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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에세이

<사회정책연구회> 열돌

2010. 11. 12. by 현강

  I.
사회정책연구회가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사회복지분야를 연구하는 학자들 몇 명이 모여 이름도 없이 조촐하게 출범했던 연구 소모임이 이제 리스트 회원이 100명에 육박하고, 연구발표회 때마다 발표공간이 꽉 찰 정도의 회원들이 모여 활기찬 토론을 펼치는 생명력 있는 연구회로 발전했다.

그간 이 연구회가 공식명칭이나 공식조직, 정관이나 규칙 등 모든 공식성을 배제한 채 오직 회원 간의 자발적 참여와 연구열정, 그리고 상호 신뢰와 인간적 유대만으로 오늘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이 연구회는 다른 기존 학회와 확연히 구별되는 고유성을 지닌다. 이처럼 비공식적이고 느슨하기 짝이 없는 연구회가 매달 월례 발표회 때마다 대형 학회 보다 더 많은 열성적 회원을 모을 수 있다는 것은, 참여빈곤으로 몸살을 앓는 작금의 학회 사정으로 볼 때 실로 불가사의에 가까운 일이다.

지난 10월 23-24일 연세대학교 원주 캠퍼스에서 1박 2일의 10주년 기념 모임이 있었다. 여기에도 40여명의 회원들이 참여하여 연구회의 어제를 되돌아보고, 오늘을 진단하며, 앞으로의 발전 방향을 논의했다.

출범 당시부터 깊이 관여했던 필자로서는 이날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II.
10년 전 늦여름, 나는 사회복지정책을 연구하는 몇몇 젊은 학자들에게 함께 모여 공부하는 연구모임을 갖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그러면서 그 모임은 개방적이고, 학제적(學際的)이어야 하며, 무엇보다 서로 공부에 실질적 도움이 되는 모임이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뜻을 밝혔다. 모두 반기면서, 일단 비공식적 모임으로 출발하여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연구회로 발전시키자는데 합의했다. 마침 삼성경제연구소에 소모임 지원 프로그램에 의해 장소 도움을 받을 수 있어 순조롭게 출발할 수 있었다.

초기 멤버 중에는 어쩔 수 없이 내 제자들이 많았다. 또 학부부터 줄곧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학자들 보다는 학문적 배경이 정치학, 행정학, 사회학, 경제학 등 인접 분야 출신인 학자들이 많았다. 이들 비(非) 사회복지배경 학자들은 특히 그동안 복지학계의 비주류로서 얼마간 소외감을 느껴왔기 때문에, 연구회의 출범을 더 반겼던 것 같다. 나 자신도 말하자면 그런 축이여서 상호간에 공감대가 컸다. 이들은 학부부터 줄곧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사람들과 달리, 다양한 사회과학적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각자 사회문제와 정책을 바라보는 관점과 접근 방식, 강조점이 서로 달랐다 이 점이 바로 이 연구회의 큰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출범 당시 나는 이스라엘의 <키브츠> 모형의 몇 가지 특성에 준거해서 이 모임을 발전시키면 어떨까 하는 조금 엉뚱한 생각을 했다. 함께 연구한다는 본질적 목표에서 벗어나 관료화, 형식화, 비본질화의 길을 걷는 기존의 연구회나 학회와는 다른 새로운 연구회 모형을 실험해 보고 싶은 의도에서였다.

주지하듯이 키브츠는 집단적 생활공동체이다. 따라서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지식인 모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조직 유형이다. 그러나 키브츠의 몇 가지 특성, 즉 자발성, 비공식성, 대면성, 평등성, 공동체성을 우리 연구회의 조직과 관행에 적절히 적용하면, 연구회의 본래의 목표를 온전하게 지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키브츠는 이스라엘이라는 자본주의 바다에 떠있는 작은 섬과 같은, 소규모의 사회주의적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그 생존 자체가 도전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키브츠가 그 동안 이스라엘이라는 큰 사회에 생명력을 불어 넣으며 오늘까지 연면히 자기 지탱을 할 수 있었던 요체는 무엇일까. 나는 구성원 모두가 자유로운 영혼으로, 스스로의 결단에 따라 진정으로 그들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키브츠 구성원은 누구나 가입과 탈퇴가 자유로우며, 모두가 평등한 존재로서 비공식적, 대면적 네트워크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들은 또한 공동으로 의사를 결정하고, 그에 따라 자신들이 원하는 삶을 공동체적으로 일구어 나간다. 이렇듯, 이들은 현대조직에 필수적인 공식성과 위계, 규제는 최소 수준으로 낮추고, 대신 교감, 소통, 우의와 공동체 의식을 높였다. 나는 우리 연구회를 그렇게 만들고 싶었다.

그렇다고 내가 이런 속생각을 공공연히 밝히거나 연구회의 방향을 그런 식으로 애써 유도하지 않았다. 사회정책연구회는 오히려 스스로 길을 찾아 당초의 내가 의도했던 것 보다 더 아름답고 건강하게 발전했다. 출범부터 오늘까지의 과정을 되돌아보자.

 사회정책연구회는 처음부터 따로 이름을 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초기에는 모임 때 마다 이름이 편의대로 바뀌었던 기억이다. 그러다가 언제 부턴가 명칭이 <사회정책연구회>로 자연스레 수렴되었다. 공식적 직책은 언제나 간사 하나였다. 역대 간사가 모든 연락을 하고 연구회를 추스렸다. 연구회가 커지면서 간사의 일이 힘겨워 보였다. 혼자 애쓰는 그가 안쓰러워 보였던지 언제 부턴가 회원들은 간사를 모두 회장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본인은 아직 스스로를 간사라고 부르지만, 이제는 회장이 실질 명칭이 되어 버렸다. 따로 정관이나 규정이 전혀 없다. 공식적 회의록도 채택한 바 없다. 아마 역대 간사가 중요한 사항은 메모 정도 해 놓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모두가 그냥 평등한 회원일 뿐이다. 회원 중에는 큰 규모의 국제학회, 국내학회의 회장도 여러 명이지만, 여기서는 그냥 회원일 뿐이다. 초창기 회원들 중 많은 이가 이미 50대 이상이고, 신입회원 중에는 30대가 적지 않으나 모두가 세대를 넘어 격의 없이 소통한다. 연구회 안에 일말(一抹)의 권위주의의 그림자도 찾아보기 어렵다.

대체로 간사가 이메일로 월례발표회 일정을 통보하고, 가능한 한 발표논문도 미리 첨부파일로 보낸다. 그러나 아무도 굳이 참석을 종용하거나 불참한다고 탓하지 않는다. 모두가 자유의사에 맡겨진다. 탈규제의 전형과 같은 모임이다.

모이는 장소도 여러 번 바뀌었다. 초기에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모였는데, 이후 그 때, 그 때, 형편에 따라 을지로 2가 꽃동네 사무소, 경희대, 보건복지인력개발원, 서강대로 전전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서강대에 안착했다.

한 여름 가장 더울 때 한 달, 그리고 한 겨울 가장 추울 때 한 달을 제외하고는 매달 발표회를 가진다. 주로 회원 한, 두 명이 그간 준비했던 연구결과나 논문을 발표하고 그에 대한 토론을 진행한다. 한 때는 복지국가 및 사회정책 분야의 최근 도서 및 논문들을 선정하여 독해와 토론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가끔 외부 인사를 초청해서 서로 생각을 나누기도 했다. 어떤 경우에도, 발표, 토론이 무척 자유롭고, 격의 없이 진행된다. 아무런 금기 없이 자유롭게 소통하고 어떤 치열한 논쟁도 주저하기 않기 때문에, 자신의 연구 아이디어를 점검하거나 학회의 공식 발표 전 예비발표로도 안성맞춤이다. 허심탄회하면서도 속 깊은 논의가 서로에게 큰 학습이 된다. 발표회가 끝나면, 시간이 되는 회원들은 발표장 가까운 음식점에 모여 저녁을 함께하며 담소한다. 그러면서 토론이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공식회비가 없으니, 모두가 만원씩 내서 저녁 값을 충당한다.

서울에서 열리는 월례 연구발표회 외에, 일 년에 한번 정도 지역모임을 가지거나 지방 여행을 함께 했다, 형식상 연구발표를 곁들이기도 했으나, 우의를 돈독히 하는데 주된 목적이 있었다. 그 때는 모두가 수학여행을 하는 학생처럼 즐거워한다. 원주 2번, 정선 1번, 청주 2번, 진주 1번, 속초 1번, 전주 1번의 1박 2일을 프로그램이었는데, 언제나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을 남겼다. 적지 않은 회원들이 지방 여행 때 가족을 동반한다. 그 덕택에 가족 간의 우의가 많이 다져졌다. 지방여행은 연구회가 하나의 큰 가족이라는 공감대를 마련하는 데 크게 보탬이 되었다. 흥미 있는 것은 최근에 들어 여성 회원들이 자제들은 물론, 비회원인 남편을 대동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 다른 연구회나 학회의 경우, 이런 예는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회정책연구회 회원들은 얼마간 공유하는 특성이 있는 듯하다. ‘사회복지’라는 공통의 지적 관심이 삶에 투영된 때문인지, 회원 모두가 온유하고 배려심이 각별하다. 나눔과 돌봄이 몸에 배었다. 그래서 어떤 게재에도 상호 간에 긴장감이 없고, 처음 입회해도 그냥 그 날부터 가족이 된다. 흥미있는 것은 ‘저출산 고령화’ 사회에 대한 우려 때문인지, 회원 중에 ‘다산형’(多産型)이 많다는 것이다. 비혼(非婚)이 늘어가는 이 시대에 아이가 셋인 회원 수가 적지 않다.

사회정책연구회는 그동안 역대 간사들의 헌신적 노력과 회원들의 진심어린 협조로 크게 성장했다. 외연도 넓어지고 내실도 갖춰졌다. 회원들도 전공분야도 복지국가, 사회보장을 비롯하여 비교사회정책, 노동시장정책, 보건의료정책, 복지행정, 비영리조직 등 그 연구영역이 크게 확장되었다. 전공학문의 배경도 실로 다양하여 사회복지학, 정치학, 사회학, 행정학, 경제학, 보건 및 예방의학에 이르기 까지 갖가지다. 국내에서 다(多)학문적 성격이 가장 강한 연구모임이 아닐까 한다. 회원들의 최종 학위 수여지로 따져 보아도 처음에는 국내와 미국 중심이었는데, 이후 유럽에서 공부한 회원이 급격히 증가하여 최근에는 오히려 영국 및 독일 등 유럽 유학배경 회원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전체로 볼 때, 한국, 유럽, 미국, 일본 등 비교적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국내 대학 출신 배경도 처음에는 연세대 출신이 가장 많았으나, 날이 갈수록 다양하게 구성되고 있다. 해외 회원 중 스웨덴 <남 스톡홀름 대학>의 최연혁 교수는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국내 회원들과 깊게 교감하고 유럽학계와의 가교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회원들 중에는 교수들이 가장 많으나, 연구소의 연구원도 적지 않고, 전문관료들도 있다.

최근에 귀국해서 아직 정착하지 못한 젊은 박사들도 여러 명 있다. 아직도 학부배경이 사회복지학이 아닌 젊은 학자들이 국내외에서 사회정책을 공부를 한 후 이 연구회에 들어오는 예가 많다. 그 때문에 이전 회장이 이 연구회는 <제2의 모교>와 같다고 한 말이 기억이 난다. <새 보금자리>라는 말도 생각난다. 각자 학문적인 배경이나 소속이 다르지만 이 연구회는 모두에게 정서적으로 편안하고 의지할 수 있는 모교와 같은 보금자리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다른 학회나 연구회에 비해 사회정책연구회의 회원들 간에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지는 학문적, 인간적 교류가 매우 긴밀하다. 공동연구 프로젝트 등을 통해 비공식적 연구 네트워크를 형성하기도 하고. 신진연구자의 학계 진출을 돕는 인큐베이터 구실도 한다.

이처럼 다원적, 복합적 구성에도 불구하고 사회정책연구회는 마치 용광로처럼 회원들 모두를 한데 묶고 용해하는 엄청난 힘이 있다. 회원들의 다양한 배경이 오히려 연구회의 역동성을 보태고 상호 학습을 통하여 회원의 시야와 안목, 그리고 연구수준을 높인다.

최근에 연구회의 국제적 접촉이 잦아졌다. 2009년 여름에 최연혁 교수의 주선으로 일정이 가능한 회원들이 참여하여 스웨덴 현지에서 그곳 학자들과 한국과 스웨덴 양국의 사회정책을 비교하는 공동세미나를 가졌다. 아울러 스웨덴의 주요 사회정책 관련기관인 노동조합(LO), 경영자 조직, 최소단위 지방정부인 코뮌 등을 직접 방문하여 세계 최고 복지국가의 진면목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연구회 회원들의 국제적 네트워크의 형성과 국제적 역량은 여러 가지 경로로 나타난다. 회원 중에 최영준 교수(고려대)를 비롯한 일부 젊은 유럽유학출신의 학자들은 유럽체류 기간 동안 영국을 중심으로 여러 유럽대학에서 복지국가를 공부하는 학자와 학생들을 모아 동아시아 복지제도의 발전을 논구하는 연구회의 창립을 주도했다. 이 연구모임이 지금은 명실 공히 유럽과 아시아 학계에서 높이 평가하는 국제적 학회(East Asian Social Policy Network/EASP)로 성장했다. 문진영 교수는 최근에 바로 이 학회의 회장직을 지냈다.

바로 지난주에는 세계적으로 저명한 복지국가 이론가인 스웨덴의 Bo Rothstein 교수가 한국을 방문하게 되어, 연구회가 그를 초청했다. 그의 강연을 듣고 회원들과 장시간 진지하게 토론하는 기회도 가졌다. 세계적 학자가 바쁜 일정에 소규모 비공식 연구모임을 위해 오후와 저녁시간을 통째로 할애하여 장시간 서로 소통하는 기회를 가지는 것은 드문 예일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그동안 연구회가 상승곡선을 그렸던 것만은 아니다. 성쇠(盛衰)와 부침(浮沈)이 있었다. 그러나 큰 위기는 없었던 것 같다. 그것은 무엇보다 연구회에 대한 회원들의 지극한 속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역대 회장들, 즉 1대 정무권(연세대, 2000-2003), 2대 신동면(경희대, 2004-2006), 3대 문진영(서강대, 2007-2009), 4대 정무권 (연세대, 2010)의 헌신적 노력과 기여가 컸다.

그러나 필자는 사회정책연구회의 지속가능성과 생명력의 가장 큰 원천은 이 연구회가 그 동안 회원들에게 실질의 차원에서 학문적, 인간적으로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연구회의 미래 성공의 열쇠도 바로 여기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근 사회정책연구회의 새로운 시도의 하나는 <메타로그>를 만드는 작업이다. 구성원 개개인이 자신의 블로그를 만들고 여기에 실린 글이 자동적으로 연구회의 메타블로그에 모여져, 전 회원과 연구회 밖의 사람들이 상시적으로 정보와 지식, 관점과 아이디어를 공유, 소통하게 되는 이 시스템이 이제 시동단계에 있다. 정무권 회장의 회심작인 메타로그를 통해 회원들이 앞으로 한국복지국가 및 사회정책발전을 위한 알차고 활기넘치는 담론을 펼칠 것으로 기대된다.

필자는 연구회의 초기 형성과정에 참여했을 뿐, 그 후로는 어떤 실질적 관여도 피했다. 특히 2007년 2월 연세대학교를 정년퇴직하고 강원도 속초/고성으로 이사를 간 후로는 한 해에 한번 정도 연구발표회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지방여행 때는 꼭 참석하는 편이다. 터 놓고 얘기하면, 내가 연구회와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 연구회의 자생적 발전에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왔던 게 사실이다.

 III.
사회정책연구회 10주년을 기념하는 지난 번 원주 모임에서 <사회정책연구회의 과거, 현재, 미래>를 주제로 라운드 테이블이 있었다. 여기에서 회원들은 연구회의 앞으로의 발전방향에 대해 많은 토론을 했다. 그런데 흥미 있는 일은, 대부분의 회원들이 연구회를 보다 공식화, 제도화하기 보다는 오늘과 같은 비공식적 연구네트워크로 그냥 유지하는 것이다는 입장을 개진했다는 것이다. 다만 회장의 짐이 너무 크니 그를 도와 줄 직책을 한 자리 정도 더 마련하자는 의견에는 대체로 동의했다.

그 날, 연구회 내에 소모임을 활성화시켜 소규모로 공동연구/스터디 그룹을 형성하자는 의견, 가끔 연구발표 외에 주요 저술이나 논문의 독해도 하고, 실제로 정책결정 위치에 있거나 현장에 몸담고 있은 사람들의 초청강연도 주선 하자는 제안, 연구회를 중심으로 국제적인 리서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방안 등 연구회의 운영 및 발전과 연관하여 다양하고 건설적 제의가 많았다. 그러나 앞으로 어떤 시도나 노력도 미리 면밀히 기획하고 추진하기 보다는 현재와 같은 비공식적 네트워크 안에서 자연스레 뜻을 모아 보자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 졌다. 전체적으로 연구회의 어제와 오늘에 비교적 만족하며, 내일에 대해서도 낙관하는 여유 있는 분위기였다.

 나는 그날 회원들의 논의를 지켜보면서 깊은 감회에 젖었다. 그러면서 어떠한 공식성과 조직성을 배제한 채, 진정성 하나 만으로 이 연구회가 오늘의 성장을 이룬 것은 하나의 <작은 기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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