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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에세이

한 여름 제철공장의 추억 II

2010. 10. 12. by 현강

1967년 Voest에서의 공장 노동과 연관해서 잊혀 지지 않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그 중 기억나는 일 몇 가지를 정리해 본다.

I.
회장과의 대화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 너구리 반장은 내게 회장과 무슨 말을 나눴느냐고 끈질기게 물었다. 나는 그분이 최근 한국에 다녀오셨기 때문에 한국 얘기를 주고받았다고 둘러댔더니, 그는 꽤 미심쩍은 표정으로, 겨우 그런일로 그 바쁜 분이 너를 만났겠느냐고 계속 다그쳤다.

그런데 그날 이후 반장의 모습이 달라졌다. 위압적이고 꽤나 권위적이던 던 그가 하루아침에 나에게는 순한 양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다른 노동자들에게, 내가 회장님의 지인이며 대단한 친구라고 떠벌리며, 내게 잘 보이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다. 당시 내가 30kg짜리 강판을 들어 옮겼는데 그것을 20kg으로 낮춰 주었고, 일하는 데 자주 찾아와 힘들지 않으냐, 따로 도와줄 일이 무엇이냐며 귀찮을 정도로 물어댔다. 한번은 일하다가 내가 손을 조금 다쳐 사소한 상처가 났다. 평소 같으면, “침이나 묻혀” 혹은 “코나 발라” 등 다친 사람 염장지르기로 이름난 그였는데, 그 날은 급히 의료반을 불러 치료를 해 주며 수선을 떨었다. 너무 부담스러워, 그에게 제발 이러지 말라고 간청을 했더니, 그의 대답인 즉,

“아닐세, 당신은 매우 중요한 분이 아닌 가.”

그때 나는 생각했다. 서양이라고 다를 게 없구나.

II.
나는 그곳 철공장에서 일하면서 사람의 몸은 대단한 적응력을 가졌다는 것을 절감했다. 처음에는 파트너와 더불어 20kg을 들어 옮기는데도 쩔쩔맸는데, 시간이 가면서 일이 한결 수월해졌고 후반에 들어서는 30kg을 거뜬히 옮기게 되었다. 나보다 훨씬 건장한 서양의 전문 일꾼들에 견주어 별로 뒤지지 않게 육체노동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대견하게 느꼈고, 나름대로 자부심도 생겼다. 두 달 가까이 되면서 주말 가외 노동도 어렵지 않게 소화했다. 그러다 보니 몸무게는 조금 줄었지만 근력이 강화되어 가슴도 벌어지고, 팔에 알통도 배기는 등 몸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주위 동료도 “이젠 진짜 노동자 티가 난다”고 연대감을 피력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일하면서, 나는 공장 노동자들의 삶과 그들의 문화를 체험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그래서 휴식시간마다 그들에 가까이 다가가서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들은 내가 외국 유학생이라는 사실 때문에 처음에는 거리를 두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내 진심을 알고 마음을 열었다. 내가 제법 유식하고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했는지, 정치나 경제의 흐름으로부터 자신들의 가족문제, 장래 계획 등 생활 전반에 걸쳐 이것저것 자주 물어보고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후반에 들어서자, 이들은 나를 아예 “안 박사(Doktor Ahn)”라고 불렀다. 학위를 받기 전에 이들로부터 이미 박사대접을 받은 셈이다.

이들과 몸을 비비며 일했던 공장 노동자 생활이 후에 내가 정치사회학, 산업사회학을 공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고, 특히 산업민주주의에 관심을 두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III.
방학은 학생들이 집중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런데 학업에만 전념해야 하는 외국 유학생이 두 달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학업을 접어두고 공장에서 일하다 보니 심리적으로 많은 부담이 되었다. 더욱이 그 무렵은 박사학위 주제를 지도교수와 합의하고 논문의 큰 그림을 그리는 시점이었다. 그 중요한 시기에 온갖 책과 자료는 물론 모든 지적 소통으로부터 두 달간 단절을 한다는 것은 얼마간 모험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과중한 육체노동으로 지치고 고단한 몸을 가지고 주경야독 식으로 남은 시간에 책을 보거나 공부에 매달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일과 공부를 함께 해 보자는 것이었다. 공장에서의 작업이 이제 웬만큼 익숙해졌고 강판 무게도 감당할 만하니, 기계처럼 일상화된 동작을 반복하면서 머리로는 공부를 해 보면 어떻겠냐는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몸과 머리를 별개로 움직인다는 일이 불가능하다 싶었다. 그러나 우선 논문 주제를 머리에 달고 계속 고민을 하는 연습을 시작했다. 마치 수행자가 화두에 몰두하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웬걸 몸이 일상화된 반복동작을 거듭하는 동안 머리는 저 나름대로 논문의 큰 그림을 조금씩 그리는 게 아닌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몸과 머리가 따로 놀고 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일하면서 동시에 머리로 논문의 얼개를 만들고, 주요 논점과 접근방법 등을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방학 중 공장에서 책과 멀리 하고 있다는 조바심 때문에 보다 생각을 더 깊이, 철저하게 했다. 그러다 보니 집중력도 심화하는 느낌이었다. 혼자 생각했다. ‘이렇게 되면 마르크스가 말한 노동소외도 극복되는 것이 아닌 가’.

두 달간의 일을 마치고 대학으로 돌아와 지도교수와 마주 했다. 토론을 통해 나의 논문 진척상황을 면밀히 점검한 교수는, 꽤나 만족한 얼굴로 “자네 방학 중 공부를 많이 했군, 한여름을 도서관에서 보낸 모양이야.”라고 말했다. 나는 굳이 그것이 철공장에서 이루어 진 것이라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산행에 나설 때는 생각의 한 꼭지를 미리 챙긴다.

IV.
당시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학비가 따로 없었다. 그래서 내가 받는 장학금은 말하자면 생활비였다. 장학금으로 생활하는 데는 큰 불편이 없었으나 필요한 책을 산다는 것은 무리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책이 ‘고팠다’. 그런데 두 달 공장에서 노동하고, 막판에는 주말 가외 노동 까지 하니 생각했던 것보다 노임을 훨씬 많이 받았다. 따져보니 두 달 일하고 자그마치 넉 달 치 장학금을 받은 셈이다. 그래서 큰 맘 먹고 거기서 벌어들인 거액의 돈을 몽땅 투자해서 책을 샀다.

공부를 끝내고 귀국길에 오르기 위해 이삿짐을 정리하다 보니, 내가 지닌 책들 대부분이 1967년 여름, 그 한여름 철공장에서 번 돈으로 사들인 책들이었다.

V.
그 한 여름 제철공장으로부터 나는 실로 많은 것을 배우고, 얻었다. 우선 내가 모르던, 그러면서 알고 싶었던 미지의 세계를 경험했다. 또 그 체험학습을 통해 추상의 세계에서 맴돌던 내 공부와 생각이 소중한 ‘현장감’을 얻게 되었다. 아울러 공부는 책상머리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새로운 사실도 몸소 터득했다.

나는 요즈음도 한 여름 폭염이 기승을 부릴 때면, 철공장에서 중무장하고 땀 흘리며 일하던 그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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