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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에세이

나의 좌충우돌 복지국가 체험기

2011. 1. 16. by 현강

I.
내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학했던 때 이야기다. 그곳에서 결혼하고 1968년 10월 첫 딸을 낳았다. 아이 낳고 퇴원한 지 닷새쯤 지났을까 구청 복지과로부터 제법 큰 부피의 소포가 배달되었다. 뜯어보니 출산 축하 편지와 함께 분유와 옷가지 등 갓난아이에 필요한 각종용품이 가득했다. 아무 신고도 안 했는데 관청에서 어떻게 내가 아이 낳은 걸 알고 이런 걸 보냈을까 신기하기 짝이 없었고, 또 그냥 덥석 받는다는 것도 염치없는 짓 같아 어찌 된 일인지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담당 직원은 산모의 퇴원 서류가 병원에서 자동 복사되어 자신들에게 넘겨진다면서 빈에서 출산한 모든 아이에게 주어지는 복지혜택이니 걱정하지 말고 받으라고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달부터 매달 같은 날짜에 아동수당이 딸아이 몫으로 통장에 들어왔다. 큰돈은 아니었으나, 아이를 보살피는 데 꽤 도움이 되는 금액이었다. 가난한 유학생에게는 더 할 수 없는 고마운 선물이었다.

 그런데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며칠 후 구청 복지과에서 내게 편지가 왔다. 내용인 즉, 내가 오스트리아 국법에 따라 절차를 밟아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딸은 ‘사생아’ 이며, 아이의 양육비용은 만 17세가 될 때까지 빈 시가 맡겠다는 얘기였다. 그러면서 매달 일정 금액의 부양비를 보내겠다고 통보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편지를 받고 나는 무척 불쾌한 심경으로 즉시 구청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나는 외국인이기에 현지 신분법에 따라 결혼할 의무가 없으며, 분명 이곳 교회에서 결혼했고, 또 한국에 정식으로 결혼 신고를 했기 때문에 부양비를 받을 이유가 없다고 격렬하게 항의했다. 그랬더니 담당자는 사정이 그렇더라도 절차적으로 이미 양육비 지급이 결정된 상황이니,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그냥 받으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적법하게 매달 적잖은 액수의 부양비가 나오는데 그것을 마다하니 이해가 안 된다는 얘기였다. 그의 관료적 사고와 상투적인 말투가 나를 다시 격앙시켰다.

 그 길로 구청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왜 멀쩡한 내 아이를 사생아를 만들고, 싫다는 돈을 굳이 주겠다며 내 자존심을 꾸기느냐고 대들며 따졌다. 구청 한구석이 떠들썩하자 상급자가 나서서 중재를 시도했다. 그러면서 내게 우선 오늘은 그냥 돌아가서 내일 하루 깊이 생각하고 모래 다시 들려 달라며, 그동안 자기들도 어떻게 이 문제를 풀 것인가 숙의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돌아와 가까운 현지 친구 몇 명과 의논을 했다. 그랬더니 웬걸 이 친구들은 하나같이 그쯤 했으면 됐으니 못이기는 체 하고 양육비를 받으라는 얘기였다. 돈을 받아 아기에게 요긴하게 쓰면 그게 좋은 일이지, 거기 왜 자존심을 내 세우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와 내 처의 입장은 처음부터 분명했다. 우리가 아무리 곤궁해도 딸아이를 사생아로 만들면서 부양비를 챙겼다가는 반드시 천벌을 받을 것 같은 느낌이었고, 괜한 일을 만들어 우리를 괴롭히는 현지 당국의 처사는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이틀 후 구청에 가서 그 결심을 말했더니 구청직원은 부양비를 받지 않으려면 서울에서 내 결혼신고서를 떼어, 그 내용을 오스트리아 현지 한국대사관이 공증하고, 다시 빈 신분청의 확인 절차를 밟는 등 복잡한 과정을 밟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논란 끝에 나는 하는 수 없이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기로 했다. 이후 서류가 서울과 빈을 오가며 복잡한 절차가 완결되기까지 석 달이 넘게 걸렸다. 나는 여러 번 분통이 터졌고, 학업에도 지장이 많았다.

  II.
오스트리아의 빈은 전통적으로 이 나라 사회당이 오래 지배했던 도시이다. 따라서 20세기 빈은 사회복지의 맥락에서 유럽의 대표적인 진보 도시였고, 그 혜택이 모든 시민의 생활 구석구석까지 미쳤다. 돌이켜 보면 나도 당시 그 혜택을 풍성하게 받았다. 외국학생인 나도 학비, 의료비가 모두 공짜였고, 학교 식당은 물론 전차요금부터 오페라, 미술관 관람료에 이르기까지 파격적인 할인혜택을 받았다. 게다가 이 나라로부터 장학금 명목의 생활비까지 받았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국가라면 규제의 주체로만 인식했던 가난한 나라 유학생에게 복지선진국 오스트리아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한번은 내 지도교수가 한국의 사회복지에 대해 자세히 묻기에 한국은 이제 겨우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는 형편이라 국가 차원의 복지제도는 아직 걸음마도 떼지 못한 처지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는 “그러면 국가가 국민에게 어떻게 충성을 요구할 수 있는지” 되물어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내가 겪은 일화를 한 가지 더 보태보자. 유학 간지 얼마 안 될 때 일이다. 하루는 빈 도심지에서 일단의 대학생이 구호를 외치며 데모를 하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 그들이 요구하는 바를 알아보았더니, 나라에서 대학생에게 정규적인 급여를 지급하라는 황당한 내용이었다. 논거인 즉, 자신들이 직업학교를 거쳐 일찌감치 입직(入職)했다면 이미 돈도 잘 벌고 결혼도 했을 텐데, 훗날 나라의 동량(棟樑)이 되려고 대학 공부 길에 들어 온갖 고생과 희생을 감수하고 있는데 국가가 뒷짐을 지고 모른 체 하니 말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모든 대학생이 학비를 안 내고 공짜로 대학에 다니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한 일인데 월급까지 달라니 정말 염치없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속으로 “정신없는 친구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주변의 시민들 반응이었다. 대다수가 공감하는 낯빛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고, 더러는 “힘내”하고 의기를 북돋아 주기도 하였다. 때는 바야흐로 복지국가 황금기였고, 이들은 모두 복지국가에 깊숙이 길들어 있었다.

III.
다시 ‘사생아 부양비’ 건으로 돌아가자. 지금 생각해도 그때 그 사건은 자못 희화적(戱畫的) 이다. 당사자가 싫다는 데도 복지 당국은 돈을 주려고 갖은 애를 썼고, 내 편에서는 그 돈을 안 받겠다고 안간힘을 썼으니 말이다. 구청에서는 경우가 어떻든 합법적 절차에 따라 법을 집행하면 된다는 생각이 앞섰고, 나는 무엇보다 멀쩡한 내 딸이 ‘사생아’로 낙인찍히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서양의 실용적 사고와 동양의 명분 중시 사고가 맞부딪쳤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빈 의 ‘지나친’ 복지공세도 고마운 일이었고, 궁핍한 가운데 명분 없는 부양비를 완강히 거부했던 우리 부부의 ‘만용(蠻勇)에 가까운’ 행태도 그런대로 대견했다고 느껴진다.

내 딸이 다 큰 후, 이 일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나와 내 처는 그런 일이 다시 닥쳐도 아마 당시와 똑같이 행동했으리라고 얘기했다. 그러나 내 딸의 얘기는 달랐다.

 “그 돈 받는다고 내가 사생아가 되는 것도 아닌데, 궁핍했다며 왜 굳이 어렵게 그 돈을 안 받아. 그냥 받아서 예쁜 옷이나 사 입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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