 유학에서 돌아 왔다. 공황에 나왔던 친구가 나를 보자 요즈음 장발단속이 심하다며, “머리부터 깎아야겠다 ”라고 말했다. 나는 이미 한국에 장발단속 소문을 들었기에 웃으면서 “그래야지”라고 답했다.

  그런데 막상 머리를 깎으려니, 영 내키지 않았다. 우선 반민주적 권위주의 정부가 1945년 제정된 경범죄 처벌법을 근거로 퇴폐풍조를 일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한다는 것 차제가 전형적인 파시스트 수법 같아서 울화가 치밀었다. 뿐만 아니라 단속이 겁나 스스로 머리를 깎는 일이 마치 체제를 마음으로 수용하는 것 같아 따르기가 싫었다. 1968년 권위주의적인 구질서를 혁파하려고 봉기했던 진보적 학생운동이 유럽을 휩쓸 때 내가 그곳에서 공부했고, 당시도 히피의 반문화 운동이 전 세계를 들썩이게 하던 때였기에, 그러한 시대적 배경도 내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래서 궁리 끝에 결국 머리를 스스로 깎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러한 결정이 무슨 비장한 결의위에 이루어 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거기에는 소극적 저항심과 더불어 얼마간의 장난기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어디 할 테면 해 봐라. 내 손으로는 안 깎는다. 나도 한번 버틸 때까지는 버텨 보겠다는 생각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후 몇 년 동안 나는 장발 때문에 만만찮은 수난을 겪었다.

 

                            II.

  당시 뒷머리가 옷깃, 옆머리가 귀에 닿으면 장발에 해당되었다. 그런데 내 머리는 그 보다 훨씬 길었다.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그랬듯이 내 경우도 내 처가 집에서 조발을 했는데, 얼굴이 둥그니 머리가 좀 긴 게 낳아 보인다고 항상 머리끝만 조금씩 자르곤 했다. 귀국 후에도 처가 머리를 깎으니 늘 머리가 꽤 긴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당시의 안목에서는 장발 중에도 장발에 속했다. 우리 가족에게는 그 모습이 익숙한데, 다른 이들에게는 조금 지나치다 싶었을 게다.

 

  귀국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내가 정부 종합청사에서 일하는 가까운 친구 C군을 찾아 갔다. 그 친구가 근무하는 큰 방을 여니, C군이 황급하게 내게 다가와 내 등을 밖으로 밀어 내면서, “아니 너 예수님 머리를 하고 어떻게 감히 정부청사에 들어 올 생각을 했어. 모두 놀라서 네 얼굴만 처다 보잖아”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내 긴 머리를 지키기는 일이 앞으로 그리 수월치 않을 것을 예감했다.

 

  첫해는 이 대학, 저 대학 강사로 열심히 뛰었다. 몸이 큰 편이고 굵고 검은 안경테라 제 나이 보다 더 먹어 보였지만, 그 때 세는 나이 31세였으니 영락없는  ‘장발의 젊은 이’였다. 그러니 불신 검문에 걸려 거리에서 바리캉으로 머리 깎일 위험은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거리에 나설 때는 언제나 조마 조마했다. 그러나 그 해는 요행이 잘 지나갔다.

  다음해 나는 한국외국어대학에 조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같은 대학에 무척이나 보수적이고 고집불통인 Y라는 전설적인 체육교수님이 한분 계셨다. 50대 후반 쯤 되신 분인데, 장발의 남학생이나 미니스커트의 여학생을 보면 어김없이 잡아 크게 혼을 내신다는 분이셨다. 당시 만해도 외대가 전임교수 70명 정도의 작은 학교였으니, 교수들 간의 접촉도 비교적 잦은 편이었다. 그런데 Y교수님에게는 내가 꽤 못 마땅한 존재였던 것 같다. 그래서 멀리서 내 모습이 보이면 아예 발길을 돌리시던가 아니면 의식적으로 외면하곤 하셨다. 동료교수들도 장난삼아 내게 “Y 교수님한테 아직 안 걸렸어”하고 자주 물었다. 그러다 보니 외대에 있었던 3년 반 동안 Y교수님과는 한 번도 말씀을 나누지 못했다.

 

                         III.

  그러나 그 힘든 세월이 나만 피해 갈 수는 없었다. 1972년 유신 선포 이후 장발단속은 더 심해 졌다. 1972년에서 1974년 간 세 번이나 장발단속에 걸려 파출소에 잡혀 갔다, 요행히 그때그때 풀려 나왔지만, 대학교수로서 할 짓은 아니었다. 자초지종을 말하면 다음과 같다.

 

  1972년 가을로 기억된다.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야간 강의가 있어 동순동으로 가려고 신설동에서 택시를 기다리다가 순경에게 잡혔다. 신설동 파출소로 연행되었는데 아무리 사정을 해도 막무가내였다. 승강이를 하다 보니 이미 수업시간을 넘겨 버렸다. 겨우 파출소 내에 전화를 빌려 행정대학원 수위실에 전화를 걸고, 내 수업을 기다리는 학생 한명을 바꾸어 달라고 청을 했다. 한 학생이 전화를 받기에 내가 사정이 생겨 오늘 휴강을 하게 되었노라고 얘기했다. 그랬더니 그 학생이 무슨 안 좋은 일이냐고 걱정스레 묻기에, 내가 장발단속에 걸렸는데, 그냥 풀려 날 것 같지는 않다고 곧이곧대로 말했다. 그랬더니 그 학생이 “파출소 순경을 좀 바꿔 주십시오”하는 게 아닌가. 내가 소용없는 일이라고 했더니, 그래도 자꾸 바꾸라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나를 잡아 온 순경을 바꿔 주었다. 두 사람이 몇 마디 나눈 후, 수화기는 다시 내게 넘겨졌다. 그러자 저쪽 학생이 “교수님, 저는 서울지검의 K 검사 입니다. 얘기가 잘 되었으니 택시타고 그냥 오세요” 하는 게 아닌가.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2부가 공직자를 위한 석사과정인데, 요행이 내 전화를 받았던 학생이 현직 검사였기에 예상치 못한 도움을 받은 것이다.

 

   두 번째는 1973년 늦가을이었다. 당시 내가 우이동 유원지 근처에 살았다. 마침 일요일이라 편한 옷차림으로 동네 어귀로 한가로이 산책을 나갔다가 순찰 중이던 순경에게 잡혔다. 그 순경은 다짜고짜 나를 오토바이 뒤에 태우고, 수유리 장미원 근처 파출소로 직행했다.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보기는 그 때가 처음이었고, 그 후에도 다시는 그런 일이 없었다. 장미원 파출소에는 이미 유원지 일대에서 잡혀 온 더벅머리 장발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내가 파출소 소장에게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되냐고 물었더니, 큰 차가 오면 모두 함께 뚝섬으로 옮겨져 즉심에 회부되고, 머리 깎이는 것은 물론이고 아마 하루 구류처분을 받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다음 날 강의 걱정이 앞섰고, 아울러 즉심에서 직업을 물으면 어쩌나하는 생각부터 구치소에서 지낼 하루 밤, 바리캉으로 마구 잡이로 깎일 내 머리 모습까지 파노라마처럼 뇌리에 스쳤다. 바로 그 때 창밖을 보니 우리 동네 통장님이 지나가다 힐끗 파출소 안을 쳐다보는 게 아닌가. 나는 급히 그에게 손짓을 했다. 그는 파출소 안을 들여다보고 즉시 상황을 파악한 후, 평소 안면이 있는 파출소 소장을 밖으로 불러내어 열심히 설득했다. 얼마 후 나는 큰 차가 오기 전에 풀려 나왔다.

 

   세 번째는 1974년 봄 서울 한 복판 명동에서 빚어졌다. 당시 서울대학교 김운태 교수님 주관으로 정치학자 6인 공저 <한국정치론>(박영사, 1975년 초판) 집필을 하고 있었는데, 그 중간 점검 모임이 명동에서 있었다. 다른 5인이 다 중견이상 원로 교수님들이었기에 내게는 조금 어려운 자리였다. 그래서 조금 이른 시간에 잰 걸음으로 약속장소로 가다가 명동 파출소 바로 앞에서 경찰관에게 잡혔다. 매우 중요하고 빠질 수 없는 모임에 가는 길이라며, 선처를 부탁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파출소 전화로 약속장소에 전화를 걸어 김 교수님께 사정을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김 교수님께서 “알겠네, 잠간만 기다리게” 하시더니 한 걸음에 파출소로 달려 오셨다. 파출소 문을 열자마자, 김 교수님은 “누가 파출소장이야”하고 큰 소리로 물으시더니, 파출소장을 향해 “머리 좀 길다고 대학교수를 마구 잡아넣다니, 당신 정신 있는 사람이야”하고 일갈을 하시는 게 아닌가. 나는 무척이나 당황했다. 김 교수님은 평소에 온후하시고 말씀도 적으신 분인데, 파출소장에게 반말로 호통을 치시는 것도 의외였고, 혹시 파출소장이 이 어른께 거칠게 반응을 하면 어쩌나 싶어서였다. 그런데 의외로 파출소장은 공손하게 내 신분을 확인하더니 웃으면서 “저희들이 지나쳤던 것 같습니다”라며 순순히 풀어 주었다. 나는 너무 고마워서 파출소장에게 깊숙이 꾸뻑 했다. 나는 그 후에도 그날 그 장면을 가끔 머리에 떠 올린다. 당시 50대 중반이셨던 김 교수님은 이미 고인이 되셨고, <한국정치론>은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4판을 거듭했다.

 

                             IV.

   1970년대 중반을 넘으면서 장발 유행도 한물갔고, 자연 장발단속도 없어졌다. 그러는 가운데 내 머리도 많이 짧아졌다. 내 처도 “그냥 이발소 가서 깎지 그래” 할 때가 잦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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