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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에세이

안해균(安海均) 교수님 영전에

2012. 10. 19. by 현강

내 대학원 은사셨던 안해균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님께서 지난 12일 86세을 일기로 영면하셨다. 안 교수님은 내게 학자로의 길을 열어 주신 고마운 분이다. 앞의 글은 14일 영결식에서 내가 읽은 <영결사>이고, 뒤의 글 <오랜 인연>은 18년전(1994) 안 교수님께서 정년 퇴임하실 때 선생님을 추억하며  썼던 글이다.

 

                       

                              영결사 (永訣辭)

 

  오늘 저희들은 실로 애통한 심경으로 저희 모두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선생님의 영정 앞에 서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간 오랜 병고로 크게 힘드셨지만, 놀라운 정신력으로 잘 견뎌 오셨기 때문에 이처럼 빨리 저희들 곁을 떠나시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가족과 친지 그리고 수많은 제자들의 슬픔과 안타까움, 허망하고 아쉬운 심경은 그만큼 더 큽니다.

 

  저희 제자들은 이 자리에서 선생님의 저희들 제자들에 대한 가없는 사랑에 깊게 감사드리며, 학자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선생님의 지난 모습을 추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가능한 한 비탄에 젖기보다는 보다 가라앉은 심경으로 선생님의 그간의 업적을 되돌아보며, 아울러 저희들이 선생님과 맺었던 그 아름답고 소중한 기억들을 더듬어 보고자 합니다.

 

  우선 선생님은 한국 행정학의 제 1세대로서 한국행정학 발전에 크게 공헌하셨습니다. 현대행정학, 정책학원론, 한국행정체계론 등 수 많은 저서를 내셨고 다수의 논문을 통하여 한국 행정학의 프로티어를 성실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개척하심으로써 후학들에게 훌륭한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다듬어 지지 못한 수많은 제자들을 뛰어난 학자로 잘 키워 주셨습니다. 선생님의 문하에서 행정학계의 수많은 제제다사(濟濟多士)들이 배출되었다는 사실은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선생님께서 제자 발굴과 제자 조련에 남다른 노하우를 지니셨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선생님의 남다른 제자 사랑과 지극한 정성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분이셨습니다. 무엇보다 정이 넘치셨고, 또 서민적이셨습니다. 아무와도 스스럼없이 허술한 선술집을 찾으시는 선생님의 서민풍의 풍모는 선생님 특유의 트레이드 마크셨습니다. 그래서 선생님 정년퇴임 때 제자들이 선생님께 헌정한 에세이 집의 제목도, “정 많은 서민풍의 학자, 안해균 선생님”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언제나 유머가 넘치시는 유쾌한 분이셨고, 또 무척이나 순수한 분이셨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에는 언제나 위트와 기지, 해학과 풍자가 넘쳤고, 좌중을 휘어잡으시는 현란한 말솜씨와 중저음의 매력적인 목소리는 정말 일품이셨습니다. 저희들은 이제 선생님이 즐겨 부르시던 문주란의 ‘공항의 이별’을 어디서도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어린 아이처럼 착하고, 순진무구, 천의무봉(天衣無縫)의 모습이셨습니다. 한 올의 악의도 없으셨고, 감정을 가식이나 여과 없이 그대로 물 흐르 듯 표현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선생님을 생각하면, 아주 자연스럽게 입가에 웃음을 띱니다. 아주 기분 좋은 웃음 말입니다.

 

  지금 이 순간 저희들이 가장 안타깝게, 또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앞으로 저희들은 이처럼 좋은 스승, 이처럼 보배로운 인생의 선배, 그리고 이처럼 진정한 멘토를 세상 어디서도 만날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도 매울 수 없는 선생님의 그 큰 빈 자리 앞에 저희들은 오열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일생동안, 그리고 특히 지난 8년 동안 병상의 우리 선생님을 지극한 사랑과 정성으로 수발해 주신 사모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사모님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선생님의 큰 사랑의 백분의 일도 돌려 드리지 못한 불초한 저희 제자들은 선생님의 영전 앞에서 회오의 눈물을 흘립니다. 선생님, 하해와 같으신 마음으로 저희들 모두를 용서해 주십시오.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선생님 영전에 제자 일동 올림

 

 

                                           

                               오랜 인연

                                          

                                      I.

  안해균 선생님을 내가 처음 뵌 것은 1963년 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 입학하면서부터였으니, 따져 보면 선생님을 가까이 모신지도 어언 30년이 넘었다. 돌이켜 보면 그때 선생님은 30대 중반이셨는데, 어린 내 눈에는 꽤나 연세가 지긋한 어른으로 보였다. 그래서 그런지 내 눈에 비친 선생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변하신 게 없다. 얼굴이 좀 검으신 편이라 세월이 가려서 그런지 지금도 연세에 비해 무척 젊으신 편이고, 무엇보다 머리가 아직 칠흑 같이 검으셔서 정년퇴임을 하신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어떤 좌석에서나 해학과 풍자가 섞인 질펀한 말솜씨로 좌중을 휘어잡으시는 것이나, 괜찮아 보이시는데도 항상 감기가 드셨다고 호주머니에서 감기약을 꺼내시는 것도 그렇고, 아무와도 스스럼없이 허술한 선술집을 찾으시는 특유의 서민적 풍모, 그런가 하면 환갑 문턱에 이른 제자들에게도, “완기야”, “영희야” 하고 거리낌 없이 이름을 크게 부르시는 품, 실로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선생님 모습 어느 것 하나 30년 전과 다를 것이 없다.

 

  내 눈에 비친 선생님이 항상 30년 전에 머물러 계시니 나도 어쩔 수 없이 선생님 앞에 서면 그대 그 옛날로 돌아가 20대 홍안의 청년이 된다.

 

                                          II.

  1963년 6월, 대학원 첫 학기가 거의 끝날 무렵으로 기억한다. 내가 우연히 당시 선생님 조교로 있던 최치덕 군을 만나러 선생님 연구실에 들렸더니, 안 선생님께서 느닷없이 “병영아, 너 내 방에서 공부해” 하시며 잡아 앉히셔서, 그 길로 안 선생님 조교가 되었다. 그것이 안 선생님과의 오랜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 때 안 선생님께서는 행정대학원 도서관장직을 맡고 계셨기 때문에 나는 선생님 연구실에 있으면서, 보이지 않는 혜택을 많이 받았다. 당시 미국에서 행정대학원에 꽤나 푸짐한 도서지원을 하고 있었기에, 신간 사회과학 도서들이 우리나라 어느 도서관보다 더 많이, 그리고 빨리 들어왔다. 새로 들어오는 책들이 정식으로 등록되어 서가에 꽂히기까지 도서관 사무실에 수북이 쌓여 있었고 그것이 처리되자면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새 책에 눈독을 들였고, 내 뜻을 알아챈 미스 윤(당시 사서로 근무하던 노처녀)은 아직 등록되지 않은 책들을 옆방 연구실에서 미리 볼 수 있도록 편의를 보아주었다. 그 바람에 나는 행정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교수님들의 손이 미치지 않은 책들을 한 발 앞서서 미리 읽을 수 있는 행운을 가졌다. 그때 내가 열독하던 책들은 대체로 비교정치와 사회학 책들이었는데, 안 선생님께서는 연구실에서 내가 읽는 책들을 눈 여겨 보시고 바쁘신 중에도 이 방면 책들을 놓치지 않고 챙겨 읽으시곤 했다.

 

 

  연구실에 있었던 몇 가지 일화가 생각난다. 내가 하루는 안 선생님께 매우 난처한 얼굴로 말씀을 드렸다. “선생님, 제가 우연히 알아보니까 항렬로 따져서 선생님께서 제 손자뻘이 되던데요. 그냥 알고나 계시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내 얘기를 들으시더니 선생님은 무척이나 난처하신 표정이었다. 평소에 순흥 안씨 가문이 어떻고 하시는 말씀을 비교적 자주 하셨던 편인데, 밤낮으로 어린애 취급을 하시던 구석자리 조교가 하루아침에 조부 뻘이 된다니 꽤나 불편하셨던 모양이다.

  “그래 그랬었군. 그렇게 항렬이 높은지 몰랐네.”

  실은 내가 족보도 따져보지 않고 선생님의 반응을 보려고 일부러 능청을 떨었던 건데, 선생님께는 얼마간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의외로 풀이 죽으신 선생님을 보고 내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불과 며칠이 못되어 들통이 났다.

  하루는 연구실에 들어오시면서 대갈일성, “저런 멀쩡한 놈, 나보다 4대나 뒤지면서 제가 할아버지를 자처해. 족보를 뒤져 보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네.” 하시는 게 아닌가. 나는 그 일로 아직까지 안 선생님께 많은 구박을 받는다. 그런데 나도 문제인 게 게으른 탓에 아직도 선생님과의 족보상의 서열을 제대로 따져 보지 못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내게 대한 선생님의 엄포가 당초에 내가 선생님께 시도했던 유(類)의 ‘짜가’가 아닐지 의심스러울 때가 없지 않다.

 

 

  하루는 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그리고는 내게 찾아오는 친구가 너무 많고 걸려오는 전화가 많다고 역정을 내시면서, “너는 도대체 사내 기생이냐. 왜 오가면서  그리 친구를 많이 사귀어. 분명히 말하자면, 네가 정말 학자가 되려면 친구를 정리해야 돼”라고 일갈을 하셨다. 선생님께서는 그냥 귀찮으셔서 한마디 뱉으셨던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그때 그 말씀을 들으며, 내 인생의 항로를 분명히 정해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실은 그때까지 그냥 공부가 좋아서 막연히 연구실에 찾아들었지만, 막상 교수가 되겠다는 작정을 굳게 하고 있지는 않았다.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며, 나는 그때 앞으로 교수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고, 그 후 이 생각은 흔들리지 않았다. 또 공부하기로 결단을 내린 후에는 공부와 무관하게 폭 넓게 친구 사귀는 것을 삼갔다. 그래서 아직도 내 친구들은 대부분 예부터 알던 묵은 친구들이거나 학계  동료들이지, 새로 사회에서 사귄 친구들은 거의 없다.

  이후 나도 한때 선생님이 내게 하신 말씀을 내 방 조교들에게 자주 써먹었다. “너는 사내 기생이냐. 왜 그리 친구가 많아...” 그러면서 이렇게 불쑥 던지는 내 말이 조교들에게 왕년에 선생님이 내게 주셨던 그런 자극을 던져줄 수 있었으면 하고 은근히 기대한다.

 

 

  행정대학원 2학년 2학기 1964년 가을은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그때 학생들이 학교 측과 오랜 갈등 끝에 이른바 스트라이크를 감행한 것이다. 엄혹한 권위주의시절 국립대학교 대학원에서 스트라이크라니,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학교 측의 대응은 무척이나 강경했다. 교수 회의에서 몇 명 주모 급에 대한 징계 논의가 있었다. 그 중에 나도 끼어있었다. 학생총회에서 만장일치로 등교거부를 결의하고 배수진을 쳤는데, 하루 이틀이 지나니 퇴학시키겠다는 학교 측 엄포에 밀려 대부분 학생들이 등교를 하는 바람에 앞장섰던 친구 몇 명이 퇴학감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 때, 나는 마침 오스트리아로 유학 가는 시험에 합격해서 졸업하면 곧장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석사학위가 장학금 지불의 전제조건이었기 때문에 퇴학을 맞으면 모두가 도로아미타불이 될 형편이었다.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중징계를 면하고 제때에 졸업을 하게 되었는데, 그 후 한 교수님이 내게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이 일로 안 교수님께서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셨는지 아나. 교수회의에서 ‘이 놈은 학자가 될 놈이니 제발 살려 달라’ 고 읍소를 하셨네. 그 바람에 자네가 막판에 살아남았네.”

  그 후 나는 이 일을 선생님께 여쭤본 적도 없고, 안 선생님께서도 그 일을 내게 자세히 설명하신 적이 없으니 당시 교수 회의의 정경이 실제로 어떠했는지 알 길이 없다. 내게 말씀해 주신 선생님께서 조금 과장을 하셨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일로 안 선생님께 꽤나 심려를 끼쳤던 게 사실이고,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죄송스럽기 그지없다.

 

 

   이처럼 선생님께 많은 은덕을 입었지만 요즈음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산다. 전화라도 자주 드려야 하는데 그렇지도 못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런데 그간 나는 전화로 선생님께 두 번이나 큰 실수를 저질렀다. 어쩌다가 내 전화수첩 속에는 나와 가까운 친구 하나의 전화번호가 선생님 전화번호의 바로 밑에 자리해 있었다. 문제는 내가 이 두 전화번호를 혼동해서 전화를 잘못 건데서 시작된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고는 저쪽 목소리를 확인하지 않은 채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여봐, 아무게야, 너 요사이 평이 영 좋지 않아. 하라는 일은 하지 않고 허구헌날 골프만 치고, 정신 차리지 않으면 큰일 나. 어쩌고저쩌고....” 앞뒤 가리지 않고 한참 떠들다 보니 무언가 기미가 이상해 멈칫하고 저쪽 목소리를 확인해 보니까, 웬걸 내가 실수로 전화 다이얼을 잘못 돌려 안해균 선생님께 큰 소리를 치고 있는 게 아닌가.

뒤늦게나마 선생님께 백배 사과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실수를 또 다시 저질렀다.

  그 후 얼마 뒤에 같은 방식으로 선생님께 전화를 드리고 이번에는 “너 임마....운운 ”하며 아주 거칠게 나와 버렸다. 어쩌다가 같은 실수를 두 번씩이나 거푸하게 되니, 나로서도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두 번 다 안 선생님께서는 곧장, “나야 나...”하시면서 내 잘못을 빨리 일깨워 주시지 않으셨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워낙 장난기가 넘치시는 분이라, 자신을 숨기시면서 마치 내 친구인 양 행동하셨다. 가능한 한 반응을 늦추시며 시간을 오래 끄셨다. 두 번째는 아예 가성까지 내시면서 내 실수를 유도하셨다.

그 후 다른 사람들을 함께 만나면, 으레 그 얘기를 끄집어내신다. “저 친구, 정말 멀쩡한 놈이야. 실수하는 척하고 내게 욕지거리를 상습적으로 하니...” 그래서 나는 상습 전화 골갈범으로 선생님께 크게 찍혔다.

 

 

   선생님은 저녁에 술을 한잔 하시면 가끔 내게 전화를 하신다. 전화를 하시면 으레 야단을 치신다. 대충 야단의 내용은 두 가지 중에 하난데, 하나는 내가 건방지다는 것이고 둘째는 너무 완벽주의자라는 것이다. 선생님께서 정말 나를 그렇게 느끼셔서 그러시는 건지 아니면 그냥 그래 보시는 건지 알 길은 없지만, 신기한 것은 선생님께서 아무리 야단을 치셔도 내 기분이 별로 상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대체로 선생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된다. “병영아, 너 내가 볼 때, 요새 너무 건방져. 오만하단 말야. 네가 뭐라고. 아무 것도 아닌 놈이 괜히 재기나 하고..... 이런 얘기는 나만 하는 게 아니야. 중론이 그래....”

  “너는 너무 완벽주의자야. 무엇하나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완벽을 추구하는 것은 바보짓이야. 제 능력과 형편을 알아야 돼.”

  그러시면 내 대답은 한결같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다음부터 안 그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면 선생님께서는 곧장, “됐어. 그렇다면 좋아....그런데 말야.” 하시면서 본론으로 들어가신다. 말하자면 나에 대한 비판과 핀잔은  일종의 전주(前奏)인 셈이다. 그래서 그것은 그냥 가깝다는 친화감의 표현이신 게 아닌가 생각한다.

  만약 선생님 말씀대로라면 나는 정말 큰일이다. 건방지고, 무능하고, 게다가 제 분수도 모르고 완벽을 추구하니. 이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마음이 울적하다가도 선생님 전화를 받고 몇 마디 비난의 표적이 되고 나면, 금방 웃음을 머금게 되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아마 이것이 선생님이 지니신 심리적 흡인력이 아닌가 싶다.

 

  안 선생님께서 별 생각 없이 하시는 말씀 속에서 나는 깊은 뜻을 찾아내고 새로 배우는 것이 많다. 선생님께서 인간관계나 사회관계를 표현하실 때, 최근에 자주 쓰시는 말씀이 “그건 복잡한 거야”다. 앞뒤 맥락에서 선생님의 말씀을 내 나름대로 정리하면,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는 단선적이거나 합리적인 것이 아니고 여러 요인이 얽히고설켜 만들어지는 매우 복잡한 것이라는 뜻이시다. 그 관계는 오랜 세월 속에 씻기고 닦이면서 형성된 역사적 침전물이기 때문에, 그것을 논리적으로 파악하거나 합리적으로 이해하려고 애써도 소용이 없다는 말씀이다.

  나는 선생님의 이런 말씀을 자주 들으면서 선생님의 삶의 철학이 그 안에 깊게 스며있다고 느꼈다. 선생님을 잘 모르는 분들은, 선생님 문하에서 그렇게 많은 걸출한 학자들이 배출되고 그들이 선생님을 마음으로 따르는 것을 무척 신기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을 단순하고 명쾌한 인과율로 설명해 보려면 쉽게 풀리지 않는다. 하지만 선생님이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전체적 삶의 맥락에서 설명하면, 얼마간 이해가 될 수 있다.

  선생님은 하나하나 촘촘히 생각하시고 이것저것 재면서 행동하지 않으시는 편이다. 그러나 큰 궤적으로 선생님 스타일을 마련하셨다. 기본적으로 정이 많으신 분이고, 가식이 없고 감정을 여과 없이 그대로 표현하신다. 얼마간 자유분방한 기질이 있으신 게 사실 이지만, 선생님과 오랜 교분이 있는 사람이면 선생님의 행동을 바르게 예측할 수 있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심리적 부담을 주지 않으신다. 그러기에 많은 이들은 선생님과 함께 있는 시간을 무척 즐긴다.

  선생님은 또 제자들에 관한 한 정말 유별나신 데가 있으시다. 우수한 제자들 발굴하시는 독특한 노하우가 있으시고, 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또 좋은 공부 성과를 올릴 수 있도록 한껏 도와주신다. 이렇게 긴 세월을 보내고 나면, 선생님과의 인연이 쌓이고 거기서 깊은 정과 감사의 염(念)이 남는다. 그러면서 선생님 말씀대로 복잡하게 인연이 엮어진다.

 

 

  며칠 전 전화를 드렸더니, 정년을 앞두고 ‘멜랑콜리한 하루하루’를 보내신다고 말씀하셔서 가슴이 찡했다. 그래서 선생님은 아직 건강하시고 하실 일도 많으신데 웬 말씀이냐고 상투적인 위로의 말씀을 드렸다.

  전화를 끝내고 나니 마음이 아팠다. 정든 연구실을 뒤로 할 일이 큰일이라는 말씀이 비수처럼 가슴에 와 꽂혔다. 그러면서 교수들에 있어 연구실이 주는 상징적 의미는 그의 인생의 전부일 수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니 우리 선생님께서는 그리 침울하게 세상을 보내실 분이 아니시다. 아마 일요일이면 더 씩씩하게 산에 오르시고, 공부에도 더 큰 열정을 쏟으시리라 생각한다. 또 선생님 앞에 서면 언제나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진심으로 선생님께 매달리는 많은 제자들이 있으시니, 그 염력(念力)으로라도 선생님의 여생이 더 건강하고 보람되며 행복하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선생님께서 그간 베풀어 주신 학은(學恩)에 머리 숙여 감사드리며, 다시 한번 선생님의 만수무강을 하느님께 빈다.

 

                               『정 많은 서민풍의 학자 안해균 선생님』(평보 안해균 교수 정년기념논문집

                                 간행위원회, 1994) 156-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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