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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에세이

소년 정치마니아 II

2010. 11. 7. by 현강

I.
9.28 수복으로 서울로 돌아온 후 몇 달도 못 되어 1.4 후퇴로 다시 피난길에 올랐다. 천신만고 끝에 대구에서 약 10개월 머물다가 부산으로 내려갔다. 1951년 11월 부산에 정착한 곳이 우연히도 당시 임시수도 부산의 정치 1번지인 부민동이었다. 당시 구 경남도지사 관사였던 곳에 대통령관저가 자리 잡았고, 그 근처에 국회가 있었는데, 모두 우리 집에서 100M 이내였다. 그런데 한국 정치사에 큰 획을 그었던 부산정치파동이 바로 그 때 그곳에서 시작되어 이듬해인 1952년 전반기에 집중적으로 펼쳐졌다. 실로 적기, 적소에 한국 정치의 분화구로 찾아 들어 간 셈이다.

부산정치파동은 1950년 5.30선거에서 야당이 압승하여 이승만의 재선이 어려워지자, 정부가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1952년 1월 18일 국회가 이를 부결함으로 정부와 국회의 대립이 첨예화 된다. 이에 정부는 국회 해산을 요구하는 ‘관제민의’를 동원하여 국회의원을 위협하는 한편, 5월 25일 국회해산하기 위해 부산을 중심으로 한 23개 시, 군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국회의원 정헌주 등 12명을 구속하는 등 초강수를 두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비난여론이 쇄도하자 대통령 이승만은 5월 4일 국회해산을 보류한다고 밝힌다. 이를 계기로 부통령 김성수가 사임하였고, 국회의원 장택상을 중심으로 한 신라회가 주동이 되어 대통령직선제 정부안과 내각책임제 국회 안을 발췌, 혼합한 이른바 ‘발췌개헌안’을 마련한다. 7월 4일 경찰과 군인들이 국회의사당을 포위한 가운데, 국회의원들은 기립투표방식으로 출석의원 166명 중 찬성 163표, 반대 0표, 기권 3표로 발췌개헌한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이승만 독재 기반이 굳어졌다. 정치학자 김일영은 부산정치파동을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군사쿠데타로 규정하고, 이를 ‘본질상 보나파르트 쿠데타적 성격’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이 1952년 바로 내가 열 두 살 되던 해에 일어난 일이다. 전쟁이 한창 진행되어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던 그 당시 임시수도에서 이승만 정부의 야당탄압과 헌정질서의 파행적 운영이 공공연히 자행된 것이다. 나는 그 과정을 마치 역사의 증인인양 가까운 곳에서 목도할 수 있었다.

대통령 관저 앞 광장에는 연일 사람들로 들끓었다. 전국 각 지방에서 ‘민의’의 이름으로 군민대표들이 몰려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주장하는 데모를 했다. 하얀 옷의 촌로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이승만 대통령에게 충성을 맹약하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역사는 이들을 강제동원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나, 현장에 있던 내가 보기에 그들에게 나름대로 진정성이 있었던 것으로 느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반 백성에게 이승만은 하늘같은 존재였고, 그의 카리스마는 막강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다수의 자유당 외곽조직들이 ‘반민족 국회의원 성토대회’를 열어 내각책임제 개헌추진 의원의 제명 요구했다. 딱벌떼, 백골단, 민족자결단 등 섬뜩한 느낌을 주는 이름의 폭력단체들도 국회의원 소환과 국회 해산을 요구하는 관제데모에 앞장서며 국회를 압박했다. 이들이 거리를 휩쓸면서 공포 분위기를 연출하여 시민들도 불안에 떨었다. 특히 계엄령이 선포되고 야당의원이 무리로 잡혀갈 당시 국회주변의 분위기는 삼엄하기 그지없었다. 어린 나에게도 이런 모습은 학교에서 배우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일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나는 학교가 파하면 빠짐없이 대통령 관저와 국회 근처로 달려가 그 곳에서 전개되는 대중동원과 파행정국을 예의 관찰했다. 답답하기 그지없었던 것은 내 친구 중 어느 누구도 이런 정치 현실에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혼자 끌탕했다. 그러다 보니 궁금한 것을 아버지에게 낱낱이 묻고, 억지로 정치 토론을 유도했다. 매일 신문을 탐독하는 것도 일과가 되었다.

II.
열 세 살 되던 1953년 3월에 피난지 부산에서 K중학교에 입학했다. 그해 6월 나는 서울로 환도했고, 곧 이어 7월에 정전협정이 맺어져 전쟁이 끝났다. 그 사이에 나는 ‘정전협정 반대’, ‘북진통일’을 외치는 관제 데모에 여러 번 동원되었다. 선배들의 열변과 선창에 따라 거리로 나서곤 했는데, 이미 반공의식이 깊숙이 머리에 배여 있던 터라 별다른 이의 없이 데모에 참여했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 들어간 후 정치에 대한 나의 관심에 다시 불을 지핀 것은 동아일보에 연재된 정치칼럼 <단상단하(壇上壇下)>였다. 재치와 풍자가 넘치는 날카로운 정치촌평이었는데, 특히 자유당정권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 인기가 높았다. 백광하(白光河)라는 분이 썼는데, 이 분이 한문에 조예가 깊어 칼럼에 한시, 한자성어 등을 많이 인용하여 노장층 독자에게 특히 인기가 높았다. 내 짧은 한문 실력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옥편을 들고 칼럼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으며 지배(紙背)에 담긴 함축된 의미를 찾아내려고 꽤나 고생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풍자의 참뜻을 찾아내면 무릎을 치고 기뻐했다.

내가 당시 탐독하던 또 하나의 칼럼이 경향신문의 무기명 칼럼 <여적(餘滴)>이었다. 이 칼럼은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등 생활전반을 고르게 다뤘는데, 필진 중에는 유명 문필가, 정치평론가가 많았다. 이 칼럼은 투철한 비판의식과 함께 지성적 풍미가 높았다. 나는 이 칼럼을 읽으면서, 높은 지성의 뒷받침을 받은 비판이야 말로 지식인이 추구해야 할 평론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여적>은 1959년 2월 경향신문 폐간을 몰고 온 도화선이 되었다, 그 때 집필자가 시인이자 정치인이었던 주요한이었다. 경향신문의 최장수 칼럼인 <여적>은 아직도 이 신문의 대표 아이콘으로 남아있다.

이들 주요 신문의 칼럼을 읽으며, 나는 비판적 관점에서 정치를 보는 공부를 많이 했다. 그러면서 권력의 편에 서려면 굳이 왜 언론에 글을 쓸까 하는 생각을 자주 했다. 아울러 나도 커서 반드시 비판적 지성이 넘치는 격조 있는 정치평론을 써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이후 나는 1970년대 말부터 약 20여년 동안 주요 언론에 백 여 편의 정치평론을 썼다. 대체로 비판적인 논조에 글을 많이 써서, 주위에서 ‘사람은 온유한 것 같은데, 글은 꽤나 매섭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아마 거기에는 <단상단하>와 <여적>의 영향이 적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III.
나의 소년시절을 되돌아보면서 왜 내가 그 어린 나이에 그토록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가졌을 까 다시 생각해 본다. 그런데 별로 설득력 있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우리 집안이 특별히 정치에 관심이 있다거나 이해관계가 있는 편도 아니고, 더욱이 내가 남달리 활발하거나 나서서 설치는 성격이 아니어서 더욱 그렇다. 나는 조용하고 무척이나 수줍은 성품이어서, 어른들도 내가 정치에 큰 관심을 쏟는 것이 ‘별 스러운 일’이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나는 어려서부터 정치는 무척 중요한 영역이고, 정치가 잘되어야 나라의 앞날이 밝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현실 정치에 참여할 뜻은 추호도 없었지만, 정치에 대한 나의 관심과 공부를 언젠가 글로써 표현하겠다는 열망을 강렬하게 키웠다.

돌이켜 볼 때, 내가 소년기에 정치와 연관하여 가장 관심이 컸던 대목은 옳고 그른 것에 대한 관심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정치적 인물, 정권, 정치적 사건을 평가할 때, 으레 정의라는 잣대를 가지고 따져 보곤 했다.

아직도 이러한 경향은 나의 정치를 보는 눈에 주된 기준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정치적 술수와 계략에 능한 세력이나 명분 없이 작은 실리나 이해관계에 집착하는 정치인은 아예 질색이다. 내가 정치참여를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이유도, 그 세계에 이러한 사람들이 많고, 또 그들 세력이 판을 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아마도 보다 정의로운 사회, 미래와 큰 사회를 생각하는 참 정치에 대한 꿈이 소년을 미래의 정치평론가, 그리고 정치학자로 이끌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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