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2004년 가을 내가 참여정부에서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장관으로 재직할 때 이야기다. 교육부 출입기자들과 기자회견을 끝낼 즈음이었다. 어떤 기자가 내게 물었다.

 “장관님, 제가 보기에 장관님은 ‘노무현 코드’는 아니신 것 같은데, 그럼 어떤 코드십니까”

  나는 곧장 서슴없이 대답했다.

  “저는 국민코드입니다.”

  그러자 와 하고 웃음이 터졌다. 그들은 내가 그냥 농담하는 것으로 느낀 듯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내 진지한 낯빛을 보고 그들의 웃음기는 빠르게 걷혔다. 나는 다시 힘주어 말했다.

  저는 국민코드입니다.”

  예상했던 질문도 아니었고, 준비했던 대답도 아니었다. 그런데 대답을 하면서 이게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II.

나는 김영삼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 교육부 수장을 지냈다. 그런데 나를 임명한 두 대통령과는 아무런 정치적 연고나 사적 친분이 있었던 사이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정치적으로 얽매이지 않아 얼마간 자유롭다는 이점이 있었으나, 대신 청와대나 당, 정 어디에도 마땅히 터놓고 의논할 상대나 나를 지지해 줄 세력이 없어 늘 외롭고 힘들었다. 당시 나는 장관 퇴임 후 곧장 대학으로 돌아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깨끗하게’ 그리고 ‘떳떳하게’ 복귀해야 한다는 목표 외에 정치적으로 아무런 다른 욕심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내 갈 길을 분명하게 정했다.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말고 ‘국리민복(國利民福)‘만을 염두에 두자, 그리고 ‘일’로 승부를 겨루자. 생전 일면식도 없는 나를 장관으로 임명한 두 대통령이 마음이 걸렸지만, 그렇다고 장관직이 그분들에게 충성을 바치는 자리는 아니지 않겠는가. 또 그분들도 내게 정치적 예종(隸從)을 기대하고 임명하지는 않았을 게 아닌가. 나라의 백년대계를 생각해야 하는 교육이라는 영역은 적어도 당리당략이나 지나친 이념적, 정치적 고려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일련의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실제로 이러한 결심을 실천하기는 상황이 그리 녹록치 않았다. 주요한 정책결정에는 늘 크고 작은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에 당, 정, 특히 청와대와의 정책조정과정에서 자주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나는 그 난관을 극복하는 것이 내 책무이자 운명이거니 생각했다.

  III.

내가 이해하는 '국민코드‘는 바로 ’국리민복‘의 관점이다. 이 맥락에서 볼 때, 필자는 무릇 한 나라의 교육정책의 거시적 틀은 경쟁력 강화에 역점을 두는 ’수월성‘과 교육기회의 평등을 중시하는 ’형평성‘을 슬기롭게 조합한 중도지향의 정책혼합(policy mix)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념적 성향으로 볼 때, 김영삼 정부는 수월성 쪽에, 그리고 노무현 정부는 형평성 쪽에 과도하게 치우칠 개연성이 컸다. 나는 색깔이 다른 두 정부에서 장관으로 재직(1995.12- 1997.8. 2003.12 -2005.1)하면서 이 문제를 가장 크게 고심했다. 그래서 적어도 내가 교육부 수장으로 있는 동안은 국민코드의 관점에서 주요 정책이 이념적으로 어느 한 쪽으로 크게 편향되지 않도록 적절히 조율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나는 교육의 중심을 잡기 위해 내심 아래와 같은 원칙을 세웠다.

 먼저 정권의 수명을 넘어 지속가능한 정책 및 사업을 우선적으로 추진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치 굳건한 주춧돌처럼 교육의 근본을 바르고 튼튼하게 만드는 백년대계 지향의 인프라가 구축된다면, 이념적 성향이 다른 새 정권이 들어서도 감히 그것에 손대지 못할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두 번 교육부 수장을 맡으면서 이러한 관점에서 시종 가장 큰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 <e-러닝 교수. 학습체제 구축>이었다. 그 핵심 사업으로 에듀넷 (1996.9), EBS 수능방송(위성교육방송/1997 및 EBS 수능강의 및 인터넷 서비스/2004), 사이버 가정학습체제 (2004)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 일련의 사업들은 교육정보화라는 세계적 추세에 부응하여, 그리고 정권의 수명을 넘어 공교육내실화, 사교육비경감 및 지역. 계층 간 교육격차해소에 두루 이바지할 수 있었다. 주지하듯이 오늘날 한국은 e-러닝 세계 선도국가가 되었다.

 두 번째로 교육정책의 거시적 틀이 수월성과 형평성 중 어느 한 쪽에 기우는 경우, 다른 쪽을 적절히 보완하여 전체적 균형을 잡자는 것이었다.

 1995년 김영삼 정부의 대통령 자문기관인 ‘교육개혁위원회’은 ‘5.31 교육개혁안’을 내 놓았다. 이 방안은 기존의 획일적이고, 규제위주, 그리고 공급자위주의 교육체계를 보다 다양하고 자율적이며 수요자위주의 교육으로 바꾸고 교육과정도 민주화하자는 패러다임 전환적 내용을 많이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 개혁안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라는 당시의 시대적 조류와 정권특성의 영향을 받았기에 얼마간 형평성에 비해 수월성에 편중되어 있었다. 필자는 전체적 균형과 조화를 위해 형평성 차원의 정책보완이 필요 하다고 보고, 고심 끝에 우리나라 최초의 ‘교육복지종합대책’(1996)을 수립했다. 위의 대책 중 ‘중도탈락자 대책’은 ‘대안학교 설립 및 운영지원대책’(1997)으로 발전하면서, 대안학교가 제도권으로 들어오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반면 노무현 참여정부는 수월성보다 형평성에 관심이 컸다. 따라서 거시적 정책지형에서 볼 때, 수월성 교육의 결손이 우려되었다. 그래서 필자는 전체적 균형과 조화를 위해 2004년 12월 말 ‘수월성교육 활성화방안’을 발표했다. 일견해서 참여정부의 이념지향과는 얼마간 거리가 있는 정책 프로그램이었다. 필자는 청와대 및 당정과 정책협의를 거치면 차질이 생길까 우려되어 그 과정을 생략하고 보고형식만 갖춘 후 전격적으로 발표하는 길을 택했다. 그 주된 내용은 자질이 뛰어난 학생을 일찍 선발하여 그들에게 ‘맞춤식 개별화 교육’을 하자는 전형적인 수월성 강화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이 방안을 발표하면서, 이는 형평성 지향의 평준화 교육을 깨는 것이 아니라, 그를 보완하는 것이며, 형평성과 수월성의 새로운 균형을 추구하는 것임을 크게 강조했다. 아울러 수월성의 핵심은 고부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창의성임을 함께 역설했다.

 세 번째는 절실히 필요한 정책임에도 이념이나 정치적 이유로 추진이 미뤄지는 경우, 그것을 찾아 과감히 밀고 나가자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관점에서 2004년 2월 초, 당. 정. 청은 물론 교육부 고위 간부와도 사전 조율 없이, 그간 금기시되었던 ‘교원평가’ 시행의지를 표명했다. 우리나라 교원의 질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방도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예상대로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왔다. 전교조의 저항이 가장 치열했고, 대통령도 부정적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필자는 교원평가는 더는 지체할 수 없는 과제임을 밝히고, 교원평가를 교원양성체제 및 교원연수체제 개혁과 유기적으로 연계하여 총체적인 ‘교원 개혁’을 추진할 것을 천명하였다. 2005년 1월, 교원평가에 대한 정책연구가 크게 진척되어 그 윤곽이 드러날 즈음, 필자는 부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후 교원평가 논의는 오랜 동면기로 접어든다.

 네 번째 정권이 지나치게 이념적으로 편향된 정책을 밀어붙이려는 경우, 이를 단호히 거부하자는 것이었다.

 노무현 정부의 대통령 자문기구인 교육혁신위원회는 민중주의적/평등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한 때 ‘대학 공동선발제’와 같은 혁명적 제안을 구상하였고, 수능 무력화를 위해 ‘수능 5등급’이라는 극단적 접근을 시도하는 등 시종 지나치게 편향된 이념적 성향을 드러냈다. 교육부와 교육혁신위 간에는 팽팽한 긴장이 계속되던 가운데, 양자의 갈등은 ‘2008학년도 대입 개선안’을 둘러싸고 극적으로 분출했다. 오랜 논란 끝에 수능 9등급화에 합의했으나, 청와대, 혁신위, 여당은 1등급 7% 안의 강행을 시도했다. 대통령도 그편에 섰다. 7%는 아무런 타당근거를 내세울 수 없는 정치적 비율이었다. 정규분포(正規分布)를 상정하면 1등급은 당연히 4%가 되어야 하며, 그래야 최소한의 변별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필자는 사표 제출이라는 배수진을 치고 이에 맞서 결국 교육부가 설정했던 마지노선인 1등급 4% 안을 관철했다(현강재, 연구노트 ‘2008 대학입학제도 개혁안의 정책과정’ 참조).

  V.

대통령과 장관과의 이념적 궁합은 매우 중요하다. 양자 간의 궁합이 잘 맞으면 정책형성이나 집행과정이 순조롭다. 무엇보다 대통령의 강력한 지지와 후원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정책추진에 동력이 붙고 부처 직원들도 일하기가 수월하다. 그러나 그런 경우 항상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칫하면 이념의 편향성이 보강되어 ‘국리민복’과 더 멀어질 수도 있다.

 두 번 장관직을 수행하는 동안, 대통령이나 정권의 이념 및 정책 성향이 내가 생각하는 ‘국민코드’와 어긋날 때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정치적 후원세력이 없어서, 언제나 단기(單騎)로 난관을 돌파해야 했기 때문에 많은 고뇌가 따랐다.

 지금까지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교육부 직원들이 고비 고비마다 어김없이 내 뒤에 서 주었다는 점이다. 그들의 신뢰와 지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내가 어찌 감히 ‘국민코드’를 표방할 수 있었겠는가.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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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2.24 14:38 Address Modify/Delete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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